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부쉬, 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역주 오류

 

그러나 1914년 자신의 자유주의 스승들이 <전쟁(1차 세계대전)을 대단히 진지하게 하나님의 계시>라고 공언하는 것을 듣게 되었을 때, 바르트는 계시 개념의 그런 사용은 의문시되기 시작했다. 이미 1914년에 그랬던 것처럼, 이후 1933년에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이 <독일의 시간>(Deutsche Stunde, 1933년 바이에른의 라디오 방송역자 주)을 어떤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했던 것과 관련해서도 바르트는 정치적 입장의 정당성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종교적 진술의 신학적 정당성을 물었다. 즉 전쟁 혹은 <독일의 시간>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든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에 무엇을 더 추가할 수 있는가? 그런 표현은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허가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계시>라고 부르는 것 안에는 이전에 이미 계시 없이 형성된 인간적 사상과 관심만이 반영되어 나타나지 않는가?”(118, 문장부호 수정인용)

 

그러나 1914년 자신의 자유주의 스승들이 <전쟁(1차 세계대전)을 대단히 진지하게 하나님의 계시>라고 공언하는 것을 듣게 되었을 때, 바르트는 계시 개념의 그런 사용은 의문시되기 시작했다. 이미 1914년에 그랬던 것처럼, 이후 1933년에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이 <독일의 시간>(deutsche Stunde, 1933년 히틀러 집권과 더불어 나치즘과 독일 민족적 고유성이 현실 정치의 원리로 작동하던 시기)을 어떤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했던 것과 관련해서도 바르트는 정치적 입장의 정당성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종교적 진술의 신학적 정당성을 물었다. 즉 전쟁 혹은 <독일의 시간>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든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에 무엇을 더 추가할 수 있는가? 그런 표현은 인간이 자신의 생각을 허가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계시>라고 부르는 것 안에는 이전에 이미 계시 없이 형성된 인간적 사상과 관심만이 반영되어 나타나지 않는가?”

 

독일어 원문: [...] Und er[=Barth] begann schon 1914 so, wie er es dann auch 1933 angesichts des Verständnisses der »deutschen Stunde« als einer neuen Gottesoffenbarung bei den Deutschen Christen tat, nicht nach der Richtigkeit der politischen Stellungnahme zu fragen, sondern nach der theologischen Richtigkeit jener religiösen Aussage: Was fügt die Bezeichnung des Krieges oder der deutschen Stunde eigentlich der Meinung, die die Menschen ohnehin schon von diesen Vorgängen haben, hinzu - außer dem, daß sie ihre Meinung sanktioniert? [...]

 

독일의 시간’(deutsche Stunde)의 역주를 바로잡았다.

 

독일 신학자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교회의 독일의 시간(Die deutsche Stunde der Kirche, 1933)을 참고할 것:

 

“Unsere evangelischen Kirchen haben die deutsche Wende von 1933 als ein Geschenk und Wunder Gottes begrüßt.”

 

아울러, H. G. 푈만의교의학(이신건 옮김, 신앙과지성사, 2012) 77-79쪽 글, ‘-계시와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을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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