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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0월 1일 이전에 체코 침공을 결정한 히틀러는 체임벌린 수상에게 300여명의 수데텐 독일인이 총살당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수데텐은 합병되어야 한다고 단언하였다.(p763)... 9월 19일 영국과 프랑스 양국 정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제안을 체코 정부에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즉 독일어 사용자가 주민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은 독일에 할양하며 할양 후 새로운 국경을 체코 정부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이런 제안은 실로 체코의 독립 자체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만일 체코가 계속 저항한다면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9월 21일 새벽2시 15분에 체코 정부에 전달하였다. 체코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p764) <세계외교사> 中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1938년 비밀리에 재군비를 완료하고, 빠르게 제국을 확장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야심은 당시 독일인이 많이 거주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수데텐 지역의 할양을 요구하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냈지만, 이러한 독일의 무리한 요구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참혹한 전쟁을 피하고자 수데텐 지방의 할양을 체코 정부에게 압박했고, 이는 세계외교사에서 가장 큰 실패로 일컬어지는 뮌헨 협정로 이어지게 된다.


[사진] 뮌헨협정(출처 : https://www.britannica.com/event/Munich-Agreement)


 뮌헨협정(Munich Agreement 1938년 9월 29일)은 히틀러가 고데스베르크에서 요구한 모든 것을 수용한 것이었다. 체임벌린과 달라디에는 이 뮌헨 협정으로 자신들이 체코를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의 운명을 자신에게 맡긴 것이라고 믿었다.(p768) <세계외교사> 中


 영국과 프랑스의 수뇌는 독일이 수데텐 지방을 가져간 후에는 더이상 침략을 하지 않으리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가졌지만, 이후 독일은 1939년 체코와 폴란드, 1940년 노르웨이를 차례로 침략했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영국의 처칠(Sir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1874 ~ 1965)는 <제2차 세계대전 The Second World War>를 통해 당시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한다.


 왜곡된 낙관주의의 물결이 1939년 3월 한 달 동안 영국 전역을 휩쓸었다. 독일의 강력한 압박에서 비롯된 체코슬로바키아의 긴장이 안팎으로 점점 더 고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뮌헨 협정을 지지하는 내각과 언론은 영국 국민을 끌고 들어간 정책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p218)... 1939년 3월 10일 히틀러는 뮌헨 협정의 결정에 의해서 방어선을 빼앗긴 채 쓰러지기 직전에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프라하에 도착한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의 보호령으로 선포했고, 독일 제국에 합병시켰다.(p219) <제2차 세계 대전 上> 中


 15일, 체임벌린은 하원에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의 무력에 의한 보헤미아 점령은 오늘 아침 6시에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당연히 지금 일어난 사태를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유로 우리의 진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 세계 모든 사람들의 염원은 여전히 평화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p220) <제2차 세계 대전 上> 中


 수데텐을 독일에게 넘겨주고 독일이 침략의사를 포기를 바랐던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 체코까지 잃고 나서야 자신들의 판단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침략행위에 대한 규탄이 전부였다. 반면, 그들의 그릇된 판단에 따라 지불한 대가는 컸다.


 체코의 점령은 오스트리아/수데텐의 병합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체코는 독일인이 거주한 지역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것이 적나라한 침략행위라는 것은 만인에게 분명하였다. 독일인의 거주 지역만을 목적으로 한다는 히틀러의 공언이 허위임이 밝혀진 것이다. 영국은 1939년 3월에 이르러서야 그동안 추진했던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이 오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p771) <세계외교사> 中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81년 전 일어난 역사적 사건(뮌헨협정)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약 2개월 동안 우리의 모든 관심을 집어삼킨 '조 국 법무부 장관 임명'. 대통령의 정당한 지명 후에도 검찰, 언론 그리고 자유한국당의 공격이 드센 상황이다. 비록 9월 28일 촛불집회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선(戰線)이 명확해졌다고 보는 편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이들이 조국 사퇴를 주장하는 것은 그렇다고 하겠지만, 자유한국당, 검찰과 언론에 반대한다면서 이들과 같은 주장을 펴는 이들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조 국이 사퇴한다면, 지금의 혼란이 가라앉을 수 있을까. 그런 낙관적인 생각은 수데텐을 히틀러에게 넘겨주면 평화가 온다고 믿은 체임벌린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건으로 공세수위를 높여 내년 4월 총선에서 승기를 잡으려 흠집 내기에 여념이 없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이번 '조 국 법무부장관'과 관련한 일련의 일들은 박근혜 탄핵 이후 사회모순과 부조리와의 전쟁에서 주력회전(主力會戰)으로 판단된다.

