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서 같이 읽으면 좋은 책/참고할 만한 책은『가부장제와 정치경제학』시리즈와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이다.

이 책에서는 젠더가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설명하는데, '누가 노동자인가'라는 부분에서 차티스트들의 인식을 지적한 부분이 눈에 띈다.

차티스트들은 개인의 노동 혹은 노동력의 산물이 그 자체로 자산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산을 개인의 정치적 권리 향유와 관련지은 로크 이론의 한 측면을 발전시켰다. 그러면서 차티스트들은 이미 선거권을 획득한 이들과 자신들 사이의 또 다른 유사성 - 그들 모두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122쪽)

남성 자산 소유자가 중심이 된 차티스트 운동이 제시한 계급에 대한 젠더화로 인해 대안적 계급 개념들이 주변부로 밀려나고, 성차 그 자체가 비가시화되었다. 노동력을 가진, 혹은 노동할 수 있는 자신들이 '남성'임을 인식하게 되면서 노동계급의 구성에서 더 많은 수를 차지했던 '여성'과 '어린이'는 '노동 계급'에서 제외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젠더 분석에 대한 접근법 중, 가부장제의 기원과 관련된 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그에 근거한 추론을 통해, 집단으로서의 여성이 남성 집단에게 종속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는 자본주의와의 결합으로 더욱 공고해진다. 그럼 사회주의는 어떠했을까. 사회주의는 여성의 가사 노동의 상당 부분을 '외주화'함으로써 노동자로서의 여성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정에서 요구되는 노동은 여성 '본연의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성들은 집 밖에서 임금 노동을 하든 하지 않든, 계속해서 집에서 "무보수로" 가사 노동을 도맡아 했다. 왜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사회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여성의 일로 간주되는지 오직 경제적인 견지로만 설명할 수 없었던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단순히 모든 여성은 똑같이 여성이라는 계급, 즉 제1의 (남자라는 성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제2의 (여자라는) 성에 속하기 때문에 모든 사회에서 가사 노동이 여성에게 할당된다고 결론지었다.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151쪽)

기독교 신자인 내가 페미니즘을 읽을 때, 읽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 괴리 때문에 괴롭지 않으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전혀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기독교인이어서 유독 더 괴로운 건 아니라고 답한다. 인류 문명은 시작부터 내내 한결같았다. 여성 혐오가 인류 문명의 출발이었다는 정희진쌤의 말은 구체적인 실례에 모두 들어맞는다. 영국의 왕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이름 모를 종족에서도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불교에서 여성을 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교에서도 여성을 죄의 근원이라 여겼다. 자본주의가 여성의 무임금 노동을 '사랑'과 '헌신'으로 만들어 착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가사 노동은 여성의 일로 간주되었다.

역시, 여성과 남성의 '성 구분'과 '강제적 이성애'가 젠더 형성과 고착화에 대한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된다. 만약, 이 구별의 기준이 '성별'이 아닌 그 무엇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외향적인 사람은 요리를, 내향적인 사람은 설거지를 맡기로 한다면. 문과인 사람들은 설거지를, 이과인 사람은 장보기를 하기로 정해져 있다면. 키가 큰 사람은 청소를, 키가 작은 사람에게는 정리정돈을 맡긴다면 어땠을까.

모두 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할 것이다. 성향이나, 성격, 혹은 신체적 특성으로 그 사람의 어떠함을 예단하고, 그에 따른 임무를 강제하는 일이 부당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젠더는 아직도 그렇게 작동한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여성다움과 남성에게 강요되는 남성다움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직업 선택과 활동 범위에 관해서, 여성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넓은 선택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정은, 사적 영역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주효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리 성공한 여성이라도, 아니 성공한 여성이라면 더욱더, 아이들의 양육과 돌봄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할 것을 '요구' 받으며, 아이들을 전적으로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부여' 받는다. 여성의 사회 진출은 여성의 이중, 삼중 노동을 전제해야만 가능하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돌봄 노동을 포함한 모든 재생산 노동에서 여성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욕구를 우선시할 것을 요청받는다. 사회학자 디무트 엘리자베트 부벡이 말했듯, 모든 여성은 직접 착취당하지 않아도 젠더에 기초한 착취에 취약(『친밀한 착취』, 141쪽)하기 때문이다.


