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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의 면공업은 영국에 새로운 기술을 전수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 영국의 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 강제적으로 인도의 탈공업화 전략을 통해서 그 발전이 억제되었다. 제국주의 팽창 이전에 인도의 면공업은 영국 면공업에 대한 주요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으나 이후 인도의 면공업 종사 노동자는 그 이후 유럽에 대한 값싼 식품과 원재료의 공급자로 전락하고 만다._김영철, <자본, 제국, 이데올로기> <산업혁명기의 기술혁신과 대외무역과의 관련성에 관한 연구>, p123 


스벤 베케트(Sven Beckert)의 <면화의 제국 Empire of cotton>을 관통하는 주제는 자본주의(capitalism)다. 북반구와 남반구 30도 이내 지역에서 널리 재배되던 면화. <면화의 제국>은 중국과 인도의 면직물에게 밀렸던 유럽의 면직물 산업이 어떻게 경쟁국들을 따돌렸는가를 잘 설명한다. 많은 경우 19세기 유럽 제국주의 침략을 제국주의, 종교, 과학기술, 자본주의의 결합이라고 설명하는데, <면화의 제국>에서는 이들 중 제국주의, 과학기술, 자본주의가 어떻게 제도를 변화시켰는가를 잘 보여준다.

 

 전쟁자본주의는 세계를 '내부'와 '외부'로 가를 수 있는 부유하고 강력한 유럽인들의 역량에 의지했다. '내부'는 모국의 법과 제도와 관습을 포괄했고, 국가가 부과한 질서의 지배를 받았다. 반대로 '외부'를 특징지은 것은 제국의 지배, 방대한 지역의 수탈, 원주민 학살, 자원 약탈, 노예화, 그리고 멀리 떨어진 국가의 효율적인 감시를 벗어난 민간 자본가들의 방대한 토지 지배였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85

 스벤 베커트는 <면화의 제국>에서 유럽의 자본주의를 크게 2종류로 나눈다. 전쟁자본주의와 산업자본주의가 그것으로, 다른 세계에 비해 여러 면에서 부족했던 유럽인들은 무기를 활용한 침략과 식민지 건설을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자본주의로부터 축적된 이윤을 바탕으로 산업자본주의로의 이행(移行). 이것이 스벤 베커트가 바라본 진화된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사진] Florida's Culture of Slavery(출처 : https://floridahumanities.org/floridas-culture-of-slavery/)


 유럽인들은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에 착수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냈고, 생산에 뛰어든 뒤로는 철저히 노예제에 의지해 부를 창출했다. 제국주의적 팽창과 수탈, 노예제라는 세 동인이 새로운 전 지구적 경제질서를 조성하는데,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가 등장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세 동인들은 이 새로운 세계의 한 가지 또 다른 요소와 결합했다. 바로 국가였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84


 여전히 규모도 작고 기술적으로도 뒤처진 유럽 면산업의 기반을 잡아준 것은 바로 제국의 팽창, 노예제, 토지 약탈로 요약되는 전쟁자본주의였다. 전쟁자본주의 덕분에 유럽의 면산업은 역동적인 시장을 얻었고, 기술력과 필수 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전쟁자본주의는 자본 형성에도 중요한 추진 장치가 되었다.(p104)... 마지막으로, 전쟁자본주의는 보험, 금융, 운송처럼 영국 면산업의 등장에 매우 중요했던 부문뿐 아니라 국채, 화폐, 국방 같은 공적 제도들까지 부양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105


