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 루니의 화제작 『노멀 피플』보다 그녀의 데뷔작 『친구들과의 대화』가 더 좋았던 이유는 오로지 주인공 때문이었다. 나는 좀처럼 아니 도저히, 『노멀 피플』의 코넬을 좋아할 수 없었는데, 물론 마리앤에게도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화살은 주로 코넬에게로 향했다. 『친구들과의 대화』가 좋았던 건 닉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처음 샐리 루니를 읽었을 때는, 내가 느끼는 감정과 혼란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제일 정확하게는 당혹스럽다고 해야겠는데, 닉에 대한 내 감정이 그랬다. 폭력적이고 타인을 억압하는 남성은 모두가 싫어한다. 그건 여성이나 남성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을 '남성적 성향'이라고 찬양하고 숭배하는 문화에서는 물론 다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닉은 너무 가냘픈 그대여서, 유약하고 다정하며, 배려심이 가득하지만... 아, 생각만 해도 지친다. 프랜시스가 그랬다. 당신은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 식물은 건강하고, 깨끗하고, 활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초식남 닉은 그냥 매가리가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는데 그렇게나 소극적이었다. 먼저 키스해 주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는 남자였다. 근데 내가 프랜시스가 되어 그렇게나 매가리 없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니, 소설을 읽는 내내, 다 읽은 후에도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구야.
아름다운 세상으로 돌아와서.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한데, 그래도 한 번 써보자. 아일린과 사이먼이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네가 우리를 만나러 파리에 올 예정이었는데 내가 그 뭐랄까, 네가 비행기를 타는 거며 뭐 그런 일에 대해서 걱정을 했어. 그러자 나탈리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아. 이런, 아빠의 어린 딸이 아무도 없이 혼자군. 뭐 그 비슷한 말이었어. 웃겼어. 내 말은 그녀가 농담한 것 같다는 거야.
그 순간 아일린이 두 눈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나도 얘기 하나 해줄게. 어느 날 밤 당신이 문자를 보냈는데, 마침 에이든이 내 전화기 바로 근처에 있어서 대신 그 메시지를 확인해 줬어.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한테 화면을 보여주면서 '네 아빠야'라고 하더라. (183쪽)
둘 사이의 나이 차이가 5살이니 20대 초반이라면 나이 차이가 크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언제든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빠 같은' 이라니. 꺼림칙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 사이먼은 아일린을 그렇게 대했다. 아일린의 남자친구도, 사이먼의 여자친구도, 사이먼이 아일린에 대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걸 알고 있었다. 여기에 sexual한 의미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아일린의 언니 롤라가 사이먼을 험담할 때 말했듯이 사이먼은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생존과 자기 보존, 그리고 보호의 의지는 당연히 sexual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생존의 조건, 생명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Lucy by the sea』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루시는 인터넷 쇼핑을 못하나요. 루시는 쿠팡 아이디가 없나요. 루시는 앱카드가 없나요. 아니요, 아닙니다, 아닌데... 윌리엄은 그런 사람이다. 루시에게 필요한 걸 기억해 두었다가 사 주는 사람이다. 윌리엄이 주문해 준 겨울 코트가, 가디건이, 운동화가 맘에 든다고 크게 소리쳐 부르는 루시에게 '손 씻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물건을 담아둔 상자를 루시 대신 밖에 내다 놓는 사람이다.
젠더가 우리 삶 속에 자리 잡은 양태는 다른 어떤 사회적 양식보다 견고하고 은밀하다. 남자답다 혹은 여자답다,는 말이 주는 힘은 공기처럼 무게감 없이, 저항감 없이 우리를 지배한다. 사람들에게 여성다움 혹은 남성다움은 '규범'으로 작동하고, 그러한 규범은 자연스레 '이상화'된다. 나는 지금, 샐리 루니가, 혹은 샐리 루니마저도 '강한 남성', 나를 보호해 주는 남성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고 말하는 중이다. 나는, 아일린과 사이먼이 '아빠 같은'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서 편안하게 마주 보며 웃는 장면에서 그렇게 느꼈다. 아일린을 걱정하는 사이먼, 아일린이 혹시 어려움을 겪을까 안절부절못하는 사이먼. 그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들으면서 적잖이 놀라는 사이먼. 사이먼은 그런 남성이길 원하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하고 있으며, 아일린은 그런 사이먼의 행동을 받아들인다. 그의 보호를, 간섭을, 침입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지점은. 이것이 아일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이먼을 위한 것이라는 데 있다.
다시 루시에게로 간다. 이 장면은 예전에 페이퍼로도 한 번 썼다. 코비드 상황에 비교적 안전한 바닷가 외딴 마을로 이사를 간 윌리엄과 루시. 간만에 두 사람이 함께 마트에 갔는데, 주차장에 혼자 남아있던 루시의 자동차 번호판을 보고 어떤 여자가 '뉴욕 사람들은 뉴욕으로 돌아가라!'라며 욕을 한다. 황망해하는 루시와 달리 윌리엄은 별다른 말이 없다. "윌리엄, 나는 누가 나한테 소리지르는 게 싫어!" 루시의 말에 윌리엄은 자기한테 소리지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답한다. 며칠이 지나 아직도 화가 안 풀린 루시가 윌리엄에게 묻는다. 당신은 심지어 그 여자가 내게 소리를 지른 뒤에도 왜 나한테 다정하게 하지 않는 거야? 윌리엄이 답한다.


나는 윌리엄이 루시를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무언가를 내놓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루시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혹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겪게 될 불이익이나 불편, 혹은 바로 이전 가족에게서 멀어지는 경우까지라도. 윌리엄은 단지 그녀가 먼저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윌리엄 자신이 살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코비드 때문에 루시가 죽게 된다면,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살기 위해 루시를 살리려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파스텔 연분홍 펜으로 이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내가 너를 위해 뭔가 해준 적이 있다면, 그건 정말로 나 자신을 위해서였어.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거든.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너한테 내가 필요하다고, 너는 나 없이는 안 된다고 느끼고 싶었어. 내 말 이해하겠어? 내가 쉽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네. 내가 너를 위해 해준 것보다 네가 나를 위해 해준 게 정말 훨씬 더 많다는 뜻이지. 그리고 네가 나한테 더 필요했어. 너한테 내가 필요한 것보다 나한테 네가 더 필요해. 그는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잠자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두서없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틀린 말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나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무척 어렵거든. 다시 한번 그는 한숨 쉬듯 숨을 내쉬고 자기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그녀는 그를 계속 지켜보면서, 말없이 귀 기울여 듣기만 했다. 마침내 그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겁먹은 거 알아. 그리고 네가 우리 우정에 대해 한 모든 말, 친구로 지내고 싶을 뿐이라는 말도 진심이었을 수 있어. 만약 진심이었다면 받아들일게. ... (381쪽)
사이먼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네게 내가 필요한 것보다, 내게 네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렇게 느꼈다. 다만.... 다만, 그는 너무 소극적이었고, 느렸고, 그리고 정중했으며. 이 모든 사이먼'적' 요소는 아일린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 보호하고자 하는 남성과 겹칠 때, 그 '이상화'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어질 때, 그 남성이 그 수행을 성실히 해나갈 때, 나는 가끔 서로를 구원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이먼이 원하는 대로 된 것 같지만, 그건 아일린을 위한 것이고. 아일린이 원하는 그것이 바로 사이먼이 원하던 그것이었으니까. 그 수행을 허락한 사람은 아일린이니, 최후의 승자는 아일린인 것으로. 사이먼도 그 결과를 좋아할 테다.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