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는 수익과 관계없이 계속 운영해야 하는 공공 서비스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기업과는 다르다. 이는 자동차의 등장과 버스나 항공기 같은 다른 형태의 공공 교통수단이 발전하기 전까지 특히 그랬다. 철도가 필수적인 서비스를 독점적으로 제공하는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철도는 호황일 때는 집중적으로 활용해 수익을 낼수 있으나 불황기라고 일시적으로 중단하거나 폐쇄할 수도 없는 거대한 고정 자산이었다. 따라서 철도는 경기 변동이나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에 특히 취약하다. 나동차와 트럭 그 뒤로 항공기 등에 승객과 화물을 빼앗기기 시작하면서 결국엔 국유화된것이다.  - P186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철도는 세계 전역에 자리를 잡아, 증기 기관차가 연기를내뿜으며 시골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 됐다. 이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 주요 노선뿐만 아니라 급속히 늘어나는 지선이 놓인 외진 지역까지 마찬가지였다. 1880년에는 철도 총연장이 약45만 킬로미터였지만,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약 80만킬로미터에 이를 정도였다. 세계 전체로 보면, 철도는 해마다 1만 6000킬로미터씩 늘어나고 있었고,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질 때까지 계속됐다.  - P291

1830년의 세계는 그 50년 전과 달리 철도와 그것이 가져올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되어 있었다. 철도는 증기 기관이 필요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자본도 필요했다. 이 두가지가 모두 갖춰졌기 때문에 철도와 증기 기관의 발명과 빠른 확산이 가능했다. 철도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혁신, 즉 증기 기관을 선로 위를 달리는 열차에 놓는 것은산업혁명이 촉발한 수많은 기술적인 변화 덕분이다. 이 발명의 단순섬은 그 기술을쉽게 모방하고 개발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초기 철도와 기관차의 다양한 크기와 궤간에서 볼 수 있듯이, 철도는 전례 없는 융통성 덕분에 이용할 수 있는 효율적인 동력원이라는 형태로 힘을 체계적으로 제공했다. 다른 핵심적인 혁신, 즉 철로뢴 선로 위를 달리게 해준 플랜지 방식의 바퀴와 증기의 힘으로 끄는 기관차의 조합덕분에 사람이나 가축이 끄는 것보다 열 배 이상 무거운 짐도 옮길 수 있게 됐다. 더욱이 전례 없이 많은 승객을 운송할 수 있게 됐는데, 역마차 수십 대가 필요한 일을열차 한 대로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 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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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국방비는 2~9위를 합친 액수와 맞먹을 정도여서 전 세계 국방비의 36퍼센트를 차지하지만, 미국 군대의 총체적 무능은 거의 모든 해외 원정에서 충분히 드러났다.2 미국은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도 아프가니스탄(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다)에서 탈레반을 물리치지 못했다. 한꺼번에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주둔시키면서 2300명이 넘는 병사를 잃고 1조 달러 이상을 지출했지만 허사였다.

오늘날 국제적인 패권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련은 이제 사라졌다. 중국은 (아직) 충분히 강하지 않다. 유럽은 혼란에 빠져 있다. 미국은 쇠퇴하는 중이다.

유럽은 현재 세계 주변부의 일부다. 유럽인들은 끊임없이 유럽에 관해 이야기한다. 유럽의 역할이 무엇인지, 유럽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미국이 계속 선두에서 이끌 수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패권국이 등장할 것인지를 궁금해한다. 하지만 한 나라, 또는 오직 한 나라만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필연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쨌든 세계는 ‘패권국’ 없이도 똑같이 순조롭게(또는 똑같이 삐걱거리며) 작동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패권국으로 여겨지는 나라가 패권이 위협을 받을 때 어떤 행동을 하는가 하는 것이다. 패권이 쇠퇴하는 시대에 미국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페리 앤더슨이 말하는 것처럼, "지배의 자연적 정당성에 대한 믿음과 맹목적인 자기만족"이다.

유럽의 우위라는 가정은 18세기와 19세기에 발전했다. 18세기에 계몽주의의 지적 성취와 합리성, 성직자의 반계몽주의에 맞선 승리를 바탕으로 이런 가정이 만들어졌다. 이런 우월감은 19세기에 유럽의 우위가 더 강력한 물질적 기반?기술적·산업적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에 닻을 내리면서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유럽의 우위?근대의 횃불, 문명의 요람?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유럽’은 아일랜드와 이베리아반도의 서부 해안에서부터 카프카스산맥과 콘스탄티노플까지, 그리고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의 얼어붙은 불모지에서부터 시칠리아의 따뜻한 기후에 이르는 지리적 실재가 아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유럽은 글을 쓰는 사람에 따라 시대마다 각기 다르게 정의되는 서유럽이었다.

