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선제후령에서 직접적으로 그의 통치가 시작된 직후인 1566416 오트하인리히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성서에 일치하는 교회의 질서와 교리를 추구하는 종교개혁 칙령을 공직자들에게 반포했다. 이것은 잘못된 예배를 중지하고’, 성만찬과 함께 진행되는 교황 미사를 금지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226)

 

선제후령에서 직접적으로 그의 통치가 시작된 직후인 1556416 오트하인리히는 종교개혁 칙령을 내려 공직자들에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성서에 일치하는 교회의 규정과 교리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잘못된 예배를 중지하고’, 빵만 분배하는 성만찬과 함께 진행되는 교황 미사를 금지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어 원문: Unmittelbar nach dem Antritt seiner Herrschaft in der Kurpfalz wies er am 16. April 1556 die Amtsleute in einer Reformationsmandat an, Lehre und Ordnung der Kirche entsprechend der Heiligen Schrift und dem Augsburger Bekenntnis zu gestalten. Das bedeutete, dass „falscher Gottesdienst abgestellt‟ und die „päpstliche Messe‟ mit der Austeilung des Abendmahls unter einer Gestalt verboten worden wurde.

 

anweisen, A zu gestalten

 

= A를 마련하라고 지시하다

 

mit der Austeilung des Abendmahls unter einer Gestalt

 

= 한 가지 형태, 즉 빵만 분배하는 성만찬과 함께

 

아울러, 연도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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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하지만 법은 곧 종교개혁자들 편으로 돌아섰다.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는 시민들에게 선택의 자유, 즉 전통적인 신앙을 고백하거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의 종교개혁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였다.(225-226)

 

하지만 상황은 곧 종교개혁자들 편으로 돌아섰다.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는 제국의회 의원들에게 선택의 자유, 즉 전통적인 신앙을 고백하거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의 종교개혁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였다.

 

독일어 원문: Das Blatt wendete sich jedoch bald zugunsten der Protestanten. Im Augsburger Religionsfrieden von 1555 wurde es den Reichsständen freigestellt. beim hergebrachten Glauben zu bleiben, oder die Reformation im Sinne des Augsburger Bekenntnisses von 1530 einzuführen.

 

das Blatt wendete sich = 상황이 급변했다

 

Reichstände = 제국의회 의원들(성직자 선제후, 세속 선제후, 주교, 백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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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하이델베르크 종교개혁:

 

1545년 프리드리히 2세는 성례를 제한하고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미사를 거행할 것을 촉구하는 첫 번째 교회 규칙을 공포하였다. 동시에 지속적으로 가톨릭 황제와 개신교 군주를 중재하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225)

 

1545년 프리드리히 2세는 성인 숭배 제한하고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미사를 거행할 것을 촉구하는 첫 번째 교회 규칙을 공포하였다. 동시에 지속적으로 가톨릭 황제와 개신교 군주를 중재하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독일어 원문: Im Jahr 1545 erließ er[=Friedrich.] eine erste Kirchenordnung, der zufolge die Messe in deutscher, nicht mehr in lateinischer Sprache zu halten und der Heiligenkult einzuschränken war. Gleichwohl suchte er weiterhin zwischen dem katholischen Kaiser und den evangelischen Fürsten zu vermitteln.

 

Heiligenkult = 성인 숭배

 

단어를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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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이 하이델베르크와 선제후령(Kurpfalz)에서 실현되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군주는 오랫동안촉진과 금지 그리고 관용을 혼합시킨모호한 종교정책을 실행해왔다. 선제후였던 루드비히 5세는 1520년대와 1530년대에 종교개혁적인 정치를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회개혁에 반대하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다.(2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이 하이델베르크와 선제후령(Kurpfalz)에서 실현되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군주는 오랫동안촉진과 금지 그리고 관용을 혼합시킨모호한 종교정책을 실행해왔다. 선제후였던 루트비히 5세는 1520년대와 1530년대에 종교개혁적인 정치를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회개혁에 반대하는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도 않았다.

 

독일어 원문: Es dauerte jedoch noch recht lange, bis sich Heidelberg und die Kurpfalz der Reformation anschlossen. Die Religionspolitik der Herrscher war lange Zeit durch eine eigenartige Mischung aus Förderung, Verbot und Toleranz gekennzeichnet. Kurfürst Ludwig. verfolgte in den zwanziger und dreißiger Jahren noch keine reformatorische Politik. Zugleich schritt er aber auch nicht gegen kirchliche Neuerungen ein.

 

nicht gegen A einschreiten

 

= A를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다

 

문장을 바로잡았다.

 

• 121쪽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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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하이델베르크에서는 풍성한 후속 결과가 나타났다. 루터는 151710월 말 면죄부에 반대하는 95개조 논제를 가지고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제들은 빠르게 재()인쇄되었으며 1518년부터는 독일어와 라틴어로 상세하게 설명되었다.(223)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하이델베르크에서는 풍성한 후속 사건나타났다. 루터는 151710월 말 면죄부에 반대하는 95개조 논제를 가지고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제들은 빠르게 재()인쇄되었으며, 루터는 1518년 초 이 논제들을 독일어와 라틴어로 더 상세하게 설명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독일어 원문: Gleich zu Beginn der Reformation kam es in Heidelberg zu einem folgenreichen Ereignis. Luther hatte Ende Oktober 1517 mit seinen 95 Thesen gegen die Ablasspraxis eine hitzige Debatte ausgelöst. Die Thesen wurde rasch nachgedruckt, und Luther sah sich gezwungen, sie Anfang 1518 in deutscher und lateischer Sprache eingehender zu erläutern.

 

두 단어의 차이에 주의할 것:

 

Ereignis = 사건

 

Ergebnis = 결과

 

sich gezwungen sehen =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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