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2030세대, 특히 ‘개딸‘ 이라 불리는 이들의 긍정에너지와 에너지가 가져온 변화는 새롭게 느껴진다.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을 ‘이유없는 반항‘으로 표출하는 방식에 익숙한 세대들에게 그들의 외침에 더 귀기울이게 되는 이유다.

돌이켜보면, 과거에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성과를 내기 위한 수단 이상으로 생각하지는 못했음을 반성하게 된다. 또한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2030 개딸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들도 이같이 대해 달라는 그들의 ‘부드러운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공부하라며 학원으로 내몰기만 하는 부모세대의 일원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성찰의 계기를 갖는다.


웨스가 놀라워하며 물었다.
"샴은 저는 다른 조련사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신뢰할 수 있기 전에는 절대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샴과함께 일하면서 저는 제 의도를 삼이 완전히 납득하기 전에는 어떤 훈련도 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래서 새로운 고래를 받아들일 때마다 일정 기간 동안은 아무런 훈련도 시키지 않습니다. 신뢰가 생길때까지 저희가 하는 일이란 그저 배가 고프지 않게 해주고 물속에 들어가 같이 노는 것뿐입니다."
"어떤 걸 납득하도록 만든다는 거죠?"
"우리가 그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고래들에게 당신에 대한 신뢰가 생기기를 기다린다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그것이 저희가 동물들과 일하면서 가장 큰 원칙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 신뢰와 우정이 아까 보셨던 소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고래는 인간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훈련시기는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걸 표현하죠. 당신은 관리자니까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고객을 만족시기는 것이고, 그것의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직원들을 만족시키는 것임을 잘 아실 겁니다. 범고래들이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 어울리게 되면 범고래와 우리 사이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사실이 관객들에게도 전달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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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부영 교수의 분석심리학의 탐구 3부작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은 칼 융(Carl Gustav Jung, 1875 ~ 1961)의 분석심리학(分析心理學, Analytische Psychologie)을 대중적으로 설명한 입문서(入門書)다. 이부영의 분석심리학 3부작을 관통하는 주제는 한마디로 '무의식(無意識, unconsciousness)의 창조적 역할'이라 하겠다.  

 

 융의 무의식관은 무의식이 자율성을 가진 창조적 조정능력을 지닌 것이라는 점에서 프로이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인간의 원초적 행동유형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집단적 무의식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의식의 뿌리를 이루며 정신생활의 원천이라고 보는 만큼, 진화의 흔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다.(p33) <그림자> 中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 1939)는 무의식을 진화과정의 부산물로 인식한 반면, 융이 바라보는 무의식의 세계는 '창조의 원천이자 뿌리'다. 융은 무의식을 이처럼 중요한 개념으로 인식했기에, 그의 이론에서 무의식의 영역은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등으로 구분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 즉 의식(consciousness)과 모르고 있는 마음, 즉 무의식(the unconscious)로 이루어지며 무의식은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의식과 무의식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특성과 기능에 따라 의식계에서는 '나'(Ich, ego)'를 볼 수 있고 무의식계에서는 '그림자' '아니마'(Anima) 또는 '아니무스'(Animus) '자기'(self)라 부르는 독특한 요소가 있다. 우리의 정신은 심리적 복합체, 콤플렉스로 이루어지며 이 가운데 집단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콤플렉스는 다른 말로 원형(Archetype)이라 부른다.(p35) <그림자> 中 


 우리 마음을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한다면, 우리가 자아(自我 Ich ego)라고 부르는 것은 의식의 주체(主體)인 반면, 무의식계의 양상은 조금 복잡하다. 무의식의 영역은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정신분석학 3부작에서는 우리 삶의 방향은 궁극적으로 이들을 통합해 '자기실현'에 이르는 것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이들 그림자와 아니마/아니무스는 각각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이번 페이퍼에서는 <그림자>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내용을 통해 이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다. 그것은 나, 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다시 말해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와는 대조하는,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열등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아의식이 한쪽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람자는 그만큼 반대편 극단을 나타낸다.(p41)... 우리의 무의식에는 의식과 무의식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원형이 있다. 이것을 자기원형(Archetypus des selbst)이라 하는데 이 또한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원형적 그림자는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으로서의 '나'의 그림자에 비해 엄청나게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p42) <그림자> 中


 칼 융에 의하면 그림자는 무의식에서 열등한 인격에 해당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에서 하이드씨, 스타워즈 Star Wars에서 포스(Force)의 어두운 면, 절대선(絶對善)에 대응하는 절대악(絶對惡)이 그림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칼 융의 그림자는 단순하지 않다. 그림자는 개인 차원과 집단 차원의 그림자의 복층구조이며, 이 때문에 다소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사진] Dark Force Darth Vader(출처 : https://artinsights.com/product/dark-force-darth-vader-star-wars-original-painting-by-william-silvers/)


 그림자는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개인적으로 개인적 무의식에 억압된, 앞으로 의식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열등한 인격의 한 측면이다. 그러나 그 가장 밑바닥 단계는 동물의 충동성과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p85) <그림자> 中


