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교의학은 <프로레고메나>(Prolegomena, 서론)로 시작한다. 19세기의 교의학은 그것을 일반적·인간적인 그리고 인간적·종교적인 전제들, <신앙론>을 가능하게 만드는 전제들을 미리 서술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바르트는 자신의 교의학에서 프로레고메나를 이와 정확하게 반대로 이해하면서 곧바로 북소리를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프로레고메나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전제 아래서) 내용과의 연속성 안에서 단지 앞서(zuerst) 말하는 것이며, (믿음의 전제 없이 이성적으로) 내용과 독립적으로(vorher) 믿음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다>(KD /1, 41)”(88, 인용부호 수정인용)

 

교의학은 <프로레고메나>(Prolegomena, 서론)로 시작한다. 19세기의 교의학은 그것을 일반적·인간적인 그리고 인간적·종교적인 전제들, <신앙론>을 가능하게 만드는 전제들을 미리 서술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바르트는 자신의 교의학에서 곧바로 파문을 일으키며, 즉 기존 이해와 정확히 반대되는 프로레고메나의 이해로 시작했다. 프로레고메나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전제 아래서) 내용과의 연속성 안에서 단지 앞서(zuerst) 말하는 것이며, (믿음의 전제 없이 이성적으로) 내용과 독립적으로(vorher) 믿음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다>(KD /1, 41)”

 

독일어 원문: [...] Barth hebt in seinem Werk gleich mit einem Paukenschlag an, mit einem dem genau entgegengesetzten Verständnis der Prolegomena: [...]

 

Paukenschlag = Eklat = 파문, 센세이션

 

독일어 <Duden>사전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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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크리스토퍼 프라이(Chr. Frey)는 바르트와 틸리히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틸리히는 <새로운 목재들을 가지고 낡은 건축구조를 축조하는 반면에바르트는 낡은 목재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구조물을 만들어낸다.> 다른 비유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교회교의학움직였던 그 지형 위에서 그것이 앞으로 나아갔던 길들로부터, 하나의 지도를 그려보려고 시도할 것이다.”(88, 문장부호 수정인용)

 

크리스토퍼 프라이(Chr. Frey)는 바르트와 틸리히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틸리히는 <새로운 목재들을 가지고 낡은 건축구조를 축조하는 반면에바르트는 낡은 목재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구조물을 만들어낸다.> 다른 비유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제교회교의학통과해 움직였던 그 풍경들과교회교의학이 앞으로 나아갔던 그 길들의 지도 그려보려고 시도할 것이다.”

 

독일어 원문: [...] Es sei versucht, noch einmal in jenem anderen Bild gesprochen, eine Landkarte von den Landschaften zu zeichnen, durch die diese Dogmatik sich bewegt, und von den Wegen, auf denen sie hier vorwärtsgeht.

 

eine Landkarte von A und B zu zeichnen

 

= AB의 지도를 그리다.

 

A = von den Landschaften zu zeichnen, durch die diese Dogmatik sich bewegt

 

B = von den Wegen [zu zeichnen], auf denen sie hier vorwärtsgeht.

 

Landschaft = 풍경

 

지형 = Bodengestalt, Bodenbeschaffen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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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자신의 교의학을 여전히 계속 또 계속해서 집필하고 있었던 노년의 바르트를 향해 폰 발타자르(H. U. von Balthasar)<그대, 영원한 풍요의 뿔(Füllhorn)이여!>¹³라고 외쳤다. 만일 우리가 바르트의 글쓰기 작업을 지속시켰던 영혼(psychischen)의 원동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다음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85, 문장부호 수정인용)

 

자신의 교의학을 여전히 계속 또 계속해서 집필하고 있었던 노년의 바르트를 향해 폰 발타자르(H. U. von Balthasar)<그대, 영원한 풍요의 뿔(Füllhorn)이여!>¹³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가 바르트의 글쓰기 작업을 지속시켰던 영혼(psychisch)의 원동력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다음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각주 163: E. Busch, Lebenslauf, 391. 비교. KD /1, 83ff.

 

각주 163: E. Busch, Lebenslauf, 457.

 

독일어 원문: »Sie ewiges Füllhorn!«¹³, sagte H. U. von Balthasar zum alten Barth, der an seiner Dogmatik immer noch weiter und weiter schrieb. Aber wir verstehen nicht nur den psychischen Motor nicht, der das Schreiben in Gang hielt, [...]

 

각주 출전을 바로잡았다. (비교. KD /1, 83ff.는 삭제할 것.)

 

아울러, 병기된 독일어psychisch도 수정했다.

 

형용사<독일어사전 표제어>에 따른, 기본형을 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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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각주: 156 So der Titel seines Berichts darüber: Zürich, 1967.

 

각주: 157 A.a.O., 41.

 

각주 157 같은 곳, 41.

 

각주: 158 같은 곳,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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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

 

바르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1960년대에 비친 희망의 표징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거기서 <‘회심의 형태>가 새롭게 이해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회심<다른 종파에 속한 교회로의 회심이 아니라, 하나의 보편적, 사도적 교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의 회심>이었으며, <그분의 교회 안에서 오직 한 분이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께 대한 봉사로 부르심>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회심을 의미했다.”(81, 문장부호 수정인용)

 

바르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1960년대에 비친 희망의 표징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거기서 <‘개종의 형태>가 새롭게 이해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개종<다른 종파에 속한 교회로의 개종이 아니라, 하나의 보편적, 사도적 교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의 개종>이었으며, <그분의 교회 안에서 오직 한 분이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께 대한 봉사로 부르심>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개종을 의미했다.”

 

독일어 원문: Er[=Barth] sah das Konzil als das Hoffnungszeichen der sechziger Jahre, weil er dort erkannt fand: eine Erneuerung in der »Gestalt von Konventionnicht zu einer anderen Kirche, sondern zu Jesus Christus, dem Herrn der einen, katholischen und apostolischen Kirche«, in der bereitschaft, sich »in seiner Kirche zum Glauben an den einen Herrn und in seinen Dienst rufen« zu lassen.

 

Konversion = ‘개종

 

<천주교 용어 사전>의 표제어, ‘개종(改宗)’을 참고할 것:

 

이는 일반적으로 종래 자신이 신봉하던 종교를 떠나 새로운 종교에 입문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을 받아들여 그분을 자신의 삶의 중심으로 삼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이며 은총이다. 특히 한국 가톨릭의 통념으로는 개신교, 불교, 유교 등의 신자가 가톨릭으로 입교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개종이라는 말은 종교적 전향(轉向)에 한정하는 언어 습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므로 적절치 않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개종이란 말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와의 완전한 교류(交流)로 들어간다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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