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비밀이라 하자면, 내가 『사상의 좌반구』 읽고 있는 거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된다. 특히 잠자냥님한테 비밀이다. 잠자냥님이 알면 "오, 단발머리님? 이 책 샀어요? 좋지요, 이 책?" 하고 물을 텐데, 나 이 책 안 샀다, 아직은.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상호대차, 다른 구 도서관에서 빌린 거라서 나름 어렵게 빌린 것임ㅋㅋㅋㅋ)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부분만 살짝 읽어보고 싶어서 빌렸다. 아직 구매 안 했으니까, 다 읽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까 내가 이 책 읽는 거, 비밀이다.


엄마한테 화분 맡긴 거, 비밀이다.

지난달에 화분을 선물받았다. 별 기대도 없었는데, 내 것도 따로 챙겨주셔서 마음이 좋았다. 퇴근하면서 사진을 찍어 친정 단톡방에 자랑했는데, 예쁘다~ 화사하다~ 이런 말은 온데간데없고. 너, 그거 못 키울 거 같으면 이리 가져와~라는 말을 들고야 말았다. 아니라고, 나도 키울 수 있다고, 일주일은 내가 가지고 있을 거라고 했는데. 했는데. 엄마의 예언은 항상 옳았으며. 그저께 출근 전에 친정 잠깐 들려서 수박이랑 친구가 선물해 준 예쁜 망고 2개를 가져다 놓으면서 이 화분도 살짝궁 놓고 왔다. 이렇게 예쁘던 아이가 우리 집에서 큰 고초를 겪더니, 이렇게 되었다. 엄마에게 갔으니 부활하리라 믿는다.





조성진 시디 잃어버린 것도 비밀이다.


분명 운전석 옆 함에 넣어 두었던 거 같은데, 어디 갔는지 도대체 모르겠다. 클래식 잘 안 듣는 사람이지만, 조성진은 가끔 듣는단 말이지요. 속상한 마음에 조성진 시디 하나 샀다. 잭 리처는 표지가 예뻐서 샀고, 김금희 씨 책은 작가님에게 고마운 마음에 샀다. 빈티지 미니 시리즈는 전에 친구가 제인 에어의 『 Independence 』 선물해 줘서 알게 됐는데, 그 시리즈가 다 마음에 들어서 이번에 유발 하라리의 『 Money 』 샀다. 다음에는 하루키 살 예정이다. 빈티지 미니 시리즈 하루키 편의 제목은 뭘까. 그건 진짜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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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6-13 15: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단발머리님? 이 책 빌렸어요? 좋지요, 이 책?˝ 🤣🤣🤣

단발머리 2025-06-13 16:1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다고요! 좋아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많이 나와서 좋아요!🤣😍😎🤩🤪

잠자냥 2025-06-13 1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셨어요? 단발머리 님이 좋아하시는 분 일단 두 분 나오시네요. (유시민/정희진)

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89603

단발머리 2025-06-13 16:12   좋아요 0 | URL
좋아하는 분 두 분 알아주심 감사드려요~~
근데 저 근무시간입니다. 지금도 근무시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토요일이면 하루 종일 가능한데 ㅠㅠㅠ
왜 금요일이에요. 왜 낮이에요. 왜 50석 밖에 안 돼요.

망고 2025-06-13 16: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카랑코에 화분이네요ㅋㅋㅋ저거 다육과로 진짜 기르기 쉬운건데요ㅋㅋㅋㅋ 저건 잎만 똑 따서 흙에 꽂아두면 뿌리가 내리고 줄기 잘라서 꽂으면 카랑코에 화분 하나 뚝딱 나오는 번식력 최강 식물이고요🤣 꽃이 저렇게 시들해진 건 아마 단발머리님이 분갈이를 안 해주셔서 그런거 아닐까요? 🙄

단발머리 2025-06-13 17:46   좋아요 1 | URL
네~~ 망고님! 돌아오는 길에 저도 저 카랑코에가 키우기 쉬운 식물이란걸 알았습니다. 상 중 하 중에 난이도 하 였구요 ㅠㅠㅠ
지금 망고님 댓글 보고 분갈이 찾아보고 왔습니다. 분갈이를 해줘야 하는군요. 화분을 사는 건 알겠는데, 다른 흙은 어디서 구해야하는지... 적당히 배합된 흙을 살 수 있는지... 즐거운 금요일 밤에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네요 ㅋㅋㅋㅋ

망고 2025-06-13 18:51   좋아요 1 | URL
ㅋㅋㅋ배양토는 마트나 다이소 물론 꽃가게에도 팔아요 단발머리님 가까이에 늘 팔고 있었을 겁니다ㅋㅋㅋ화분도 이쁜걸로 사서 분갈이 잘 해주세요

