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그래서, 너는 페미니스트야?"하고 물었을 때, 나는 명동의 하동관 곰탕 속으로 잠수할 기세로 한 숟가락을 가득 퍼 입에 밥과 고기를 넣고 있었다. "음, 음. 나는 페미니스트야."




고등학교 1학년 때, 열일곱 살에 이 친구를 만났다. 대학을 가고, 연애를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퇴사를 하고,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만나고 또 만났다는 건 서로를 좋아한다는 뜻이고. 친구가 "너, 페미니스트야?"하고 물었을 때, 나는 안전하다.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배척당하지 않을 것이고, 설명을 강요당하지 않을 것이다. 미움받지 않을 것이고 해고당하지 않을 것이며, 살인 협박을 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안전한다. 그래서, 나는 '응.'이라고 답할 수 있다. 각성한 20대 여성, 페미니즘 책을 이만큼이나 읽었어도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며 가차 없이 나를 질책하는 20대 여성과 마주 앉았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주위의 가까운 여성들, 친구들, 교회 집사님들, 아이가 어릴 때 알게 된 아이 친구 엄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는다. 그건 모두 다 아는 비밀과 같다.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은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다. 나는 말하지 않는다.

시집 이야기, 시어머니 이야기, 남편 이야기, 그리고 돌봄을 당연한 것으로 요청하는 엄마에 대해 폭발하는 경우에만 한 마디를 보탠다. 근데, 그게... 그게 보니깐 안 그런 사람이 없는 것 같아. 모두 다 그런 것 같고. 난 예전에는 우리나라가 유교문화권이라서 유독 그런 줄 알았는데(여기에선 남존여비), 그것도 아닌 것 같아. 그러면서 리베카 솔닛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세계 최고의 나라, 지상 왕국 미국 여성들의 부상 원인 1위가 교통 사고가 아니라, 현 남편, 전 남편, 현 남친, 구 남친의 폭행이라는 걸. 다들 놀란다.

여성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인류 문화의 시작이 여성 혐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건 4시간, 혹은 5시간이 필요한 주제다. 대화를 독식하는 것도 폭력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 페데리치, 달라 코스타 이야기도 할 수 없다. 역시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앞의 이 친구는, 나를 좋아하는, 나를 귀히 여기는 사람이고. 내 친구는 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그리고 우리는 단둘이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남편의 임금에는 너의 무임금 노동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체제는 일부를 억압함으로써 굴러가고 있다고 말한다. 친구는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한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한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봤어.

내 친구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일등 신붓감'이다. 못하는 일이 없다. 주부에게 요청되는 그 모든 걸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짜증 내지 않으면서 쉽게 빠르게 집안일을 해내고, 맛있는 음식을 내놓고, 사교육 없이 아이를 가르치고, 부업까지 하고 있다. 친구의 남편은 다정하고, 친구의 말을 잘 듣는다. 만약 행복하다면, 지금의 상태에 만족한다면, 난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가부장제 이성애 가정을 이상화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로 인해 남성들이 얻게 되는 집단적 이익, 특혜와 특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자주... 그 제도와 억압의 굴레 속에 살아가는, 그중 일부를 인정하는 나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바른 말'을 한다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지기는 한다. 20대 여성의 뼈아픈 충고는 옳다.

가사노동임금 관련 저자들과 활동가들은 재생산 영역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며 가사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반자본주의 투쟁의 중심에 있다고 역설했다. 이들은 가사 노동이 자본 재생산에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붕괴시킬 잠재력이 있다고 서술했다. 이 운동의 핵심 요구는 무임금이나 저임금 상태에 있는 재생산 노동에 대해 자본주의 국가가 임금을 지불하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든 재생산 노동에 임금을 지급할 경우 자본주의가 이윤을 낼 수 없다는 점을 이런 식으로 보여주려고 했다.(25-6쪽)

여성학자 캐시 워크스 Kathi Weeks가 말하듯이, 노동 행위에는 존재론적 실체를 만드는 효과가 있다. 즉 노동 행위가 주체를 존재하게 한다. 주체는 기억, 욕망, 습관을 통해 안정된 실체로 드러난다. 이런 것들은 어떤 유형의 노동을 능숙하게 반복하면서 내면화된다. 주체는 사회적으로 성립된 자아를 사회보다 앞선 진정한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감정노동의 경우에 특히 그렇다. (45쪽)



이 책을 읽고 있다. 잘 읽을 수 있을 테지만,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안의 모순과 낙담을 하소연 없이 풀어내고 싶다. 집에 아무도 없어 조금만 더 읽고 싶은데, 밤 되기 전에 청소기 돌려야 한다. 오후 6시 49분이니까. 서두르자.