민족과 민족주의 둘 다 유럽 프로젝트에서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힘이 세다. 실제로 유럽연합의 모든 문서는 더욱 응집력 있는 공통의 정체성이 필요하다고 언급할 때면 언제나 파편화와 혼란, 충돌을 피해야 하고, 응집과 연대, 보완과 협력을 달성하고 회원국들에서 현존하는 민족 정체성을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한다. 나는 유럽의 정체성을 가르칠 수 없다고 본다. 유럽을 민족국가들의 민족국가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유럽 각 민족국가의 사람들은 자기 민족을 선택하지 않았다. 민족성과 민족 건설을 억지로 떠안았을 뿐이다. 마침내 그들은 영국인, 독일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에스파냐인, 벨기에인 등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가 스코틀랜드인이나 콘월 사람, 가스코뉴 사람이나 브르타뉴 사람, 바이에른 사람이나 프로이센 사람, 시칠리아 사람이나 피에몬테 사람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관료제와 교육 체계가 공용어와 ‘공동의’ 역사를 부여한 덕분에, 전쟁, 국가國歌, 스포츠 경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국가별 공영방송, 그 밖에 수많은 기획 덕분에? 대다수 유럽인들은 ‘민족’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일련의 정치 제도와 동일시하는 법을 배웠다.

민족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만들고, 세금을 인상하고, 교육과 미디어를 통제하고, 경찰과 군대를 보유해야 한다. 유럽연합은 이런 구조가 없으며 그렇게 만들고 싶어하는 이들도 거의 없다. 프랑스나 영국, 독일 정체성이 만들어진 방식대로 유럽 정체성을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하다.

전문가들은 ‘민중’이 ‘엘리트들’에게 분노한다고 지적해왔다. 서구에서 정치인의 자질이 왜 그토록 퇴보했는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검토해야 한다.

가치는 변화를 겪는다. 유럽적 가치는 일정한 가치를 장려하고 다른 가치들은 ‘비유럽적’인 것이라고 깎아내리려고 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구성물이다. ‘유럽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통일된 일련의 원리와 가치라는 개념은 실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강령으로서 지식인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다. 통일된 가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럽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과거를 되돌아보기보다는 자신이 어떤 미래를 원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에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로 눈을 돌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 역사와 언어가 다르고 어떤 면에서는 공통점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역경을 무릅쓰고 공존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27개국 연합의 모습이다. 유럽은 세계의 나머지 200여 개 나라에 공존이 어려울지 몰라도 협력말고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할 수 있다.

미디어는 사적인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간에 대중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대중은 이미 아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대중이 아는 것은 자기 마을(나라)과 미국이다. ‘소소한’ 예외가 많이 있지만?비틀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해리 포터도 유명하다(영어로 노래하고 글을 쓰는 게 도움이 된다)? 미국은 여전히 엄청난 규모의 자국 문화 산물을 수출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이민자들의 땅인 미국의 문화가 여러 문화가 뒤섞인 것이라는 사실이 도움이 된다.

지방주의와 낮은 수준의 민족주의가 계속 남아 있는 것은 유럽 기획이 상대적으로 실패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유럽 회의론은 지난 20년간 뚜렷하게 고조되었고, 유럽 회의론 정당들도 늘어났다.

분명한 이유 때문에 정치인들은 당원보다 유권자에게 더 신경을 쓴다(당원의 주요한 쓰임새는 유권자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당원은 이미 당에 속해 있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 당원은 정치에 매료된 사람들이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친구와 술을 마시거나 책을 읽는 대신 을씨년스러운 장소에서 정치 쟁점을 토론하면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걸 즐긴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한 것처럼, "사회주의의 문제는 저녁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는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들이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아는 주된 통로는 여론조사다. 정치인들이 접촉하는 유권자들은 보통 불만이나 망상, 대의명분에 사로잡힌 이들이기 때문이다?전부 당 활동가들만큼이나 ‘비정상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투표의 의미와 중요성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챙기면서 어쨌든 마음 내키는 대로 해석한다. 유권자들은 투표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일단 표를 던지는 순간, 자기가 가진 권한과 목표, 바람을 자신이 믿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정치인에게 넘겨주는 셈이다. 투표는 불가피하게 권력을 포기하는 행위다. 투표를 하고 나면 집에 가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고양이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다른 방법은 전혀 없다. 권력은 불가피하게 소수의 수중에 집중된다. 문제는 이 소수를 어떻게 선발할 것인가 하는 것뿐이다. 노골적인 힘이나 지위, 신분, 출생, 선거 등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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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각본
박찬욱.정서경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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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봤다. 사랑이야기지만 마음아프고 슬픈 결말의 영화는 영화 안에 담긴 여러 의미로 여러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영화 감상의 꽃이라 할 미장센(Mise-en-Scene)을 이해하기에는 많은 영화를 보지 않아 한계가 있었음에도 영화가 던져주는 메세지는 울림이 있었다.