단발머리 2025-06-13 18:58   좋아요 1 | URL
일단 배양토 사야하고 화분 사야하구요. 다이소 말고 망고님 가까이에 살고 싶네요. 주중에 하게 되면 알라딘에 올릴게요 ㅋㅋㅋㅋ 가능할 것인가🤣🤣🤣

책읽는나무 2025-06-14 0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밀이 이리도 많으셔서 어쩐답니까?
이런 비밀스런 여자.ㅋㅋㅋㅋ
비밀이 한아름이라 풍경은 멋지군요.ㅋㅋ
조성진과 김금희 작가의 완주 책 눈에 띕니다.
가랑코에 화분을 보구서 어, 저건 키우기 쉬운데? 저도 그 생각 좀 했었는데 단발 님 어머님이 화분을 좋아하시나 보다. 대신 키워서 가랑코에 꽃을 보고 싶으셨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분홍꽃이 피었군요.
전 노랑 가랑코에를 키웠었는데 꽃이 정말 오래가서 키울 맛이 났어요.
근데 다음 해부터 꽃은 못보고 이파리만 열심히 돌봄 중이구요.ㅜ.ㅜ
근데 진짜 이파리들이 넘 잘 자라서 윗대를 꺾어 그 옆에 심어두면 계속 쑥쑥 자라나더군요. 자라나는 속도에 늘 감탄하면서 키울 수 있는 화분인 것 같아요.
근데 꽃을 매해 못봐서…ㅜ.ㅜ
분갈이가 답이었던가? 저도 망고 님 댓글을 읽으면서 갸웃해 봅니다.
분갈이 해서 꽃을 피우게 되면 팁 좀 알려 주세요. 비밀로 해드릴게요.ㅋㅋㅋ

단발머리 2025-06-14 09:36   좋아요 1 | URL
미스테리의 화신으로 불러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 우아~~ 저 너무 신기한게 너무 저 화분 선물받고 나서 *이버로 사진 찍어서 그게 뭔지 확인했거든요. 이름이랑 키우는 법. 물 가끔 주고 환기 잘 되면 된다고. 난이도가 <하>라고 그러더라구요. 근데 망고님도 책나무님도 딱 보시고 뭔지 아시고 키우기 쉬운 종인줄 아시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게다가 오래가서 키울 맛이 난다고 하시니 저로서는ㅋㅋㅋㅋㅋ 저를 탓할 뿐입니다. 그렇게 생명력이 강한 아이조차 살 수 없는 이 척박한 땅, 제가 바로 거기에 산답니다.
그래서! 망고님 말씀대로 분갈이 도전해보려합니다. 성공하게 되면 다음 이야기 올릴게요. 일단 엄마집에 갔으니 간단한 응급조치는 되었을거라 믿고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 2025-06-14 14:12   좋아요 1 | URL
저도 카랑코에 꽃 못 보고 잎만 무성하게 자라난 화분을 기르는데요 그것도 많이ㅋㅋㅋㅋ자르고 꽂아 놓으면 뿌리내려서 너무 잘 자라서 지겨울정도ㅋㅋㅋㅋ근데 얘네 꽃을 보려면 밤이 길어야 한대요 실내에서 기르니 방 조명이 밤늦게까지 켜 있어서 꽃대가 안 올라온답니다 저녁6시쯤부터 까만 봉투를 화분에 씌워두고 낮에 햇빛 보게 벗기고 또 저녁에 씌우고 이렇게 한달정도 하면 꽃대가 올라온대요 하지만 전 귀찮아서 그렇게 못 해서 늘 잎만보고 있습니다ㅋㅋㅋㅋㅋ
분갈이는 뿌리가 너무 꽉 차면 건강하지 못 하니까 해주는 거고 카랑코에 꽃을 보기 위해선 또다른 작업, 밤을 길게하는 작업을 해 줘야 한다는 말인거죠🤣

책읽는나무 2025-06-14 22:31   좋아요 1 | URL
아. 밤을 길게 해줘야 하는 거였군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망고 님은 정원사!👍
저는 화분을 몇 개 키우고 있어도 늘 물만 주고 키우는 수준이라(분갈이도 잘 안해주는 편인지라 애들이 늘 비실비실) 식물들한테 늘 미안하네요. 그래도 늘 죽이고 사고 또 죽이고 사들이고.ㅋㅋㅋ
일단 쟤를 까만 봉다리를 찾아서 어디 한 번 시도해 볼까? 싶네요.
과연 꽃을 피울런지?^^
꿀팁 감사합니다. 망고 님^^

2025-06-15 0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6-15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6-15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The love hypothesis』의 올리브 엄마는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올리브는 대학원에서 췌장암 조기 진단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고 싶어 한다. 담당 교수가 예상보다 빨리 은퇴하게 되어 다른 대학 실험실을 알아봐야 하는데, 면접을 보게 된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fake boyfriend인 애덤의 지인이자 선배이기도 한 톰 벤튼 교수다. 연구 과제에 대해 질문하던 톰은 올리브에게 개인적인, 지극히 사적인 부분을 물어본다.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진짜 말하기 싫었지만 올리브는 대답한다. 엄마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자신의 노력이 엄마를 살릴 수는 없겠지만, 과거의 엄마에게 도움이 될 법한 특별한 성과를 얻고 싶었기 때문에, 그 연구를 계속해야 하기에 올리브는 말한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자체는 비밀이 아니지만, 엄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엄마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올리브에게는 감정적 동요가 일어난다. 금방 울보가 된다. 올리브에게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말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 끝내 감추고 싶은 그 무엇이다. 베프인 안과 룸메이트인 말콤에게조차 말하고 싶지 않은 그런 이야기.



