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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것은 바뀐다. 대부분의 내 친구들과 내가 아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집을 바꾼다. 다정한 인사를 주고받는다. 자전거를 오토바이로 그리고 오토바이를 자동차로 바꾼다. 유리창의 커튼도 바꾸고 일자리도 바꾼다. 편지와 견해와 생각을 주고받는다.

 

물론,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변화를 말하는 동안에도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있다.

 

지금은 푸르고 투명한 여름이다. 지금은 덥고, 하늘은 우리 머리 위에서 불타고 있다. 하지만 벌써 저녁 무렵이면 무언가 서늘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밤이 되면 바람이 일고 비구름 냄새가 몰려온다. 이제, 저기 보아라. 나뭇잎들은 붉거나 짙은 갈색으로 서서히 물들어가고, 바다는 이전보다 다소간 더 푸르러지고, 대지는 약간 더 짙은 갈색을 띠고, 멀리 보이는 산들조차도 더욱더 멀어져 보인다. 세월은 모든 것을 그냥 무심하게 변화시킨다.

 

 2

줌치는 사랑의 이야기이다.줌치는 생의 최초의 아침에 만났던 처음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줌치처음사랑의 조약돌이 어떻게 마음의 호수 한복판에 떨어졌고, 그때 생겨난 사랑의 파문이 어떻게 퍼져 나갔으며, 그 파문이 호숫가에 달하기도 전에 어떻게 사라져버렸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줌치처음사랑을 단순히 털어놓는 수준에서 자신의 고해성사를 끝내고 있지는 않다.줌치는 그 처음사랑이 왜 우리에게 사랑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사유를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처음사랑이 그 후에도 계속된 우리들의 생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성찰하고 있다. 이 점이야말로 줌치의 사랑 이야기의 미덕이다.

 

따라서줌치모든 것은 바뀐다라는 명제를 자신의 첫 문장으로 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또한 첫사랑을 반추할 때면 으레 감정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달콤함과 안타까움, 씁쓸함의 소용돌이에 줌치가 허망하게 좌초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성찰이 베푸는 힘 때문이다.

 

줌치는 사랑의 황금 사원을 찾아 떠나는 모슨 순례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관문이며, 그들의 지친 영혼을 감싸주고 위로할 영원한 주제곡이다.

 

199410, 린쯔에서

 

박진곤

 

3

내 이야기는 원래 한 문장이면 충분했었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자전거 한 대를 선물로 받아서 그걸 장난감 전기기차와 바꾸었고, 전기기차를 주고 다시 개 한 마리를 얻었으며, 그 개를 잃고 연필깎이를 하나 주었으나, 사랑을 위해 그 연필깎이마저 내주어버렸다.

 

 4

사랑은 왜 지속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여러 가지 다른 질문들을 해 본다면 어떨까. 왜 그해 여름은 지나가버렸을까? 그리고 또 다시 찾아온 여름마저도? 그리고 그 뒤에 계속해서 해마다 돌아온 여름은? 왜 에스더의 아버지는 병이 났을까? 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변할까?

 

5

질문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질문들 가운데 대답할 수 없는 것이 허다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이야기를 여기서 마칠 수밖에 없다.

 

6.