 그렇다면, 전쟁 자본주의 체제에서 영국이 승자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스벤 베커트는 인류 최초의 그리고 최대의 글로벌 상품인 면화 네트워크를 장악할 수 있는 강한 해군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초기 인도 면직물과의 경쟁에서 열위(劣位)에 있을 때는 보호무역 조치로, 산업혁명 이후 산업 경쟁력을 갖춘 이후에는 자유무역주의를 밀어 붙이며 영국은 룰 메이커(rule maker)로서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 지구적 수준에서 보면 영국 노동자들이 생산한 면직물의 양은 극미했고, 영국의 농부들은 아예 면화를 생산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영국이 생산을 개조하고 면화로 촉발된 산업혁명의 진원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영국 상인들이 이런 글로벌 네트워크를 장악했던 덕분이다. 산업자본주의는 확실히 혁명적이긴 하지만 앞선 몇 세기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전쟁 자본주의의 산물이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117


 초기에 영국의 면제조업자와 상인은 자국산 직물과 인도산 직물을 아프리카로 수출하는 데에 주력했다. 해외 시장에 대한 이런 의존성은 1750년 이후에 뚜렷해졌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메리카가 가장 중요한 시장이어서, 18세기 중반이면 영국 직물 수출의 94%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 향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103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영국 제국주의 = 간접통치 방식 = 인도주의적인 지배방식'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보다는 오늘날 문화제국주의의 전단계 모습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통치방식을 선호했을 뿐이라는 것이 영국제국주의의 본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갤러허(J.Gallagher)와 로빈슨(R.Robinson)은 직접지배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도에 걸쳐있는 간접지배도 제국주의로 규정하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정부는 특히 간접지배를 선호했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약식 제국주의(informal imperialism)는 실상 통치비용을 들이지 않는 값싸고 효율적인 지배를 의미한다. 무역을 통한 간접지배를 선호하는 자유무역 제국주의는 영국의 절대적인 공업력 우세와 강력한 해군력이라는 물질적 토대 위에서 생겨나고 유지될 수 있음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_서정훈, <자본, 제국, 이데올로기> <빅토리아 후기(1870~1903)의 대외팽창 성격>, p205


 19세기 영국의 자유무역주의는 그 주창자들이 내세우는 만큼 실제로 공평한 무역관계를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발달 정도가 다른 산업 사이의 "자유 경쟁"에서 영국 산업이 이익을 우선적으로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가 실제로 수입관세를 점차로 낮추다가 1880년대부터 사실상의 자유무역제를 실시하게 된 것은, 직물업자를 위시한 영국의 자유무역주의자들의 거센 압력 때문이었다._이태숙, <자본, 제국, 이데올로기> <토머스 B, 머콜리와 인도>, p274 

 전쟁 자본주의와 산업 자본주의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전쟁 자본주의가 노예제에 기반한 생산구조였다면, 산업 자본주의는 임금(賃金)에 기반한 생산구조였다. 전자가 노동의 양(量)적 착취에 기반했다면, 후자는 노동의 질(質)적 착취에 기반한다. 산업혁명을 통한 기계(자본재)의 공급 확대는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으나, 동시에 더 많은 노동력의 투입이 요구되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자본론 Das Kapital>의 절대적 잉여가치, 상대적 잉여가치의 개념 이해는 이와 연관시켜 보면 좋을 것이라 여겨진다. 동시에, <자본론1>에서 언급된 여성, 아동들에 대한 노동 착취는 산업 자본주의 이행기의 실상을 상세하게 고발하기에 함께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다시 돌아와서,


 방적과 직포와 채탄 분야의 개량들은 대체로 노동을 절약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들은 이전까지 다수의 노동자가 이루어 낸 성과를 소수의 노동자가 성취할 수 있게 했고, 예전에는 성인 남녀에게 적합했던 작업을 아동들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음에도 생산량은 대폭 늘어나 성인 노동자 대부분의 수입은 증가했다._T. S. 애슈턴, <산업혁명>, p184

 분명 산업혁명은 주로 노동력 절감 기술에 관련된 것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방적 부문에서 생산성이 수백 배나 향상된 것을 목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절감하는 이런 기계들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역시 노동력이 필요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288


 제조업자들은 이 모든 기계를 가동시키고 공장을 가로질러 면화를 이동시키기 위해 수백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아동과 여성이었다. 모든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공장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가 임금을 받고 일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는 산업자본주의가 이룬 또 다른 중요한 제도적 혁신이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128


