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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을 맞잡고 빈다. 서희는 외면을 해버린다. 차마 정시할 수 없다. 장 (唱)을 하겠다는 것도 물론 거짓이다. 기화는 치매상태로 가고 있는 것이다. ‘불쌍한 것. ‘ 다정다감했던 그 감성은 어디로 갔는가. 사무치게 깊었던 그 숱한 한은 어디로 갔는가. 너그럽게 이해하고 푼수를 알며 물러나 앉을 줄 알던 그 조신스러움은 어디 갔는가. 욕심 없고 거짓 없던 그 천성은, 아니연연하고 그 풍정이 사내들 마음을 사로잡던 기생 기화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가. 그에게서는 양현을 향한 모성마저 없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 여자를 이렇게 만들었나. 마약의 심연므로, 다정다감함이 유죄요, 다정다감함의 단죄인가.(377/560)
- P377

‘더 늙으면 추해진다.‘ 눈을 뜨고 노을이 타는 철창문을 또 바라본다. 생애를 통하여 철창문에 비치는 저 노을만큼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환이는 자신의 생애가 성인의 길이 아니었음을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투쟁과 방랑과 애증과 원한의 가파로운 고개를 넘은, 평지가 오히려 발끝에 설었던 오십 평생은 마음과 몸이 피로 물들었던 것처럼 격렬했었다. 환이는 무엇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인지 그것을 생각한다.(200/560)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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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상현에게는 소설을 쓴다는 것, 쓰는 행위 이상의 절실한 무엇과의 대결상태, 문학은 하나의 방패였었는지 모른다. 싸움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래도 좋은가, 이래도 좋은가, 수없이 자기 자신에게 의문을 던지면서 낫질도 도끼질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내부, 자신을 둘러싼 외부와의 대결은, 그러나 언제 끝날지, 과연 끝날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욕망과 갈등과 자포자기, 제약과 여건과 의무, 그 모든 것은 첩첩이 쌓인 가시덤불, 이동진의 아들이 일제하에서 어떻게 발붙일 것인가. 발붙일 곳도 없거니와 발을 붙여도 아니 된다. 그러면 어디로 가나 갈 곳이 없다.(71/572)
- P71

‘살찐 돼지보다 죽지 뿌러진 한 마리의 송학이 초라한 것은 당연한 일이거니 용이가 초라하게 뵈는것도 당연하고, 조선의 백성이 다 같이 초라해 뵈는 것도 당연한 일이로다. 살찐 돼지는 옹졸하고 볼품 없는 발톱에 편자를 끼우고 먹새 좋고 더러운 주둥이에 포문을 물리면은 현인신인들 아니될까. 하여 유구한 문화에다 기원 이천육백 년의 대일본제국은 욱일승천이라, 우러러보게 훌륭한 것은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로다.(252/572)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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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삼수.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한들 악의 생리를 몰랐다면 어리석었다 할밖에 없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을 해칠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악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말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있는 허위의 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440/522)
- P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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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부인은 끊임없이 매질을 하던 형리를 잃었다. 생전의 최치수는 아들이 아니었으며 가혹한 형리였던 것이다. 그것을 윤씨부인은 원했다. 원했으며 또 그렇게 되게 만든 사람이 윤씨부인이다. 그 사실을 지금 윤씨부인은 공포 없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가엾은 형리, 세월을 물어뜯으며, 물어뜯으며 지겨워서 못 견디어 하다가 그 세월에 눌리어 가버린 사람, 최지수는 윤씨부인을 치죄(治理)하기 위해 쌓아올린 제단에 바쳐진 한 마리의 여윈 염소는 아니었던지.

사실 이들은 하느님을 본 일이 없다. 그 누구도 본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님도 본 일이없고 터줏님 조상님의 얼굴도 모른다. 설령 삼 대사 대쯤, 어린 시절에 본 일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죽은 후 만난 일이 없다. 다만 하느님을 하늘과 해와 달에서, 별빛이나 구름이나 강물에서, 자연에 존재하는 크나큰 것, 혹은 신기하고 위태로운 것에서 느끼는 것이며, 나라님은 포졸의 육모방망이나 원님들의 거룩한 도임행차 같은 데서 느끼는 것이며, 터줏대감은 무당의 주술에서, 조상은 신주 위패에서 느끼는 것인데, 하느님을 말할 것 같으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특히 농민들이 실감하는 것으로는 사계절 천후(天候)를 임의로 하심이요, 세상에 태어나고 또하직하는 인간사를 관장하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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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임의로 죽을 수 없는 게 사람의 목숨이란 말씀이오. 설령 삶이 죽음보다 고생스러울지라도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게요. 제가 일개 의생으로 칠십 평생 얻은 것이라고는 사람의 목숨이 소중하다 그것이었소. 제 목숨뿐만 아니라 남의 목숨도, 죄가 있다면 사람마다 죄가 있을 것이요, 갚음이 있다면 사람마다 갚음이 있을 것이요, 살아야 할 사람이 죽는 것은 개죽음이요,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짐승일 따름, 사람은 아닐 것이외다. 

치수의 지체, 최치수의 재물, 최치수의 학식, 최치수의 오만, 그런 것이 말할 수 없는 큰 덩어리가 되어 자신은 그 밑에 짓눌리어 자꾸 작아지는 것 같은 생각이 그를 슬프게 했고 걷잡을 수 없게 안정을 잃게 했던 것이다.

요즘 서희는 엄마 데려오라 하면서 패악을 부리지는 않았다. 차츰 엄마의 일은 뭔지 모르나 불가한 것이며 입 밖에 내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은 마음이 솟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꼬투리 잡아 울부짖었고 누구든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해주었으면 싶을 때 그는 겉돌려 가며 방금 길상에게 한 것처럼 더듬어보지만 아무도 그에게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희의 마음이 자란 것이다. 슬픔은, 다른 아이들에게보다 그에게 더 많은 지혜를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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