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he Crash

프리다 맥파든의 10번째 책이다.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평범한 교훈을 야무지게 얻게 된다. 완벽한 가정에는 반드시 아이가 필요하다는 전제, 사람들의 그런 고정 관념이 얼마나 집요한지 보여준다. 모성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어떤 여성이 어머니가 '될 만한가'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특히, 임신한 여성에 대한 규제와 규율, 온갖 잔소리가 정당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세세히 펼쳐진다.

프리다 맥파든의 솜씨가 놀라운 지점은, 소설의 배경이 외부로부터 고립된 지역이고, 등장인물이 몇 명 되지도 않는 설정에서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가끔 과거가 회상되기는 하지만, 중요한 사건은 오직 하나, The Crash 뿐이다. 그 사건이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들을 은인과 범인으로 만들어버림과 동시에 선인이며 악인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래서, 제목이 The Crash.









2. The Tenant

프리다 11번째 책이다. 프리다의 다른 작품과 달리 작품의 전반부는 남성 화자의 목소리로 진행된다. <감사의 말>에서 프리다도 이 부분을 언급했는데, 처음 몇 챕터를 남편에게 보여줬더니,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작은 오해로 인한 크고 작은 갈등은 끝내 증오로까지 이어지는데, 마지막에 밝혀진 건 진실이 아니라 여전히 숨겨진 비밀이다. 하나의 비밀을 발견하고, 이로 인한 실망과 아픔이 다 치유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진실이 그들을 덮쳐온다.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이 그랬던 걸까. 서로에게 생명의 은인이 되었던 두 사람은 끝내 함께하지 못한다. 마지막 비밀을 고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밀을 감춘 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3. 아메리고

아메리카에 아메리고의 이름이 붙은 까닭을 밝혀낸다. 우연과 오해, 그리고 여러 실수가 연속적으로 만들어지면서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으되, 새롭게 태어난 이 신대륙은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아메리고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콜럼버스에게서 그 영광을 찬탈한 것이 아니라, 여러 우연의 기묘한 조화를 통해 그 일이 그렇게 '되어 버렸음'을 츠바이크의 치밀하고 촘촘한 자료 조사와 유려한 문장이 차분히 밝혀낸다.


신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열망은 환상에 가까웠다. 그러한 환상이 조직적인 수탈에 이어 국가적인 차원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를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유럽인들의 탐험과 정복의 야망이 어느 누구와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탐욕스러웠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츠바이크는 베스푸치가 그 땅을 '문두스 노부스'라 부름으로써 유럽인들에게 신대륙이라는 인식을 불러왔다(179쪽)고 설명했다.

그곳은 돈이나 소유물, 권력을 위한 싸움이 인간들의 마음을 뒤흔들지 않는 땅이었다. 그곳에는 제후도, 왕도, 고리대금업자도, 강제 부역을 시키는 이도 없으며 생계를 유지하려고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일도 없었다. 그곳의 대지는 마치 어머니처럼 인간을 먹여 살렸고, 인간은 서로에게 영원한 적이 되지 않았다. 베스푸티우스라는 이 무명의 사나이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것은 아주 오래된 종교적 소망이자 메시아적 염원이었다.(58쪽)

이국적인 환경의 완벽한 외부. 제후도, 왕도, 고리대금업자도 없는 땅. 현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곳. 풍요로운 자연의 보살핌 속에서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곳. 베스푸치가 사람들 마음속에 그려낸 '문두스 노부스(Mundus Novus)'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 가능한 곳이다. 불가능의 공간, 그곳에 붙여진 이름이 '아메리카'이다.









4. 메리

두 주 동안 읽었던 책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책이다. 4번? 아니, 5번을 읽었다. 여러 번 읽어도 즐거운 책은, 또 읽고 싶은 책은, 좋은 책이다. 읽을 때는 반드시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어제도 그카더니

오늘도 그칸다!

자꾸 그카믄

확 묶아 놓는다!



책을 많이 못 읽어서 온 세상에 죄송하기는 한데, 그래도 책을 샀다. 먼 곳에 있는 친구가 보내준 예쁜 책들은 살포시 세워 두었다. 도서관 책으로 읽은 샐리 루니 한글책을 사면서 다른 샐리 루니도 샀다. 프리다 맥파든은 킨들 사기 전에 사두었던 모양이고, 장강명도 한 권 샀다. 그래도 주인공은 손열음. 손열음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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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5-09-27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11번째 프리다 맥파든! 저 이번에 하우스메이드 3권 주문해서 오늘 받았어요. 근데 기다림이 길어서 그 사이 카라마조프를 시작해버렸지 뭡니까.. 하우스메이드 과연 얼마나 기다려야 손에 잡을 것인가🙄
메리는 아직 못 본 안녕달 작가 책이군요! 좋아하신다니 주문하러 갑니다 쑝쑝

단발머리 2025-09-27 22:32   좋아요 1 | URL
저는 킨들로 읽고 있는데, 잘 몰라도 휙휙 넘기다 보니 벌써 11권째네요. 12권째 프리다 책의 제목은 <The Teacher>입니다. 신기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ㅋㅋㅋㅋㅋㅋㅋ 막 펼쳐지네요.
카라마조프를 시작하셨다니 너무 근사한 거 아닌가요. 저는 러시아 소설은 무조건 ㅋㅋㅋㅋㅋㅋ 겨울에 읽어야한다는 어떤 강박이 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님의 카라마조프 읽기 응원합니다!
메리는....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 호호호!

망고 2025-09-27 2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다 맥파든은 책도 많이도 썼군요. 쓰는 족족 다 인기있고... 부자되셨겠당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이 좋아하는 책도 저기 있군요ㅋㅋㅋㅋ
그림책에 그림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강아지 똥까지ㅋㅋㅋㅋ은근히 리얼하네요

단발머리 2025-09-28 07:08   좋아요 1 | URL
네ㅋㅋㅋㅋㅋ 어디에서는 18권이라 하고 또 어디선가는 24권이라 하더라구요. 부자되셨을거라 생각합니다. 바다 건너에서도 읽는 사람들이 있고요 ㅋㅋㅋㅋㅋ
다락방님이 좋아하는 책은 바로 그 책입니다. 망고님이랑 저랑 생각하는 그 책ㅋㅋㅋㅋ
‘안녕달‘이라는 이 작가의 책이 대체로 그림이 이런 느낌입니다. 이 책은 특히 사투리가 아주 정겹구요ㅋㅋㅋㅋㅋㅋㅋ
 












예전에 읽었던 소설(장르:로맨스)이 있다.

데이트앱을 통해 만난 두 사람. 여주는 가벼운 만남을 원하는데, 남주는 여주에게 단번에 반해버렸다. 직장(이공계)과 공통의 취미 등으로 자주 만나게 되는 두 사람. 안 그러려고, 진짜 안 그러려고 하는데(뭐를?), 자꾸 그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엥?). 여주는 자꾸 자신의 비밀을, 과거에 잘못된 행동을 남주에게 털어놓는다. 판단하지 않고 들어주는 남주. 여주에게 진지한 만남을 요청한다. 하지만, 여주는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하고. 그럼에도 계속 만나게 되는 두 사람. 곤경에 처한 여주를 도와주려 했던 남주.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여주는 남주의 도움을 거절해 그의 신뢰를 반사해 버리고. 남주는 크게 상심한 채 여주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기로 한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르고.