 임금을 주어 엄청난 수의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그들의 작업을 감시하며 그들이 기술과 열정을 쏟게 하는 동안 새로운 딜레마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공장을 벗어난 노동자들의 가정과 거주 지역에서 고용주의 권한은 훨씬 더 멀어졌다. 노동자들을 모집하고 규율을 시행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노동조건이 끔찍했기 때문이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307


 <면화의 제국>에서는 이처럼 전쟁 자본주의에서 산업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통해 유럽 사회가 어떻게 패권을 장악했는가를 설명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쟁 자본주의가 산업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 신생국 미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바로 미국 남북 전쟁(American Civil War, 1861 ~ 1865)이다.


 미국이 급부상하며 시장을 지배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원면 생산에 투입되는 세 가지 필수 요소, 즉 노동과 토지, 신용의 공급이 유연했다.(p378)... 면화가 중심이 된 미국 남부의 독특한 정치경제가 이제 막 싹튼 북부의 자유노동과 자국의 산업화를 추구하는 정치경제와 충돌했을 때, 미국의 노예제는 그 체제를 통해 이룬 번영을 스스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1861년 4월 남부연합과 북부연방 사이에 발발한 전쟁은 미국 영토의 통합과 그 '특유한 제도'의 미래를 둘러싼 투쟁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노예노동으로 지탱되고 있던 글로벌 자본주의를 둘러싼 투쟁이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381


[사진] American Civil War(출처 : https://www.history.com/topics/american-civil-war/american-civil-war-history)


 우리에게 링컨(Abraham Lincoln, 1809 ~ 1865)과 노예제 폐지, 톰 아저씨의 오두막으로 유명한 남북전쟁이지만, 그 실상은 남부의 전쟁자본주의와 북부의 산업 자본주의간의 패권 전쟁이자, 글로벌 자본 간의 격돌이었다. 링컨은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1811 ~ 1896)에게 남북전쟁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고 말했다지만, 결국 노예제 폐지는 명분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미국 남부에서 면화 재배가 확대되고 영국의 소비자들, 최종적으로는 유럽 대륙의 소비자들이 미국 남부의 면화 공급에 점점 의지하게 되면서 미국 남부와 유럽 사이의 제도적 연결이 점점 더 심화되었다... 이 모든 네트워크의 중심에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면화의 흐름과 그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자본의 흐름이 있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193


 같은 시기에 읽은 <면화의 제국>, <자본, 제국, 이데올로기>, <산업혁명>등을 종합한다면, 19세기에 만들어진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란 면화로 대표되는 열등한 상품 경쟁력을 만회하기 위해 총칼로 식민지를 만들어 상품공급지와 소비지로 만들어 막대한 이윤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전쟁 자본주의에서 산업 자본주의로 이행하며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경제력 우위 수준에 따라 보호주의와 자유주의를 번갈아 사용하고, 대량 생산을 통해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과학 기술이 활용되며, 필요에 따라 이데올로기로서 '인권', '자유' 등의 개념이 남발되는 것을 이들의 책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비춰볼 때, 과연 오늘날 서구의 부(富)의 기원이 무엇인지, 그들이 동양에 대해 갖는 편견의 근거는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역사는 순환하는 것이어서, 그들이 그토록 경멸하던 중국, 인도의 발전을 이제는 경계하는 지경에 이른 것을 보면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