 그림자의 의식화란 그림자의 표현으로서 완결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림자가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으로 나타날 경우에 한한다는 사실도 언급하였다. 집단적 무의식의 그림자상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다름 아닌 자기 마음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 충격을 간직하는 것 이외의 일을 할 수 없고 그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파괴적인 충동에 휩쓸리지 않고 조심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p203) <그림자> 


 그림자의 집단적 투사란 어떤 집단 성원의 무의식에 같은 성질의 그림자가 형성되어 다른 집단에 투사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경우 그림자는 개인적인 특성을 가지기보다 집단적 특성을 지닌다. 그러한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그 집단성원이 하나의 페르조나, 즉 집단의식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p118) <그림자> 中


 여기에서 우리는 연극 탈을 의미하는 페르조나라는 개념을 만난다. 집단사회의 규범과 관습은 개인에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양식'을 강요하고, 그 결과 개인의 무의식에는 집단의식의 그림자도 함께 자리하게 된다. 일본인의 심리를 설명할 때 흔히들 다테마에(建前)와 혼네(本音)를 통해 설명한다. 친절한 겉모습과는 또다른 속마음을 가진 이들 용어를 통해 집단적 무의식과 그 그림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태어난 이후 개인이 살아오면서 이루어진 무의식의 층을 융은 개인적 무의식(the personal unconscious)이라 하였다. 프로이트 초기학설의 무의식은 여기에 포함된다... 융은 더 나아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마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개인의 특수한 생활사에서 나온 무의식의 층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는 인간 고유의 원초적인,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무의식의 심층으로 이것을 융은 집단적 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이라 이름하였다.(p33) <그림자> 中

 

 집단사회의 행동규범 또는 역할을 분석심리학에서 '페르조나(Persona)'라 부른다. 그것은 집단정신에서 빌려온 판단과 행동의 틀이다. 집단이 개체에 요구하는 도리, 본분, 역할, 사회적 의무에 해당하는 것, 그 집단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야 할 여러 유행이다.(p36) <그림자> 中


 그렇다면, 이처럼 열등한 그림자가 창조적 기능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저자는 <그림자>를 통해 우리가 그림자를 온전히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으로 받아들였을 때 우리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림자>의 나머지 내용은 이러한 양상이 전래 동화와 종교(宗敎)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준다.


 마음 속의 열등한 것, 미숙한 것은 통제와 억제, 혹은 승화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살림'으로써, 즉 움직이게 함으로써 발전/분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분석심리학에서의 그림자의 의식화는 바로 무의식의 열등기능인 그림자를 의식이 받아들이고 의식에 동화시켜 나감으로써 그 바라던 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p277) <그림자> 中


 그림자의 문제, 그림자와의 대면과 갈등은 결국 대극의 합일과 완성의 상징 - 결혼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겪어야 하는 필수적인 고통의 과정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도 많은 동물들이 콩쥐를 돕는다. 본능의 중요성은 여기서도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p242)... 친어머니는 이야기의 무대 뒤에서 초능력을 발휘하여 콩쥐를 돕는다. 다시 말해 그녀는 무의식의 지혜와 가까이 있고 의붓어머니와 그 딸은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한 개인을 놓고 볼 때 사람은 때로 이 두 갈등 사이에서 방황한다... 절망 속에서 우리는 구원을 찾을 수 있다.(p243) <그림자> 中


 그리고, 의식과 열등한 인격의 통합이후 우리는 새로운 통합대상을 만나게 된다.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가 그들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모두 혼(魂)에 속하는 개념인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남성의 무의식(아니마)은 여성적 특성을, 여성의 무의식(아니무스)는 남성적 특성을 가진다는 점이라 하겠다. 융에 따르면,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한 전체적 관점에서는 '남성적 특성'과 '여성적 특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적 특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빛과 어둠의 서로 떨어져 있던 두 측면은 아니마를 통해서 만나게 된다. 자아의식이 무의식을 소홀히 하면 그림자가 아니마를 감싸버려서 아니마를 인식하기 어려워진다는 사실, 그림자를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그림자에 오염되어 분간하기 어려웠던 아니마가 드러나서 인식하기 쉬워진다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p255) <그림자> 中


 아니마는 독일어의 제엘레(Seele, 심령)에서, 아니무스는 가이스트(Geist, 심혼)에서 빌려온 라틴어 용어이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의 혼과 같은 것이다. 혼이나 넋, 또는 심령이란 모두 자아의식을 초월하는 성질의 표현이며 '나'의 통제를 받기보다는 고도의 자율성을 지닌 독립된 인격체와 같은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남성의 무의식의 내적 인격은 여성적 속성을, 여성의 무의식의 내적 인격은 남성적 속성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p43) <그림자> 中


 무의식의 측면에서 여성과 남성이 다른 면을 한마디로 지적한다면 아니마는 기분(Launen, mood)을, 아니무스는 의견(Meinungen, opinion)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p63)... 우리는 남성의 무의식의 아니마, 여성의 무의식의 아니무스의 특성이 단지 남녀의 의식에서 배제된 내용만으로 일어지는 것이 아니고 더 깊은 원형적 토대, 즉 '선험적 전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p64) <아니마와 아니무스> 中


 저자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통해 자신 안에 내재한 다른 성(異性)의 요소와의 통합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진정한 남성상을 '51%의 남성과 49%의 여성'으로 말할 수 있다라면, 진정한 여성상은 여기에 대칭(對稱)적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융은 여기에 머물지 말고 통합적 자기로 나갈 것을 강조한다.