그런 올리브가 애덤에게는 엄마 이야기를 한다. 묻지 않았는데, 말하라고 종용하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말한다. 말하고 싶어 한다. 주사를 맞지 않으려 떼쓰는 어린 올리브를 달래기 위해 엄마가 준비했던 아이스크림 샌드위치에 대해 말한다. 눈물이 금방 차오르지만, 말하고 싶어 한다. 내 이야기를, 내 비밀 이야기를, 올리브는 애덤에게 하고 싶어 한다.


모든 비밀이 약점인 것은 아니지만, 비밀은 약점이 되기 쉽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랑할 수 있으되, 자랑할 수 없는 어떤 것은 결국에는 말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자랑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말할 수 있는 비밀의 범위 이내에서 '말해지는 것'이다. 비밀은, 말해질 수 없을 때 비밀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 그래서 비밀을 털어놓고 나면, 금세 그 사람은 취약해진다. vulnerable. vulnerable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그러니까 스스로의 결정으로 그런 상태에 처하려고 한다. 올리브가 애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 자신의 비밀을, 나 자신의 아픔을, 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고 싶어 한다. 그녀에게, 혹은 그에게 말하고 싶어 한다.









『The Housemaid's secret』의 밀리에게는 남자친구가 있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아직 하지는 못했지만, 좋아하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함께 있을 때 행복하고 오래오래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아직 밀리는 남자친구에게 자신의 가장 큰 비밀을 털어놓지 못했다.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그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를 거라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자신을 계속 사랑해 줄 거라는 확신 중 어느 마음이 더 큰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털어놓고 싶은데, 말하고 싶은데. 밀리는 그러지 못한다. 자신의 비밀을 그에게 말하지 못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누구든 탐색의 시간을 갖게 된다. 비밀이라기 보다 신상을, 두 번 만났을 때부터 가차 없이 털어놓았던 그녀. 나는, 끝내 말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기에 진지하게 경청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말하고 싶은 자에게 말하게 하라. 털어놓고 싶은 사람에게 털어놓게 하라. 하지만, 저의 비밀을 물으시다니요. 제 인생의 비밀을, 복잡한 구내식당에서 듣고 싶다니요. 식사 시간이 25분 밖에 안 되는데, 밥을 씹으면서, 국을 퍼먹으면서 제 인생의 제일 곤란했던 시절에 대해 '말하라'니요. (그렇습니다. 비밀을 잘 털어놓지 않는 나, 오랜 시간 가까이 지낸 사람들로부터 속 이야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고 평가받는 나는, 여기 알라딘에서 내가 곤란했던 그 순간의 암담함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저는 그때, 한없이 무서웠습니다.)


비밀은 큰 것일 수도 작은 것일 수도 있다. 천하의 비밀인 줄 알았는데, 나 이외 다른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었을 수도 있고, 내 딴에는 엄청나게 큰 실수인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 못 하는 작은 실수일 수도 있다. 이 세상에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큰 불행 속에 현재까지 고통받는 사람에게 내 비밀은, 하늘이 무너질만한 큰 비밀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안고 있을 때, 내가 품고 있을 때, 내 비밀은 내겐 너무 버거운 그 무엇이다. 전 우주에서 가장 심각한 일이고, 도저히 풀 수 없는 난제이며, 그래서 말할 수 없는 비밀이다.









아마존 들어가서 이북 구경하다가 housemaid 시리즈 세 권이 묶여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그다음 날 들어가서 프리단 다른 책들 구경했는데. 분명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면에 "Thank you~~ "로 시작하는 문장이!!!!!!


노란색 1 click 누른 사람 누구냐. 그 사람 진짜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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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6-12 0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러니까 하우스메이드 시리즈 세 권을 전부 말입니까!! ㅎㅎㅎㅎㄹ

단발머리 2025-06-12 19:04   좋아요 0 | URL
하하하 그렇게 되어 버렸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ㅋ그러니깐 노란색 버튼 클릭한 사람 누구냐고요 ㅋㅋㅋㅋㅋㅋ
 
















이재명 대통령을 본 건 박근혜 탄핵 집회에서였다. 교보빌딩 앞 차도를 걸어가고 있는데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이재명 시장이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그 뒤를 몇몇 지지자들이 따르고 있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생각보다 키가 작았다. 혹은 작다고 느껴졌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박근혜에게만 집중하기에도 바쁜 나날이었다.