 

 주력회전이란 주력의 싸움이며 부수 목적을 추구하는 중요하지 않은 싸움이 아니다. 주력회전은 목적을 달성하기 곤란하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순간 조기에 포기하고 마는 단순한 시도가 아니라, 진정한 승리를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싸움이다.(p203)... 주력회전은 응축된 전쟁으로서 전체 전쟁 또는 전역의 중심으로 간주될 수 있다. 태양광선이 오목거울의 초점에 집중되어 완전한 형상과 최고의 불꽃을 형성하듯이 전쟁의 일체의 힘과 요소들이 주력회전에 집중되어야 통합 효과가 최고도로 발휘된다.(p215) <전쟁론> 中


 클라우제비츠(Carl Phillip Gottlieb von Clausewitz, 1780 ~ 1831)가 <전쟁론 Vom Kriege>에서 강조한 주력회전의 중요성을 생각해 본다면, 이제 우리의 활은 시위를 떠났고, 여기서 물러서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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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3 0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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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3 0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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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 1914 - 1918 Putain de Guerre!>과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C'etait la guerre des tranchees>는 제1차 세계대전을 병사의 시각에서 바라본 작품들이다. 자크 타르디(Jacques Tardi, 1946 ~ )는 이들 작품들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다. 작품 안에서 프랑스군과 독일군 병사들은 증오감에 넘쳐 상대를 죽이는 이들이 아니라, 죽음 앞에선 나약한 인간의 모습 그 자체다.

 

 희생을 강요당한 우리의 머릿속에는 과상망측한 생각이 깃들 수밖에. 이 살육장에서 도망칠 철두철미한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펄펄 끓는 정어리 기름을 마시는 놈들도 있었다. 그러면 황달이 와서 며칠 동안 입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갖 종류의 자해가 시도되었다. 그것은 팔 하나 혹은 다리 하나를 잃는 대가를 감수해서라도 이 지옥을 벗어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p31)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 1914 - 1918> 中


 독일 병사들은 '친구'를 외쳤다. 양 진영이 처음부터 그랬다면 윗분들이 계획한 살육을 피할 수 있었을텐데. 하지만 그들이 우리 손에 쥐여준 총은 써야 했고, 그 결과도 따라왔다.(p73)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 1914 - 1918> 中


 전쟁터에 끌려가기보다 작은 부상으로 전선을 이탈하는 이들을 부러워하는 병사들, 서로 상대를 죽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병사들의 모습과는 달리 얼마나 전쟁은 참혹했는가. 참혹한 전쟁과 파괴로 이성(理性 reason)의 시대를 종식시킨 제1차 세계대전의 진정한 승리자는 영국, 프랑스, 미국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소련)도, 멀리 떨어진 연합국 일본도 아니었다. 진정한 승리자는 각국의 대자본(大資本)이었다.

 

 독일군은 크루프사가 루르 공장에서 제조한 포로 공격하고, 우리 군은 프랑스 슈나이더사가 르크뢰조, 생테티엔, 생샤몽 공장에서 제조한 대포로 응수한다.(p8)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中


 이것은 분명 '문명'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당위성'의 전쟁도 아니었다. 슈나이더, 생 샤몽, 피아트, 크루프, 비커스, 르노, AEG, 포커, 호치키스 등 호주머니가 찢어질 정도로 가득 찬 군수업체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이다. 거기에는 얼마 전부터 비스코른도 포함되었다.(p69)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 1914 - 1918> 中


 전장은 대자본들이 생산한 신무기들의 테스트장으로 바뀌어갔으며, 병사들은 테스터로 전락해갔다. 그리고, 이로 인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 새로운 시장의 창출을 위해 파괴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이들 대기업들은 전쟁 중에는 무기산업으로, 종전 후에는 전쟁복구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이미 예약한 상태였다.


  찬란히 빛나는 제1차 세계대전! 35개국아 직간접적으로 이 전쟁에 참전했다. 사망자가 1000만명이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진흙 속에 파묻혔는가. 얼마나 많은 부상자, 과부가 생겨났는가. 순무를 키워야 할 좋은 땅에는 십자가들만 솟아 있다. 사망한 프랑스군인들을 혁명기념일에 4열행대로 행군하게 한다면, 마지막 군인이 지나갈 때까지 5박 6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비용은? 대포, 포탄, 그 밖에 다른 무기들은? 모두 2조 5000억 금본위 프랑이다! 그 돈이면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의 모든 주민들이 방 네 개짜리 집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숫자는 숫자일 뿐.(p112)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中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과 <그것은 참호전이었다>는 작품 전체를 통해 전쟁의 비참함을 잘 표현한다. 그렇지만, 이처럼 비참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선을 돌려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직후의 유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전(開戰) 초기 민족주의에 도취한 유럽인들은 전쟁을 피하기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평범한 시민들인 군중은 비통해하기는커녕 서로를 증오했다. 그들은 기쁨과 증오를 공유했다. 손쉽게 무찌를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증오를.(p36)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中


 한 카페의 악대가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한다. 애국심에 불타오른 손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국가를 제창한다. 한 노인만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다... 그 일요일, 나는 카페테라스에서 군중의 살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알게 되었다.(p37)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中


 전쟁 초기 낭만주의에 물든 이들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은 걷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모두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Ein Bericht von der Banalitat des Bosen>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떠올리게 된다.

 

 수많은 독일인들과 많은 나치스, 아마도 엄청난 수의 그들은 살인을 하지 않으려는, 도둑질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이웃이 죽음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려는, 그리고 그들로부터 이익을 취함으로써 이 모든 범죄의 공범자가 되지 않으려는 유혹을 분명히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맙소사, 그들은 그러한 유혹에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배워버렸다.(p227)...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p349)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中


 비록, 세계대전의 진정한 수혜자가 전쟁에 나서지 않는 권력자, 지배층, 자본들이라 할지라도, 이를 방관하게 만드는 것은 '악의 보편성'이며, 이는 우리들의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로부터 대파멸을 불러올 수 있음을 한나 아렌트는 경고한다. 악(惡)은 결코 악마처럼 기괴한 존재이거나, 하이드씨 처럼 분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악을 인정했을 때, 우리는 파멸을 막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정리해보자. 