남주를 찾아온 여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여주와 마주친 남주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하고, 여주는 남주를 붙잡아 세운다. 이래저래 도와준 거 고마웠다고. 자기가 이래저래 했던 거 미안하다고. 또다시 자리를 뜨려는 남주.

좋아한다 말했는데

고맙다니요.

사랑한다 말했는데

미안하다니요.

다른 할 말이 있다고 머뭇거리는 여주. 가슴속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남주가 말한다. 2분 줄게요. 하고 싶은 말을 해요. (이 책은 번역본이 아직 없습니다)

여주가 말한다. 나한테도 이런 사랑이 가능할 줄 몰랐다고. 당신을 만나면 안전하다고 느꼈다고. 지금 내 모습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고.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상관없다고.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혹시 내게 기회를 줄 수 있겠느냐고. 그러겠다고 대답하는 남주의 머릿 속 생각은 이탤릭체로 쓰여있다.

"It means that ..." That you're mine, the uncivilized part of him screamed. That I'm going to take you and hoard you.

드디어 도착했다. 바로 이 부분이다. 타인을 자신의 소유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생각. 그런 발상. 그런 시도. 10번도 더 인용했을 법한 <가부장제의 창조>의 그 문장을 다시 한번 가져와보자.











다른 인간존재를 잔인하게 대하고 그/그녀에게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노동을 하도록 강제하는 것보다 한수 높은 중요한 발명은, 지배당하는 집단을 지배하는 집단과 완전히 다른 집단으로 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물론 그런 차이는 노예가 될 사람들이 타지방 부족 구성원, 말 그대로 타인들일 때 가장 명백하다. 그러나 그 개념을 확장하고 노예화된 사람들(the enslaved)을 어떤 면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것,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남성들은 그런 지정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정신적 구성물은 대체로 어떤 현실 속의 모형들에서 나오며, 과거 경험을 새롭게 정렬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 경험은 노예제가 발명되기 이전에 남성들에게 주어졌던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 집단의 여성들을 종속시켰던 경험이다. 여성 억압은 노예제보다 먼저 일어나 노예제를 가능하게 만든다. (『가부장제의 창조』, 138쪽)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서는 사유재산의 기원이 여성 억압의 제도화와 가부장제의 강화 속에 있다고 보는데, 거다 러너는 그중에서 가장 먼저 사유화된 것이, 사유화된 집단이 '여성들'이라고 본다. 재생산이 가능한 대상, 재산가치가 충분한 대상으로 여겨졌다는 것인데, 이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여성 교환' 개념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 간의 여성 교환을 통해 남성들은 인간 사회를 '남성 위주로' 조정해 내었고, 이를 문화라는 이름으로 규범화했다. 인류 문명을 통틀어 한결같이 여성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신체적으로 남성과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억압의 대상물이었다.

세상은 변했고, 이제 온 세상은 ‘쿨함’에 대한 추구를 지상명령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요원하기는 해도 여성의 삶은 이전보다 나아졌으며, 또한 나아지고 있다. 이제 여성도 자신의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지고 있다. 샐리 루니의 소설 속 인물들은 그러한 문화 현상의 실체를 보여준다. 내가 너를 사랑하되, 너를 구속하지 않을 것이며. 너는 온전히 내 것일 수 없으니, 때때로 혹은 영원히 너는 자유하라. 문명인의 생각이며, 차가운 도시 남녀의 사랑법이다.

바람돌이님의 주옥같은 댓글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바람돌이님이 ‘독점욕’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나는 ‘사랑의 배타적 속성’이라고 표현했다. 같은 뜻,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다른 인간관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식이 여럿일 때, 자식들은 평생 엄마의 애정을 갈구한다.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 자식이 있다? 그는 이미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얻어낸 자식이거나 자신에게 당도할 애정이 없음을 간파한 자식이다. 연인 관계가 그러한 독점욕, 사랑의 배타적 속성이 폭발하는 관계라고 생각한다는 부분에서도 바람돌이님과 내 의견은 '쿨하게도' 일치한다.

아일린이 원했던 그것은 인류 문명 초기에 발현되었던 소유에 대한 원초적 감정과 닿아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딴 여자랑 결혼하고, 섹스한 다음에, 나를 생각해… 이런 말도 아니고 방구도 아닌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으며. 사이먼 역시 제정신 못 차리고 헛발질하다가 날새기 전에 정신 챙겨서 다행이다.










오늘 도서관에서 상호대차로 빌린 책은 이 책이다. 퇴근 후에 집에 안 들어가고 샌드위치 먹으면서 책 읽고, 부지런히 챙겨온 무선 키보드 꺼내 이 글을 마저 썼다. 둥지 비기 전에 떠나기 잘했다. 오늘은 셋 다 늦는다고 한다.

이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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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6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점욕과 배타적 속성.... 같은 의미이긴 한것 같은데 언어의 퀄리티가 너무 차이나잖아요. 아 나 진짜 너무 단어가 저렴한거 같아요. 잉잉..... 공부 좀 하지.... ㅠ.ㅠ
저도 가부장제의 창조 읽으면서 가장 신선했던 부분이 바로 저 여성 억압이 가장 먼저였고 그것이 노예제의 모델이 되었다는 의견이었어요. 충분히 수긍이 가서 막 감탄하면서 읽었었습니다. 그런데 계급제의 시작에서 나왔던 저 여성 억압이 오늘날까지 무수한 로맨스로 변주하면서 너는 내꺼야라는 소유욕이 마치 사랑인듯 포장되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왔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그거 막 무너지는 중인거 같아 그건 참 좋은거 같더라구요. 그래도 사랑은 단발머리님 말대로 남들과 다르게 대우받고싶은 배타적 속성을(아 나도 써먹었다. 고급진 말) 가지는게 맞는데 그게 소유욕과는 다른 거니까...

저 오늘 읽은 <동방의 항구들>이란 책에 보면 사랑받는 아들과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아들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단발머리님이 예로 든 아이들 이야기에서 오늘 읽은 책의 등장인물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도 생각나구요. 제가 올해 읽은 가장 핫한 로맨스는 오늘 읽은 동방의 항구들이 돼버렸습니다. 로맨스 거의 없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그냥 로맨스가 되어버리는데 너무 좋았어요. ㅎㅎ

둥지 비기 전에 탈출 좋아요. 둥지 비면 더 좋아질 거 같은데 우리집 둥지도 안 비었지만 저도 뭐 제가 알아서 탈출했습니다. 다들 알아서.... ㅎㅎ

단발머리 2025-09-18 09:49   좋아요 0 | URL
가부장제의 창조... 바람돌이님이 지적해주신 부분 저도 인상깊었던 대목이에요. 같은 그룹의 여성을 노예화한 경험이 다른 민족의 여성을 그리고 다른 민족의 남성을 노예화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었다는 것이요. 저는 남성도 여성을, 여성도 남성을 자신의 사랑과 이상에 대한 대상물로 삼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점점 우리 사회도 그런 사회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요는 우리가 함께 샐리 루니를 읽으면서 그런 쿨한 사랑의 복잡성과 답답함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함께 느꼈다는 거 아닐까 싶어요. 저는 여전히, 연인 사이에는 각별함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구요. 이게 연인 뿐 아니라 다른 인간 관계에서도 어느 만큼은 존재하지만.... 특별해지고 싶은 누군가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올해, 화제의 추천작! 가장 핫한 로맨스 <동방의 항구들> 적어두었습니다. 찾아봐야겠어요.

