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전에 시간이 15분 정도 남았는데, 딱히 뭐를 시작하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노트가 없어 옆에 있던 A4 이면지를 펼쳤다. 책 사이에 넣어 두었다가 집에 돌아와 가방 정리하려고 하니, 구겨진 종이 한 장이 나온다. 아, 이게. 이건 이게 아닌데. 이거 말고, 이걸 여기에 넣고. 알라딘의 야심작 '읽기의 계보' 첫 번째 이야기, <AI는 인간의 꿈을 꾸는가?>처럼 해보고 싶었으나. 실패.

1. 근대성 : 이 부분은 요즘 관심사는 아니다. 타의에 의해 조선에서 한국으로 넘어와 버린 우리는 역사의 일부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고, 그 역사의 일부는 배곯지 않겠다는 근대정신의 발현으로 구성되었다. 우리는 근대 없이 현대를 맞이했고, 지금은 가열차게 자본주의의 변곡점을 지나가고 있다. 개인의 발명이 이루어진 근대에 대한 탐험은 그래서 현재 내 관심사는 아니다.

2. 인간다움 : 제일 관심 가는 부분이다. 구체적으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물음. 인간이 동물과 비슷한 진화의 과정을 겪어 왔다면 인간만의 특이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어느 때 인간이고, 어느 때 인간이 아닌가. 인공지능을 탑재한 휴머노이드가 자신 역시 '인간'이라 주장할 때, 인류의 대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인간다움의 특징이 '인지'와 '내면'으로 구현된다고 했을 때, 인공지능이 경사하강을 통해 판단, 선호가 강화된 상태의 '추진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을 인간의 욕망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인간 내면에 실제 하는 감정과 느낌은 감각기관을 탑재하게 될 인공지능의 그것과는 얼마나 유사하고, 어떤 차이점을 갖게 될 것인가.

3. 노동 : 관심도로 보자면 이 부분이 두 번째다. 일하지 않는 인간과 일하는 로봇. 인간의 노동 대부분을 대체할 것으로 예상되는 로봇이 노동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은 논의할 단계가 아닌 것 같다. 인권처럼 '로봇의 권리'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질문은 '무엇을 일이라고 부를 것인가'에서 시작할 것이고, '일하지 않는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로 이어질 것이다.

4. 기술 봉건주의 : 인공지능에 대한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던 건, 팔란티어 때문이었다. 이게 말이 돼? 진짜야?라는 물음이 시작점이었다. 스페이스 X 최고경영자(팔란티어의 피터 틸과 함께 '페이팔 마피아'라 불리는 그 사람)의 나치식 경례 사진은 미국 기술 엘리트들의 정신 상태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의 최첨단 기업들이 트럼프를 방패 삼아 민족주의, 반자유주의, 기독교-근본주의의 '뉴 아메리카'에 헌신한 것은 중국 때문이었다. 국가의 강력한 통제 하에 이루어지는 기술 발전이 미국을 압도할 거라는 불안감이 그들을 자극했고, 그렇게 미국과 중국은 제각각 기술 낙원, 기술 유토피아의 건설을 위해 미친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이기는 편 우리 편,이라고 나이브하게 말할 수 없는 상황. 어느 쪽이 이기든, 우리 편이 아닌 것은 확실하고, 사실 우리도 개네 편 하고 싶지도 않다.

5. 인간 vs 로봇 : 가까운 미래에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모습에 거의 근접해질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화면 저편의 LLM(대규모 언어 모델)을 바탕으로 한 챗지피티와의 대화에서도 감정적인 연결이 가능한 현실에서, 휴머노이드의 모습을 한 챗봇이 인간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 역시 궁금한 지점이다.












읽고 있던 책은 『기계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대한 인문학적 사유』였는데, 상호대차 도서인지라 반납하라고 해서 일단 반납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인류와 로봇의 불편한 동거'를 희곡 형식으로 풀어낸 『R. U. U 로줌 유니버설 로봇』이고, 오늘 도서관에서 받아온 책은 『비인간 권력』이다. 첫 번째 책은 2번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고, 지금 읽고 있는 책은 5번 카테고리에 들어가면 되겠다. 『비인간 권력』은 어느 카테고리에 들어갈지 모르겠다. 모르니깐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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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7-08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페크가 로봇 이야기를 도대체 어떻게 풀어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사회과학책은 잘 읽지 않는 분야라서 이 분야를 읽는 사람들 제가 참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거 아시죠?ㅋㅋㅋ

단발머리 2026-07-08 22:43   좋아요 0 | URL
너무 모르기에 ㅋㅋㅋㅋ재미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외워야 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는 ㅋㅋㅋㅋ사랑의 눈빛으로 부탁드립니다. 😍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 - 중국의 첨단기술 형벌 식민지에서 벌어지는 탄압과 착취의 기록
대런 바일러 지음, 홍명교 옮김 / 생각의힘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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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인공지능에 대한 탐구는 흘러 흘러 중국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장 위구르 지역에 대한 탄압의 현장으로까지 흘러왔다. 과학 기술 만능주의를 주창하는 이들에게 미래는 언제나 분홍빛(내가 좋아하는 파스텔 핑크)이다. 어쩌면 황금빛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예언하는 미래에, 인간은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존재하며, 우주를 뒷산처럼 오고 갈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미래는 예상보다 훨씬 더 비극일 수 있다.