 

 악의 보편성을 의식하게 되면 악을 또 다른 차원으로 이해하게 된다. 악은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험 속 어디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악의 모든 장소, 모든 시간, 그리고 모든 분별 있는 개개인의 삶에 간여해왔다. 악이 보편적임을 이해한다.(p19)... 그러므로 악마란 기묘하고 한물간 존재가 아니라 인간 정신 안에, 또는 인간 정신을 압도하는, 거대하고 영원한 힘이 표출된 것이다.(p38) <데블 The Devil> 中


 세계대전의 파멸적 결과와 이의 원인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최근 우리 사회의 모습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거의 2달 가까이 벌어진 언론과 검찰의 무도한 모습을 우리 모두를 대파멸로 이끌고 있다. 여기에 올라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는 더이상 침묵해서는 안된다. 침묵과 방관은 대파멸로 가는 것을 '순전한 무사유'로 암묵적 동의를 표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 안에 아이히만이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제는 우리가 검찰과 언론 그리고 자한당과 바미당을 견제하고 이들이 딴짓을 못하도록 준엄하게 심판하는 것. 이것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


PS. 오늘 읽은 <좌우파 사전>에서 재밌게 읽은 퀴즈가 있어 옮겨본다.


 Q :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소득에 따른 법칙금 차등화를 주장한 대통령은 누구일까요?(힌트 : 4지선다형에서 모르면 *번을 찍으시오.)


1. 김영삼  2. 김대중  3. 이명박  4. 노무현


 정답 :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11022362341


 같은 주장을 해도 조국이 하면 안되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 이와 더불어, 이분이 사회주의자라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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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6 23: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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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6 2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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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27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트 워에서는 그나마 중세
신사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하던데 나중에는 그마저도 없어졌
다고 하더군요.

어떤 이유에서라도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9-27 10:33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쟁 초기에는 단기에 끝날 것이라는 희망과 자신이 영웅이 되리라는 일종의 허세가 퍼져있어 낭만적인 분위기가 났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토너먼트나 결투에서 멋진 통성명 후 상대와 겨루는 양상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독가스와 기관총알, 철조망에 찢기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후에는 그로부터 도망치려는 모습이 작품에서는 그려집니다... 전쟁은 참혹하다는 레삭매냐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가져오려는 노력은 아무래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이론에 따르면 다양한 통치 형태는 제각기 장점을 갖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안에서 가장 압제적인 형태로 바뀌다가 급기야 전복된다. 그러므로 군주정은 독재정이 되어 진보적 귀족들에게 전복당하고, 귀족정은 억압적인 과두제로 빠져들다가 민중 민주주의가 과두제 집권층을 타도하며, 민주정은 무정부 상태로의 문을 열어 또다시 상황을 안정시킬 군주정에 기회가 돌아오는 것이다... 로마 정치 체제에서 군주정 요소는 행정을 맡은 집정관들이었다.(p38)... 귀족정 요소는 당연히 원로원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주정 요소는 모든 로마 시민에게 열려 있던 민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p39) <폭풍 전의 폭풍> 中


 <폭풍 전의 폭풍 The storm before the storm>은 로마 공화정이 붕괴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구체적인 시간 배경은 BC 146에 일어난 카르타고의 멸망부터 BC 78의  술라 죽음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작품은 공화정 말기 혼란한 상황에서 공화정의 토대가 흔들리는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이 시기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가 <정치학 Politika>에서 말한 혼합정체의 요소를 가진 로마가 체제가 바뀌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답(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구해본다.


 관직에 있는 자들이 오만을 부리면서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할 때, 시민들은 서로에 맞서, 또 관직을 가진 자들에게 그런 권위를 준 정치체제에 맞서 파당을 형성하기 때문에(정치체제의 변화가 일어난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함, 즉 탐욕(pleonexia)은 어떤 때는 사적인 재산으로부터, 어떤 때는 공공의 재산으로부터 생겨난다. 명예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파당의 원인이 되는지도 또한 분명하다.(1302b 5 ~ 10) <정치학 제5권> 中


 포에니 전쟁(Bella Punica, BC 264 ~ BC 146) 결과 카르타고(Carthago)는 멸망하게 되었고, 넓어진 식민지로부터 제국의 중심으로 사람과 물자가 전에 없이 들어오면서 로마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로마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사회규범을 무너뜨리게 된다. 새로운 시대 변화를 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라쿠스 형제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BC 163 ~ BC 132)와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 BC 154 ~ BC 121) - 의 개혁이 시작된다.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이 공화정 초기를 규정짓는 요소로 작용하기는 했지만, 로마 정치는 계급 전쟁이 아니었다. 로마의 여러 가문은 엘리트층 귀족 보호자로부터 다수의 평민층 피호민들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복잡한 관계망을 구축했다... 그렇지만 진정 로마인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암묵적인 사회/정치 행동규범이었다. 성문화되지 않은 규율, 전통, 상호 기대가 로마인들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선조들의 관습'을 뜻하는 모스 마이오룸 mos maiorum이라 했다.(p32) <폭풍 전의 폭풍> 中


