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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토지 독서 챌린지를 마무리한 후 오늘 반가운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토지독서챌린지를 주관했던 토지문화재단에서 수료증과 함께 박경리 선생의 친필, 작품 등이 새겨진 여러 기념품을 받았습니다. 독서챌린지를 통해 <토지>를 부족하나마 훑어볼 수 있었던 소득과 함께 의미있는 선물도 함께 받으니 참 좋았습니다. 아쉬운 점은 사진 촬영 후 수료증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내와 딸아이 몫이 되었다는 점이... 그렇지만, 제게는 <토지>가 있으니 괜찮습니다...ㅜㅜ


 독서챌린지를 통해 <토지>를 읽는다는 것은 장점과 단점이 명확합니다. 때로는 한 곳에 머무르며 감동을 더 느끼고 싶은 지점에서도 주어진 일정에 따라 서둘러 다음으로 넘어가야 했던 부분은 아쉬웠습니다. 물론, 이러한 부분이 있어야 일정관리가 되겠지만요. 제 경우에는 <토지 8>의 월선의 죽음 부분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월선의 죽음을 뒤로 하고 다음 진도를 나갈 때 마치 용이처럼 발걸음을 떼기 힘들더군요. 


 패키지 관광과 자유배낭여행의 차이 정도라 여겨집니다. 때로는 미술관의 작품 하나에 방해받지 않고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개인여행의 장점이라면, 전체적인 도시의 인상을 느끼는 것은 패키지 관광이 더 나은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번에 독서챌린지를 마무리하면서 2기, 3기와 다른 독서챌린지 일정이 있어 공유해 봅니다. 챌린지 도중 전문가들의 해설 프로그램도 진행되기에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는 부분은 챌린지가 가진 다른 하나의 장점이라 여겨지네요. 


 <토지>를 읽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프로그램이었고 좋은 경험이었기에 이웃분들과 나누고 싶어 글을 올려봅니다.  <토지>를 읽고 싶으셨던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칩니다...


관련 페이지 : 박경리 작가의 소설, 시집, 산문집 챌린지


https://korearf.kpipa.or.kr/uss/ion/evt/EgovEventRceptRegist.do?eventId=EVENT_00000000000391&applcntId=&searchSe=01&menuNo=1002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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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5-06 2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주 의미 있는 일을 하셨군요. 좋은 경험을 하셨다고 봅니다.

겨울호랑이 2022-05-06 23:31   좋아요 2 | URL
네 페크님 말씀처럼 새롭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독서‘가 반드시 외롭게 이루어지는 책과의 대화가 아닐 수도 있다는... ^^:)

희선 2022-05-06 23: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수료증을 받다니 좋은 경험이네요 그렇게 한번 읽으셔서 좋으시겠습니다 언젠가 혼자 보실지도 모르겠네요

겨울호랑이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겨울호랑이 2022-05-06 23:39   좋아요 2 | URL
네, 혼자서 읽을 때는 일정 관리가 어려운데 독서 챌린지와 같은 프로그램을 유용하게 활용하면 전체적으로 작품을 조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는 가끔 머물고 싶은 곳에 가서 사건, 장소 또는 인물을 따라가는 것도 생각하게 됩니다.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희선님께서도 평안한 주말 보내세요! ^^:)

바람돌이 2022-05-06 23: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드디어 끝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다른 책도 아니고 토지를 끝내고 받는 거잖아요. 의미가 진짜 남다를듯.... 그동안 겨울호랑이님이 토지와 함께 생각할거리들을 많이 이야기해주셔서 저는 아 토지에서 생각해볼수 있는게 이렇게 많구나하고 생갇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문득 20대때 읽었던 토지와 지금 읽는 토지는 완전 다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구요. 어쨌든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가족분들에게 멋진 선물도 줄수 있었으니 더 좋은 독서였잖아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2-05-07 08:33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일단 독서챌린지는 마쳤지만, 읽으면서 놓치는 부분도 많이 느꼈습니다. 제 나름으로는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보려 했는데 지난 페이퍼들을 보니 제 독서의 한계도 명확했습니다. 작가나 작품 자체로도 의미있는 내용 또는 작가 삶과의 연계 등은 아예 들어가지도 못했네요... 작은 성취와 큰 과제를 부여받은 도전이라 생각합니다. 바람돌이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

파이버 2022-05-07 10: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축하드립니다. 긴 시간동안 꾸준히 달리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겨울호랑이 2022-05-07 11:42   좋아요 3 | URL
파이버님 감사합니다. 여러 번 마음만 가졌다가 겨우 일독했네요. 이제 출발선에 선 듯 합니다. 파이버님 좋은 하루 되세요! ^^:)

mini74 2022-05-07 1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꾸준히 열심히 호랑이님 글 읽은 독자로서 ㅎㅎ 너무너무 축하드립니다 ~ 선물도 예쁩니디 ~

겨울호랑이 2022-05-07 20:51   좋아요 1 | URL
미니님 부족한 글을 꾸준히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완독할 수 있었습니다. 더 깊은 생각이 배어날 수 있도록 공부하겠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
 

 한이 된다는 말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 같았다. 희망이 없는 캄캄절벽, 어디서 빛줄이 새어들어 한을 풀 새날을 기다려본단 말인가. 삶의 의지를 잃은 사람은 비단 성환할매나 박서방뿐만은 아니었다. 최서희도 지금 평사리에 내려와 있었다. 날개 찢긴 나비같이, 거미줄에 걸린 나비같이, 파닥거리지도 않았고 몸부림치지도 않았다. 조용하게 사람을 바라보았다. 만석꾼 살림의 최서희나 나룻배 뱃삯을 선뜻 내놓을 수 없는 박서방이나 눈이 멀어버린 성환할매, 살아보고 싶은 뜻을 잃은 상태는 매일반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평등했다. _ 박경리, <토지 19> , p286/532


  작년 7월부터 올렸던 <토지> 독서챌린지도 어느새 2주 후면 마무리된다. <토지 20> 마지막 권을 들어가기에 앞서 지난 독서 여정을 살펴본다. 초반부에 사라진 인물도 있었고, 도중에 등장한 인물도 많았다. 오늘의 미션인 '첫인상과 현재의 인상이 가장 많이 달라진 인물' 을 수행하려다 보니 필요한 작업이기도 했지만. 