 융의 아니마/아니무스론은 인간이 남성과 여성에 머물러 있지 말고 남성은 여성적 요소를, 여성은 남성적 요소를 살려서 의식에 통합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식의 중심인 자아는 전체정신의 중심에 거의 접근하게 된다.(p36) <아니마와 아니무스> 中


 '자기(Self, Selbst)'란 자기실현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다. 자기란 전체정신,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합된 전체정신이다. 그것은 인격성숙의 목표이며 이상이다. 그것은 의식의 중심인 '나(자아)'를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크기의 전체정신 그 자체, 혹은 그 전체정신의 중심이며 핵이다... 융은 인간무의식 속에서 하느님과 같은 신상(神像)을 발견한 것이다.(p45) <그림자> 中


 분석심리학 탐구 3부작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나는 몇 가지 지점이 있다. 첫째는 우리 모두는 페르조나 동일시를 통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회적으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할 바를 부여받고, 그 역할에 따라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좋은 부모로서, 좋은 자식으로서 우리 모두는 각자 부여받은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을 바라보고, 우리 역시 그 역할에 동화(同化)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갈등은 특히 부모와 자식간에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때, 가족간의 상처 문제는 상당부문 페르조나의 문제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페르조나 문제는 자신 내면의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중요한 문제임을 확인하게 된다.


 둘째로, 우리가 성별 특성이라 부르는 많은 것들이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면 뒤바뀜을 확인하면서, 성(性) 역할이나 특성에 대한 편견을 깨닫게 된다. 마치 <거울 나라의 앨리스 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Alice Found There>처럼 우리는 현실과 다른 거울 너머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내가 거울 속의 집에 대해서 상상한 것들을 모두 말해 줄게. 저긴 물건들이 반대로 있는 것만 빼면 우리 집 거실하고 아주 똑같단다. 의자 위에 올라서면 저 안을 볼 수가 있어. 벽난로 뒤만 빼고 말이야. 아아! 벽난로 뒤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p206)... 우리 거실 문을 활짝 열어두면 거울 속 집의 복도가 살짝 보인단다. 우리 복도랑 무척 비슷하지. 하지만 저 너머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어.(p207) <거울 나라의 앨리스> 中


 벽난로를 대칭점(symmetric point, 對稱點)으로 거울 나라와 앨리스가 속한 세계(世界)는 분리되어 있지만, 이들 모두가 세상(世上)을 만드는 것처럼, 자기 실현을 위해서는 개인적으로는 내면의 소리에, 사회적으로는 약자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 나아가 이는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을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영역이라고 한다면, 무의식은 우리가 깨닫지 못한 영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의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개발에 초점을 두어야 하겠지만, 장기적 후손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 개발보다 보존 또한 중요한 문제임을 생각하게 된다. 무의식의 의식화와 경제개발은 이러한 부문에서 통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부문은 교육(敎育)문제에 있어서, 아이들 잠재력 개발과도 연관지을 수 있다. 조기 교육을 통한 아이들 잠재력 개발이 좋은 문제인가 역시 이같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새로운 접근법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이부영의 분석심리학 탐구 3부작은 칼 융의 사상을 쉽게 정리한 입문서다. 그래서, 칼 융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설명하되 일반인들이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도록 잘 정리한 책이라 생각된다.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을 읽은 후 칼 융의 사상에 관심이 생긴 독자라면, 먼저 프로이트 사상을 접한 후 칼 융 저작을 접하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이상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무의식은 궁극적으로 무의식적이다. 자아가 전일(全一)의 경지인 자기의 경지에 근접할 수는 있으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기는 언제나 자아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실현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곳에는 미지의 세계가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실현을 통해서 완전한 인간(vollkommener Mensch)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vollstandiger Mensch)이 되는 것이다.(p47) <그림자> 中


PS. 아니마와 아니무스 통합이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은 <마징가 Z>의 아수라 남작의 사례를 통해서 반증되는 것은 아닌지 짧게 생각해 본다.


[그림] 아수라 남작(출처: https://anidb.net/character/5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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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3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3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Joseph Goebbels>(이하 <괴벨스>)는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Ralf Georg Reuth, 1592 ~ )가 쓴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 ~ 1945) 평전이다. 독일 제3제국 선전장관으로 나치 선전에 앞장선 괴벨스를 다룬 이 책의 큰 줄기는 그가 히틀러(Adolf Hitler, 1889 ~ 1945)를 선택한 배경과 나치 집권을 위해 사용한 그의 선전 전략이라 생각되기에, 이번 페이퍼에서는 이를 중심으로 따라가본다. 


 <괴벨스>의 저자는 괴벨스가 어릴 때 갖게 된 '만곡족(彎曲足)'이라는 질병이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바라본다. 자신이 가진 신체적 약점으로 그는 열등감에 빠졌고, 이로 인해 한때 성직자를 꿈꾸던 소년이 신(神) 대신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의 '초인(超人)'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구원자를 찾기를 원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소년 괴벨스가 갖게 된 질병이야말로 '비극(悲劇)의 탄생'이라 하겠다.


