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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혁명의 중심성은 세계경제의 헤게모니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 간 투쟁의 중심성의 한 결과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 투쟁에서 프랑스의 임박한 패배감에 뒤이어 그리고 그것의 한 결과로 일어났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헤게모니 투쟁에서 패배했던 바로 그 나라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그것이 미쳤던 바와 같은 영향을 세계체제에 미쳤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의 승리의 물결을 뒤집어 엎으리라고 기대했던 프랑스 혁명은 반대로 지속적인 영국의 승리를 확인시켜주는 데에 결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지경학적(地經學的) 패배 때문에, 프랑스 혁명가들은 실제로 그들의 장기적인 이데올로기적 목표들을 달성했다. _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3>, p145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2019)은 <근대세계체제 The Modern World-system>에서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영국과의 헤게모니(hegemony) 투쟁에서의 패배에서 찾는다.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 ~ 1763), 인도에서의 플라시 전투(The Battle of Plassey, 1757) 그리고 후대 아프리카에서의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 1899)에서 보듯 세계 전역에서 프랑스는 영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있었고, 나폴레옹 제국의 붕괴 이후에는 신생 강국 프로이센(Prussia)으로부터 2인자의 위치도 위협받는 처지에 몰려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는 <미슐레의 민중 Le Peuple>에서 프랑스의 새로운 희망을 민중으로부터 발견한다.


 하나의 민중 ! 하나의 조국 ! 하나의 프랑스 ! 결코 두 개의 국가가 되지 말기를 기원하노라. 단결이 없으면 우리는 파멸한다. 어찌 이것을 보지 못하는가? 모든 조건의, 모든 계급의, 모든 당의 프랑스인들이여, 한 가지만 기억하라. 당신들에게 이 지상엔 단 하나의 확실한 친구만이 있을 뿐이며, 그것은 프랑스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8/144


  민중에 대한 나의 오랜 연구 기간을 통틀어 언제나 나에게 충격을 주어왔던 그들의 중요하고 가장 현저한 특징은 결핍의 무질서와 비참한 악덕 속에서도 풍요로운 감정과 선한 심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네. 그런데 부유한 계층에게서는 그것을 거의 찾을 수 없었지. 게다가 누구라도 이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네. 콜레라가 창궐하던 시기에 누가 고아들을 입양했는지 아는가? 가난한 사람들이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2/144


 <미슐레의 민중>은 '프랑스 민중'과 국가 '프랑스'를 연결시킨다. 그는 헤게모니 전쟁에서 패배하고 1848년 혁명전야의 혼란 속의 프랑스 정세를 프랑스 민중의 모습에서 발견한다. 산업화 시대 속에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해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쇠락해가는 프랑스의 모습에 다름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이를 이겨내는 민중들의 모습에는 분명 미래 프랑스의 희망이 담겨 있었다. 


 육체적 허약함과 정신적 무능, 이런 상황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무능의 감정이다. 기계의 모든 움직임에 맞추면서 기계 앞에서 허약해진 이 사람은 공장주는 물론, 부지불식간에 그의 일감을 잃게 만들어 그의 빵을 빼앗아갈 수 있는 천 가지의 원인들에게도 종속하게 된다... 이들의 악행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극도로 육체에 의존하게 되어 본능적인 삶을 요구하게 되며 그것은 육체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어 결국 무능한 정신과 공허한 영혼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31/144


 이런 희망의 싹을 민중들은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들의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드러난 부정적인 면 대신 드러나지 않은 긍정적인 면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미슐레는 현재 세대가 아닌 미래 세대인 어린이들에게 주목하고, 이들에게 신념을 심어줄 것을 주문한다.


