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원한 상호 관계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오직 하나님 안에 근거하며, 결코 ‘하나님 우리안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Die ewige Korrelation zwischen Gott und uns, wie sie in Gottes Offenbarung sichtbar ist, ist in Gott allein und nicht etwa in Gott und in uns begründet.

 

The eternal correlation between God and us, as shown in God’s revelation, is grounded in God alone, and not partly in God and partly in us.

 

KD /1,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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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신학은 하나님을 희생하고서는 인간에 관해 올바르게 말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님에 관해 말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에 관해서도 올바르게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를 바르트는 디도서 3:4에 따라 <하나님의 인간성>(Menschlichkeit Gottes)이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은 바르트 신학에서 성서적 개념인 계약(/1, 2-4)과 동일한 뜻이며, 또한 <임마누엘>(/1, 2-4)이라는 구약성서의 표현과도 같은 의미인데, 임마누엘은 마태복음 1:23에 따르면 예수의 이름이고 그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다”(161-162, 문장부호 수정인용)

 

신학은 하나님을 희생하고서는 인간에 관해 올바르게 말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님에 관해 말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에 관해서도 올바르게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를 바르트는 디도서 3:4에 따라 <하나님의 인간성>(Menschlichkeit Gottes)이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은 바르트 신학에서 성서적 개념인 언약(/1, 36)과 동일한 뜻이며, 또한 <임마누엘>(/1, 2-4)이라는 구약성서의 표현과도 같은 의미인데, 임마누엘은 마태복음 1:23에 따르면 예수의 이름이고 그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다

 

독일어 원문: [...] Das Gemeinte brachte Barth nach Tit. 3,4 auf die Formel von der »Menschlichkeit Gottes«, die für ihn dasselbe sagt wie der biblische Begriff des Bundes (/1, 36) und dasselbe wie die alttestamentliche Aussage, die nach Matth. 1,23 der Name Jesu ist: »Immanuel, das ist verdolmetscht: Gott mit uns« (/1, 2-4).

 

출전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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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이 연대성은 한편으로는 신학자가하나님 인식의 시작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실행하는 시작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해서처음부터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신학자는 이미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고 <믿음 없는 자를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1, 104f.).”(159, 문장부호 수정인용)

 

이 연대성은 한편으로는 신학자가하나님 인식의 시작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실행하는 시작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해서처음부터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신학자는 이미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고 <불신앙 가장 우선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1, 104f.).”

 

독일어 원문: Sie besteht einerseits darin, daß der Theologe wie er angesichts dessen bekennen muß, daß der Anfang der Gotteserkenntnis nicht ein von uns mit Gott gemachter ist sich darum gar nie erst zum anderen zuwenden muß, weil er immer schon bei ihm ist, weil er »den Unglauben zuerst und vor Allem in sich selbst« findet (/1, 104 f.).

 

der Unglaube / der Unglauben = 불신앙,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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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하나님과 인간을 <존재>라는 포괄적 괄호 안에 묶어 놓고, 그 힘으로 인간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와는 달리, 그 유비는 <믿음의 유비 또는 관계의 유비>(analogia fidel sive revelationis)[...]로 이해될 수 있다.”(157-158, 문장부호 수정 및 부분삭제 인용)

 

하나님과 인간을 <존재>라는 포괄적 괄호 안에 묶어 놓고, 그 힘으로 인간이 자신을 미루어 하나님을 추론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와는 달리, 그 유비는 <믿음의 유비 또는 관계의 유비>(analogia fidel sive revelationis)[...]로 이해될 수 있다.”

 

독일어 원문: [...], kraft der der Mensch von sich auf Gott schließen kann, [...]

 

von sich auf Gott schließen = 자기 자신을 미루어 하나님을 추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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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어쨌든 바르트에게는 다음의 명제가 신학의 진리다. <사유한다는 것(Denken)은 곧 차후(次後)적으로 성찰한다는 것(Nachdenken)을 의미한다.”(157, 문장부호 수정인용)

 

어쨌든 바르트에게는 다음의 명제가 신학의 진리다. <사유한다는 것(Denken)은 곧 뒤따라 성찰한다는 것(Nachdenken)을 의미한다.”

 

독일어 원문: Es gilt für Barth jedenfalls von der Theologie: »Denken heißt: Nachdenken.«

 

151쪽의 소제목을 볼 것:

 

뒤따라-성찰하기(Nach-denklich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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