 소년 자신은 장애와 신앙의 관련성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과 함께, 무엇보다도 어른들의 모욕적이고 동정 어린 시선과 친구들의 놀림 때문에 괴벨스는 신체적 장애가 모든 것에 그늘을 드리운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집 밖으로 나가기를 꺼리게 되었다.(p23)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中


 "하느님은 왜 경멸과 조롱을 받도록 그를 만들었는가? 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과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없는가? 왜 사랑하고 싶고 사랑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고 증오해야 하는가?" 그래서 그는 신을 원망했다. "때때로 그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p27)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中


 괴벨스는 자신의 '현대적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습을 한 다른 "구원자"를 찾으려했다. 그는 이미 박사논문에서도 '강력한 천재'를 갈망하는 마음을 표현한 바 있다.(p106)... 괴벨스는 믿음, 이러한 믿음의 육화(肉化)에 대한 갈망, 그리고 마지막으로 희생을 통한 자기 구원 등의 요소를 통해 사이비 종교적이고 병리학적인 나치즘 제식의 빈 껍데기 말들을 미리 발견했던 것이다.(p107)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中


 괴벨스의 다른 사상 축이었던 반(反)유대주의 역시 그의 다리 장애와 무관하지 않다. 헤어진 약혼녀와 다투게 된 원인이 다리 장애였다는 사실과 그 약혼녀가 마침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반유대주의의 모든 원인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출신 인종주의 이론가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Houston Stewart Chamberlain, 1855 ~ 1927)의 <19세기의 기초> 등의 책을 읽으면서 반유대주의를 강화해 나갔다. 


 1922년에 약혼녀 엘제 얀케는 그의 다리 장애 때문에 일어난 다툼중에 자신의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러나 괴벨스가 유대인 문제를 자신의 사고에서 중심에 놓기 시작한 것은 은행에서 겪은 '체험'과 '통찰'에 따른 것이었다.(p118)... 이제 괴벨스는 유대인을 물질주의의 화신, 악, '적(敵)그리스도의 화신', 나아가 이 세상의 악덕에 구체적으로 책임이 있는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p120)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中


 <괴벨스...>의 작가는 여기에 덧붙여 니체와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 ~ 1936)의 사상 또한 청년 괴벨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음을 설명하고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도 있다 여겨진다. 니체가 나치에 영향을 준 부분은 분명하지만, 니체 자신이 반유대주의자나 국수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 니체가 나치주의의 사상적 원류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라 여겨진다.(니체사전 '나치스' 항목 참조)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읽은 것도 전반적으로 그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니체 모방자가 쓴 역사형태학에서 괴벨스는 모든 문화가 생성과 소멸이라는 존재의 영원한 법칙에 묶여있다는 것을 읽었다. 그는 지금 영혼이 없는 물질의 시대, 산업과 '문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모든 문화가 소멸하기 시작하는 때임을 그 책에서 잀었다. 슈펭글러의 영원한 생성과 소멸의 법칙에 따르면 오로지 강자가 지배해야 하기 때문이다.(p80)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中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 ~ 1955)도 말하듯이 "니체가 도덕, 인간성, 동정, 그리스도교에 적대한 모든 것, 그리고 아름다운 방탕, 전쟁, 사악에 참여하여 입에 올린 모든 것은 파시즘의 사이비 이데올로기에 자리를 얻었으며, 병든 자를 죽이고 열악한 것을 거세하라고 처방한 니체의 '의사를 위한 도덕', 노예제의 필연성의 인상을 준 교설, 종족 위생상의 선택 도태...... 의 넋두리는 나치스의 실천에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p66) <니체 사전> 中


 이와는 별도로 1930년대에 나치에 의해 전용된 다른 예술가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 ~ 1883)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니체와 달리 반유대주의자였던 바그너의 사상은 삶을 부정하고 비방하는 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생전 니체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3제국에서 이들의 사상들이 각각 나치즘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서로 대척점에 있던 이들의 사상들이 파시즘 안에서 어떻게 합(合)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고, 이제부터는 괴벨스의 대중선동에 대해 살펴보자.(니체의 바그너 비판은 낭만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지만, 히틀러가 독일음악으로 생각했던 바그너의 음악이 니체로부터는 프랑스 풍(風)으로 비판 받았다는 점은 흥미있는 부분이라 여겨진다.)