내 손으로 뽑은 첫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부터 이후까지 여러 번의 선거가 있었고, 그 세월 동안 나는 한결같이 파란색 당 지지자다. 당원은 아니지만 당과의 일체감은 어떤 열성당원 못지않다. 하지만, 그런 내가 보기에도 이재명에게는 약간 걱정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러니깐, 이재명이 싫다거나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그의 정책과 집행 능력이 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받아들이기에,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기에 그의 정책은 아직은 '과격'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나쁜 쪽으로는 아니었고, 좋긴 한데 가능할까, 이런 느낌이 강했다. 적절한 예가 없어서 급조한 예를 들어보자면. 그러니까 내게 이재명은.


사고 싶은데 가격이 좀 나가는 근사한 원피스 같은 느낌이었다. 원피스가 필요하다. 내 몸에 잘 맞고 나를 근사하게 만들어줄 원피스. 차려입어야 하는 자리에 자주 가는 건 아니지만 가끔 생기는 그런 자리에 입고 갈 만한 원피스가 필요하다. 길이도 적당하고 색상도 얌전(네이비)하고 좋은 재질의 원피스. 나의 단점을 커버해 주고 나를 우아하게 만들어줄 디자인의 원피스. 마침, 그런 원피스를 발견했다. 원래는 더 비싼 제품인데, 지하 1층 행사장에 전시된 제품이라 4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고 한다. 고민의 핵심은 가격에 있지 않다. 원래 가격이라면 어림도 낼 수 없겠지만, 이 가격이라면 구매를 고민해 볼 만하다. 이걸 하나 구매하면 생각보다 오래 입을 수 있겠다 그런 생각도 든다. 가격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옷이 너무 좋은 옷이라는 데 있다. 내가 이렇게 좋은 옷을 입어도 되나. 내가 이렇게 비싼 옷을 사도 되나. 내가 이렇게 호사를 누려도 되나.

내게 이재명은 그런 느낌이다.


이재명이 대통령인 나라에 내가 살 수 있다고? 우리나라 대통령이 이재명이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는 그 일이 6월 3일 화요일 밤에 이루어졌고, 그렇게 이재명은 대한민국의 제21대 대통령이 되었다. 과한 옷을, 내게 과한 옷을 드디어 선물 받고 만 것이다. 생일도 아닌데, 특별한 기념일도 아닌데. 나는 받고야 말았다. 이재명이라는 선물을. 이재명이라는 근사한 선물을.

취임 선서 낭독 후 첫 일성이 국회 청소 노동자를 만나는 일이었다는 보도를 보았다. 영상도 보았다.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는 이재명 대통령을 볼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일렁인다. 대통령에 대한 보도가 쏟아진다. <소년공, 대통령 되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서민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면, 대선 토론장은 가장 고생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 간의 '고통 경쟁', '고통 호소'의 장이 될 것이다. 그 고통을 이기고 성공한 사람, 유력한 정당의 대표가 된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당 대표와 대통령이 되는 길은 비슷하면서도 똑같지 않다. 가끔 국민들은 바보 같은 결정을 하기도 하지만, 곧 그 결정을 철회하기도 한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오랫동안 사람을 잘못 볼 수는 없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고난,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사람들은 그걸 '예술적 승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렇게 변신했을 때, 그 영광은 이전의 고통과는 물리적으로도 화학적으로도 완벽하게 다른 형태와 모양을 지닌다. 나쁜 것에서 가끔 좋은 것이 나오기도 하지만, 나쁜 것에서 반드시 좋은 것이 나오는 건 아니고, 고통과 고난, 그리고 고생이 주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라는 건 확실하다. 고통은, 피하고 싶은 그 무엇이며, 중단시키고 싶은 어떤 순간이다.

이재명은 자신의 고통, 자신의 고생, 자신의 과거와 마주한다. 피하지 않고 직면한다. 잊지 않고 반복해서 말한다. 자신의 과거, 자신의 계급, 자신의 출신에 대해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틈만 나면 자랑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걸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종종 아니 자주. 나의 과거, 나의 계급, 나의 출신에 대해 부정한다. 부정하고 싶다. 그건 말하기 싫은 어떤 것이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이 현재 나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벗어난 사람만이 되돌아갈 수 있다. 극복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재명의 훌륭한 점, 그의 범상치 않음은 자신의 고통,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태도에 있다. 14살의 아이가 여기저기 공장을 전전하며 남의 이름을 빌려 취업을 하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팔에 장애를 입고 나서도 계속해야만 하는 삶이라는 굴레를, 그 끈질김을 그가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 ~라떼는 말이야,라고 말하며 그곳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행세하지 않았다는 것. 스스럼없이 청소 노동자의 손을 잡고 한 사람, 또 한 사람의 손을 맞잡는다는 것. 내가 이재명에게 사로잡히는 지점은 바로 거기다.