청소기 마저 돌리고 큰애가 사온 김밥과 호떡을 먹었다. 이제 점심 설거지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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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5 0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5-02-25 07:47   좋아요 0 | URL
미슐랭에게도 엄격한 ㅋㅋㅋㅋㅋㅋㅋ 우후훗~ 절대미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5-02-25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25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25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5-02-25 12:46   좋아요 0 | URL
😍😘🥰😙😝🥳😎
 
아기 퍼가기 시대 - 미국의 미혼모, 신생아 입양, 강요된 선택 서구 미혼모 잔혹사 1
캐런 윌슨-부터바우 지음, 권희정 옮김 / 안토니아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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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필요한 것은 정부로부터 받는 양육 지원이 아니라 필요한 물건을 사 줄 수 있는 두 명의 부모이며, 그들은 아기에게 사랑 외엔 줄 것이 없는 미혼 엄마가 줄 수 없는 물질적 풍요를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권유하고, 회유하고, 강요하며, 수치심을 주고, 병명을 붙여 진단하고, 몰아붙이고,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입양 복지사는 이미 알지도 못하는 낯선 부부에게 (돈을 받고) 아기를 구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 놓고는 미혼모가 아이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저항하면 자신들에게 아기를 넘기라고 위협한다. 미혼모는 사람들이 사랑보다 돈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61쪽)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아동 복지'라는 이름으로 미혼모의 아기에 대한 대대적인 입양 정책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극한의 경험 속에서 취약한 상태에 빠진 미혼모들, 특히 10대의 미혼모들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가족들, 남자 친구, 애인과 분리되었고,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들의 삶과 미래를 결정해야 했다. 친화적인 태도로 미혼모들을 도와주던 복음주의 기독교 여성 종사자들은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회 복지사들에게 그 역할을 빼앗겼다. 아기와 엄마간의 교감과 소통을 강조하던 이전의 기독교 여성들과는 달리 사회 복지사들은 미혼모들에게 아기를 키울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며, 더 '훌륭한' 부모에게 아기를 입양 보낼 것을 강요했다. 아기를 위해, 아기의 미래를 위해 입양을 선택한 미혼모들은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괴로워했다.이 책의 저자도 그런 미혼모 중의 한 사람이다.

문제는 수요다. 아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 돈벌이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아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선다. 왜, 왜 아이가 필요할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기 퍼가기 시대'가 시작되던 미국 사회에서 무자녀 부부는 불완전하고 그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완벽한 가족 신화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자녀가 많은 가족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자녀가 없는 가족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가운데 아이가 없는 부부는 여러 가지 다양한 압박에 노출되었다(Reid 1956). (110쪽)

가정의 중심은 부부다. 이는 너무 당연한 말이다. 두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완벽한 가정'의 그림 속에는 아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상화된 가정을 완성하기 위해 아기가 필요했다. 어떤 아기인가. 사람들이 원하는 아기는 파란 눈의 백인 여자아기였다. 입양 가능 조건을 충족시킨 사람들은 대부분 백인 부부였고, 이들은 자신들과 닮은 파란 눈의 백인 여자아기를 원했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프렌즈>에는 주인공 챈들러와 모니카가 나온다. 서로를 너무 사랑하지만 아기를 갖지 못한 이 부부는 여러 번의 다양한 시도 끝에 두 사람 모두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10대 미혼모(금발, 파란 눈의 백인)의 아기들(쌍둥이)의 입양을 위해 입양 신청 절차를 진행한다. 드라마 속에서 이 과정은 아름답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어리고 미숙하지만, 착한 마음을 가진 10대 미혼모가 경제적 여건을 갖추고 있으면서 좋은 부모가 될 열의와 사랑을 가진 두 사람에게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결정'을 통해 아기들을 입양시키기로 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고, 이 책은 그러지 않았을 때의 이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아기를 빼앗긴 미혼모의 고통은 새로운 아기를 얻는다고 해서 희석되지 않는다. 영원히, 그녀들은 잃어버린 아기를 그리워한다.

이러한 비도덕적 입양 강요가 가능할 수 있었던 건,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 아기에 대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기를 원하는 백인 중산층 부부의 아내였다고 상상해 보자. 나는 아기를 원한다. 나를 닮은, 남편을 닮은 예쁘고 귀여운 아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기를 낳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기를 원한다. 우리 가정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기는 만들어질 수 있는 어떤 것, 주문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아기는 남녀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고, 여성의 희생으로 완성되어 이 세상에 태어난다. 나는, 우리 가정에는 아기가 필요하다. 아기를 줄 수 있는 여성을, 아기를 주고자 하는 여성을 찾아보자. 그 여성은 자신의 아기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인다. 이 아기는 혼외자이고, 경제적 불안 속에 성장할 것이 뻔하다. 그 아기를 우리 집에 데려온다면? 나는 그 아기를 내 아이처럼, 아니 내 아이로 키워낼 자신이 있다. 그 아기는 우리 가정에서 자랄 때 더 행복할 것이다. 그 아기는 우리의 아기가 되어야 하며, 내게는 그 아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미혼모에게서 그 아이를 빼앗아야 한다.


