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두드러진 것은 개인정보 활용 등 프라이버시 문제다. 한국은 봉쇄나 재택명령 대신 확진자와 접촉자의 이동경로를 추적하여 잠재적 감염자들을 선제적으로 검사하는 3T 방식을 택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일상생활을 보장한다는 점에서는 기본권 제한이 약하지만, 사생활의 보호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측면에서는 기본권을 크게 제약한다. 서구에서는 이 방식이 불가능했다. 추적을 위한 정보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점도 있었지만, 프라이버시 보호에 대한 요구 정도가 매우 높아서 실행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바이러스는 모두에게 재난이었지만 그 영향은 불평등했다. 특히 장애인·홈리스·이주노동자·요양원 수용자·기저질환자 등 차별받던 의료 취약계층에게는 더한 차별이 닥쳤다. 이들은 정부가 지정한 고위험군·집중관리군에 포함되지 못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이들이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정부 관리와 사망자 통계의 사각지대에서 ‘방치된 죽음’이었다.

질병의 원인을 도덕화하는 오랜 습속과 혐오를 조장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토양이 접속하자 혐오는 마치 증식숙주 속의 바이러스처럼 폭발적으로 창궐했다. 경기도와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 연구팀이 2020년부터 2022년 1월까지 4회에 걸쳐 경기도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경기도 코로나19 심리방역을 위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초기에는 확진 자체와 관련이 있는 중국인, 신천지 교도, 성소수자 등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방역수칙 위반자, 백신 미접종자 등 특정 행위 관련자들에게 혐오가 가해졌다.

혐오와 비난을 줄인 것은 결국 유행의 장기화였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에서 코로나19를 둘러싼 방역정치는 정당 간 대립의 맥락 속에서 과잉정치화되었다. 한쪽에서 "세계가 감탄한 K-방역"을 자찬할 때, 다른 한쪽에서는 "세계 최악 ‘허망한 K방역’"이라는 비난으로 맞섰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보수정당 지지자에 비해 권력의 억압을 훨씬 더 촉구하는 역설은 ‘방역정치의 정당정치화’라는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이들에게 K-방역의 성공은 세월호참사와 메르스사태 때 국민의 생명을 방기한 보수정권에 대한 심판임과 동시에 진보정권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증거였다. 훼손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급격한 기후위기는 채굴 분야에 투자한 이들에게 경제적 위협이 될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세계관에 투자한 이들에게는 우주론적 위협이 된다. 기후변화는 지구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로, 공짜는 없다는 것, 인간이 (특히 백인 남성이) ‘지배’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 한쪽만 이득을 취하는 일방적인 관계 같은 건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행동에는 반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수세기에 걸친 굴착과 추출은 이제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튼튼한 구조물?해안도시, 고속도로, 석유굴착기 등?조차 취약하고 허약해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추출주의적 사고는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뿌찐, 트럼프, ‘자유호송대’의 공통된 우주관을 감안하면, 이들이 저마다 다른 지역에 살고 다른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서로 일맥상통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독성이 덜한 향수(鄕愁)를 되찾는다고 해서 독성이 강한 향수의 힘을 물리칠 수는 없다.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는 제국주의적 침략, 우익 사이비 포퓰리즘, 그리고 기후붕괴를 동시에 야기하는 세력과 싸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 이런 싸움과 매우 흡사한 것이 그린뉴딜이다. 그린뉴딜은 현 체제에서 가장 조직적으로 버려지고 오염된 지역사회를 돌보는 일부터 시작해 저렴한 친환경주택과 좋은 학교를 짓는 등 의미있는 일을 하는, 가족을 지원하고 노조가 결성되어 있는 사업장에 투자함으로써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책이자 운동이다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 위기는 북미와 서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를 대체할 화석연료 기반시설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다. 그 위기는 미국, 캐나다, 독일, 일본 등 우리 모두가 여전히 지구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석유와 가스,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요동치는 시대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은 많다. 핵무기가 무분별하게 확산되도록 내버려둘 때 어떤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한때 강대국이었던 나라들을 비난하는 근시안적 사고에 대해. 어떤 땅과 목숨은 침범하고 버려도 되고, 다른 어떤 땅과 목숨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서구 언론의 기괴한 이중잣대에 대해. 어떤 강제이주는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위기가 되고, 또 어떤 강제이주는 이주 대상국에 위기로 작용하는가에 대해.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의지에 대해. 그리고 자기 결정과 영토 보전을 위한 어떤 싸움은 영웅적인 것으로 칭송받고, 또 어떤 싸움은 테러로 치부되는 현실에 대해. 벌거벗은 역사의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국내 연안 양식장이 직면하고 있는 또다른 과제는 해양 쓰레기다. 어민들이 살고 있는 어촌 주변 바닷가에는 파도에 밀려온 플라스틱이나 양식장에서 사용하는 어구인 흰색 부표가 많다. 어쩌다 치운다고 하더라도 조류에 밀려온 다양한 해양 쓰레기가 금세 해안에 수북이 쌓인다. 도시에서 살다가 귀어한 어민들의 경우 처음에는 작업 중 나오는 쓰레기를 되가져오려고 노력하곤 한다. 그러나 바닷일의 고됨이 누적되고 시간에 쫓기게 되면 결국 바다에 그냥 버리는 쪽을 택하게 된다. 다른 어민들은 자연스럽게 버리는데 자신만 쓰레기를 되가져오는 게 혼자 잘난 척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쓰레기를 버리거나 방치하는 문제는 귀어 초기 어민들이 이전 세대와 갈등을 겪는 주제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출산은 죽음을 환기할 만큼 어머니와 자녀 모두의 취약성이 극대화되는 시간이고,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생명의 취약성에서 오는 불안까지 동반하는 복합적 노동일 수밖에 없다.