 잉글랜드를 구출한 것은 지배자들이 아니라, 자신만의 협소한 목적을 추구한 것이 분명하지만 새로운 생산 도구와 새로운 산업 경영 방법을 창안할 만한 지혜와 자질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인도와 중국의 평원에는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남녀들이 낮에는 함께 일하고 밤에는 따로 잠자는 가축들보다 외견상 거의 나을 게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같은 아시아의 생활수준과 기계화되지 않은 그런 공포는 산업혁명을 거치지 않고 인구수만 늘리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인 것이다._T. S. 애슈턴, <산업혁명>,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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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정치적 폭발의 요소들은 그 얼마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1870년에서 1871년 사이 독일로 인한 국가적 자존심의 곪아터진 상처, 그로 인해 프랑스 군대가 겪은 치욕, 공화파와 왕정파 사이의 오랜 적대감, 그리고 공화국과 교회 간의 그 못지 않은 적대감, 계속되는 경제적 불만, 특히 농업 분야의 부진,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길한 것은 맹렬한 반유대주의의 부상이었다. _ 메리 매콜리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 p405


 메리 매콜리프 (Mary Mcauliffe)는 1871년부터 1929년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얽히는 과정을 3권의 책에서 담아냈다.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Deutsch-Franzosischer Krieg, 1870 ~ 1871)의 패전과 파리 코뮌(La Commune de Paris, 1871)의 상처를 안은 프랑스는 50억 프랑이라는 막대한 전쟁 부채와 알사스-로렌 지방을 넘겨주면서 큰 위기에 봉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는 국가 차원의 노력을 기울인다.


 정부의 공공사업들이 경제에 미친 부양 효과는 실제적이기는 했지만 일시적인 것으로 1882년 초까지밖에 가지 않았다. 연초가 되자 고공 행진을 하던 상업은행 위니옹 제네랄의 도산과 함께 경제가 극적으로 주저앉았다.(p192)... 주가 폭락의 여파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특히 노동자 계층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현 사태와 뒤따르는 재정적 재난에 대해 정부를 비난했는데, 그 불만에는 좀 더 깊고 악의적인 감정도 섞여 있었으니, 사태의 책임을 유대인 은행가들에게 돌리려는 것이었다... 사실 로트실트가(로스차일드가)와 다른 은행들은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자금을 빌려준 터였지만, 프랑스 전역의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_ 메리 매콜리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 p193 


 프랑스는 공공사업을 통한 재정부양책을 사용하면서 전후 위기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어느 사회나 이러한 경제부양정책으로부터 소외받은 이들과 문제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는 이들은 있기 마련. 프랑스 내에 경제불평등 문제와 반(反)유대주의는 드레퓌스 사건( L'affaire Dreyfus, 1894 ~ 1906)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 바닥에 남아 있었다. 극심한 경제불평등은 문화를 가난한 이들로부터 분리했고, 결국 이 시기의 예술은 '가진 자'들의 것으로 될 수 밖에 없었고, 반유대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프랑스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벨 에포크 시기의 그림자는 짙었다. 


 졸라가 본 대로, 파리는 이전 해의 재앙들로부터 급속히 회복되고는 있었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시의회에 들어간 클레망소도 그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 몽마르트르의 빈민들을 위해 그의 일은 파리의 광범한 하층계급을 부단한 의제로부터 부각시켰다. 그가 특히 경각심을 느낀 것은 파리 극빈 지역 아동들이 처한 난국이었다. 그런 아동들, 특히 사생아들에 대한 최소한의 국가 보호도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체제하에 번창하는 파리 사람들은 불운한 자들을 위해 시간을 낼 여유가 없었다. _ 메리 매콜리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 p74


 이 시기 프랑스는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고, 다시 한 번 세계의 중심지로 영광을 누리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현실은 과거와 달랐다. 프로이센과의 전쟁 뿐 아니라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 1898)에서 보듯 해외식민지 확보 경쟁에서는 영국에게 뒤쳐졌던 것이 프랑스가 처한 현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지도층은 당시 일어난 민족주의 감정을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등을 통해 고취하길 원했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 에펠 탑등을 만들어지며 파리의 모습은 적어도 외적으로는 획기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와 함께, 경제적 부흥 노력과 국제 행사 개최를 계기로 유럽 여러지역의 예술가들이 프랑스로 몰려들면서, 프랑스 예술계는 본격적인 부흥을 시작하는데,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 1900 ~ 1918>는 이 시기를 잘 묘사한다. 