사회 내의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젠더 역시 각 개인의 삶을 구속하는 주요한 요소 중의 하나임은 확실하다. 다른 어떤 요소들보다 젠더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 젠더가 가진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까지 읽고 썼다. 안 아파서 운동하기 싫다고 깝치다가 감기인지 뭔지에 호되게 걸려 콜록콜록 며칠을 누워 보내고 이제 힘내서 읽어보려 했더니, 오늘이 3월 28일이라고 한단다. 벌써요? 벌써???




우리는 "남성"과 "여성"이 텅 빈 동시에 의미가 넘쳐 흐르는 범주라는 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그 과정의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 텅 빈 것은 그 범주가 어떤 궁극적이거나 초월적인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가 넘쳐 흐르는 것은 그 범주들이 고정돼 있는 것처럼 보일때조차 그 안에는 여전히 대안적이거나 거부당했거나 억압된 정의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 P99

의미가 다차원적이고, 관계적으로 확립되며, 한 명 이상의 청자를 향해 있고, 기존의 담론)장 속에서 표현되는 동시에 새로운 장을 형성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구든 푸코(암시적이긴 하지만 스테드먼 존스의 연구 속 또 다른 존재)를 읽을 수 없다. - P117

그 공통분모는 그 유형은 다를지라도, 자산을 소유한다는 것이었다. 차티스트들은 개인의 노동 혹은 노동력의 산물이 그자체로 자산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산을 개인의 정치적 권리 향유와 관련지은 로크 이론의 한 측면을 발전시켰다. 그러면서 차티스트들은 이미선거권을 획득한 이들과 자신들 사이의 또 다른 유사성 - 그들 모두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 P122

강한/약한, 공적인/사적인, 이성적인/감정적인, 물질적인/영적인ㅡ같은 대립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서구 문화가 젠더를 코드화한 예들이다. 이런 젠더화된 용법을 사용할 때 성별에 관계없이 개인들이 그런 정의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또한 그들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그 정의들을 재해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여성들이 "남성적인" 운동을 지지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이는 차티스트운동이 가진 특정한 해석을 긍정하는 것이다. - P123

이것은 여성의 복지가 남성의 복지 안에 포함돼 있으며, 여성의 주된 과업은 소비 행위와 출산이고, 이런 활동들이 아무리 공적이고 정치적일지라도 남성들의 임금노동과 그 위상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했다. 계급의 남성적인 구성은 (젠더화된) 가족 내 노동 분업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어떤ㅍ이들이 자연적인 배치라고 생각했던 것을 재생산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P126

이런 질문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은, 젠더와 계급 사이의 연관성을 "이중 체계" 분석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 접근에서 가부장제는자본주의와 나란히 존재하며 상호 교차하는 사회 체계다. 각각의 체계에는 특유의 조직과 관계, 동학, 역사, 이데올로기가 있다. 흔히 가부장제의"기원"은 가구 내 생산·재생산관계를 비롯한 가족과 친족 체계에 위치한다. 자본주의적 관계는 생산수단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나며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몰성적"sex-blind이거나 젠더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경제적 실천을 수반한다. 45 이런 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가부장적 "젠더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실천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 P162

계급 개념의 구축에 여성적인 것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를 검토하지 않은 채 노동계급 여성에 대해 쓴다는 게 가능할까? 여성들의 문화가 여성들을 어떻게 재현하고, 여성들이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묻지않은 채, 여성에 대한 글쓰기가 가능한가? 이런 문화적 재현과 자기 정의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가정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연관성을 읽어 낼 수 있을까? 모든 여성 또는 동일 계급의 모든 여성에게공통의 자기 이해self-understanding가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는것일까? 19세기 영국에 과연 객관적으로 기술할 만한 노동계급 여성들의 "이해관계"가 존재하기는 했을까? 특정 정치 운동의 정치학과 주장은 이런 이해관계를 정의하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까? - P168

공방은 독립된 건물이거나 마스터 가족의 숙소에 붙어 있는 방이었다. 공방이 집에 붙어 있는 경우, 마스터의 아내는 성수기에 일손을 돕거나 일 년 내내 단추와 옷단을 바느질했지만, 생산의 기본단위는 어디까지나 임금으로 생계를 부양했던 남성 직인들이었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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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3-31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쯤이면 다 읽으셨을까요, 단발머리 님?
저는 이 책 읽으면서 우리가 함께 읽었던 그 사회계약에 대한 책이 떠올랐어요. 지금 생각이 안나요. 진분홍 표지에 여자들 발이 보였던 책이었는데.. 아 답답해.. 그 책에서 사회계약은 남자와 남자들 사이에 이루어진거다, 라고 한 부분 있잖아요. 그 부분 때문에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책도 생각났고요.