둥지는 비었다고 합니다. 저도 둥지에 없습니다. 푸하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9-16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의 페이퍼를 읽고나서 그리고 위의 바람돌이 님의 댓글까지 다 읽고나서 제가 한 생각은, 역시나 이성애는 세뇌된 거였다, 라는 것입니다. [여자는 인질이다] 생각이 파바박 나버리고요. 이 세뇌된 이성애가 내가 너의 여자가 되는 것을 낭만적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그 유명한 드라마의 한장면이 생각납니다. 거기선 남자가 여자에게 그러죠.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왜 말을 못해!‘ ㅎㅎ

독점욕, 배타적 속성 그리고 자유 연애, 다자 연에.. 사실 저는 이 세상 모든 것에 있어서, 그것이 사소한 물건이든 사람이든 ‘궁극적인 것‘ 이 있으면 그 외의 것에 욕심이 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이를테면, 몽블랑 만년필을 써보고나면 볼펜이나 펜을 마구 사들이는 걸 멈추게 된다, 는 것입니다. 아 여기서 몽블랑은 상징적으로 쓴거고요 그게 누군가에게는 모나미 볼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얘기인데요, 헐리우드에서 유명한 바람둘이로 소문난 남자 배우 ‘워렌 비티‘가 ‘아네트 베닝‘을 만나더니 결혼하고 다시는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 고 합니다. 이게 되게 그 당시에 화제가 됐었는데요, 저는 아네트 베닝이 워렌 비티에게 궁극의 연인이었다고 생각해요. 자유연애 라는 것은, 그러니까 나도 만나고 다른 사람도 만나고 에브리바디 오케이 에브리씽 오케이, 라는 것은, 결국 아직 궁극적인 누군가가 없다는 게 아닐까,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건 충성심과는 좀 다른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충성해야지, 라는 의지에서 발현된게 아니라, 정말 이 사람이 있으니 굳이 다른 사람한테 눈이 안가는 겁니다. 굳이 다른데서 다른 걸 또 찾을 필요가 없는거지요. 문제는, 그런 궁극의 누군가가 누구에게나,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찾아오는 건 아니라는 거죠.

오늘 단발머리 님이 쓰신 글 읽다가 제가 웃었던 지점은, 이 책을 읽었으니까 웃을 수 있는데, ‘너에게 아내가 있다고 상상해봐, 네 아내는 에쁘고 너에 대해 잘 알고 너네는 오늘 섹스를 하는데, 그런데 너는 잠깐 파리에서 우리가 섹스했던 걸 떠올리지‘ 하던 아일린이 생각나버렸거든요. 폰섹스 마친 사이먼이 ‘파리에서의 너를 생각한게 이 상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부분이었어‘는 그둘이 훌륭한 짝임을 증명합니다. 놀고들있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나 뭐, 그들이 그러고 논다는데 어쩌겠습니까. 흠흠. 말도아니고 방구도 아닌것을..

단발머리 2025-09-19 08:4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다락방님~~ 저 역시 이성애가 세뇌된 거라는데 동의합니다. 에이드리언 리치가 말했던 강제적 이성애요. 이에 대한 낭만화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고, 무엇보다 강력한 건 역시 문화... 음악, 영화, 드라마, 이제 예능까지... 말이지요. 짝짓기 예능을 사람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이유가 있겠죠.

‘궁극적인 것‘, ‘궁극적인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네요. 몽블랑으로 설명해 주시니 아주 딱이구요. 저는 아네트 베닝은 아는데(얼굴만ㅋㅋㅋㅋㅋ) 워렌 비티는 누군지 몰라서 찾아봤어요. 아일린에게는 궁극의 누군가가 사이먼이겠죠. 다른 남자를 사귀어도 동거를 하고 있어도 계속 그리는 누군가는 사이먼일 테고, 또 사이먼 그리고 사이먼.... 사이먼 전 여친이 헤어지면서 그러잖아요. 당신과 함께 사는 건 마치 우울증을 안고 사는 것 같다. 너 때문에 우울해진다 ㅋㅋㅋㅋㅋㅋ 사이먼이 노력해도 안 되는 그런 뭔가가 있었던 거고요. 두 사람의 궁극이 서로여서 참 다행이라고는 생각했어요. 한 쪽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비극은 다시 없습니다. 나는 너를 친구로 두고 싶다는데, 그 한 쪽은 그렇게 되지 않을 때 말이지요.

저는 아일린이 ‘너에게 아내가 있다고 상상해봐... (쩜쩜쩜)... 너는 나를 생각해.‘ 여기서... 아, 아일린, 제발 그만.... 그만~~ 을 크게도 외쳤답니다. 이렇게까지 매달리지는 말라고.... 이러면서 말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9-19 09:28   좋아요 0 | URL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단발머리 님, 제가 그랬거든요? 폰섹스 얘기 하다가 갑자기 거기에 자기를 넣어버려서, 아일린, 그러지마, 그건 좀 아니야, 하지마... 했는데 ... 사이먼이 또 그걸 좋아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말을 말자 진짜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9-19 09:31   좋아요 0 | URL
둘이 비슷한 거죠 ㅋㅋㅋ한 세트이고 짝궁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흐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09-27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도 아니고 방구도 아닌 🤣🤣🤣🤣
저도 웹소 로맨스에서 집착남이 그렇게 인기있는 이유가 궁금하더라고요. 현실에서는 싫지만 소설이니 좋은 거겠지 싶긴 한데, 나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만족감을 원하는 걸까요? 흠:.
저도 폰섹스 장면에서 얘네 대체 뭐하는 거니 싶었어요 ㅋㅋㅋ

독서괭 2025-09-27 10:42   좋아요 1 | URL
아 근데, 무선 키보드 자주 쓰시나 봅니다. 폰이랑 연결해서 쓰시는 거죠? 그거 편한가요? 🤔

단발머리 2025-09-27 10:52   좋아요 1 | URL
전 뭐랄까… 그런 스타일 좋아해요. 폭풍의 언덕, 히스클리프 스타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를 그렇게까짘ㅋㅋㅋ저도 폰섹스에서 쪼금🙃😟😳

단발머리 2025-09-27 10:57   좋아요 1 | URL
저는 짐이 많을 때, 무선키보드 씁니다. 로지텍 k380 분홍색(다락방님 보라색)이구요. 핸폰이랑 연결해서 써요. 그러나 가끔 댓글이 똑같은게 3개가 달리고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09-27 12:08   좋아요 1 | URL
히스클리프 스타일 ㅋㅋㅋㅋ
로지텍은 접히는 건 아니군요? 이것저것 보다가 접이식 초경량으로 하나 찾았는데 과연 내가 이걸 얼마나 쓸 것인가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ㅋㅋ

단발머리 2025-09-27 12:33   좋아요 0 | URL
전 애플 접는 거 있는데 안 쓰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구입한 로지텍 ㅋㅋㅋㅋ 이건 그래도 가끔 이용하는데 쓸 때마다 만족합니다😝☺️😎
 









근래에 제일 많이 생각하는 남자는 사이먼이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닉을 좋아하면서 시도때도 없이 터졌던 복창은 그래도 사이먼을 만나 안정을 찾았고. (코넬은, 말 말자.) 조금, 아주 쪼금은 상처 받은 심성이 치료된 것 같다.