 

 나는 바그너 음악을 영혼의 디오니소스적 강대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했다. 바그너 음악에서 나는 태곳적부터 봉쇄당해온 삶의 근원력을 마침내 숨쉬게 하는 지진 소리를 들었다고 믿었다... 고통받는 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원하고, 삶에 대한 비극적 통찰과 비극적 개관 또한 원한다 - 또 다른 하나는 삶의 빈곤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다.(p530)... 삶에 대한 보복 - 이것은 그런 빈곤한 자에게는 가장 자극적인 도취인 것이다!...... 후자의 이중적 요구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 걸맞은 것이다. - 이들은 삶을 부정하고, 삶을 비방하며, 그러기에 내 대척자들이다.(p530)... 마지막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에 관해 말하자면 : 사람들은 바그너의 진정한 기반은 파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그리고 명백히 알고 있다.(p532).... 나는 언제나 독일인이기를 선고받았다......(p538) <니체 대 바그너 Nietzsche contra Wagher> 中

 

 다른 이들 앞에서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 양 모습을 취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그것을 모른다는 강한 의구심과 두려움이 포함돼 있습니다...나에게는 두 사람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공적인 모임의 대중 앞에서 긴 연설로 위장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나는 봅니다.... 긴 연설을 하는 자는 우리는 무엇이라고 밝힐까요? 정치가인가요, 아니면 대중선동가인가요? 대중선동가입니다.(268 a ~ b) <소피스트 Sophistes> 中


 1926년 나치의 베를린 관구장으로 임명된 괴벨스는 이때부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대중 앞에서 대중들이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주제만을 강조하는 그의 선전술은 오늘날에도 많이 볼 수 있는 마케팅 전술로 현재도 유효하다. 이러한 형식을 가깝게는 K-POP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후크송( 영어로 kitch song)으로 알려진 짧은 구절을 반복하는 노래 형식은 강렬함을 더해주는데, 괴벨스는 이러한 점을 극대화하여 사용했다. 오래되었지만, 2008년 쥬얼리의 <Baby one more Time>이 가장 인상적인 후크송이라 생각되어 올려본다.



 "이 도시(베를린)는 센세이션(흥분, 사건)을 먹고 산다. 그리고 이를 소홀히 하는 정치 선전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괴벨스의 견해에 따르면, 대중의 시대에 거리는 "현대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훗날 그는 "거리를 정복할 수 있다면 대중을 정복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을 정복하는 자는 국가를 정복한다."라고 회고했다.(p180)... 괴벨스는 '이념'을 모든 선전 활동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 이념을 구구절절이 두꺼운 책에 쓸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간명하고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주제"만을 담고 있어야 한다.(p181)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中


 괴벨스는 선동 연설이나 <공격> 논설에서, 파리에서 '진짜로'일어나고 있는 일은 바로 독일 민족을 노예화하고 결국 서양 전체를 몰락시키려는 '국제 유대주의'의 가공할 음모라고 집요하게 반복 주입하였다.(p229)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中


 괴벨스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념'은 이성(理性)에 호소하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감성(感性)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과학과 이성이 강조된 산업화 사회에서 따뜻한 인간의 감성을 울리는 '감성 마케팅'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과학'을 잘 조합한 괴벨스의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고 그 결과 나치는 다수당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괴벨스는 청중들에게 이른바 '이념'의 숭고한 점을 전달하고 그들을 신자로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나치즘은 그들에게 (머리가 아닌) 심장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치즘이 다른 정치 노선보다 탁월해 보일 뿐 아니라, 물질주의적이고 차갑다는 판결을 받은 대도시의 세계에서 확연히 눈에 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괴벨스가 조직한 선전 집회들은 항상 청중들의 감정과 본능에 호소했다.(p187)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中


 괴벨스의 수많은 연설 외에도 포스터가 선거전의 주요 선전도구로 쓰였다. 선거전에 투입된 선전물의 양이 결국 득표 수에 반영된다는 괴벨스의 지론에 따라... 괴벨스는 다른 선전 도구들도 활용했는데, 기술적으로 그 시대의 수준에 걸맞는 것이었다. 그는 축음기용 음반을 하나 제작해 총 5만장을 찍었는데, 음반 하나가 일반 편지 봉투에 넣어 발송할 수 있을 만큼 크기가 작았다.(p334)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中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치의 성공적인 선전 전략은 괴벨스 독창적인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가깝게는 <프로파간다 Propaganda>의 버네이즈(Edward Bernays, 1891 ~ 1995)로부터 멀게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나 플라톤(Platon, BC 428 ~ 427) 때부터 대중선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대중 선전의 역사가 결코 짧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괴벨스는 여기에 충실하여 자신의 환경에 맞는 방법을 고안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할까.

 

 청중을 설득하고 훌륭한 조언을 할 수 있는 모든 수단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효과적인 것은 모든 정체(政體)를 알고 각 정체의 관습과 제도와 이점을 구별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에 설득되고, 유익한 것은 정체를 보전하기 때문이다.(1365b 22 ~ 25)... 우월함은 미덕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연설에 공통된 현상 가운데 '효과의 강화'는 과시용 연설에 가장 적합하고, 예증은 심의용 연설에 가장 적합하며, 생략삼단논법은 법정 연설에 가장 적합하다.(1368a 26 ~ 32) <수사학 Techne Rhetorike> 中


 <괴벨스...>에서는 괴벨스의 삶을 보여주면서 그가 나치에 빠지게 된 배경과 그를 유명하게 된 선전술이 효과적인 감성마케팅 전략의 결과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책 본문에서 놀라운 선전술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약속과 실천을 하지 않으면서도 제국 내 2인자의 위치를 끝까지 지켜내는 괴벨스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플라톤이 <고르기아스>에서 지적했던 연설가(고르기아스)의 허언(虛言)에 대한 비판을 떠올리게 된다.