 프랑스가 다시 신념을 갖고 그 미래를 염원하기 위해서는 그 과거로 되돌아가 본연의 천재성에 천착해야 한다. 그 일을 진지하게 마음으로부터 하려 한다면 이 연구를 통해 확립된 전제로부터 다음과 같은 일들이 반드시 뒤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과거로부터 미래가, 즉 프랑스의 사명이 당신에게 흘러나오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에게 온전한 빛 속에 드러나게 될 것이며, 당신은 믿을 것이고 믿는 것을 사랑할 것이다. 신념은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15/144


 구체적으로 미슐레는 본문에서 공립학교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신념을 불어넣어 줄 것을 주장한다. 민중들이 국립학교에서 국가에 대해 배우고, 자신의 신념을 세울 때 비로소 프랑스는 과거 프랑스 혁명 시대의 영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미슐레의 민중>을 관통하는 주제다. 


 어린이에게 지속적으로 강력한 조국의 영향을 미칠 기관이란 학교로서 언젠가 세워질 위대한 국립학교이다. 나는 진정으로 모두가 공유하는 학교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모든 계급의 모든 어린이들이 1~2년 동안 나란히 함께 앉아서 어떤 특정 교과를 배우기 이전에 프랑스에 대해서만 배우는 곳이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17/144


 이 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대단히 강력한 것 두 가지를 갖고 있다. 프랑스는 원칙과 전설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가장 원대하고 가장 인간적인 관념과 동시에 가장 많이 따르는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이다. 중세에 은총이라는 교리 속에 묻혀 있던 이 원칙, 이 관념을 인간의 언어로는 형제애라고 부른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109/144


 <미슐레의 민중>은 이처럼 변화된 프랑스의 힘을 공립교육과 우정(박애)으로부터 찾지만, 사실 이들 모두는 프랑스 대혁명의 유산이다. 콩도르세(Nicolas de Condorcet, 1743~1794)가 제안한 공교육에 관한 개혁안, 프랑스 대혁명의 주요 이념인 '박애'를 생각해 본다면, 결국 미슐레는 프랑스 혁명 정신을 통한 자본시대 극복을 강조했음을 알게 된다. 

 

 "Liberte, Egalite, Fraternite ou La Mort." '자유, 평등, 박애, 그것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이 과격한 문구가 프랑스의 국가적 이념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실 자유와 평등은 상충하는 개념이다. 애초에 인간 사회는 평등하지 않으며 누구나 배타적 자유를 즐기고 싶어 하는데, 이 두 개념을 변증법적으로 융합시킬 제3의 개념이 박애로 알려진 'Fraternite'인 셈이다. _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1.7> <자유, 평등, 그리고 능력주의>, p5


 평등과 자유의 고결한 친구들이여, 여러분의 힘을 한데 모아, 공권력으로부터 이성의 빛을 퍼뜨릴 수 있는 교육을 얻어내도록 하라. 그럴 생각이 없다면, 여러분이 기울인 고귀한 노력의 모든 결실이 머지않아 사라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p61)... 공권력은 자신의 첫 교육이 맺은 열매를 우연 속에 방기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의 자상한 권위의 보살핌에 이어 이제 성인들에게는 공권력의 도움이 주어질 것이며, 그러한 도움은 성인의 독립적인 이성이 열렬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리라. _ 콩도르세, <콩도르세, 공교육에 관한 다섯 논문>, p144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다수 민중을 '목적'이 아닌 국가를 위한 '수단'으로 파악한 점,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인류의 차원으로 확장시키지 못하고 프랑스만의 사상으로 한정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미슐레의 주장은 시대퇴행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그의 글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무모한 돌격 전술을 감행한 프랑스 지휘관들의 무모함을 떠올린다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여기에 최근 폐지가 예정된 프랑스 엘리트층의 산실이었던 국립행정학교(ENA)와 관련된 프랑스 사회의 논쟁은 그가 강조한 공립학교 교육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물음을 던지게 된다. 