 1권에서 철부지 어린애가 19권에서는 노인이 되어버린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인물들이 지나갔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번 미션의 TOP3는 봉선(기화), 명희, 병수로 선정했다. 그 이유를 서술하기 전 <토지 인물 사전>에서 이들의 삶을 옮겨본다.


 봉순 기화(紀花) : 두 살 아래인 서희와 친동기처럼 지낸다. 길상을 사모하나 길상의 내심을 간파하고 간도에 동행하지 않는다. 타고난 재질을 살려 소리를 배우며, 명기 기화로 다시 태어난다... 서희를 만나기 위해 혜관과 용정을 방문한 후 변해버린 길상과의 관계에 절망한다. 이후, 서희로부터 외면당하고 돌아온 상현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껴 그와 함께 생활한다. 상현이 떠나고 난 후 군산에서 홀로 상현의 아이 양현을 낳지만, 허무감을 달래지 못해 아편 중독자가 되어 평양을 떠돈다. 서희의 도움으로 평사리로 돌아와 요양하며 살아가지만 타락한 자신의 모습에 우울함을 견디지 못하며, 정 석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정리하듯 섬진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_  이상진, <토지인물사전> , p88/216


 봉순과 명희에게서 받은 인상의 변화는 외부 요인에서 온 것으로, 이들의 굴곡진 삶이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릴 때는 동생 서희를 감싸고 보호해주는 언니였지만, 길상이 서희의 남편이 되면서 서희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아편에 중독된 채 쓸쓸하게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봉선. 듬직한 언니에서 마약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나약함으로 봉선에 대한 인상이 크게 바뀌었다면, 명희에 대한 인상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돈을 보고 선택한 인물이라는 명희에 대한 인상은 용하와의 이혼 후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모습에서 '박제된 학'에서 '창공을 나는 학'으로의 이미지 변화를 느낀다.


 임명희(任明姬) : 임명빈의 동생. 빼어난 용모에 지적인 세련미, 독특한 분위기와 품격을 가지고 있다. 동경에서 알게 된 상현을 사모하나, 거절당한다. 명희를 차지하기 위해 이혼한 조용하와 결혼하여 '박제한 학'처럼 살아간다. 조씨 가문에 대한 죄의식과 강박감, 그리고 조용하의 끝없는 질투와 가학에 시달리다가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자살을 시도한다. 친구 여옥의 도움으로 통영의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시동생 조찬하에 대한 감정을 냉정하게 정리한다. 조용하가 죽은 후 상당한 유산을 분배받는다. 서울로 돌아와 유치원을 하며 말년을 보내며, 도솔암의 젋은이를 위해 거금 5천 원을 희사한다. _  이상진, <토지인물사전> , p166/216


 반면, 병수는 다른 이유로 선정했다. 봉순과 명희와는 달리 그에 대한 인상은 <토지>의 강력한 악인(惡人) 조병수에 의해 가리워진 그림자로 인식되었다. 아버지의 위세에 기대어 서희와 최씨네 재산을 탐하는 인물이라는 편견이 있었으나, 길상과의 대화 이후 아버지와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오해가 있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조병수 : 조준구의 외아들. 꼽추의 몸이나 '해맑은 눈동자'에 '천상의 동가잩이 깨끗한 얼굴'을 가졌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빠르고 정확한 직감을 가졌다. 또한 탐미적인 감각과 인간의 존업성을 헤아리는 의지를 가졌다. 평사리에 올겨 온 후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삼수에게 매질 당하는 삼월을 동정과 연민으로 바라보기도 하며, 서희에 대한 호감을 길상에게 들킨 후 절망하기도 한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 조준구가 영락하고 쇠장한 몰골로 찾아오자, 갖은 학대를 받으며 3년간 그의 병수발을 들고 임종을 지킬 정도로 효자이다. _  이상진, <토지인물사전> , p178/216


 그러고는 말이 뚝 끊어졌다. 환국이와 시우는 그런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다. 보이지 않느 어떤 것이 자신을 꽁꽁 묶어놓은 듯, 입이 붙어버린 듯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옛날의 그 도도했던 위엄은 사라졌으나 그와는 또 다른, 그것은 다만 침묵이었는데 매우 이상한 힘으로 압도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타나지 않는 눈물이었는지 모른다. 나타나지 않는 절망 비통이었는지 모른다. _ 박경리, <토지 19> , p293/532 


 서희는 이러한 주면 인물들과의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토지> 후반부로 가며 자신과 갈등관계에 있던 인물들과 해원(解怨)한다. 이 같은 서희의 모습 속에서 모든 갈등이 '서희'라는 하나의 용광로에서 융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작품의 주인공이기에 작품 전체에서 가장 입체적으로 그려진 서희지만, 그 원인은 찾아본다면 봉순, 명희, 병수와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어느덧 서희는 노년이 되었다.


 인생의 주로(走路)는 정해져 있네. 자연의 길은 하나뿐이며, 그 길은 한 번만 가게 되어 있네. 그리고 인생의 매 단계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한데, 이런 자질들은 제철이 되어야만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라네. _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 p44


 인간에게 있어서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시간화하는 것이다. 현재 속에서 과거를 넘어서는 계획들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겨냥한다. 우리의 활동들은 무기력한 요구들로 가득 찬 채 응고되어 과거로 되돌아간다. 나이는 우리 자신과 시간과의 관계를 바꾸어놓는다. 해가 바뀜에 따라 우리의 과거는 점점 더 육중해지고, 반면 우리의 미래는 점점 짧아진다. 노인이란 "살아온 긴 생을 뒤에 갖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삶의 희망이 매우 한정된 인간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_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 p505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적게 남은, 이제는 죽음을 바라보는 노인 서희. 그런 서희를 주변에서는 안타깝게 바라보고, 서희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본다. 지난 시절 할머니가 호열자에 걸려 돌아가시기 전 함께 돌아본 최참판의 가세(家勢)를 살펴보던 어린 서희와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서희가 <토지 19>에서 그려진다. 서희가 돌이켜 본 자신의 삶은 어떤 색이었을까.