 연설술은 사실 자체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전혀 없지만, 대신에 설득의 어떤 계책을 찾아내어 모르는 자들 앞에서 아는 자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게 해야 합니다.(459c)... 연설가는 그것들 자체는 모르지만 즉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나쁜 것이 무엇인지, 훌륭한 것이 무엇인지, 부끄러운 것, 정의로운 것, 부정의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모르는 자들 앞에서 모르면서도 아는 자보다 더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것들에 관하여 설득할 계책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까? <고르기아스 Gorgias> 中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치가 패망한지 7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괴벨스의 후예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가짜뉴스가 판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기 힘든 시대에서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은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을 지향하는 파시즘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기록서라 여겨진다.


[사진] Fake news(출처 : BBC.com)


 괴벨스의 가장 강력한 동맹자는 다름 아니라 점차 심화되어 가는 독일의 고난이었다. 실업자 수는 오래전에 3백만 명 상한선을 넘어섰다. 그들은 더 나은 상황으로 급격한 변화를 약속하는 자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p279)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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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0-06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괴벨스에겐 그런 약점이 있었군요 이 책 읽어보고싶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님 ㅎㅎ

겨울호랑이 2018-10-06 17:51   좋아요 1 | URL
이번에 <괴벨스...>를 읽다보니, 히틀러도 그렇고 파시스트들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어둠의 기운(?)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님 평안한 주말 되세요!^^:)

syo 2018-10-06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기서 쥬얼리가 나오다니! 당했다..... ㅎㅎㅎ

카알벨루치 2018-10-06 17:47   좋아요 1 | URL
추억이 돋아 동영상부터 봤다는

겨울호랑이 2018-10-06 17:53   좋아요 1 | URL
^^:) 다소 생뚱맞지만, 일종의 호객행위가 되버렸습니다.ㅋ

카알벨루치 2018-10-06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격이....쎄네요 =333333...55555555ㅋㅋ

겨울호랑이 2018-10-06 17:54   좋아요 1 | URL
네 좀 두께가 되는 책이 되어서 그런지 좀 비싸네요ㅜㅜ

카알벨루치 2018-10-06 17:56   좋아요 1 | URL
지를 때 눈 감고 손가락만 움직이면 됩니다 ㅎ

겨울호랑이 2018-10-06 18:07   좋아요 1 | URL
^^:) 알라딘 마을은 마음이 통하는 분들이 많아 편하고 좋습니다.ㅋㅋ

카알벨루치 2018-10-06 18:0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같이 지르러 갈까요 =33333333

겨울호랑이 2018-10-06 18:12   좋아요 1 | URL
저는 <괴벨스...>는 이미 구입해서 다음 달에 다른 책으로 하겠습니다.ㅋ

곰곰생각하는발 2018-10-06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퀄리티 페이퍼입니닷 ! ㅎㅎㅎㅎ

겨울호랑이 2018-10-06 18:50   좋아요 0 | URL
^^:) 곰곰발님 감사합니다. 평안한 주말 보내세요!^^:)

2018-10-06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06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10-06 2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영논리니 복잡한 설명 다 필요없습니다 -
현실의 문제를 직격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적 문구 하나면 끝납니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대중의 그런 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실행에 옮긴 거지요.

그 와중에 훼이크 뉴스의 활용은 정말 탁월
했습니다. 독일 민족이 지금 겪는 모든 고
통과 만악의 근본 원인은 바로 유대인이다.
공격해야 할 소수 희생양까지 점지해 주었
으니...

겨울호랑이 2018-10-06 21:55   좋아요 0 | URL
나치 집권 과정이 완벽하게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레삭매냐님의 지적대로 핵심은 대중 선동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소수 세력이었던 나치가 다른 세력과 연합을 통해 내각을 구성하고 하나하나 적으로 돌리면서 최후의 승자로 남을 때도, 스탈린그라드에서 괴멸적인 패배를 당했을 때조차도 그 원인을 다른 곳에서 돌리면서 대중의 눈을 가리는 모습을 책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탁월하다 해야할지, 사악하다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2018-10-07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07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널리 알려진 빅터 플랭클(Victor E. Frankl, 1905 ~ 1997)박사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 The Will to Meaning : Foundations ans Applications of Logotherapy>에서 자신의 이론인 로고테라피 Logotherapy에 대해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인간의 의지 意志 와 삶의 의미 意味, 그리고 이들의 관계라 생각된다.

 