유능함은 지도자에게 당연히 필요한 덕목이다. 중고생 교복 무상 지원과 산모를 위한 공공산후조리원 설립, 어린이집 등 보육 시설 과일 공급과 만 24살 청년들에게 지급된 1인당 100만 원의 '청년 배당'. 공약 실천율 89%의 이재명은 유능한 행정가이다. 일개 자치 단체장에서 대통령까지의 영전은 그의 행정 능력을 시민들이 알아봐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능한 사람이 좋다. 말을 알아듣는 사람, 말을 잘 알아먹는 사람이 말 그대로 국민의 '심복'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도 혼자 생각한다. 혼자만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건 마음인가. 따뜻한 마음. 약한 사람에게 먼저 찾아가는 마음.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도 그 처지의 자신을,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는 마음. 자신의 성취를 뽐내지 않으면서 먼저 손 내미는 마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마음인 건가. 진공 청소기를 돌리며, 대통령의 첫 일성을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차오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내가 했던 생각이다.

국민주권정부의 성공을 기원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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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5-06-05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재명 대통령을 잘 모르지만, 단발님이 ‘과분한 느낌‘으로 비유해주시니 기대해 보고 싶네요!

단발머리 2025-06-05 13:18   좋아요 1 | URL
혼자 하는 건 아니니까요. 대통령이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근데 이전 정부 보면 딱 그 대통령에 그 장관, 그 정도의 사람들이 같이 모여 일 하더라구요.
좀 다를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언론이 걱정스럽기는 합니다만, 그래도요. 기대고 싶습니다.

잠자냥 2025-06-05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첫 행보가 청소노동자 찾아갔다는 기사 보고 좀 울컥하더라고요.
퍼포먼스라고 할지라도, 그런 퍼포먼스조차 개념에 없던 정부 이후 그런 모습을 보니.. 눙물이...
이제야 뭔가 정상으로 돌아온 느낌....ㅠㅠ 3년 동안 뭘 본 건지....

단발머리 2025-06-05 13:20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 잠자냥님. 퍼포먼스라도 말이지요. 저는 퍼포먼스가 나쁘다고 생각 안 하거든요. 하는 척도 안 했던 그 무도한 정부를 우리가 3년이나 봤던 거 아닙니까. 못 볼 거... 우리가 많이도 봤지요.
한 번에 안 되겠지만, 아무튼 사회대개혁의 발판이 되었으면 합니다. 모두 다 만족할 수 없겠지만....
제 소원 여기에 하나 말해도 돼요? 최저임금인상. 전폭 인상을 저는 일단 신청해 봅니다 ㅎㅎ

잠자냥 2025-06-05 14:05   좋아요 2 | URL
전 성별에 관계없이 동일노동 동일임금 살포시 놓고 갑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5-06-05 15:22   좋아요 0 | URL
저는 비정규직에 1.5배 임금 지급 살포시 놓고 갑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

망고 2025-06-05 1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뉴스보다가 저번 대선 시장에서 한 연설이 나오는데 갑자기 울컥해서 얼른 방에 들어왔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그래도 고생을 해 본 사람, 경제적으로 좀 궁핍해 본 적도 있고 이것저것 경험도 많이 해본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정말 실질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사는지 공감할 수 있으니까... 머리로만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해서 아는 건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단발머리 2025-06-05 18:02   좋아요 1 | URL
아.... 네, 망고님 말씀도 맞아요. 어려운 상황에 처해 봤던 사람이 그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거에요. 정말 그렇죠. 저는 어렵게 살다가 쌩 깐(?) 사람들, 더 지독한 사람들 많이 봐서요 ㅠㅠㅠㅠㅠ
간절한 마음 변치 말고 부디 국민을 위한 정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wonderful 2025-06-05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놀지않고 일 열심히 할거같아요. 믿음이 갑니다.

단발머리 2025-06-06 18:59   좋아요 0 | URL
네~ 그럴거 같아요. 야근에 김밥에 ㅋㅋㅋ 이거 실화나요? ㅋㅋㅋㅋ

바람돌이 2025-06-07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재명대통령에 대한 단발님의 비유 재밌게 읽었네요. 그런 마음도 있구나 해요. 저는 뭐 단발님같지는 않고 그래도 이제야 사람이 정치를 하겠구나. 그간의 정치가 저것들이 사람이냐하는 날들의 연속이라 그것만 해도 감개무량합니다. ㅎㅎ 국민들의 기대가 큰만큼 부디 이 정부가 성공적인 행보를 걸을수 있기를 기원하고 있어요.