내 문장의 '가끔'을 제외하면 로맨스 판타지로 읽힌다고 친구는 썼다. 첫번째로 연애한 사람과 결혼했으며, 핵가족 4인 가족의 기혼 여성인 나는 여전히 산업화된 로맨스 판타지의 충직한 추종자로서, 친구의 진단이 맞다고 생각한다.(내가 이렇게나 쿨한 사람이다.) 친구의 단어 '변화'가 내가 선택한 '구원'보다 더 적합한 단어였겠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구원이라는 단어를 선택할 때 나름의 고민이 있기는 했다. 더 정밀하게 하자면, 내가 의도한 바는 '답'이었던 것 같다. 남성이 이상화되고, 그가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갈 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답이 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해답이 아닌 답. soulution 아닌 answer. 이 사람이 운명의 그 사람이 아니라, 내게 온 이 사람이 나의 그 사람일 수 있다는 것. 혹은 -이라는 것.

나는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의 사이먼이 『오, 윌리엄!』, 『바닷가의 루시』의 윌리엄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에 대해 썼다. 이른바 '아빠 모드'에 관하여. 두 사람은 정말 비슷한가.

그들이 샹젤리제를 따라 함께 걸으면, 여자들이 그를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키가 무척 크고 아름다웠으며 위엄이 있었고, 결코 그녀들을 돌아보지 않았다.(290쪽)

키가 무척 크고 아름다우며 위엄이 있는 남자. 여기까지는 윌리엄과 똑같다. 다른 점은 그 다음이다. 사이먼은 자신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여자들을 결코 돌아보지 않았지만, (젊었을 적) 윌리엄이라면 뒤를 돌아보고 아마도 그 여자에게 연락처를 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윌리엄, 위엄을 갖춘 윌리엄의 실제는 허상이다. 담담히, 루시가 그의 실재를 밝히는 대목이 있다. 루시에 대한 책 3권(『내 이름은 루시 바턴』 제외. 아직 안 읽었음)을 통털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좀 길지만 옮겨 보자.









나는 늘 그-혹은 그녀-가 뮤지엄의 불 켜진 타워에서 혼자 일하며 느꼈을 외로움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때 내가 느낀 위로란-! 밤마다 나는 뮤지엄 타워의 불 켜진 창문을 바라보았고 밤새 거기서 일하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야 나는 금요일이든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밤에 그 불빛을 보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은 늘 켜져 있었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내가 지켜본 그 시간 동안 자정을 지나 새벽 세시가 될 때까지, 햇빛이 충분히 밝아져서 전등이 여전히 켜져 있는지 알아볼 수 없게 될때까지, 거기서 일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여러 해가 지나서야 내가 어떤 신화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간에 그 타워에는 아무도 없었다.(『오, 윌리엄!』, 293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기다린 사람은, 나를 사랑해 줄 그 '어떤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깐, 실재하는 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여전히 그의 안녕을 비는 '나', 이 '나' 뿐이다. 허상일 수 밖에 없는 그가, 내 사랑이 되는 경우는. 내가 그를 사랑할 때. 내가 그를, 내 사랑으로, 내 사람으로 인정했을 때. 오직 그 때 뿐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답이 될 수 있다.

정답이 아니라 그냥 답.

solution이 아니라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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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6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루시 시리즈의 문장은 왜 단발머리님을 통해서 만나면 더 멋져보이는겁니까? 저도 분명 읽었는데 저런 감흥이 없었단 말이죠. 막 다시 읽어야 하는거야라면서 자괴감에 시달립니다. ㅠㅠ

솔루션이 아니라 앤서(영어 찍기 귀찮습니다)라는 단발머리님 말이 맘에 콕 와서 박힙니다. 그 답만 되어도 아름다운 관계죠. 우리 사람 관계에 욕심 많이 없잖아요.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고 자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근데 이것도 진짜 어려운지라 살기가 다들 쉽지만은 않은것 같습니다.

단발머리 2025-09-18 11:05   좋아요 1 | URL
아~~ 우리 바람돌이님의 칭찬은 얼마나 진지한지요ㅋㅋㅋㅋㅋ소심한 단발머리의 마음 속으로 100% 흡수됩니다.

네, 맞아요. 해결책이 될 수 없죠. 누가 누구의 삶에 대한 유일한 정답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좋은 시절 하나의 기억, 행복한 웃음으로 기억되기를 바랄뿐이구요. 그런데, 그런 좋은 관계는 또 자주 돌아보고 살펴야되잖아요. 찐우정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2-30대 연애사라면 물론 알쏭달쏭 헷갈리기도 하겠지요. 사이먼은 직진하라! 아일린은 행복하라!
 
















일반적으로 성을 떠올릴 때의 그 범주와 한계를 벗어나 더 포괄적(?)인 혹은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성에 대한 서술은 푸코의 『성의 역사』일텐데, 4권짜리이고 2권 읽었지만,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고.










『왓 이즈 섹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 저는 섹스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섹스를 할 때와 똑같은 만족을 느낄 수 있지요."(7쪽)

강의를 하면서 느끼는 섹스의 만족. 라캉은 말할 때, 청중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을 때, 섹스할 때와 똑같은 만족을 느낀다고 말한다. 라캉이 본인만의 성적 취향이나 선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건 섹스가 무엇인가 혹은 어떠한가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이 될 수 있다. 나는 뭐할 때 섹스할 때와 똑같은 만족을 느끼는가. 뭐할 때, 그리고 뭐할 때.










