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아우크스부르크의 개신교들은처음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모든 교회를 빼앗긴 후14년 동안 참을성 있게 자유로운 하늘 아래서 평화롭게 예배를 드렸다. 다른 도시들도 예배를 위해 달려가는개신교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메리안의 판화(ein Stich Merians von Wien, 1649)(32-33)

 

아우크스부르크의 개신교들은처음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모든 교회를 빼앗긴 후14년 동안 참을성 있게 노천(露天)에서 평화롭게 예배를 드렸다. 다른 도시들도 예배를 위해 () 밖으로 나가야 하는개신교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메리안의 판화(ein Stich Merians von Wien, 1649)

 

독일어 원문: Die Protestanten in Augsburg feierten, nachdem ihnen nach großen anfänglichen Erfolgen alle Kirchen genommen worden waren, 14 Jahre lang geduldig und friedlich Gottesdienste unter freiem Himmel. Auch andere Orte berichteten vom „Auslaufen zum Gottesdienst‟ der Evangelischen (so noch 1649 ein Stich Merians von Wien).

 

unter freiem Himmel = 노천(露天)에서

 

Auslaufen zum Gottesdienst

 

= 예배를 드리러 성() 밖으로 나가다

 

오스트리아 빈의 경우, 1578년 개신교도의 도시 내 예배가 금지되었다.

 

빈의 개신교도들은 일요일이면, 도시를 빠져나와 인근 도시Hernals, St. Ulrich, Inzersdorf, Vösendorf로 가, 거기서 예배를 드렸다.

 

 

 

개신교도들의 아성, 헤르날스(Hernals)의 모습. 빈의 개신교들은 예배를 드리러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Matthäus d. Ältere Merian,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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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모의재판과 공개적인 교수형과 화형 그리고 죽은 자의 관을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사후(死後) 처형을 행한 도시들이 오랜 시일에 걸쳐 도시들(안트베르펜, 아우크스부르크, 에든버러, 페라라, 옥스퍼드 등)이 되었다. 그래서 그 도시들에서는 신앙의 문제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온 망명자들을 받아들이는 도시가 되었다.(32)

 

극적인 공개재판 공개적인 교수형과 화형 그리고 죽은 자의 관을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사후(死後) 처형을 행한 많은 곳이 일시적이거나 오랜 기간 도시들(안트베르펜, 아우크스부르크, 케임브리지, 페라라, 옥스퍼드 등)이 되었다. 그래서 그 도시들에서는 신앙의 문제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온 망명자들을 받아들였다.

 

Viele Orte wurden nach dramatischen Schauprozessen, öffentlichen Hinrichtungen und Verbrennungen bis hin zu postumen Verurteilungen mit öffentlicher Verbrennung der Särge (Antwerpen, Augsburg, Cambridge, Ferrara, Oxford u. a.) zeitweilig oder langfristig zu Städten, in denen Glaubensflüchtlinge aus vielen Ländern Aufnahme fanden.

 

Schauprozeß = 공개재판

 

단어와 지명,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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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이와 같이 예민한 갈등은 결국내적인 성령의 말씀’(Geisteswort) 그리스도인 각자의 신학적 권위에 토대를 두고[예컨대 울름의 세바스티안 프랑크(Sebastian Franck)카스퍼 폰 슈벵크펠트(Caspar von Schwenckfeld)] 삼위일체 교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와 같은 기독교의 주요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는[예컨대 베네치아(Venedig), 폴란드(Polen), 지벤뷔르겐(Siebenbürgen)에서 나타난 반()삼위일체론, 제네바의 세르베트(Servet)]성령운동(Spiritualistische Bewegung)을 조성해주는 역할을 하였다.(31)

 

