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개혁가이기는 했지만 급진주의자는 전혀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당원이었다. 1956년 스타브로폴 지구 공산주의청년동맹 제1서기를 시작으로 1970년 지역의 국영농장위원회 서기를 거쳐 최고 소비에트 의원에 이르기까지 당을 통해 성장했다. 새로운 지도자는 그 세대 공산주의자들의 많은 정서를 대표했다. 고르바초프는 당이나 당의 정책을 절대로 공개리에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곧 흐루쇼프 시대의 오류에 환멸을 느꼈고 이후 브레즈네프 시절의 억압과 무기력에 실망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런 의미에서 고전적인 개혁 공산주의자였다. _ 토니 주트, <전후 유럽 1945 ~ 2005>2 , p144/46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 2022)가 어제(8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1980년대 후반  글라스노스트(glasnost)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정책을 펼치면서 이후 탈(脫)냉전시기를 이끌어낸 지도자로 당시 세계인의 찬사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그를 기억한다. 비록, 정권 말기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고, 그를 대신하여 쿠데타에 맞선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 1931 ~ 2007)에게 밀려나 이후 다시 정계에서 쓸쓸하게 사라지지만.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의 죽음 소식을 들으며, 한 시대가 끝났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다만, 그의 죽음으로 진정한 냉전의 시대가 끝났음을 인지하기도 전에, 탈냉전의 시기가 진정한 평화의 시대가 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신냉전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깊이 체감하게 된다. 


 개혁의 본능은 절충에 있었다. 다시 말해 관료적 병폐에서 해방되고 원료와 숙련 노동력의 확실한 공급을 보장받은 소수의 인기 있는 사업을 실험적으로 (위로부터) 만들어 내야 했다. 그러면 이러한 사업이 다른 유사한 사업에 성공적인 모델의 기능을, 나아가 이윤을 내는 모델의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목적은 통제된 현대화, 가격 결정 과정에 대한 점진적 적응, 그리고 수요에 부응하는 생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법은 그 작동의 전제 때문에, 다시 말해 당국이 행정상의 허가를 통해 효율적인 사업을 설립해야 했기 때문에 실패가 예견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경제와 씨름하면서 두 발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소련의 경제적 난제만 따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경제적 난제는 더 큰 문제의 증상에 불과했다. 소련은 중앙 통제경제의 정치적/제도적 기득권을 지닌 자들이 운영했다. 소련 특유의 작은 모순들과 일상의 부패는 권위와 권력의 원천이었다. 당이 경제를 개혁하려면 우선 당 자체를 개혁해야 했다. 그래서 총서기(고르바초프)는 당 기구의 장악력을 깨부수고 경제재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글라스노스트(공개)에 의존했다. _ 토니 주트, <전후 유럽 1945 ~ 2005>2 , p146/465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는 사뭇 갈린다. 새시대를 연 세계적인 지도자로 바라보는 시선과 그의 정책으로 결과적으로 동유럽과 소련이 개방의 길로 접어들면서 겪은 혼란상으로 인해 실패한 지도자로 바라보는 관점. 그에 대한 평가는 이제 역사가 내릴 테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으로 20세기 후반 가장 큰 사건인 '탈냉전'은 이제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고르바초프의 초기 시도 중 거의 어느 것도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경제는 단순한 권고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정부 자체의 경제정책, 특히 재정정책은 예산 부족과 물가 상승을 초래했고,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행정부와 그것의 우유부단하고 혼란스러운 방향 때문에 경제는 브레즈네프 치하에서 가졌던 응집력을 상실하기 시작하면서도, 그 시대를 대체할 만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p897)... 이것은 전적으로 위로부터의 혁명도 아니었고, 전적으로 일관성 있는 혁명도 아니었다. 고르바초프는 더 이상의 급진적인 조치를 앞두고서도 계속해서 머뭇거렸다. 그는 중도적인 입장을 유지하려고 시도하면서, 당의 급진파와 제휴할지 보수파와 제휴할지 오락가락 하다가 결국 양쪽 모두와 소원해졌다. 아무튼 당은 점점 더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_ 니콜라스 V.랴자놉스키 외, <러시아의 역사 -하- > , p89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08-31 2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르바초프, 한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갔네요. 평가는 갈리겠지만 어쨌든 역사에서 큰 전환점을 만들었던 것 만큼은 분명한 인물이지요.

겨울호랑이 2022-08-31 23:00   좋아요 1 | URL
네... 정말 20세기를 대표하는 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단순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마무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파리의 풍경 1 파리의 풍경 1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지음, 송기형 외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 파리는 너무 크다. 파리는 나라라는 몸에 비해 과도하게 큰 머리같다. 대도시는 전제적인 정부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다.이런 정부는 대도시에 사람들을 몰아넣기 위해 모든 수를 다 쓴다. 사치와 향락이라는 미끼로 대지주들을 끌어들인다. 군중을 목장 속의 양떼처럼 몰아넣어서, 양떼를 지키는 개들의 역할을 하는 공통의 법이 더 쉽게 다스리도록 한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 p10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Louis-Sebastien Mercier, 1740 ~ 1814)의 <파리의 풍경 1 Tableau de Paris>에는 18세기 말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 본문에는 제목 그대로 18세기 파리의 생활상이 담겨있다. 중세 이래의 비위생적인 도시의 모습은 근대 프랑스 왕국의 중심지 파리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를 많이 저버린다. 우리가 기대한 바로크의 화려함은 왕과 그를 따르는 귀족과 함께 베르사유(Versailles)로 옮겨가버렸기에,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의 상황을 보다 실감나게 관찰할 수 있다.


 공기는 건강 보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부터 바로 치명적이 된다. 그런데 건강은 사람들이 가장 무관심한 재산이다. 좁고 잘못 난 길들, 너무 높고 공기의 자유로운 순환을 가로막는 집들, 푸줏간과 생선가게, 하수구, 묘지들 때문에 대기가 나빠지고 불순한 입자들로 가득 차게 된다. 그래서 이 폐쇄된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 p90


 수많은 마차가 끝없이 덜컹거리면서 끊임없이 내뿜는 철의 입자들로 가득한 파리의 진흙은 더러울 수밖에 없다. 거기에 부엌에서 나오는 오수가 더해져 악취가 난다. 막대한 양의 유황과 아질산염이 함유된 이 진흙은 외지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긴다. 이 진흙 얼룩이 묻으면 천이 타버릴 정도이다. 화차가 진흙과 쓰레기를 수거하여 가까운 들판에 쏟아 버린다. 이 더러운 하치장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불쌍할 뿐이다. 진흙 수거는 헐값에 하청을 준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 p156


