이레네 딩엘종교개혁인물과 중심지를 따라 읽다류성민 옮김영음사, 2022(3).

 

교황 비오 2(Papst Pius II)는 에니아 실비오 피콜로미니(Enea Silvio Piccolomini)의 추기경이었을 때 열정적인 교회회의주의자였지만교황이 된 후에 1460년 교령 “Execrabilis”을 통해 교황에게 보편적 공의회를 요청할 가능성을 매우 단호하게 금지시켰다이것이 교회 회의에 교황을 넘어서는 권위가 부여될 수 있음을 의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48)

 

 교황 비오 2(Papst Pius II)는 에니아 실비오 피콜로미니(Enea Silvio Piccolomini)라는 이름의 추기경이었을 때 열정적인 교회회의주의자였지만교황이 된 후에 1460년 교령 “Execrabilis”을 통해 교황을 넘어 보편적 공의회에 항소할 가능성을 매우 단호하게 금지시켰다이것이 교회 회의에 교황을 넘어서는 권위가 부여될 수 있음을 의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어 원문: Papst Pius II., der als Kardinal Enea Silvio Piccolomini noch ein eifriger Konziliarist gewesen war, verbot in seiner Bulle »Execrabilis« im Jahre 1460 aufs schärfste die Möglichkeit, vom Papst an ein allgemeines Konzil zu appellieren, zumal dies bedeutet hätte, dass dem Konzil eine über dem Papst stehende Autorität zukäme.

 

 번역을 바로잡았다.

 

 

 아래글을 볼 것:

 

https://de.wikipedia.org/wiki/Pius_II.

 

So erließ er nur vier Tage nach dem Kongress von Mantua am 18. Januar 1460 die Bulle Execrabilis, die eine Appellation an ein allgemeines Konzil gegen den Papst mit der Exkommunikation belegte. Damit war dem Konziliarismus ein wichtiges Instrument aus der Hand genom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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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네 딩엘, 종교개혁, 인물과 중심지를 따라 읽다, 류성민 옮김, 영음사, 2022(3).

 

마르실리우스의 사상은 교회의 정죄로 인해 자신의 동시대인들을 불러올 수는 없었지만, 이런 방식으로 후대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46)

 

마르실리우스의 사상을 교회의 정죄로 인해 그의 동시대인들은 근거로 삼을 수는 없었지만, 이런 방식으로 후대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독일어 원문: Das Gedankengut des Marsilius, auf das sich seine eigenen Zeitgenossen wegen seiner Verurteilung nicht berufen konnten, erlangte auf diese Weise nachträgliche Wirkung.

 

사실 그는 아그리콜라나 그와 똑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전에 자신이 직접 사용했던 표현들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81)

 

사실 그는 아그리콜라나 그와 똑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전에 자신이 직접 사용했던 표현들을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어 원문: Zwar erkannte er, dass sich Agricola und seine Gesinnungsgenossen auf Formulierungen berufen konnten, die er selbst einmal gebraucht hatte.

 

번역을 바로잡았다.

 

sich auf A berufen = A에 근거를 두다

 

 

아래, 181쪽의 번역을 볼 것:

 

이 주제가 종교개혁 신학을 계속하여 움직인 것은 양쪽 모두 다양한 맥락에서 진술되었던 루터의 견해들을 근거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어 원문: Dass das Thema die reformatorische Theologie weiter beschäftigte, lag u.a. daran, dass sich beide Seiten auf Positionen Luthers berufen konnten, die er in unterschiedlichen Kontexten geäußert ha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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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네 딩엘, 종교개혁, 인물과 중심지를 따라 읽다, 류성민 옮김, 영음사, 2022(3).

 

그 결과 교황 요한 22(Papst Johannes XXII)는 그를 출교했고, “평화의 방어자라는 불쾌한 책을 이단서로 정죄하여 불태우는 당연한 수순의 사건이 발생했다.(45)

 

그 결과 교황 요한 22(Papst Johannes XXII)는 그를 출교했고, “평화의 방어자라는 불쾌한 책을 이단서로 낙인찍는 당연한 수순의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어 원문: Es war deshalb nur folgerichtig, dass ihn Papst Johannes XXII. exkommunizierte und die anstößigen Sätze des »Defenso pacis« als häretisch brandmarkte.

 

번역을 바로잡았다.

 

https://www.dwds.de/wb/brandmarken

 

 

아래, 87쪽의 번역을 볼 것:

 

이를 통해 루터의 견해가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주장과 유사한 것임이 드러났다. 그래서 에크는 이 기회를 사용했다.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정죄된 두 명의 교회 비판가들의 주장을 비판함으로 루터를 이단으로 낙인찍으려 했다.

 

독일어 원문: Dies brachte ihn in argumentative Nähe zu John Wyclif und Jan Hus, so dass Eck die Gelegenheit nutzte, Luther unter Verweis auf verschiedene, auf dem Konzil von Konstanz 1415 verurteilte Sätze der beiden Kirchenkritiker als Ketzer zu brandmar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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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네 딩엘, 종교개혁, 인물과 중심지를 따라 읽다, 류성민 옮김, 영음사, 2022(3).

 

귀족 가문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유산을 상속하면서 유산을 받을 권리를 가진 이들의 수에 따라 새롭게 경계가 정해졌다. 결혼에 의해서도 다시 경계가 정해질 수 있었다.(39-40)

 

귀족 가문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유산을 상속하면서 유산을 받을 권리를 가진 이들의 수에 따라 새롭게 경계가 정해졌다. 결혼에 의해서도 다시 경계가 폐지될 수 있었다.

 

독일어 원문: Es gab Länder, die von Adelsfamilien regiert wurden, in denen bei jedem Erbfall die Grenzen entsprechend der Zahl der erbberechtigten Söhne neu gezogen wurden, oder in denen diese Grenzen durch Heiraten wieder aufgehoben werden konnten.

 

번역을 바로잡았다.

 

아래, 410쪽의 번역을 볼 것:

 

이제 수도원들이 폐지되었고, 수도원의 재산들은 세속화되었다.

 

독일어 원문: Nun wurden zwar Klöster aufgehoben und das Klostergut säkularisie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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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네 딩엘, 종교개혁, 인물과 중심지를 따라 읽다, 류성민 옮김, 영음사, 2022(3).

 

그에 반하여 막시밀리안 1세는 극단적 상황에서 자신의 식탁의 은을 저당잡거나, 미수금이 정산될 때까지 부인과 자신의 나라를, 예컨대 보름스의 채권자들에게, 몇 달간 담보로 제공했어야 했다. 그가 빈(Wien)에 있는 자신의 성의 천장에서 몰래 보물을 캐도록 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39)

 

그에 반하여 막시밀리안 1세는 극단적 상황에서 자신의 식탁의 은을 저당잡히거나, 미수금이 정산될 때까지 부인과 그 수행원들을, 예컨대 보름스의 여관 주인들에게, 몇 달간 담보로 제공했어야 했다. 그가 빈(Wien)에 있는 자신의 성의 지하실에서 몰래 보물을 캐도록 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독일어 원문: Von Maximilian I. dagegen ist bekannt, dass er in Extremsituationen sein eigenes Tafelsilber versetzen oder gar seine Gemahlin und deren Hofstaat z.B. den Wirten von Worms monatelang als Pfand ausliefern musste, bis ausstehende Rechnungen bezahlt waren. Man kolportierte, dass er in den Gewölben seiner Burg in Wien nach mysteriösen Schätzen graben ließ.

 

문장과 번역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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