단발머리 님, 화이팅!!
 













서문에서 제일 중요한 문장을 꼽으라면 10쪽의 이 문장.

논쟁이 계속된다는 것은 젠더 자체가 가진 규정하기 힘든 특성을 보여준다. 신체적 차이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고, 그 차이와 사회적 처신 및 성적 욕구의 관계 역시 고정적이지 않다. 역사적 기록은 젠더 범주의 가변성과 다양성을 입증하며, 인류학자들도 젠더 범주가 문화적으로 각양각색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10쪽)

고정적이지 않다,는 게 제일 중요한 지점이다. 저자는 '젠더의 불확실성'에 대한 사유가 미셀 푸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건 『감시와 처벌』에서 반복되는 그 주장, '권력은 관계적이며, 억압적인 힘으로 작동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효과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 생각을 24쪽에서 저자는 이렇게 풀어쓴다.

이 글에서 젠더란, 성차에 관한 지식을 의미한다. 나는 미셸 푸코를 따라 인간관계, 여기서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문화 및 사회가 생산해 낸 이해라는 의미로 지식을 사용한다. 이런 지식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며, 늘 상대적이다. 지식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적어도 그에 준하는) 역사를 가진 거대한 인식론적 틀에 의해 복잡한 방식으로 생산된다. 지식의 쓰임새와 의미는 정치적으로 경합하며, 이를 통해 권력관계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구축된다.(24쪽)

젠더는 성차의 사회적 구성이다, 라는 문장에 형광펜을, 주황색 모나미 형광펜으로 줄을 긋는다 해도 여전히 아리송한 이내 마음. 읽고 있는 정희진쌤의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다시 펼쳐보자.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에서 이건 그냥 외우라고 하셨던 바로 그 부분이다.












1949년 출간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서부터 주디스 버틀러의 '정체성이 아닌 수행성(performance)으로서 젠더'에 이르기까지 사상가들의 입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젠더는 다음 세 차원에서 작동한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서로 의존하며 연결된다.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남성다움/여성다움, 남성성/여성성, 성별, 성별 분업, 성차별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만들어낸 차이로서 젠더다. 둘째는 계급, 인종과 함께 사회적 분석범주(category)로서 젠더, 즉 사회 구성 요소(factor)이다. 커피 자판기의 종이컵이 사회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뜨거운 물일 것이다. 이 뜨거운 물이 젠더이다. 물을 얼마나 붓는가, 몇 도의 물을 붓느냐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질 것이다. 프로이트는 젠더를 인간의 무의식으로부터 드러냈다. 젠더를 고려하지 않으면 인간과 사회, 자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젠더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가부장제는 내외부가 없다. 다시 말해 젠더 인식이 없는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 셋째는 메타 젠더(meta gender)로서 '다른 목소리', 새로운 인식론이다. 젠더에 기반하되 젠더를 넘어서는 '대안'으로서 사유를 말한다. 젠더는 '여성 문제'가 아니라 에피스테메(episteme), 새로운 인식론이다.(<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103-4쪽)

훨씬 이해하기 쉬우나 여전히 어려운, 그 무엇. 그것은 바로 젠더.

역사 분석 범주로서의 젠더를 이야기하며 저자는 '젠더'가 '여성'의 동의어로 쓰이는 현상을 지적한다. 학문적 진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여성을 포함하지만 여성이라고 꼭 짚어 말하지 않음으로써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인데, 그 주장의 바탕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관한 생물학적 설명을 거부하고, 그 대신 성 역할 관념이 '문화적 구성물'임을 강조하는 데 있다. 즉, 성별화된 신체sexed body에 부과된 사회적 범주로서의 젠더를 말하는 것이다.(71쪽)

페미니스트 역사가들의 젠더 분석에 대한 접근법이 특히나 흥미롭다. 첫 번째, 가부장제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와 두 번째,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비평 사이의 조화를 모색한 것. 그리고 세 번째, 주체의 젠더화된 정체성이 생산, 재생산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인데, 나는 이 중에서 첫 번째 '가부장제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관심이 많았다. 『가부장제의 창조』의 거다 러너의 질문, 그러니까 어떻게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었는가, 이것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중심에 놓고 읽었다.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그 전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여성의 소외가 공고화되었음을 생각할 때,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매 순간 새롭게 만들어지며, 더욱 저열하고 치졸한 방식으로 구체화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성 운동, 여성의 각성에 대한 '백래시'는 일단의 사건이나 경향이 아니라, 전 역사를 통틀어 한결같이 '현재 진행 중'이라는 뜻이다.