 서희는 지난 그때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 어린 옛날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가마를 타고 갔을 때였다. 논에서 밭에서 일하던 남정네 아낙들, 길가에 서 있던 노인, 그들은 모두 가마를 향해 절을 했다. 바람이 이랑을 만들며 벼를 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엉덩이에 쇠똥이 잔뜩 묻은 어미소와 송아지가 물이 말라서 바닥이 드러난 개울가에 앉아 있었다. 물이 괴어 있는 개울가에서 아닥 한 사람과 아이들이 낯을 씻고 있었는데 가마를 본 그들은 기겁을 했다. 마치 메뚜기처럼 개울 건너 메밀밭으로 뛰어가서 숨는 것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9> , p307/532 


  봄은 청춘의 계절이고 다가올 결실을 약속하지만 다른 계절들은 그 결실을 베어 거둬들이기에 적합하기 때문일세. 한데 노년의 결실이란, 앞서도 거듭 말했듯이, 전에 이룩한 선(善)에 대해 회상할 일이 많다는 것이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무엇이든 선으로 간주되어야 하네. _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 p80


제1권 328e  어르신께서는 시인들이 "노년의 문턱에' 들어섰다고 말하는 바로 그런 춘추에 이미 들어서셨기에 여쭙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그것이 어려운 고비인지, 아니면 어르신께서 어떻게 알려 주실 것인지 듣고 싶군요." 

329a "소크라테스 선생! 멩세코, 선생께 내 말씀드리리다. 내가 보기에 그게 실로 어떤 것인지를. 실은 우리 엇비슷한 연배 몇 사람이 자주 한데 모이고 있어서, 옛 속담을 따르고 있는 셈이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 중에서 대부분은, 모였다 하면, 젊은 시절의 즐거움을 아쉬워하며, 성적인 쾌락과 관련해서, 그리고 술잔치나 경축 행사, 또는 이런 등속의 것에 속하는 다른 여러 가지 것과 관련해서 회상을 하며 한탄을 하죠. 그러면서 그들은 마치 굉장한 무엇인가를 앗기기라도 한 듯이, 그래서 한때는 잘 살았으나, 이제는 사는 것도 아닌 듯이, 화를 내지요. _ 플라톤, <국가>, p57


 서희의 삶에서 사람들이 차례로 떠났듯, 이제 <토지 20>에서 서희의 인생은 양현과 함께 해방을 맞이하며 영원한 쉼표로 마무리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쉼표를 향해 밖으로 확장되었던 서희는 이제 다시 어린 시절로 회상하며 움츠러 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블랙홀의 죽음과도 같이.. <토지 19>에서 노인이 된 서희를 보며 이제 <토지>를 마무리해야 할 때를 실감하는 한 주의 독서였다...


 적막강산, 고립무원, 한 사람 한 사람 떠나가는 것을 이제는 더이상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 곁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떠나갔다는 것은 더더군다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위엄에 차 있던 어머니가, 찬 이슬에 날개를 접은 나비같이 숨만 쉬고 있는 것 같은 안방의 어머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9> , p298/532 

 

 노년은 제2의 어린 시절이라는 점을 환기시킨다. 달리 표현하면 생애 과정이 완전히 순환한 것이다. 그런 표현의 이면에 있는 논리는, 만약 저변의 어떤 논리든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많은 개별 노인이 경험한 신체적/정신적 쇠퇴와 그로 인한 타인에의 의존을 관찰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은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시간을 초월한 이미지이다. _ 팻 테인 외, <노년의 역사>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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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닌 게 아니라, 영광은 자신이 늘 우울해 있었던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지나치게 방어적인 자신의 의식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기분이 어둡든 밝든 세상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담의 말대로 울든 웃든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영광은 바닷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바다 풍경이 이렇게 아름답고 신선한 것을 미처 모르고 살아온 것 같았다. 조촐하고 청정하고 마치 내 집 안마당같이 아늑해 보이는 바다,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은 모두 이 강산에 태어난 사람들의 땅이요, 바다는 내 조국 내 민족의 보금자리며 요람이며 삶의 터전 아닌가.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귀하고 소중한 민족의 생명이다. 명경 같은 바다 위에 꿈과도 같이 전개되는 섬, 가고 오고 겹쳐서 나타나고 연이어져 나타나는 각양각색의 섬, 한결같이 섬에는 푸른 소나무들이 우뚝우뚝 서 있었다. 처음으로 영광은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자기 내부에 진한 소속감이 굽이치고 있는 것을 느낀다. _ 박경리, <토지 17> , p389/572


  [토지 독서 챌린지] 34주차. 이제 5부 2권 <토지17>도 이번 주차로 마무리된다.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오가타와 인실이 그들의 아이를 찬하가 길러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내용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지난 주 독서챌린지에 이미 다뤘기에 넘어가도록 하자. 대신 이번 주에는 영광이 바라본 바닷가의 풍광과 생각을 함께 살펴보려 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어수선한 <토지>의 상황만큼이나 어수선한 20대 대선 직후의 어지러운 지금 상황에서 영광의 마음이 더 잘 이해되었기 때문일까. 평소 자신을 짓누르는 우울감 속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본 영광. 시원함과 드넓은 바다와 시원한 파도의 움직임과 소리는 그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준다. 영광이 바다에서 느낀 생명의 신비와 소속감은 부둣가에서 빨래터라는 그의 공간으로 오면서 구체화된다. 구체화된 이미지들이 영광에서 시(詩)로 변화하여 다시 자신의 생각으로 빠져드는 영광. 


 빨갯방망이 소리 여자들의 웃음소리 부서지는 햇빛, 영광은 어제 부둣가에서 그 신선한 삶의 활력을 되새겨보는 것이었다. 삶의 의미, 가능성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영광은 다음 순간 그것은 남의 인생이라는 강한 부정에 빠지는 것이었다. 남이 바라보는 자신의 있는 모습이 결코 진실이 아니라는 선에서부터 출발하여 영광은 빨래터에 다시 시선을 던진다.

 '그렇다, 바로 내 시계에 저들 모습이 들어왔고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들이 시(詩)가 아닌가. 한다면 시는 진실인가!'

 '한 위인이 살다 간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서가 아닐까? 시일까? 타인에게 투영된 그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갖가지 정서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자체는 보는 사람에게는 풍경이며 시다. 위대하다는 그 자체가.' 