바로 여기. 아기를 갖고자 하는 나의 욕망과 아기를 자신의 힘으로 키우고자 하는 미혼모의 욕망이 충돌한다. 타인의 욕망에 반하는 나의 욕망은 어느 지점까지 용납될 수 있는가. 나는 어느 선까지 나의 욕망을 타인에게 강제할 수 있는가. 나의 욕망을 완성하기 위해서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 입양 복지사 로우에 따르면, 입양 부모들은 입양할 아이를 고르기 위해 미혼모 시설에 직접 방문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엄마들의 극심한 고통"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에 "불편함"을 느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입양의 날 느끼게 될 행복"을 망쳐 버리기 때문이다.(210쪽)

… 입양 부모는 친모를 계속 비가시화하고, 마음에서도 멀어지게 하려고 하는데, 왜 그런지 그 동기를 오랫동안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아무도 누군가의 희생이 전제된 행복을 누릴 수는 없다. (212쪽)

백인 중산층 부부들은 '모른 척' 하기로 한다. 미혼모의 딱한 사정을 '못 본 척' 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행복,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게 된 행복은 진짜가 아니다. '아기 퍼가기 시대'는 그렇게, 미혼모들의 눈물과 불행을 통해 완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구원된 입양 아동은 감사해야 한다고 믿었다. 만약 입양된 아이들이 친부모에 관해 묻거나 친부모를 찾으려 하면 나쁜 아이이거나 은혜를 모르는 아이라는 말을 들었다. 입양인들은 과거에 대해 알 권리가 없고, "부도덕한" 미혼모와 살았다면 누리지 못했을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양부모도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 생긴 것이다(Marshall & McDonald 2001). - P90

1940년대 말 백인 신생아 입양을 원하는 불임 백인 부부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신생아를 빨리 입양하고자 하는엄청난 수요"와 입양할 아이를 빨리 확보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미혼모를 번식 기계로 여기는 경향이 점차 커졌다"(Young1953). - P113

또한 입양 보내진 아동의 인종적 차이는 확연하다. 1963년미혼모에게서 태어난 백인 신생아의 약 70%가 입양 보내졌지만, 흑인 아동의 경우는 5%에 그쳤다(Winston 1963). 1964년 입양보내진 아기 중 백인은 70%, 흑인은 4%였다. 이 해 미혼모 중 백인은 42%로 기록된다. - P193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실망하고, 자신도 스스로에게 실망한다. 사회는 어떤 엄마에게 임신은 잘한 일이고, 어떤엄마에게 임신은 잘못한 일이라고 한다. 어떤 엄마에게는 슬퍼하라 하고, 어떤 엄마에게는 슬퍼하는 것은 적절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은 행동이라고 한다. 어떤 엄마에게는 자신보다 아기를 먼저 생각하는 일이 자연스럽다 하고, 어떤 엄마에는 아기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 그녀는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자신의 경험에서 고립되어있다. 그녀가 느끼는 슬픔은 해결될 수 없다. 홀로 어떻게든그것과 함께 살아야 한다. (Roland 2000:9-10)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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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5-02-23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군요. 완독 축하드립니다~~

이 책은 여러모로 참 할말이 많은 책인 거 같아요.
두 아이를 평범한 가정에서 키워낸 저이지만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되어 아이를 빼앗긴 수많은 엄마들에게
무어라 할말이 없을만큼 마음이 아픕니다.
진정으로 누군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날이 올까요.
아이를 보내는데 적극적이었던 입양보호사나
스노우화이트에 푸른 눈만을 선호하는 입양가정에도 엄마라는 여성이 있었음에 분노합니다!

단발머리 2025-02-25 07:50   좋아요 1 | URL
저는, 거부하고 싶은< 제도로서의 모성>이 어떤 사람에게는 소중한 그 무엇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좀 많이.... 복잡했습니다.
다른 아이를 낳아도 채워지지 않는 그 마음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했구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미혼모들에게 입양을 강요한 입양 보호사들은 정말 나쁜 사람, 사기꾼이 맞는 것 같아요. 잃어버린 시간들은 대체 어쩌면 좋을까요....

다락방 2025-02-24 0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프렌즈에도 저런 에피소드가 나왔었군요. 입양이 언제부턴가 주객전도가 된것 같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하고 있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임신해서 혹은 기타 다른 이유들로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상황은 있을 수 잇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럴 경우에 좋은 집으로 입양을 가는 것도 방법중 하나라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입양을 원하는 수요가 크다 보니 이제 그렇게 아기를 ‘팔기‘ 위해서 미혼모가 필요해져버린 상황이 된걸로 생각되거든요. 그게 그 과정에서 분명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이익을 취하는 사람이 아이를 낳은 엄마가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요.

완독 축하드립니다. 저는 전쟁과 평화 읽느라고 잠깐 멈춤 상태입니다. 곧 따라갈게요!!