이 책은 과학 기술의 발전 뒤에 숨겨진 어두운 이면을 고발하는 소설이 아니라, 과학 기술의 발전이 만들어가는 어두운 현실을 고발하는 책이다. 저자인 대런 바일러는 중국 내 무슬림에 대한 중국 당국의 조직적 탄압을 24개월 이상에 걸쳐 연구하고,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엮어 이 책을 썼다. 신장 위구르 내 수용소의 위성 사진이 공개된 이후, 중국 당국에서는 이를 '직업훈련 프로그램'이라고 변명했다. 수감되었다고 추정되는 사람들이 150만 명 정도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들의 처참한 상태에 대한 기술은 너무나 참혹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한족과 인종적으로, 종교적으로 상이한 위구르족, 그리고 그 지역에 거주하는 일부의 카자흐족 등은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간직해왔다. 위구르 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흥망성쇠가 이어져 왔고, 1949년 중국에 의해 병합되었다. 자치구인 신장 위구르의 지위가 위협받은 것은 이슬람 문화의 지배하에 한족과의 동화가 어렵다고 판단한 중국 당국이2017년에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이후다. 위구르족 인구가 다수인 일부 지역에서 5세 이하 아동의 70퍼센트가 보통화(표준 중국어)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우정 유아원/유치원'에 수용되어 있으며, 그들의 부모는 수용소나 교도소 또는 공장에 있다.(126쪽) 수용소 시스템이 시작된 이후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위구르인의 출산율이 50~80퍼센트 급감했다(90쪽).

소수 민족에게 불균형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서구의 경찰 시스템과 중국의 경찰 시스템 사이에는 일부 유사점도 있고 상당한 차이점도 있다. 신장에서는 카메라 네트워크의 밀도가 훨씬 더 높고, 검문소와 데이터 감시도 지원되며, 모든 지역 주민은 포괄적인 "공공 보건" 계획의 일환으로 당국에 생체 정보를 제출했다. ... 당국은 신장의 모든 주민에게 국가가 발급하는 신분증을 새로 등록하도록 강제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고화질 얼굴 이미지가 담긴 기초 저장고를 보유하고 있다. ... 샤완에서의 연구 조사에 따르면 0.8초 만에 얼굴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고, 최대 30만 명의 대상자들과 관련된 알림 경보를 등록 및 기록할 수 있다. 만약 기술자들이 0.2초만 더 기다릴 용의가 있다면, 최대 50만 명에 대해서까지 작업을 수행할 수도 있다.(61쪽)

위구르인들에 대한 이러한 전방위적인 폭압이 가능했던 것은 '신체검사'라고 이루어지는 절차를 통해서다. 목소리 녹음과 홍채 스캔, 혈액 검사와 DNA 채취 등을 통해 수집된 생체 정보는 '위험한' 인물로 분류된 사람들을 파악하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은 '예비 범죄자'로 취급되었는데, '종교적 콘텐츠가 담긴 디지털 파일의 보유, VPN 사용, 왓츠앱 설치'가 '예비 범죄'로 분류되었다(51쪽). 수용소는 자동 추적 카메라와 음성 인식 기술을 통해 수용자들의 행동을 24시간 감시 및 통제한다.

유럽인들에 의해 자행된 아메리카 원주민 침략 및 학살의 역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역사는 위구르를 비롯한 소수 민족에 대한 중국 당국의 역사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토지를 빼앗고, 아이를 빼앗은 후, 그들을 수용소에 격리시켜 종국에는 인종 말살의 결과를 얻어내려 한다.

과학 기술이 개인을 억압하고 사회를 통제하는데 사용될 가능성과 위험성에 대한 글일거라 예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지구 한 편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현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국가 폭력이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쉽게 무력화시키는지를 보았고, 그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작은 가능성조차 빼앗겨버린 그들의 현재가 안타까웠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고 느낀 감정은 두려움과 무력감.