 영광은 밑도 끝도 없는,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고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사념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_ 박경리, <토지 17> , p448/572  


 바다와 빨래터라는 외부 공간에서 민족과 생명의 이미지를 찾아내는 영광의 흐름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헤겔의 미학강의 Vorlesungen uber die Asthetik : Mit einer Einfuhrung hrsg>에서 다루어지는 시의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시적인 구상에 맞는 내용에 관해 보면, 우리는 적어도 상대적으로 외적인 것 자체, 즉 자연 사물들을 배제할 수 있다. 시문학은 태양이나 산, 숲, 풍경, 인간의 외적인 형상, 피, 신경, 근육 따위가 아닌 정신적인 관심사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시문학은 그 안에 아무리 직관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요소를 띠고 있더라도 역시 정신적인 활동으로 머물며, 정신 가까이 있으면서 구체적인 감각성을 띠고 현상하는 외부사물들보다 정신에 더 적합한 내적인 직관을 위해서만 일하기 때문이다.(p589)... 이런 측면에서 시문학의 주요 과제는 정신적인 삶의 위력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의 열정과 감정 속에서 부침하고 물결치거나 고요히 관찰되며 지나가는 것, 인간의 모든 표상, 활동, 행위, 포괄적인 운명의 영역, 이 세상에서 추진되는 일들, 그리고 신이 다스리는 세계를 의식하게 하는 일이다. 시문학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폭넓은 가르침을 주는 교사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_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헤겔의 미학강의 3>, p590


 영광이 바다를 통해, 빨래터를 통해 떠올렸던 정신적 관심사. 이를 포괄적으로 '한민족의 민중의식'이라고 거칠게나마 묶을 수 있을까. 민중의식을 만약 시적으로 느꼈다면, 그것은 영광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의 <미슐레의 민중 Le Peuple> 또한 혁명기 프랑스 민중의 고통 속에서 시적인 요소를 발견한다.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힘에게 질식당하는 고통. 그것은 아직 시가 아니다.  미슐레는 민중 자체에서 시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은 투박하고 소박하다. 시원의 생명력을 갖고 있지만,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느끼기는 어렵다. 프랑스 민중과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우리 민중들의 핍박받는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면,  영광이 발견한 민중 속의 시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모두가 고통을, 진부한 통속성을, 노예제의 추악함을 함께 나누고 있다. 예컨대 가장 행복하게 태어나 즐거운 프랑스 남부의 거주자들조차도 슬프리만큼 일로 허리가 휘었다. 오늘날 최악은 허리만큼이나 영혼도 휘었다는 것이다. 고통, 곁핍, 빚쟁이나 세리에 대한 두려움, 이보다 덜 시적인 것이 있을까?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 p114/254


 민중 자체는 덜 시적이며, 그를 둘러싼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사회에는 그들이 음미할 만한, 생생하고 감동적인 세부에 대한 신랄한 묘사를 포함하는 시가 거의 없다. 이 사회에 있는 시라고는 때로는 아주 복합적인 조화를 말하는 고상한 시로서, 숙련되지 않은 눈으로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다. 불쌍하고 외로운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을 밀어붙이고 있는 이렇듯 방대한 대상과 거대한 집단적 힘에 둘러싸여서 스스로가 나약해지고 모독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에게는 이전에 개인의 창의성을 그리고 강하게 만들어줬던 자존심이 조금도 없다. 만일 그에게 해석을 할 창의력이 없다면 그는 이 강력하고 현명하며 학식 높은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사회 앞에서 용기를 잃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빛의 중심이라는 곳에서 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생각보다는 그 빛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선택할 것이다. 그 지혜 앞에서 민중의 작은 뮤즈는 물러서서 숨조차 쉬지 못할 것이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 p114/254


<토지>에서 영광이 의식한 민중의 아름다움은 '차별성'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상황에 따라 독립투사와 친일파를 오가는 지식인들과는 달리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 내부에서 울려올라오는 소리를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이 친일파나 지식인 등 다른 계급들과는 구분된 민중들만의 본연적 아름다움이 아닐까. 이러한 순결함이 '질박(質朴, 質樸)'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외부 이미지로부터 이러한 질박함을 아름다움으로, 문학적 형태로 표현한 것인 시적으로 표현된 민중의식이 아닐런지. 어쩌면 영광은 이를 시적 감정으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민중'이란 개념이 자신도 모르게 계급적 함의를 띠게 될 경우 그것은 필연코 관계적인 것이 되며, 그 재현의 장 속으로 다른 계급들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반드시 다른 계급들과의 대비에 의해 정의되며, 명시적이건 암시적이건 그 계급들과의 투쟁 관계 속에 놓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 현상 또는 서사의 이음새를 파열시킬 뿐만 아니라, 원래의 구도를 초월하는 단계, 즉 '민중'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자아비판과도 같은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다. 특히 그러한 전개 과정은 '민중'이라는 개념의 '타자성'을 피할 수 없게 만들며, 그 개념이 특권적이지만 제자리는 갖지 못한 관찰자, 이 서사의 원재료를 편안하게 그러나 열정은 없이 수집하고 있는 관찰자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안하게 강조하게 된다. _ 프레드릭 제임슨, <정치적 무의식> , p247


 누가 압니까? 순수한 친일파들이 독립군의 뒷돈을 대주고 있는지, 형세 보아가며 대한독립만세! 하고 외치며 나왔다가 몇 달 구류 살고 그런 뒤 조선이 독립될 그날 길이 좁아라며 활보할 궁리를 하고 있는지 그건 모를 일이지요. 가장 지혜롭고 영악하게 사는 사람들, 어디든 적응하는 식물같이 끈질기게, 본시 생물은 다 그렇게 하게 돼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사람이다! 해봤자 별무소득이지요. _ 박경리, <토지 17> , p300/572


 진보적 식자라는 그들도 믿지 않았다. 형평사운동으로 알게 된 그 진보주의자들 역시 이론의 수식가(修飾家)가 태반이었으며 학식은 처세요 의복 같은 것, 일본서 한창 유행인 풍조를 옮겨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실정이었다. 결국 그들이 지니고 온 지식의 정체는 내 것을 부수고 흔적을 없게 하려는 것, 소위 개조론이며 조선의 계몽주의였다. 부지불식(不知不識)의 경우도 있었겠으나 동경유학생과 기독교와 일본의 계몽주의 삼박자는 잘 맞은 셈이었다. 일본은 숨어서 어떤 미소를 머금었을까? 주권과 강토는 이미 그들 수중에 있는 것, 내용이 문제 아니었을까. _ 박경리, <토지 17> , p427/572


 이서방, 파도가 눈에 뵈지 않는다고 바다가 조용한 건 아닐세. 상어떼가 무리를 지어 날뛰고 피래미 한 마리 숨을 곳이 없다면 조용한 그 자체는 더 무서운 것 아니겠나? 그러나 절망하지 말게. 민중들은 아직 순결하다. 친일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지식인들이 일본이라 할 때 대다수 민초들은 왜놈 왜년이라 하네. 역사적인 자부심과 피해의식은 그들 속에 굳게 간직되고 있어. 그들은 일본인을 두려워하면서도 모멸하고 복종하는 체하면서도 결코 섬기지 않아. 그들은 조선의 대지(大地)이며 생명이다.  _ 박경리, <토지 17> , p469/572


 이번 주 [토지독서챌린지]에서는 영광의 생각과 <토지> 안의 대화 안에서 시적인 아름다움과 시에 담긴 시대정신을 생각하게 된다. 혼란스러운 주변 상황 때문에 영광의 혼란과 생각에 함께 몰입하게 된다. 영광의 마음으로 읽은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의 시 중 한 편을 옮기는 것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문학적인 감성으로 사회문제를 바라본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의 <시적 정의 Poetic Justice: The Literary Imagination And Public Life>는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일 것이다...