 [관련기사] :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38


 이러한 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한계가 명확해 보이지만, 새로운 시대의 빛을 어벤져스(Avengers)가 아닌 평범한 대중들로부터 찾으려 했다는 점만은 분명 그가 평가받을만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미슐레의 민중>이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중심으로 민중을 인식했다면, 산업국가 영국의 민중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이들의 삶은 칼 마르크스 <자본 1>과도 연계된 부분인만큼 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삶은 삶을 비추고 삶에 끌릴 뿐 고립에 의해서는 소멸한다. 삶이 자신과 다른 삶과 섞이고 다른 존재와 연계될 때 그것은 더 큰 힘과 행복과 풍요속에 존재하게 된다.(p53)... 단순한 사람들은 삶에 공감하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훌륭한 재능을 갖게 된다. 그것은 최소한의 흔적만으로도 그들은 삶을 충분히 직시하고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_ 쥘 미슐레, <미슐레의 민중>, p8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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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7-16 2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고 있는 역사학자 카가 쓴 <새로운 사회>라는 책에서 프랑스 혁명이 없었으면 지금 세상이 더 좋아졌을거란 문장을 보고 충격받고 있는 중입니다.
이유는 책 끝에 얘기해 준다고 하는데 넘 기대됩니다. ^^

겨울호랑이 2021-07-16 21:04   좋아요 1 | URL
저도 말씀을 듣고 보니 매우 기대가 되어 책을 담아 갑니다.미끼용 멘트가 아닌 의미 있는 통찰이 담겨있었으면 합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1-07-16 21:17   좋아요 1 | URL
다른 사람도 아닌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대학자 카인데 미끼는 아닐거라 믿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7-16 21:28   좋아요 1 | URL
전체는 아니겠습니다만, 대체로 영국과 프랑스 역사 학자들은 대체로 상대국의 역사 평가에 박한 듯 합니다. 혹시 카의 평가도 그런 분위기에 편승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물론 들여다보면 설득력이 있는지 알겠지만요. 북다이제스터님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사치산업과 자본주의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가, 또 사치수요의 증대가 자본주의의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의의를 지녔는가는, 우리가 오랜 수공업의 틀 속에서 나타났으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분화된 사치산업을 검토할 때야 비로소 완전하게 평가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자본주의에 속하게 된 수공업의 분야가 언제나 사치수요를 위한 생산 활동을 행해왔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 기회에 획득할 수 있는 경제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식이다._ 베르너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p195/243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1863 ~ 1941)의 <사치와 자본주의 Luxus und Kapitalismus>는 '사치'가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본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에 매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다. (엄밀하게는 '사랑' 보다는 '애정'이 더 정확한 표현일 듯 싶다.)


 사치란 남녀 간의 사랑(특히 비합법적인 사랑)과 관련이 있는 육욕적인 소비 행위이며, 이러한 감각적인 소비 풍조가 사회 전체에 만연되어 서구 사회에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_ 베르너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p236/243


 강력한 사치소비의 형성이 산업생산의 조직에 대해서 미친 영향이 훨씬 더 중요하다. 매우 많은 경우(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자본주의에 문을 열어준 것은 강력한 사치소비의 형성이었으며, 그 결과 자본주의는 수공업으로 철저히 둘러싸여 있던 도시에 진입하였다._ 베르너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p147/243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서구사회에 만연했던 '애인'을 갖는 풍조 속에서 애인에게 좋은 선물을 주려는 유효수요가 있었고, 이러한 유효수요가 때마침 인클로저(Enclosure Movement) 등으로 도시 근처에 밀집된 수공업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베르너의 주장에 대해 여러 문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함께 살펴보려 한다.


 좀바르트는 먼저 거대한 궁정(宮廷)과 이를 둘러싼 귀족 사회에 대해 말한다. 프랑스에서 발달한 궁정사회의 중심은 왕과 그 주변의 연인들이었다. 전제권력을 지닌 왕은 자신의 향락욕구와 함꼐 애인(愛人)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침이 없었고, 이러한 풍조는 곧 궁정을 둘러싼 귀족들에게로 퍼져 나간다. 바로크(Baroque)를 탄생시킨 절대권력. 에두아르트 푹스(Eduard Fuchs, 1870 ~1940)의 <풍속의 역사 Illustrierte Sittengeschichte vom Mittelalter bis zur Gegenwart>는 이같은 절대권력과 주변 귀족에 의해 방탕함(그리고 사치)이 퍼져 나가는 상황이 잘 표현된다.