 1900년 10월 중순, 파블로 피카소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파리의 붐비는 새 철도역인 오르세역에 도착했다. 며칠 후 만 열아홉 살이 되는 그는 의기충천해 있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그의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파리에 입장하는 얼마나 근사한 방식인가! (p15)... 이사도라에게 힘을 주는 것은 춤의 근본원리를 발견하겠다는 목표였다. 그녀는 진리가 기술보다 먼저임을 강조했다. "삶이 뿌리이고 예술은 꽃이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는 10년 후 모스크바에서 나타나게 될 메소드 연기와도 다소 비슷한 것으로, 그녀는 고전발레의 인위성을 거부하고 정서적 관념들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동작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녀는 무용의 역사를 바꾸어놓을 발견을 하려는 참이었다._ 메리 매콜리프,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 1900 ~ 1918>, p86

 

 20세기 초에는 예술 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유럽은 끝없는 발전을 이루는 듯 보였다. 독일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 ~ 1955)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1905)하고, 마리 퀴리(Maria Skłodowska-Curie, 1867 ~ 1934)와 피에르 퀴리가 라듐을 발견(1898)하던 시기, 인간 이성(理性)에 대한 낙관을 가지고 벨 에포크(Belle Epoque)시대의 즐거움을 프랑스는 누렸다. 그렇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이 빛나는 황금시대는 막을 내린다. 3부작의 마지막 <파리는 언제나 축제, 1918 ~ 1929>에서는 전후(戰後) 프랑스가 떠오른 신흥 대국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면서 상처를 복구했는가가 그려진다. 프랑스 프랑화(貨)의 약세, 미국 금주법 시대(禁酒法時代, Prohibition era, 1919 ~ 1933) 등을 통해 많은 미국 예술가들이 프랑스에 건너오면서 프랑스는 새로운 부흥을 꿈꾼다는 이야기로 책은 마무리된다.  마지막은 마치 동화책의 결말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안다. 1929년 불어닥친 대공황이 유럽을 다시 한 번 잿더미로 초대했다는 사실과 유럽 사회에 팽배했던 반유대주의가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을 어떻게 끝냈는지를.


 1920년대 파리는 모든 방면에서 혁신의 온상이었다. 그 시절 이 빛의 도시는 문학, 미술, 건축, 음악, 패션 등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의 문화적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창조성과 함께 관용의 태도가 널리 번졌고, 적어도 어던 집단에서는 그러했다.(p111)... 프랑스라는 나라는 제1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극복했고, 비록 값비싼 - 특히 인명에서는 - 대가를 치른 승리였으나 1929년에 프랑스인들은 대체로 번영을 즐기며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_ 메리 매콜리프, <파리는 언제나 축제, 1918 ~ 1929>, p421


 이처럼 메리 매콜리프의 '예술가들의 파리' 시리즈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벨 에포크 시대를 여러 인물들의 교차 편집을 통해 잘 묘사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가들의 삶과 함께 그들과 분리할 수 없는 시대상을 볼 수 있다. 비록, 작품, 작가를 깊이있게 묘사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은 이 시리즈가 가진 장점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는 결코 분리해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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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2-15 2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페이퍼를 읽으니 프랑스의 역사를 다룬 박물관을 관람한 기분이에요. 벨 에포크 시대에 대해서는 막연히 낭만적인 느낌을 갖고 있었는데 마냥 좋은 시절은 아니었군요…

겨울호랑이 2020-12-15 20:54   좋아요 1 | URL
파이버님의 말씀처럼 많은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크게 발전한 시기, 산업화의 혜택으로 문화가 부흥한 시기로 인식된 벨 에포크 시대가 누군가에겐 깊은 고난의 행군시기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어쩌면 소수가 행복한 시기보다 다수가 평온한 시기가 더 좋은 시절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파이버님 감사합니다.^^:)

prothoevero 2020-12-16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은 책에 추가했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12-16 13:56   좋아요 0 | URL
즐거운 독서 되세요, prothoevero님 감사합니다.^^:)