[경고] 이하 글에는 영화와 관련된 스포일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관람에 방해받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어주세요...

언어를 통한 의식적인 소통의 한계

형사 장해준(박해일)은 기도수의 살인범으로 송서래(탕웨이)를 의심한다. 서래가 내뱉는 ‘마침내‘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에게 해준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이 말을 알고 사용한 것일까? 스스로 한국어가 서툴다고 소개하는 그녀의 말처럼 우연한 단어의 선택이었을까. 서툰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의식적인 소통은 피의자와 형사의 관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럼에도 스치듯이 느껴지는 감정은 무의식적인 것이다.

점차 상대를 이성으로 느끼는 해준과 이를 알게 된 서래. 잠복근무를 통해 상대를 면밀하게 관찰하는 형사의 눈은 어느새 이성을 훔쳐보는 관음증 환자의 눈으로 변해간다. 이들의 감정은 무의식적인 것이지만, 출발은 의식적인 것이었다. 남편과는 달리 품위있는 형사 해준의 배려에 마음에 연 서래. 의식세계에서 이들의 교감은 언어의 장벽으로 제한되기에, 스마트폰의 번역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커져가는 감정을 느낀다. 그렇지만, 서래의 마음을 받아들여 욕망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해준의 ‘의식세계‘ 붕괴를 의미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선 해준과 서래.

불면증에 고통스러워 하는 해준은 잠을 잘 때 입으로만 호흡한다는 진단을 받는다. 평소에는 코로 호흡하는 것이 문제없다는 해준. 무의식적인 호흡은 그에게 평안함을 주지만, 잠을 자기위한 의식적인 호흡은 부자연스러운 고통을 안겨준다. 그런 그에게 무의식으로의 미끄러짐은 자연스러운 생명의 길일지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무의식의 세계는 욕망의 세계다. 작품 속의 시체의 눈은 욕망의 결과들이다. 서래를 소유하고 자 한 첫째 남편, 서래를 이용해 돈을 벌려던 둘째 남편. 무의식 아래 자리한 욕망의 결과 그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작품 중에서 해준은 끊임없이 안약을 넣는다. 안약을 넣기 전 마치 벌레가 기어다니는 시체의 눈과도 같았던 해준의 눈은 안약을 통해 다시 맑아지고, 해준은 멍한 무의식의 상태에서 의식의 세계로 돌아온다. 이런 면에서 해준의 안약을 넣는 행위는 죽지 않으려는 의식의 본능일까. 무의식으로의 미끄러짐은 생명과 사랑을 얻는 것일까. 아니면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죽음의 충동일까. 마치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을 위협하는 지진과도 같은.

해준의 아내 정안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한다.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을 지키는 존재인 아내 정안은 후반부에 떠나고 해준은 이후 무의식의 세계로, 서래에게로 미끄러져간다. 아내인 정안은 원자력 발전소의 안정 뿐 아니라 해준을 무의식의 세계로 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사천왕같은 존재였을까.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

모순적인 상황에 놓인 것은 서래도 마찬가지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서래는 산을 싫어하지만, 산에서 남편과 헤어지려는 자신의 욕망을 이뤘고, 바다(물)을 좋아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사랑을 얻지 못했고 헤어질 결심을 해야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산을 배경으로 한 전반과 바다를 배경으로 한 후반은 여러모로 대칭된다. 높음과 넓음, 서래를 의심하는 해준의 부하 오수완(고경표)과 서래를 감싸는 여연수(김신영). 이러한 대칭적 세계구도에서 시공간(時空間)을 넘어선 사건(event)은 말그대로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en)이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면...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어요. <헤어질 결심> 中

‘마침내‘와 ‘나는 붕괴되었어요‘. 서래의 ‘마침내‘와 해준의 ‘나는 붕괴되었어요‘는 서로를 향해 나아가면서 서래에 의해 완성된다. 해준의 붕괴를 막기 위해 그녀가 처음에 까마귀를 묻어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을 묻는다. 쌓아올린 모래벽은 거센 파도에 붕괴되면서 자신 또한 붕괴되고, 자신의 선택으로 영원히 미제사건으로 해준에게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헤어질 결심>에서 모래사장을 찾아가는 서래의 모습과 그를 쫓는 해준의 모습에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 ~ 1998) 감독의 <카게무샤>의 를 떠올린 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다케다 신겐과 카게무샤 간의 숨박꼭질처럼 보이는 해준과 서래의 엇갈림.