 200년 전에는 성에서 살던 귀족들이 대도시로 나오는 것을 꺼려했다. 그래서 그들이 시골에서 거주하던 성채를 떠나게 만들려고 온갖 수를 다 썼다. 귀족들은 때대로 자의적인 명령을 무시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체가 높은 집단이었다. 그러나 베르사유에서만 군주가 하사하는 은급을 받을 수 있고, 주위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가운데 점 하나가 정해지면서 귀족들은 오래된 성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들은 폐허가 되고 영주들의 힘도 사라졌다(p16)... 농업의 쇠퇴가 두드러졌다. 왕권은 더욱 빛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국가의 재산은 축이 났다. 대도시들이 형성됨으로써 나라는 상당한 손해를 입었지만, 몇몇 개인은 엄청난 특혜를 보았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 p17


 <파리의 풍경>에서 우리는 왕과 귀족들의 사냥터에 의해 둘러싸인 파리를 만나게 된다. 사냥터의 동물들에 대한 권리는 오직 왕과 귀족들에게만 있으며, 이들은 사냥을 당하기 전까지 법에 의해 엄격하게 보호된다. '왕의 짐승'만도 못한 파리 시민들. 이러한 법의 체계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대혁명의 전조를 발견할 수 있다.


 파리 주변 8~10리외에서는 총을 쏠 수 없다. '국왕 전용 사냥터'와 왕족들의 토지가 모든 사냥권을 밀어내 버렸다. 이에 관해 만들어진 법은 왕국의 다른 법들과는 대조적으로, 잔인하다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가혹하다. 자고새 한 마리 죽이면 중노동형에 처해진다(p14)...  산토끼가 농민의 양배추를 먹어버리거나 비둘기가 수확을 망치고 잉어가 풀밭에 물을 대주는 강을 거슬러 올라오더라도, 잉어를 건드리지 말고 지나가게 하고 산토끼와 비둘기가 농작물을 먹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사슴을 죽이면 교수형을 당한다. 그처럼 끔찍하고 가증스러운 죄는 거의 유례가 없으며, 존속살해보다 훨씬 더 드물게 일어난다. 수렵재판소의 법규는 아주 특이하고, 우리 시대의 다른 법 중에서도 괴상하다. 실제로 그런 법규들은 존재하며, 모두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지나치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 p256


 한편, 파리는 주변을 둘러싼 사냥터에 의해 엄격하게 팽창이 제한된다. 제한된 면적의 파리는 그 안의 사람들을 양분화시킨다. 한 편에는 대규모 자금을 유통시키는 은행가들과 무위도식하는 금리생활자들이 있다면, 다른 한 편에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노동을 팔아 처절하게 살아가는 다른 계층이 있다. 


 지난 반세기 이래 어음 교환, 회수, 무수한 대부 등의 은행 업무가 신중하고 합리적이며 조심스런 법제를 대신해왔다. 행정 업무는 끝없이 계속되는 투기가 되어버렸다. 은행가들이야말로 프랑스의 지배자들이다. 그들은 돈을 들어오게 하고 나가게 한다. 그들은 유럽 끝에서부터 돈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또 사라지게 만든다. 그들은 위험한 마법사들이자 대담한 세계인들이다. 금을 수은 비슷하게 만들고 국고를 단번에 파산시켜 버리는 교묘하고 무시무시한 그 게임의 결과는 무엇일까? 돈의 빠른 유통은 적어도 우리에게 활력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착각이 계속되면 더욱더 그렇지만 우리는 끝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 p287


 부자가 그 높은 집들에 기어올라가 금 조각을 몇 개 주고, 아직 무명이라서 먹고 살기에 급급한 젋은 예술가의 작품들에서 상당한 이윤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부자는 탐욕에 이끌려 노동자를 고생시키는 궁핍에서 이득을 취하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유익할 수가 있다.... 한 여인이 모정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먹을 것을 두고 다툰다. 불행한 남편의 노동은 가혹하기 짝이 없는 세금이 부과되는 식료품을 사기에 부족하다. 반쯤 열린 지붕 밑에서 울려 퍼지는 가난뱅이의 절규는, 근처에서 공기를 진동시키다가 사라지는 공허한 종소리와 비슷하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 p8


  파리라는 같은 물리적 공간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심리적 거리는 너무도 멀었다. '평등하다'는 인식을 줄 수 있는 정책은 중단되었고, 제1신분 성직자와 제2신분 귀족의 권리와 신분은 계층 내에서 순환할 뿐이다. 파리의 순환되지 않는 대기보다 더 심각한 계층의 불평등은 사회적 공기마저 험악하게 만들었음을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은 거리의 집들에 번지수를 매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유용한 활동은 중단되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러나 대문들은 기록자가 번지수를 매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사실 판사, 징세청부업자, 주교의 저택에 어떻게 비천한 번호를 부과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그 저택의 위풍당당한 대리석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누구도 로마에서 2인자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 p390


 주교들은 음모와 아첨의 결실을 기다리며, 은밀히 공직에 오르려고 애쓴다. 그들은 끊임없이 막후에서 일을 꾸미고, 옛날에 예언자들이 격분했던 바빌론에 못지않게 죄가 많은 새로운 바빌론의 한복판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처럼 고위성직자들은 전적으로 세속적인 일에 전념한다. 순수한 도덕을 함양하고 지칠 줄 모르는 자선, 말하자면 사도다운 자선의 본보기를 보여줄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 p213


 고등법원 법관이 되는 데에는 징세청부업자가 되는 것보다 더 높은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다. 변호사증을 구입한 사람은 박식한 것처럼 여겨진다. 변호를 맡을 거리는 많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재판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다. 한 사람이 변론을 하면, 다른 사람은 앉아서 그 변론을 듣는다. 돈이 모든 차이를 만든다. 사법관직을 판 초기의 군주들은 우리의 왕국을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망가뜨렸던 것이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 p255


 앙시앵 레짐 체제 아래에서 짐슴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이들이 유일하게 대접받는 경우는 이들이 세금을 낼 때 뿐이다. 권리없이 의무만 부담하는, 왕의 사냥터에 둘러싸인 베르사유의 곳간 파리를 우리는 <파리의 풍경 1>에서 목격하게 된다. 대다수의 시민들이 피폐하고 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가운데 작은 불꽃이 도화선이 되어 대혁명으로 발전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너무 결정론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파리의 풍경 1>에서 우리는 서유럽의 중심도시 파리의 화려함 대신 18세기 말의 어두운 시대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속에서 역사의 진보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가난뱅이만 세금을 낸다. 가난뱅이에게는 모든 즐거움이 면제되지만, 먹고 살아야 하는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군주는 마음만 먹으면 도시를 굷게 만들 수 있다. 그는 선량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새장에 가두어 놓고, 화가 나면 그들에게 먹이를 주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살아가야 한다. 생명보존이 최우선 법칙이다. 이 도시는 번창하고 있지만, 그것은 국가 전체를 희생시킨 덕이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 p11