 <폭풍 전의 폭풍>의 시작은 그라쿠스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먼저 저자가 이 시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이 책의 저자 마이크 덩컨은 사임의 로마 혁명론을 따르고 있다. 세상에 느닷없이 불쑥 일어나는 혁명은 없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순전히 야망의 힘으로 파괴한 정치체계는 분명 출발부터 건전하지 않았다.(p8) <폭풍전의 폭풍> -추천사- 中


 해제를 통해 우리는 저자가 역사가 로널드 사임(Ronald Syme, 1903 ~ 1989)의 역사관을 따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임의 역사관은 무엇일까. 이는 그의 주저 <로마혁명사 The Roman Revolution>을 통해 살펴본다.


 사임은 과두 정치를 로마사에서 가장 중심적이고 영속적인 주제로 생각했다. "정부의 형태와 명칭이 군주정이든 공화정이든 민주정이든 상관없이 어느 시대에나 그러한 외관의 배후에는 과두 지배층이 숨어 있다. 그리고 공화정이었든 군주정이었든, 로마의 역사는 통치 계급의 역사이다. 혁명기의 대장군들, 외교가들, 금융가들은 아우구스투스의 공화정에서 사람은 같지만 다른 옷을 입은 권력의 집행자와 대리인으로 또다시 확인될 수 있다. 그들이 신(新)국가의 정부이다."(p30) <로마혁명사 1> - 해제 - 中


  사임의 역사관에서 로마사는 과두 집단의 의지가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나타난 구체적인 결과다. 이러한 이유로 사임은 인물 집단 전기(prosopography) 방식을 통해 <로마 혁명사>를 기술했고, 이 안에서 수많은 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역사를 끌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라쿠스 형제와 마리우스(Gaius Marius, BC 157 ~ BC 86),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BC 138 ~ BC 78) 역시 이러한 인물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된다.


 그라쿠스 형제 때문에 제국에나 속하는 모든 결과들이 로마 국가에서 터져나와 혁명의 한 세기를 열었다. 귀족 가문 간의 전통적인 경쟁이 사라지기는커녕, 주로 경제적 이해 관계에 기초한 당파 간의, 심지어는 계급 간의, 그리고 군사 지도자간의 알력으로 복잡해졌다. 이탈리아 전쟁(Bellum Italicum)에 이어서 내전이 일어났다. 마리우스와 킨나 그리고 카르보가 이끄는 당파가 패배했다. 코르넬리우스 술라(L. Cornelius Sulla)가 승리를 거두었고, 폭력과 유혈 덕분에 로마는 질서를 회복하였다. 술라는 기사들을 많이 죽이고, 호민관의 입을 막고, 콘술들에게는 재갈을 물렸다. 그러나 술루조차 그 자신의 사례가 재현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한 후계자가 그의 지배권을 계승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p85) <로마혁명사 1> 中


 여기서 우리는 이 시기를 다룬 비슷한 유형의 책 하나를 <폭풍 전의 폭풍>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 1937 ~ )의 <로마인 이야기 3 : 승자의 혼미 ロ-マ人の 物語>가 그것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바라보는 로마의 역사의 중심은 인물(人物)이며, 특히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BC 100 ~ BC 44)다. 로마 이전의 유럽사가 모두 로마라는 지중해로 흘러든다라면, 시오노 나나미의 세계에서 로마사는 카이사르라는 인물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로마인 이야기> 전 15권 중 카이사르에게 할당된 분량이 2권에 이르는 점이 저자의 카이사르 사랑을 뒷받침한다. 이런 시오노 나나미에게 이 시기 역사는 카이사르를 준비하는 시기에 불과하다. 일종의 대림시기(Advent)라 할까.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좌절한 요인을 대부분의 후세 연구자들은 시기상조론으로 돌린다. 인간은 사실을 눈앞에 들이대지 않는 한 눈을 뜨지 못하는 법이다... 실제로 그라쿠스 형제의 생각이 70년 뒤에나마 실현된 것은 무기를 가진, 즉 인간에게 눈을 뜨도록 강요할 수 있을 만한 권력을 가진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다.(p86) <로마인 이야기 3> 中


 다분히 인물 중심의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관(歷史觀)에서 우리는 다른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le, 1795 ~ 1881)이 <영웅숭배론 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의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영웅숭배 및 영웅정신은 큰 주제입니다. 그것은 실로 큰 주제이며, 무한대한 주제로서, 세계 역사 그 자체만큼이나 광대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볼 때, 세계 역사, 즉 인간이 이 세계에서 이룩해온 역사는 근본적으로 이 땅에서 활동한 위인들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이룩되어 있는 모든 것들은 정당히 말해서 이 세계에 보내졌던 위인들에게 깃들여 있던 사상의 외적/물질적 결과요, 실질적인 구현이자 체현입니다. 전세계 역사의 본질은 이들의 역사였다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 그것은 이 자리에서 온당하게 다룰 수 없는 주제입니다.(p28) <영웅숭배론> 中