 영롱한 목표


 새로운 목표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죽음보다도 엄숙하게

 귀고리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도 더 영롱하게

 나는 오늘부터 지리교사모양으로 벽을 보고 있을 필요가 없고

 노쇠한 선교사모양으로 낮잠을 자지 않고도 견딜 만한 강인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목표는 극장 의회 기계의 치차(齒車)

 선박의 삭구(索具) 등을 주저(呪詛)하지 않는다

 사람이 지나간 자국 위에 서서 부르짖는 것은

 개와 도희의 사기사(詐祈師)뿐이 아니겠느냐

 모든 관념의 말단에 서서 생활하는 사람만이 이기는 법이다

 새로운 목표는 이미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역을 떠난 기차 속에서

 능금을 먹는 아이들의 머리 위에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희열 위에서

 40년간의 조판 경험이 있는 근시안의 노직공의 가슴속에서

 가장 심각한 나의 우둔 속에서

 새로운 목표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죽음보다도 엄숙하게

 귀고리보다더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도 더 영롱하게 _ 김수영, <김수영 전집, 시>,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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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역사, 사연이 똬리를 틀듯 둘러싸여 있는 평사리의 최참판댁, 고래 등 같은 기와집,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탈환의 최후 목표였던 평사리의 집을 거금 오천 원을 주고 조준구로부터 되찾았을 때, 그것으로 서희의 꿈은 이루어졌고 잃었던 모든 것을 완벽하게 회수했던 것이다. 그때 서희의 감정은 기쁨보다 슬픔이었고 허망했다. 그리고 뭔지 모르지만 두려움 낯섦, 과거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낯섦이었다. 서희는 회수한 평사리의 집에 꽤 오랫동안 접근하지 못했다. 그렇다. 서희는 과거를 두려워한 것이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음산한 비극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평사리의 집은 의식 속에 방치된 채, 서희는 현실에 쫓겼는지 모른다. _ 박경리, <토지 16> , p512/594


  [토지문화재단 독서챌린지] 32주차. 개인적으로 <토지> 5부 1권의 마지막 16권을 정리하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개인의 복수를 마무리하는 서희의 심경이 담긴 부분이다. <토지>의 시작 아버지 최치수와 할머니 윤씨 부인의 잇달은 죽음으로 간도로 내몰렸던 서희는 수십 년의 시간동안 간도와 진주를 거치면서, 조준구를 옥죄고 결국 평사리의 집을 되사오는 것으로 복수를 마무리짓는다. 한 푼없이 조준구를 극한으로 내몰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재기의 발판을 남겨주고 말없이 보내준 서희의 모습은 통쾌한 복수와는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서희가 허락한 조준구의 여유는 사실은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닐까. 이를 평사리의 집을 바라보는 서희의 감정을 통해 헤아리게 된다. 


 졸음같이 달콤한 죽음의 유혹이 또다시 영광에게 스며들었다. 소년 시절에 겪었던 죽음에 대한 센티멘털, 그 미숙(未熟)한 동경에 삼십 장년이 휘청거린다. 아무 희망도 없었다. 정열과 그리움도 없었다. 세월에 바래어지고 마모된 것 같은 어머니와 누이 등의 초라한 모습에서 느낀 것은 슬픔이나 애달픔보다 세월의 찬바람이었고 움츠려지는 뭔가 형용하기 어려운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6> , p250/494


 서희는 흐느껴 울었다.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았으나 흐르는 눈물은 멎지 않았다. 그가 앉은 별당, 어머니 별당아씨가 거처하던 곳, 비로소 서희는 어머니와 구천이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어머니는 불행한 여인이었던가, 나는 행복한 여인인가 서희는 자문한다. 어쨌거나 별당아씨는 사랑을 성취했다. 불행했지만 사랑을 성취했다. 구천이도, 자신에게는 배다른 숙부였지만 벼랑 끝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살다가 간 사람, 서희는 또다시 흐느껴 운다. 일생 동안 거의 흘리지 않았던 눈물의 둑이 터진 것처럼. _ 박경리, <토지 16> , p516/594


 영광이 느꼈던 죽음에 대한 센티멘털, 별당아씨와 구천에 대한 사랑 등 복합적인 감정 등이 복수 후 남겨진 서희의 마음 한 켠에 몰아쳤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토록 원했지만 감히 돌아갈 수 없었던 기억의 공간. 다시 그 공간의 대문으로 서희가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복수 후 남겨진 여유 속에서 자신을 정리할 수 있었던 여백의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서희는 평사리 고택의 문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서희의 아들 환국 또한 법당문을 열고 아버지의 관음상을 바라본다.


