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두 번째 얼굴은 상황(kontextuelle) 신학 프로그램이다. 여기서도 바르트는 신학이 비신학적인 상황들과 관련을 맺는 것 그 자체를 배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신학이 <계시를 이성, 실존, 창조, 또는 그 외의 다른 어떤 주체와의 관계 속에 있다고 보는 것그리고 생각하고 말하면서 그것들과 관련짓는 것>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르트는 계시를 상황과 <관련시켜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학은 계시를 기준으로 삼아 다른 주체들을 해석해야지, 다른 주체들을 기준으로 삼아 계시를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142, 문장부호 수정인용)

 

두 번째 얼굴은 상황(kontextuelle) 신학 프로그램이다. 여기서도 바르트는 신학이 비신학적인 상황들과 관련을 맺는 것 그 자체를 배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신학이 <계시를 이성, 실존, 창조, 또는 그 외 다른 핵심 개념이 이제 무엇이든 간에 그 개념과의 관계 속에 있다고 보는 것그리고 생각하고 말하면서 그것들과 관련짓는 것>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르트는 계시를 상황과 <관련시켜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학은 계시를 기준으로 삼아 다른 핵심 개념들을 해석해야지, 다른 핵심 개념들을 기준으로 삼아 계시를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독일어 원문: Ein anderes Gesicht ist das Programm einer kontextuellen Theologie. Nicht an sich einen Bezug der Theologie auf nichttheologische Kontexte bestritt Barth, nicht dies, daß sie »die Offenbarung in Beziehung sieht und denkend und sprachend in Beziehung setzt (in Beziehung setzen muß!) - zur Vernunft, Existenz, Schöpfung oder wie die andere Instanz nun heißen mag.« Aber dafür stritt er, »daß sie jene andern Instanzen nach Maßgabe der Offenbarung und nicht etwa die Offenbarung nach Maßgabe jener andern Instanzen interpretieren« soll.

 

wie die andere Instanz nun heißen mag = 다른 핵심 개념들이 이제 무엇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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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바르트가 그렇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자기 인식과 인간의 하나님 인식 사이에 있는 <유사성> 그 자체를 배격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미리 주어져 있다고 전제되는 존재적 동질성에 근거하여 그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유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선사하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식을 하나님 자신의 인식에 상응하도록 만드시기 때문이다(/1, 254ff.).”(141-142, 문장부호 수정인용)

 

바르트가 그렇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자기 인식과 인간의 하나님 인식 사이에 있는 <유사성> 그 자체를 배격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미리 주어져 있다고 전제되는 존재적 동질성에 근거하여 그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미루어 하나님을 추론할 수 있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유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선사하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식을 하나님 자신의 인식에 상응하도록 만드시기 때문이다(/1, 254ff.).”

 

독일어 원문: Dies nicht, weil er an sich eine »Ähnlichkeit« zwischen der Selbsterkenntnis Gottes und der menschlichen Gotteserkenntnis bestritt. Dies aber wegen der These, es gebe solche Ähnlichkeit aufgrund einer vorgegebenen seinsmäßigen Verwandtschaft von Gott und Mensch, so daß dieser von sich aus auf Gott schließen könne.

 

von sich aus auf Gott schließen = 자기 자신을 미루어 하나님을 추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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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누락(19)

 

그러나 그런 어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지고의 존재의 총괄개념에 그친다. 그런 어떤 하나님이란 실상은 인간 자신의 고유한 존재의 한 가지 <요소>이고 거짓-신이며 <우상>이다.”(139, 문장부호 수정인용)

 

그러나 그런 어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지고의 존재의 총괄개념에 그친다. 그런 어떤 하나님이란 실상은 인간 자신의 고유한 존재의 한 가지 <요소>이고(157) 거짓-신이며 <우상>이다.”

 

독일어 원문: Aber als der Inbegriff des Höchsten, das der Mensch sich selbst wählen und schaffen kann, ist dieser Gott in Wahrheit nur ein »Element« seiner eigenen Existenz (157), ein Nicht-Gott, »ein Götze, [...]«

 

빠진 출전KD /1, 157을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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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누락(18)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에게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반면에 자연신학에서는 이스라엘을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말해 보편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보다 앞세우는 틀 안에서, 자연신학은 신약성서도 오해하게 된다.”(137)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에게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반면에 바르트가 보기에, 자연신학에서는 이스라엘을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특징적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말해 보편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보다 앞세우는 틀 안에서, 자연신학은 신약성서도 오해하게 된다.”

 

독일어 원문: [...] weshalb für Barth die Christusoffenbarung unablösbar von der Geschichte Israels ist, während für ihn die Ablösung Israels von der Kirche gerade für die natürliche Theologie bezeichnend ist. Diese mißversteht damit aber auch das Neue Testament, nämlich im Rahmen eines Vorrangs des Allgemeinen vor dem Konkreten, [...]

 

빠진 부분für ihn[=Barth]을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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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계시에 의존하는 신학에서는 (1) 가능성에 대한 현실성의 무조건적인 우위가 인정된다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주셨으며 또 지금도 내어주신다는 사실에 근거한다.”(136)

 

각주 26: K. H. Miskotte, Über Karl Barth KD, 39

 

계시에 의존하는 신학에서는 (1) 가능성에 대한 현실성의 무조건적인 우위가 인정된다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주셨으며 또 지금도 내어주신다는 사실에 근거한다.”(136)

 

각주 26: K. H. Miskotte, Über Karl Barths KD, 39.

 

출전 오류를 바로잡았다.

 

‘39’ 뒤에 저자가 빠뜨린 마침표를 찍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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