 모든 자리, 즉 고위직, 민간직, 장교직, 성직은 돈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부자와 나머지 시민들 간의 거리는 나날이 커져 간다. 가난뱅이의 눈을 피곤하게 만드는 사치의 놀라운 발전 때문에 가난은 더욱 참기 어려워진다. 증오의 골은 깊어가고, 국가는 두 계급으로 나뉜다. 탐욕스럽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과 불평하는 사람들, 땅을 잘게 쪼개고 재산을 작게 나누는 방법을 찾아내는 입법자는 국가와 주민에게 크나큰 봉사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몽테스키외가 "두 사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모든 장소에서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아주 적절한 표현에 의해 밝힌 풍요로운 사상이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 p29


소수에 집중된 부는 즐기는 사람에게나 시샘하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위험한 사치를 낳는다. 이 부가 덜 불평등하게 분배된다면, 호사가 야기하는 파괴적인 독 대신에, 노동의 근원이고 가정적인 미덕의 원천인 여유가 생겨날 것이다. 사람들의 재산이 거의 같은 수준인 국가는 모두 평온하고 행복하며 단결된 모습을 보인다. 오늘날 스위스가 그렇다. - P29

은행권, 다시 말해서 지폐만이 수도의 수많은 필요를 해결해 줄 수 있다. 지폐는 팔리지 않은 물건만큼 많은 기호를 만들어낼 것이다. 필요한 것이 많으면 기호도 그만큼 많아져야 한다. 우리 시대에는 필요한 것이 너무 많다... 은행권을 현명하고 절제된 비율로 찍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은행권은 정부의 감독하에 유통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부는 국립은행을 가동시키는 장치에 손을 대지 않고 공적인 부의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 P32

누군가 말하길, 부는 쌓이는 성질이 있다고 했다. 이미 있는 곳에 또 모인다는 것이다. 부는 쌓이면 쌓일수록 더 많아진다. 루소는 처음의 1에퀴가 나중의 100만 에퀴보다 벌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사실은 수도에서 실감할 수 있다. 이 모든 부자들은 재산을 가지고 뭘할까?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중요한 것, 유익한 것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이 부자들은 남는 시간에 하찮은 일을 쫓아다니느라 애쓴다. - P127

국고에 쌓아둔 거금을 앗아가는 손쉬운 재빠른 속도는 15만 명에 달하는 서기들의 고되고 끝없는 노력과 대비된다. 이들은 한 손에 검을 들고 다른 손에 붗을 들고 폭력적으로 조그만 조각들을 요구한다. 이 조각들은 엄청난 양의 주화 더미를 이루게 되지만, 저수 탱크 바닥에 쌓이자마자 녹거나 사라져 버린다. 압축의 빨펌프가 중단 없이 격렬하게 작동해도 저수 탱크는 거의 언제나 말라 있다. 그래서 국민은 극도로 지쳐서 무기력하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쓰러질 지경이다. - P177

현재의 학습 진도표는 매우 잘못되어 있어서, 아무리 우수한 학생이 10년을 공부해도 모든 분야에서 배우는 것이 별로 없다. 문인들을 보면 참으로 놀랄 수밖에 없다. 그들은 독학으로 배운 것이다. 먼저 한 언어를 철저하게 알아야 다른 언어를 잘 배울 수 있는데도, 많은 현학자들은 아동들이 모국어를 알기도 전에 라틴어를 가르치려고 한다. 우리의 모든 교육체제에서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 퍼져 있는지! - P188

(샤를마뉴시대의) 그 훌륭한 정부의 균형상태가 카페 왕조의 초기 왕들에 의해 파괴되고 민족이 광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거대한 봉토를 강제로 왕실에 통합시키는 과정이 단지 인민을 적대적인 두 세력으로 분열시키는 데 그친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삼부회 소집은 오랫동안 절대권력을 지연시켰다. 그러나 서서히 절대권력이 발전했다.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 앙굴렘 가는 클로비스에 의해 시도되었다가 그 민족에 의해 강력하고 단호하게 분쇄되었던 바로 그 계획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때부터 민족은 눈부신 순간을 맞이했으나, 너무나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 P236

한편으로 나는 프랑스가 국가의 모든 사업을 수행할 만큼의 충분한 통화(通貨)를 갖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가 재정을 영국의 수준으로 올려놓기에는 통화가 부족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프랑스는 다른 국가들보다 재정이 취약하다. 홀란드인은 프랑스인보다 5배 더 부유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명목화폐와 실물화폐를 결합시킨 국가들의 정책을 찬양하고 싶다. 자금의 이동이 늘어날 것이고, 은행을 통해 국가에 존재하는 현금 기금이 얼마나 되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 - P458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22-08-29 20: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근래 본 조사자료 중에 전세계에서 역사적, 문화적 등 모든 면에서 남한과 가장 유사한 나라가 일본, 대만, 중국, 북한 바로 다음 다섯 번째로 프랑스라는 말을 듣고 크게 충격받았지만, 한편으론 그럴 듯 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2-08-29 22:24   좋아요 3 | URL
^^:) 그렇군요.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을 듣고 유럽에서 우리나라와 유사점이 많은 나라를 찾는다면 저도 프랑스보다는 이탈리아가 더 생각나긴 합니다만, <파리의 풍경>안의 내용을 생각해본다면 프랑스에서도 적지 않은 공통점을 발견한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8-29 22:23   좋아요 3 | URL
저도 이탈리아가 우리나라와 비슷하단 풍문 들어 눈여겨 찾아 보니 30번째 이상이었습니다. ㅋ
오히려 위에 말씀하신 네덜란드와 폴란드가 우리나라와 유사성이 더 많았습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2-08-29 22:28   좋아요 2 | URL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와는 다른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에도 그런 듯 합니다. 평판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북다이제스터님 감사합니다, 하루 마무리 잘 지으세요!
 