임대병영’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독일제국의 주택정책은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던 임대인 단체나 임대차제도를 넘어 생산과 관리 영역에도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요구하는 사회개혁가 등의 출현과 쟁명 속에서 전개된다.

주택공익성 개념과 소유권이 계속 충돌했던 서독에서는 규제와 해제가 긴장 속에 반복된다. 전후 복구시기 과거의 주택강제경제를 철폐하면서도 사회주택의 공급과 주거보조비의 확대를 통해 국가 개입의 끈을 튼튼히 잡았던 것이 보수진영의 입장이었다는 점은 ‘사회국가’ 독일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후 서독에서는 1960년대의 규제완화로 임대료가 폭등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 때처럼 민간부문의 건설 활성화도 이룩하지 못했고 결국 1971년에 다시 임차인보호강화법을 제정하게 된다. 동독과 서독의 이러한 사례를 보면, 좌든 우든 현실의 복잡함 앞에서 자만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헤겔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믿음의 과정을 보편성과 특수성이 통일되어 개별성으로 지향되는 과정으로 개념화하는데, 이는 부처나 그리스도라는 씨앗이 중생 즉 인간에 내재한 채 전개해서 개별적인 그 나름의 인격이 되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남기호의 책에는 이백년도 더 전인 그 옛날 헤겔이 이러한 개념을 만드는 과정에서 겪은 일, 즉 왕권과 그 밑에 활동하는 종교성의 감시와 의혹의 눈초리를 피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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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주도세력의 유교적 엘리트의식과 촛불대항쟁의 수평적 연대의식을 대비할 수 있다면, 전자가 유교 전통의 비민주적 잔재에 해당하고 후자는 동학으로 매개된 유교적 요소의 긍정적 위력으로 보는 시각도 가능하겠습니다.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란 꾸준히 투쟁해서 획득해야 하는 가치였다는 점, 그런 투쟁의 역사가 낳은 강렬한 주체성 등이 개벽의 사상사와 연결되는 지점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한편으로 촛불대항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 꼭 언급해야하는 것이 뉴미디어입니다. 촛불혁명은 미디어 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나라 전체가 식민화되고 제국주의 침탈을 심각하게 겪었던 일제강점기 당시 사람들의 상실감은 엄청났을 겁니다. 중국 역시 국권에 대한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나라 전체가 넘어가지는 않았거든요. 한국인의 국권과 자아정체성이 파괴된 경험이 더 심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주적 자아, 대동(大同)의 ‘나’에 대한 갈망이 강해졌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는 민주화라는 정치체제의 전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민주적 삶의 양식’을 향한 일반 시민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 속에서 발견되고 경험되는데, 이때 개벽이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시민적 화두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죠.

