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누락

 

같은 해[1522] 10월 네덜란드의 총독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폰 오스트리아(Margarete von Österreich)는 도처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들 중 세 사람이 71일 브뤼셀 대시장의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들은 종교개혁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는 영예를 얻었다.(37-38)

 

같은 해[1522] 10월 네덜란드의 총독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Margarete von Österreich)는 도처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들 중 세 사람이 자신들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을 거부했고, 두 명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 헨드릭 푀스와 요한 판 덴 에쉔은 1523 71일 브뤼셀 대시장의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들은 바로 루터 종교개혁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는 영예를 얻었다.

 

독일어 원문: Im Oktober desselben Jahres ordnete die Statthalterin der Niederlande, Margarete von Österreich, die Festnahme der übrigen Augustinermönche an. Drei von ihnen weigerten sich, ihrem Glauben abzuschwören, und zwei Augustinermönche, Hendrik Voes und Johann van den Esschen, wurden am 1. Juli 1523 auf dem Großen Markt in Brüssel auf dem Scheiterhaufen verbrannt. Sie wurden umgehend als die ersten Märtyrer der lutherischen Reformation verehrt.

 

문장의 빠진 부분을 보완했다.

 

아울러, 인명도 바로잡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1522년 여름 야콥의 후임자로 취임한 하인리히 폰 취트펜(Heinrich von Zütphen, c.14881524) 또한 비텐베르크에서 수학하고, 루터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그 역시 루터의 교리를 설교했으며, 1522922일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며칠 만에 분개한대다수 여성들로 구성된지지자들에 의해 풀려났고 안트베르펜을 떠나 비텐베르크로 향하게 되었다.(37-38)

 

1522년 여름 야콥의 후임자로 취임한 하인리히 폰 취트펜(Heinrich von Zütphen, c.14881524) 또한 비텐베르크에서 수학하고, 루터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그 역시 루터의 교리를 설교했으며, 1522922일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다음 날 분개한대다수 여성들로 구성된지지자들에 의해 풀려났고 안트베르펜을 떠나 비텐베르크로 향하게 되었다.

 

독일어 원문: Heinrich von Zütphen (um 14881524), der im Sommer 1522 die Nachfolge Propsts als Prior antrat, hatte ebenfalls in Wittenberg studiert und war mit Luther bekannt. Auch er predigte Luthers Lehren und wurde am 29. September 1522 inhaftiert. Tags darauf wurde er von einer Gruppe aufgebrachter Anhänger, zum Großteil Frauen, befreit und verließ Antwerpen in Richtung Wittenberg.

 

tags darauf = am darauffolgenden Tag = 그다음 날

 

 

 

Heinrich von Zütphen (um 148815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그러나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부터 이미 스위스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종교개혁의 징조가 나타났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들이 알려지고 이러한 사상에 상응하는 종교개혁에 대한 욕구가 고취되었다. 특히 대학도시인 영국의 옥스퍼드 주변 도시에서(무엇보다 존 위클리프에 의해), 프라하에서(얀 후스에 의해), 그 이전에는 프랑스 리용의 페트루스 발도(Petrus Waldes)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종교개혁에 대한 요구가 고조되었다.(19)

 

그러나 독일 스위스,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00여 년 전부터 이미 종교개혁의 징조가 나타났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들이 알려지고 이러한 사상에 상응하는 종교개혁에 대한 욕구가 고취되었다. 특히 대학도시인 옥스퍼드(무엇보다 존 위클리프에 의해)와 프라하(얀 후스에 의해)를 중심으로, 그 이전에는 프랑스 리옹의 페트루스 발도(Petrus Waldes)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종교개혁에 대한 요구가 고조되었다.

 

독일어 원문: Doch bereits mehr als hundert Jahre vor der Reformation in Deutschland, in der Schweiz und anderen Ländern Europas gab es Reformansätze und wurden verschiedene ihrer zentralen Erkenntnisse gewonnen und entsprechende Reformforderungen erhoben, besonders im Umkreis der Universitäten Oxford (vor allem von John Wyclif) und Prag (von Jan Hus), früher noch in Lyon von Waldes und den Waldensern.

 

vor der Reformation in Deutschland, in der Schweiz und anderen Ländern Europas

 

= 독일과 스위스,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일어났던 종교개혁 이전에

 

im Umkreis der Universitäten Oxford [...] und Prag

 

= 대학도시 옥스퍼드와 프라하를 중심으로

 

문장을 바로잡았다.