 

트라팔가르 해전은 60척의 전열함이 교전한 19세기 역사상 최대 해전 가운데 하나였다. 10월 21일 아침 일찍 적을 발견한 넬슨은 기함 빅토리호에서, 총 인원 1만 7천 명, 포 2148문을 탑재한 27척의 전열함과 4척의 프리깃함, 2척의 부속 선박에 전투 준비를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33척의 전열함과 5척의 프리깃함으로 이루어진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는 총 3만 명의 장교와 병사들, 2632문의 포를 싣고 있어서 규모가 더 컸지만 훈련과 사기 측면에서 영국 함대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258/1210


 9시 30분경 결정적 순간에 안개가 걷히고 "아우스터리츠의 태양"이 전장을 비추자 나폴레옹은 니콜라 술트 원수에게 프라첸 고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동맹군의 허를 찔렀고 그들의 군대를 둘로 쪼개어 병사들 사이에 혼란이 퍼져나갔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무너지고있던 동맹군의 좌측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프랑스 포병대는 얼음이 깨지도록 얼어붙은 웅덩이들에 포탄을 발사해 후퇴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따. 저녁 6시에 이르자 전투는 대체로 끝이 났다. 아우스터리츠는 나폴레옹 군사 전략의 걸작이었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279/1210


  군인이자 황제인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 ~ 1821)의 삶에서 트라팔가르 해전과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있었던 1805년의 전황은 프랑스 제국의 한계와 위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이 이끄는 영국 해군에게 봉쇄당한 해군과 유럽 대륙을 석권한 대육군. 나폴레옹이 이끄는 전투의 대부분이 유럽에 집중되기에(비록, 이집트 원정이라는 예외도 있지만), 나폴레옹과 관련한 역사책들은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분석을 유럽사에 한정한다. 이러한 분석이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나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난 걸출한 인물이 숙적 영국에 의해 번번히 막히다가, 운명처럼 러시아 원정의 혹독한 추위에 무너지고, 엘바 섬 유배 이후 극적인 탈출을 통해 부활을 꿈꾸다가 다시 워털루에서 꺾이고 말았다는 '영웅 서사'에는 적합할지 모르겠지만, 세계사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또 하나의 '봉쇄령'에 불과함을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Alexander Mikaberidze)의  <나폴레옹 세계사 The Napoleonic Wars>은 알려준다.


 러시아 원정은 나폴레옹 제국에 참사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제국은 전에도 시험에 들었지만 이전의 어느 실패도 러시아에서 당한 패배의 규모에는 근접하지 않았다. 대육군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침공에는 궁극적으로 60만 명가량이 투입되었지만 12월에 네만강을 다시 건넌 병사는 10만이 채 못 됐다. 50만 명의 병력 손실 가운데, 아마도 무려 10만명 정도는 이탈병일 것이고 12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나머지는 질병이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또는 혹독한 환경에 노출되어 죽었다. 그만큼 파국적인 것은 군사 장비의 손실이었다. 나폴레옹은 약 1300문의 대포 가운데 920문을 잃었고, 기병은 사실상 일소되었다. 훈련된 말 대략 20만 마리가 러시아 벌판에 쓰러져 있었다. 포병과 기병 어느 쪽도 향후의 전역 동안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714/1210


 마치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 ~ 1870)의 <두 도시 이야기 A Tale of Two Cities>의 두 도시처럼 서로 다른 영국과 프랑스의 극한 대립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남을 확인할 수 있다. 30년 전쟁을 통해 강대한 이웃을 두지 않으려는 프랑스의 정책이 독일을 오랜 기간 제후국들로 분열시켰다면, 영국은 더 큰 스케일로 통일유럽제국을 경계한다. 유럽사 속에서 세력 균형의 조정자로 처신해 온 영국은 신생 프랑스 공화국과 이어 등장한 프랑스 제국의 도전에 대해 강대한 해군력을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팽창을 제한한다. 


  나폴레옹 전쟁을 혁명적 투쟁들의 지속으로만 인식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18세기 전쟁의 맥락속에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18세기 전쟁의 맥락속에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1803년과 1815년 사이 유럽 열강은 거듭하여 전통적인 국가 목표를 추구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 상수가 있었다. 하나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창출하고, 그리하여 헤게모니적 권력을 수립하려는 프랑스의 결연한 의지였다(p11)... 영국은 전 유럽적인 제국을 건설하려는 프랑스 황제의 시도를 억지하고자 하는 폭넓은 동맹의 한가운데 있었다. 동맹 하나가 깨지기 무섭게, 런던은 급속히 확대되는 무역 네트워크와 산업 성장에서 나오는 이유 덕분에 재정적으로 뒷받침되는 새로운 동맹을 결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대결은 사실상 제국 건설과정에서 벌어진 두 사회 간의 투쟁이었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12/1210


 비록 프랑스가 7년 전쟁(Seven Years' War, 1756~1763)을 통해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상당한 해외식민지를 상실하긴 했지만, 여전히 서인도제도와 동인도 지역에서 세력은 잔존한 상태였고, 프랑스의 해군력 또한 트라팔가르 이후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기에 세계 각지에서 이들 세력간의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나폴레옹 세계사>에서는 이집트 원정, 생도맹그(아이티) 혁명, 루이지애나 매입 등의 사건이 세계사적으로 미친 영향에 대해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인도로 진출하려던 프랑스 원정군의 이집트 침입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타격을 주고,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프랑스 우방이었던 오스만 투르크를 대불동맹에 가담시키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이와 함께 쇠약해진 오스만 투르크는 이집트와 발칸반도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고, 이러한 틈을 러시아는 적극 활용하여 남쪽으로의 진출을 가속화하여 이란 지역에가지 이르게 된다. 이 시기 러시아의 남진 움직임은 19세기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으로 이어진다.



이집트 원정은 학문과 문화 영역에서 항구적인 유산 - 이집트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 을 남겼지만 본질적으로는 군사적/정치적 실패였다. 원정은 레반트에서 프랑스의 전통적인 정책들을 정면으로 위배하며, 영국 식민 권력을 강타하는 대신 프랑스의 전통적 맹방(오스만 제국)이 숙적 러시아와 영국과 손을 잡게 몰아갔다. 정치적으로는 총재 정부의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대대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1798년 후반기에 2차 대불동맹이 결성되도록 촉진했다. 그것은 공화주의 이상들을 식민주의와 영토 확장과 결합하려는 기획의 실패를 의미했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117/1210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패배와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은 세르비아인들에게 큰 힘을 실어줬으니 이제 러시아가 오스만튀르크에 맞서 세르비아를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술탄 마무드는 러시아의 간섭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신중히 처신했다. 그는 세르비아에 제한적인 자치를 허용하고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세르비아 군주로 인정했다. 정치적인 행보였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저도 모르게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해체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568/1210


 나폴레옹 전쟁은 과거 제국의 영화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유럽 열강의 장기판의 졸이 된 이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영국과 프랑스 양측에 배신을 당한 이란은 러시아의 손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전쟁은 카자르 국가의 비효율성을 만천하에 드러냈고 이란의 주도적 일부 인사들은 군사 개혁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여기에 나폴레옹 전쟁이 이란에 남긴 가장 항구적인 유산이 있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600/1210


 이와 함께, 에스파냐로부터 할양받은 막대한 영토인 루이지애나 지방은 북쪽 영국의 캐나다와 신생국 미국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위협이 결정적이게 된 것은 신생국 생도맹그(아이티) 의 독립이었다. 결과적으로 루이지애나의 매각은 미국의 힘을 2배로 키워주었으며, 향후 미국이 2개 대양에 이르는 거대국가로 만드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다. 


