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아우크스부르크는 외부 정치적으로도 온화하고 중도적인 길로부터 신중하게 돌아섰다. 1533년 말 울름 및 뉘른베르크와 특별 동맹을 맺었으며, 15361월에는 포괄적인 정치적인 지원을 약속한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n Bund)에 가입했다. 그리고 아우크스부르크는루터와 부처가 성만찬 문제에서 협정을 맺은1536년의 <비텐베르크 협약>(Wittenberger Konkordie)을 지지했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이로써 아우크스부르크는 외부에도 개신교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49)

 

아우크스부르크는 외부 정치적으로도 온화하고 중도적인 길로부터 신중하게 돌아섰다. 1533년 말 울름 및 뉘른베르크와 특별 동맹을 맺었으며, 15361월에는 포괄적인 정치적인 지원을 약속한 슈말칼덴 동맹(Schmalkaldischer Bund)에 가입했다. 그리고 곧바로 아우크스부르크는루터와 부처가 성만찬 문제에서 협정을 맺은1536년의 <비텐베르크 협약>(Wittenberger Konkordie)에 참여했다. 이로써 아우크스부르크는 외적으로는 신조(信條)의 일치를 이루는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

 

독일어 원문: Behutsam kehrte man auch außenpolitisch vom „milden und mittleren Weg‟ ab: Nach einem Sonderbündnis mit Ulm und Nürnberg Ende 1533 kam im Januar 1536 der Beitritt zum Schmalkaldischen Bund, der erweiterte politische Rückendeckung versprach. Zeitnah war Augsburg der Wittenberger Konkordie von 1536 dem Abendmahlskompromiss zwischen Luther und Bucer beigetreten. Somit galt Augsburg nach außen hin als bekenntniskonform.

 

zeitnah = umgehend = 곧바로

 

nach außen hin = 밖으로, 외적으로

 

bekenntniskonform = 신조가 일치된

 

삭제할 것: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표제어는 주격(主格)으로 쓸 것: Schmalkaldischer B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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