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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와 예니가 우려했듯 빈곤을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1850년 11월 19일, 소호에 있는 비위생적이고 얼어붙은 누추한 집에서 둘째 아들 헨리 가이가 한 살도 채 안 된 나이에 폐렴으로 죽고 말았다. 이 부부가 처음으로 잃은 자식이다. 이후 그 거리에서 마르크스는 다른 아이들도 잃게 된다._ 자크 아탈리, <마르크스 평전>, p260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에 대한 여러 평전이 있지만, 그의 삶을 바라봄에 있어 공통적인 것은 평생 마르크스 부부를 따라다닌 지독한 가난과 자식들의 죽음이 아닐까 여겨진다. 독일, 프랑스, 영국을 떠돌며 지냈던 이들에게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 ~ 1895)란 친구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을까.


 마르크스가 걱정한 대로 물질적 형편은 얼마 안 가 힘들어졌다. 10월, 마르크스가 집세는 물론이고 아이들이 먹을 식량을 구할 돈도 곧 해산하게 될 아내의 병원비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상태였을 때 엥겔스가 나타났다. _ 자크 아탈리, <마르크스 평전>, p239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비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 궁핍을 자네에게 쏟아붓는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히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날마다 아내는 자식들과 함께 무덤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비롯되는 말할 수 없는 굴욕감 때문에 뭐라고 책망할 수도 없네." _ 자크 아탈리, <마르크스 평전>, p371


 평전에서 매해 출간되었던 그의 저술 다음 문단에는 거의 반복적으로 자녀들의 죽음 또는 손자/손녀들의 죽음과 그와 부인의 건강문제가 언급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부인이 돈을 얻기 위해 독일로 갔다는 이야기도 함께. 스스로 말하듯 '돈에 대해 책을 쓰지만, 돈을 벌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그를 괴롭힌 외적 불행을 안다면, 그가 <자본론>에서 소년/소녀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비참한 삶에 대해 많은 페이지를 할당했는지,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를 음울한 유령에 비유했는지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


 1863년 여름 내내 마르크스는 최악의 상태였다. 정다발증이 세균 감염으로 악회되어 죽을 뻔했고, 한 달 이상이나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옹, 두통, 폐질환, 간질환 등이 점점 더 빈번하게 출현했다. 그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p382)... 1881년 11월, 예니의 병이 악화되었다. 간염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마르크스 역시 너무 아파(늑막염이 겹친 복막염) 침대에 누워 지냈고, 아내 방으로 가기 위해 하루에 딱 한 번만 나왔다. 라파르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니가 심하게 앓고 있었으므로 그는 학문 작업을 정상적으로 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는 아내의 고통 때문에 끔찍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수학에 몰두하는 방법으로만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나는 파리에서 온 세 자식들과 두 사위, 그리고 마르크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12월 2일 죽음을 맞는다. _ 자크 아탈리, <마르크스 평전>, p583

 

 영화 <친구>에서는 준석(유오성)이 상택(서태화)에게 자신이 일탈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이 처음 가출했을 때 주변에서 아무도 뭐라 말하지 않았다고. 만약, 그때 누군가 자신에게 뭐라 해서 잡아주었다면 지금처럼 비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크스와 독일 귀족 출신이었던 부인 예나가 자신들의 삶이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사회 평등에 관한 확고한 그들의 신념을 접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궁핍한 노동자들의 삶이 보다 살만한 것이었다면, 20 세기를 흔들었던 열렬한 지지를 얻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대 사상가의 삶 대신 조금은 평범한 월급쟁이의 삶이 마르크스에게 주어졌다면, 그가 자신의 펜을 누그러뜨려 주말에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컬럼리스트의 삶에 만족하며 살았을지도 모를일이다.


