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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엽서의 사진은 일본 사람 사다요시 시오타니의 작품이다. 사다요시는 자신의 작품을 그저 바다라고 불렀다. 엽서의 뒷면을 보니 이 사진은 이미 1935년에 찍은 것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고요하고 부드러운 바다가 그 당시에 실재했었다니! 바다의 고요 때문에 나는 이 그림엽서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조는 듯이 부드럽게 밀려오는 물결처럼 서서히 내 마음 한구석에 욕망이 자리를 잡는다. 일본에 가서 그곳의 해변을 걷고 싶다. 어쩌면 그곳에 있는 바다는 정말로 훨씬 더 부드럽게 밀려오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하면서도 나는 오랫동안 정작 이 그림엽서가 왜 내 마음을 그렇게 사로잡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물은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우리는 왜 그것이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것은 엄연히 실재하고는 있으나 밝힐 수는 없는 가장 어처구니없는 무지일 것이다. 우리 속에는 명백히 불분명한 (혹은 알 수 없는) 판관이 있다. 이것은 어떤 것에 대한 마음의 경도를 판결하기는 하지만, 이 마음의 이끌림을 밝혀내지는, 즉 언어의 논리로 기술해 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들의 미적 감응과 우리들의 논리 사이의 거리를 뜻할 뿐이다. 이 거리를 뛰어 넘으려는 나의 전략은 이렇다. 나는 이 그림을 내 방에 세워 놓는다. 그리고는 생각날 때마다 이 그림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것이다. 계속해서 거듭되는 이 응시는 차근차근 정신을 일깨운다. 하나씩, 하나씩 깨어난 이 정신은 불해명성의 거리를 조금씩, 조금씩 메우어 나아간다. 계속해서 들여다보게 되면 언어와 통찰이 언젠가 우리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법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가는 물론 알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언어에 이르게 되는가를 밝혀 낸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이 점점 더 끌리는 것은 잦아드는 물결의 이랑이었다. 나는 기억한다. 해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종종 했었다. 바다는 사람을 압도한다. 물결치는 파도의 서늘한 힘이 무섭다. 이것이 내가 다른 바다를 꿈꾸도록 한 이유였다. 이제 모든 게 분명해 진다. 바다의 침묵은 죽음의 상징이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났으면 하는 은밀한 욕망이 내 속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다요시 시오타니의 이 그림엽서는 죽음의 공포, 그것의 불면성과 그 불면을 잠재우려는 잠들지 않는 욕망을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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