김지하의 삶에 대해 우리가 던지는 첫번째 질문은 어쩌다 그가 투사의 길로 들어서게 됐나 하는 것인데, 그는 자기 ‘행동’이 어떤 조직이나 이념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의 필연성에 따른 개인적 열정의 산물이었다고 대답한다.(『회고록 2』 341면) 즉, "언제나 조직 밖의 활동가"(같은 책 42면)라는 자의식이 그를 따라다녔다. 심지어 그는 역사적 사건의 한복판에 서 있는 순간에도 "역사와는 반대되면서, 그럼에도 역사로 돌아가는 (…) 내면적 카오스의 생성의 시간"을 막연하지만 생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중요한 사실은 김지하 시의 출발점에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땅’이자 ‘반란과 형벌의 고장’으로서의 고향 전라도에 대한 운명적인 연대가 깊게 깔려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목격했던 좌우대립의 참혹함뿐만 아니라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일본제국 군대에 의한 동학군 학살과 남한대토벌의 역사도 그에게는 무심할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 "나의 영적 혈통의 핵심에 있는 동학의 기억은 단순히 어렸을 때의 집안의 전설이 아니라 스무살이 넘은 나에게 하나의 살아 있는 현실"(같은 책 387면)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근본적인 것은 양자의 생생하고도 유기적인 결합, 즉 박제품 상태의 판소리 형식을 현실비판의 살아 있는 무기로 힘차게 살려낸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김지하 고유의 진정한 성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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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책은 경제에 충격을 야기한다. 원래의 상태에서 새로운 정상상태로 안착해야 성과를 판단할 수 있고, 그 과정에는 다양한 부작용과 의도에 반하는 교란도 일어날 수 있다. 이런 부작용을 사전에 감지하거나 혹은 사후에라도 보완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이때도 객관적 자료가 보여주는 사실을 평가하면서 그것이 조정 과정 중에 발생하는 부작용인지 아니면 정책의 기본 방향 자체의 문제점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대표적 언론매체들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한 채 후자의 결론으로 비약하는 수준 낮은 비판을 주도했다.

정부의 경제정책을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글로벌 자본주의체제하에서 한 나라의 정책이 만들어낸 결과와 글로벌 경제의 거대한 흐름이 만들어낸 결과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정책과 성과의 시차까지 고려해야 한다.

지난 5년간 한국경제의 성과를 평가하려면, 두가지 기준에 대한 고려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는 글로벌 자본주의하의 여건을 반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선진국들과 한국의 성과를 비교하는 것이다.

2017년 극한으로 치달았던 북핵 위기와 한반도 군사적 긴장, 2018년 미중 무역전쟁과 세계무역의 침체, 2019년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에 대한 일본정부의 수출 제한조치와 한일 경제전쟁, 2020년부터 현재까지 지속된 코로나19 팬데믹과 세계 경제위기 등 전쟁·질병·경제 삼중 위기가 이어진 5년이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한국경제는 다른 선진국과 견주어 건실한 행보를 이어왔다는 것이 OECD·IMF·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의 판단이다. 대표적 경제지표인 국가신용등급, GDP 성장률과 일인당 GDP, 고용률 등의 자료가 이런 판단을 뒷받침하고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기초연금 인상, 근로장려금 확대, 아동수당 도입 등 정부의 재분배 정책에 따른 소득분배 개선 역시 눈에 띈다. 처분가능소득을 기준으로 주요 지표를 살펴보면 소득불평등과 양극화 문제가 크게 완화됐다.

윤석열정부의 「새정부 경제정책방향」에는 두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선 막연하고 비현실적이며 합리적이지도 않은 경제관에 의존하는 점이다. 있는 자들을 위한 세금 경감과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는 낙수효과는커녕 강자들만의 힘의 질서를 강화하고 양극화와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한다.
20) 두번째 심각한 문제는 지금처럼 세계경제의 전망이 어둡고 불확실성이 높은 위기 국면에서 이런 낡고 허술한 틀만 가지고 대처하겠다는 안이한 자세에 있다.

