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옐레,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이용주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6(3).

 

우리는 세웠다네

국가라는 큰 집을

하나님을 신뢰하며

악천후와 폭풍,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 집은 무너질지 모르나

그것이 대체 무슨 난관이랴

우리 모두 안에는 정신이 살아 있고

하나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니!”(37)

 

우리는 세웠다네

한 웅장한 집을

하나님을 신뢰하며

악천후와 폭풍, 공포에도 불구하고

그 집은 무너질지 모르나

그것이 대체 무슨 난관이랴

우리 모두 안에는 정신이 살아 있고

하나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니!”

 

독일어 원문:

 

Wir hatten gebauet

ein stattliches Haus

und darin auf Gott vertrauet

trotz Wetter, Sturm und Graus. [...]

Das Haus mag zerfallen,

was hat’s denn für Not?

Der Geist lebt in uns allein,

und unsre Burg ist Gott!

 

stattlich = 위풍당당한, 당당한, 이목을 끄는.

 

이를 staatlich국가의, 국가적인로 순간, 잘못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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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옐레,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이용주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6(3).

 

이 [프랑스어] 노래는 오늘날까지도 초핑기아 협회의 행사 때마다 일동 기립한 채 울려 퍼지는 곡이다. 본래 이 노래는 독일 일반 청년회의 강제 폐쇄에 항의하여 18191126일 예나에서 봉기했던 학생들이 불렀던 것으로, 아우구스트 폰 빈처(August von Binzer)프랑스어로 번안한 곡이다.”(37쪽, 부분보완 인용)

 

이 [프랑스어] 노래는 오늘날까지도 초핑기아 협회의 행사 때마다 일동 기립한 채 울려 퍼지는 곡이다. 본래 이 노래는 독일 일반 청년회의 강제 해산에 항의하여 18191126일 예나에서 봉기했던 학생들이 불렀던 것으로, 아우구스트 폰 빈처(August von Binzer)쓴 가사를 프랑스어로 번안한 곡이다.”

 

독일어 원문: Dieses Lied, das auch heute noch an jeder Veranstaltung der «Zofingia» angestimmt wird, wobei man von den Sitzen aufsteht, ist die französische Nachdichtung eines Liedes von August von Binzer, das die aufgebrachten Studenten am 26. November 1819 in Jena anlässlich der gewaltsamen Auflösung der Burschenschaft sangen:

 

August von Binzer의 독일어 가사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사람은 Marc Monnier.

 

아래 사이트의 문서, 17-18쪽을 볼 것:

 

http://www.burschenschaftsgeschichte.de/pdf/gfbg-jahresgabe-200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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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옐레,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이용주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6(3).

 

“[...] 바르트의 왕성한 활동력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망하기 바로 전날 저녁까지도 그는 1969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 기도주간 기념 연설문을 작성하고 있었다.”(32)

 

“[...] 바르트의 왕성한 활동력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망하기 바로 전날 저녁까지도 그는 1969 1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 기도주간 기념 연설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독일어 원문: [...] Am Vorabend seines Todes arbeitete er am Manuskript für einen Vortrag, den er anlässlich der ökumenischen Gebetswoche für die Einheit der Christen im Januar 1969 vor evangelischen und katholischen Mitchristen halten wollte.

 

칼 바르트는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동시대인들에 비해 장수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활동적으로 일했다. 사망하기 하루 전날 저녁까지도 바르트는 1969 취리히에서 열릴 에큐메니칼 교회일치 기도주간에 발표할 강연원고인 <일어서기-돌이키기-고백하기>를 다듬고 있었다.”(171)

 

칼 바르트는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동시대인들에 비해 장수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활동적으로 일했다. 사망하기 하루 전날 저녁까지도 바르트는 19691 취리히에서 열릴 에큐메니칼 교회일치 기도주간에 발표할 강연원고인 <일어서기-돌이키기-고백하기>를 다듬고 있었다.”

 

독일어 원문: [...] Noch am Abend vor seinem Tod arbeitete er an einem Vortrag, den er im Januar 1969 in Zürich aus Anlass der ökumenischen Gebetswoche für die Einheit der Christen halten wollte: «Aufbreechen Umkehren Bekennen.»

 

빠진 단어Januar를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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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옐레,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이용주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6(3).

 

바르트는 젊은 시절 노동조합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라가츠의 노선에 근접해 있었지만 후에는 정당 활동보다 선포행위를 우선시하는 쿠터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30년대의 투쟁들을 거치며 그는 다시금 라가츠의 사상에 한발 다가갔다. 당시 바르트는 국가사회주의를 매우 단호하게 거부하였다.”(23-24)

 

바르트는 젊은 시절 노동조합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라가츠의 노선에 근접해 있었지만 후에는 정당 활동보다 선포행위를 우선시하는 쿠터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30년대의 투쟁들을 거치며 그는 다시금 라가츠의 사상에 한발 다가갔다. 당시 라가츠는 국가사회주의를 매우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독일어 원문: Ganz praktisch betätigte sich der junge Pfarrer in der Gewerkschaftsbewegung. Später näherte er sich Kutter und dessen Beharren auf dem Primat der Verkündigung gegenüber der konkreten Parteiarbeit an. In den Kämpfen der dreissiger Jahre fand dann wieder eine Annäherung (nicht persönlich, aber in der Sache) an Ragaz statt, dessen Beurteilung des Nationalsozialismus sich durch ihre besondere Entschiedenheit (und zwar im ablehnenden Sinn) hervortat.

 

마지막 문장의 주어를 바로잡았다.

 

관계대명사 dessen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앞의 Rag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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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옐레,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이용주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6(3).

 

누락(1)

 

“[...] 그리스도교에 대해 하르낙만큼 박식한 사람은 없었다. 주저인그리스도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899/1900년 겨울학기에 모든 학과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16개의 강연)에서 하르낙은 그리스도교의 장대한 상을 제시하였다. 하르낙은 그리스도교를 <오직 역사적 의미에서>, <역사학 및 역사학으로부터 획득된 삶의 경험만을 통해> 묘사하고자 했다.”(20, 문장부호 수정 및 부분삭제 인용)

 

“[...] 그리스도교에 대해 하르낙만큼 박식한 사람은 없었다. 주저인그리스도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899/1900베를린 대학교의 겨울학기에 모든 학과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16개의 강연)에서 하르낙은 그리스도교의 장대한 상을 제시하였다. 하르낙은 그리스도교를 <오직 역사적 의미에서>, <역사학 적용해서, 그리고 체험한 역사로부터 획득된 삶의 경험만을 통해> 묘사하고자 했다.”

 

독일어 원문: [...] In seinem Buch «Das Wesen des Christentums Sechzehn Vorlesungen vor Studierenden aller Facultäten im Wintersemester 1899/1900 an der Unversität Berlin gehalten» entwarf er ein gewaltiges Panorama des Christentums. Wie er sich selbst ausdrückte, wollte er das Christentum darstellen «lediglich im historischen Sinn», das heisst «mit den Mitteln der geschichtlichen Wissenschaft und mit der Lebenserfahrung, die aus erlebter Geschichte erworben» worden sei.

 

빠진 부분을 보완하고 문장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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