단발머리 2025-02-25 07:54   좋아요 1 | URL
저도 다락방님과 비슷한 생각이었어요. 여유로운 환경에서 행복한 가정에서 양육받는 것이 그 아이에게 더 좋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요. 취약한 미혼모들의 아이를 빼앗기 위해 그들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게 가장 나쁜 거라고 생각해요. 정서적 지원이나 응원이 어렵더라도, 경제적인 부분이 채워지면 미혼모들이 용기 내어 아이를 키울 수 있었을텐데...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현재 러시아를 여행하신다고 들었어요. <전쟁과 평화> 평화롭게 마치시고, 완독 행렬에 참여하시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침에는 영어 공부를 한다. 책만 펴면 얼마나 졸리는지. 순식간에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하게 된다. 너무 졸려서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를 돌아다닌다. 매해 벽두마다 두근두근 심정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뭘 준비해야 하나. 딥시크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용되지 않고 나 자신을 고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해서 숙련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란 무엇일까.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을까. 돈을 받고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가 앞을 서성인다. 눈에 띄는 책을 뽑아 든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딱 하나만 선택하라면, 책

유물론

완벽하지 않을 용기

나르시시즘의 고통

바이칼호에 비친 내 얼굴

Diary of a Wimpy Kid 『The Meltdown』

재취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책으로만 6권을 골랐다. 그래도 우치다 책이 내가 가려는 그 어딘가에 제일 근접해 보인다.

이 장면은 약간, 아니 많이 알라딘스럽다. 혹은 알라딘틱하다. 알라딘의 리뷰, 알라딘의 페이퍼가 대부분 이렇지 않은가 싶다. 흠~ 좋았어. 아, 진짜 좋았어~의 동력으로는 리뷰를, 페이퍼를 쓰게 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어머, 어떡해. 와, 진짜 이 책 짱인데! 의 감상이 있어야만 리뷰를 그리고 페이퍼를 쓸 수 있다. 여러분~~ 여러분을 부르는 외침. 내 말 들려요?! 의 물음이야말로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곳에는 눈 밝은 독자이자 귀 밝은 독서가들이 계시기에 읽고 쓸 수 있다. 여러분!! 여기 진정한 걸작이 있어요!


























이 페이지도 남겨 두고 싶어 사진을 찍고 여기 박제해 둔다. 읽은 책이 보이면 반갑고 즐겁다. 『파이 이야기』, 『노인과 바다』 안 읽은 거는 억울하지 않고, 『작은 것들의 신』, 『조이 럭 클럽』이 보이니 마냥 신난다. 두 번째 페이지는 읽은 책이 더 많은데 그중에 제일 반가운 건 『레 미제라블』, 『유혹하는 글쓰기』 그리고 『쥐』다.

아침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책을 조금 읽는다. 저녁에는 이력서를 쓰고 자기소개서를 읽고, 다시 또 읽는다. 이력서를 양식에 맞춰 고쳐 쓰고, 자기소개서를 한 번 더 읽고, 문장을 한 번 더 고친다.

길게 쓰고, 더 길게, 혹은 아주 길게 쓰는 일이 어렵지 않은데, 나를 소개하는 일은, 나를 증명하는 문장을 쓰는 일은 이렇게나 고되다. 예상보다 어렵고, 생각보다 난감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면접/면접들. 옷깃을 여며도 바람은 차고, 나는 또 나를 설명해야 한다.

오늘 아침에는 여유롭게 집을 나섰고, 엄마와 만나 그간 밀린 토크를 나눴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반대여서 엄마가 타신 초록색 버스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바람이 한없이 매서웠다. 패딩 모자를 덮어쓰니 한결 나았다.

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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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8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5-02-18 21:48   좋아요 0 | URL
네네~~ 그럼요! 완전 찬성합니다!

공쟝쟝 2025-02-18 2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돈을 많이 번다면 단발님을 취직시켜 드릴텐데....ㅜ_ㅜ 아직 제 사업장이 협소합니다...

단발머리 2025-02-19 08:39   좋아요 0 | URL
쟝쟝님이 많이 잘못하셨네요ㅋㅋㅋㅋㅋ얼른 넓직한 사업장의 사장님이 되시어 저를 고용하셔야지~
4대 보험, 주휴수당, 연차, 독서지원금 이런 거 주셔야지요, 쟝쟝님이...
근데 쟝님이 나 고용했는데 나 할 줄 아는 일이 하나도, 없으면 어쩌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02-19 0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 제가 행운 좀 놓고 갑니다. 이거 가져다 쓰세요!!

단발머리 2025-02-19 08:40   좋아요 0 | URL
에구에구, 이 귀한 행운을 여기에 두고 가셨네요. 어머나! 포장지도 너무 예뻐요, 리본도 예쁘고요.
아껴서 잘 사용할게요. 오늘 하루는 종일 좋은 일만 생길거 같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nine 2025-02-19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윔피 키드 시리즈를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아들이 어렸을때 좋아했고 그래서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한구석에 가지고 있는 책인데. 저 멜트다운은 없어요. 저 단어가 요즘 아주 눈에 많이 뜨이더군요. 우리말의 멘붕이 딱 저 말이래요.

단발머리 2025-02-20 07:26   좋아요 0 | URL
저희집 아이들은 안 좋아했고요. 제가 좋아했는데, 주인공이 저 같은 캐릭터라서 그런걸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도서관에 가니 저 시리즈가 주르륵 있어서 딱 뽑아들었는데 딱 우리 상황 맞는것 같아요. meltdown...
 














