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 부여한 삶의 질서와 패턴은 기존의 질서와 얽히고 겹친다. 예컨대 같은 감염자라 하더라도 그의 국적, 인종, 종교, 섹슈얼리티 등에 따라 낙인과 혐오의 정도가 달라진다. 감염병이 개인을 관리하고 재배열하는 질서는 기존의 차별적 권력과 중층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방역 당국이 감염자에게 번호를 매기고 그들의 동선을 시간순으로 공개할 때 감염자는 바이러스의 인간화된 표상이 된다. 순차적으로 배열된 정보는 마치 바이러스 또한 순차적으로 이동하는 듯한 착시를 주고, 이 착시는 관리와 통제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로, 불충분한 정보에 대한 불안으로, 감염자에 대한 혐오로 연쇄된다. 그리고 이 연쇄 속에서 질병에 대한 두려움은 혐오의 대상이 되는 데 대한, 지극히 사적인 삶이 공개되는 데 대한 두려움으로 쉽게 도착(倒錯)된다.

면역은 근본적으로 자기(self)와 비자기(nonself)의 구분을 전제한다. 따라서 자기동일성을 구축하고 타자성을 변별·배제하는 면역 개념은 인식론적·정치철학적 문제와 유비적으로 이해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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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1-18 1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로나로 인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고 많은 것이 달라지기도 했지요.
미용실에 갔더니 원장님이 이제 퇴근을 저녁 6시쯤 한다고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문을 일찍 닫았던 게 습관이 되었다고 해요.
코로나가 끝나도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한 글이 생각났어요. 줌 수업, 이라는 것도 코로나로 인해 생긴건데 요즘 많이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시대가 끝났는데도 말이죠. 편리한 점을 맛보았기 때문이죠.
창작과 비평, 오랜만에 봅니다. 저는 이번에 트렌드 코리아 2024와 녹색평론 겨울호를 샀어요. 읽을 만하더군요.^^

겨울호랑이 2024-01-19 09:52   좋아요 0 | URL
정말 코로나 이후 우리의 삶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그토록 바뀌지 않을 것 같았던 회사의 회식 문화도 바뀌는 것을 보면요. 물론 그전부터 세대 변화로 내용이 바뀌기는 했지만, 회식 자체가 드물어진 것은 코로나의 영향이 참 크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큰 변화가 가져온 좋은 변화, 나쁜 변화 모두에 잘 적응해 가야겠지요. 변화가 일상이 된 이후 또 어떤 새로운 파도가 밀려올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런 변화를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는 책이 트랜드 코리아 2024 같아요. 페크님 새해에도 책과 함께 좋은 시간 보내시고, 항상 감사합니다! ^^:)
 

세계와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오판은 미국이 국가나 집단의 분노, 상실, 충동을 이해하지 못한 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즉 개발도상국들은 특히 팬데믹을 거치면서 이면계약으로 백신을 독차지하고 기후위기에 약속한 자금을 국제기구에 기부하지 않는 북반부 국가의 리더 미국의 규칙을 더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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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1-02 0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가 오고 이제 이틀째네요 2024년에 하고 싶은 거 즐겁게 하시고 늘 건강 잘 챙기세요


희선

겨울호랑이 2024-01-02 09:23   좋아요 1 | URL
희선님 항상 감사합니다. 희선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원하시는 바 다 이루는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
 

수운의 개벽사상은 시운(時運)에 따른 말세(종말)에 대한 적시가 아니었다. ‘오심즉여심’으로서의 시천주(侍天主)를 자각했기에 생각 틀 자체가 달라지는 사건이었다. 시천주란 천주이자 지극한 기운〔至氣〕을 ‘님〔主〕’으로 모신 인간, ‘내 마음이 그 마음이 된’ 개념이다. 따라서 수운의 하느님 체험이 중요하다.

종교체험에서 비롯한 ‘다시개벽’은 일상에서 사람을 한울님처럼 대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13으로 이어진다. 사람뿐 아니라 사물 또한 그리 공경하라고 했다. 사물을 공경하고〔敬物, 경물〕, 사람을 높게 여기는 일〔敬人, 경인〕이 결국 하늘을 섬기는 일〔敬天, 경천〕인 까닭이다.

개벽사상의 백미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의 개교표어 속에 있다. 동양정신〔道〕으로 서구 물질세계를 홀대하는 척사의 변형, 즉 동도서기(東道西器)와는 차원 다른 개벽사상의 표현이다. 서구의 근대성을 인정하되 동시에 정신세계의 구축이라는 이중과제를 내포했다.

