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라고 쓰려고 했는데, 추억이라고 썼다.
추석이라서 고소하고, 기름진 이야기 써야 할 듯싶은데, 그런 이야기가 없다. 앜ㅋㅋㅋㅋㅋ 동서가 LA갈비 해왔는데, 시어머니가 우리집 육식인간 주라고 하시면서 싸주셨다. 도라지, 고사리나물 감사한데, 감사하기는 한데, 육식 인간은 먹지 않을 것이기에. 고소하고 기름진 이야기는 여기서 끝ㅋㅋㅋㅋㅋㅋ
사사키 아타루의 『모두를 위한 철학 입문』을 읽고 쓴다.
죽음에 관한 책들에서 여러 번 읽었겠지만, 자꾸 읽어버리는 대목을 『죽음: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에서 다시 확인했더란다. 죽음이란 타인의 죽음이다. 내게 의미 있는 죽음이란 타인의 죽음이고, 나의 죽음은 사실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일이다. 사사키도 이 지점을 지적한다.
정리하자.
죽음이란 늘 '타인의 죽음'이다.
죽음은 불특정한 '사람'에게 찾아온다.
우리가 체험하는 죽음은 늘 '타인의
것'이다.
나에게만 존재하는 '나의 죽음'을 체험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통해,
타자의 확인을 통해 이루어진다. (86쪽)
요즘에 내가 계속 밀고 있는(내가 안 밀어도 잘나가시는 분인데, 열심히도 밀고 있음) 프리다 맥파든의 『The Housemaid』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앤디였던 것. 하지만, 이제 앤디가 아닌 그 무엇. 앤디가 살았던 그것. 앤디라 칭했던 그 장소. 하지만, 이제 앤디가 아닌 그 무엇. 그 무엇을 앤디라 할 수 없다면, 앤디는. 앤디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려고 한다면, 먼저 '생명/살아있음'에 대해 다뤄야 한다. 자연스레 책은 빅히스토리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데, 우주의 기원과 생명의 시작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의식에 대한 문제를 다루려면, 뇌과학 역시 빼놓고 갈 수 없기에 논의는 점점 복잡해지고, 책은 점점 두꺼워진다. 인간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주에 대한 이해와 의식에 대한 현재까지의 과학적 성과 또한 알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한 결론은 사실 생각보다 훨씬 더 단순할 수도 있겠다. (단순한 거 좋아하는 편) 우주적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이 거대한 우주 속 변방 은하계의 구석자리에, 태양계에 속한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지난한 진화의 과정 속에 사피엔스라는 종이 탄생했는데, 이들이 여차저차 이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진화의 과정 속에 종교라는 고도의 정치체를 '발명'해낸 인간은 여러 제의와 의식을 통해 이러한 생각을 공고히 해왔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원시적' 신념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으면 전부 다 끝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구성했던 물질은 분해될 것이고, 그리고 재조립될 것이며, 별의 일부였던 우리는 결국, 별의 일부로 돌아갈 것이다.
이런 결론이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원시적' 신념, 이천 년 전에 유대 지역을 순례했던 한 남자를 신이라 믿는 '원시적' 신념을 오늘에까지 간직한 사람이다. 비이성적이라고 한다면, 더하면 더했지 덜할 수 없는 게 바로 종교이고, 내가 바로 그 종교인이다. 나는 그 점을 받아들인다. 다만, 궁금한 지점은 여기인 것 같다.
아무것도 허락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세상에 태어난다.
살아 있는 이상 언젠가 죽어야 한다.
백 년, 천 년 후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술이 있다. 예술을
통해 운명을 '웃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우리의 운명을 비극이 아니라 희극으로
만들 수 있다.
명랑하고 쾌활하게, 큰 소리로 웃으면서
운명을 헤쳐 나갈 수 있다. (158쪽)
158쪽의 저 두 문단 사이의 간극을 왜 사사키는 채우려 하지 않는가. 내가 알고 싶은 지점은 바로 그 간극 사이에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동의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난 이상 (이렇게) 살고 있으며,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죽게 될 터인데. 내가 이 지구상에서 나를 기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그 모든 일을 다 한다 해도 결국에 나는 잊혀지고, 지워질 텐데. 그렇다면 왜... 영원히 사멸된 이 '내'가, 예술을 통해 내 운명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말인가.
<작가의 말>에서 사사키는 이렇게 덧붙인다.

삶에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주어지지 않았고, 주어지지 않을 테니, 내가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고. 아무리 삶이 의미가 없다손 치더라도, 우리에겐 '의미'를 부여할 힘이 남아있다고.
아.... 없다고 하려면 끝까지 없다고 하시고, 있다손 치려면 처음부터 있다고 하셔야지. 원래 없는데, 있다고 하자니요. 아니, 원래 있다 없다는 중요하지 않으니, 의미를 (있다 치고) '부여'하자니요.
나는 이 부분이 석연치 않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에 세뇌된 종교인의 뇌로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지점이다. 기독교에서는 너의 '존재 의미'가 태초에서부터 '있었다'라고 말한다. 시편 139편에서는 '나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나를 보셨으며'라고 쓰여 있다. 이 땅에서의 나의 삶이 기독교의 신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어 이 모든 과정 역시 의미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깐 기독교에서는 내 삶에, 내 인생에 처음부터 의미가 있었고,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니, 죽음은 현생과 이생을 연결하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라고 말한다.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통해 성도의 삶이 견인되고, 완성되기에 오히려 재회의 순간으로 이해될 때도 있다. 기독교는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그래서 네 삶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망해가는 미국을 대신해 전 세계의 유일한 패권국가가 될지도 모를 중국의 유일한 지도자 시진핑과 대통령 5번, 국무총리 2번에 빛나는(?) 막강 러시아의 푸틴이 나눴던 대화가 화제였다. 지난 전승절 행사 시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푸틴의 통역사가 "인간의 장기는 계속해서 이식될 수 있으며 당신은 오래 살수록 젊어지고 심지어 불멸에 이를 수 있다"라고 중국어로 말하니, 시진핑이 "인간이 150세까지 살 수 있을 거라는 예측도 있다더라"라고 답했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가졌으며, 이를 유지할 막강할 권력을 가졌으니, 이제 부족한 건 살아갈 날 수뿐이며, 고민은 오직 노화와 죽음. 방법은 장기 이식 그리고 줄기세포? 그러나, 그대들 역시 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아마도 죽게 되리라.
추석이라 고소하고 기름진 이야기 쓰고 싶었는데, 아니, 알콩달콩 새콤달콤한 이야기 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내일 아침에는 다른 책을 찾아보겠다. 일단 오늘밤에는 좀 놀고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