이 책의 부제는 <미국의 미혼모, 신생아 입양, 강요된 선택>이다. 저자 자신이 미혼모로서 강압에 의해 자신의 딸을 빼앗긴 일을 시작점으로 미국의 '입양 산업'에 대한 '폭로'를 적어내려간 글이다.


미혼모를 돕고 그들이 아이와 함께 있도록 도움을 주던 복음주의 기독교 여성 종사자들은 미혼모 분야의 전문가이자 입양 전공자라고 주장하는 입양 사회 복지사들이 미혼모 시설에 들어오게 되면서 현장에서 물러나게 된다(55쪽).

직업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 복지사들의 최종 목표는 '미혼모와 아이가 잘 생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었고, 아이를 다른 가정에 '입양 보내도록 미혼모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취약한 미혼모들은 사회 복지사들과의 접촉 시간이 많아질수록 입양에 동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혼모와 아이들에 대한 정책이 '지원'에서 '입양' 중심으로 바뀐 것에 대해 비판하던 비평가들은 일부 입양 복지사들의 행동이 사기와 다름없다(64쪽)고 주장했다.

두 명의 호주 범죄학자에 따르면, 사기꾼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뉘우치지 않고 상대가 "바보 같다거나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사기당한 사람들을 비난하며 얄팍한 방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또한, 사기꾼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축소하거나 "오만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64쪽)

그러니까 도서관에서, 메가 커피 바닐라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내가 읽던 대목은 바로 여기였다. 사기. 사기꾼.

1초 안에 이 문장들은 이렇게 바뀌어버렸다.

두 명의 호주 범죄학자에 따르면, 사기꾼들(윤가와 내란세력)자신들의 행동을 뉘우치지 않고("비상계엄은 국민호소용이다") 상대(국민들)가 "바보 같다거나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사기당한 사람들(국민들)을 비난하며 얄팍한 방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또한, 사기꾼들(윤가와 내란세력)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축소("아무도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다", "한밤의 해프닝이다")하거나 "오만한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64쪽)

사기. 사기꾼들. 대국민사기극 생중계 보기도 넘나 피곤한데, 헌재에서 탄핵심판 일정에 18일 추가 변론을 지정했다고 한다. 얼른 끝나야 할텐데. 얼른 끝나야 끝날텐데...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미혼모를 어려움에 놓인 어머니로 보지않고, 위험한 여성으로 보았다. 정신박약과 성적 방종이란 두개의 낙인을 사용하며 미혼모에게 입양에 치우친 서비스를 제공했다. 만약 어떤 미혼모가 "정신박약으로 보기에 너무 똑똑하면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으로 진단하고 어머니가 되기에 결함 있는 여성으로 만들어 손쉽게 아기를 엄마로부터 떼어 놓았다. - P42

한편, 사회복지사들이 수행한 "양면적" 역할과 더불어 사회복지사들이 주로 여성이었다는 직업의 젠더적 특징이 주목받기도 했다. 웨거는 입양 복지사들이 일반적으로 인도주의적 동기에 고무되었지만, "좋은 엄마" 만들기에 관한 사회적 가정에 기초하여 미혼모를 다루었고, 게다가 전통적으로 여성이 하는 일을 평가절하했던 사회에서 여성 직업인으로서의 지위, 권위 그리고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미혼모 관련 정책을 만들었다(Wegar 2008[1997])고 주장했다. - P64

심리학 교수이자 여성학자인 필리스 체슬러는 관습을 따르지 않는 것을 죄악시한 점을 지적하며 엄마로부터 아기를 빼앗은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질문한다.

만약 미혼모의 유일한 죄가 관습을 따르지 않은 것이라면, 엄마의 양육권을 박탈하고 아기를 빼앗아 가는 것은 국가, 가족, 또는 아동 중 누구를 위해서인가? 누구를 위한 이익이 작동하고 있나? 미혼모가 어머니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양육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적 질서를 위반했기 때문이다. 결국 ‘부모의 권리‘란 사실 ‘남성‘의 권리를 포장한 말이다. (Chesler 1986:361)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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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 - 우리를 분열시키는 이슈에 대해 말하는 법
아리안 샤비시 지음, 이세진 옮김 / 교양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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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백인도 인종차별당할 수 있나>와 9장 <불평등 구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인상깊었다.

부제는 <우리를 분열시키는 이슈에 대해 말하는 법>이다. 작가 소개에 쿠르드계 영국인이라 나오는데, 아버지가 아랍계이고, 어머니가 백인이다. 이 소개가 필요한 이유는 이러한 사실이 저자의 독특한 위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을 '유색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혹은 적어도 스스로 백인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 같다. 49쪽에, 자신의 피부색이 밝아서 백인으로 오해받기도 하다는 에피소드가 이를 보여준다. 그녀가 자신을 백인, 백인 여성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이 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 책은 백인 여성이라면 쓸 수 없는 종류의 책이다. 독특한 경험에서 나오는 분노와 그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에 대한 선명한 해답이 발랄하게 펼쳐진다.