인공지능 없이도 세상은 충분히 우울한데, 나쁜 사람들 손에 들어간 인공지능 때문에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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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6-07-05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의 AI 독서는 어디까지 나아가는가!!
중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ㅠㅠ

단발머리 2026-07-07 19:39   좋아요 1 | URL
그렇더라구요. 생각보다 훨씬 더 엄혹해서 읽는 동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ㅠㅠ
신장 관련 뉴스는 티베트처럼 독립을 원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신장 지역 자체의 중요성도 있고 해서 중국에서는 훨씬 더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는 듯 해요.

nama 2026-07-06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년 전 신장위구르에 갔을 때 검문소마다
통제가 심해서 여권 사진 펴서 가슴에 댄 상태로 얼굴 사진을 찍히기도 했어요. 다녀본 나라 중 감시가 가장 삼엄했어요.
지금은 더하지 않을까 싶네요.

단발머리 2026-07-07 19:40   좋아요 0 | URL
아, 8년 전부터 그런 분위기가 있었군요. 근데... 여권 사진 펴서 얼굴 사진 찍는 거는 엄청나게 폭력적이네요.
드나드는 사람들을 모두 ‘잠재적 위험 인물‘로 보고 있는 걸까요. 지금은 더 엄격해졌을 거 같네요 ㅠㅠ

건수하 2026-07-06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I가 통제를 너무 쉽게 만들어주는군요... 티벳 등 다른 자치구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겠어요.

단발머리 2026-07-07 19:43   좋아요 0 | URL
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할 거 같기는 해요. 신장의 이런 상황은 그곳을 탈출했던 분들이 다른 나라에서 제보한 것들인데, 중국 당국에서 바로 연락이 왔다고 해요. 너희 가족이 중국에 있다... 이런 식으로요ㅠㅠ

다락방 2026-07-06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나쁜 사람들 손에 들어간 인공지능은 또 얼마나 무섭게 사용될까요. 그러고보면 미션 임파서블 가장 최근편도 디지털 정보와 인간이 싸우는 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니까 보통의 인간은 AI 와도 경쟁해야 하고, 그걸 차지한 나쁜 놈들과도 싸워야 하고... 그렇게 되는걸까요?

단발머리 2026-07-07 19:46   좋아요 0 | URL
보통의 인간은 Ai와 경쟁이 안 될 거 같아요. 그냥 일자리를 빼앗기는 모습이 될 거 같고요. 문제는 인공지능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려는 나쁜 사람들이 있을 때, 그걸 제어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 같아요. 흠.... 이게 답이 없는 문제네요.
 












1. 만화로 보는 맨큐의 경제학 1

다락방님이 재미있게 읽으셔서 따라 읽은 책이다. 만화라고 쉬이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 내용이 생각보다 알차다! 정치 경제 좋아했던 나지만, 사실은 정치만 잘했고, 경제는 어려웠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경제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 싶다.

<인간은 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의 다음 문장은 '왜냐하면 인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공존과 자기희생, 도덕론에 대한 호소가 아니라, 이익을 나누는 방식으로 서로를 유익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 그들의 자비심이 아니라 이기심에 의존한다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험이 실패한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이고, 그러면서도 각 개인의 이익 추구가 공동의 번영으로 안착하도록 만드는데 국가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2. 복 타러 간 총각

선생님~ 오늘 책 읽어주시면 안 돼요?라고 다정하게 묻는 8세가 있어, 그 소중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는 없으며. 아이 둘을 책으로 길렀어요,라고 말하기 저어 되기는 하지만, 아무튼 어린 시절에 원 없이, 한없이 책을 들이밀기는 했다. 그 부작용은 오늘 이 시간, 책 안 읽는 성인(들)이 되는 것으로 쓸쓸한 마무리.

복 타러 간 총각은 되는 일이 없어 그걸 하늘님에게 물어보러 길을 떠나, 먼 길 가는 길에 이런저런 사정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결혼만 하면 남편이 죽어버리는 여자가 있었고, 내내 공들여 키운 나무가 죽어버려 낙심한 노인이 있었고, 3천 년 기다려도 용이 되지 못하는 이무기가 있었다.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후, 접수했던 소중한 민원을 하나하나 하늘님께까지 전하며, 대략 사정을 들려드리고, 답안지 얻어 돌아온다. 정작, 총각의 질문, '나는 왜 되는 일이 없나요?', '내 복은 무엇인가요?'의 답은 얻지 못한 채였다. 총각의 안내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 가운데, 총각은 의도치 않게 금은보화와 함께 각시를 얻게 되었으며. 집으로 돌아와 열심히 농사짓고 알콩달콩 살다 보니, 자기 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



가정을 이뤄 오늘, 현재의 일에 충실하라는 정상성에 대한 강한 독려와 촉구를 모르는 바 아니나, 행복의 주체는 항상 총각이고, 남자임을 우리 여성들은 모르지 아니한다는 점을 여기에 적어 둔다.