단발머리 2025-06-09 21:03   좋아요 1 | URL
저것들이 사람이냐~~~ 의 시간이 길기는 했지요. 감개무량하기도 하구요.
바람돌이님과 한 마음으로 이 정부가 성공적인 진짜 국민주권정부 되기를 바래봅니다. 간절히~~

책읽는나무 2025-06-08 08: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청소 노동자 분들과 악수 하시는 장면을 보면서 이재명 대통령이 어떤 마음으로 그 손을 맞잡았을지 그 마음이 짐작이 가 찡했었어요.
여동생과 어머님 생각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어머님도 아들이 대통령 되는 걸 보셨더라면 참 좋았을텐데…싶기도 했구요.
암튼 주사위는 던져졌고 걱정이 앞섰지만 이젠 그 걱정 접고 무조건 국민을 위한 정부로서 열심히 일 해줄 것이란 기대와 응원을 보내봅니다.

단발머리 2025-06-09 21:05   좋아요 2 | URL
네네~~ 저는 임기 첫날 야근에 다음날 점심 김밥 한 줄도 참 인상적이었어요. 그래도 사람들이 이 장면, 청소노동자들과 손잡는 장면에서 많이 뭉클해하시는 거 같더라구요.
걱정도 많고 경제 상황도 많이 안 좋지만 잘해나가기를 바래볼 뿐입니다. 아무튼 큰 걱정은 덜었어요......
 

















독서괭님의 <영어책 같이읽기> 공지를 보고 참여할 생각을 했던 건 아닌데(아닌데 ㅋㅋㅋㅋㅋ) 책에 자꾸 눈이 가기는 했다.

분명 아는 책인데, 읽지 않은 책이고. 저 책을 산 것도 같은데, 사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청소년용 영어책으로 잘 알려진 책이라 표지가 눈에 익어 그런 걸까. 일단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했다.









원서의 판권을 한국 출판사에서 사 온 듯한데, 책 플러스 단어정리가 잘 되어 있는 롱테일북스의 뉴베리 컬렉션 시리즈는 내가 애정하는 시리즈다. 영어 공부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나오는 책들 중 상당수가 이 시리즈로 나와 있는데, '원서읽기'의 중간 거점 같은 느낌이어서 '원서 읽기 시작해 보겠겠다' 하는 친구들에게 권하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그러다 지난주에 찾을 책이 있어서 책장 속 책들 위로 덮인 달력 종이들을 치우고 책을 찾기 시작했는데, 앗! 있었다. 있었던 것이다. 『The Miraculous Journey of Edward Tulane』이 집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 책은 이 표지였고.







혼잣말로 아하~~ 표지가 달라 헷갈렸으며, 안 읽은 건 확실하다는 걸 책의 상태로 확인했으며. 그래도 다정하게 사진 한 장 찰칵!




내란성 불면증은 없었지만, 12월 3일 이후로 밤이 좀 다르게 느껴지기는 했다. 몸이 덜덜 떨리는 그 밤을 잊고 싶었는데도 자주 그 밤의 공포와 분노가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고, 노래 한 번 부르고 또 기다리던 그날이 드디어 왔다. 하루가 얼마나 길었던지.

닭강정 주문해놓고 또 기다린다.



이제 29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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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5-06-03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구조사 보니 마음놓아도 될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5-06-03 20:22   좋아요 2 | URL
내란정당에 후보가 K인데 39%가 넘는다니.... 좀 충격이긴 해요.
망고님~~ 이제 우리 맘 놓고 오늘은 맘껏 기뻐해요! 👏🥳🎉

망고 2025-06-03 20:22   좋아요 1 | URL
0.7퍼를 이겨도 이긴거니까 저는 나름 만족하고 감격스러워요😭

단발머리 2025-06-03 20:40   좋아요 2 | URL
네네 맞아요. 진짜 그랬네요. 0.7퍼에 승패가 갈렸죠 ㅠㅠㅠㅠ
출구조사 보다 2%만 더 나와라, 싶은데 욕심 부리면 안 되겠지요. 저도 만족하고요. 감격의 도가니에 퐁당! 🎊

독서괭 2025-06-03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머 표지가 달라서 기억 못 하셨던 거군요! 저 표시도 예쁘네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집으로 걸어가는 표지가 이야기에 더 맞는 것 같고 저도 그 표지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읽어보시죠. 쑝쑝!!

단발머리 2025-06-05 15:59   좋아요 1 | URL
네, 집으로 가는 표지가 맞는거 같아요. 제 책의 표지가 더 어둡긴 하지만요.
읽으려고 합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구요. 아, 근데 책 어디갔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크pek0501 2025-06-04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차에서 원서로 소설을 읽고 싶은 소망이 있었는데 물 건너 갔다는...
한때 열심히 영어 공부했었는데... 살면서 포기가 많아져요. 하하~~

단발머리 2025-06-05 16:00   좋아요 0 | URL
물 건너 떠나간 소망을 찾습니다.
사실 저도 포기 한 번, 희망 한 번이 체크 무늬처럼 번갈아 나타납니다. 하하~~

다락방 2025-06-04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독서괭 님 따라서 읽으려고 사놓기만 한 바로 그 책입니다. 이상하게 나 이거 읽지 않았나? 갸웃하면서 샀는데 사고 보니 안읽은 것 같은.. 아무튼 지금도 안읽고 있긴합니다. 읽을겁니다!