역인종차별과 역성차별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먼저 인종차별, 성차별이 동성애 혐오, 트랜스젠더 혐오, 장애인 차별, 계급주의 등과 마찬가지로 억압(oppression)의 한 형태임을 강조하는데, 억압이란 세상이 혼란하거나 복잡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회 설계의 일부로서 작동하며, 이를 통해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24쪽)한다. 특권과 억압이 가능한 것은 이러한 사회 구조를 통해 이득을 보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특정 집단의 종속과 착취가 사회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임을 강조한다. 성과 젠더 위계 안에서는 남성이 특권을 누리고, 유색인종은 인종 위계 안에서 억압을 당한다(24쪽).

이러한 억압이 구조적으로 작동하는 경우, 이 모든 것은 '합법적'이다. 이를테면,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지배권. 1991년까지도 영국에서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강간죄는 '성립될 수 없다'라는 것이 법적 견해(30쪽)였다. 2022년, 로 대 웨이드 판례가 뒤집혀 임신부의 임신 중지 권리는 폐지되었다. 연방대법원 다수의견서에서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은 17세기 법학자 매슈 헤일을 인용하는데, 그는 마녀의 술수에 대한 책을 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마녀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내렸던 사람(31쪽)이다. 억압받는 집단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구조적이다.

인종차별 역시 이러한 억압의 역사적 기준에 부합하는 실례라고 여겨진다. 아프리카인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백인들에 의해 납치되어 비인간적인 대우 속에 다른 대륙으로 옮겨 살게 되고, 죽을 때까지 노동하며,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으로 삶을 끝냈던 바로 구조를 통해 유럽과 북미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충분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새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은 이것이다. 영국에서는 1833년 노예페지법으로 노예제를 종식시킨다. 인도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반란 등을 이유로 노예의 수익성이 떨어졌기 때문인데, 이를 위해 이제 더 이상 '합법적으로' 노예를 소유할 수 없는 노예 주인들에게 '재산'에 대한 보상을 하기로 한다. 재무부가 190억 달러 상당의 돈을 빌려 그 비용을 충당했는데, 2015년에야 이 부채를 다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노예의 노동은 온전히 주인의 것이어서 노예들은 일하고, 쓰러지고, 죽어 나갈 때도 무급이었지만, 이제 합법적으로 노예를 '소유'하지 못한 백인 주인들에게는 그 손해에 대한 배상이, 충분히, 넉넉하게 이루어졌다.

'백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와 '화이트파워'를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와 '블랙파워'와 비교할 수는 없다. 이중 기준이 아니라 두 진술의 맥락이 터무니없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걸파워'와 '맨파워'의 즉각적이고 뚜렷한 차이를 생각해 보라.) 백인이라는 것 자체가 권력이다. 권력은 너무 자주 백인의 것이다. '백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백인'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중요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동어반복일 뿐이다.(147쪽)

9장에서 다루는 내용은 '실천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시작은 '신자유주의적 전환(neoliberal diversion)'이다. 환경 오염을 필두로 한 지구 파괴에 대한 문제는 구조적인 것인데, 자선 단체 기부, 공정 무역 초콜릿 소비, 친환경 세제 사용 등으로 화제를 전환함으로써 개인적 해결책을 강제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결함을 가리려는 시도를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성차별과 인종차별의 사례로 직면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의류 재봉사들은 그냥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가난한 유색인종 여성이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사망하거나 삶의 터전을 잃는 사람은 그냥 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주로 남반구의 유색인종이다. 남반구 인구, 저임금 노동자, 환경이 평가절하되는 이유는 경제가 그 평가절하를 바탕으로 삼아 굴러가기 때문이다. 그 점이 이 시스템에는 자명하다. 세계의 공장들은 남반구에 있고 그곳의 인력은 주로 저임금 유색인종 여성 노동자다. 상황이 이렇게 지속되는 한, 북반구의 페미니즘 운동과 인종차별반대 운동은 겉치레에 불과하다.(350쪽)

겉치레에 불과하다.에 밑줄을 긋고 책상 위 펼쳐둔 책 위에 머리를 박는다. 겉치레에 불과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이가 공부를 안 한다고, 안 해도 너무 안 한다고 하소연하는 엄마들에게 꼭 하는 말이 있다. (엄마들의 대화는 시작이 아이들 공부 이야기고, 반드시 공부 이야기로 수렴한다) 우리는 후진국에서 태어나 중진국에서 자랐고, 이제 선진국에서 살지만, 얘네들은 선진국에서 태어난 얘들이에요. 뭐든 가졌고, 이제 더 필요한 게 없어요. 우리는 제 1세계에요. 우리나라 GDP 좀 떨어졌던데, 그래도 세계 13위에요. 세계 13위. 세계 13위 국가의 수도 서울에 사는 아이들이 어떨 거 같아요. 돌아가자.

북반구의 페미니즘 운동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챕터가 '고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나.