성장지상주의는 아직도 한국정치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저개발국으로서 빠른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경제성장이 필수적이었던 역사적 경험이 여전히 성장지상주의가 공감을 얻는 한 이유일 것이다. 그렇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후진적 정실 자본주의와 불투명한 구체제 속에서 경제적 잉여를 독점하는 기득권세력과 그에 영합하는 언론·정치·공권력 집단에 있다.

성장지상주의를 폐기하고 구조개혁에 성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성장정책이라는 것이 OECD·IMF·세계은행 등의 포용적 성장 전략이 강조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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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사이드는 더이상 ‘침묵의 범죄’가 아니다. 남반구 국가의 숲과 산, 강과 바다, 광산 등 곳곳에서 지뢰가 터지듯 점점 요란스럽게 퍼져가는 에코사이드는 오히려 노골적 범죄에 가깝다. 토착민 축출은 물론, 아마존에서 지난 십수년간 살해된 활동가들이 300명이 넘는다는 사실도 놀랍다(138면). 남반구의 환경운동은 목숨을 거는 일이며, 적의 총구 앞에 노출된 전쟁터의 병사가 되는 일이다. 생태학살 돈벌이에 나선 초국적 포식자들이 방해가 되면 무엇이든 제거 대상으로 겨냥하는 것이 에코사이드의 참혹한 정체다.

1944년 법학자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이 만든 신조어 ‘제노사이드’ 역시 초기에는 집단학살, 홀로코스트 등에 초점을 두어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했지만, 근래에는 문화·환경의 파괴 등 어떤 집단의 통합적 정체성이 해체되는 ‘사회적 죽음’으로 확장되어 쓰인다. 세계 제노사이드 연구자들은 2021년 ‘기후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선언’을 통해 "에코사이드와 제노사이드가 얽히면서 인간과 지구행성에 가하는 복합적 폭력을 직시"(118면)하라고 강조했다. ‘생태학살’과 ‘집단학살’의 명백한 인과성에 대한 주장은 기후·환경운동의 논리와 실천에 의미있는 영향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학살의 연계야말로 이 책이 담은 가장 독보적인 통찰이기도 하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산수화에는 화가 및 그림 주문자의 특정한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산수화에는 이러한 의도와 관련된 당시의 문화적 코드가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각각의 역사적 시기마다 그려진 산수화는 제작 당시에 정치·문화 권력을 쥔 인물들에 의해 산수가 어떻게 인식되고 평가되었으며 재해석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당시의 문화적 코드가 반영된 산수화는 사람들의 산수 인식을 변화시키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산수화가 세계를 다시 만든 것이다.

1960년대 세계문학계에 급부상한 ‘라틴아메리카 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까르뻰띠에르는 중남미문학의 미학을 ‘경이로운 현실’과 ‘바로크’로 규정지으며 이를 자신의 작품 속에 구현해 중남미소설의 토대를 이뤘다. 그의 대표작 『잃어버린 발자취』(Los pasos perdidos, 1953)가 올해 출간된 것은 작품과 작가의 문학사적 위치를 고려할 때 뒤늦은 감이 있지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궁극적으로 도올은 수운의 사유를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서양의 초월적 신관과 실체론적 사고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사유,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이려고 한다.