 궁정을 맨 처음 만든 이는 프랑수아 1세이다. 그는 여성을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함으로써 궁정을 만들었다... 프랑수아 1세는 교활한 전제정치에 매혹적인 황홀함을 곁들여서 궁정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프랑스의 모든 활력과 세속적인 세계가 왕을 중심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여자와 함께 음모, 정사, 그리고 사치가 발생하였다.(p10)... 이 세계를 언뜻 들여다보면 그 세계 전체가 여성의 지배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동시대의 사람들도 그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_ 베르너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p11/243


 나는 앞에서 궁정은 언제나 지배계급의 일반적인 방탕이 모범이라고 썼다. 우리는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절대군주는 거의 모든 권력을 수중에 넣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향락욕구 역시 가장 대담하게 채울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지배계급, 곧 귀족이나 부호 그리고 그들에게 기생하는 계급에서는 변함없이 지저분한 방탕이 만연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당연했다._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3 : 色의 시대>, p273 

그렇다면, 이들의 방탕함이 지배계급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1897 ~ 1990)의 <궁정사회 Die ho"fische Gesellschaft>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베블런(Thorstein Veblen, 1857 ~ 1929)이 <유한계급론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에서 말한 '과시적 소비'는 품위유지비였으며, 이를 위해서 지출되어야 하는 금액이었다. 물론, 이러한 금액의 과다가 이른바 '혁명의 시대'를 가져오게 되지만, 이와는 별개로 '자본의 시대'의 씨앗으로도 해석된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렇지만, 궁정사회만으로는 사치가 자본주의를 가져왔다는 주장을 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사치가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되기 위해서는 보다 사회적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확산되었다. 


 수입보다 지출을 적게 하고 가능하면 현재의 소비를 수입수준에 맞추고, 앞으로 소득이 더 높아질 것을 바라면서 절약한 차액을 의무적으로 재투자하라는 직업시민의 사회윤리가 존재한다. 이러한 직업시민적인 행동규범은 특권소비의 규범과 다르다. 이처럼 다른 윤리, 즉 지위에 기준을 맞춘 소비(status consumption ethod)의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오로지 한 가문이 기존에 누려온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나아가 사회적 체면을 높이며 사회적으로 성공하는가의 여부는, 가계운영비/소비/지출에서 무엇보다도 그 가문이 소유하거나 추구하는 사회적 서열과 지위 및 특권에 좌우된다. 자신의 서열에 걸맞게 등장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존경을 상실한다._노르베르트 엘리아스, <궁정사회>, p154


 좀바르트는 <사치와 자본주의>에서 르네상스 말기부터 화폐경제, 도시의 활성화에 주목한다. 화폐경제의 발달로 기존 지주 계층과는 다른 형태의 재력가들이 등장했으며, 이들이 새롭게 귀족 계층에 편입되면서 궁정 사회는 도시 사회로 확대된다. 이는 부르주아(bourgeois) 귀족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바로크에서 로코코(Rococo)로 문화예술양식에서의 변화도 이 시기에 일어난다.

 

 특히 1600년에서 1800년에 이르는 200년 동안 옛 귀족과 새로운 화폐 재산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사회계층이 형성되었다. 이 계층은 내적으로는 새로운 부를 대표하였지만, 외적으로는 아직도 봉건적인 생활양식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벼락부자들 중 대부분이 귀족 신분으로 올라갔다는 것을 뜻한다._ 베르너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p18/243 