다른 책들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읽어야만 그나마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바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려운 책인 건 분명하지만, 그만큼 흥미롭다는 점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근데, 왜 헌재는.

우리 모른 척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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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5-03-20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 읽어야 하나요? 언니

단발머리 2025-03-20 20:56   좋아요 1 | URL
네, 언니! 😉🤪😎

수이 2025-03-20 21:11   좋아요 1 | URL
언니가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

단발머리 2025-03-20 21:12   좋아요 0 | URL
하하하 🤣😍🤗

은하수 2025-03-20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리 요약을 해주시니.... 또 나름 이해가 되네요.
어려워도 읽었음을 실감하게 하는 문장들을 저도 기억하고 있다니 말입니다^^
꾸역꾸역 읽어나가고 있네요.ㅠㅠ
파이팅~~~

단발머리 2025-03-21 16:38   좋아요 1 | URL
암요. 암요~~~~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밑줄에서 이해와 공감을 ㅋㅋㅋㅋㅋㅋㅋㅋ얻어갑니다.
저도 열심히 읽고는 있는데 진도 안 나가는 것 무엇? 엥?? 하면서 읽고 있어요.
우리 모두 화이팅!!!

다락방 2025-03-21 0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너무 어려워서 진도가 안나가요.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요. 엉엉 ㅠㅠ 정희진의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아직 안읽어서 그런걸까요. 흑흑 ㅠㅠ

단발머리 2025-03-21 16:3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정희진쌤의 그 책 읽은 저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책이기는 해요. 집중해서 읽어야할 듯 한데, 행간이 좁은 것도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ㅋㅋㅋㅋㅋㅋㅋ 하고 있습니다, 저는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5-03-21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어려워서 도통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단발 님 글을 읽으면 또 대충 이해가 갈 것 같네요? 그렇다고 아주 간 것은 아닙니다만.ㅋㅋㅋ 이번 달 책은 정말 진도가 안 나가서 곧 말일이 다가올 것 같아 글자를 읽어야만 하는 건가? 골똘히 생각 중입니다. 우쨌든 노력해보겠습니다. 파이팅.^^

단발머리 2025-03-22 14:19   좋아요 1 | URL
저도 항상 그렇습니다. 될듯될듯 안 되고, 안 되는듯 안 되는듯 ㅋㅋㅋㅋㅋㅋ 알쏭달쏭!
그런 경우 모르는 쪽에 더 가깝기는 합니다만 일단 끝까지 읽어보는 것으로 해야겠지요.
책나무님 파이팅 잘 접수했고요~~ 제 파이팅도 전해드립니다. 파이팅!!
 
















루시와 이야기를 나누던 셜린이 말한다. I'm glad we don't talk politics.

And Charlene Bibber said she kept feeling the same way. We still walked together - or mostly sat on the granite slab - every other week, and one time she said to me, "I'm glad we don't talk politics." I turned to look at her. "We never have to talk politics," I said, and she said she knew that. "I just appreciate it," she said. And I said, "Of course." (216p)

나도 그런 적 있는데, 지난 대선 직전에 대학 친구랑 통화하다가 놀란 경험.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진짜 그럴 줄이야.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후회를 나 혼자 했다. 그 이후로 정치 이야기를 안 하니까, 우리는 여전히 사이좋게 지낸다.

이런 저런 일들에 가정사까지 겹쳐 주중에 못 나가서 지난 토요일에는 광장에 나갔고. 태극기 집회 지나치며 중국 공산당 이야기에 목소리를 높이는 20대 여성의 연설을 강제 청취했다.

경북궁 오른쪽에 내내 서 있다가 안국역 쪽으로 이동했을 때 마침 행진이 시작되어 1호차 따라 종각 찍고 유턴. 출발점으로 다시 이동. 행진과 연호. 나라 구하느라 애쓴다,는 말로 크게 위로해 주었는데도 동행인은 콜록콜록. 안 나왔으면 내가 시름시름 할 판이어서 나오긴 나왔어야 했다. 내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나도 놀란다. 선창할 용기는 없지만서도 목소리 높여 박자를 맞춰 구호를 외쳤다. 그 당연한, 그 무엇을.

윤석열을 / 파면하라

윤석열을 / 파면하라

윤석열을 / 파면하라

헌재가 오늘도 선고일자 공고 안 해서 심히 피곤하다.

