 로고테라피의 인간에 대한 개념은 다음 세 개의 기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자유 의지 freedom of will,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will to meaning, 그리고 삶의 의미 meaning of life이다.(p34)... 인간의 의지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의지이다. 인간의 자유는 어떤 조건을 피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그가 어떤 조건에 처해 있든 그것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p35)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빅터 플랭클에 의하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상황을 바꿀 정도의 힘을 갖지 못한 불완전한 것이다. 의지를 통해서는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의 대응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절망시킬 정도의 어려운 상황에 닥쳤을 때 의지만으로 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인간의 의지를 가진 이들이 무너지는 과정이 잘 묘사되고 있다. 반면,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낸 저자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3의 원리란 의지의 자유와 함께 의미, 즉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삶의 의미 - 인간이 찾으려고 노력해 왔던 바로 그 의미가 있다는 것과 인간에게는 이 의미를 성취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p111)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우리가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자신을 통합시킬 것을 주문한다. 세상을 정신과 물질로 구분지어 이원론(二元論, dualism)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종합적으로 바라봤을 때 우리는 새로운 차원에서 자신을 조망할 수 있게 된다. 변증법의 합(合)의 단계가 여기서도 요구되는 것이고, 이것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짓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인간을 생물적인 차원과 정신적인 차원에 투사를 하면 그 결과는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하나는 그 결과가 생물적인 유기체 biological organism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인 기제 psychological mechanism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존재의 신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이 아무리 서로 모순된다 하더라도 차원적 인간론의 견지에서 본다면 이 모순이 더 이상 인간의 통일성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p46)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신체적, 정신적 현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그 수준을 초월해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새로운 차원이란 순수 지성 noetic에 입각한 차원, 생물적인 차원이나 심리적 차원과는 구별되는 noological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차원이다.(p37)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이렇게 인간이 통합적으로 자신을 고양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부산물로 얻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행복, 자아 실현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빅터 플랭클에 따르면 이들은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쾌락을 추구한 에피쿠로스(Epicuros, BC 341 ~ BC 271)와 반대 위치에 서 있는 저자의 입장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 쾌락을 목표로 하면 할수록 더욱 그 목표로부터 빗나가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행복의 추구' 그 자체가 그것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순리적으로 쾌락은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목표의 달성을 통해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결과라는 것이다. 목표의 성취가 행복을 느낄 이유를 만들어낸다.(p58)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자아 실현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제일 우선시 되는 의지도 아니다. 자아 실현 자체에 목표를 두게 되면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적인 특성과 모순을 이루게 된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자아 실현도 하나의 결과, 즉 의미를 성취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p64)... 나는 자아 실현을 '삶의 의도성에 의해 얻어지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p65)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나는 맛의 즐거움, 사랑의 쾌락, 듣는 즐거움, 아름다운 모습을 보아서 생기는 즐거운 감정들을 모두 제외한다면, 선 agatbon을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름다움과 탁월함 arete 등은 우리에게 쾌락을 제공할 때 가치를 지닌다. 이들이 쾌락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p40) <쾌락> 中 - 인생의 목적에 관하여 -


 에피쿠로스 학파의 창시자인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쾌락을 주는 것은 좋은 것(善)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렇지만, 빅터 플랭클에 의하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능력이 없는 존재다. 인간이 가진 의지의 힘이란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만 가능하기 때문에, 행복의 추구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행복을 동기의 목표로 삼으면 필연적으로 그것을 관심의 목표로 삼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행복해야 할 이유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고, 그러면 행복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p59)... 행복과 쾌락은 모두 성취의 대체물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쾌락 원리가 권력에의 추구와 마찬가지로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것이다.(p61)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행복과 쾌락을 추구한 에피쿠로스의 주장대로라면, 고통과 시련은 우리가 피해야할 악 惡이다. 오직, 행복과 쾌락이 아타락시아 ataraxia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선이라면 우리는 이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렇지만, 빅터 플랭클의 삶의 의미는 시련을 통해서도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라도 우리는 한 단계 도약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련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궁극적인 의미는 더 이상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것을 지적인 영역에서가 아니라 실존적인 영역에서, 우리의 존재를 넘어선 믿음을 통해 포착할 수 있다.(p228)... 낮은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높은 차원에서는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p231)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그렇다면, 빅터 플랭클이 말하는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그가 말한 의미는 '가치중립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삶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발견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의미는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 그것 자체로는 중립적인 것들에 우리가 투사시킨 어떤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중립성의 견지에서 현실은 우리가 바라는 바가 투사되어 있는 하나의 스크린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p97)...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p99)... 의미란 나에게 질문을 던졌던 어떤 사람에 의해서, 그런 질문을 수반하고 대답을 요구하는 상황에 의해서 그렇게 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바로 그것이다.(p101)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삶의 의미를 찾아서> 내용 전체를 통해서 저자는  한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믿음'을 강조한다. 믿음을 통해 하나된 자신을 바라봤을 때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 속에서 우리는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 ~ 1855)가 말한 불안의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불안을 통해서 개인이 신앙을 지향하도록 교육 받을 때, 불안은 바로 그 자신이 낳는 것을 뿌리뽑을 것이다. 불안은 운명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바로 개인이 운명을 신뢰하기를 원할 때, 불안은 일변하여 운명을 없앤다. 왜냐하면 운명은 불안처럼 그리고 불안은 가능성처럼 마녀의 편지 Hexenbrief, magic picture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운명과의 관계에서 스스로에 의해서 그렇게 변형되지 않을 때, 그는 항상 그 어떤 유한성도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변증법적 앙금을 남길 것이다.(p404) <불안의 개념> 中


 키에르케고르가 불안의 의미를 개인 신앙의 고양 高揚에서 찾고 있듯이, 우리 삶의 불확실성을 믿음의 차원으로 극복하자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는 전편 <죽음의 수용소에서>보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독자들은 딱딱하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그렇지만, 저자의 체험이 어떻게 이론으로 녹아들어갔는가를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나름의 재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를 읽으면서 떠오른 생명파 시인 청마 유치환(柳致環, 1908 ~ 1967)의 시 詩를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운명 運命에 대하여 (2연)