『에이스』의 부제는 <무성애로 다시 읽는 관계와 욕망, 로맨스>이다. 이 책은 일반적인 ‘성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모든 사람이 섹스를 좋아할 거라는 생각, 진짜 남자는 섹스를 많이 할 거라는 생각, 새로운 시대를 맞는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은 원나잇에 개의치 않는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저자의 이야기는 오늘 이 시대 알라딘 서재의 라이징 스타 아일린과 사이먼의 이야기와 겹쳐 보인다. 저자의 남자친구 헨리는 5년간 개방 연애(open relationship)를 하자고 졸랐다. 애인이나 배우자를 두고 자유롭게 다른 사람을 만나자는 거였다. 오랜 갈등의 시간 끝에 두 사람은 헤어졌고, 일대일 관계에 목을 매는 구식의 생활을 버리고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관계로 나아가자는 헨리의 말을 기억하며, 스물 둘의 저자는 데이트 사이트 '오케이큐피드'에 로그인해 괜찮아 보이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그를 만나 아프고 형식적인 섹스를 한다. 이제 자기는 한 남자에게만 목매는 찰거머리도 아니고, 충분히 진보적인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 그녀는 헨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헨리에게 이야기하자 헨리는 축하한다며, 자기가 다 기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여름이 더 지난 어느 컴컴한 밤, 헨리는 마음 한구석에서 모든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내 행동이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벌이자 불신의 신호라는 직감이 들었다고. 헨리는 정확하게 짚었다. 헨리의 기분이 이상했던 건 자기가 내게 1순위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어쩌면 아주 작게나마 있었기 때문이었다.(『에이스』, 114쪽)

두 사람의 끝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나는 두 사람간의 합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계에 만족할 수 있다면, 이 관계 속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오케이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현실판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그만큼에 만족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 관계는 존속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는 열 다섯살의 아일린이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자신의 진의를 사이먼에게 전했다고 생각한다.

내 평생에, 딱 한 사람이라고요.(39쪽)

독서괭님의 정확한 관측에 의해 '전반적으로 개새가 아닌 것으로 밝혀진' 사이먼은 '전반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 진지하게 임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를 괴씸하게 여기는 대목은 바로 여기이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런 배경 때문에 아일린은 그렇게나 오랜 시간 '친구 타령'을 입에 달고 살지 않았나 싶다. 사이먼은 반성하고, 아일린은 행복하길.

아침에는 그가 커피를 만들었고, 밤에 아일린은 그의 침대에서 잤다. 그들이 사랑을 나눈 후, 그는 그녀를 오랫동안 안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더블린에 돌아온 날, 그녀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녀는 사이먼이 크리스마스에 그녀의 가족이 사는 집에 들러 브랜디를 한잔하면서 크리스마스트리를 칭찬할 때까지 그로부터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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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9-14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선 제가 기대한 글보다 짧음에 아쉬움을 토로합니다!!

언급하신 책중 푸코의 성의 역사는 4권까지 다 읽었지만, 사실 그건 제 읽기 능력의 부족함으로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고요, 왓 이즈 섹스와 에이스는 마침 가지고 있으니 저는 그것들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집에 있으니까 지금은 말고.. 그렇다면 섹스에 대해 좀 더 다른 방식으로의 이해가 가능해지겠죠. 저는 다른 방식의 이해,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음 저는 사실 사이먼과 아일린을 ‘각인‘된 사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트와일라잇 읽으셨었죠, 단발머리 님? 거기 보면 나중에 제이콥이 벨라의 딸에게 각인되잖아요. 무조건 그 딸을 지켜야하고 평생 그 아이만 봐야 돼요. 사실 이건 아이에게 각인된거니 좀 징그러운 면이 있긴한데, 저는 이 ‘각인‘이 실제 생활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이먼의 아버지 기질이 제대로 발휘되고 유독 발휘되는 이유는 저는 사이먼이 아일린에게 각인됐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저는 누구에게나 이 각인이 일어나지 않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일어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게 꼭 연애감정에서뿐만은 아니고 어떤 관계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그러나 모두에게 살면서 한 번 이상 꼭 일어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제가 어떤 운명적인 사랑 같은걸 믿는 걸지는 모르겠는데, 예전에 봤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에서 하림이 여옥에게 그랫던것도 각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 때 하림을 너무나 좋아하던 여자가 하림의 온 신경이 최대치 사랑하는 여옥에게 가있는 걸 보고, 그녀를 구하는 것에만 쏠린 걸 보고 ‘당신에게 여옥은 국가보다 더한 존재이군요‘ 라고 말하거든요. 하림은 부정하지 않고요. 물론 이건 드라마 캐릭터긴 하지만, 저는 이 각인이 실제로 어떤 경우에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있고, 저는 사이먼이 아일린에게 각인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얘긴데, 갑자기 생각나서 덧붙였습니다.

단발머리 2025-09-14 22:34   좋아요 0 | URL
간단한 정리여서 그렇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

푸코의 성의 역사는 해설서라도 찾아서 읽고 다시 읽어야겠어요. 저도 너무 어려웠구요. 그러나, 다시 읽어도 @@ 자신은 없구요.

저도 다락방님과 비슷하게 생각했는데!!! 아... 저는 그 ‘각인‘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지 못했던 거 같아요. 제가 정확히는 기억 안 나는데, 다섯살의 사이먼이 갓 태어난 아일린 보겠다고, 보여달라고 그러잖아요. 그 순간이 각인의 순간일 수 있겠네요. 첫 만남. 태어나자마자. 그러고 보니 트와일라잇의 그 장면과 비슷하네요. 제이콥도 벨라의 갓난 아이에게 각인되죠.

운명적인 사랑이라. 저는 운명적인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던 사람이었죠. 어디에선가, 나만의 그가.... 백마를 탔던가요? ㅋㅋㅋㅋㅋㅋㅋ정장 입은 거 확실하고요? 하지만, 이제는 그걸 믿지 않는 어떤 사람이 되었구요. 하지만, 다락방님 말씀처럼 ‘각인처럼 운명적인 일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예상과 추측을 넘어선 인연과 만남이 있다고 생각하고요. 카를로 로벨리의 책에서 만난 문장, 과학자의 문장 속의 ‘대상‘에 인간들도 포함된다고 생각하니까요.

속성은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대상 사이에 놓인 다리인 것입니다. 대상은 맥락 속에서만, 즉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다리와 다리가 만나는 지점입니다. 이 세계는 거울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비쳐야만 존재하는 관점들의 게임인 것입니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111쪽)

인간은 맥락 속에 존재하죠. 그 사람이 의미있는 건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내가 존재하기에 비로소 그 사람도 의미를 ‘성취‘하는 거고요.