그리고 이재명 대통령을 맞이하게 되어서 정말 좋아요. 윤이 용산에 남겨둔 비품이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무슨 일을 한건지, 일을 하긴 한건지.. -.-

단발머리 2025-06-05 16:02   좋아요 0 | URL
저는 10년도 넘은 거 같아요. 애들 읽히려고 산 책이거든요. 아니면 2,000원 적립금 받으려고 원서 넣다가 샀을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프린터가 안 되고(이해 안 됨), 종이, 볼펜도 없는데(이게 가능?) 인터넷도 안 되었다고 그러대요.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나쁜 일 하다가 런~~ 이런 분위기 아닌가 싶습니다.

하이드 2025-06-05 0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 저는 이 책을 달리기하며 오디오로 들었는데, 점진적으로 가슴이 찢어지고, 마지막에는 달리다가 에드워드를 외치며 오열했습니다.

단발머리 2025-06-05 16:03   좋아요 0 | URL
점진적으로 가슴이 찢어지고, 에서 약간 걱정스러웠는데, 달리다가 에드워드 외치며 오열~~ 에서 읽기로 결정했어요.
하이드님, 저 이 책 읽으려고요! 다 읽고 리뷰로 돌아올게요^^
 
재생산 유토피아 - 인공자궁과 출생의 미래에 대한 사회적·정치적·윤리적·법적 질문
클레어 혼 지음, 안은미 옮김, 김선혜 감수 / 생각이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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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페이퍼를 쓰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주제는 '재생산권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 전제는 '재생산권을 통제한다' 혹은 '재생산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출산율, 이제는 출생률로 부르고 있는, 재생산 비율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획기적인 대안이 도출되지 않고 있음을 고려하면 아직은 우리 사회가 그 문제를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는 하다.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길어야 100년 사는 우리가 고민하는 지구의 미래에 대해 나는 좀 회의적이다.

문제는 권력자들의 정치적 성향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더 좋거나 더 나쁜 재생산 후보로 분류하고 서열화할 수 있으며, 이를 근거로 재생산을 통제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부분적으로는 좌파, 진보적 사상가, 선의를 지녔다고 인정되는 개인, 국가 또는 기관이 이행하기만 한다면, 그런 관행은 허용될 수 있고 심지어 유익할 수 있다는 위험한 신념 때문에 우생학이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이런 발상은 어떻게 아직도 할데인이 상상한 인공 자궁에 대한 잔재가 실현 가능한지, 우리가 얼마나 더 나아가야 체외발생이 화를 재촉하는 데 쓰이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시사한다. (109쪽)

폭력으로부터 임신한 사람을 보호해 줄 자원을 제공하는 것보다, 그저 이들의 몸에서 태아를 적출하여 '더 안전한' 장소에서 자라는 편이 더 낫다는 발상은 지극히 충격적이다. 이런 주장은 태어난 어린이와 동등한 권리를 태아에게 부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임신한 사람이 임신에 최적화되어야 할 '환경'이자 인큐베이터에 불과하다고 암시하면서 이들의 권리를 침해한다. 그리고 이런 각각의 주장들은 인공 자궁을 우생학의 실현 도구로 활용하려는 과거의 잔재를 이어간다. (115쪽)

배아에 대한 실험적, 물리적 통제가 14일이었지만, 이제 그 기한은 이런저런 이유로 연장될 가능성이 크다. 초극소 미세아에 대한 돌봄 혹은 관리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경우, 두 개의 기술은 반드시 결합할 것이다. 의료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인공 자궁에 들어가는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날 테고, 그 이후에는 '편리함'을 이유로 인공 자궁을 이용해 아이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런 흐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에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기술의 적용에는 후진이 없다고 생각한다.

뒤쪽을 읽어갈 때는 '조산아'의 인종, 계급, 사는 지역에 따른 사망률의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보건 의료 자원을 보다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에는 임신한 사람, 엄마, 영아들의 건강 불평등이 인종차별로 인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있다. 미국의 경우 임신한 흑인 여성들의 사망률은 임신한 백인 여성들의 3~4배에 이른다. 또 임신 및 출산과 관련하여 '생명이 위태로워'지거나 신체적 손상이나 합병증으로 후유증을 겪을 확률도 실질적으로 더 높다. 원주민 여성들이 임신이나 출산과 관련된 원인으로 사망할 위험은 도시에 사는 백인 여성들보다 4.5배 더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 사는 흑인, 하와이 원주민, 미국 본토 원주민, 알래스카 원주민 아기들은 미숙아로 태어날 위험이 더 크고, 생후 일 년 이내에 사망할 확률도 더 높다. (144쪽)