 운명 運命이란 산 山처럼 엄숙하게 생긴 것은 아니다. 낙엽 落葉같이 흔하고 값 없어 거리에 굴르는 그 어느 하나를 주워 네 것이라 하여도 매 마창가지 - 외롭고 슬프고 의지 없게 마련이거늘 오늘 너보다 더욱 크낙한 것의 당차한 조락 凋落의 계절에서 너는 마땅히 배아 胚芽를 갖지 못한 무수한 낙엽 落葉의 그 한 이파리임을 깨쳐야 할 것이다.(p142) <청마시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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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8-04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어요.
시원하고 즐거운 일들 가득한 주말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겨울호랑이님, 기분 좋은 토요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8-08-04 19:40   좋아요 1 | URL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있네요. 다음 주만 넘기면 더위가 가시리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주말 되세요!^^:)

북다이제스터 2018-08-04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무더운 날씬엔 책 어디서 읽으세요?^^

겨울호랑이 2018-08-04 21:52   좋아요 1 | URL
저는 집에서 주로 읽습니다. 손에 익은 책을 보는게 좋아서요 ㅋ 북다이제스터님께서는 시원한 도서관을 가시나요?^^:)

2018-08-05 0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5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로고스 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로고테라피 Logotherapy' 혹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빈 제3정신의학파'로 불리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보고 있다.(p168)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 for Meaning :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는 빅터 플랭클(Viktor Emil Frankl, 1905 ~ 1997)박사가 아우슈비츠(Auschwitz)에서 강제수용되었던 당시의 경험과 자신의 경험에 바탕한 심리학 이론 로고테라피(Logotherapy)에 대한 개괄을 설명한 책이다. 죽음에 직면한 상황 속에서 저자는 자신과 주변인들의 심리 변화를 날카롭게 포착해 나가고 있다. 


[사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출처 : http://lightandlife.org/wpll/?p=1174)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은 첫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조차도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p49)... 이런 반응들은 며칠이 지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첫번째 단계에서 두번째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상대적인 무감각의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 다음에는 혐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p52)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강제수용소에 들어간 수감자들은 처음에는 충격을 받게 되나, 곧 이어 그런 상황에 무감각해지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혐오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고된 수감 생활 속에서 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접고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꾸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둘 죽어간다. 반면, 저자는 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실제로 수형 기간은 불확실했으며, 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저명한 연구전문 심리학자는 강제수용소의 이런 삶을 '일시적인 삶 provisional existence'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p128)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저자 빅터 플랭클는 인생의 목표는 사랑이며,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길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저자는 힘든 수용소 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으며, 후에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 이론을 정립하게 되었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p78)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p120)...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 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p121)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인간은 괴롭고 끔찍한 상황에서 이를 견디어 나갈 힘을 가지고 있다. 태도의 자유와 이에 따른 선택이 그것인데, 선택을 위해서 인간은 자신 삶의 의미를 먼저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닌, 자신이 갈 길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를 제안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p138)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이처럼,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자는 자신의 수용소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한 로고테라피 이론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먼저 환자는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후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찾기를 요청받고, 그 의미에 맞는 삶을 살아간다면, 현재 겪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할 수 있다. 


[사진] 기도 (출처 : http://bisporodovalho.saranossaterra.com.br/aonde-esta-sua-mente-e-o-que-ela-esta-pensando/)


 로고테라피에서 우리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확인하게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自由義志)'강조와  삶의 의미 발견(召命) 등의 요소가 이를 뒷받침한다. 로고테라피 속에서 다분히 종교(宗敎)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수용소 생활을 통한 저자의 실존(實存) 체험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우리 인간은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인지, 로고테라피에서는 종교적인 면을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로고테라피가 기독교 사상과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우리에게 널리 읽히는 것은 종교를 넘어선 인간 보편의 '종교적 체험'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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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3 21: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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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3 2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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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게우스 2018-07-14 1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과학은 끊임없이 인간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있고, 종교와 인문학적 영역에서는 의미 있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과연 과학이 말하는 객관성으로 진정한 객관적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과학 또한 세상은 어떠어떠하다는 믿음에 불과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과학도 그저 새로운 사상에 불과한 것일까요? 분명한 것은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겨울호랑이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7-14 10:40   좋아요 1 | URL
베텔게우스님 말씀처럼 과학의 세계에서는 생물학적으로는 개체 단위보다 유전자 단위로 생각을 하고, 물리학적으로는 양자역학적으로 이론을 전개하고 있기에, 예전과 달리 인간은 더 이상 독립된 대상이 아닌 일종의 ‘합‘에 불과한 듯합니다. 반면, 오랜 역사를 가진 학문에서는 여전히 개체 중심적인 이론을 전개하기에 이들의 충돌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이러한 학문간 충돌 속에서 조화를 모색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조금 더 붙인다면,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빅터 플랭클은 높은 단계의 사상을 하위 단계의 사상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는 환원주의를 경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무더운 날입니다. 베텔게우스님,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

2018-07-14 17: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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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4 19: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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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7 08: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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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7 1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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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2 16: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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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2 2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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