3. 새로운 질서

기계에 의한 통치와 '잘못된 결정을 할 권리'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직접 그 답을 알게 되기까지 혹은 절절히 인식하기까지 인간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데, 그런 인간에게서 '낭비할 권리', '실수할 권리'를 빼앗으려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성 말살의 현장이라 할 수 있겠지만, 사실 현대의 부모들은 적잖이 자식에게 이런 방식을 강요하기는 한다. 적어도 내 자식만은 내가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나 역시 그런 마음이 없었다, 할 수 없다. 무균실에서 혼자 키울 거 아니라면, 이 험한 세상을 마음껏 경험하게 두는 것이 올바른 육아법일 텐데.

아울러 어떤 게임에서든 더 정확하게 미래의 수를 계획하기 위해 AI는 점차 과거의 행동에 대한 기억을 제 것으로 획득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기억은 말하자면 주관적 자아의 기층이 될 것이다(오늘날 시스템은 그런 기억을 갖지 않는다. 자신이 과거에 특정 행동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주관적으로 '알' 필요가 없으며, 오직 그 행동이 미래에 성공할 확률만 필요하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기계가 역사, 우주, 인간 본성, 지능형 기계의 본성이란 무엇인지 결론을 도출하고 그 과정에서 기초적인 자기 인식을 갖게 되리라 예상해야 한다.(95쪽)

머신러닝으로 훈련된 모델은 인간이 새로운 발견(모델의 출력값)을 알게 해주지만 그 발견이 이루어진 방법(모델의 내부 과정)을 이해하게 허용하지는 않는다(74쪽)는 부분은 95쪽의 기계의 기초적 '자기 인식'과 연결되어 생각할 수 있다. 인공지능 내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을 현재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 그에 더해 인공지능이 과거의 행동을 반복하면서 그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할 가능성은 인공 지능이 가히 기계가 아니라 '지능'으로서 존재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공 지능은, 인공 '지능'이다.

육체적으로 연약한, 정확히는 무기력한 존재인 인간은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가 되는 과정에서, 많은 동식물들을 멸종시켰다. 의도적이었든 그렇지 않았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는 위협이 되고 말았다. 236쪽, 인류와 AI와의 공진화 부분을 읽으면서, 착잡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가능할 것인가. 공진화 이전에 공존이 가능할 것인가. 늙어가고 유한하고 느린 인간이, 늙지 않고 빠른 AI를 당해낼 수 있을 것인가.










4.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

일전에 하이드님이 칭찬하셨던 알라딘의 <읽기의 계보> 프로젝트를 나도 칭찬한다. 두 번째 <자기 자신을 쓴다는 것>은 글 하나하나 꼼꼼히 읽었고, 한 번 더 찬찬히 읽어보고 싶다. 첫 번째 <AI는 인간의 꿈을 꾸는가?>는 익숙하지 않은 부분이 많아 골라 읽었고, 관심이 가는 책들은 골라 두었다.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는 2017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중국 정부의 소수 민족에 대한 '재교육'을 조명한다. 중국 당국은 150만 명에 달하는 위구르족, 카자흐족, 후이족 사람들을 수감해, 정부의 시책에 대한 반복적 재교육을 실시한다. 이를 "직업 훈련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하는 중국 당국은 현재 385곳의 시설에서 그들이 '위험하다'라고 지목한 사람들을 구금하고 있다. 당국에 의해 '예비 범죄자'와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분류된 이들은 구금 시설에서 이슬람 신앙과 민족 전통을 버리고 '하나의 중국'에 동화될 것을 강요당한다. "오직 국어로 말하라, 애국하라, 조국에 해로운 것에 반대하라, 이 방 안에 종교란 없다, 벽에 걸린 TV를 비롯해 어떤 것도 손상시키지 말라, 싸우리 말라, 누구도 비밀 대화를 할 수 없다, 누구도 다른 방의 교육생들과 대화해선 안 된다, 자신의 의자에 앉아라."(34쪽)

빅브라더의 현실은 참혹하다. 신장의 모든 2,500만 거주민들은 "모두를 위한 신체검사"라 불리는 색채 인식 데이터 수집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얼굴과 홍채를 스캔하고, 목소리 특징이 녹음되고, 혈액과 지문, DNA의 채취를 통해 얻어진 그들의 신체 데이터는 데이터세트에 저장된다.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평범한 일상에서도 그들의 행동반경은 당국의 감시 아래 있다.

공산주의 정치 체제가 과학 기술을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하려 할 때, '중국은 기술 봉건주의의 실사판이 될 것인가'의 의문을 이 책을 통해 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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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6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6-07-07 20:16   좋아요 0 | URL
설마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럴리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6-07-06 2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창 시절 정치도 못했고 경제도 못했어요. 정치경제가 정말 쥐약이었습니다. 국어 영어가 정치경제보다 재미있었어요. 저에게 그것은 암기과목... 성인이 되고 지금에 이르니 좀 더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싶고요. 하여간 지금이라도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시 책이 좋아요.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는 읽어야할 것 같은데 읽기 무섭네요. 저게 그러니까, 현실이잖아요? 맙소사 ㅠㅠ

