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심철민 옮김, 도서출판 b, 2017(4).
심철민 선생님께
1
번역문, 원문에 명사 ‘Natur’가 다섯 차례 나옵니다.
그 가운데 한 문장입니다.
2
So wird handgreiflich, daß es eine andere Natur ist, die zu der Kamera als die zum Auge spricht.
3
81쪽, 번역문:
이리하여 카메라에게 말을 거는 자연은 육안에게 말을 거는 자연과는 다른 것이라는 점이 명확해진다.
→ 이리하여 카메라에게 말을 거는 특성은 육안에게 말을 거는 특성과는 다른 것이라는 점이 명확해진다.
4
무언가 착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여기서 ‘Naur’는 ‘자연’이 아닙니다.
자연(自然)은, 정관사 die와 함께 씁니다: die Natur.
부정관사―eine―와 함께 쓰면, ‘특성’이나 ‘본질’을 의미합니다.
5
기존 번역본을 살펴보겠습니다:
① 따라서 카메라에 나타나는 것은 육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임이 분명하다.(반성완)
② 따라서 카메라에 나타나는 것은 육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임이 분명하다.(최성만)
③ 이렇게 볼 때 카메라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과 육안을 통해서 포착되는 것은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점이 쉽게 이해될 수 있겠다.(차봉희)
6
하지만, 반성완과 최성만도 유사한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벤야민의 다른 글, <사진의 작은 역사>에 위쪽의 독일어 원문과 비슷한 대목이 나옵니다.
(벤야민은 이 대목을 나중에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2판 16절과, 3판 13절에 끼워 넣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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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 ist ja eine andere Natur, welche zur Kamera als zum Auge spricht [...]
① 카메라에 비치는 자연은 눈에 비치는 자연과 다르기 때문이다.(반성완)
→ 카메라에 비치는 특성은 눈에 비치는 특성과 다르기 때문이다.
② 카메라에 비치는 자연은 눈에 비치는 자연과 다른 법이다.(최성만)
→ 카메라에 비치는 특성은 눈에 비치는 특성과 다른 법이다.
8
김화영은 알베르 카뮈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기존 번역본―특히, 이휘영의 번역―을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번역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선학(先學)들이 축적해 놓은 원문 텍스트 이해와 한국어 표현 가능성을 살펴보고, 그 토대 위에서 자신의 이해와 표현 가능성을 확장해 가는 번역 방법과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박진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