 근대사회의 발전에 있어서 크고 일반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점은 다음과 같다. 부 이외에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막대한 재산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능력 이외에는 자신을 눈에 띄게 할 만한 다른 특성을 갖고 있지 않은 벼락부자들, 즉 이러한 졸부들이 자신의 물질적이고 배금주의적인 세계관을 오래되고 고귀한 가문들에게 전하였으며, 또 그로 인해서 그들이 사치생활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갔다는 사실이다._ 베르너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p110/243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자신의 권력 충만의 중요한 조건으로서 늘 염두에 두고 면밀하게 감시했던 귀족과 시민사회의 각 최상층 사이의 사회적 장벽이 영국에서는 모호하고 느슨했다. 부유한 시민 출신의 영국의 대토지 소유주를 일컫는 특수계층인 젠트리(Gentry)는 특권 형성에 개입했고, 일반적으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지위의 경쟁관계의 압력을 받았으며, 지위의 소비에서 그 무렵의 주도층인 귀족가문 못지 않게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 영국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파멸한 무수한 가문이 있었다._노르베르트 엘리아스, <궁정사회>, p156



 그리고, 상류에서 하류로 이러한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말 그대로 이 시기는 '색 色의 시대'가 되버렸다. 남녀 누구나 공공연하게 정부(情婦)를 두고 있었던 시대에 애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사치품의 수요는 급작스럽게 팽창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와 계급의 주변부, 예컨대 경제관계로 그들과 얽혀 있는 계급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무절제한 방탕이 자행되었다.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갑자기 봉건주의의 침략을 받은 도시의 풍기를 비교해보면, 추악함은 언제나 상류층에서부터 가장 낮은 서민층으로까지 마침내 흘러가는 것이 확실히 드러난다._에두아르트 푹스, <풍속의 역사 3 : 色의 시대>, p279


 또한, 사치품에 대한 강력한 유효수요(有效需要)는 도시에 밀집된 수공업자들을 자극하게 되었다. 화폐를 기반으로 큰 시장이었던 도시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이들은 치열하게 경쟁했으며, 주로 외상거래로 이뤄지는 사치품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을 축적하게 되었다는 점을 좀바르트는 지적한다.


  대도시들도 기본적인 의미에서는 소비도시였다. 대 大소비자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군주, 성직자, 고관이었는데, 이제는 새로운 중요한 집단이 추가되었다. 즉 대자본가가 그들이었다.(p36)... 국민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국가 수입의 상당액이 도시에서, 특히 대도시에서 소비된다면, 사치 문제는 대도시 문제와 결합한다._ 베르너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p51/243


 사치품을 거래하는 상인은 다른 사정이 똑같다고 가정한다면 언제나 많은 자본을 수중에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상품의] 회전이 (외상 제도 때문에) 느렸기 때문이다... 판로의 공간적인 확대, '해외시장', '수출'이 자본주의적인 조직을 '필요'로 하였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지금부터 한 세대 전의 뛰어난 연구가이며 진실로 생산적인 사상가인 칼 뷔허 Karl Bucher의 이론에서 강력한 버팀목을 찾았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수공업은 고객의 주문에 의한 생산이며 자본주의는 익명의 고객 집단을 위한 생산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수공업이 국지적인 판매라면, 자본주의는 초 超 국지적인 판매라는 것이다._ 베르너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p147/243 


 이러한 유럽 사회 내부의 움직임과 함께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가 열리면서 해외에서도 사치품(또는 원재료)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를 가공하는 제조업과 거래하는 금융업이 함께 일어난 것이 유럽의 외부 상황이라 할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세계적으로 소비자 사회가 시작되었다. 앞선 몇백 년 동안에도 대륙간 교역을 통해 이국적인 물품들이 유통되었지만, 동양의 사치품이 일상용품으로 바뀌고 군주나 귀족뿐만 아니라 사회 중간층 가구도 입수할 수 있게 된 것은 18세기에 와서 이루어진 일이다.... 대륙 간 교역으로 거래된 물건은 개인의 생활 방식과 공중 영역에서의 자기표현에서 점차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유럽 사회 전역에서 널리 입수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자극성 식품은 커피와 차였다._ 세바스찬 콘라드 외,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 1750 ~ 1870>, p543/713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여성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설탕이 매우 빠르게 애용되는 기호품이 되었으며, 또 설탕이 있었기 때문에 코코아, 커피, 차 등의 자극제가 유럽에서 매우 신속하게 널리 애용되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품목의 무역, 유럽 식민지에서의 코코아, 커피, 설탕의 생산, 그리고 유럽 안에서의 코코아의 가공과 원당 原糖의 정제는 자본주의 발전에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_ 베르너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p128/243 