단발머리 2026-07-07 20:17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면서 수학을, 철학을, 정치경제를 배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 지루한 교과서로.... 아흐...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 너무 무서워요. 슬픈 무력감이 몰려옵니다.... 읽지 마세요 ㅠㅠㅠ
 












여름이 되면 수박을 많이 먹는다. 제일 좋아하는 과일 두 개만 고르라면, 포도랑 수박. 세 개 말해도 되나요? 그럼 자두. 포도, 수박, 자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여름이면 수박을 잘라 둥근 통에 담아 드렸다. 시어머니가 못하시는 건 아니지만, 시아버지께 뭐 해드릴게 없는데, 수박 자르는 건 나도 할 수 있으니까. 다 드신 통이 돌아오면 다시 수박을 담아 가고, 그 통에 수박을 담고 가서는 다시 빈 통이 돌아오고.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시어머니 드시라고 수박을 잘라 둥근 통에 담아 드렸다. 시어머니가 수박 자르는 게 힘들 정도로 연로하신 건 아니지만, 혼자서 수박 한 통 사서 먹으면 오래 걸리니깐. 그러다 보니 마음에 걸려 작년에는 한두 번 친정 부모님에게도 수박을 잘라 역시나 둥근 통에 담아 가져다드렸다.

지난주에 수박을 잘라 시댁과 친정에 반씩 담아 갔다. 자르면서 맛보니 별로여서 가져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가져갔다. 맛이 없다는 심심한 고백에, 시어머니는 그래도 맛있다고 하셨고, 아빠는 '수박을 잘 못 샀구먼.'이라고 간단히 말씀하셨다.

이번 주말에 수박 한 통을 사서 집으로 돌아온 빈 통에 담아 시댁에 보냈다. 냉장고에 바로 넣지 않으시고 맛을 보시더니, 맛있다 하셨다고 남편이 전했다. 어제는 월요일이라 많이 피곤한데, 맛없는 수박으로 본때를 보여드렸으니, 이번에 맛있는 수박도 맛 보여야겠다 하고 수박을 한 통 더 사서는, 석박지보다는 작지만 대충 깍두기 모양으로 크고 반듯하게 잘라 둥근 통에 담아 친정에 갔다.

늙으신 부모님은 두 분 다 주무시고 계셨는데, 내가 들어서니 두 분 다 잠에서 깨셨다. 아빠는 어느새 포크를 들고 수박 조각 두 개를 맛보셨다. "이번에는 잘 샀네." "아니, 왜. 수박을?" 이라는 엄마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빠가 그러셨다. "왜, 수박... 이렇게 딱 잘라오니 좋잖아. 딱 먹게.""아니! JH이 아빠! 애가 수박을? 수박 써는 게 얼마나 힘든데, 응? J야, 수박 이렇게 가져오지 말라고~~!!" 여기서 한 마디를 더하면 엄마가 폭발할 것을 잘 아시는 아빠는 더는 말이 없으시다.

그랬다. 우리 아빠. 한국에 수입되는 모든 과일을 서둘러 맛보시는 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과일을 제일 먼저 맛보시는 분. 제철 과일의 최고급 포식자. 아침과 저녁, 새벽과 오후에도 과일을 즐기시는 우리 아빠. 엄마와의 토크로 말하느라 바쁜 내 입에 부지런히 사과를 넣어주시는 분. 그런 아빠에게도 수박 썰기는 귀찮은 일이었으니, 아빠는 잘 됐다~ 싶으셨을 텐데, 엄마의 진심을 담은 블로킹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셨던 거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아빠는 굳이 옷을 갈아입으시고, 주차장으로 따라 내려오셨다. 전 국민적 관심사 주식 토크를 잠시 나눈 뒤, 아빠와 즐거운 빠이빠이.

수박 가득한 통을 받아드시며 즐거이 통을 열어 바로 맛보시는 시어머니와 '맛이 있다', '맛이 없다'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시는 아빠. 그리고, 수박 맛이 전혀 중요치 않고, 오직 내 손목만 중요한 우리 엄마.

엄마 딸이라 다행이라고, 아빠를 똑닮은 내가 생각한다.


책을 샀다. 벌써 2주가 지났군.











정아은 작가님의 책은 『엄마의 독서』만 읽어봤는데, 작가님과의 이별이 내내 아쉽고 안타깝다. 팔딱팔딱한 작가의 문장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어서 샀다. 『The Daily Stoic』은 영어책 구입 시즌인데(원서 구입 강박), 구입할 만한 책이 안 보여서 샀다. 브론테 자매 집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피날레』는 수전 구바라 샀다. 수전 구바니까. 책 살 이유로 완벽하게 충분하다.

역시나 주인공은, 브론테 자매 집게. 두꺼운 책도 잘도 잡힌다.



너무 졸리다.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는데도 너무 졸리다. 9시에 한 잔, 11시에 한 잔.

