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하르트 부쉬,『위대한 열정』, 박성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2쇄).
바르트는, 시간의 흐름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그것에 무한성을 부여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가 동일한 도식 안에서 일어나는 변주라고 본다. 다시 말해 인간은 고대 그리스인의 방식에 따라 “어떤 무한한 존재자의 세계 안에서 자신의 기원과 관련을 맺게 된다”라고 생각하거나 , 아니면 “매 ‘순간’ 영원하다”(슐라이어마허)는 점에서 자신에게 하나님과의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기술 시대 안에 있는 인간은 “무한한 진보라는 표상”에 헌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들은 하나님이 마치 자신을 유한한 모든 것과 구분하기를 열망하시고, 자신이 여전히 그렇게 구분되는 무한성에 머물러 있음을 확실히 감독하시려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471쪽)
→ 바르트는, 시간의 흐름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그것에 무한성을 부여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가 동일한 도식 안에서 일어나는 변주라고 본다. 다시 말해 인간은 고대 그리스인의 방식에 따라 “어떤 무한한 존재자의 세계 안에서 자신의 기원과 관련을 맺게 된다”라고 생각하거나 , 아니면 “매 ‘순간’ 영원하다”(슐라이어마허)는 점에서 자신에게 하나님과의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기술 시대 안에 있는 인간은 “무한한 진보라는 표상”에 헌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Ⅲ/2, 622). 그 변주는 하나님이 질투가 나서 유한한 모든 것과 달리 무한자가 지속되는 것에 대해 감시하신다는 것은 아니다!
독일어 원문: Und es sind für Barth nur Variationen im selben Schema, ob nun der Mensch seiner als flüchtig gefürchteten Zeit so Unendlichkeit zu verleihen sucht, daß er sich nach altgriechischer Weise eine »Beziehung zu seinem Ursprung in einer Welt des unendlich Seienden« ersinnt, oder so, daß er sich eine Gottähnlichkeit denkt, in der er »je im ›Augenblick‹ auch ewig« ist (Schleiermacher), oder so, daß er sich wie in der Ära der Technik der »Vorstellung eines unendlichen Fortschritts« hingibt (622). Nicht als ob Gott eifersüchtig darüber wachte, im Unterschied zu allem Endlichem der Unendliche bleiben zu dürfen!
• nicht als ob Gott eifersüchtig darüber wachte, im Unterschied zu allem Endlichem der Unendliche bleiben zu dürfen!
= (그 변주는) 하나님이 질투가 나서 유한한 모든 것과 달리 무한자가 지속되는 것에 대해 감시하신다는 것은 아니다!
• 빠진 출전을 보완하고, 문장을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