 마르크스는 다시 강도 높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집필작업이 드디어 끝을 맺었다. 이제 돈을 벌 수 있고, 일요일이면 아이들에게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에드가에게 쏟은 열정을 이제 세 살 된 엘레아노르에게 옮겼다. _ 자크 아탈리, <마르크스 평전>, p338


 마르크스의 가난과 질병, 극심한 불행 속에서 태어난 공산주의의 성전 <자본론>. 많은 이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악(惡)으로 바라보며 그의 사상에 반대하여 반공(反共)을 외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반공은 이데올로기 다툼이 아니라, 더는 마르크스와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이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분명한 것은 마르크스의 삶을 알고난 후 <자본론>을 읽는다면, 이 책이 혁명서가 아니라 살고자 하는 처절한 외침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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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일 밤 백선엽 육군 예비역 대장이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기사출처] '일제에 항거한 의병이 국군의 뿌리였다'... 국방부 재평가 https://www.yna.co.kr/view/AKR20190221180200503 


 백선엽 장군은 6.25 전쟁 당시 혁혁한 무공을 세운 장군으로 기록되었지만, 동시에 만주국 소속 군인으로 독립전쟁사에 오점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백선엽 개인의 죽음에 대해서 인간적인 애도의 뜻을 표한다. 그렇지만, 역사적 인물로서 백선엽에 대한 평가는 다른 문제다. 한국군의 전통이 만주국군이 아니라 의병과 광복군에서 찾는다는 것이 국방부의 공식적인 평가라면 이에 맞는 조치가 이뤄져야 하는것이 아닐런지...  <친일인명사전>에서 백선엽 관련 항목을 옮겨본다.

 

백선엽(白善燁, 1920 ~ 2020) 만주국군 중위, 간도특설대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펑텐(奉天)에 세운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1940년 3월 입학해서 1942년 12월에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佳木斯) 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국군 중위였다.


[사진] 간도특설대 사진(출처 : https://www.nocutnews.co.kr/news/4000118)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에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 성장 이범익(李範益)의 건의를 받아들여 엔지현(延吉縣) 특무기관장 겸 젠다오 지구 고문인 오고에(小越信雄) 중좌가 주도해서 만든 조선인 특수부대다.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과 조선인 사관 9명을 먼저 선발하여 옌지현 명월구에서 같은 해 12월 15일 제1기 지원병 입대식을 열었다.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9월초 고향으로 돌아가 평안남도 도인민위원회 치안대장을 지냈으며 평양에 있던 조만식의 비서를 잠시 지냈다. 1945년 12월 간도특설대 출신의 김백일, 최남근 등과 함께 월남했다. 같은 달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해서 1946년 2월 제1기로 졸업한 뒤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대령)으로 재직하면서, 좌익을 제거하기 위한 숙군(肅軍)작업을 지휘했다. 1948년 11월, 박정희 소령이 '여순사건'이후 남로당 활동 혐의로 체포되자 구명에 앞장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1949년 7월 제5사단장으로 부임했고, 1950년 4월부터 제1사단장으로 복무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7월 준장으로 진급했고, 1951년 4월 소장으로 진급해 제1군단장을 맡았다. 1952년 1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지냈다.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1959년 2월부터 1960년 5월까지 연합참모본부 의장을 지내고 5월말 예편했다.


 1960년 7월 주중화민국 대사, 1961년 7월 주프랑스 대사, 1965년 7월 주캐나다 대사를 거쳐 1969년 10월부터 1971년 1월까지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1973년 4월부터 1980년 3월까지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 2008년 5월 대한민국 건국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윈회 고문에 위촉됐다. <친일인명사전> 中


 여기에 한 줄 보탠다.  2020년 7월 10일 사망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인을 가슴이 아닌 머리에 묻으며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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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3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13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난 빈민들은 군 복무에도 열의를 보이지 않았고 자녀 양육도 소홀히 했다. 그리하여 곧 전 이탈리아에서 자유민들의 수가 눈에 띄게 감소하고 온 나라가 외국 노예들의 수용소로 가득 찼으니, 부자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자유민들을 쫓아내고 외국 노예들을 시켜 경작하게 했던 것이다.(p416)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티베리우스 그락쿠스 전> 中


  약 120여년 간에 걸쳐 3차례 일어났던 포에니 전쟁(BC 264 ~ BC 146)과 뒤이어 그리스 지역을 제국의 지배 하에 둔 로마는 바야흐로 전성기를 향해 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잦은 전쟁으로 농민들은 자신들의 농경지를 돌보지 못하고 전장으로 끌려가며,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붕괴하게 된다. 반면, 부자들은 피폐해진 빈민들의 농경지를 싼 값에 인수하고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며 빈익빈 부익부(貧益貧富益富) 현상은 심화되었다. 로마의 모순이 드러나러 했던 이 시기에 등장했던 인물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BC 163 ~ BC 132)와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 BC 154 ~ BC 121) 형제다.