 막스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가 유명한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에서 말한 근면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도식에 익숙한 우리에게 '사치가 자본주의를 가져왔다'는 주장은 생소할 수 있지만,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사치가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는 좀바르트 주장은 받아들이도록 하고, 다음 과제로 넘어가보자. 전쟁은 어떻게 자본주의 를 발전시켰는가. 다음 주제는 <전쟁과 자본주의> 다...






나는 <근대 자본주의> 중 재산 형성을 다룬 장에서 귀족의 궁핍화가 시민계급 대금업자를 부자로 만든 원천이라고 말하였으며, 또한 봉건 재산이 부르주아 재산으로 전환되는 이러한 과정이 십자군전쟁 이후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_ 베르너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p110/243

사람들은 사치가 당시에 발생 중에 있는 경제형태, 말하자면 자본주의적인 경제형태를 발전시킨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따라서 경제적인 ‘진보‘의 지지자들은 모두 또한 사치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그들은 기껏해야 지나친 사치소비가 자본 형성에 해를 끼치지 않을까 염려하였을 뿐,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필요한 자본의 재생산과 축적을 확실하게 해주는 검소한 사람들은 이미 충분하게 있다는 확신으로 자신을 위로하였다._ 베르너 좀바르트, <사치와 자본주의>, p147/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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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7-09 16: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연애/방탕-> 사치 -> 자본주의라니. 흥미롭네요. <유한계급론>은 예전에 흥미롭게 읽었었는데 기억이 안..나네요.. ㅜㅜ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7-09 16:51   좋아요 3 | URL
좀바르트의 관점은 자본주의를 신성시하는 기존의 관점과 궤를 달리하기에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베버보다 잘 짚어냈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독서괭님 금요일 저녁 즐겁게 보내세요! ^^:)

북다이제스터 2021-07-09 2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유물론보다 관념론을 더 믿는 편이지만,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는 넘 ‘구라’가 심한 것 같습니다. ㅋㅋ 넘 마르크스를 의식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정성어린 좋은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7-09 22:13   좋아요 1 | URL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베버의 사상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졌는데, 지금은 여러 곳에서 그에 대한 날선 비판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새삼 학문의 흐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감사합니다. 4단계로 고요한 금요일 밤 평안하게 보내세요! ^^:)
 

 

 인도의 면공업은 영국에 새로운 기술을 전수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후 영국의 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 강제적으로 인도의 탈공업화 전략을 통해서 그 발전이 억제되었다. 제국주의 팽창 이전에 인도의 면공업은 영국 면공업에 대한 주요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으나 이후 인도의 면공업 종사 노동자는 그 이후 유럽에 대한 값싼 식품과 원재료의 공급자로 전락하고 만다._김영철, <자본, 제국, 이데올로기> <산업혁명기의 기술혁신과 대외무역과의 관련성에 관한 연구>, p123 


스벤 베케트(Sven Beckert)의 <면화의 제국 Empire of cotton>을 관통하는 주제는 자본주의(capitalism)다. 북반구와 남반구 30도 이내 지역에서 널리 재배되던 면화. <면화의 제국>은 중국과 인도의 면직물에게 밀렸던 유럽의 면직물 산업이 어떻게 경쟁국들을 따돌렸는가를 잘 설명한다. 많은 경우 19세기 유럽 제국주의 침략을 제국주의, 종교, 과학기술, 자본주의의 결합이라고 설명하는데, <면화의 제국>에서는 이들 중 제국주의, 과학기술, 자본주의가 어떻게 제도를 변화시켰는가를 잘 보여준다.