 개인적으로 <폭풍 속의 폭풍> 속 인물들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 ~ 1831)의 시대정신(時代精神, Zeitgeist)의 구현이라 여겨지는 반면, <로마인 이야기>  속 인물들은 카이사르 라는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예언자들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저자들의 역사관 차이는 두 책에서 어떻게 표현될까. 술라가 폰투스 군을 맞아 싸운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예로 살펴보자. <로마인 이야기>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마치 열띤 스포츠 경기를 중계하는 캐스터의 목소리로 전투를 설명한다. 박진감있게 전투를 설명하는 능력은 시오노 나나미의 장점이기도 한데, 카이사르를 주인공으로 한 <로마인이야기 4> <로마인 이야기 5>에 이르면 거의 국방 TV의 토크멘터리 전쟁사의 대본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림] Battle of Chaeronea(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301530137522876802/)


 폰투스군과 로마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 결과는 폰투스 쪽의 전사자와 포로가 10만 명 이상, 도망친 병사가 1만 명 남짓한 반면, 로마 쪽의 전사자는 12명에 불과했다. 전투가 끝난 뒤 점호에 대답하지 않은 병사는 14명이었지만, 해가 진 뒤에 진영으로 돌아온 병사가 두 명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한니발의 전과를 웃도는 신기록이었다.(p172) <로마인 이야기 3> 中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에 대해 우호적인 자신의 인식을 바탕으로 사료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반해, <폭풍 속의 폭풍> 속의 카이로네이아 전투 모습은 한결 차분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점을 비교해볼 때 두 책 모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 이야기지만, 차분하게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폭풍 속의 폭풍>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폭풍 속의 폭풍>이 다루는 시기는 공화정의 말기 일부를 다루기에 로마 전체 역사를 바라볼 수 없다는 점은 한계다.


 고대 사료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과장법을 맛보기로 살펴보자면, 술라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10만 명 넘는 폰토스 병사가 죽은 반면 그 자신은 단 14명만 잃었다고 보고했다. 이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지만, 술라가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사실이다.(p373) <폭풍 전의 폭풍> 中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폭풍 전의 폭풍> 관점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었다. 사임의 말처럼 로마 역사를 움직인 시대정신은 과두정으로 대표되는 지배계층으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례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 ~ 1527)가 <로마사론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에서 조명한 성산사건(聖山事件, BC 494)을 살펴보자. 평민들이 귀족의 독재에 대항하여 일으킨 성산사건에서 마키아벨리와 리비우스(Titus Livius Patavinus, BC 59 ~ AD 17)는 무엇을 보았는가.

 

 로마의 평민들은 비르기니아 사건 때문에 무장을 하고 성산(聖山)으로 몰려갔다. 원로원은 사절을 보내어 그들이 무슨 권위로 사령관을 내팽개치고 제멋대로 성산으로 이탈했느냐고 물어왔다. 원로원의 권위는 높이 존중되었고 또 평민들은 그들 중에 지도자가 없었으므로, 아무도 감히 대답을 하려 들지 않았다. 리비우스는 그들이 대답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대답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고 논평한다. 이것은 지도자가 없는 군중은 위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p215) <로마사론> 中


 성산사건을 통해 평민과 귀족들은 다시 화해하게 되지만, 평민들은 성산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들의 깨달음이 구체적으로 이들을 대표할 인물을 찾게 되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그라쿠스, 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이 시대의 요청에 따라 나타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평민들의 시대정신은 공화정이 붕괴된 오랜 시간이 지나 군인 황제 시대(軍人皇帝時代, AD 235 ~ 284)에도 이어졌던 것은 아닐까하는 추론을 해본다. 이의 근거로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Iulianus, AD 331 ~ 363)가 갈리아 군단에 의해 황제에 옹립된 사건을 기번(Edward Gibbo, 1737 ~ 1794)의 <로마제국 쇠망사 Gibbon's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통해 살펴보자. 


[사진] Flavius Claudius Iulianus (출처 : https://hellenicfaith.com/zeus-helios/)

 

 무장한 병사들의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으며, 거칠 것 없이 터져 나오는 불만스러운 웅얼거림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대담하게 막사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과격한 선동이라도 일으킬 듯한 기세로 치달았다. 또한 지휘관들의 묵인 속에서 율리아누스가 받은 치욕, 갈리아 군데애 데한 억압, 아시아 군주의 악덕을 생생하게 묘사한 비방의 글이 비밀스럽게 유포되었다.... 군대는 '율리아누스 황제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렇게 갈리아 군단은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p271) <로마제국 쇠망사 2> 中


  페이퍼의 처음으로 돌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체제의 변동이 탐욕과 명예라는 동기를 통해 파벌의 형성되고 이는 체제의 변동으로 이어졌음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로마의 경우 파벌의 형성된 원인이 민중들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를 단순하게 탐욕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개인의견으로 그렇지 않다 생각된다. 