이와 같이 예민한 갈등은 결국내적인 성령의 말씀’(Geisteswort)을 내세우며 그리스도인 각자의 신학적 권위에 토대를 두고[예컨대 울름의 제바스티안 프랑크(Sebastian Franck)카스파 폰 슈벵크펠트(Caspar von Schwenckfeld)] 삼위일체 교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와 같은 기독교의 주요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는[예컨대 베네치아(Venedig), 폴란드(Polen), 트란실바니아(Siebenbürgen)에서 나타난 반()삼위일체론, 제네바의 세르베트(Servet)]성령운동(spiritualistische Bewegung)을 조성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독일어 원문: Ebenso scharfe Konflikte bereiteten spiritualistische Bewegungen, die sich unter Verweis auf das „innere Geisteswort‟ auf die theologische Autorität des einzelnen Christenmenschen beriefen (z. B. Sebastian Franck und Caspar von Schwenckfeld in Ulm) und die zentrale Glaubensinhalte wie die Lehre von der Dreieinigkeit und von der Gottheit Christi in Frage stellten (z. B. Antitrinitarier in Venedig, Polen, Siebenbürgen; Michael Servet in Genf).

 

unter Verweis auf A

 

= A를 거론하며, 내세우며

 

Siebenbürgen = 트란실바니아 = 루마니아의 중부와 서북부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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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물음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논쟁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필립 폰 헤센은 1529마부르크에서1526년 시작된 야고보서 논쟁 이후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사이에서 중도(中道)의 길을 모색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양자를 화해시키려는 시도에서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1536년의 <비텐베르크 협약>(부처와 멜란히톤)이 바로 그것이다. 이 협약으로 개신교는 일치에 이르게 된다.(31)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물음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논쟁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필립 폰 헤센은 1529마르부르크에서1526년 시작된, 논박 문서를 통해 수행된 논쟁 이후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사이에서 중도(中道)모색했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양자를 화해시키려는 시도에서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1536년의 <비텐베르크 협약>(부처와 멜란히톤)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1973년의 로이엔베르크 협약으로 개신교는 비로소 일치에 이르게 된다.

 

독일어 원문: Der Streit über die Gegenwart Christi im Abendmahl wurde zu einem Zentralkonflikt zwischen Lutheranern und Reformierten. Philipp von Hessen suchte in Marburg 1529 (nach einer über Streitschriften geführten Debatte, die 1526 begann) eine „Mittelstraße zwischen Lutherischen und Zwinglischen‟, was allerdings scheiterte. Ein wichtiger Schritt auf diesem Weg war die Wittenberger Konkordie von 1536 (Bucer und Melanchthon). Aber erst der Leuenberger Konkordie von 1973 gelang die innerprotestantische Einigung.

 

nach einer über Streitschriften geführten Debatte, die 1526 begann

 

= 1526년 시작된, 논박 문서를 통해 수행된 논쟁 이후

 

참고로, 루터와 칼슈타트 사이의 야고보서 논쟁 = 1519/1520

 

아울러 빠진 부분을 보완하고, 지명과 단어를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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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비텐베르크 종교개혁 신학의 중요한 대표자,

 

안드레아스 루돌프 보덴슈타인 = 칼슈타트

 

신비주의적 신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칼슈타트는 루터보다 더 급진적으로멜란히톤이나 루터가 그토록 중시하던 교욱 없이도그리스도인 각자의 성숙함과 공동체 구성원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자신의 교회공통체인 오르람뮌데(Orlamünde)에서 그는 야고보의 형제로서 모든 평신도의 의미를 강화하는 실천 방안을 발전시켰다.(30-31)

 

신비주의적 신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칼슈타트는 루터보다 더 급진적으로멜란히톤이나 루터가 그토록 중시하던 교욱 없이도그리스도인 각자의 성숙함과 공동체 구성원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자신의 교회공통체인 오를라뮌데(Orlamünde)에서 그는 안드레아스 형제로서 모든 평신도의 의미를 강화하는 실천 방안을 발전시켰다.

 

독일어 원문: Von mystischer Theologie beeindruckt, betonte Karlstadt radikaler als Luther die Mündigkeit des einzelnen Christen und die Autorität der Gemeinde auch ohne die für Melanchthon und Luther so wichtige Bildung. In seiner Gemeinde Orlamünde entwickelte er als „Bruder Andreas‟ eine die Bedeutung aller Laien stärkende Praxis.

 

인명과 지명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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