[사진] Tiberius and Gaius Gracchus( 출처 : https://www.pinterest.com.au/pin/495607133970630353/)


 법을 어긴 탓에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고 불법적으로 점유한 토지를 돌려주고 벌금까지 물어야 하는 자들에게 티베리우스는, 보상금을 받고 불법 취득물들을 포기하되 그것들을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넘겨주기만을 요구했던 것이다.(p419)... 이처럼 온건한 개혁인데도 민중은 미래에 불의가 없다는 보장만 있다면 과거는 잊으려 했다. 그러나 탐욕에 이끌려 법을 미워하고 분노와 당파심에서 법의 입안자를 증오하게 된 부유한 지주들은 티베리우스의 토지 재분배 법안과 급진적인 개혁 법안은 사실은 정체(政體)를 전복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민중이 개혁에 들을 돌리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p419)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티베리우스 그락쿠스 전> 中


 부동산과 이로 인한 부의 양극화가 극심한 오늘날의 우리처럼, 로마에서도 부동산 문제가 극심했던 것 같다. 호민관으로 선출된 티베리우스는 개혁법안을 제출하면서 이러한 병폐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처럼 기득권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좌초된 것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이러한 시도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는 명예롭고 의로운 일을 위해 싸우고 있었고, 그보다 저급한 일이라도 명예롭게 만들 만한 웅변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이 운집한 가운데 연단에 서서 빈민들을 위해 연설할 때마다 그는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었다.(p419)... 티베리우스가 고귀한 정신과 순수한 감정에서 우러나온 말로 로마 민중 사이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면 이를 감당할 정적은 아무도 없었다.(p420)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티베리우스 그락쿠스 전> 中


 특히, 형 티베리우스는 대의(大義)를 위해 싸우고 있었기에 언제나 당당했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그의 말과 행동은 민중들을 움직이고, 사랑받을 수 있었다. 이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모습에서 며칠 전 세상을 떠난 박원순 서울시장을 떠올린다다. 분단의 시대에 부의 양극화로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한 박시장와 공화국의 전성기에 전쟁으로 토지에서 쫓겨난 민중을 돌본 티베리우스 그락쿠스. 좋은 배경을 가지고도 자신보다 낮은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는 공통점도 가진 이들에 대한 민중의 느낌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적어도 내 감정은 그렇다.


 민중은 두 형제의 입상을 제작해 눈에 잘 띄는 곳에 세우고 그들이 살해된 장소들을 축성한 다음, 해마다 철철이 새로 나온 과일의 맏물을 그곳에 갖다 바쳤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신들의 신전을 찾는 것처럼 날마다 제물을 바치며 두 형제의 입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p460)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가이유스 그락쿠스 전> 中


 플루타르코스(Ploutarchos, AD 46 ~ 120)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실패의 원인으로  이들 형제의 개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개인적으로 박시장의 죽음에 대한 감정은 슬픔과 함께 개혁의 시대를 이어갈 재목 중 하나가 사라졌다는 이기적인 욕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슬픔과 아쉬움 교차되는 감정으로 휴일 하루를 보낸다...


 적 앞에서 용감하고, 아랫사람을 공정하게 다루고,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쾌락을 억제하는데서는 두 사람이 다르지 않았다. 티베리우스는 아무보다 아홉 살이나 많았다. 그래서 그들의 정치 활동은 시기적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이는 그들의 계획이 실패하게 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동시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 자신들의 역량을 하나로 모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역량을 하나로 모았더라면 이를 감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p411)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티베리우스 그락쿠스 전> 中


[사진] 고 박원순 시장 빈소 영정(출처 : 민중의 소리)



PS. 마침, 최근 출간된 <몸젠의 로마사 5>는  카르타고 복속을 다룬 <몸젠의 로마사 3>과 그리스 제국들을 제압한 <몸젠의 로마사 4>에 이어 그라쿠스 형제와 드루수스의 개혁이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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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꼬꼬(Rococo)는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의 한 극단적인 형태를 발전시킨다. 로꼬꼬의 '예술을 위한 예술'은 어떤 점에서 19세기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 순수하고 본원적인데, 그것은 예술의 품속에서 휴식을 취하려는 경박하고 피곤하고 수동적인 사회에서 저절로 우러난 자연스러운 태도이기 때문이다. 로꼬꼬는 미의 원리가 무제한의 지배권을 가지는 사교문화의 마지막 국면을, 또 아름답다는 것과 예술적이라는 것이 동의어로 통하는 최후의 양식을 대변한다.(p68)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3> 中 


 아르놀트 하우저 (Arnold Hauser, 1892 ~ 1978)가 내린 로코코에 대한 표현 - 예술을 위한 예술과 사교문화 - 에 따르자면,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 ~ 1793)를 로코코의 여왕으로 표현한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1881 ~ 1942)의 평가는 적절하다 생각된다.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Marie Antoinette>에서 로코코 문화를 정점으로 이끈 그녀의 삶을  일반적으로 알려진 악녀(惡女)의 이미지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보여준다.