 법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낡은 것들 속에 새로움이 한결 선명한 관음탱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관음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관음상을 응시한다. 오른손에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에는 보병(寶甁)을 든 수월관음(水月觀音), 또는 양류관음(楊柳觀音)이라고도 하는데 아름다웠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청초한 선(線)에 현란한 색채, 가슴까지 늘어진 영락(瓔珞)이며 화만(華鬘)은 찬란하고 투명한 베일 속의 청정한 육신이 숨 쉬고 있는 것만 같다. 어찌 현란한 색채가 이다지도 청초하며 어찌 풍만한 육신이 이다지도 투명한가. _ 박경리, <토지 16> , p564/594


 나는 그가 문을 여는 순간부터 미묘한 충격에 사로잡힌 채 그가 합장을 올릴 때도 그냥 멍하니 불상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우선 내가 예상한 대로 좀 두텁게 도금을 입힌 불상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내가 미리 예상했던 그러한 어떤 불상이 아니었다. 머리 위에 향로를 이고 두 손을 합장한, 고개와 등이 앞으로 좀 수그러진, 입도 조금 헤벌어진, 그것은 불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형편없이 초라한, 그러면서도 무언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사무치게 애절한 느낌을 주는 등신대(等身大)의 결가부좌상이었다. 그렇게 정연하고 단아하게 석대를 쌓고 추녀와 현판에 금물을 입힌 금불각 속에 안치되어 있음직한 아름답고 거룩하고 존엄성 있는 그러한 불상과는 하늘과 땅 사이라고나 할까, 너무도 거리가 먼, 어이가 없는, 허리도 제대로 펴고 앉지 못한,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은 채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悲願)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콱 움켜잡는 듯한, 일찍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그러한 어떤 가부좌상이었다.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나는 미묘한 충격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 미묘한 충격을 나는 어떠한 말로써도 설명할 길이 없다. _ 김동리, <등신불> 


 <토지>에서 법당 문을 열고 환국이 바라본 관음상은 아름다움(美) 자체다. 반면, <등신불>에서 '나'가 금불각의 문을 열고 바라본 불상(佛像)의 모습은 인간이 모든 감정을 다 담고 있는 섬뜩하고 끔찍한 추(醜)의 모습이다. 등신불의 '나'는 혼란에 빠져 질문을 던진다. 저렇게 인간의 고통을 잔뜩 짋어진 불상의 모습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소신 공양으로 성불을 했다면 부처님이 되었어야 하지 않는가. 부처님이 되었다면 지금까지 모든 불상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은 거룩하고 원만하고 평화스러운 상호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에 가까운 부처님다움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거룩하고 부드럽고 평화스러운 맛은 지녔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금불각의 가부좌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벗어나지 못한 고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얼굴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어떠한 대각(大覺)보다도 그렇게 영검이 많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_ 김동리, <등신불>


 사실, 이러한 질문은 <등신불>의 '나'만 제기한 문제가 아니었다. 부활 후 심판자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그리스도왕' 또는 양 떼를 인도하는 '착한 목자'가 아닌 '수난의 예수'를 인정하는 것은 중세 유럽인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중세 이후 극적으로 묘사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부활이라는 극적인 상승을 위한 예정된 하강의 이미지로서 자리매김되었을 때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The Christ>에서 정점을 보여준 극단적인 참혹함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부활'이라는 약속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일반이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은 '성불(成佛)'이나 '부활(復活)'의 과정일 때 비로소 가능할테지만, <등신불>에서 '고통'은 하나의 완성이기에 '나'는 혼란에 빠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수치스러운 증거를 자신의 범미주의적 시각으로 다시 흡수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의 예수는 분명 흉한 모습이지만, 그런 피상적인 흉함을 통해서 그 희생의 내면적인 미와 우리에게 약속한 영광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비로소 현실적인 남자로, 매 맞고 피 흘리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런 한편 십자가 책형과 수난의 여러 단계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가 수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찬양하는 것이므로 극적으로 사실주의적이 되었다... 수난 받는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문화에 전해지면서 수난의 에로티시즘은 점점 더 강결해졌다. 결과적으로 고통에 시달린 성스런 얼굴과 신체에 대한 묘사는 자기만족과 성적 모호함에 가까운 하나의 유희가 되며, ... _ 움베르트 에코, <추의 역사> , p49


 반면, 환국은 '관음상'을 받아들이기에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려낸 관음탱화는 완벽한 진선미(眞善美)의 재현으로서 관음상의 모습은 주위를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쩌면 환국은 관음상 속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했을 지도 모른다. 인생의 황혼에 선 서희의 모습. 한 송이 국화와도 같은 모습이었을까, 빛 속에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었을까.


 마흔여덟의 최서희는 아직도 아름다웠다. 서산에 해가 지는, 그 노을빛같이 아름다웠다. 물살을 가르며 가는 배, 뱃전에 서 있는 여인, 하얀 숙소(熱素)겹저고리 치마를 입고, 옷고름이 나부끼고 치맛자락이 강바람에 나부낀다. 그는 진정 아름다웠다. 고귀하고 위엄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외로운 모습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6> , p474/594


 미학의 기원 중 하나는 수많은 문명에서 신은 빛과 동일시된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셈 족의 바알, 이집트의 라, 페르시아의 아후라 마즈다는 모두 태양이나 빛의 은혜로운 행위를 상징하는 신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플라톤의 이데아의 태양으로서의 선의 개념과 맞닿게 된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이런 이미지들은 그리스도교의 전통 속에 자리잡는다... 플로티노스는 <엔네아데스>에서 단순한 형태로 인해 각 부분의 균형미를 끌어낼 수 없는 태양의 색과 빛, 혹은 한밤에 눈부시게 빛나는 별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자문한다. 그는 이데아와 유사한 방식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불의 미를 찾을 수 있다. _ 움베르트 에코, <미의 역사> , p102


 '등신불'은 그 외양의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주위에 기적을 행하는 권위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토지 16>에서 찾아본다. 노동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후 혀 끝에 전해지는 밥 한 톨로 전달되는 배고픔으로부터의 해방감. 이에 대한 서술이 답이 될 수 있을까.


 한 개인의 삶은 객관적인 것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행이나 행복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모호한가. 가령 땀 흘리고 일을 하다가 시장해진 사람이 우거짓국에 밥 한술 말아 먹는 순간 혀끝에 느껴지는 것은 바로 황홀한 행복감이다. 한편 산해진미를 눈앞에 두고도 입맛이 없는 사람은 혀끝에 느껴지는 황홀감을 체험할 수 없다. 결국 객관적 척도는 대부분 하잘것없는 우거짓국과 맛 좋은 고기반찬과의 비교에서 이루어지며 남에게 보여지는 것, 보일 수 있는 것이 대부분 객관의 기준이 된다. 사실 보여주고 보여지는 것은 엄격히 따져보면 삶의 낭비이며 진실과 별반 관계가 없다. 삶의 진실은 전시되고 정체하는 것이 아니며 가는 것이요 움직이는 것이며 그리하여 유형무형의 질량(質量)으로 충족되며 남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6> , p536/594


 궁극적으로 해탈(解脫)과 같은 궁극의 상태를 현세에서 체현하기 직전 <등신불>의 만적(萬寂)과 <토지>의 길상의 상황이 달랐던 것에 주목하게 된다. 만적이 이복동생 사신(謝信)을 보고 느꼈던 고통, <욥기>에서 욥이 하느님께 부르짖는 외침 속에서 절대경지와 만났다면, 길상은 그와는 달리 아름다운 부인과 사랑하는 아들들과 양딸 양현과 함께 하는 상황에서 되찾은 자신의 길이었기에 더 평안하게 궁극의 경지를 만났던 것은 아닐런는지.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결국 미술작품에 재현된 미(美)는 내용이 절대경지를 표현했다 할지라도 그 바탕과 끊을 수 없는 인연(因緣)과 연결되어 있는 접점에 불과함을 생각하게 된다.