 생도맹그 원정의 실패는 프랑스에 즉각적인 결과를 야기했는데, 프랑스는 이제 가장 수익성 좋은 식민지와 카리브 해역의 상업 중추를 상실한 셈이었다. 더욱이 생도맹그 대참사는 대서양에서 프랑스 식민 제국 건설이라는 보나파르트의 웅대한 비전을 산산조각 냈다. 영국과의 새로운 전쟁이 거의 불가피한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새로 수복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보호할 수 있을지 걱정이 컸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191/1210


 미국에게 루이지애나 매입은 "역사적 중요성에서 독립선언과 연방 헌법 채택에 다음가는" 획기적인 순간이었다. 미국의 크기는 두 배로 늘어났고 미시시피강 전역과 멕시코만 연안의 많은 부분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루이지애나 영토는 새로운 15개 주의 일부나 전부를 구성하게 된다. 매입은 미국인들이 그 지역에서 외세의 영향력을 제한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고, 북아메리카의 인구 구성을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팽창패턴을 작동시켰다. 루이지애나 매입지의 경계가 매우 모호했기 때문에 명백한 운명 - 미국은 그 방대하고 광활한 공간을 소유하고 정착할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는 발상 - 은 거의 불가피했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174/1210


 전시대 아메리카 대륙에 거대한 제국을 세웠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이 시기에 완전히 쇠락하여, 본국은 프랑스의 지배를, 라틴 아메리카 지역은 독립하면서 중상주의 제국시대는 종결된다. 그렇지만, 아이티 독립 이후 수많은 독립혁명의 움직임과 영국의 침략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먼로주의를 표방한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게 된 것이 라틴 아메리카의 비극이다. 앵글로 아메리카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의 종속적 지배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이로써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독립운동의 서막이 올랐고,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탄생과 함께 1776년에 성립된 현 제도적 상태가 깨졌다. 기존의 식민 행정구조(부왕, 아우디엔시아 audiencia '왕립심문원', 식민지 최고 사법기관)는 새로운 정치 현실들에,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능동적인 무장한 평민 집단의 등장에 적응하기 위해 씨름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이 겪은 가장 큰 실패 가운데 일부였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610/1210


 미영전쟁은 그러므로 무승부로 끝났지만 항구적인 유산을 남겼다. 미국 쪽에 전쟁은 제임스 매디슨 행정부가 내세우는 것과 달리 전혀 압도적인 승리가 아니었다. 미국의 전쟁 목표 가운데 거의 어느 것도 달성되지 않았고 최종 조약은 미국 시민의 강제 징모와 영국의 해상 관행을 비롯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은 미국의 정치를 재편했다. 연방파의 붕괴에 기여하고 전쟁의 여파로  새로운 국가적 목적의식과 미국인들 사이에서 일치단결을 반영한 이른바 호감의 시대 Era of Good Feelings를 열었다. 이 분쟁은 또한 미국의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치열하게 논의될 경제적/재정적 개혁의 필요성을 조명했다. 전쟁에서 미국의 명명백백한 성공 한 가지는 강력한 군사력이자 미국 국가 안보의 근간으로서 미국 해군의 부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은 북아메리카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보장하고 최초의 탈식민 열강으로서 미국의 부상을 촉진하며, 1775년에 시작되었던 것을 완수했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777/1210


 세계 전역에서 이루어진 거의 모든 식민전쟁에서 프랑스는 철저하게 파괴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 시기 동안 이집트, 이란,동남아시아, 아프리카에서부터 인도로 넘어오려는 프랑스의 시도를 좌절시켰기에 가능했다. 인도라는 배후지를 지키는 영국의 해군력은 결국 대륙봉쇄를 뚫고, 나폴레옹의 제국을 예정된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


 인도는 19세기 당대인들에 의해 영제국의 "왕관 한가운데 보석"으로 묘사되어왔다. 광대한 아대륙은 결코 바닥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천연자원의 원천이자 영국 상품을 위한 어마어마한 시장이며 영국의 가장 소중한 속령이었다. 인도와의 통상과 그부터 나오는 막대한 이익은 영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도에서 이전된 세수는 나중에 영국의 경제력을 뒷받침하고 영국의 군사력, 특히 가장 유명한 영국 해군을 지탱하는 공장을 비롯해 다른 경제활동에 재투자되었고, 덕분에 영국 해군은 전지구에 걸쳐 자국의 이해관계를 성공적으로 수호했다. 인도가 없었다면 십중팔구 영제국도 없었을 것이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629/1210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의 <현금의 지배 Money and Power in the Modern World, 1700~2000>에는 워털루 전쟁에서 영국 국채에 돈을 걸어 막대한 이득을 취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모습이 나오지만, 당시 전후 사정을 본다면 극적인 서술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 그룹에서 채무자의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면, 승패는 미셸 네의 무모한 근위대 기병돌격 명령이 내리기 이전에 이미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아니, 나폴레옹 전쟁 이전에 영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는 순간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의 전쟁은 징세(다소 느리고 뒤엉킨 과정)에 내재한 문제들과, 가장 부유한 계층이 대체로 납세에서 면제되는 특권 체제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세금으로 충당되었다. 사실 프랑스의 식민지 야심을 지탱하는 돈은 세계 금융에서 나왔다. 18세기 내내 프랑스는 외국 채권자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릴 수 있는 국제 자본시장에 갈수록 의존하게 되었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28/1210