[사진] 영화 <카게무샤> 中 (출처 : https://www.filmedinether.com/features/kagemusha-40-year-anniversary-kurosawa/)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전을 3일만에 세우겠다는 예수의 말처럼, 필멸의 인생 대신 불멸의 영광을 찾겠노라는 아킬레우스의 선택처럼 서래는 해준에게 불멸의 미제사건이 되는 선택을 한다. 이러한 장엄미(美)가 참된(眞)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선택을 오래 전 <인어공주>에서 본 듯한 기억이 난다.

사실, 어제 본 영화라 다소 두서없이 정리된 감이 많고, 놓친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칠게나마 글을 쓰는 것은 눈 앞의 거대한 향유고래가 사라지기 전 부족하더라도 스케치를 남기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어질 결심> 각본은 아직 채 읽지 못했지만, 의식세계의 문자가 하나의 작살이 되어 내 무의식의 이미지를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헤어질 결심>을 다시 만날 약속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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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8-03 19: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중적 의미를 지닌 각종 장치들 덕분에 추리하고 되새김질하는 맛이 있었던것같아요. 겨울호랑이님 ‘의식세계의 문자가 작살이되어...‘마지막 표현 근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2-08-03 20:02   좋아요 3 | URL
정말 오랫만에 좋은 영화를 봤습니다. 미미님 감사합니다 ^^:)

나와같다면 2022-08-03 20: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헤어질 결심 리뷰 기다렸어요. 다시 한 번 감동에 빠집니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폰은 버려요
깊은 바다에 던져서
아무도 못 찾게

겨울호랑이 2022-08-03 20:18   좋아요 4 | URL
에고... 나와같다면님 읽어주신 것도 감사한데, 기다리셨다니요... 감사합니다. ^^:) 나와같다면님께서 인용한 글을 보니 갑자기 영화 <shape of water>가 생각나네요... 물론 폰과 직접 관련은 없습니다만... 깊은 물과 사랑의 이미지와는 어쩐지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참 여운이 오래 가네요...

얄라알라 2022-08-03 21: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께서는 아카데미아에서 프로페셔널한 글쓰기에 달인이시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리뷰 넘 멋져요. 안약 넣는 행위를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영화를 만약 다시 본다면 겨울호랑이님께서 말씀해주신 부분 화악 들어올 것 같아요. Shape of Water도 연관이 되나보네요^^ 아. 멋진 글이었어요. 영화도 넘 좋지만요

겨울호랑이 2022-08-03 21:17   좋아요 4 | URL
당연하게도 제 리뷰가 마음에 드셨다면, 그것은 좋은 영화의 리뷰이기 때문이고, 제 감상이나 해석에 무리가 있었다면 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다행히 얄라얄라님께서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

단발머리 2022-08-03 22: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님. 숨겨진 의미 해석해 주신 부분도 인상깊었고요, 특히 마지막에 올려주신 사진이 <헤어질 결심>의 일렁이는 파도를 기억나게 해서 참 각별한 느낌이 드네요.

겨울호랑이 2022-08-03 22:15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다만, 단발머리님께서도 느끼셨겠지만, <헤어질 결심>은 보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해석하는 길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 글은 수많은 길 중의 하나라 여겨집니다. 그 길이 이웃분들에게도 <헤어지는 결심>으로 가는 하나의 길로 이해될 수 있었다면, 두서없는 제 리뷰가 작은 의미를 가질 수 있어 다행입니다^^:)
 

여기서 세부적인 실험결과와 수치들은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그 결과가 꽤나 인상적이다. 흥미롭게도, 이 연구에 따르면 작동 과정에서 측정된 미세입자들의 검출량은 일상생활의 다양한 요리활동에서 검출되는 입자량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런 논쟁 과정에서 누군가 "프린터용 잉크는 인체에 유해하다. 그러니 쓰지 말자!" 라는 주장을 하고 이것이 뉴스에 크게 보도된다면 어떨까?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는 사회적으로 유익하고 유의미한 주장일까? 그렇다면 "전자파는 인체에 유해하다. 그러니 전자파를 뿜어내는 기기들을 쓰지 말자!"라는 주장은 어떠한가? 이는 사회적으로 유익하고 유의미한 주장인가?
이런 주장들과 논의들은 사회적 논의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소모적이다.