 착하고 어질던 사신이 어쩌면 하늘의 형벌을 받았단 말인고, 사신은 문둥병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_ 김동리, <등신불>


  개인적으로 <토지 16>은 일종의 완성(完成)의 의미로 읽힌다. 서희의 복수는 그가 남겨둔 작은 여지와 여백을 통해 회복과 재생으로 완결되며, 길상은 금어(金魚)로 관음탱화를 완성하며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완성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완성이 완결(完結)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토지>가 5부 1권에서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는 구도 속에서도, 여지를 남겨둔 조준구에 대한 관용이 그와 가족들에게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는 소설의 내용과도 연결지어 생각하게 된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는 없는 인과율(因果律)에 의한 복수가 더 큰 것임을 서희는 알았던 것일까.


 조준구의 감각에도 산내음이 풍겨오는 사내,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 조준구는 믿는다. 해도사가 시적을 이루어 자기 병을 낫게 할 것이라는 예감을 믿는 것이다. 자기와 무관한 일이거나 불리할 경우에는 귀신이건 영신(惡)이건 미신으로 간단하게 단정해 버리지만 자기 자신에게 유리할 경우에는 미신이 아닌 것이다. 악(惡)과 탐욕의 속성인 것이다. 하여 치매현상으로 나타나지만 완전하다고 믿는 것이 또한 그들의 속성인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6> , p428/594


 해도사는 휘한테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똥벼락을 맞은 조병수가 대성통곡을 했다는 얘기, 가엾고 측은하며 사람이 어찌 저렇게 살아야 하는가, 떠날 길을 왜 생각지 않는가 하며 통곡을 했다는 얘기, 해도사는 병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심정이 바로 지금 그와 같았다. 측은하고 가엾고, 미워할 수가 없었다. 정말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구제받지 못하는 자에 대한 슬픔이었다. 하늘 아래 홀로 서 있는 자에 대한 슬픔이었다. 삭을 대로 삭아버린 육체를 안고 버둥거리는 한 생명에 대한 슬픔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6> , p432/594


 글의 마지막은 인간의 고통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인 <욥 기>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을 옮기는 것으로 마무리짓는다. 만적이 스스로 해탈의 길을 선택했다면, 자신의 고통을 절대자에 대한 참회로 극복하는 욥의 모습은 같은 듯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교부들에 따르면, 욥은 하느님의 전지(全知)와 하느님께서 인간 삶의 모든 사건을 통제하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때 하느님에게 의로움을 인정받는다(올림피오도루스). 욥은 진실한 겸손(대 그레고리우스)과 온전한 참회를(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보여 준다.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배우기 위해 질문한다, 사람이 하느님께 붇는 그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하느님 앞에서 시인하는 것이다(대 그레고리우스). 교부들이 욥 안에 그리스도교적 삶의 기본 덕들이 예시되어 있다고 본 것은 분명하다. 욥이 참회했을 때는 그가 아직 시련에서 구원받기 전이며 여전히 환난 중에 있었다. 이제 욥은 사제가 되며 방문객들이 예물을 가지고 온다. 그는 자녀들을 위해 희생제품을 바친 바 있는데 이제 친구들을 위해 희생 제물을 바친다. 의인을 비난하는 사람은 중대한 잘못에 대해 속죄한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_만리오 시모네티/마르코 콘티, <교부들의 성경 주해 : 욥기>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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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이는 월선의 무덤가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일어섰다. 달리 할 말도 없거니와 감회도 없었다. 할말이나 감회가 없었다기보다 죽음과 이별의 냉혹함을 이제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해야 옳은지 모른다. 절대적 침묵이 냉혹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절대적 사실에는 누구든 길들여지게 마련이다. 홍이도 길들여졌던 것이다. 그리움이며 고마움이며 한 인간의 심신을 형성해준 요람이었을지라도 그 인연들이 형체없이 사라지고 청산이 되었는데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원한 침묵의 냉엄함과 망각의 비정,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_ 박경리, <토지 16> , p26/592


 토지문화 독서챌린지 31주차. 홍이는 월선의 무덤가에 있다. 김두수의 협박담긴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홍이는 자신의 마음과 다른 행동으로 심한 마음고생을 한다. 분열되는 자아. 그것이 홍이의 지금 모습이 아닐까. 홍이는 자신의 영원한 어머니 월선 앞에서도 할 말이 없었다. 말이 없음을 말할 수 밖에 없는 홍이. 홍이는 소외되고 외로웠다. 하지만, 소외된 홍이의 침묵은 무(無)가 아닌 새로운 가능태(可能態)임을 우리는 읽을 수 있고 소망하게 된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그 단순한 현존 속에 침묵의 위대함이 있다. 침묵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침묵은 모든 것이 아직도 정지해 있는 존재였던 저 태고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침묵은 창조되지 않은 채 영속하는 존재이다. _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 p17


 요컨대 우리는 발화되기 이전의 파롤과, 그것을 끊임없이 에워싸고 있는 침묵의 배경을 고찰해야 한다. 이러한 배경이 없으면 파롤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파롤과 뒤얽혀 있는 침묵의 끈들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뜻이다(p51)... 표현하는 예술이 지니는 새로움은, 침묵하는 문화를 죽음과도 같은 순환에서 빠져 나오게 한다. 예술가는 숭배나 반항에 의해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재개하려고 한다. _ 메를리 퐁티,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 p139/262