바람돌이 2025-09-15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의미의 성에 대해서 생각할 때 푸코라니요. 저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누가 하냐구요. ㅎㅎ(저는 1권 읽고 나가떨어진 사람입니다.)
사랑이나 연애의 형태는 정말 여러가지일 수 있는데 서로가 합의한다면 그 형태가 어떻든 상관없을거 같아요. 그런데 참 쉽지 않은게 사람에게는 이성으로 이런게 좋아라는게 있는 반면 의식 아래 밑바닥에는 또 다른 원초적인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독점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범위를 벗어나면 정신병이 되는 거지만 연인관계라고 할 때 저 사람이 나에게만 특별하게 대해주는게 뭐 하나는 있어야 연인관계가 성립되는 거잖아요. 그 특별한 뭔가가 저는 독점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특별한 뭔가가 많은 사람에게는 섹스라고도 생각하고요.(아 무성애자는 제외입니다. 무성애자는 그 무성애를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게 특별함이겠죠.) 그래서 너와 내가 연애를 하고 섹스도 하는데, 오픈 마인드로 다른 사람하고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관계를 지향한다고 했을 때 사실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는 힘들지 않을까? 너는 나에게 특별하지 않은데 언젠가 그 오픈 마인드로 만나는 다른 사람 중에 특별한 사람이 나타날 가능성이 많으니까요. 샤르트르로 보바리의 계약결혼 얘기도 하지만 저는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연인이라기 보다는 친구관계였을 가능성이 많을거 같거든요. 하여튼 그래서인지 저는 개방 연애 잘 될거 같지 않아요. ㅎㅎ

우리의 주인공 사이먼과 아일린에 대해서는 저도 단발머리님이 인용하신 대목 읽으면서 이런 바보같은 놈 했었거든요. 하지만 사이먼의 저 마음도 이해가 갔어요. 저 때 당시 아일린은 남친이 있었고, 아일린은 그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죠. 제가 사이먼이라면 많이 힘들었을거 같아요. 아일린은 내가 보호해줘야 하는 아이인데, 아일린은 그 남친을 정말 좋아하고, 나와의 일은 일시적인 일탈일 뿐일지도 모르는데 나이 먹은 내가 아직은 자유롭게 살아야 할 아일린의 세계를 망가뜨린느거 아닌가 뭐 이런 수많은 고민이 있었을거라는거죠. 물론 쓸데 없는 고민이지만, 사이먼은 아빠 모드잖아요. 저기서 아일린이 확실하게 물어봤다면 뭔가 달라졌겠지만 저 때의 사이먼은 먼저 물어보거나 다가갈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대화를 하고 살아야 한다? 역시 저의 결론은 평범합니다. ^^

단발머리 2025-09-15 21:20   좋아요 1 | URL
저에게도 푸코는 항상 아픈 기억이지요 ㅎㅎㅎ차라리 <감시와 처벌>이 나았습니다.

바람돌이님이 말씀해주신 의식 아래 원초적인 감정에 대한 부분이 제 생각과도 많이 비슷합니다. 바람돌이님은 그걸 독점욕이라고 쓰셨는데, 저는 그걸 사랑의 ‘배타적 속성‘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그렇지 않은 연인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건 아니구요. 하지만 이차저차 이쪽저쪽 상황이 복잡해지는 건 사실이구요. <에이스> 저자의 남친 헨리가 그렇게나 ‘오픈된 관계‘를 주창하더니만 자기의 여친이었던 저자에게 일어난 일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던 건, 의식 아래, 자신의 말 아래, 자신의 주장 아래, 도사리고 있는 원초적인 감정(출처:바람돌이님)을 모른척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샤르트르와 보봐리는 처음에는 연인 관계였을 테지만, 후에는 ‘섹스 없는‘ 결혼관계였을거라 생각됩니다. 연애사를 굳이 공유했던 이유를 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서로에게 비밀을 가졌다는 점에서, 결국 두 사람간의 계약결혼보다 더 중요한 사람, 연인이 생겼다는 것이구요. 하지만, 말이 통하는 사이였으니까요. 그만큼이라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요.

바람돌이님이 사이먼의 고민을 이해해 주셔서 사이먼에게는 다행입니다. 저는 저 때가, 사이먼이 제일 뻘짓했을 때라 생각하고요. 물어봤어야 한다고, 고백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먼저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이 아일린이어서 저는 기분이 나쁘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화할 수 있어야 인간이죠. 바람돌이님 결론이 바로 저의 결론!!
 









샐리 루니의 화제작 『노멀 피플』보다 그녀의 데뷔작 『친구들과의 대화』가 더 좋았던 이유는 오로지 주인공 때문이었다. 나는 좀처럼 아니 도저히, 『노멀 피플』의 코넬을 좋아할 수 없었는데, 물론 마리앤에게도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화살은 주로 코넬에게로 향했다. 『친구들과의 대화』가 좋았던 건 닉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처음 샐리 루니를 읽었을 때는, 내가 느끼는 감정과 혼란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제일 정확하게는 당혹스럽다고 해야겠는데, 닉에 대한 내 감정이 그랬다. 폭력적이고 타인을 억압하는 남성은 모두가 싫어한다. 그건 여성이나 남성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을 '남성적 성향'이라고 찬양하고 숭배하는 문화에서는 물론 다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닉은 너무 가냘픈 그대여서, 유약하고 다정하며, 배려심이 가득하지만... 아, 생각만 해도 지친다. 프랜시스가 그랬다. 당신은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 식물은 건강하고, 깨끗하고, 활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초식남 닉은 그냥 매가리가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는데 그렇게나 소극적이었다. 먼저 키스해 주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는 남자였다. 근데 내가 프랜시스가 되어 그렇게나 매가리 없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니, 소설을 읽는 내내, 다 읽은 후에도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구야.









아름다운 세상으로 돌아와서.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한데, 그래도 한 번 써보자. 아일린과 사이먼이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네가 우리를 만나러 파리에 올 예정이었는데 내가 그 뭐랄까, 네가 비행기를 타는 거며 뭐 그런 일에 대해서 걱정을 했어. 그러자 나탈리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아. 이런, 아빠의 어린 딸이 아무도 없이 혼자군. 뭐 그 비슷한 말이었어. 웃겼어. 내 말은 그녀가 농담한 것 같다는 거야.

그 순간 아일린이 두 눈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나도 얘기 하나 해줄게. 어느 날 밤 당신이 문자를 보냈는데, 마침 에이든이 내 전화기 바로 근처에 있어서 대신 그 메시지를 확인해 줬어.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한테 화면을 보여주면서 '네 아빠야'라고 하더라. (183쪽)

둘 사이의 나이 차이가 5살이니 20대 초반이라면 나이 차이가 크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언제든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빠 같은' 이라니. 꺼림칙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 사이먼은 아일린을 그렇게 대했다. 아일린의 남자친구도, 사이먼의 여자친구도, 사이먼이 아일린에 대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걸 알고 있었다. 여기에 sexual한 의미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아일린의 언니 롤라가 사이먼을 험담할 때 말했듯이 사이먼은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생존과 자기 보존, 그리고 보호의 의지는 당연히 sexual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생존의 조건, 생명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Lucy by the sea』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루시는 인터넷 쇼핑을 못하나요. 루시는 쿠팡 아이디가 없나요. 루시는 앱카드가 없나요. 아니요, 아닙니다, 아닌데... 윌리엄은 그런 사람이다. 루시에게 필요한 걸 기억해 두었다가 사 주는 사람이다. 윌리엄이 주문해 준 겨울 코트가, 가디건이, 운동화가 맘에 든다고 크게 소리쳐 부르는 루시에게 '손 씻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물건을 담아둔 상자를 루시 대신 밖에 내다 놓는 사람이다.