 정리하면, 로마의 정체(政體)가 과두정이었으며, 공화정과 제정 전반에 걸쳐 과두정이라는 시대정신에 초점을 두고 역사를 서술한 사임의 역사관, 그리고 이를 반영한 <로마 혁명사> <폭풍 전의 폭풍>이 <영웅숭배론>과 <로마인 이야기>보다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과두정 이면에 위치한 로마 시민, 병사들의 관점있다는 전제 하에, <로마 혁명사>에서는 이 점이 충분하게 반영하지 못한 부분은 한계라 여겨지며, 대중 역사서인 <폭풍 전의 폭풍> 또한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폭풍 속의 폭풍>안에서 대중 교양서로서 가지는 즐거움과 한계를 동시에 확인하면서 이번 페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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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의한 육지의 분리가 가장 중요하다. 분리의 영향은 분리의 정도에 달려 있다. 관건은 분리가 완전한지 아니면 불완전한지, 따라서 육지가 섬의 형태인지 아니면 반도의 형태인지 하는 것이다. 또한 관건이 되는 것은 분리하는 바다의 폭이다. 왜냐하면 협만이 좁은 경우에는 생물이 뛰어넘을 수 있으며, 이는 기후학적 영향을 거의 미칠 수 없다. 이런 것들은 그 원인을 지질적 현대에 두고 있는 현상, 따라서 기후와 인간 생활에 대해서는 큰 의의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동/식물의 분포에 대해서는 중요한데, 이는 종과 속 그리고 부분적으로 이른 과거로 그 기원을 소급할 수 있으며, 현재는 바다인 육지상에서 빈번히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p258) <지리학2> 中


[사진] Mediterranean Lingua Franca(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Mediterranean_Lingua_Franca) 


 알프레트 헤트너(Alfred Hettner, 1859 ~ 1941)는 <지리학 Die Geographie: Ihre Geschichte, Ihr Wesen und Ihre Methoden>에서 지리의 자연 분류에서 바다와 육지의 관계가 자연환경과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설명한 위의 이론은 기후가 생태계에는 영향을 미치는 반면, 인간 생활에는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헤트너의 이론은 역사(歷史)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이번 페이퍼에서는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 1985)과 데이비드 아불라피아(David Abulafia, 1949 ~ )를 통해 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지중해 지역의 삶을 포근하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매력적인 풍경에 의한 착각이다. 경작지는 부족한 반면 메마르고 척박한 산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강우량도 고르지 못하다... 이밖에도 지중해의 물은 항상 따뜻해서 대부분의 지역에서 섭씨 13도를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자원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p68)... 지중해의 생명선은 대서양과 연결된 좁은 해협이었다. 만약 제방을 쌓아 지브롤터 해협을 막아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중해는 십중팔구 염수호로 변할 것이고, 그 안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p69) <지중해의 기억> 中


 패르낭 브로델은 유고작 <지중해의 기억 Les-Memories de la Mediterranee>에서 지중해의 역사를 기후, 지리 등 자연환경과 연관지어 분석하는데 반해, 데이비드 아불라피아는 이러한 브로델의 관점을 비판하며, 인간의 역할을 보다 강조한다.

 

 브로델의 접근 방법에는 '모든 변화는 느리게 진행된다'는 것과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속박되어 있다'는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이 책은 두 가지 관점 모두에 반대되는입장을 취한다. 특정 시대를 고찰하여 지중해의 특성을 파악한 브로델의 수평적 역사 서술 방식을 지양하고, 시대에 따른 지중해의 변화에 주안점을 두는 수직적 역사 서술 방식을 지향하려는 것이다.(p24) <위대한 바다> 中


 이 책도 바람이나 해류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보다는 지중해를 넘나든 인간들의 경험이나, 바다를 생계 수단으로 삼은 항구 도시 및 섬들에 거주했던 인간의 삶을 전면에 부각시키려는 것뿐이다. 인간의 힘은 브로델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던 것보다 한층 더 지중해 역사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p28)... 이렇듯 룰렛의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만, 회전 바퀴를 돌리는 것은 결국 인간의 손이었다.(p30) <위대한 바다> 中


 이러한 저자의 입장이 반영되어 <위대한 바다>에서 자연의 변화는 역사의 사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아불라피아의 지중해 역사에서 변수(變數)는 인간이고, 자연은 상수(常數 constant)다. 그런 면에서 <위대한 바다>는 의지를 가진 위대한 인간이 활동한 바다를 그려내는 역사책이라 할 것이다.


 브로델은 정치사를 '사건들(events)'로 치부하고 경멸에 가까운 조소를 보였다. 사건보다는 지형이 지중해 유역 내에 일어나는 일을 결정짓는 요소라고 보았다. 그는 지중해의 진정한 중요성은 다른 곳, 예컨대 지중해를 둘러싼 육지 지형과, 지중해를 오가는 사람들이 항로를 결정할 때 고려하는 바람과 해류 등 지중해 자체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p24) <위대한 바다> 中


 그렇지만, 서문의 브로델 비판에도 불구하고 문명(文明 civilization)의 초창기 역사에서 자연의 역할을 빼놓을 수는 없다. 초창기 풍부한 식량과 자원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교역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위대한 바다>에서도 피해갈 수 없는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바라본다면 브로델의 관점을 비판하고 인간의 역사를 강조한 아불라피아의 역사관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기원전 5000년 무렵의 이른바 중석기 시대, 도구를 만드는 기술은 착실히 발전하고 있었지만 축산, 도기, 곡물 경작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던 과도기에는 시칠리아 섬의 선사 시대인들의 식량이 도미류와 농어류 같은 바다의 산물로 바뀌었다.(p38) <위대한 바다> 中


 수백 년 동안 큰 변화가 없던 몰타 섬과 달리 시칠리아 섬은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각종 자원이 풍부한 데다 접근하기 쉬운 커다란 땅덩이다 보니 그런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리피리 제도에 흑요석이 흔한 것도 시칠리아 섬으로 사람들이 모여든 요인이었다.(p46)... 모르긴 해도 토로이는 아나톨리아 내륙 및 흑해와의 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주석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을 것이다.(p53) <위대한 바다> 中


  이러한 비판에 대해 아불라피아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초창기에 인간은 자연의 영향을 받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자연의 역할은 점차 비중이 약해졌고, 이제는 무시할 수준에 이르렀다는.