토지 사용에 초점을 맞춰보자. 세계는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1) 육류를 적당히 먹는 국가들. 모두가 이러한 식생활을 한다면 농지가 지금보다 덜 필요할 것이다. (2) 육류를 많이 먹는 국가들. 모두가 이러한 식생활을 한다면 농지가 지금보다 더 필요할 것이다(경작지나 목초지를 더 만들기 위해 숲을 벌목해야 할 것이다). (3) 육류를 지나치게 많이 먹는 국가들. 세상 모두가 이렇게 고기를 많이 먹으면 무슨 수를 써도 농지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을 것이다. 놀랍지도 않겠지만 이 분류는 국가별 국민 1인당 부(富)를 그대로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1)에는 태국, 중국, 스리랑카, 이란, 인도가 포함된다. (2)에는 독일, 영국, 멕시코, 한국이 들어간다. 그리고 미국, 아일랜드, 캐나다, 스웨덴,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뉴질랜드의 전형적 식생활이(3)과 맞아떨어진다. (332쪽)

육식만 문제일까. 하지만, 육식이 문제의 핵심인 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고. 내가 불편할 정도로 생활패턴을 획기적으로 바꿔야만 한다. 구조적인 문제임을 알았고, 이것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실천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의 실천은 반드시 필요하다. 요는 실천할 게 너무 많다는 것.

나의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얼마나 고기를 잘 먹던 사람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의 식단 변화에 놀랄 수밖에 없다. 나도 놀랐다. 이게 실천할 수 있을 줄 몰랐다. 불균형한 식단으로 작년 건강검진에서는 빈혈 판정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더 먹어야만 했는데, 다행히 초등학교 식단에는 고기가 많이 나와서 점심시간을 고기 먹는 시간으로 정했다. 우리 집에 육식인간은 1인이고, 그 1인조차 양이 적은 편이라 그 어느 집보다 '고기 안 먹는 집'이 되었다. 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마리아 미즈는 고기, 새우, 유제품, 그중에 치즈를 덜 먹어야 한다고 했다. 치즈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식이어서, 마음이 아프다. 지난주에 마트에 나가보니 칵테일 새우가 특가 세일이어서 가격이 저렴했는데, 다음에 사자 하고 미뤄두었다(요리하기 싫어서 아님). 마리아는 고가의 사치품, 화장품의 사용을 자제하라 말했다. 특히 립스틱을 사지 말 것을 권고했다(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에게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권합니다) 근데 저번 주에 립글로스 너무 이쁜 거 발견해서 참다 참다 결국 하나 샀다. 다 못 쓴 립스틱 많은데, 많은데... 하면서 샀다.

어디 그뿐일까. 옷 사지 않기. 일회용품 사용하지 않고 장바구니 가지고 다니기. 지역 물품 이용하기.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기. 전력/에너지 사용을 최소화하기. 이걸 말고도 너무 많아 여기에 신경 쓰다 보면 다른 일을 못 하게 될 지경이다. 그런데도 지구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호소를 기후 변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고.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유럽에서 이 비율이 낮아지고 있는 유일한 국가는 핀란드인데, 수도인 헬싱키만 봐도 노숙자가 크게 줄었다. 핀란드의 '주거 우선' 정책은 주거권에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는다. 사람은 일단 살 곳이 안정되면 다른 문제(이를테면, 약물 중독)도 해결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자선 단체와 지방 의회가 변화를 꾀하기 위해 열심히 로비를 했더라도 결국 법안을 제정하고 수만 명의 삶을 순식간에 변화시킨 것은 정부의 힘이다. 노숙자들을 방치하는 것은 정치적 선택이고, 변화의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 (339쪽)

정치적 선택과 정부의 책임. 정부는 정치적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다. 장관과 각 기관장에 대한 임명권이 대통령에게 있다. 3,000명이라고 했던가, 5,000명이라고 했던가. 그 이외에 정부 외 정부 출연기관까지 합한다면 엄청나게 많은 인원이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그 일을 수행하게 된다. 대통령은 자신과 비슷한 정치 철학을 가진 사람들을 그 자리에 임명할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들의 작태를 보라. 윤석열의 인권을 보호하랜다. 자신과 국가의 존망이 달린 탄핵 심판을 헌법 재판소에서 받으면서 꾸벅꾸벅 졸고 앉아 있는 위인의 인권을, 국회 연설 때 국회의원들이 무시하고 박수 안 쳐서 비상계엄 발동했다는 위인의 인권을, 계엄군이 압력을 행사한 게 아니라 도리어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말하는 위인의 인권을.... 보호하랜다. 아이고야. 정치 이야기는 이제 그만! 정치 묻히기 이제 그만!


하지만, 정치다. 변화의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게 있고, 정부는, 행정부는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민이 원하는 삶', 다수가 바라는 나라를 만들어가기 위해 일한다. 일해야 한다. 우리가 주는 세금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 화석 연료 사용을 최소화하고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한 새로운 에너지 수급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나라에서 주는 보조금(40여만 원)에 5만 원을 더해 앞 베란다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했다. 문정부 때였다. 지금은 태양광 기업이 모두 중국기업이라 그 사업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이 크게 들린다. 윤정부 시대다. 식료품이 이동한 거리는 탄소발자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아보카도보다 사과를 먹는 것이 지구를 위해, 나를 위해 나은 선택이다. (가끔은 먹을 수도 있다, 나도 아보카도를... 좋아한다) 내가 혼자 한살림을 이용하는 것과 학교 급식 물품이 한살림 물품인 것은 차원이 다르다. 개인이 할 수 없는 영역, 미미한 영역에 기업과 정부가 개입하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자연을 살리고 지구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성과를 낼 수 있다.