아래 인용문에서 서구 신학과 변별된 개벽사상으로서 원(圓)기독교의 일면을 살필 수 있다. "신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거나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거나 우리 밑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은선이 말한 대로 신학(神學)에서 신학(信學)으로의 개벽적 전회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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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정부 출범 1년 만에 경제, 남북관계, 외교, 그리고 당연히 민주주의 위기가 이미 전면화되고 있어요. 작년부터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이 계속 하락했을 뿐 아니라 민생 부문 예산을 삭감하는 방식으로 세수 부족에 대응하고 있어 국민의 어려움이 더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외교적으로도 대미 편향적으로 일관하여 한국의 외교 발전 공간을 축소시키고, 한미일 군사협력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면서 반국가세력, 공산전체주의를 운운하는데 민주주의가 안녕할 리 없겠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글로벌 패권체제라든지 국제경제, 시장 시스템 자체는 앞으로 기후패권으로 옮겨갈 겁니다. 이러한 추세는 벌써 10년, 15년 전부터 이어져왔는데도 대한민국은 아무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제 표현대로 하자면 ‘전망의 부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빨리 달리려고만 하지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에 대한 전망이 없어요. 이는 단순히 윤석열정부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경제정책이 제대로 수립되려면 노동정책이 그와 동등한 수준에서 함께 맞물려가야 합니다. 노동자들이나 국민들의 삶 자체가 시장임금에 매몰되고 사회적 안전망이나 사회임금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결국 노사간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거든요.

OECD 국가 중 극우 정치세력이 집권 중심부로 쑥 들어온 나라는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정도입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는 아무런 바리케이드 없이 정권의 중심으로 극우세력이 들어왔는데, 원인을 진단하고 대안을 만들지 않으면 이런 상황이 또 반복될 수 있는 거죠.

지금 민주당은 ‘윤석열정부를 응징합시다’와 ‘총선에서 승리하겠습니다’라는 두 구호만을 가지고 대응하고 있어요. 현재까지는 과거 박근혜정부 탄핵 이후 생성 합의가 없었던 시기의 경로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나라는 2010년대에 이르러 민주주의지수가 굉장히 높아진 반면 출산율, 성평등 지수, 자살률 같은 사회적 지속 가능성과 관련된 지수들은 곤두박질쳐왔습니다. 한국에 이런 문제가 지속되는 이유는 전쟁정치가 계속되기 때문이에요. 이념이 다른 세력은 절멸시켜야 한다는 식의 정치형태이기 때문에 연합을 만들거나 합의에 이르지 못해왔다는 거죠.

유권자들이 선거 때 찍을 수 있는 대안 집합을 구성하는 것은 정당들의 역할이란 말이에요. 그 대안의 집합을 구성하는 방법에 대해 시민사회 쪽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선거법 개정이나 위성정당 문제도 정치권에 모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개입할 여지가 있어야 하고요

한국사회 자체를 완전히 재건해야 하는 상황이죠. 이 재건을 어느 정도 규모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은 아무것도 없어요. 엄청난 지구적 변화나 생태계적 전환 앞에서 모든 인류의 생존을 걸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기존 시스템을 어떻게 해체하고 새로 만들어낼 것인가. 이제까지 한번도 당면해보지 못한 가장 거대한 수준의 담론 논쟁을 해야 할 겁니다.

살림은 사람과 지구를 함께 살리자는 것이니 기후위기 의제와 다른 사회개혁의 연결고리가 되고, 돌봄은 페미니즘을 사회개혁과 연결하는 의제입니다. 살림과 돌봄을 모두 연결하여 복합위기의 해결책으로 제시할 수도 있고요. 한반도평화 문제에 관해서는 왜 민주당이 반국가세력으로 몰리면서도 평화 이니셔티브를 계속 외면하고 뭉개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구호를 내걸고 진보정당들에 삼고초려 하며 정책연합이든 정치연합이든 호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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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이와 돌봄을 받는 이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상호의존성에 근거한 돌봄은 타자를 위한 돌봄뿐 아니라 자기돌봄(self-care)도 요청한다. 타자를 돌본다는 것은 곧 세계 네트워크에서의 자기 위치와 역량을 질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자기돌봄 역시 타자를 위한 돌봄에 연계되거나 그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돌봄의 자원은 어떻게 분배되고, 돌봄을 받을 자격은 누가 결정하며, 그 인프라를 구축하고 유지·관리하는 이는 누구인가? 우리는 끈질기게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업화된 디지털 장치가 돌봄 자원을 사유화하는 문제 외에도, 주지하다시피 돌봄노동은 가족 같은 사적 영역 내에서 여전히 비가시화·저평가되어 여성, 노인, 이주노동자 같은 집단을 착취하거나, 호혜적인 정치적 돌봄의 성격을 잃고 시혜적인(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자선으로 쉽게 대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돌봄은 실존적 돌봄으로서, 죽음이 있으리라는 것을 앞서 보고 유한한 시간 속에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되돌아보고 질문하며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존재는 죽음이라는 비존재 및 시간의 유한성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토대에 대한 불확실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 돌봄들은 위계적이거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종속되어 있다기보다는 협업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쿠라, 유피테르, 텔루스를 중재하고 권한을 나누었던 것이 시간의 신인 사투르누스였음을 상기해보자. 시간은 단선적이지 않으며 여러 돌봄의 시간은 서로 얽히고 의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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