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호이시칼 호이시의 세계 교회사손규태 옮김한국신학연구소, 2004(9).

 

10월 16일 루터는 “a papa non bene informato ad melius informandum”을 통해서 호소하고 나서 [아우크스부르크]로부터 도망쳐서 [비]텐베르[]에서 자기의 Acta Augustana”를 발표했고 11월 28일 일반 공의회에 호소한다.(422)

 

→ 10월 16일 루터는 교황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더 잘 알고 판단할 수 있는 상위 권위에(a papa non bene informato ad melius informandum) 항소하고 나서 [아우크스부르크]로부터 도망쳐서 [비]텐베르[]에서 자기의 아우크스부르크 사건록(Acta Augustana) 발표했고 11월 28일 일반 공의회에 호소한다.

 

독일어 원문: Am 16. Okt. appellierte Luther „a papa non bene informato ad melius informandum“, entfloh darauf aus Augsburg, veröffentlichte in Wittenberg seine „Acta Augustana“ und appellierte am 28. Nov. vom Papst an ein allgemeines Konz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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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호이시, 칼 호이시의 세계 교회사, 손규태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2004(9).

 

스콜라주의는 면죄부를 교의학적으로 정리하였는데 특히 교황은 성자들의 넘치는 공적들의 보물을 관리하는 자이기 때문에 면죄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교리를 발전시켰다.(419)

 

스콜라주의는 면죄부를 교의학적으로 정리하였는데 특히 교황은 성자들의 넘치는 공적들의 보물을 관리하는 자이기 때문에 면죄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교리를 발전시켰다. 여기에는 많은 점에 대해 큰 불명확성이 남아 있었다.

 

독일어 원문: Die Scholastik hatte den Ablaß dogmatisch bearbeitet, insbesondere die Lehre entwickelt, daß der Papst den Ablaß spenden könne, weil er der Verwalter des „thesaurus bonorum operum“ sei, des Schatzes der überschüssigen Verdienste der Heiligen. Über viele Punkte herrschte große Unklar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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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그런 발음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경험의 한계에 대한 진술이어야 한다.

경험의 한계가 주장듣지 못했으니, 존재하지 않는다이 되는 순간, 민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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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호이시, 칼 호이시의 세계 교회사, 손규태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2004(9).

 

종교전쟁에 참여했던 자들에게 교회의 참회형벌을 면하게 하는 십자[] 면죄부가 성립되었다(11세기 후반; §51h). 12세기부터 직접 전쟁에 나가지 않았던 사람도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살 수 있게 되었다.(419)

 

종교전쟁에 참여했던 자들에게 교회의 참회형벌을 면하게 하는 십자[] 면죄부가 성립되었다(11세기 후반; §51h). 처음부터 면죄부는 또한 하나님에 의해 판결된 연옥의 형벌에 대한 사면으로도 간주되었다. 12세기부터 직접 전쟁에 나가지 않았던 사람도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살 수 있게 되었다.

 

독일어 원문: Auf dieser Grundlage entstand der Kreuzablaß, der Erlaß kirchlicher Bußstrafen für die Teilnehmer am Glaubenskriege (2. Hälfte des 11. Jhs., vgl. § 51 h). Von Anfang an galten die Ablässe auch als Erlaß der von Gott verhängten Fegfeuerstrafen. Seit dem 12. Jh. konnten auch solche, die nicht persönlich in den Krieg zogen, gegen eine Geldzahlung Ablaß erwerb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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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끊임없이 다른 기준을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제 인생을 풍요롭게 했죠.

 

이지수, <한겨레>, 2025.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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