  그렇지만. 이에 대해서도 반론이 가능하다.  문명 초기 좋은 기후와 환경이 위치한 곳에 이미 인류 문명의 포석이 끝난 상태에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주변지역으로 확장이 일어났다고 본다면, 결국 인류 문명은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같은 존재가 아닐런지. 기후의 영향으로 발생한 문명과 이의 확산 발전은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 ~1823)의 차액지대론으로 보충설명한다면 반론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정리하자면, 지중해 역사에서 자연(또는 기후)의 영향을 배제한<위대한 바다>의 아부라피아 관점보다는 이를 통해 역사를 설명하고자 한<지중해의 기억>의 브로델 관점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한 나라에 사람이 처음 정착할 때는, 기름지고 비옥한 토지가 풍부해 매우 적은 부분만이 현재 인구의 부양을 위해 경작되면 되거나, 아니면 그 인구가 지배할 수 있는 자본으로써 실제로 경작될 수 있기 때문에 지대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점유되지 않은 토지가 풍부하고 따라서 누구나 원하는 대로 그것을 경작하기로 선택할 수 있는 때에는 아무도 토지의 사용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p71)... 사회가 발전하면서 2급 비옥도의 토지가 경작되면 1급 질의 토지에서 즉각 지대가 발생하며, 이 지대의 크기는 이 두 종류의 질적 차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p72)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에 대하여> 中


 보나파르트는 처음부터 몰타 섬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1797년에 그가 아직 총재 정부에서 일하고 있을 때, "우리의 주 관심사는 몰타 섬"이라고 하면서 우호적인 기사단장을 확보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글을 상사들에게 보낸 것도 그 점을 말해 준다... 나무와 식수가 부족한 것을 모르고 보급 기지로서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의 이 견해는 매우 정확한 판단이었다.(p773) <위대한 바다> 中


 또한, 개인적으로 브로델의 역사관에 더 끌리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역사의 변인(變因)을 외부에 두었을 때 역사의 보편성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다른 환경에서  문명의 차이가 나타났고, 이러한 차이가 문명으로 표현되었다는 브로델의 관점과는 달리, 아불라피아와 같이 인간(또는 문명) 속에서 역사의 변인을 찾는다면, 자칫 선민(選民)사상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심정적으로도 별로 끌리지 않는다. (실제로 아불라피아는 유대계 영국인이다.) 


 사실 지중해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지구에서 가장 큰 땅덩어리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유럽-아프리카-아시아가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대륙에 갇혀 있는 꼴이다. 이 거대한 땅덩어리는 그 자체로 지구라고 할 수 있으며, 처음부터 상품과 인간이 교류되었던 땅이기도 하다. 인류는 이렇게 세 대륙이 하나로 연결된 땅에서 역사라는 드라마를 공연해왔다. 또한 이 땅은 중대한 교환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p73) <지중해의 기억> 中


 '지중해의 정체성'을 규정하거나 지중해의 어떤 물리적 특성이 인간의 경험을 형성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지중해 역사를 몇 가지 공통 요소로 묶으려 하는 것은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지중해의 기본적 통합성을 주장하려는 그런 시도야말로 지중해 유역과 섬들에 거주했거나 또는 지중해를 오간 사람들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통합성을 찾기보다는 다양성에 주목해야 한다.(p947)... 지중해 역사의 통합성은 역설적이게도 변화무쌍한 가변성, 상인과 유랑민들의 이산, 오래도록 고생에 시달린 이븐 주바이르나 펠리스 파브기 같이 겨울이 닥쳐 해상에서 발이 묶이지 않기 위해 서둘러 바다를 건너려 한 사람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p956) <위대한 바다> 中