2020-12-22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3 0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12-25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불전쟁에서 참담한 패전...
그리고 이은 파리 코뮌의 실패

그런 시절을 뒤로 하고 벨에포크
시절이 왔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겨울호랑이 2020-12-25 19:17   좋아요 0 | URL
예나 지금이나 어려움은 힘 없는 이들에게서 행복과 경제력을 빼앗아 가진 자에게 나누어주는 불평등의 기폭제가 되는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벨에포크 시대는 말 그대로 그들만의 빛나는 시대였겠지요... 다만, 그런 불안정한 시대는 사상누각에 불과함을 역사는 잘 보여주지 않나 여겨집니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는 ‘파리코뮌- 빅토르 위고‘로부터 시작하여 ‘드레퓌스 사건 - 에밀 졸라‘로 마감되는 세기말 파리의 예술사다. 여러 면에서 이 책은 칼 쇼르스케의 「세기말 빈」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19세기 말 이성과 문화의 정점을 향해 달리던 두 제국의 황혼을 다뤘다는 소재면에서 발견할 수 있겠다. 차이점이라면 전자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찬란한 영화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프랑스 제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과 후자가 다민족으로 이뤄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통합노력이 그려진 정도가 아닐까 한다.

19세기 제국주의 황혼에 핀 문화, 예술, 과학에 대한 비교는 다른 페이퍼로 미루고 이번에는 간략하게 19세기 파리 물랑루즈(Moulin Rouge)의 배경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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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 마리아 신부는 스페인 내전 때 공화파의 종군기자로 참전했다 체포되어 처형될 뻔할 정도로 전체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프랑코가 가톨릭을 자신의 통치 이념의 한 축으로 삼은 것은 그에겐 천행이었다. 그야말로 "교회를 친구로 둔 민중은 운이 좋다". 그는 이 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라사트-몬드라곤 가톨릭 액션'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그는 좌파 사상의 영향(특히 초기 마르크스주의)을 받았을지언정, 폭력혁명은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_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티아리에타, <호세 마리아신부의 생각>, p266 


 스페인 바스크 지역에 기반을 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협동조합인 몬드라곤 협동조합(Mondragon Corporation Cooperative)과 창시자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Jose Maria Arizmendiarrieta Madariaga, 1915 ~ 1976). 사회적 기업 또는 협동조합의 롤모델로 널리 알려진 조합과 창시자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실 이들만큼 이질적인 조합도 없을 듯하다. 국민 진영의 프랑코(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odulo Franco y Bahamonde, 1892 ~ 1975)정권의 비호를 받았던 가톨릭 교회의 사제였던 호세 마리아 신부가 공화정부군 편의 중심지였던 바스크(Basque)지역에서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고 만들어진 몬드라곤 협동조합. 


 칸타브리아 해안을 따라 펼쳐진 북부 지역은 국민군에 포위되어 고립된 상태였고, 마드리드를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속히 끝내려고 한 네 차례의 연이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난 뒤 국민군의 자연스러운 공격 목표가 되었다... 병력에서 우위에 서는 유일한 방법은 우선 적의 취약 지점을 제압한 다음, 그곳 병력을 더 어려운 목표물인 중부 지역 공격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아라곤과 안달루시아 전선은 공화 정부가 비교적 빠르게 병력을 증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포위되어 고립된 상태였던 북부 해안 지역이 분명한 공격 대상으로 선택되었다. _ 앤터니 비버, 스페인 내전>, p397 


 가톨릭 신부이면서도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호세 마리아 신부와 바스크 지역으로 처음부터 공화정부 지지지역이였음에도 개전 초기인 1937년 3월 공세에서 국민군에게 점령당했던 몬드라곤(Mondrgon).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성공은 어쩌면 스페인 내전의  이념 갈등을 개인적/지역적으로 직접 체험한 이들의 화합이 보이지 않는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를 <스페인 내전>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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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0-29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것 참 특이하네요...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이 가톨릭 사제단
을 가혹하게 처형하고 모욕해서 종교계에서
반발이 격렬했다고 하던데 -

그 중에서도 깨인 사제분들은 프랑코 총통
에게 저항했었군요.