졸리다... 아, 너무 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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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6-25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마는 역시 엄마네요. 그쵸?

단발머리 2026-06-25 21:19   좋아요 0 | URL
엄마~~~~~~ 엄마가 최고에요!!!!!!!!!!!!!!!!

독서괭 2026-06-26 0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니 일갈에 철없는 아이 되어버린 아버님 ㅎㅎㅎ 하지만 딸 입에 계속 사과 넣어주시는 아버님의 사랑도 넘 좋네요☺️

단발머리 2026-06-26 07:51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 아시는가 모르시는가 모르겠네요. 제가 아빠랑 아주 똑같아요. 생김새, 생각, 성격, 심지어 과자 취향까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마는 아빠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6-06-26 0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6-26 0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6-26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6-26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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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저자 바버라는 학자의 양심으로 책상 위에서 이러저러하다 판단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웨이트리스, 식이요법 보조원, 청소부, 월마트 점원이 되어 얻게 된 수입만으로 생활하는 실험을 강행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가, 그들이 돈을 낭비해서가 아니라, 게을러서가 아니라,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돈을 아껴 쓰면서, 부지런히,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데도 여전히 가난한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 때문임을, 저자는 밝혀내고자 한다.

저자가 도전했던 저임금 육체노동 중에, 가사 노동의 특이성을 지적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첫 번째는 비슷한 임금을 받는 경우라 하더라도 가정집 청소부는 최후의 선택인 경우가 많았다. 지역별로 집안인을 대신해 주는 노동 인구의 인종 구성이 다른 경우가 있다손 치더라도, 어느 경우든 더 나은 직장, 심지어 새로운 직장이 공장인 경우라 하더라도, 가정집 청소부는 다른 직장을 구하는 즉시 그 일을 그만두었다.

두 번째는 비슷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정집 청소부는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저자가 일했던 다른 지역에서는 웨이트리스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면 처음 보는 사람조차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청하고, 다른 점원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청소부 유니폼은 정반대의 효과를 냈는데, 식당에서 주문을 하는데도 웨이트리스가 못 들은 척하기도 하고, 슈퍼마켓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 "문득 흑인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142쪽) 가정은 스위트홈이고, 여성은 가정의 천사라 칭송되어 왔지만, 그 중요한 일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그 일이 실제로 시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고단한 직업 체험을 마친 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와 함께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는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운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 지나치게 높은 주거비(월세)와 낮은 임금을 꼽는다. 한 번도 아프지 않고, 초과 수당 없는 초과 근무를 버티면서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고, 그 돈으로 월세를 내고, 배부르다는 게 뭔지 모를 정도만 먹고, 일과 수면을 반복하는 삶. 오늘만 있고 내일이 없는 삶. 부양할 가족이 있고, 어린아이가 있는 경우라면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삶. 육체노동을 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미국 노동자들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보조금을 받기 위한 절차, 생필품을 받기 위한 절차의 비효율성 역시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임대 주택의 확대와 최저 임금의 상승, 의료 제도의 전면적 개편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건 확실하지만, 적어도 그것 정도가 시작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 길어지면, 다시 기본소득 나오니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갈무리하고.

저자의 아버지는 구리를 캐는 광부였고, 삼촌들과 할아버지들도 광산이나 철도 회사에서 일했다. 저자의 언니는 통신 회사 영업 사원, 공장 노동자 같은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했고, 그녀가 전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시간당 4달러 50센트를 받는 창고 인부였다. 그녀의 가정사를 줄줄이 읊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그런 뿌리, 그런 배경을 잊지 않았음을 책 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박사 학위 소지자이다. 과학도답게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하기 위해 이 어려운 실험을 시작했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노트북을 펼치고 자신의 경험과 그 경험이 의미하는 바를 문장으로 조립해 낼만한 지식인이다.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자의식. 그녀는 그걸 자랑하려 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걸 잊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나.

이 프로젝트를 마치고 난 뒤,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더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이 질문에는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어떤 면에서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과 다를 것이라는 가정이 담겨 있다. 내가 어느 모로든 특별하다고, 더 지적이거나 교육을 잘 받은 것 같다는 말을 직장 상사나 동료한테 들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내 생각에 내가 남들보다 '특별'했다면 그건 오로지 일에 너무 서툴다는 점에서 그랬을 것이다.(19쪽)

그러니깐, 사람들의 통념. 박사 학위를 받았고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라면 일용직 노동자들과 '뭔가' 다를 거라는 통념은 통념에 불과하다. 지독한 이분법의 지배 아래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뭔가 다르지 않을까. 그래도 다른 점이 있지 않을까.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다,고 한단다. 특별한 점이라면, '특별히' 일에 서툴다는 점 정도다.