Keep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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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3-20 0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s://youtu.be/3AtDnEC4zak?si=5vmeIn_YMfBdcTFw

맥락은 다르지만 이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단발머리 2025-03-20 11:57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링크해주신 노래의 라이브 버전 들으면서 이 페이퍼 썼습니다. 다시 들어도 명곡인 것이며 ㅋㅋㅋㅋㅋㅋㅋㅋ

광장에서 부른 노래 중에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참 좋았어요.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책읽는나무 2025-03-21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어요. 빨리 결과가 나야할텐데 말입니다.

단발머리 2025-03-22 14: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책나무님~~ 세상에... 아직도 결과가 안 나왔어요. 이런 순 ㅠㅠㅠㅠㅠㅠㅠ
 













며칠 전, 전데에 대한 글을 찾다가 이런 문단이 눈에 들어와 두 번을 읽었다. 계속 생각나서 다시 그 글을 찾았고(내가 쓴 글에서 인용했는데도 찾는데 오래 걸리는 편), 한 번 더 읽었다.






나의 젠더란 사랑했던 사랑의 대상이 구성한다는 것. 내가 사랑했던 무언가와 이별했다면 그 대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남아 있다는 것. 그러니깐 나의 일부로. 나의 일부로 남아 내 안에 남아 있다는 것.



잊을 수가 없는 내 안의 일부. 잊을 수 없는. 나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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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5-03-14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름이 곧_옵니다. 새로운 사랑을 합시다. 응?! 🤪

단발머리 2025-03-15 10:59   좋아요 1 | URL
앞으로 점점 봄이 짧아진다고 해요. 새로운 사랑 좋지요~~ 사랑이라니!

수이 2025-03-15 13:23   좋아요 0 | URL
사랑이라니 선영아 😛

단발머리 2025-03-15 13:27   좋아요 0 | URL
사랑이라니 수이야 😘😍🥰

수이 2025-03-15 13:40   좋아요 1 | URL
사랑뿐이야 단발아 🥸😎🧐🤨🤯

건수하 2025-03-14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젠더 트러블 읽기 전에 읽을까 하고 사둔 책인데, 쉽지가 않네요 @.@

단발머리 2025-03-15 11:00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젠더 트러블 읽던 중에 추천받아 읽은 책이에요. 이쪽이든 저쪽이든 저도 쉽지 않더라구요 @@
 
친밀한 착취 : 돌봄노동
알바 갓비 지음, 전경훈 옮김 / 니케북스 / 202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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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적 이성애와 무성애의 섬 (feat. 수하님)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327166)

[젠더 트러블] 젠더는 반복된 일단의 행위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2808169)

이성애와 성 범주와 관련해 이 글과 연관이 있는 예전 글의 링크를 올려둔다. 먼댓글이 없어져서 많이 아쉽다.

평소에는 자주 못 만나던 교회의 구역 식구들이 연말에 한자리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내가 아는 가장 착하고 순한 엄마들 중에서 자기주장이 강하고 야무진 집사님 1인이 그러는 거다. 아침에 아이들 깨우는 게 너무 힘들다고. 10분만, 5분만. 딱! 5분만. 5분 뒤를, 그리고 10분 뒤를 말할 때, 그 시간에 맞춰 아이를 깨워야 하는 사람인 나는, 그 시간 동안 '대기'할 수밖에 없고. 대기하는 동안 내 시간은, 그렇게 그냥 흘러가 버리니, 그렇게 잃어버린 내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이 그녀의 토로였다. 어느 집이든, 어느 집의 엄마든 겪어내는 일이기에 모두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 역시 고개를 끄덕끄덕. 맞아요, 진짜! 진짜 그래요. '엄마, 나 5분 뒤에 깨워줘요!'의 상황이 이 책이 말하는 바로 그 '상황', 그 situation이다.

아침에 제시간에 착실히 일어나 작업장으로 착착 걸어 들어가는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여성은 가장 중요한, 가장 근본적인 역할을 맡는다. 전통적인 핵가족 모델에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중산층에 속하는 백인 여성은 돌봄노동을 주로 맡게 되고, 이는 자연스레 '여성의 일'로 여겨진다. 돌봄노동의 핵심은 '감정노동'일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 인정을 원하는 우리의 정서 욕구를 채우는 데 무임금 재생산 노동이 필수인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무임금 재생산 노동은 개별화된 욕구 충족을 통해 개개인의 차이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한없이 복잡하다. (100쪽)