적은 비용으로 치료가 가능한데도 건강 불평등 때문에 흑인, 원주민의 아기들이 목숨을 잃는 반면,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얻어진 최신 과학 기술 덕분에 생명을 '연장'하게 된 백인 아기들이 존재한다. 이는 명백히 자원의 배분과 연관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당연히 서열화일 것이다. 누가 누구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 정치를 넘어 문화의 영역에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용인될 때, 사람들의 잘못된 신념은 구체적인 통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반대로 '강제적' 평등이 강조되었을 때, 전체주의 사회의 도래를 막을 수 없게 된다. 로이스 로이는 소설 『기억 전달자』에서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차이를 'sameness'로 치환하려 했을 때, 그러한 강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지 보여준다. 요는 '차이'를, '다름'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상을 우열로서가 아니라 차이로서 인식하는 것. 인류 문명이 다하는 날까지 어쩌면 그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부분에 재생산권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두 아이를 낳아본 입장에서 낳는 것보다 키우는 일이 몇 배 더 힘들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뱃속에 아이를 열 달 넣고 다니는 게 힘들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한 인간을 1인분으로 키워내고, 그 모든 과정에서 가능한(혹은 최대한)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나 자신을 반추해 나 자신이 먼저 성숙한 인간, 좋은 부모에 가까운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2018년 11월부터라고 다락방님이 이야기해 줘서야 알았다. 같이 읽기를 시작했던 그 순간의 대화들도 기억이 또렷한데 7년이나 지났다고 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책 선정에서부터 리뷰와 페이퍼 쓰기, 완독 독려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을 이끌어주신 다락방님께 특히 감사드린다. 함께 읽고 함께 쓰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었던 모든 이웃님들 덕분에 새로운 것들을 많이도 배웠다.

완독의 기쁨을 5월 31일, 오늘 이날에 즐겁게 담아둔다.

기술로 만든 장치 안에서 자라는 아기의 경험은 인간의 자궁안에서 겪는 경험과는 어떻게 다를까? 또 우리가 결국 이런 계획을 추진해야 할 이유에 설득되어 동의한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미래의 일을 넘겨짚는 대신, 1923년과 케임브리지의 북적북적한 학술모임에서 ‘체외발생‘이라는 말이 처음 생겨난 순간으로 돌아가 과거를 되짚어보면서 가능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자. - P85

달리 말하면 인공자궁은 ‘우월한 자‘만이 생존을 보장해준다는 이야기이다. 《오늘과 내일》 시리즈의 다른 저자들도 우생학이 완전히 실현된 미래가 더 나은 미래라는 데 동의했을 것이다. - P102

헉슬리가 전체주의와 우생학이 지배하는 체제를 상상한 시기는 나치의 그야말로 극단적인 우생학 정책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었다. 하지만 당시 헉슬리는 영국, 유럽, 북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시행되고 있는 정책과 법률, 관행에서 정보를 얻었다. 이 책이출판된 지 3년이 지난 1935년에는 뉘른베르크 인종법Nuremberg RaceLaws으로 홀로코스트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유럽과 북미에서는열등하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의 불임화와 분리정책을 정당화할의도로 법규를 통과시켰듯이, 뉘른베르크 법은 유대인, 로마인, LGBTQ, 흑인, 장애인, 혼혈인을 인간 이하로 분류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이 법은 이들 중 누구도 ‘아리아‘ 독일인과 결혼하거나 성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명시하고 사람들이 결혼 전에 건강적합인증서를 갖추도록 했다. 이러한 각각의 조치들은 미국에서 통과된 법규와 영국 우생학자들의 권고 및 저서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았다. - P110

국가나 기관이 몸 안에 아기를 지니면 안 된다고 다른 누군가를 대신해서 결정한다면, 이것은 우생학이다. 임신한 사람이 알코올이나 마약을 사용했든, 암 치료를 받았든, 학대에 희생되었든, 이런 행동 때문에 임신한 사람의 몸에서 아기를 적출되는 편이 아기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결할 권한이 판사에게 주어진다면, 이것도 우생학적이고 반페미니즘적 관행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이 같은 판결을 마주한 사람이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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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6-02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 5월 도서 완독을 축하드리고요 읽고 글까지 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같이 읽어주셔서 더 감사드리고요. 단발머리 님 덕에 이 같이읽기가 오래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같이읽기를 하게 된다면 꼭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단발머리 님이 게셔야 힘이 납니다.
감사했어요!!

단발머리 2025-06-03 11:20   좋아요 0 | URL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건 좋은 책과 알라딘 이웃님들, 그리고 다락방님이 계셔서에요.
안식년 야무지게 잘 보내신 후 또 좋은 계획 있으면 공지해 주세요^^
우리도 더워요, 한국도요 ㅋㅋㅋㅋㅋ치앙마이도 덥겠죠? 땀 많이 내고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