드디어 도착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단. 이 문단을 옮겨 적으려고, 이 글을 시작한 게 아닌가 싶다. 이 문단에는 배경이 있다. 가정집 청소 작업은 조를 짜서 이루어지는데, 저자가 속한 조의 팀장인 홀리는 점점 창백해지는 안색으로도 일을 계속하는 젊은 여성이었다. 주당 30-50달러를 벌어 남편과 자기 자신과 연로한 친척을 먹여 살린다는 그녀는 어느 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는데, 아무래도 임신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저자는 홀리가 청소일에 사용하는 각종 화학 약품 가까이 있는 것이 해로우니 집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홀리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저자는 홀리의 일까지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새로운 집에 당도했을 때, 그들에게는 부엌 조리대 위에 올려져 있는 구리 냄비와 팬들을 모두 닦으라는 업무 명령이 내려졌는데, 저자가 조리대 위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냄비를 잡다가 손이 미끄러져 냄비가 유리구슬로 꾸며진 최고급 어항에 떨어지고 말았다. 물고기들이 날아가고, 고급 요리책들이 모두 물에 젖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구세주 노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해. 나 자신에게 타일렀다. 아무도 얼뜨기한테 구원받기를 바라진 않으니까. 심지어는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조차 확실히 기억 나지 않았다. 물론 홀리를 돕고 싶고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을, 가능하다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돕고 싶었다. 제정신이 아닌 요양원 환자들이 말해 주었듯이 나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갑자기 처하게 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 싫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제시 잭슨 목사가 즐겨 말했듯 '무시할 수 없는 사람(somebody)'이 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관대하고, 능력 있고, 용감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 눈에 띄는 사람.(140쪽)

나는 이 순간을 정확히 포착해냈다는 점에서 저자가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삶 속에서 주인공이다. 아무도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그건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 동의도 필요 없고, 허락도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관대하고, 능력 있고, 용감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 눈에 띄는 사람. 그 인정은 반드시 외부에서 온다.

저자는 과학자이고, 박사이고, 지식인이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내고자 이 프로젝트에 자신을 투입시켰다. 직장 동료들은 그녀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자기소개서에 쓰인 대로, 이쪽 분야의 경력이 전혀 없지만, 새로 일을 시작하려는 이혼녀로 알고 있을 뿐이다.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보면서 저자는 그들을 돕고 싶어 한다. 그 마음이 왜 잘못된 일이겠는가. 저임금 노동에 허덕이면서도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는 가난한 동료를 돕는 일이 왜 비윤리적인 일이겠는가. 문제는 그 마음의 이면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야 하는' 현재의 자신을 다른 존재, 이전의 자신으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고. 나는 원래 이렇게 무능한 사람이 아니고. 나는 원래... 그 욕망이 그릇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가 자신 안의 그런 욕망을 알아차렸다는 점에 감탄할 뿐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순간을 알아 채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으로 충만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인정은 밖에서 온다. 나를 'somebody'라고 말해줄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를 보는, 밖에서 나를 보고 있는 어떤 사람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말해 줄 때, 김춘수의 시구처럼, 비로소 나는 그런 사람이 된다. 관대하고, 능력 있고, 용감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 눈에 띄는 사람.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somebody가 된다.

아무도 내게 somebody라 말해주지 않을 때, 허공에 대고 소리친다. 나보다 나이 많은 나무에게 주절거린다. 지나가는 동네개에게 하소연한다. somebody가 되고 싶은 여전한 욕망으로, 내내 이글거리는 내가 즐겨 읽는 시다. 이상목 시인의 <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생략)

나는 늘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여름이 또 가고 나니까

민박집 간판처럼 허술하게

떠내려가다 걸린 나뭇등걸처럼

우두커니 그냥 있었다

이 촌구석에서

이 좋은 가을에

나는 정말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여러번 일러줬는데도

나무들은 물 버리느라 바쁘고

동네 개들도 본 체 만 체다

지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는데

나도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소주 같은 햇빛을 사발때기로 마시며

코스모스 길을 어슬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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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6-23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부심을 스스로 느끼기란 어려운 것 같아요. 제가 어제 썼던 직업적 자부심도 자기 만족도 있겠지만 외부의 인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가정집 청소부는 최후의 선택이었던 거겠죠…?

단발머리 2026-06-23 21:32   좋아요 1 | URL
가끔 그런 사람.... 즉, 직업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극소수가 아닐까 싶어요. 소설에는 하루키, 음악에는 김동률 ㅋㅋㅋㅋㅋㅋㅋ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열정과 창작 의지. 물론 극기와 자기 절제의 순간들은 제가 알 수가 없지요. 세계 최고는 그냥 되는 게 아닐 테니까요.

식당의 웨이트리스가 하는 일(음식을 차려주고, 음식 먹는 중간, 중간 필요한 것을 가져다 주고, 다 먹은 음식과 그릇을 치우는 일)도 사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일과 상당히 비슷한데도, 가정집 청소부는 육체 노동 가운데에서도 가장 허드렛일이라 여겨지더라구요. 화장실 청소 부분을 읽다 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구요.