나는 인간이 서로에게 '의지'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 그런 시도 자체가 모순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 인간은 입속으로 무언가를 넣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간은 동물과 식물에게 생존을 의탁한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인간 식물'만이 올곧이 존엄하고 완벽한 자존이 가능하다.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 출생 직후 극도로 유약한 상태에서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신생아 뿐만 아니라, 성인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녀, 친구와 이웃으로부터 얻는 정서적 지지, 정서적 도움이 생존에 필요하다. 생필품이라 할 만한 것들은 국가의 범위를 넘어 다른 국가의 사람들, 다른 국가의 노동자들을 통해 얻어진다. 아침에 먹은 바나나는 스미후루 감숙왕 바나나.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글로벌 기업이다.


요는 이러한 도움, 이러한 돌봄이 여성의 것, 여성'만'의 것으로 강제되고,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있다. 그것이 왜 여성의 일인가. 왜 여성만의 일인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곧 여성만의 영역이었던 출산에서 여성은 비로소 탈출하게 될 것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예언했던 바로 그 해방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출산은 여성, 가임기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출산을 제외하고 다른 영역에 있어서 여성이 할 수 없는, 즉 남성에게 가능하고 여성에게 불가능한 '일'이란 있을 수 없다. 동시에 여성이 할 수 있는데 남성이 할 수 없는 일이란 것도 없다. 설거지와 화장실 청소, 아이 목욕시키기와 밥 먹이기, '어린이집 데려다주기'와 '자전거 뒤쪽 잡아주기'의 어느 지점이 '여성적'이란 말인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건 '여성의 성역할'로서의 돌봄노동을 의미한다. 이를 '여성적'인 일로 규정함으로써 남성 집단 전체가 받게 된 이익, 남성으로써 누리는 특권에 대한 제고가 반드시 필요하다. 일면 이제는 이런 인식이 상식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여성은 스스로, 그리고 사회적 압력과 문화의 이름으로 '여성적인 일'에 복무한다. 복무할 것을 요청받는다. 요청받은 수행을 반복한다. 평생에 걸쳐.

이 지점에서 이성애 로맨스가 중요하다.

여기에 이성애 로맨스와 가정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홍보가 따랐다. 이성애 결혼이 곧 좋은 삶이 되었고, 모두가 핵가족이라는 규범적 재생산 제도를 원하는 듯 보인다. 이성애는 무임금 노동의 자연화다. 이성애를 통해, 젠더화된 노동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며 좋은 것이 된다. 로맨스 이데올로기는 감정노동을 일이 아니라 보상으로 보이게 한다. (120쪽)


왜, 왜 이성애가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는가. 될 수 있는가. 여성이 남성을,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잠깐. 누가 여성인가? 누가. 누가 남성인가. '누가' 남성이 될 수 있는가. 누가 누구를 '여성'이라고 혹은 '남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모니크 위티그가 주장한대로, "성 범주는 남성이 여성의 재생산과 생산을, 결혼 계약으로 실제 여성 개인을 전유하는 이성애 사회의 생산물이다(<스트레이트 마인드>, 51쪽) 즉, 일방을 남성으로, 다른 한쪽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인간의 성을 오직 두 가지 방식으로 한정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인위적으로 범주화된 두 종의 인간, 여성과 남성이 구분되고, 이성애만을 긍정하며, 또한 이성애 결혼을 권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가부장제가 공고화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젠더 관계를 이념적으로 재정하는 주요 수단 중 하나였던 “여성 논쟁”에서는 두 개의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 첫째로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를 극대화하고 남성성과 여성성의 전형을 더욱 명확하게 구분 지은 새로운 문화적 규준이 구축되었다. 둘째로 여성은 과도하게 감정적이고 욕망이 넘치며 자기통제능력이 부족한 만큼 선천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남성의 통제 아래에 놓여야 한다는 명제가 확립되었다. (『캘리번과 마녀』, 164쪽)




They call it love.

사랑이라 부르며 요구되는 착취 속에 여성들은, 대부분의 여성은 이 명령을 내재화했다. 자신을 희생하라는 요구, 규범적 여성성의 핵심적 요구에 부응했다. 오랜 기간 그것이 여성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대부분의 사회에서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이를 거부한 여성은 폭행당했고, 살해당했고, 미친년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가 온다.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순응하기를 거절하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재생산을 거부하는(182쪽), 자주적으로 살기로 결정한 새로운 세대가 온다.