 로코코, 이 지나치게 세련되고 섬세를 극대화한 고대적 문화의 개화(開化), 이 한가로운 손과 도락을 즐기는 유약한 정신의 세기는 몰락하기 직전에 하나의인물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세기는 왕비의 모습 속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될 수 있는 세기였고, 이 로코코의 여왕으로서 이상적인 여자가 바로 마리 앙투 아네트였다. 근심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근심 없고, 낭비가들 중에서도 가장 낭비가 심하고, 멋지고 애교있는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스러운 멋쟁이이며 애교 덩어리였다.(p122)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 中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슈테판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죄과를 두 가지로 나누어 평가한다. 용서 받을 수 있는 죄과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과. 츠바이크는 역사 속 인물의 삶에 대한 평가가 한 개인과 역사 속 지위에 따라 다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림] 마리 앙투아네트(출처 : 위키백과)


 너무나도 경솔하게 역사의 엄청나게 거대한 사명 앞에 나선 것, 유약한 마음으로 가장 격렬한 세기의 논쟁 속에 휘말려들어간 것은 그녀의 죄과, 부인할 수 없는 죄과이다. 그러나 용서 받을 수 있는 죄과이다. 보다 강한 성격이라고 하더라도 거의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시험이었기 때문이다.(p120)... 이러한 부박한 인생관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의 죄과이지만 동시에 그녀가 산 시대 전체의 죄과이기도 하다. 바로 그 시대정신에 완전히 휩쓸려들어감으로써 마리 앙투아네트는 전형적인 18세기의 대표자가 된 것이다.(p122)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 中


 용서 받을 수 있는 죄가가 준비없이 나약하게 역사의 흐름에 선 것이라면, <마리 앙투아네트 : 왕비의 비밀 일기 Marie-Antoinette: Carnet secret d'une reine >에 담긴 다음의 대목은 용서 받을 수 있는 죄가의 한 표현이 될까.


  1775년 6월 25일, 베르사유. 무엇보다도  루이와  프랑스에 후계자를 안겨주어야만 나의 지위가 확고해진다는 것을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편은 계속해서 침실에 들어오지 않고 나는 그이가 남편으로서 의무를 다해주기를 절망적으로 기다리고 있다. 갑자기 부담을 안겨주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다정하고 매력적으로 남편을 대하고 있지만, 하루하루 세월이 흐르니 심리적인 압박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 : 왕비의 비밀일기> 中


 아내로서, 다른 한 편으로서 왕비로서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는 한 인간의 나약함을 츠바이크는 용서할 수 있는 죄가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는 무엇일까. 그것은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잘못이 아닐까. 결국, 츠바이크의 평가에 따르자면 인간적인 부족함은 용서받을 수 있는 죄(罪)이지만, 역사에 선 공인(公人)의 부족함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는 듯하다. 


 1789년 6월 7일, 베르사유. 루이와 나는  날이 갈수록  힘드는 새로운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상황이 쉴새 없이 나빠지고 있으니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 왕에게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왕비인 나의 지지가  필요하다. 전국에 기근이 창궐하고, 삼부회 의원들의 영향을 받은 백성은 점점 더 과격해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당장라도 폭동이 일어날 듯한 이 위태로운 분위기를 견딜 수 없다. 남편은 프랑스의 국왕이고, 그것은 신의 의지다. 그의 백성 중  누구도 왕을 대신해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마리 앙투아네트 : 왕비의 비밀일기> 中