스펙트럼과도 같은 유해성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일견 간단해 보이는 해결책인 이분법적인 사고를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세심한 맥락화다.

이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사회경제적 선택의 폭을 넓혀줄 수 있다. 어느 정도까지 유해함을 감수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규제할 것이며 기존의 시스템과 합치하는지, 또 다른 사회적 계층화의 위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등 사회가 실제로 마주하는 선택지는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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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토마스 프랭크 지음, 김병순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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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생각할 때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당은 민주당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대초원의 서부 고지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시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했다고 한 친구에게 말했더니 그녀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여태껏 남들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공화당 후보를 찍을 수 있지?˝라고 물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지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은 오늘날 미국인의 정치적 삶이 어떤 상황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_ 토마스 프랭크,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 p5/294

최근 여권의 지지자들에 ‘저소득 저학력‘ 층이 많다는 유력 정치인의 발언으로 조금 시끄럽다. 다른 한 편에서는 ‘빈자 혐오‘라고 비난하고 프레임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저소득층의 보수주의 정당 지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두 가지 가정 때문이다. 1) 모든 게임의 참가자들에게 정보는 완전하게 주어지고 2)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는.

[관련기사] ‘월소득 200만원 미만‘ 10명 중 6명, 尹 뽑았다
https://m.mk.co.kr/news/politics/view/2022/03/269908/

토마스 프랭크(Thomas Frank, 1965 ~ )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What‘s the Matter with Kansas? >는 이러한 설명하기 어려운 물음에 대한 답을 알려준다. 미국 저소득층 사람들에게 정보는 불완전하게 주어지며, 특히 미국 중부의 기독교 사상에 철저한 이들은 정치적인 ‘정의‘를 위해 자신들의 경제적인 ‘정의‘를 기꺼이 감내해 내는 모습을 보인다. 일련의 ‘반지성주의‘적인 이들의 모습 속에서 진보적 가치들은 토론의 대상이 아닌 선악(善惡)의 구도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보수주의 정치가들은 이들의 신념을 교묘하게 선동하여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보수 반동 이론가들은 부유하고, 권력이 있고,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자유주의 계열의 미디어와 무신론 과학자, 밉상 맞은 동부의 엘리트들이 꼭두각시를 앞장 세워 무수한 음모들을 꾸며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알고보면 보수 반동이라는 술책만큼 지금까지 미국 중산층의 이익을 완전히 거덜낸 정치적 음모는 없었다. 보수 반동 세력이 비난하는 가장 교활한 배후조정자들도 그런 정도의 음모는 생각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그들은 상속세 폐지를 주장하면서 ‘기존 체제‘에 저항한다. 그들이 지금 여기서 기존의 권력구조를 비난하는 것은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자는 운동이다. 그들은 노동조합과 민주당의 작업장 안전 법안 때문에 노동자들의 삶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다고 맹렬하게 비난한다. 또 미국 학생들의 학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공고육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_ 토마스 프랭크,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 p11/294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의 배경은 미국이다. 그렇지만, 분단체제가 만들어 내는 특수한 보수주의 의제들과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종교적인 우리 민족성을 고려했을 때, 우리의 현실 모두를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중요한 많은 부분을 짚고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책의 내용을 정리하는 리뷰는 시간이 될 때 올리는 것으로 하고, 간략한 책소개로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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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2-08-04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혁을 따라가려면 끊임없는 논리구조의 이해가 필요할거에요. 정치를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들만의 득을 위함임을 가릴, 쉬운 어조의 감안이설을 만들어 반복적으로 해대고. 그 너머를 보려면 어쩔 수 없이 지성이 뒷받침 되야 하고, 지성은 그냥 꽁으로 쌓이는 게 아니지요.
이유들을 생각해봅니다.

겨울호랑이 2022-08-04 08:29   좋아요 1 | URL
갱지님 말씀처럼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역설적인 상황을 맞닥뜨리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을 갖지 위해서 배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산이 필요한데 그 배경이 이미 하나의 배경이 되어버리는. 다른 한 편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모든 분야에서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태를 이해하는 것은 지식이 아닌 지혜가 필요하지 않나 여겨집니다. 자연이나 자신의 삶에서 터득할 수 있는 이치를 받아들이고 이로부터 자신의 판단을 유지하는 것은 말씀하신 역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