<나폴레옹 세계사>를 통해 나폴레옹과 그의 빛나는 전술적 승리 이면에 숨겨진 전략적 패배와 세계역사의 씨앗들을 발견하게 된다. 자유, 평등, 우애(Liberte, Egalite, Fraternite)라는 혁명의 이념들로 일어섰고, 이러한 사상들로 세계각국의 민중들로부터 환영받으며 이룩한 거대한 성공. 이러한 성공을 담보로 유럽대륙을 하나의 제국으로 묶으려던 시도가 역설적으로, 혁명으로 자각된 민족의식으로 패배하게 된 과정과 혁명에서 이루어진 과정이 오히려 빈 체제에서 반혁명 보수체제를 더 공고하게 하는 아이러니를 <나폴레옹 세계사>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나폴레옹은 시대에 뒤처지기도 하고 앞서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 계몽 전제군주이자 근대 국가의 선지자였다. 유럽에게는 나폴레옹 정권이 근대 세계에 대한 신선한 관점이자 그 자원과 국고를 고갈시키는 권력의 행위를 의미했다. 한 독일 역사학자의 평가는 유럽 다른 지역들에도 적용될 수 있을 텐데, "독일 민족의 역사와 그들의 삶과 경험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근대 독일 국가의 최초 토대가 놓이고 있던 시기에 압도적이었다. 한 국민의 운명이란 그 국민의 정치이며, 그 정치들이란 나폴레옹의 정치, 즉 전쟁과 정복의 정치, 착취와 억압의 정치, 제국주의와 개혁의 정치였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374/1210


 프랑스의 제국적 노력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독일 국가들에서 민족의식의 기운을 일깨웠고, 프랑스의 점령은 교육 받은 엘리트층과 궁극적으로는 서민들로부터 애국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프로이센에서는 민족 정서가 꿈틀대고 있었고 이곳의 저명한 독일 작가와 철학자들은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고 민족주의 선전과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일깨우는 데 위대한 재능을 바쳤다. 앞서 겪은 군사적 패배들과 그에 따른 깊은 낭패감과 굴욕감은 독일 계몽사상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 일조해, 이전의 세계시민주의와 합리주의 요소를 희생시켜가며 독일 계몽주의에 낭만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특색을 가미했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698/1210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의 전쟁은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 ~ 2019)에 의하면 핵심부의 헤게모니(hegemony)에 대한 주변부 도전의 패배, 이어지는 '중도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홉스봄(Eric Hobsbawm, CH, 1917 ~ 2012)에 의하면, '혁명의 시대' 중 시민혁명의 이데올로기와 산업혁명의 구조가 결합되어 이후 '자본의 시대'로 이어지는 연결점이 될 것이다.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 ~ 1985) 에 따르면, 오랜 장기지속적 과정을 통해 영국 우위로 이미 결정적인 사안이 될 것이겠지. 


 이처럼 <나폴레옹 세계사>는 단순한 정복전쟁이 아닌 세계사의 한 결정적 사건(epoch)으로 나폴레옹 전쟁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다소 두껍지만 읽을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페이퍼에 언급된 다른 책들과 함께라면 더 좋을 것이라 여겨진다. 아직 리뷰를 쓰지 못한 책들은 조만간 올리는 것으로 하고 나폴레옹 전쟁을 요약하면서 페이퍼를 갈무리하자...


 같은 시기에 인도에서는 영국의 제국 세력이 공고해졌으니 이 같은 사태 전개에 힘입어 19세기에 영국은 지구적인 패권국가로 등장할 수 있었다. 이 제국 건설 과정은 인력과 자원의 막대한 투입을 요구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반도전쟁으로 죽은 영국인보다 더 많은 영국인이 서인도제도와 동인도제도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된 전역 기간 동안 죽었다. 영국의 팽창만이 이 시기에 지구적 관련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초에 러시아는 핀란드와 폴란드 ,북동 태평양에서 식민지적 계획을 추구했던 한편, 오스만 제국과 이란을 희생시켜 발칸반도와 캅카스 지역에서 팽창을 도모했다. 대서양 세계 한군데에서만 나폴레옹 전쟁은 이미 자리 잡은 세 유럽 제국과 신생 공화국 미국이 저마다 영토를 보전하고, 경쟁국을 희생시켜 자국 영토를 확대하려고 작정하면서 활발하게 경쟁하는 모습을 목도했다.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영토를 구입하면서 국토가 두 배 이상 늘어났고, 1812년 전쟁으로 영국에 도전했다. 카리브해에서 프랑스 혁명은 대서양 연안에서 일어난 노예 반란 가운데 가장 중대한 반란이 아이티 혁명을 불러왔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808년 나폴레옹의 에스파냐 점령이 독립운동을 자극해 에스파냐 식민 제국을 종식시키고, 그 지역에 새로운 정치적 현실을 창출했다. 이슬람 세계에서도 중대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오스만 제국과 이란에서 발생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격변은 "동방문제 Eastern Question"이라는 고민거리의 토대를 놓았다. 이집트에서는 1798년과 1807년 영국과 프랑스의 침공으로 메메트 알리가 부상하고 19세기 나머지 기간 동안 중동문제를 규정지을 강력한 이집트 국가가 궁극적으로 출현했다. _ 알렉산더 미카베리즈, <나폴레옹 세계사>, p14/1210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란공 2022-07-17 23: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폴레옹의 존재가 세계사적 사건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고 이해되기도 합니다. 정말 많은 사건들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네요^^;; 나폴레옹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너무 일을 크게 벌였네요. ㅋ 정성들여 써주신 글에 언급하신 책들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7-17 23:51   좋아요 3 | URL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폴레옹 전쟁의 의미를 이정도로 깊이있게 다룰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를 통해 사건뿐 아니라 그 영향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페이퍼에 있는 도서는 제가 아는 정도지만 초란공님께서는 또다른 연결점을 찾으시리라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

페크pek0501 2022-07-18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튜브에 들어가서 공부하기 위해 철학이나 역사 분야의 영상을 보는데요, 오늘은 어느 쪽을 볼까 고민한답니다.
그런데 겨울호랑이 님의 서재에 오면, 으음... 역시 역사 쪽을 봐야 돼,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

겨울호랑이 2022-07-18 13:14   좋아요 1 | URL
페크님의 선택에 제 글이 작은 도움이 되었네요.^^:) 저도 철학과 역사 중 하나를 고르라면, 아무래도 역사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ㅋㅋ 페크님 오늘도 건강하게 하루 보내세요!
 

 

흐루셰브스키의 《우크라이나- 루스의 역사》7권은  '코자크의 시대' 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 후  10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내용이 코자크 지도자들과 코자크 집단의 활동에 대한 서술로 채워지고 있다. 흐루셰브스키는 코자크를 우크라이나 민족성의 근간으로까지 여긴다(p64)... 흐루셰브스키의 이러한 목적론적 사고와 밀접히 관련된 것이 동서 우크라이나의 연결성, 단일성에 대한 강조이다. 그는 옛 키예프 루스의 동북부지방과 서부지방을 구분하여 서부지방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구성 부분으로 확신하는 반면 동북부지방은 이 구성에서 제외해 버린다. 동북지역이 외부자로 여겨지는 반면 서부지역은 키예프 루스의 적통을 공유하는 우크라이나 공들의 통치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68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Mykhailo Hrushevskyi, 1866~1934)의 <우크라이나의 역사 >는 '코자크'에 근간을 둔 '친(親)서방적'인 저자의 사관(史觀)이 잘 드러난 책으로 서술된 여러 곳에서 저자의 이러한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루스'라는 용어 사용이다.