 1789년의 사람들은 프랑스인뿐 아니라 인간 전체를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들의 시도에는 데카르트가 자신에 앞서 사고된 모든 것을 기피했던 것과 유사한 것, 즉 불합리함과 특수성이라는 낙인이 찍힌, 그들 이전의 프랑스사에 대한 부정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사회를 근본적으로 손질해야 한다는, 문자 그대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프랑스 합리주의 철학과 결부되어 있으므로 프랑스혁명에 선행하는 것이었다.(p146)... 프랑스에서 구체제에 대한 관념에 특별한 힘이 부여하게 될 시간적 연속성의 단절에 대한 그토록 강렬한 느낌은 1789년의 사람들의 합리주의적이고 의지주의적인 급진주의와 불가분의 것이었다. 그들이 하고자 한 것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이성 위에 사회를 재창설하는 것이었다.(p147) <기억의 장소 3 : 프랑스들 1> 中


 그렇지만, 역사 속에서 한 인물의 위치를 인간적인 측면과 공적인 측면으로 완전히 분리해서 평가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한 개인의 사상이 그가 가진 사회적 위치에서 행동으로 표현되고, 역사에 발자취로 남긴다고 본다면, 이들을 분리해서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다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기를 살펴보자. 이 일기에는 고대하던 어머니가 된 마리의 기쁨이 표현되며, 우리는.이 일기를 읽으면서 마리가 (왕비로서) 큰 일을 완수했고, 수고한 자신을 위해 작은 선물을 마련한 느낌을 받는다.


[사진] Chateau de Versailles (출처 : https://www.systemair.com/hr/o-nama/reference/chateau-de-versailles-france/)


 1785년 6월 25일, 베르사유.  어머니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행복해하셨을까! 왕비의 임무를 완수한 이래 나는 드디어 나 자신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친구들과 함께 트리아농에  내 거처도  만들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배치되어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이 되었다... 심지어 거기에 너무도 매력적인 작은 마을도 만들었다. 농부 부부도 고용해서 염소와 양, 수탉과 암닭,  멋진 암소 등 진짜 농장에서 볼 수 있는 가축도 모두 기르게 했다!! 이런 전원의 삶이, 짐승 소리와  꽃피는 자연이  나를 감동하게 한다. 궁정의 예법이나 위선 따위와 멀리 떨어진 이곳의 삶은 무척 평화롭다. <마리 앙투아네트 : 왕비의 비밀일기> 中


 그렇지만, 그녀에게 '작은 선물' 은 결코 작은 선물이 아니었다. 개인의 감수성을 위한 왕가의 과도한 지출은 프랑스 재정을 파탄으로 이끄는데 일정부분 기여를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츠바이크가 말한 용서받을 수 있는 죄과와 용서받을 수 없는 죄과의 경계는 모호하다 여겨진다. 전원의 삶을 동경하여 작은 마을을 조성한 왕과 왕비의 취향은 베르사유를 더 화려하게 물들이며 로코코 문화를 정점으로 이끌었고, 그들 자신들의 삶과 함께 사라져갔고, 그 사이 파탄난 프랑스 재정은 수많은 이들을 굶주림과 죽음으로 이끌었다. 왕과 왕비의 취향과 감정으로 인해 고통을 원치 않았던 수많은 이들의 삶도 격랑 속으로 내처졌음을 생각한다면 용서의 경계는 과연 존재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리가 얻은 명성과 그로 인해 지불해야 했던 대가를 비교해본다면 과연 개인적으로도 성공적인 삶이었을까 하는 의문도 함께 떠올리게 된다.

 

 계몽주의 말기에 신고전주의와 전(前) 낭만주의 감수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얼굴이다. 1774년에서 1789년까지 베르사유를 지배한 젊은 부부에 의해 도입된 이런 두 사조들은 베르사유를 놀랍게 변화시켰다. 고상하고 세련된 개조는 루이 16세 덕분이다. 서가, 모형선박과 전기나 증기기관 수집품들, 위대한 인물들의 조상들, 동양철학자들과 경제활동에 대한 헌정품들, 수제품 작업장 등. 다른 한편 그리스풍인 동시에 양탄자 일색으로 꾸미기 위해 계속 보수된 내실들은 왕비의 취향이다. 또한 일드프랑스의 작은 마을이 베르사유에 옮겨져 재조성된 것도 그녀의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작은 마을은 사람들의 말처럼 리본으로 장식된 가짜 초가집이 아니었다. 그곳은 시골영주의 저택에 딸린 실제 촌락에서 일하면서 명사들과 더불어 소일거리를 즐기는 생활을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농가와 젖 짜는 곳, 낚시터, 물레방아, 비둘기장 등과 함께 실제로 농경이 이루어지고 별도의 바이이(bailli)와 순찰대가 다스렸다.(p209) <기억의 장소 2 : 민족> 中