 

 전쟁자본주의는 세계를 '내부'와 '외부'로 가를 수 있는 부유하고 강력한 유럽인들의 역량에 의지했다. '내부'는 모국의 법과 제도와 관습을 포괄했고, 국가가 부과한 질서의 지배를 받았다. 반대로 '외부'를 특징지은 것은 제국의 지배, 방대한 지역의 수탈, 원주민 학살, 자원 약탈, 노예화, 그리고 멀리 떨어진 국가의 효율적인 감시를 벗어난 민간 자본가들의 방대한 토지 지배였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85

 스벤 베커트는 <면화의 제국>에서 유럽의 자본주의를 크게 2종류로 나눈다. 전쟁자본주의와 산업자본주의가 그것으로, 다른 세계에 비해 여러 면에서 부족했던 유럽인들은 무기를 활용한 침략과 식민지 건설을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자본주의로부터 축적된 이윤을 바탕으로 산업자본주의로의 이행(移行). 이것이 스벤 베커트가 바라본 진화된 자본주의의 모습이다.


 [사진] Florida's Culture of Slavery(출처 : https://floridahumanities.org/floridas-culture-of-slavery/)


 유럽인들은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에 착수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냈고, 생산에 뛰어든 뒤로는 철저히 노예제에 의지해 부를 창출했다. 제국주의적 팽창과 수탈, 노예제라는 세 동인이 새로운 전 지구적 경제질서를 조성하는데,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가 등장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세 동인들은 이 새로운 세계의 한 가지 또 다른 요소와 결합했다. 바로 국가였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84


 여전히 규모도 작고 기술적으로도 뒤처진 유럽 면산업의 기반을 잡아준 것은 바로 제국의 팽창, 노예제, 토지 약탈로 요약되는 전쟁자본주의였다. 전쟁자본주의 덕분에 유럽의 면산업은 역동적인 시장을 얻었고, 기술력과 필수 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전쟁자본주의는 자본 형성에도 중요한 추진 장치가 되었다.(p104)... 마지막으로, 전쟁자본주의는 보험, 금융, 운송처럼 영국 면산업의 등장에 매우 중요했던 부문뿐 아니라 국채, 화폐, 국방 같은 공적 제도들까지 부양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105


 그렇다면, 전쟁 자본주의 체제에서 영국이 승자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스벤 베커트는 인류 최초의 그리고 최대의 글로벌 상품인 면화 네트워크를 장악할 수 있는 강한 해군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초기 인도 면직물과의 경쟁에서 열위(劣位)에 있을 때는 보호무역 조치로, 산업혁명 이후 산업 경쟁력을 갖춘 이후에는 자유무역주의를 밀어 붙이며 영국은 룰 메이커(rule maker)로서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 지구적 수준에서 보면 영국 노동자들이 생산한 면직물의 양은 극미했고, 영국의 농부들은 아예 면화를 생산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영국이 생산을 개조하고 면화로 촉발된 산업혁명의 진원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영국 상인들이 이런 글로벌 네트워크를 장악했던 덕분이다. 산업자본주의는 확실히 혁명적이긴 하지만 앞선 몇 세기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전쟁 자본주의의 산물이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117


 초기에 영국의 면제조업자와 상인은 자국산 직물과 인도산 직물을 아프리카로 수출하는 데에 주력했다. 해외 시장에 대한 이런 의존성은 1750년 이후에 뚜렷해졌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메리카가 가장 중요한 시장이어서, 18세기 중반이면 영국 직물 수출의 94%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 향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103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영국 제국주의 = 간접통치 방식 = 인도주의적인 지배방식'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보다는 오늘날 문화제국주의의 전단계 모습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통치방식을 선호했을 뿐이라는 것이 영국제국주의의 본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갤러허(J.Gallagher)와 로빈슨(R.Robinson)은 직접지배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도에 걸쳐있는 간접지배도 제국주의로 규정하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정부는 특히 간접지배를 선호했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약식 제국주의(informal imperialism)는 실상 통치비용을 들이지 않는 값싸고 효율적인 지배를 의미한다. 무역을 통한 간접지배를 선호하는 자유무역 제국주의는 영국의 절대적인 공업력 우세와 강력한 해군력이라는 물질적 토대 위에서 생겨나고 유지될 수 있음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_서정훈, <자본, 제국, 이데올로기> <빅토리아 후기(1870~1903)의 대외팽창 성격>, p205