 개별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변수가 역사의 절대 변수인가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역사의 시간에서 어느 요인이 더 큰 영향을 미쳤는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지중해의 기억>애서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간 역사'와 <위대한 바다>는 '독립한 인간의 역사'를 확인하게 된다. 어느 역사가의 관점에 동의하는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역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우리의 시야를 넓게 해준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지중해는 역사 초기부터 이러한 불균형, 즉 자신의 운명 전체를 결정한 원동력의 목격자였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남분의 차이 그리고 수준의 차이를 보이면서 마침내는 문명간의 뚜렷한 갈등으로 비화된 동서의 차이가 바로 지중해의 운명을 결정한 원인이었다.(p115) <지중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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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다르네스여, 그대는 상황을 잘 몰라서 우리에게 그런 조언을 하시는 것이오. 그대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그런 조언을 하시니 말이오. 그대는 노예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아도, 자유가 무엇인지는 전혀 경험해보지 않아 그것이 달콤한지 아닌지 모르신단 말이오. 그대가 자유를 경험했더라면 우리에게 창 뿐 아니라 도끼를 들고 자유를 위해 싸우라고 조언했을 것이오. <역사 제7권 135> 中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5 ~ BC 425)가 그의 저서<역사 Histories apodexis>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페르시아 전제정으로부터 그리스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한 이후, 후세 서양사가들은 이러한 구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이 역사를 바라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이 형성되었다고 해석하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이오니아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을 '이민족'이라 불렀다... 마라톤 전투는 아태네 뿐만 아니라 전 그리스에 중요한 교훈을 일깨워주었다. 강대국에 대한 굴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이후에도 누차 강조하게 되겠지만 대왕의 군대도 격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거인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자유는 끝내 지켜질 것이었다.(p339) <페르시아 전쟁> 中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를 침공하여 정복하려 한 과정은, 크세르크세스가 잡동사니 테러국이라 칭한 나라들의 독립을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테네인들은 어쩌면 외국인 왕의 백성이 되어 아테네 고유의 민주주의 문화를 발전시킬 기회를 영영 갖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스 문명의 특징이 된 여러 가지 요소들도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마터면 서구는 독립과 생존을 위해서 싸운 최초의 전쟁에서 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구 the West'라는 실체 자체를 탄생시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p34) <페르시아 전쟁> 中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가의 설명과는 달리 페르시아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에도 심지어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 ~ BC 404)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크세토폰(Xenophon, BC 431 ~ BC354)의 <헬레니카 Hellenika>에서는 페르시아를 동맹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하는 테바이와 아테나이의 모습이, <페르시아 원정기 Anabasis>에서는 페르시아 용병으로 고생하며 퇴각하는 그리스 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서구(Europe)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 없게 들린다.

 

"전우들이여, 내가 지금 상황에 괴로워하더라도 여러분은 놀라지 마시오. 퀴로스는 내 친구가 되어, 조국에서 추방당한 나의 명예를 여러 가지 다른 점에서도 높여주었을 뿐더러 내게 1만 다레이코스를 주었소. 그리고 나는 그 돈을 받아 내 개인 용도를 위해 빼돌리거나 탕진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썼소.<페르시아 원정기 제1권 제3장 (3)> 中


 테바이인들은 어떻게 하면 헬라스의 패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만일 페르시아 왕에게 사신을 보내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알고 아테나이도 티마고라스와 레온을 파견했다... 조약 내용이 알려지자, 레온은 왕이 듣는 데서 "맙소사, 이제 아테나이 인은 왕 대신 다른 우방을 구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소"하고 말했다. <헬레니카 제7권 1:33 - 37> 中


 그렇다면, 당대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아이스퀼로스(Aeschylos, BC 525 ~ BC 456)의 <페르시아인들 Persai>에서는 다리오스의 입을 빌려 살라미스 전쟁의 패배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아이스퀼로스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패배는 휘브리스(hybris 오만)의 결과로 해석된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일단 교만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迷妄)의 이삭이 패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되기 때문이오.

 그대들은 이런 과오들과 이에 대한 벌을 보고

 아테나이와 헬라스를 기억하고, 차후에는 누구도

 자신의 현재 분복(分福)을 업신여기고 남의 것을 탐하다가

 자신의 큰 복마저 엎지르지 않게 하시오. (820 ~ 827) <페르시아 인들> 中


 <페르시아인들> 속에서 페르시아 왕은'세계정복'을 꿈꾸는 야망가의 모습이 아닌 단순히 '막대한 부'를 원하는 탐욕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로부터 <페르시아인들> 속에서 당대인들은 페르시아의 침략이 탐욕에 의해 일어난 결과로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인들의 인식 속에서 '페르시아 전쟁'은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이 그러하듯)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부(富)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자유민주정 VS 전제정'의 구도로 이 전쟁을 바라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로 이제는 <페르시아 전쟁>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굳이 이 전쟁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더라도, 이 전쟁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의미의 실마리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322)의 <정치학 Politika>을 통해 그리스 폴리스(Polis)를 살았던 여성과 노예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헬라(Hella) 공동체는 결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여성임과 노예임은 자연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런데 비(非)헬라스 사람들에게서는 여성과 노예가 동일한 지위를 가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연적으로 지배하는 어떤 것을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공동체는 남성 노예와 여성 노예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시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헬라스인들이 비헬라스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주 그럴듯하다 <정치학 제1권 5 - 9>中


 페르시아는 전제 군주정으로서 1인 군주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평등(平等  Equality)한 사회였다. 그렇다면, 오히려 페르시아 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자유와 평등'의 대결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자유'를 이데올로기로 내세운 집단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에서, '자유'는 전체의 자유가 아닌 소수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면에서도 다른 해석이 가능할 듯 하다. 즉, 오늘날 소수 글로벌 대자본에 의한 체제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  neoliberalism)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해석은 어떨까. 


 톰 홀랜드(Tom Holland)의 <페르시아 전쟁 Persian Fire>를 훒어보다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두서없이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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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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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0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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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2 1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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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2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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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7: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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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8: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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