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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박경리(朴景利)씨의 <토지>는 근원적으로 '대지(大地)'를 소유하고 사유한다는 근대적인 토지소유의 관념 그 자체에 대한 의의를 머금고 있다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국유지라는 개념의 확대 부연하면 경작자로서의 조선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은 일본제국주의에의 비판이기도 하지만 그 기층에 있는 것은 토지란 누구의 것이냐 하는 근대적인 경제사회 그 자체를 흔들어대는 물음인 것이다. _ 박경리, <일본산고>, p68
박경리(朴景利, 1926 ~ 2008)의 <일본산고 日本散考>는 저자의 대작 <토지 土地> 전체를 관통하는 세계관이 설명된다. 이는 최치수-최서희-최환국/윤국 으로 이어지는 3대와 백명 남짓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쉽게 찾을 수 없는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시대상과 그 안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너무 생동감이 넘치기 때문일까. 작품을 읽고 나서 왜 이 작품의 이름이 <토지>인가를 찾아내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러한 주제의식이 작품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서희네가 간도 용정에서 돌아오고 나서 일어난 1919년 3.1운동과 이후 사건을 다룬 3부 이후 시점이다. 특히 일본인 사회주의자 오가타 지로와 주변 인물들 사이의 긴 대화 속에서 작가는 반(反)제국주의, 반일(反日)의식을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반제국주의 정신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이러한 제국주의 침략 이전 이른바 근대화 시기에 행해진 토지로부터의 인간 소외를 1,2 부에서 쉽게 발견하기 어려웠음을 <일본산고>를 통해 돌아보게 된다.
일본의 팽창주의는 과거와 다를 것이 없다. 그 해악도 다를 것이 없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무관심을 나타내는 일부 지식층의 이상주의 혹은 지성을 나는 지적 허영으로 본다. 토지의 일본인 오가타 지로[緖方次郞]는 코스모폴리탄이다. 그는 강자 편에서, 가해자 편에서 양심을 지켜 비판하는 세계주의자다. 그러나 피해자가 불이익을 안고 과연 평등의 세계주의로 갈 수 있는 걸까? _ 박경리, <일본산고>, p70
<일본산고>에서 저자는 자신을 반일(反日)작가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일본(日本)이라는 나라를 미워하지 일본인(日本人)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함께 한다. 얼핏 들으면 말장난과도 같은 말이지만, <일본산고>를 통해 저자는 자신이 맹목적인 민족주의자도 아니며, 자신이 미워하고 경계하는 것은 '천황(天皇)'이라는 신적인 존재로서 일왕(日王)과 그를 정점으로 하는 사회 체계를 폭력적으로 확장시키려는 의도임을 분명히 한다.
일본은 거짓의 두 기둥을 박아놓고 국민을 가두어왔다. 하나는 천조의 상속권 주장인 만세일계요, 다른 하나는 현인신으로 왕을 치장한 신도(神道)다. 각일각 변화하는 생명과 만상의 원리를 어기고 어찌하여 일문이 만세에 걸쳐 군림할 수 있을까. 나고 죽는 우주 질서에서 일왕도 예외가 아니거늘 어찌하여 신으로 칭하는 걸까. _ 박경리, <일본산고>, p77
국민들은 모두 "천황의 세키시[赤子]"라는 것은 공공연한 그들의 인식이었습니다. 천황의 소유물이라는 뜻이지요. 인류에게 일본은 어떠한 존재인가. 핵무기를 가질 때 그들은 그것으로 어떤 짓을 할 것인가. 세계 정복의 청사진은 일본 체제의 확대를 의미합니다. 전 인류가 모두 현인신의 세키시가 되는 거고 소유물이 되는 거지요. 신국사상을 청산 안 하는 이유가 거기 있을 겁니다. _ 박경리, <일본산고>, p143
저자가 반대하는 일본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무력으로 강요하는 화(和)의 일본이다. 사회를 위해 자신을 억누르는 것은 미화(美化)하고 이를 추앙하는 그들의 문화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그들의 체제 안에서 2등 민족으로 1등 민족인 내지(內地)인을 위해 살아가기를 강요했던 것이 그들이 저지린 식민시대의 만행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일본에 대한 감정의 근원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 한일 관계가 정립되는 것은 이러한 아픈 역사에 대한 치유가 먼저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통곡이 없는 민족, 울지 않는 민족, 왜 울지 않을까? 슬픔도 마치 실루엣같이 소리가 없다. 너무나 정적이다. 본시부터 그러했을까? 그들이라고 울지 않을 리 없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칼로 상징되는 그들의 역사 탓일 것이다(p49)...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혹은 강자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것은 한 개인의 고통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_ 박경리, <일본산고>, p50
전쟁에서 패한 장수는 패배를 인정하고 할복(腹切り 하라키리)하는 것이 일본 무사도의 아름다움이라 스스로 말하지만, 일본 군국주의 패배 이후 그들은 할복 보다 쉬운 반성을 보이지 않았다. 일왕제를 유지하면서 오히려 이를 바탕으로 사회를 결속하고, 때마침 일어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특수로 이뤄낸 경제번영으로 자신들의 죄(罪)를 슬그머니 감춘 일본. 군국시대의 유산을 청산하지 않고 계승한 현재의 일본을 우리가 우려를 지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3년 3월 5일. 정부는 일본 기업이 빠진 '제3자 변제안'을 발표했다. 가해자는 빠진 채 국내 기업과 민간의 참여로 배상금을 지급한다는 이 안은 외교적으로 '일본의 완승'이라며 국내의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안이 왜 문제가 되는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기에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일본의 완승이 과연 일본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정신나간 퍼주기에 두 손들고 환영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사에 대한 그들의 혼네(本音)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반성없는 가해자들과의 진정한 동반은 이제 물 건너 간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모욕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이웃으로서 같이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며, 끊임없이 묻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행동을 전과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사과 요구가 자신들의 변함없음으로부터 나온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면, 민족성의 차이인지 수준차이인지는 모를 일이겠지만.
3.1절 기념사 이후 연일 계속되는 정부의 망언에 박경리의 <일본산고>를 읽으며 지금 이 시기 우리가 가져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