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1548년 남편 마테우스 젤이 죽었을 때, 카타리나는 부처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말씀을 마음에 붙잡고 그 말씀을 함께 모인 사람들에게 증거했다. 하지만 신의 입장 표명이 설교로는 충족될 수 없었기에, 그녀는 책으로 출판했다. 그 안에서 카타리나는 설교자나 제자의 직무를 감당하기를 원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오직 사랑의 막달라 마리아(Maria Magdalena)처럼 깊이 고뇌하지 않고 사도가 되며 그리고 주님의 인도함을 받아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521)

 

1548년 남편 마테우스 젤이 죽었을 때, 카타리나는 부처의 장례 설교 후에 직접 말씀을 모인 사람들에게 증거했다. 하지만 그녀의 설교가 논란거리가 되었기에, 그녀는 또한 글을 한 편 발표했다. 이 글에서 카타리나는 설교자나 사도의 직분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직 친애하는 막달라 마리아(Maria Magdalena)처럼 자기가 의도치 않게 사도가 되어 주님 자신의 강권으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기를 원한다.”라고 강조했다.

 

독일어 원문: Als im Januar 1548 ihr Mann Matthäus Zell starb, ergriff Katharina nach der Grabrede Bucers selbst das Wort und wandte sich an die Gemeinde. Da ihre „Predigt“ für Unmut gesorgt hatte, gab sie noch eine Schrift heraus. Darin betont sie, dass sie nicht das Amt des Predigers oder des Apostels bekleiden wollte, „sondern allein wie die liebe Maria Magdalena ohne Vorbedacht ihrer Gedanken zu einer Apostolin ward und vom Herrn selbst gedrungen den Jüngern zu sagen, dass Christus auferstanden wäre“.

 

nach der Grabrede Bucers = 부처의 장례 설교 후에

 

마르틴 부처(1491-1551)의 생몰 연도를 볼 것:

 

현재 시점은 1548. 부처의 묘비는 아직 존재하지 않음.

 

 

das Wort ergreifen = 말씀을 전하다

 

für Unmut sorgen = 논란을 야기하다, 논란거리가 되다

 

das Amt bekeiden = 관직을 차지하다

 

ohne Vorbedacht ihrer Gedanken = 그녀 생각의 고려 없이

 

vom Herrn selbst gedrungen = 주님 자신의 강권으로

 

단어와 문장을 바로잡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그녀[=카타리나 젤]는 루터에게 편지를 써서 성만찬 논쟁을 중재하려고 했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루터로부터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들어야 했다. “당신이 알다시피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어야 하며 우선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또한 사랑 위에 계십니다.”(521)

 

그녀[=카타리나 젤]는 루터에게 편지를 써서 성만찬 논쟁을 중재하려고 했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루터로부터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들어야 했다. “당신이 알다시피 사랑은 모든 을 능가하며 우선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을 능가하며 또한 사랑을 능가합니다.”

 

Mit einem Brief an Luther mischte sie sich sogar direkt in den Abendmahlsstreit ein. Ohne Erfolg: „Ihr wisst, dass wohl die Liebe soll über alles gehen und den Vortritt haben, ausgenommen Gott, der über alles, auch über die Liebe ist“, so Luthers Antwort.

 

über alles gehen = 모든 것을 능가하다

 

전치사 über 뒤에 오는 단어의 격()에 주의할 것:

 

über + 4= 위로, 넘어

 

über + 3= 위에

 

여기서는 모두 4.

 

문장을 바로잡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15244월에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결혼한 성직자들은 주교가 머물고 있는 사베르네(Saverne) 호출받은 후 출교당했다.(519)

 

15244월에 스트라스부르의 결혼한 성직자들은 주교가 머물고 있는 사베른(Saverne) 호출받은 후 출교당했다.

 

독일어 원문: Im April 1524 wurden die verheirateten Straßburger Priester vom Straßburger Bischof nach Zabern (Saverne) vorgeladen und exkommuniziert.