돌봄 노동에 관한 부분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이 다루어야 하는 기본 전제를 정연하게 정리한 책이어서 1독을 권한다. 논의는 돌봄 노동 거부를 넘어 가족 해체까지 나아가는데, 4인 핵가족의 한 사람이며, 정형화된 삶의 규준이 강조되는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다른 '가족', 다른 '공동체', 다른 '그 무엇'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기에 그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표지에 속으면 안 되는데, 읽다 보면 사실 이렇게나 예쁜 분홍분홍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아니, 우리가 요구받는 그 무엇, 친밀함과 다정함, 그리고 사랑이 이렇게 분홍분홍한 것은 사실이니, 그런 측면에서 제대로 된 선택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 책, 실비아 페데리치 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페데리치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누군가에게 좋은 모델이자 레퍼런스가 된다는 건 신나는 일일 것 같다. 페데리치님, 그거 아세요? 알바 갓비가 페데리치님 좋아한대요. 분홍분홍하대요!





즉 노동 행위가 주체를 존재하게 한다. 주체는 기억, 욕망, 습관을 통해 안정된 실체로 드러난다. 이런 것들은어떤 유형의 노동을 능숙하게 반복하면서 내면화된다. 주체는 사회적으로 성립된 자아를 사회보다 앞선 진정한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감정노동의 경우에 특히 그렇다. - P45

이성애는 재생산 노동의 자연화고, 재생산 노동에는 자본주의의 자연화가 따른다. 페미니스트는 이런 자연화에 도전해야 한다. - P125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맞서 투쟁하는 방법 중 하나는, 자본과 국가의 노동자 계급의 재생산 비용을 지속적으로 늘 리는 주거와 보육 서비스의 무상 지원같이 새로운 사회적 욕구를 만드는 것이다. - P130

사회학자 디무트 엘리자베트 부벡DiemutElisabet Bubeck이 말하듯, 모든 여성은 직접 착취당하지 않아도 젠더에 기초한 착취에 취약하다. 이성애 제도는 자본에 이로울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이로운 방식으로 착취한다. - P141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생산 노동은 자주적 주체성과 병립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이런 유형의 노동이란 다른 사람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의지보다는 그러한 욕구가 노동 주체를 순응시키는 힘이된다. 따라서 자주적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재생산 노동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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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3-12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자본주의에 찌들어 살고 있지만 그러나 자본주의가 무찔러야 할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특히 우리 여성들이 고통스러운건 자본주의 탓이다. 이성애 역시 자본주의가 강제했다!! 그런데 한 개인이 그걸 어떻게 쳐부수지? 이러다보면 다시 굴레에 빠지게 되고.. 여하튼 자본주의 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책을 읽기를 매우 좋아하는바, 이 책도 제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 책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제목이 좀 음... 저같은 꼴페미에겐 순하게 느껴졌거든요. 이미 다 아는, 속터지는 내용일 것 같다는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읽다보면 매운맛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도전합니다!!

단발머리 2025-03-13 15:2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댓글에 공감됩니다. 결론은 자본주의로 가는데 이걸 이길 힘이 우리 문화에, 우리 시대에 가능할까 생각할 때 저는.... 불가능하다 쪽이거든요. 근데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현재에 해결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파국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매운맛이긴 한데, 우리가 전에 읽었던 책들(페데리치, 달라코스타, 크리스틴 델피)이 있어서 그래도 잘 넘어갑니다.
도전은 항상 환영이구요!

다락방 2025-03-12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이 글의 도입부에 교회 집사님 얘기요, 아이들을 5분후에 깨워주고 또 깨워주는 일. 이것 자체는 사실 어느 집에서나 일어나는 일상이잖아요. 그런데 ‘그렇다면 아이를 깨워야 하는, 대기하는 나의 그 시간은 어디서 보상받나‘ 에 대해서는 제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서, 그 부분에 대해 큰 깨달음 얻고 갑니다. 아마 저는 누군가를 깨워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런 식의 생각은 마땅히 언젠가 나와야할 것이었고, 그 집사님께 베티 프리단 소개해드리고 싶네요. 어쩐지 잘 맞을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5-03-13 15:29   좋아요 0 | URL
그 집사님은 전업주부의 이상이며 소임(?)으로 여겨지는 자녀 교육에서 ‘세속적‘ 측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시고 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자기 공부를 시작하셨어요. 아주 잘하던 분이라 다시 공부하는데도 잘하시더라구요.(부럽네욬ㅋㅋㅋㅋㅋㅋㅋ)
베티 프리단 좋은 선택이네요. 책을 좋아하시는 분은 아니신데 독서 모임도 하시고 그러거든요^^