주) 루스라는 말은 동슬라브인들의 역사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곧 동슬라브인의 최초의 국가 이름이 되었고 이 말에서 러시아라는 이름이 나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루스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둘러싸고는 수많은 논쟁이 있다. 노르만 기원설의 지지자들은 루스가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의 한 부족 이름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흐루셰브스키는 루스를 키예프 일대의 슬라브계 주민 집단인 폴라녜와 동일시하고 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132


 저자는 '루스'에서 '러시아'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한다. 우크라이나의 중심지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로 한정하면서, 러시아와 구별된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렇지만, 폴란드 건국신화인 '레흐 Lech와 체흐 Czech, 루스Rus' 삼형제 이야기에서 사냥감을 쫓던 형제들이 흩어져 레흐는 훗날 폴란드의 조상이, 체흐는 체코의 조상이, 루스는 러시아 민족의 선조가 되었다는 내용을 생각해 본다면 의도적인 '러시아 배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작성되어 남아 있는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우크라이나의 공들과 그들이 군대는 항상 루스 혹은 루스 사람이라고 불린다. 현지의 사료들에서도 키예프 땅은 루스라고 불렸다(p171)... 우리에게는 이 이름이 키예프와 밀접하게 결부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를 근거로 우리는 9세기, 10세기에 외국 사료들에 등장하는 루스 혹은 루스 드루쥐나에 대한 보고들이 키예프 국가에 관한 것이자 키예프를 수도로 삼고 있던 공들과 그들의 드루쥐나에 관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172


 <우크라이나의 역사>의 저자 흐루셰브스키에 대해 옮긴이는 해제에서 '역사서술로 우크라이나 민족을 만들어내다'고 간결하게 표현한다. 민족적으로는 러시아와 가깝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리스-로마, 비잔틴, 독일-오스트리아 등 서방과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우크라이나인의 정서가 이런 면에서 잘 드러난 책이 <우크라이나의 역사>라 여겨진다. 친러시아와 친서방의 대립이 현대 우크라이나 정치의 중요한 두 축임을 고려해 본다면, 그 뒷면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역사> 1권과 2권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개별 리뷰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흐루셰브스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성이 러시아와는 다르며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보다는 서방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그는 할리치나에 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드니프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통치에 비해 전반적으로 더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물론 비판적인 서술이 없지 않지만 이런 경우에도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제국 지배자의 사정을 이해해 가면서 온건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한 흐루셰브스키인지라 그가 이끄는 중앙 라다 정부가 러시아 혁명 이후  불확실성이 가득한 상황에서 독일 군을 불러들인 것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독일 세력의 지원을 받자는 의도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가 기본적으로 독일을 서방의 일원으로 보았고 러시아보다는 독일과의 정치적 동맹을 선호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77


* 흐루셰브스키의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함께 셰브첸코의 <유랑시인>도 우크라이나인의 정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 생각된다. 또한, 20세기 초반까지 다루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다루지 못한 현대사를 이해하는 것에는 구로카와 유지의 <유럽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각각 별도의 리뷰로 다루기로 하자.


**  아카넷에서 번역된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러시아 번역본을 원전으로 번역한 책이다. 때문에,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기존 러시아어로 사용되던 명칭이 우크라이나어로 변경되는 현 상황과는 다소 맞지 않지만, 리뷰 작성을 위해 모든 지명을 우크라이나어로 찾아서 수정할 수도 없기에 번역본의 지명, 인명 등은 그대로 가져온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달 2022-05-18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18 16:51   좋아요 0 | URL
종이달님, 감사합니다.

종이달 2022-05-20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반갑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중심성은 세계경제의 헤게모니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 간 투쟁의 중심성의 한 결과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 투쟁에서 프랑스의 임박한 패배감에 뒤이어 그리고 그것의 한 결과로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헤게모니 투쟁에서 패배했던 바로 그 나라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그것이 미쳤던 바와 같은 영향을 세계체제에 미쳤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승리의 물결을 뒤집어 엎으리라고 기대했던 프랑스 혁명은 반대로 지속적인 영국의 승리를 확인시켜주는 데에 결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지경학적(地經學的) 패배 때문에, 프랑스 혁명가들은 실제로 그들의 장기적인 이데올로기적 목표들을 달성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p145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2019)은 <근대세계체제 The Modern World-system>에서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영국과의 헤게모니(hegemony) 투쟁에서의 패배에서 찾는다.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 ~ 1763), 인도에서의 플라시 전투(The Battle of Plassey, 1757) 그리고 후대 아프리카에서의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 1899)에서 보듯 세계 전역에서 프랑스는 영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있었고, 나폴레옹 제국의 붕괴 이후에는 신생 강국 프로이센(Prussia)으로부터 2인자의 위치도 위협받는 처지에 몰려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는 <미슐레의 민중 Le Peuple>에서 프랑스의 새로운 희망을 민중으로부터 발견한다.


 하나의 민중 ! 하나의 조국 ! 하나의 프랑스 ! 결코 두 개의 국가가 되지 말기를 기원하노라. 단결이 없으면 우리는 파멸한다. 어찌 이것을 보지 못하는가? 모든 조건의, 모든 계급의, 모든 당의 프랑스인들이여, 한 가지만 기억하라. 당신들에게 이 지상엔 단 하나의 확실한 친구만이 있을 뿐이며, 그것은 프랑스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8/144


  민중에 대한 나의 오랜 연구 기간을 통틀어 언제나 나에게 충격을 주어왔던 그들의 중요하고 가장 현저한 특징은 결핍의 무질서와 비참한 악덕 속에서도 풍요로운 감정과 선한 심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네. 그런데 부유한 계층에게서는 그것을 거의 찾을 수 없었지. 게다가 누구라도 이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네. 콜레라가 창궐하던 시기에 누가 고아들을 입양했는지 아는가? 가난한 사람들이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2/144


 <미슐레의 민중>은 '프랑스 민중'과 국가 '프랑스'를 연결시킨다. 그는 헤게모니 전쟁에서 패배하고 1848년 혁명전야의 혼란 속의 프랑스 정세를 프랑스 민중의 모습에서 발견한다. 산업화 시대 속에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해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쇠락해가는 프랑스의 모습에 다름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이를 이겨내는 민중들의 모습에는 분명 미래 프랑스의 희망이 담겨 있었다. 