 

1525년 농민전쟁 중 카타리나는 자베른(Zabern)에서 발생한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전쟁난민들을 구제했다.(521)

 

1525년 농민전쟁 중 카타리나는 사베른(Saberne)에서 발생한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전쟁난민들을 구제했다.

 

독일어 원문: Während des Bauernkriegs 1525 sorgte sie für die Kriegsflüchtlinge, die das Massaker in Zabern überlebt hatten; [...]

 

Zabern = Saverne = 사베른

 

= 프랑스 북동부 도시

 

지명을 바로잡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결혼한 지 1년이 되던 해 150명이 넘는 신앙 망명자들이 남부 바덴의 켄칭겐(Kenzingen)을 떠나 스트라스부르크로 왔을 때, 카타리나는 목사관에 80여 명의 사람들을 받아들여 4주 동안 60여 명을 돌봐주었다. 카타리나는 신앙 망명자들의 부양에만 관심을 쏟은 것이 아니라 켄칭겐으로 다시 돌아간 여성들에게 한 통의 위로편지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520)

 

결혼한 지 1년이 되던 해 150명의 신앙 망명자들이 남부 바덴의 켄칭엔(Kenzingen)을 떠나 스트라스부르로 왔을 때, 카타리나는 목사관에 80여 명의 사람들을 받아들여 4주 동안 60여 명을 돌봐주었다. 카타리나는 신앙 망명자들의 부양에만 관심을 쏟은 것이 아니라 켄칭엔에 남아 있는 여성들에게 한 통의 위로편지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Ein Jahr nach ihrer Eheschließung, als 150 Glaubensflüchtlinge aus dem südbadischen Kenzingen nach Straßburg kamen, brachte Katharina 80 von ihnen in ihrem Pfarrhaus unter und versorgte bis zu 60 Personen vier Wochen lang. Katharina kümmerte sich nicht nur um die Versorgung der Glaubensflüchtlinge, sondern verfasste auch einen Trostbrief an die zurückgebliebenen Frauen in Kenzingen.

 

die zurückgebliebenen Frauen in Kenzingen

 

= 켄칭엔에 남아 있는 여성들

 

단어와 도시 이름을 바로잡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하엘 벨커 외,종교개혁,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김재진 외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7(10).

 

1498년경 초에 카타리나는 가구 제작 장인인 야콥 쉬츠(Jakop Schütz)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게르스터(Elisabeth Gerster)의 딸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 카타리나는 한 논쟁적인 서신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10살 이후 나는 한 교회 어머니’(Kirche-Mutter)였고모든 교사들을 존경하여 많이 찾아갔으며,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이, , 세속적 즐거움, 사육제보다 좋았다.”라고 밝혔다.(518)

 

1498년경 초에 카타리나는 가구 제작 장인인 야콥 쉬츠(Jakob Schütz)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트 게르스터(Elisabeth Gerster)의 딸로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났다. [...] 카타리나는 한 변증론적인 서신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10살 이후 나는 한 교회 어머니’(Kirchen-Mutter)였고모든 교사들을 존경하여 많이 찾아갔으며,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이, , 세속적 즐거움, 사육제보다 좋았다.”라고 밝혔다.

 

독일어 원문: Katharina wurde - wahrscheinlich Anfang 1498 - als Tochter eines Schreinermeisters, Jakob Schütz, und seiner Frau, Elisabeth Gerster, in Straßburg geboren. [...] „Ich bin, seit ich zehn Jahr alt, eine Kirchen-Mutter, [] habe alle Gelehrten geliebt, viel besucht, und mit ihnen mein Gespräch - nicht von Tanz, Weltfreuden noch Fassnacht - sondern vom Reich Gottes gehabt“, schrieb sie später in einem apologetischen Brief.

 

번역문에 병기된 독일어 철자를 바로잡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