젠더가 우리 삶 속에 자리 잡은 양태는 다른 어떤 사회적 양식보다 견고하고 은밀하다. 남자답다 혹은 여자답다,는 말이 주는 힘은 공기처럼 무게감 없이, 저항감 없이 우리를 지배한다. 사람들에게 여성다움 혹은 남성다움은 '규범'으로 작동하고, 그러한 규범은 자연스레 '이상화'된다. 나는 지금, 샐리 루니가, 혹은 샐리 루니마저도 '강한 남성', 나를 보호해 주는 남성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고 말하는 중이다. 나는, 아일린과 사이먼이 '아빠 같은'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서 편안하게 마주 보며 웃는 장면에서 그렇게 느꼈다. 아일린을 걱정하는 사이먼, 아일린이 혹시 어려움을 겪을까 안절부절못하는 사이먼. 그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들으면서 적잖이 놀라는 사이먼. 사이먼은 그런 남성이길 원하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하고 있으며, 아일린은 그런 사이먼의 행동을 받아들인다. 그의 보호를, 간섭을, 침입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지점은. 이것이 아일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이먼을 위한 것이라는 데 있다.

다시 루시에게로 간다. 이 장면은 예전에 페이퍼로도 한 번 썼다. 코비드 상황에 비교적 안전한 바닷가 외딴 마을로 이사를 간 윌리엄과 루시. 간만에 두 사람이 함께 마트에 갔는데, 주차장에 혼자 남아있던 루시의 자동차 번호판을 보고 어떤 여자가 '뉴욕 사람들은 뉴욕으로 돌아가라!'라며 욕을 한다. 황망해하는 루시와 달리 윌리엄은 별다른 말이 없다. "윌리엄, 나는 누가 나한테 소리지르는 게 싫어!" 루시의 말에 윌리엄은 자기한테 소리지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답한다. 며칠이 지나 아직도 화가 안 풀린 루시가 윌리엄에게 묻는다. 당신은 심지어 그 여자가 내게 소리를 지른 뒤에도 왜 나한테 다정하게 하지 않는 거야? 윌리엄이 답한다.



나는 윌리엄이 루시를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무언가를 내놓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루시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혹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겪게 될 불이익이나 불편, 혹은 바로 이전 가족에게서 멀어지는 경우까지라도. 윌리엄은 단지 그녀가 먼저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윌리엄 자신이 살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코비드 때문에 루시가 죽게 된다면,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살기 위해 루시를 살리려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파스텔 연분홍 펜으로 이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내가 너를 위해 뭔가 해준 적이 있다면, 그건 정말로 나 자신을 위해서였어.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거든.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너한테 내가 필요하다고, 너는 나 없이는 안 된다고 느끼고 싶었어. 내 말 이해하겠어? 내가 쉽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네. 내가 너를 위해 해준 것보다 네가 나를 위해 해준 게 정말 훨씬 더 많다는 뜻이지. 그리고 네가 나한테 더 필요했어. 너한테 내가 필요한 것보다 나한테 네가 더 필요해. 그는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잠자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두서없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틀린 말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나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무척 어렵거든. 다시 한번 그는 한숨 쉬듯 숨을 내쉬고 자기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그녀는 그를 계속 지켜보면서, 말없이 귀 기울여 듣기만 했다. 마침내 그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겁먹은 거 알아. 그리고 네가 우리 우정에 대해 한 모든 말, 친구로 지내고 싶을 뿐이라는 말도 진심이었을 수 있어. 만약 진심이었다면 받아들일게. ... (381쪽)

사이먼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네게 내가 필요한 것보다, 내게 네가 더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렇게 느꼈다. 다만.... 다만, 그는 너무 소극적이었고, 느렸고, 그리고 정중했으며. 이 모든 사이먼'적' 요소는 아일린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 보호하고자 하는 남성과 겹칠 때, 그 '이상화'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어질 때, 그 남성이 그 수행을 성실히 해나갈 때, 나는 가끔 서로를 구원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이먼이 원하는 대로 된 것 같지만, 그건 아일린을 위한 것이고. 아일린이 원하는 그것이 바로 사이먼이 원하던 그것이었으니까. 그 수행을 허락한 사람은 아일린이니, 최후의 승자는 아일린인 것으로. 사이먼도 그 결과를 좋아할 테다.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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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5-09-11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전 닉 별로였는데…… 단발머리님이 좋아하신다니.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가…..

사실 두 권 읽었는데 아직 샐리 루니의 매력을 잘 모르겠어요.

루시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읽고 더 읽어야지 하고선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그래서 이 글은 나중에 와서 다시 읽기로…

단발머리 2025-09-13 07:34   좋아요 0 | URL
저도 닉을 좋아하는 제가 싫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니깐 내 마음이 왜 이러냐구요ㅋㅋㅋㅋㅋㅋ

어느 지점에서 샐리 루니가 탁 저를 건들때가 있더라구요. 전 <노멀 피플> 읽고 한동안 안 읽어야지 했는데, 이번 책은 마음에 들어요.

나중에 다시 꼬옥~~~~~~~ 오셔야 됩니다!!

다락방 2025-09-11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단발머리 님의 이 페이퍼를 읽으니 사이먼과 닉이 비슷한가 싶기도 하네요. 물론 저는 닉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먼이 무조건 이긴다고 보지만 말예요. 뭐에서 이기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매력?

‘생존과 자기 보존, 그리고 보호의 의지는 당연히 sexual 할 수밖에 없다. 그게 생존의 조건, 생명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라는 단발머리 님의 이 구절이 너무나 인상깊은데요, 이건 저도 좀 생각을 깊게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생존과 자기 보존 그리고 보호의 의지는 당연히 sexual 한것인가.. 음, 잘 모르겠어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건 계속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버지처럼 아일린을 돌보는 것을 사이먼이 좋아했고 또 사이먼이 그러는 것을 아일린이 좋아햇다는 것 자체가 이들을 이어주는 거겠죠. 저는 아일린의 마음을 언제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사이먼을 사랑하고, 이 책속의 사이먼이라면 사랑하지만, 오늘 이 페이퍼를 읽고 누군가 저를 아버지처럼 돌보아주려고 한다면 어떨것인가, 를 떠올려보면, 음, 지금 한 명이 떠오르는데, 영 별로였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건 아마 그가 그라서 그랬던걸지도... 흠흠.

저는 그동안 샐리 루니의 소설을 읽으면서 어느 캐릭터도 좋아한 적이 없었어요. 저한테 매력 있는캐릭터가 아니었죠. 이번 소설에서의 사이먼을 제외하고는요. 그런데 노멀 피플에서 코넬은 성장하는 캐릭터였다고 생각해요. 전 그 지점에서 노멀 피플이 좋았어요. 처음의 코넬과 나중의 코넬은 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거든요. 이번 소설에서도 그래요. 어릴 적의 펠릭스는 형편없었죠. 지금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그 때 형편없었다는 걸 인지하고 죄책감을 갖는 어른이 되었잖아요.

오늘 이 페이퍼 읽으니 저도 어쩐치 친구들과의 대화를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단발머리 님이 좋아하신다하니 닉에 대해서도 좀 달리 보일까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 책은 읽으면서 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가지고 ㅠ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는데, 어쨌든 저 방에 있고 저 방에 있고 그런데 유부남하고 섹스하는 장면 같은거 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가지고요 ㅠㅠ

소중한 페이퍼 감사합니다. 이 책은 참, 계속 사람들을 글쓰게 하는 책이네요!!