 어느 시대에서 보더라도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 되는 대신 그녀는 자기 시대의 특질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자신의 내면의 힘을 무의미하게 써버리는 동안에도 사실 하나의 의미를 실현시켰다. 즉 그녀 가운데서 18세기가 완성되고 그녀와 더불어 18세기가 끝났다.(p123)  <마리 앙투아네트 : 베르사유의 장미> 中


 용서할 수 있는 죄과와 용서할 수 없는 죄과의 문제는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잘못은 루이 16세의 잘못이기도,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귀족과 성직자들의 잘못이기도 하다. 체제의 문제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작은 곁가지에 불과하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정도는 지나친 것은 '로코코의 여왕'이라는 시대의 상징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만일 어느 시골 귀족의 부인으로 살았더라면, 같은 인성(人性)을 가졌더라도 역사에 미친 파급력을 훨씬 작았을 것이다. 물론, 역사적 사건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역사의 층위들이 교차해야 하기에 개인의 역할은 제한적이겠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기와 평전을 통해 역사적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 재판정에 서는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기준은 오늘날의 지도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더 무겁게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사마천(司馬遷, BC 145 ? ~ BC 86 ?)의 <사기열전 史記列傳>의 일부를 옮기며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몽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잘못도 없이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한참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내 죄는 실로 죽어 마땅하다. 임조에서 요동에 이르기까지 장성을 1만여 리나 쌓았다. 공사 도중에 어찌 지맥 地脈을 끊어놓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나의 죄다." 그러고는 약을 삼키고 자진했다.(p732)... 태사공은 평한다."... 진나라가 처음 제후들을 멸할 때는 천하의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못했다. 전쟁의 상흔도 채 가라앉지 않았을 때였다. 몽념은 명장으로서 이런 때에 백성의 궁핍을 구제하고 노인과 고아를 부양해 모든 백성을 안온하게 만드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강력하게 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황제의 야심에 영합해 공사를 일으켰다. 이들 형제가 죽임을 당한 것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어찌 지맥을 끊은 탓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사기열전 1 : 몽념 蒙恬열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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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머뭇거림은 내가 영원히 뉴요커들의 특징으로 여길 성격, 즉 소심함을 본능적으로 또한 즉각적으로 밀어내는 특성을 자극할 뿐이었다. 처니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차를 모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냥 한번 해봐. 그리고 즐겨봐. 이것이 그녀가 말하려는 메시지였다.(p113)

 아이가 없을 때는 이런 일로 인한 좌절감을 사소하게 넘길 수 있었지만, 풀타임으로 일하는 엄마로서 절반 동안만 곁에 있어주는 배우자를 두고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인내심이 차츰 줄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아예 바닥났다. 버락이 집에 오면, 화내는 나를 만나거나아예 못 만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는 집 안의 불이란 불은 다 끄고 부루퉁하게 잠자리에 든 뒤였다.(p273)

남편이 정치인인 탓에, 정치와 권력이 돌아가는 양상을 가까이에서 목격해왔다. 그래서 모든 선거구에서 투표자가 몇 명씩만 빠져도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이 후보자가 당선되느냐 저 후보자가 당선되느냐만이 아니라 이 가치 체계와 저 가치 체계 중 무엇이 채택되느냐가 달라진다는 걸 알았다.(p366)

여성들은 평생 그런 모욕을 겪는다. 길거리에서 듣는 성희롱, 더듬는 손길, 성폭력, 억압 행위를 통해서. 그런 일들은 우리를 상처 입힌다. 우리의 힘을 앗아간다. 어떤 상처는 간신히 눈에 보일 만큼 사소하다. 반면 어떤 상처는 거대하게 쩍 벌어져 있고, 평생 아물지 않을 흉터를 남긴다. 어느 쪽이든 상처는 누적된다. 여성들은 학교나 직장을 오갈 때도, 집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도, 종교 활동을 하러 갈 때도, 한 발 전진하려고 애쓰는 모든 순간에 그런 상처를 품고 다닌다.(p540)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이다. 인내와 수고가 둘 다 필요하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앞으로도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언제까지나 버리지 않는 것이다.(p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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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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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4: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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