겨울호랑이 2020-10-2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가톨릭 사제여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이도 있을 것이며, 바스크 민족이면서도 프랑코의 이념에 동조한 이들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호세 마리아 신부가 바스크 족이었던 것도 저항의 이유 중 하나였이리라고도 생각됩니다만, 이념 전쟁을 단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3.254. 나라는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시카리파라는 새로운 강도단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환한 대낮에 도시 한가운데에서 살인을 일삼는 자들이었다. 255. 특히 그들은 축제일에 무리 가운데 섞여 있다가 옷 속에 숨겨둔 칼로 상대방을 찔러 살해했다. 적이 쓰러지면 살인자들은 군중 사이로 숨어들어가 무리의 일부인 것처럼 행세했다. 이런 뻔뻔한 행위가 도처에서 자행되었다.(p228)... 2.408. 이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던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마사다라고 불리는 요새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이곳을 급습하여 차지하고 로마 경비병들을 죽였으며 그곳에 자기편 소속의 군인들을 배치했다... 409.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아들로 당시 제사를 주관하던 자들을 감독하던 용감한 젊은이 엘르아살은 이방인으로부터 어떠한 예물이나 희생제물도 받지 말라고 명령했다. 로마와의 전쟁 시작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었다._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1>, p258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 ~ AD 100 ?)의 <유대 전쟁사 The Wars of the Jews>는  AD 70년 경에 있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IV, BC 215 ~ BC 164)의 예루살렘 침공부터 마사다(Massada)에서의 최후의 저항까지의 역사를 다룬 역사책이다. 처음에는 유대 저항군의 입장에서 서 있다가 이후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AD 9 ~ AD 79) 장군(후에 황제)에게 투항한 이후 로마군의 입장에서 예루살렘 함락까지를 지켜보게 요세푸스. 그는 유대 전쟁의 시작을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아들 엘르아살의 마사다(Massada) 요새 점령으로부터 잡는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유대 전쟁의 마지막도 바로 이 요새에서 장식하게 된다. 최초이자 최후의 항쟁지 마사다 요새. 그곳은 어떤 곳인가.


 1.252. 플라비우스 실바가 유대지역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다. 그는 모든 유대지역이 로마에 정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요새가 아직도 반역을 도모하고 있음을 알고, 흩어져 배치되어 있던 병력을 모두 집결시켜 이 요새를 치러 갔다. 이 마지막 요새는 바로 마사다였다. _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2>, p283

  

[사진] Massada(출처 : https://www.secrettelaviv.com/best/activities/massada)

 

 마사다 요새는 이스라엘의 초급 장교들이 임관 직전에 반드시 방문하는 곳으로 알려져있다. 로마군의 공격으로 예루살렘(Jerusalem) 함락 후 최후의 저항을 한 곳으로 알려진 마사다 요새. 생존자 없이 전원 자결하여 비장함을 풍기는 이곳에서 이스라엘 청년 장교들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고 들었다. 이를 장교 임관 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올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되새기는 프로그램 중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마사다 요새와 같은 의미를 남한산성이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그보다는 한강대교에 가서 한국전쟁 당시 수뇌부의 수많은 피난민과 군인들이 건너고 있는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갔었던 아픈 역사를 되새기는 편이 보다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도 '마사다'는 비장한 장소로 여겨지지만, 당시의 상황을 지켜본 역사가 요세푸스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지지 않았나 보다. 그의 눈에 마사다에 모인 이들은 광신도(狂信徒, zealot)에 불과하다.