수이 2025-03-12 16: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182쪽 문장들 소리내어 방금 읽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이혼한 까닭에 접해서 다시 읽어보았고 지금 제 맞은편에 앉아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다시 읽어보았어요. 저는 한 번도 그런 투사로 살아가고 싶었던 적은 없었던 거 같아요. 주입받은 그대로 충실한 이성애에 사로잡혀 멋진 왕자랑 비스무리한 경제력 있고 근사한 남자와 가정을 이루면서 알콩달콩 펭귄새끼들보다 더 어여쁜 새끼들을 내 품 안에서 온전하게 보다듬으면서 따뜻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었던 거 같아요. 물론 이게 시나리오대로 딱딱 갈 수가 없구나, 라는 걸 알게 된 건 구남편 덕분이긴 하지만요. 동시에 저게 내 욕망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동시에 아 내 시나리오대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걸 정확히 알았고 어떤 욕망의 결로 흐르건 간에 돌봄노동과 주체성을 병합시키도록 하자. 이대로 살다간 미쳐 죽건 속터져 죽건 둘 중 하나다 그렇게 일단 내질렀던 거 같아요.

단발머리 2025-03-13 15:32   좋아요 0 | URL
저는 모든 사람이 투사로 살아야한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요. 일단 제가 투사가 될 기질이 약한 사람이고요. 소시민적 이상을 무조건 거부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근데 우리가 내내 읽는 페미니즘의 교훈은... 그런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는 건데, 설사 우리의 현실이 그러하더라도 그 억압과 무게를 감당하는 여성은 많지 않으니까요.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 같은 분투의 시간이 필요하죠.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어요.

수이 2025-03-12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비아 페데리치 언니도 그렇고 알바 갓비도 그러하긴 한데 저는 완독 후 좀 더 깊은 회의감에 사로잡혀서 아 내 한계는 여기까지로구나 그걸 명확하게 알았어요. 돌봄노동에 사로잡혀 정신 없이 살아가는 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가까이 하게 되면서 더 주체성과 돌봄노동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됐고 여자가 아무리 똑똑해봤자 결국 한국 여성의 삶은 정해져 있는 거 같아, 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또 곰곰. 어딘가에 해방의 길이 있으리라는 건 알겠는데 이걸 병행해가는 여성들(물론 돌봄노동하는 남성들도 마찬가지고)이 만족할 수 있는 때가 다다르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를 후_일 거 같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어요. 결국 욕망의 결이 아닐까 싶어요. 둘 다 운 좋게 해나가리라 여겼는데 그 친구(유학간 친구)도 그렇고 지난 제 삶을 봐도 그렇고. 지금 카페에 말린 장미 다발이 데코로 놓여져 있는데 말린 장미로 살아가고픈 이들은 아무도 없겠죠. 17년 동안의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아이를 낳아 키웠고 그것만 따지고들어도 아쉬울 건 없는데 17년 동안 말린 장미로 집 안에서 살았던 거 같아요. 더 이상은 못해먹겠다 싶어서 뛰쳐나오긴 했지만.

단발머리 2025-03-13 15:41   좋아요 1 | URL
해방의 길이 생각보다 멀리, 저기 저 길 끝, 골목 돌아가면 나오죠. 나이가 40대는 지나서야...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서. 지난 일을 후회하는 건 의미 없지만, 사무치는 후회와 원망과 회한이 없다면 그것도 거짓말일 테고요.

한편으로 저는... 전업 주부 엄마에게 요구되는 그 무게. 아이의 공부와 진로와 관련된 압박(이 책에 소개된 감정노동, 즉 다정함으로 아이를 다독이고,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하는 것)이 상당하니까요. 사람들에게 오르내리는 대치맘의 라이딩 생활 같은 거요. 오늘 기사에는 어떤 연예인이 아이 사교육비를 공개했는데(물론 어마무시한 금액) 사람들 반응이 또 오늘의 현실을 보여주고요. 이런 것들을 엄마들에게 요구하면서, 자유롭게 살아라, 제 자신을 찾아라,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요.
이건 전교 1등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 아닌가 말입니다. 공부에, 예체능에, 아이 체력도, 아이 교우 관계까지 관리할 것을 ‘요구‘하면서 ‘너 자신을 살아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가능하냐고요. 우주 최강 슈퍼맘이라도 힘들겠단 말입니다.

2025-03-12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3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7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7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7 1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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