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르트 슐링크,『계단 위의 여자』, 배수아 옮김, 시공사, 2016(8).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독일 변호사, ‘나’.
수요일 오전, 출장일을 끝낸 ‘나’는 시드니 보타닉가든―아트갤러리와 음악원이 있는―에서 오후를 보낸다.
“음악원 아래편 언덕으로 간 나는 풀밭에 누웠다. 양복을 입은 채로. 그러면 나중에 구겨진 옷을 입고 아마도 여기저기 얼룩도 묻은 채로 다녀야 한다는 사실은, 평소라면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겠지만 지금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일도, 마찬가지로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포기 못 할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포기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나를 앞서가는 모든 것들에게, 나는 대체가능한 존재였다. 아직 내 뒤를 따라오는 자들이나 나를 대체불가능하게 여길 뿐이었다.”(14-15쪽)
→ “음악원 아래편 언덕으로 간 나는 풀밭에 누웠다. 양복을 입은 채로. 그러면 나중에 구겨진 옷을 입고 아마도 여기저기 얼룩도 묻은 채로 다녀야 한다는 사실은, 평소라면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겠지만 지금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일도, 마찬가지로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포기 못 할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포기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모든 것들은 나를 대체하는 것이 가능했다. 나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내 뒤에 놓여 있는 것뿐이었다.”
독일어 원문: Bei allem, was vor mir lag, war ich ersetzbar. Nicht ersetzbar war ich nur bei dem, was hinter mir lag.
여기에서, 대체할 수 있는 것이란 미래의 일반적인 변호사의 업무, 일―“vor mir”―을 말하고 대체할 수 없는 것이란 과거의 개인적인 경험, 기억―“hinter mir”―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