 침묵과 침묵의 배경을 통해서 우리는 새롭게 말해질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단순한 발화행위 자체보다 행위가 속해있는 배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월선의 무덤가에서 말이 없는 홍이. 홍이의 모습은 단순한 감회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서 나온 또다른 발화 행위가 아닐까. 그리고 이는 홍이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처한 공통된 상황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 민족은 일본의 볼모다. 일본이 망하리라는 희망적 정세 앞에서 우리가 앞날을 어둡게 절망적으로 내다보는 것은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우리 민족이 얼마나 소모될 것인가,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가, 해서 희망과 절망의 양면을 지닌 날카로운 칼끝에 우리가 서 있다고 말한 게야. _ 박경리, <토지 16> , p48/592


 조선인들은 모두 순간순간 그것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 억압과 빚어진 습성 같은 것이지만 이제는 북녘땅에서 실려오던 신화 같은 것은 없다.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 있을 뿐 전쟁의 함성, 전과(戰果)만 대서특필, 전해질 뿐, 모든 것은 일본이 파놓은 깊이 모를 수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창씨개명, 조선어 금지, 지원병 제도, 민족신문의 폐간, 노동력 차출, 식량공출, 유명무명의 조직 확대, 관리들과 학교 교사까지 준군복(準軍服)인 카키 빛 국민복으로 갈아입은 지도 오래이며 중학교는 물론 여학교까지 교련이라는 명칭하에 군사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친일파는 친일파대로 우국지사는 우국지사대로 서민은 서민대로,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지식인 학생들, 장사하는 사람, 막노동꾼, 농민, 고기잡는 사람, 하급관리, 월급쟁이들 할 것 없이, 각기 위치와 관점은 다르지만 보다 가혹한 수난이 이 민족에게 닥쳐오고 있다는 예감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거의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것이며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젊은 엄마에게도 어느 순간 불안과 공포는 찾아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_ 박경리, <토지 16> , p184/496


 1930년대 후반, 태평양 전쟁 직전의 상황에 더할 수 없는 어둠이 내려오던 시기에 모든 이들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침묵의 세계는 결코 순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변혁이며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소외된 의식이 느끼는 죽음과도 같은 절망은 이제 새로운 도약의 동력이 된다. 이것이 <토지>에서 길상의 관음탱화로 표현되는 것은 아닐까.


 침묵은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산산조각이 난 한 세계의 잔해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잔해는 그것이 잔해인 까닭에 사람들을 무섭게 만든다. 때로 어떤 도시에서 갑자기 한 사람이 거리의 소음 한 가운데에서 쓰러져 죽는다. 그럴 때는 마치 가로수 꼭대기에 아직 여기저기 앉아 있는 침묵의 조각들이 갑자기 죽은 그 사람에게로 다가가는 것 같다. 그 침묵의 잔해들이 죽은 자의 침묵에게로 느릿느릿 걸어가는 것 같다. 한순간 그 도시는 정지하게 된다. 침묵의 잔해들은 이제 그 죽은 사람의 곁에 있으며 죽음의 틈을 통해서 그와 함께 죽음 속으로 사라지려고 한다. 죽은 자가 침묵의 마지막 잔해들을 동반한다. _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 p212


 길상이 요주의(要注意) 인물로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사실 서희의 경우는 외관상 분리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간도에서 돌아온 후 이십여 년 동안, 김환과 길상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활동과 투쟁을 교묘히 엄폐해가면서 꾸준히 최씨 일문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앞뒤가 다른 가면을 쓰고서도 늘 앞면만 보여왔다 할 수 있고, 그러니까 친일적 경향을 띠면서 회유의 손길을 뻗쳐놓을 필요가 있었고 요소요소, 상당히 광범위하게 호의(好意)의 통로를 만들어놨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6> , p478/494


 개인 스스로가 끝내 도달하는 보편적인 모습이 '죽음'이라는 순수한 존재(das reine Sein, der Tod)이다. 이는 절로 그렇게 되어가는 자연의 결과로서, 의식의 행위는 아니다... 인간이 공동의 세계에서 누리는 죽음의 안식은 참다운 의미에서 자연에 속하는 것은 아니므로 자연이 죽음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듯이 내세우는 교만함을 불식하고 죽음의 진실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이 죽음을 당한 가족이 치러야 할 의식(儀式)의 참뜻이라고 해야만 하겠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8


 길상도 홍이처럼 소외된 세계 속의 인물이다. 자신의 내면은 독립을 외치고 있지만, 감시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부인 서희의 보호를 받고 있는 그의 주변은 친일(親日)의 세계다. 그 역시 내면의 목소리를 감추고 분열되고 소외된 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다시 근원의 모습으로 돌아가 관음탱화(觀音幀畵)에 매진하는 것은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자아의 침묵이라는 언어행위는 아닐런지... 이번 독서챌린지에서는 전쟁에 끌려가는 민족의 불행이라는 보편적 상황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는 개별자들의 소외와 죽음과도 같은 고통, 그리고 이러한 고통의 승화로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글 속에서는 의미 작용이 조각상 속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다른 방식으로 집결되며, 어떤 것도 그 파롤의 유연성에 비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언어는 말하는 것이고, 회화의 목소리는 침묵의 목소리인 것이다. _ 메를리 퐁티,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 p144/262


  정신의 첫번째 현실성은 종교의 개념, 다시 말하면 직접적이고 따라서 자연적인 종교이다. 여기서는 정신이 자기를 자연 그대로의 직접적인 형태를 띤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두번째 현실성은 자연적인 요소를 탈피한 자기의 형태 속에서 자기를 인지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곧 예술종교이다. 형태가 자기의 모습으로 고양되기 위해서는 의식이 대상을 창출해야만 하는데, 이렇게 되었을 때 의식은 대상 속에서 자신의 행위와 자기를 직관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 현실성은 앞의 두 경우에 안겨져 있던 일면성을 제거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자기가 하나의 직접적 존재인 것 못지않게 직접성이 그대로 자기가 되어 있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47


 절대예술의 단계에 오면 정신은 예술을 넘어선 곳에서 더욱 고차적인 표현을 이루어내게 된다. 즉 자기로부터 태어난 인륜의 실체가 표현될 뿐만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이 자기가 표현의 대상이 되고, 개념으로부터 자기를 낳을 뿐만 아니라 개념 그 자체를 형상화하여 개념과 제작된 예술작품이 서로 동일한 것임을 확인하게도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륜적 실체가 단지 현존하는 세계를 이루는 데 그치지 않고 순수한 자기의식 속으로 되돌려지게 될 때 이 자기의식은 개념을 등에 업고 활동하는 주체가 되며 여기에 힘입어서 대상으로서의 정신이 산출되기에 이른다. _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2>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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