단발머리 2025-09-13 08:01   좋아요 1 | URL
섹스를 성행위를 넘어서는 범위로 볼 수 있다는게 제가 읽었던 ‘섹스‘ 관련 책에서의 결론인데, 이걸 제가 잘 표현을 못하겠네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뭔가를 하게 하고, 하고 싶게 하는(욕망, 욕구, 정동을 포함한) 그 모든 걸 섹스라는 범주 속에 넣을 수 있다고 보는 거거든요.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그 사람을 발견했을 때 (이건 그 사람이 그걸 알아챘느냐 혹은 알아채지 못했느냐와 상관 없이요)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동요. 저는 이거 자체를 섹슈얼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동성일수도 이성일 수 있겠지요. 제가 앨리스의 말을 그대로 가져올게요.

그러니까 섹스란게 대체 뭐야? 나한테는 실제로 사람들과 성관계를 갖지 않아도 그들을 만나고 그들에 대해 성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평범한 일이야. 아니, 더 중요한 것은, 심지어 그들과 성관계를 갖는 것을 상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아도 그렇다는 거야. 이것은 섹슈얼리티에 성행위에 관한 것이 아닌, 어떤 ‘다른‘ 개념이 포함된다는 것을 암시해. 우리의 성적 경험의 대부분이 이런 ‘다른‘ 개념의 영역일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이 다른 개념은 무엇일까? 그러니까 내가 펠릭스에게(그나저나 나를 육체적으로 건드린 적조차 없는 이 사람에게) 느끼는 것,우리의 관계를 성적인 관계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세상이여, 그대는 어디에>, 113쪽)

저는 옆방에서의 유부남과의 섹스는 진짜 별로지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압도적인 잘생김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았다. 닉의 얼굴은 아주 일반적인 의미에서 잘생겼다. 깨끗한 피부, 두드러진 뼈대, 약간 부드러워 보이는 입. 하지만 미묘하고 지적인 표정이 잘생김을 압도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그와 눈이 마주치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닉이 나를 바라보면 나는 그에게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들과의 대화>, 58쪽)

다락방 2025-09-13 09:45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 님이 읽으셨다는 그 섹스 관련 책에 대한 공유 부탁드립니다. 저도 읽고 깨닫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제가 이미 가진 책일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단발머리 2025-09-13 10:49   좋아요 0 | URL
그런 책이 여러권이긴 한데요.
일단 <섹스할 권리>, <왓이즈섹스> 그리고 <에이스>요. 푸코의 <성의 역사>도 맞기는 한데 제가 거기까지는 닿지 않고요 ㅋㅋㅋ 지금 외출하는 길이라 돌아와서 간단 페이퍼 써볼게요. 🤗

바람돌이 2025-09-11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루시는 인터넷 쇼핑을 못하나요? 쿠팡 아이디가 없나요?라는 대목에서 막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집 남편이 다 못하고 다 없어서 쿠팡 아이디오 제걸로 폰에 넣어주고 이제 제발 나한테 사달라고 하지만했거든요. 그래서 남편이 뭘 사든지 저한테 바로 문자옵니다. ㅎㅎ 우리집에서는 윌리엄이 하는 역할을 제가 하는거같군요. 그럼 아빠 마음 아닌 엄마 마음? ㅋㅋ

샐리 루니의 작품을 이 한 작품 밖에 안 봣는데 어쨌든 이 소설에서는 강한 남성, 여성을 보호해주는 남성이라는 젠더 역할 고정에 빠져있다는데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런 앨리스와 펠릭스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돈도 더 잘 벌고 더 똑똑한 앨리스지만 결국 앨리스를 구원하는건 펠릭스거든요. 심지어 앨리스와 아일린의 갈등에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중재자의 역할을 하죠. 펠릭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펠릭스는 넷의 관계에서 가장 객관적인 조정자의 역할을 합니다. 다 모자란데 약물중독자인 펠릭스는 안 모자라요. 심지어 약물중독인데도 말이죠.

어쨌든 연애나 결혼이라는 것은 사실 둘 사이의 문제이고 둘이 캐미가 어떻게 맞느냐 하는거죠. 서로가 맞으면 뭐가 문제겠어요. 아마 아일린과 사이먼은 저 사이먼이 돌봐주는 역할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 한 둘이 행복할겁니다. 하지만 저런 관계를 사실 저는 예전에 한번 본적이 있는데요. 문제가 생기더라구요. 아이요. 아들이 크면서 엄마를 똑같이 지가 돌봐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아빠와 자기를 동격화해요. 그게 다른 생활에서는 굉장히 타인을 자기 생각대로 휘두르려고 하는 걸로 나타나더군요.

뭐 산다는게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없을 수 없지만 그래도 사이먼과 아일린은 아직은 어울리고 둘이 행복해져서 일단은 다행입니다. 그 뒤는 뭐 둘이서 알아서 할 문제죠. 그쵸.

단발머리 2025-09-13 10:51   좋아요 0 | URL
<노멀 피플>에서도 앨리스, 펠릭스와 비슷한 구성의 남녀가 나오거든요. 거기에서도 여주가 남주보다 돈이 많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위력은 어마어마하니깐요. 연약하고 유약한 여주는 남주의 접근을, 친밀함을, 사랑을 기다리죠. 앨리스는 대놓고 내가 널 좋아한다... 너에게 빠졌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저는 나름 펠릭스라는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는데, 좀 위축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안 그래요. 그게 20대의 치기인지 20대 남성의 특징인지 저는 잘 모르겠고요.

저는 사이먼이 아일린을 돌봐주는 역할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을 거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 아이 낳고 아일린 돌변! 사이먼 왈. 나는 왜 맨날 혼나 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구성, 이런 미래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너무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같이 읽고 같이 쓰는 기쁨을 바람돌이님과 나누는 이 시간이요!!!

다락방 2025-09-13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 영어로 아직도 절반 밖에 읽지 못했다는 사실을 굳이 알려드립니다..

단발머리 2025-09-13 08:07   좋아요 0 | URL
저는 반 정도 왔는데요. 일단 이메일 저도 건너뛰기로 결정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했음을 굳이 알려드립니다.

다락방 2025-09-13 09:44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 님의 이메일 건너뛰기에 저도 편승함을 굳이 알려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9-13 10:50   좋아요 0 | URL
제가 다락방님을 따라 이메일을 건너뛰고 있음을 재차 확인드립니다🫣

독서괭 2025-09-24 21:52   좋아요 1 | URL
😂😂😂😂😂 저도 읽지않고 보기만 했음을 고백합니다…

독서괭 2025-09-24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가리없는 닉 ㅋㅋㅋㅋㅋㅋㅋㅋ 빵 터졌네요 ㅋㅋㅋㅋㅋ 매가리없..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9-26 18:50   좋아요 1 | URL
매가리가 없어요, 그 사람이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내가 좋아했으 ㅋㅋㅋㅋㅋㅋㅋㅋ 매가리 하나 없는 닉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