 육체적 허약함과 정신적 무능, 이런 상황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무능의 감정이다. 기계의 모든 움직임에 맞추면서 기계 앞에서 허약해진 이 사람은 공장주는 물론, 부지불식간에 그의 일감을 잃게 만들어 그의 빵을 빼앗아갈 수 있는 천 가지의 원인들에게도 종속하게 된다... 이들의 악행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극도로 육체에 의존하게 되어 본능적인 삶을 요구하게 되며 그것은 육체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어 결국 무능한 정신과 공허한 영혼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31/144


 이런 희망의 싹을 민중들은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들의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드러난 부정적인 면 대신 드러나지 않은 긍정적인 면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미슐레는 현재 세대가 아닌 미래 세대인 어린이들에게 주목하고, 이들에게 신념을 심어줄 것을 주문한다.


 프랑스가 다시 신념을 갖고 그 미래를 염원하기 위해서는 그 과거로 되돌아가 본연의 천재성에 천착해야 한다. 그 일을 진지하게 마음으로부터 하려 한다면 이 연구를 통해 확립된 전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일들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과거로부터 미래가, 즉 프랑스의 사명이 당신에게 흘러나오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에게 온전한 빛 속에 드러나게 될 것이며, 당신은 믿을 것이고 믿는 것을 사랑할 것이다. 신념은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15/144


 구체적으로 미슐레는 본문에서 공립학교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신념을 불어넣어 줄 것을 주장한다. 민중들이 국립학교에서 국가에 대해 배우고, 자신의 신념을 세울 때 비로소 프랑스는 과거 프랑스 혁명 시대의 영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미슐레의 민중>을 관통하는 주제다. 


 어린이에게 지속적으로 강력한 조국의 영향을 미칠 기관이란 학교로서 언젠가 세워질 위대한 국립학교이다. 나는 진정으로 모두가 공유하는 학교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모든 계급의 모든 어린이들이 1~2년 동안 나란히 함께 앉아서 어떤 특정 교과를 배우기 이전에 프랑스에 대해서만 배우는 곳이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17/144


 이 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대단히 강력한 것 두 가지를 갖고 있다. 프랑스는 원칙과 전설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가장 원대하고 가장 인간적인 관념과 동시에 가장 많이 따르는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이다. 중세에 은총이라는 교리 속에 묻혀 있던 이 원칙, 이 관념을 인간의 언어로는 형제애라고 부른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09/144


 <미슐레의 민중>은 이처럼 변화된 프랑스의 힘을 공립교육과 우정(박애)으로부터 찾지만, 사실 이들 모두는 프랑스 대혁명의 유산이다. 콩도르세(Nicolas de Condorcet, 1743~1794)가 제안한 공교육에 관한 개혁안, 프랑스 대혁명의 주요 이념인 '박애'를 생각해 본다면, 결국 미슐레는 프랑스 혁명 정신을 통한 자본시대 극복을 강조했음을 알게 된다. 

 

 "Liberte, Egalite, Fraternite ou La Mort." '자유, 평등, 박애, 그것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이 과격한 문구가 프랑스의 국가적 이념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실 자유와 평등은 상충하는 개념이다. 애초에 인간 사회는 평등하지 않으며 누구나 배타적 자유를 즐기고 싶어 하는데, 이 두 개념을 변증법적으로 융합시킬 제3의 개념이 박애로 알려진 'Fraternite'인 셈이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1.7> <자유, 평등, 그리고 능력주의>, p5


 평등과 자유의 고결한 친구들이여, 여러분의 힘을 한데 모아, 공권력으로부터 이성의 빛을 퍼뜨릴 수 있는 교육을 얻어내도록 하라. 그럴 생각이 없다면, 여러분이 기울인 고귀한 노력의 모든 결실이 머지않아 사라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p61)... 공권력은 자신의 첫 교육이 맺은 열매를 우연 속에 방기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의 자상한 권위의 보살핌에 이어 이제 성인들에게는 공권력의 도움이 주어질 것이며, 그러한 도움은 성인의 독립적인 이성이 열렬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리라. _ 콩도르세, <콩도르세, 공교육에 관한 다섯 논문>, p144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다수 민중을 '목적'이 아닌 국가를 위한 '수단'으로 파악한 점,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인류의 차원으로 확장시키지 못하고 프랑스만의 사상으로 한정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미슐레의 주장은 시대퇴행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그의 글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무모한 돌격 전술을 감행한 프랑스 지휘관들의 무모함을 떠올린다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여기에 최근 폐지가 예정된 프랑스 엘리트층의 산실이었던 국립행정학교(ENA)와 관련된 프랑스 사회의 논쟁은 그가 강조한 공립학교 교육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물음을 던지게 된다. 


 [관련기사] :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38


 이러한 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한계가 명확해 보이지만, 새로운 시대의 빛을 어벤져스(Avengers)가 아닌 평범한 대중들로부터 찾으려 했다는 점만은 분명 그가 평가받을만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미슐레의 민중>이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중심으로 민중을 인식했다면, 산업국가 영국의 민중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이들의 삶은 칼 마르크스 <자본 1>과도 연계된 부분인만큼 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삶은 삶을 비추고 삶에 끌릴 뿐 고립에 의해서는 소멸한다. 삶이 자신과 다른 삶과 섞이고 다른 존재와 연계될 때 그것은 더 큰 힘과 행복과 풍요속에 존재하게 된다.(p53)... 단순한 사람들은 삶에 공감하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훌륭한 재능을 갖게 된다. 그것은 최소한의 흔적만으로도 그들은 삶을 충분히 직시하고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81/144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21-07-16 2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고 있는 역사학자 카가 쓴 <새로운 사회>라는 책에서 프랑스 혁명이 없었으면 지금 세상이 더 좋아졌을거란 문장을 보고 충격받고 있는 중입니다.
이유는 책 끝에 얘기해 준다고 하는데 넘 기대됩니다. ^^

겨울호랑이 2021-07-16 21:04   좋아요 1 | URL
저도 말씀을 듣고 보니 매우 기대가 되어 책을 담아 갑니다.미끼용 멘트가 아닌 의미 있는 통찰이 담겨있었으면 합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1-07-16 21:17   좋아요 1 | URL
다른 사람도 아닌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대학자 카인데 미끼는 아닐거라 믿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7-16 21:28   좋아요 1 | URL
전체는 아니겠습니다만, 대체로 영국과 프랑스 역사 학자들은 대체로 상대국의 역사 평가에 박한 듯 합니다. 혹시 카의 평가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물론 들여다보면 설득력이 있는지 알겠지만요. 북다이제스터님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