수운의 사유에는 항상 초월과 내재, 개체와 전체, 신비와 이성, 인격성과 자연성, 인과성과 초인과성, 아(我)와 무아(無我), 불연과 기연, 인성과 신성, 유위와 무위, 이 모든 대립적 관계가 생성적 관계로 혼융되어 있다. 또 서양의 주관과 객관의 설정이 사라진다. "주관은 나만의 주관일 수 없다. (…) 수억만 개의 주관이 저마다의 세계, 저마다의 시공간을 구성하고 있"(34면)다. 도올은 동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재적 사고를 완벽히 전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 언어의 궤도를 일탈하여 신생로를 개척해야 하는데, 이때 가장 유용한 문헌이 바로 「용담유사」라는 것이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이른바 ‘386세대의 독식’과 그 때문에 ‘미래를 박탈당하는 청년세대’라는 구도를 생산해온 담론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세대 간의 체계적인 불평등이 있어 마치 386세대가 ‘양보’를 해야만 많은 사회적 병폐가 해소될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세대 선정주의’에 불과하다. 그 선정적인 허구성은 저자가 인용하는 조사결과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의 34세 이하 청년들 사이에서 386이나 586이라는 용어 자체를 잘 모른다고 대답한 사람이 44%인데, 그러면서도 ‘386세대가 한국사회의 기득권 세력이다’라는 문항에 80%가 동의했다고 한다(133면). 이는 확실히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강간은 여성의 몸에서 벌이는 전쟁이다. 성은 그 어떤 물리적 화학적 무기보다 값싸고 효율적인 파괴 무기라고, 피해자와 조력자와 관찰자 모두가 잘라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작품이라는 객체야말로 이러한 특징, 즉 본질을 파악하려는 우리의 노력으로는 결코 장악할 수도 닿을 수도 없는 잉여물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어야 한다. 강조컨대 평평한 존재론에 의하면 물, 공기, 새, 숲, 고양이, 인간 등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실재이지 외부의 지각에 의해 구성된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서로에게서 공평하게 물러나 있고 서로 간에 포착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자율성은 "자신이 맺은 관계들과는 별개의 실재를 갖춘 무언가"(139면)를 환기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본질을 명료하게 포착하고 진술하는 것과 예술은 거리가 멀다.

『예술과 객체』는 20세기 후반 철학의 주된 흐름을 대변해온 생성·사건 철학과 거리를 두고 포스트모던 예술 경향에서도 물러서며 존재(being)의 철학 쪽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예를 들어 그가 반형식주의 등 비평이론을 비판할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풍경은 이런 것이다. 십수년 전 한국에서 후기식민자본주의의 살풍경을 담은 영화(「괴물」)가 천이백만 관객을 동원한 다음 해 노골적 신자유주의 정권이 들어섰을 때 영화평론가들은 그 심상치 않은 어긋남을 불길하게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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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계급을 세분화하고 이들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반(反)자본주의적 운동을 잠재워왔다. 가령 "철도 파업에 수험생들 ‘발 동동’"(최지인 「제대로 살고 있음」)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철도 파업이 무엇에 저항하는지는 가린 채 그것이 노동자들과 무관해 보이는 이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에 집중하게 하는 방식이다. "마르크스는 시간이 흐르면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균일한 존재 조건을 공유"하게 되며 "자본주의의 계급 구조가 점차 단순"해질 것이라 예상했고, 따라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에 맞설 응집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예측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비록 자기 노동력을 판매하는 임금소득자로서 노동계급이 폭넓게 정의되고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실제 노동자들의 경험은 대단히 파편적이기 때문에 공통된 계급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계급투쟁’을 보다 넓은 의미로 재정의하여 자본주의와 맞서기 위해 필요한 세력을 연합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하자고 주장한다. 계급운동이 특수한 노동자집단의 경제적 이익만을 대변하는 개별적인 투쟁으로 치부될 때, 자본주의에 맞서는 일에 다수가 동참하기는 어려워진다.

고봉준 역시 "지금 한국시의 주력으로 평가되는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분노’의 감정이 표면에 드러나는 장면을 찾기" 어려워진 사정이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달라진 주체화 방식, 즉 주체성의 위축에서 기인한다고 해석한다.

마크 피셔(Mark Fisher)는 지금의 자본주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든다. 이는 자본주의가 "문화의 생산뿐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규제도 조건 지으며, 나아가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까지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자본주의는 선택 가능한 체제 중 하나가 아니라 대안 없는 유일무이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향해 부정적 정서를 표출하는 작업은 어떤 감응도 창출해내기 어렵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극심한 불평등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도리어 그것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질서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향한 직설적인 비판이 오히려 자본주의는 공고하며, 혁명은 무모하고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강화하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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