 253. 마사다 요새를 지키던 시카리파 수장 엘르아살은 매우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유다의 후손으로, 이 유다는 퀴리니우스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실시한 인구조사를 거부하라고 많은 유대인을 선동한 자였다. 254. 시카리파 유대인들은 로마에 항복한 자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그들의 재산을 강탕하고 집에 불을 질렀다. 255. 그들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간절히 자유를 지키려고 투쟁해온 노력을 불명예스럽게 포기한 채 로마인의 속박 아래로 스스로 몸을 내던진 자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256. 왜냐하면 시카리파는 이들과 더불어 반란에 가담하여 로마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동족 유대인들에게 가장 지독한 일을 행했기 때문이다. 258. 더욱이 시카리인들은 자신들의 위선을 드러나자 그들의 악행에 대해 정당한 비난을 퍼붓는 동족들을 더 가혹하게 다루었다... 260. 개인적이든 혹은 사회적이든 간에 모든 사람이 마치 전염병에 걸린듯이 범죄에 물들여 있었다... 262. 가장 일선에서 동족에게 불법과 만행을 저지른 자들은 바로 시카리인들이었다. _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2>, p283


 처음에는 사두가이파에서 바리사이파로 개종하고, 다시 로마군에게 투항한 요세푸스. 동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요세푸스는 변절자겠지만, 유대 전쟁 전체를 떨어져서 바라본 그의 시선은 냉정하다. 그에게 메시아(Messiah)의 재림을 기대하며 전쟁을 주장한 시카리파와 젤롯당들은 예루살렘 파괴의 원인제공자에 지나지 않는다.


 268. 이들은 유대 사회의 모든 질서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온통 무법천지로 만들어 놓았다. 그 결과 이른바 젤롯당으로 불리는 족속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 이들은 젤롯이라는 이름대로 행위에 열심을 다하는 자들이었다... 270. 그들은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한다는 뜻에서 스스로를 열심당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열심'이라는 말의 뜻을 야만스러운 성품으로 간주했던지, 혹은 가장 흉악한 범죄를 선한 일이라고 여겼던지, 사실상 그들은 그 이름을 조롱거리로 삼을 만한 행위를 일삼았다._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2>, p285


 광신도의 열정이 부른 마사다의 비극.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의 마지막 주제다. 이 사건 이후 유대 민족은 자신들의 나라를 가지기까지 2,000여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렇지만, 더 큰 비극은 역사가 반복된다는 사실이 아닐까. 광신도들의 잘못된 믿음이 가져온 폐해는 어제 오늘날의 문제는 아니지만, 2020년 광화문 집회 이후 이 문제는 더욱 아프게 다가오고, 우리의 삶이 비극(悲劇)으로 가는 듯 하다.

 

훌륭한 플롯은 단일한 결말을 가져야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이중의 결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주인공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되고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행 때문이 아니고 중대한 하마르티아(hamartia 과실) 때문이어야 한다. _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제13장 11 ~ 15, p385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5 ~ BC 323)의 <시학 peri Poietikes>에서는 훌륭한 비극의 플롯을 '중대한 과실에서 오는 행복에서 불행으로의  전환'을으로 언급한다. 연일 쏟아지는 확진자 안내 문자를 보면서 얼마전까지 'K방역'의 성공이 또다른 시카리파에 의해 훼손받고 있음을 절감한다. 비록, 지금은 우리의 현실이 비극의 플롯요소를 잘 갖추고 있지만, 아직 극(劇)은 끝나지 않았기에 조용히 집에서 주말을 보낸다. 누가 또 알겠는가. 헨리크 입센(Henrik Johan Ibsen, 1828 ~ 1906)의 <인형의 집 Et Dukkehjem >에서처럼 일반 대중들이 강력히 희망하면 작품의 결말이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뀔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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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 2020-08-30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익한 글 잘읽고 갑니다...저도 꼭 사봐야겠네요...^^

겨울호랑이 2020-08-30 14: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하마님 즐거운 독서, 건강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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