아모스 오즈(1939. 5. 4.-2018.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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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래 그 소녀야. 그 당시 소녀는 아마 그 녀석의 짝꿍이었지. 소녀가 조금만 더 다정스럽게 굴었더라면, 우리들도 소녀에게 잘해 주었을 텐데. 하지만 소녀는 욕심쟁이였다. 소녀는 공부도 잘하고 우리에 비해 아는 게 훨씬 많았다. 그러나 소녀는 우리들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짝꿍이었던 우리들이 시험지 앞에서 쩔쩔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직접 가르쳐 주기가 싫거든 두 팔로 가리지나 말일이지. ‘이런꼴이 얼마나 얄밉던지! 그 팔은 다른 사람이 넘볼 수 없는 자기만의 울타리이다. 소녀는 (아마 학급에서 거의 유일하게) 귀고리며 손목시계까지 차고 있지 않은가? 이 두 가지 장신구는 이 어린 욕심쟁이가 거둬들인 첫 번째 수확임에 틀림없지 않을까? 그것을 거리낌 없이 학교에 차고 오다니?! 소녀한테서 무언가 꼬투리를 잡고 싶은 심사는 우리의 시선의 상상력을 어둡게 할뿐이다. 운도 없고 소녀를 좋게 생각할 여유도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일생 동안 두고두고 못된 짝꿍 이야기나 하게 될 것이다. 운이 좋은 사람이라면, 윌리 로니스가 1960년 프랑스에서 찍은 사진으로 만든 이 그림엽서를 언젠가 만나게 되리라. 소녀는 결코 욕심쟁이가 아니며, 소녀에 대한 우리의 억하심정이란 어쩌면 터무니없었던 것일 수 있다는 그 첫 번째 증거는 소녀의 지극히 만족스러워 하는 눈길이다. 다른 사람을 정말로 외면할 마음이 있는 아이라면 결코 이런 눈길을 하지 않는다. 내 생각은 이렇다. 이제까지 몰랐던 새로운 종류의 기쁨을 이 소녀는 지금 맛보고 있는 것 같다. 그 기쁨은 교실이기 때문에, 다른 급우들 때문에 곡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글씨를 이제는 휴대용 흑판에, 그리고 나중에는 종이 위에 쓰게 되리라는 데서 오는 기쁨이다. 보호되어야만 하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글씨에 대한 기쁨이다. 그 기쁨을 이제 막 깨달았고, 그 때문에 행복하게 여기고 있다. 여기에다 나는 조심스럽게 몇 마디를 더 붙이고 싶다. 일상적인 글쓰기에 대한 기쁨 가운데서, 지금 소녀가 깨달은 것은 독자적인 글쓰기에 대한 기쁨은 아닐까. 소녀 외에는, 그것을 교실에 있는 어느 누구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닐까. 선생님마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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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그림엽서의 사진은 일본 사람 사다요시 시오타니의 작품이다. 사다요시는 자신의 작품을 그저 바다라고 불렀다. 엽서의 뒷면을 보니 이 사진은 이미 1935년에 찍은 것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고요하고 부드러운 바다가 그 당시에 실재했었다니! 바다의 고요 때문에 나는 이 그림엽서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조는 듯이 부드럽게 밀려오는 물결처럼 서서히 내 마음 한구석에 욕망이 자리를 잡는다. 일본에 가서 그곳의 해변을 걷고 싶다. 어쩌면 그곳에 있는 바다는 정말로 훨씬 더 부드럽게 밀려오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하면서도 나는 오랫동안 정작 이 그림엽서가 왜 내 마음을 그렇게 사로잡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물은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우리는 왜 그것이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것은 엄연히 실재하고는 있으나 밝힐 수는 없는 가장 어처구니없는 무지일 것이다. 우리 속에는 명백히 불분명한 (혹은 알 수 없는) 판관이 있다. 이것은 어떤 것에 대한 마음의 경도를 판결하기는 하지만, 이 마음의 이끌림을 밝혀내지는, 즉 언어의 논리로 기술해 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들의 미적 감응과 우리들의 논리 사이의 거리를 뜻할 뿐이다. 이 거리를 뛰어 넘으려는 나의 전략은 이렇다. 나는 이 그림을 내 방에 세워 놓는다. 그리고는 생각날 때마다 이 그림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것이다. 계속해서 거듭되는 이 응시는 차근차근 정신을 일깨운다. 하나씩, 하나씩 깨어난 이 정신은 불해명성의 거리를 조금씩, 조금씩 메우어 나아간다. 계속해서 들여다보게 되면 언어와 통찰이 언젠가 우리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법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가는 물론 알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언어에 이르게 되는가를 밝혀 낸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이 점점 더 끌리는 것은 잦아드는 물결의 이랑이었다. 나는 기억한다. 해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종종 했었다. 바다는 사람을 압도한다. 물결치는 파도의 서늘한 힘이 무섭다. 이것이 내가 다른 바다를 꿈꾸도록 한 이유였다. 이제 모든 게 분명해 진다. 바다의 침묵은 죽음의 상징이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났으면 하는 은밀한 욕망이 내 속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다요시 시오타니의 이 그림엽서는 죽음의 공포, 그것의 불면성과 그 불면을 잠재우려는 잠들지 않는 욕망을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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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81212, 작가 빌헬름 게나찌노가 죽었다고 독일 한저출판사 대변인이 알렸다.

 

2

모든 게 서툰 시절이다.

어린 아들은 유치원에서, 독일 아이들과 낯선 언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

나는 어린 아들이 독일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응급상황을 대비해, 유치원 내 작은 방에서 당분간 1시간은 대기한다.

 

3

그 방에서, 아무도 내게 말 붙이지 않는 침묵 속에서, 빌헬름 게나찌노의 언어를 모국어로 옮긴다.

 

 

4

때는 오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눈은 새로운 광경을 수없이 연출했다. 시계탑의 숫자판이 눈에 반쯤 덮인다. 삼 분이 지나자 담벼락에 세워진 자전거의 안장이 하얗게 변한다. 며칠 전부터 길도랑에 있던 빈 병이 완전히 사라진다. 이제 눈은 나를 유혹한다. 잠시 후에 나는 집을 나섰고 눈 덮인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자동차들은 가만가만 아주 조심스럽게 운행을 했다. 싸움이라도 하려는 듯, 전차는 천천히 눈발을 뚫고 나아갔다. 어떤 어린아이가 작은 소리로 훌쩍훌쩍 울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자기가 눈에 파묻힐까 봐 두려운 모양이었다. 다른, 좀 더 큰 아이들은 혀를 쑥 내민 채 커다란 눈송이가 자신들의 입 속으로 곧장 날아들도록 하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눈송이가 입 안으로 들어오면, 아이들은 재빨리 눈을 감고서 입 안의 색다른 차가움에 어찌할 줄 몰랐다. 나는 어떤 우표 가게의 진열장에서 몇 장의 그림엽서를 발견했다. 그 가운데 한 장은 바로 지금 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전차 한 대와 자동차 한 대가 눈 속을 달리는. 그때 나는 별안간, 어째서 흰 눈이 유쾌함을 불러일으키는가를 깨달았다. 그것은 하늘 가득히 눈이 내림으로써 세계는 수 분 내에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가게에 들어가서 이 그림엽서를 샀다. 눈은 세계를 아주 경쾌하고 아주 신속하게 변화시키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변화란 아주 덧없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몇 분 후에 눈은 그쳤다. 영원히 쌓여 있을 것 같았던 눈은 움츠려 들다가 아예 녹거나 곤죽으로 변했다. 아이들의 들떴던 마음도 사라지고, 사물은 본래의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내가 지니고 있던 그림엽서에서만은 아직도 계속해서 눈이 내렸다.

 

 

5

또 만나요, 고마워요!

 

내 사랑, 빌헬름 게나찌노!

    

6.

Wilhelm Genazino (1943-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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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타 서페티스,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안진희 옮김, 노란상상, 2018(12).

 

[...] 엄마는 나를 아는 친구를 통해 급히 인슈터부르크로 보냈다.(23)

 

[...] 엄마는 나를 아는 친구를 통해 급히 인스터부르크로 보냈다.

 

Insterburg = 인스터부르크 = (Chernyakhovsk = 체르냐홉스크)

 

지명 표기를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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