독서괭 2026-06-23 23: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이 글 너무 좋네요. Somebody가 되고 싶은 욕망을 포착해낸 그 부분 특히 제 마음에도 와닿습니다. 마지막 인용하신 시도 재밌네요. 지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는데 ㅋㅋㅋ
나 공부 많이 한 똑똑한 사람이야 하고 콧대 세우지 않고 노동에 참여한 저자가 대단해보이네요. 동네 개들한테도 인정받고 싶어하는 게 사람인데..

단발머리 2026-06-24 21:20   좋아요 1 | URL
이 저자가 참 훌륭한게 뭐냐면요. 진짜로 일을 열심히 해요. 열심히 배우고 또 쉬지 않고 일하고요. 특히, 웨이트리스 일 같은 경우는 젊었을 때의 경험을 되살려 열심히 한단 말이죠. 사실 너무 힘들죠. 월급의 범위 내에서 방세를 내고 식사비용을 감당하는 것 까지가 모두 실험이니깐요. 하다보면 너무 배고프고, 힘들고 그러는거죠. 그런데 이렇게 써요. 그래도 내가 이렇게 고된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내게 돌봐야 할 아이가 없고, 지금까지 균형잡힌 식사를 해왔고, 한달에 몇백 달러 이상의 고급 헬스 클럽에서 강도 높은 근력 운동을 계속 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에서 저는 막.... 감동을 받는 거죠.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나는 그런 환경에서 이 불우한 환경으로 잠깐 옮겨졌기에 가능하다. 이런 자세요.
대단한 사람입니다^^

다락방 2026-06-24 14: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일단 저자가 정말 여러가지로 대단하다는 점을 저 역시 깊이 동의하며 다시 말하고 싶습니다. 애초에 이 연구를 하기로 한것부터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까지요. 만약 저였다면, 설사 제가 이 연구를 하기 위해 저자와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해도, 그렇다해도, 저는, 그래도 나는 뭔가 좀 다르지, 나에게선 지적인 면이 흘러나올거야, 라는 생각을 어쩔 수없이 했을 것 같거든요. 제 안의 잘난척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지금 그런 자신이 몹시도 부끄럽습니다. 이 부끄러움, 이 반성. 이걸 그대로 녹여내어 이 책을 사겠습니다! 아, 너무 좋은책이고, 그래서인지, 리뷰도 너무나 너무나 좋네요, 단발머리 님!! 눈물이 나옵니다. ㅠㅠ

잠자냥 2026-06-24 17:16   좋아요 0 | URL
왜 여기서 울고 있어? 눈물 닦고 빨리 의약품 살인사건 읽어! 🤣

단발머리 2026-06-24 21:30   좋아요 0 | URL
어쩔 수 없는 부끄러운 생각은 저도 했을 거 같아요. 그래도, 내가 말이야. 사실은, 내가 말이야ㅋㅋㅋㅋㅋ

작가가 이 이야기를 책에서 여러번 하는데요. 이제 곧 이 직장을 그만두고, 그러니까 오늘까지만 일하기로 하고, 찜콩해 두었던 믿었던 직장 동료들에게 말을 하는 거예요. 사실, 나는 박사이고, 이 일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써.... (나는 위장취업자입니다. 나는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직장 동료들이 놀라지를 않는데요. 너무 놀라지 않아서 항상 실망 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묻는 경우도 있대요. ˝그래서, 내일 저녁 근무 안 나오는 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니까, 육체노동과 지적인(?) 노동 사이의 어떤 경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지식인들은 바보인가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메롱인가요.

2026-06-24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6-24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망고 2026-06-24 1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나를 뽐내기 위함은 아니었는지 반성하는 부분을 보니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이 노동현장에 가서 마치 귀족이 잠깐 현장체험하 듯 하는거 아니냐는 시선에 대한 고찰도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나온 결과물이라 진정성이 있을 것 같고요.
그나저나 인용하신 시 좋네요 저 용대리가 어디있는 용대리인진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진부령 용대리엔 황태구이가 맛있어요😋

단발머리 2026-06-24 21:54   좋아요 1 | URL
저는... 가끔은 ‘~~척‘이라도 하는게 아예 모른 척 하는 거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하는 척이 아니라 진짜로 그 곳으로 들어가 똑같이 먹고 자고 일하는 체험을 했다는 거, 거기에 더해 밤마다 그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 거는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저... 왜 이렇게 길게 썼는지 모르겠어요.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나를 뽐내기 위함은 아니었는지 반성하는 부분˝이라는 망고님의 좋은 표현 그대로 썼으면 좋았을 것을 ㅎㅎㅎ

진부령 용대리의 황태구이.... 검색 들어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