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아름답고 근사한 것 하나는 품고 있어야 삶을 이어나갈 힘을 얻을 수 있다. 내가 호메로스를 통해 경험한 것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이었고, 그것은 비루한 내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눈부신 기적이었다.

 

이준석(2023: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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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스-위르겐 자보로프스키에게 배운 것

 

1

내가 <서울, 1964년 겨울>(김승옥)을 독일어 번역으로 읽은 것은 1986.

 

안 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아니오. 아직까진……그가 말했다. “김 형은 파리를 사랑하세요?”

 

„Lieber An, mögen Sie Fliegen?“

„Nein, bis jetzt ...“ sagte er, „lieber Kim, mögen Sie Fliegen?“

 

파리를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에는 개방성이 있다. 1. 프랑스 수도 2. 곤충.

이 개방성이 곤충으로 확정되는 것은, “날 수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내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것이라는 이어지는 김의 대답이다.

 

하지만 독일어 독자는 이 개방성을 누릴 수 없다. 번역자가 문맥을 파악한 후, 곤충 파리(Fliege)로 이미 텍스트를 확정했기 때문이다.

 

번역의 상실.

 

2

서대문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이 서른두 명 있는데 그중 여자가 열일곱 명이고 어린애는 다섯 명, 젊은이는 스물한 명, 노인이 여섯 명입니다.”

 

„An der Bushaltestelle am Westtor standen 49 Leute, darunter 17 Frauen, 5 Kinder, 21 junge Leute und 6 Alte.“

 

김승옥의 문장과 독일어 번역은 일치하지 않는다.

김승옥: 32(서른두 명) 독일어 번역: 49(49 Leute)

번역자의 49명은 어디서 나온 걸까?

17 + 5 + 21 + 6 = 49

여자 + 어린애 + 젊은이 + 노인 = 49

번역자는 각 범주의 인원을 확인하고, 이를 합한 것.

인원수를 모두 더해 볼 생각을 하다니.

 

원문 읽기의 꼼꼼함.

 

3

최근에 본, 인터넷에 실린 이 번역자의 부고.

 

Hans-Jürgen Zaborowski(1943. 9. 27.-2021.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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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이 되면 나는 수업과는 별 상관없는 저널리스트 리샤르트 카푸시친스키가 이란 혁명을 취재하여 쓴 책인 <샤 중의 샤>의 한 구절을 읽어 준다. 이 글에는 혁명이 일어나는 순간에 대한 아름답고 정교한 묘사가 있다. 카푸시친스키에 따르면 그것은 시위대의 [선두]에 선 이가 곤봉을 보고도 두려워하며 도망치지 않는 순간이다.

 

김현호, <경향신문>, 2023. 5. 29.



수정 인용: 2023.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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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즐거웠던 배움의 시간은 오히려 내게 어떤 두려움을 남겼다. 즉 세상에는 바닷가에 있는 모든 조약돌을 뒤집어 보듯 텍스트를 읽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땅에 떨어진 남의 깃털을 주워 아무리 몸을 장식하려 해도 결국 누군가에게는 들킨다는 것을 그때 나는 배웠다.

 

김현호, <경향신문>, 202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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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 투이는 베트남전 중에는 깊은 구덩이나 지뢰처럼 예측할 수 없는 위험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했다. “저희 어머니는 항상 혹시 구덩이에 빠지게 되면 하늘을 올려 보라고 하셨어요. 생의 마지막 순간을 껌껌한 굴이 아니라 푸른 하늘로 기억하라면서요.”

 

백수진, <조선일보>, 2020.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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