 

아울러, 지명 표기도 바로잡았다:

 

Lyon = 리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초기의 종교개혁은 종종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기억할 필요가 없는 역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신앙하는 바를 증언하기 위해 죽음마저 불사한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를 결코 사소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교개혁의 위대한 창시자들과 갱신운동가들이 드러내놓고 활동하던 것 못지않게 종교개혁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다.(5)

 

초기의 종교개혁은 종종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기억할 필요가 없는 역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신앙하는 바를 증언하기 위해 죽음마저 불사한 사람들은 종교개혁의 위대한 창시자들과 갱신운동가들로 간주되는 사람들 못지않게 이 종교개혁의 역사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독일어 원문: [...] oft sind die reformatorischen Anfänge sogar blutig erstickt worden. Aber das ändert nicht das Geringste daran, dass diese Geschichte in Erinnerung gehalten werden muss. Denn Menschen, die für ihre Glaubensüberzeugung in den Tod gegangen sind, haben diese Geschichte nicht weniger geprägt als jene, die als die großen Ideengeber und Organisatoren der Erneuerung in Erscheinung traten.

 

Menschen, [...], haben diese Geschichte nicht weniger geprägt als jene

 

= 사람들은 저 사람들 못지않게 이 역사를 형성했다.

 

die als die großen Ideengeber und Organisatoren der Erneuerung in Erscheinung traten

 

= 저 사람들은 갱신의 위대한 사상적 주창자와 조직자들로 드러났다.

 

문장을 바로잡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귄터 그라스,양파 껍질을 벗기며, 장희창안장혁 옮김, 민음사, 2015(5).

 

그의 곁에는 다른 책들도 쌓여 있다. 수집한 담뱃갑 그림들로 기초를 다진 예술 관련 지식을 늘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눈길 한번 돌리지 않은 채 그는 막스 클링거를 다룬 책을 옆으로 치우고 곧장 다른 책을 펼친다.

 

소년은 처음에는 화가이자 조각가이자 소묘가인 클링거의 다면성을 칭송하지만, 다른 책을 보고 카라바조의 거친 생애에 매혹당한 후로는 안젤름 포이어바흐의 아틀리에에서 배우는 학생이 되기를 염원한다. 그는 독일계 로마인을 선호한다. 그는 예술가가 되기를 원하고, 무엇보다도 유명해지기를 원한다.(62)

 

소년은 크낙푸스의 예술가 시리즈를 보고, 처음에는 화가이자 조각가이자 소묘가인 클링거의 다면성을 칭송하지만, 다른 책을 보고 카라바조의 거친 생애에 매혹당한 후로는 안젤름 포이어바흐의 아틀리에에서 배우는 학생이 되기를 염원한다. 그는 로마 거주 독일 예술가들 선호한다. 그는 예술가가 되기를 원하고, 무엇보다도 유명해지기를 원한다.

 

독일어 원문: [...] der anhand der Knackfuß-Bände zuerst Klingers Vielseitigkeit, den Maler, Bildhauer, den Zeichner bewundert, sich jetzt aber, nachdem ihn in einem weiteren Band Caravaggios wüster Lebenslauf fasziniert hat, als Schüler in Anselm Feuerbachs Atelier wünscht. Zur Zeit gilt seine Vorliebe den Deutschrömern. Künstler und berühmt will er werden, unbedingt.

 

Deutschrömer = 18세기 말과 19세기, 로마에 거주했던 일군의 독일 예술가들

 

예를 들면, J. A. Koch, Arnold Böcklin, Adolf von Hildebrand, Hans von Marées

 

여기 언급된 안젤름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 1829-1880)도 로마 거주 독일 예술가.

 

아울러, 빠진 부분을 보완했다.

 

 

참고로, 펠하겐과 클라징 출판사(Velhagen & Klasing)에서 나온 이 예술가 시리즈의막스 클링거(시리즈 번호 41)안젤름 포이어바흐(시리즈 번호 76)의 저자는 헤르만 크낙푸스가 아니라, 에두아르트 하이크(Eduard Heyck)와 막스 슈미트(Max Schmid).

 

 

 

안젤름 포이어바흐, 자화상, 18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