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양떼 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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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세계적인 명성은 1984년 출간된『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덕분이다. 쿤데라는 이 한 권의 소설로 유럽과 미국의 평론가들과 독자들을 사로잡았고, 그 후 새로운 소설들을 발표할 때마다 국제적으로 평론가들과 독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1988년, 이『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송동준 옮김, 민음사)의 출간과 더불어 쿤데라는 한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최상의 외국 작가가 되었다. (쿤데라가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 된 것은《동서문학》(3월호, 통권 제140호)이 <밀란 쿤데라의 사상과 문학>이라는 특집을 마련하고 단편 [에드워드와 하나님]을 실었던 1986년이다.)

독일어 판을 저본(底本)으로 삼아 번역한 이 송동준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판형과 표지 디자인이 바뀌는 가운데 10여 년 동안 부동의 스테디셀러였다. 그리고 민음사는 1996년부터 한국에서 발효된 국제저작권 보호 규약 때문에, 저작권 계약에 따른 정식 한국어 판『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출판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번역본의 저본이 프랑스어 판으로 바뀌게 된다. 1999년 이재룡의 번역으로 새롭게 출간된『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판권면(版權面)에 씌어 있는 한 문장은 이 변화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어 판『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출간하기 위해 역자는 밀란 쿤데라가 유일한 정본으로 인정한 갈리마르 판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를 번역하였다."

함축적으로 표현된 이 한 문장의 행간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무단 번역본에 대한 쿤데라의 분노가 넘쳐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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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밀란 쿤데라: "[...] 여기[프랑스]에는 20년 전부터 유일하게 내 승인을 받아 초판본으로 내 책들을 출판하는 출판사가 있다. 유일하게 내 승인을 받은 판임을 나는 강조한다. 1985년경부터 내 모든 소설들의 프랑스어 번역들을 나는 2년 간의 집중적인 작업을 통해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 하나까지 철저하게 검토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프랑스어 번역판도 내가 쓴 텍스트로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체코어에서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에서도 내 소설들을 외국어로 번역하도록 하고 있다. 나는 심지어 두 번째 방법을 약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오랫동안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내 책들의 번역들을 검토하면서, 어떤 생각은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문장은 삭제하고, 다른 문장은 새로 집어넣는 등의 일을 나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년 전부터 내 모든 소설을 차례로 펴내고 있는 체코의 여류 출판인은 프랑스 판을 정본으로 삼아 소설을 출판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체코어로 내가 어떤 텍스트를 출판하려고 한다면, 나는 그 텍스트를 프랑스어 판과 대조해서 그 동안 약간 수정한 부분이 있을 경우, 그 수정한 내용을 체코어 텍스트에 삽입한다. 이러한 나의 작업 방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내 소설들을―내가 전혀 모르는 가운데―영어 번역판을 보고서 자기 나라말로 번역한 사실을 최근 확인했을 때 치민 내 분노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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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의 이 분노는, 1999년 한국에서 프랑스어 판을 정본으로 삼아 번역한 이재룡(숭실대학교 불문과 교수)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새롭게 출간되었을 때, 해소되었을까? 60년대 말,『농담』의 "엉터리" 번역판들 때문에 시작된 "마치 목동이 양떼를 쫓는 것처럼 수도 없이 많은 단어들의 뒤를 쫓은" 쿤데라의 "번역 감시"가 마침내 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그 열매를 맺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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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오독, 오역 1 :

까마귀 ― 바구니

테레사와 카레닌의 아침 일과 가운데 하나는, 빵집에 가서 우유와 빵을 사는 것이다.(이재룡:154, 183, 241, 330-331)

그녀[테레사]는 매일 아침마다 그랬듯이 우유를 사러 갔고, 그[토마스]가 문을 열면 빨간 스카프로 감싼 바구니를 가슴에 꼭 안고 있었다. 짚시들이 아기를 품안에 안는 식이었다. 그는 코앞에서 자신을 나무라는 듯한 까마귀의 커다란 부리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땅에 반쯤 묻힌 까마귀를 발견했던 것이다. 예전에 코사크 족은 포로로 잡은 적을 이렇게 처리했었다.(이재룡:241)

그녀[테레사]는 매일 아침마다 그랬듯이 우유를 사러 갔고, 그[토마스]가 문을 열[→자] [그녀는] 빨간 스카프로 감싼 [→까마귀]를 가슴에 꼭 안고 있었다. [→집]시들이 아기를 품안에 안는 식이었다. 그는 코앞에서 자신을 나무라는 듯한 까마귀의 커다란 부리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땅에 반쯤 묻힌 까마귀를 발견했던 것이다. 예전에 코사크 족은 포로로 잡은 적을 이렇게 처리했었다.


여기에서 번역자는, 테레사가 "빨간 스카프로 감싼 바구니를 가슴에 꼭 안고 있었다"고 옮기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 원문을 보면, 이 <바구니>는 <까마귀>(une corneille)의 오역(誤譯).

프랑스어 원문: [...], elle serrait contre sa poitrine une corneille enveloppée dans l'écharpe rouge.

왜, 이 번역자는 <까마귀>를 <바구니>로 잘못 번역한 것일까?