겉치레에 불과한 페미니즘,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발전과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그럼 너는?'이라는 비판에 더 당당히 맞서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직장 내 성폭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가정 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러는 너는? 제3세계 아동의 열악한 노동 환경은? 이슬람 세계 여성 인권 문제는? 무분별한 자연 파괴에 대해서는, 너는 할 말이 없어? 그것만 중요한 문제라는 거야? 딱 그것만?"이라 묻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온 세계에 산재된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자신이 없다면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그 헛소리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오늘, 바로 오늘의 실천을 이어가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포기하지 않으면서, 절망하지 않으면서, 이 상황이나 현실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정치의 역할에 대해서 더 깊은 성찰과 논의가 필요하다. 일단 탄핵 인용의 날에, 박수 기다리던 위인에게 큰 박수 보내드리고, 그리고 나서 시작하자. 바로. 그리고 나서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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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5-02-13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좋아요 일빠 💋 읽기는 점심 먹고난 후

단발머리 2025-02-13 12:09   좋아요 0 | URL
🥙🥗🥘🫕🍣🍜🍱🥟차린거 없지만 많이 드세요~~

다락방 2025-02-13 1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오 글 너무 좋습니다. 이 책을 얼른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한편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책을 읽고싶다!‘는 생각이 들게하니, 얼마나 좋은 리뷰인가요!

저는 밑에서 두번째 단락이 참 특히나 좋네요. 뭔가 하겠다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비판을 쉽게 하는것 같아요. 뭔가 하지 않으면 비판 받을 일도 없는데 말입니다. 뭔가 하지 않는 사람들은 완벽하기 위해 안하는게 아니잖아요. 그냥 안하는거지. 하여간 저도 제가 생각한 길을 뚜벅뚜벅 가는 걸로..

그나저나 저는 육식도 육식이지만 탄소발자국에 대해 죄인입니다.

단발머리 2025-02-13 12:38   좋아요 0 | URL
이 리뷰가 좋은 리뷰였으면 좋겠지만서도 이 책이 참말로 좋은 책입니다. 저는 제가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무척 논리적이고 신중한 스탠스인데, 이걸 실제에 응용하려면 한 번 더 읽어야겠다, 그런 생각입니다.

밑에서 두번째 단락은, ‘흑인 인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대한 다른 사람들(대부분 백인들)의 반응‘인데요. 인종차별에 대한 부분 읽다보면 페미니즘과 겹쳐지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작동하는 방식이, 어쩔 때는 ‘똑같다‘라고 여겨질 정도잖아요. 사람들은 ‘옳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왜 ‘말‘만 하냐고 그러잖아요.ㅋㅋㅋㅋ 옳은 ‘말‘이라도 한다는게 중요한데 말입니다. 그러면 ‘나쁜 말‘을 하라는 건지. 자신들의 나쁜 말을 옹호하는 그 자세야말로 더 비윤리적인데 말이지요.

9장 <불평등 구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 보편화 가능성>의 두 번째 챕터 제목은 이렇습니다. ‘탄소 발자국’이라는 사기극.
사기극이라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psyche 2025-02-13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 꼭 읽어보고 싶네요.
그리고 마지막 문단에도 공감 백배!

단발머리 2025-02-13 12:49   좋아요 1 | URL
저도 알라딘서재지기 잠자냥님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어요. 좋은 선택이 되실거라 믿습니다.
저는 기립박수 준비했습니다. 같이 하시죠~~ 👏👏 👏👏👏

은하수 2025-02-13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엇보다 정말 작은거라도 실천이 중요하단걸 다시 깨닫게 되네요.
이 글 읽으면서 저도 마리아 미즈 생각했는데... 언급해주시니 또 한번 더 실천하겠다는 의지...경각심을 가져야겠다 생각하는 계기가 되구요.

이노무 정치... 정말 중언부언 말도 안되는 논리로 헌법재판소에서 변론하는 거 보면 속이 터져요.
검찰총장 시킨 문재인 전 대통령을 진짜 원망했어요. 그거 안했으면 대통령 안나왔을텐데... 하면서요.
거두절미하고...
제발 우리나라에도 의식있고 무식한 말고 ˝유식한˝ 대통령이 좀 나왔으면 좋겠네요!

단발머리 2025-02-13 19:34   좋아요 1 | URL
저도 오늘 한 가지 실천하고요 (부끄러워 비밀로), 저녁은 냉파했습니다.

저도 문재인 대통령 원망 많이 했습니다. 원칙을 지키는 건 좋은 거지만, 아.... 온 나라가 아주 난리법석 ㅠㅠㅠ
유식한 대통령, 똑똑한 대통령, 말 통하는 대통령 나왔으면 좋겠어요. 일단은.... 탄핵 심판 마저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