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심철민 옮김, 도서출판 b, 2017(4).
심철민 선생님께
1
번역문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이 파시즘에 맞서,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대답한다.(101쪽)
→ 이 파시즘에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대답한다.
Der Kommunismus antwortet ihm [=dem Faschismus] mit der Politisierung der Kunst.
3
독일어 원문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맞서’를 굳이 집어넣어서 번역해야 할 근거는 없어 보입니다.
4
①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반성완)
② 이러한 파시즘의 태도에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라는 대답으로 맞서고 있다.(차봉희)
③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최성만)
5
기존 번역본들을 살펴보고, 선생님께서 ‘맞서’를 넣어 번역하신 이유를 조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6
번역에도 ‘선점 효과’라는 게 있습니다.
후발 번역은, 선행 번역이 수행한 텍스트 읽기 방식과 어휘 선택에 매여 자유로울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헤르만 헤세의『데미안』번역본 같은 경우에도, 이 선점 효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가능하다면,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7
1983년, 반성완의 번역이 ‘맞서’를 삽입한 것은 나름 이해할만 합니다. 이념의 시대였기에.
하지만, 2017년 선생님의 번역에까지 이 선점 효과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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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너무나도 익숙한, 어쩌면 진부하기까지 한, 어느 출판사의 광고 문안이지만, 여기에 담긴 정신만은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입니다.
박진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