이 오역의 직접적인 원인은, <까마귀>와 <바구니>라는 프랑스 어휘의 유사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corneille: 까마귀
corbeille: 바구니

이 프랑스 낱말은 철자의 수가 아홉으로 같다. 뿐만 아니라, 그 철자의 내용까지도 네 번째 낱자 하나를 제외하고는, 같다. 다만 이 두 단어가 <까마귀>와 <바구니>로 그 의미가 분화되는 것은, 오로지 이 네 번째 낱자 /n/과 /b/의 변별력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개의 <낱자의 변별>에 의지하고 있는 <의미의 분화> 때문에 이 두 단어는 낱자를 순간적으로 잘못 읽을 경우, 그 의미 파악에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번역자가 자기가 번역한 <텍스트의 내적 일관성>을 기억하고,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이 착독의 오역을 피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까마귀-바구니>의 착독은『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제5부 13장 앞 부분에 나온다. 한데 이 소설에는, 테레사가 까마귀를 집으로 데려오는 이 대목과 겹치는 부분이 또 있다. 제4부 20장이 이곳으로, 여기에는 테레사가 <언 땅에 묻힌 이 까마귀를 발견해 구해내는> 모습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제4부 20장의 한 대목:

그녀는 다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얼어붙은 땅을 파냈고 마침내 무덤에서 까마귀를 꺼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까마귀는 온몸이 마비되어 걷지도, 날지도 못했다. 그녀는 목에 두르고 있던 빨간 목도리로 까마귀를 감싸 왼손에 쥐고 품안에 껴안았다.(이재룡:183))

또 이 <까마귀-바구니>의 착독 대목을 지나, 같은 제5부 14장에서 <이 까마귀를 가슴에 안고 있는 테레사>가 정치범 사면 탄원서의 서명을 고심하는 토마스에게 떠오른다:

그 순간 그녀가 거기 있었고, 빨간 스카프로 감싼 까마귀를 가슴에 끌어[안]고 그의 앞에 서있는 그녀가 눈앞에 떠올랐다.(이재룡:252)

까마귀를 품안에 안고 있는 테레사의 이미지가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이재룡: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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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오독, 오역 2 :

영구차 ― 바구니

테레사는 토마스의 바람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이 심적 고통에 짓눌려 테레사 밤마다 일련의 흉몽에 시달린다:(이재룡:25-27, 67-71) 고양이에게 시달리는 꿈, 수영장에서 총에 맞는 꿈, 영구차에 시체로 실려 가는 꿈.

이 꿈을 화자(話者)는 테레사의 <상승>과 <추락> 욕망으로 설명한다:

수영장을 둘러싼 나체 여자들의 행진, 테레사도 그들처럼 죽었다고 기뻐해 마지않는 바구니 속의 시체들, 그것은 그녀를 공포에 몰아넣는 <저기 아래>인 셈이며 한번 빠져나갔다가도 신비스럽게 이끌리는 그런 것이다.(이재룡:71)

수영장을 둘러싼 나체 여자들의 행진, 테레사도 그들처럼 죽었다고 기뻐해 마지않는 [→영구차] 속의 시체들, 그것은 그녀를 공포에 몰아넣는 <저기 아래>인 셈이며 한번 빠져나갔다가도 신비스럽게 이끌리는 그런 것이다.

이재룡은, 여기에서도 순간적으로 한 단어를 잘못 읽고 오역을 한다. 이번에는 <영구차>(le corbillard)를 <바구니>로 잘못 옮긴 것.

프랑스어 원문: les cadavres dans le corbillard
프랑스어 원문: (영구차 속의 시체들)

corbillard: 영구차
corbeille:  바구니

이 <영구차-바구니>의 오독은, 결국 순간적으로 단어를 잘못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착독은, 앞서 말한 <까마귀-바구니> 착독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그 착독의 양상이 훨씬 더 복잡하다.

<까마귀-바구니>의 착독은 /n/과 /b/의 단순한 <치환>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구차-바구니>의 착독은 <첨입>, <치환>, <결락>―착독의 세 가지 유형은 <번역 비평>(15)를 참조할 것―이 모두 관여하고 있다:

첨입: corbeill-, 치환: corbeille-, 결락: corbeilleard

(이 경우에도, <텍스트의 내적 일관성>을 기억하는 것만이 착독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녀는 이삿짐 트럭 만큼이나 큰 영구차 속에 누워 있었다. 주위에는 오로지 여자 시체들뿐이었다. 시체가 너무 많아 뒷문을 열어놓고 다리를 밖으로 내놓아야 했다.(이재룡:26-27))



원문:

http://web.archive.org/web/20030604180402/http://bookmesse.com/serien/jingon/jingon-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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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밀란 쿤데라의 문학(1997, 민음사)을 번역했다.

그때 쿤데라의 한국어 번역본들을 살펴보았다.

꽤 오역이 많았다.

이를 정리해 한 인터넷 사이트에 발표했다.

http://web.archive.org/web/20030604180402/http://bookmesse.com/serien/jingon/jingon-index.htm

 

3년 전, 15권의 <밀란 쿤데라 전집>(2013, 민음사)이 완간되었다.

20여 년 전 오역이 어떻게 수정되었는가, 다시 살펴보았다.

수정된 오역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꽤 많은 오역이 그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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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번역자는 없다.

번역자는 '한계' 내에 있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착독(錯讀).

언어적, 어학적, 문법적 오독으로 인한 오역.

문화적, 전문적 지식의 부재로 인한 오역.

옮겨 쓰는 과정의 오류 등등.

 

이를 바로잡는 게 출판사의 편집자다.

완벽에 가까운 번역은 꼼꼼한 편집자의 손에 달렸다.

이는, 지금까지 번역서 읽기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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