 19세기 영국의 자유무역주의는 그 주창자들이 내세우는 만큼 실제로 공평한 무역관계를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발달 정도가 다른 산업 사이의 "자유 경쟁"에서 영국 산업이 이익을 우선적으로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도가 실제로 수입관세를 점차로 낮추다가 1880년대부터 사실상의 자유무역제를 실시하게 된 것은, 직물업자를 위시한 영국의 자유무역주의자들의 거센 압력 때문이었다._이태숙, <자본, 제국, 이데올로기> <토머스 B, 머콜리와 인도>, p274 

 전쟁 자본주의와 산업 자본주의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전쟁 자본주의가 노예제에 기반한 생산구조였다면, 산업 자본주의는 임금(賃金)에 기반한 생산구조였다. 전자가 노동의 양(量)적 착취에 기반했다면, 후자는 노동의 질(質)적 착취에 기반한다. 산업혁명을 통한 기계(자본재)의 공급 확대는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왔으나, 동시에 더 많은 노동력의 투입이 요구되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자본론 Das Kapital>의 절대적 잉여가치, 상대적 잉여가치의 개념 이해는 이와 연관시켜 보면 좋을 것이라 여겨진다. 동시에, <자본론1>에서 언급된 여성, 아동들에 대한 노동 착취는 산업 자본주의 이행기의 실상을 상세하게 고발하기에 함께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다시 돌아와서,


 방적과 직포와 채탄 분야의 개량들은 대체로 노동을 절약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들은 이전까지 다수의 노동자가 이루어 낸 성과를 소수의 노동자가 성취할 수 있게 했고, 예전에는 성인 남녀에게 적합했던 작업을 아동들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음에도 생산량은 대폭 늘어나 성인 노동자 대부분의 수입은 증가했다._T. S. 애슈턴, <산업혁명>, p184

 분명 산업혁명은 주로 노동력 절감 기술에 관련된 것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방적 부문에서 생산성이 수백 배나 향상된 것을 목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을 절감하는 이런 기계들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역시 노동력이 필요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288


 제조업자들은 이 모든 기계를 가동시키고 공장을 가로질러 면화를 이동시키기 위해 수백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아동과 여성이었다. 모든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공장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가 임금을 받고 일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는 산업자본주의가 이룬 또 다른 중요한 제도적 혁신이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128


 임금을 주어 엄청난 수의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그들의 작업을 감시하며 그들이 기술과 열정을 쏟게 하는 동안 새로운 딜레마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공장을 벗어난 노동자들의 가정과 거주 지역에서 고용주의 권한은 훨씬 더 멀어졌다. 노동자들을 모집하고 규율을 시행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노동조건이 끔찍했기 때문이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307


 <면화의 제국>에서는 이처럼 전쟁 자본주의에서 산업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통해 유럽 사회가 어떻게 패권을 장악했는가를 설명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쟁 자본주의가 산업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 신생국 미국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바로 미국 남북 전쟁(American Civil War, 1861 ~ 1865)이다.


 미국이 급부상하며 시장을 지배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원면 생산에 투입되는 세 가지 필수 요소, 즉 노동과 토지, 신용의 공급이 유연했다.(p378)... 면화가 중심이 된 미국 남부의 독특한 정치경제가 이제 막 싹튼 북부의 자유노동과 자국의 산업화를 추구하는 정치경제와 충돌했을 때, 미국의 노예제는 그 체제를 통해 이룬 번영을 스스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1861년 4월 남부연합과 북부연방 사이에 발발한 전쟁은 미국 영토의 통합과 그 '특유한 제도'의 미래를 둘러싼 투쟁이었을 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노예노동으로 지탱되고 있던 글로벌 자본주의를 둘러싼 투쟁이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381


[사진] American Civil War(출처 : https://www.history.com/topics/american-civil-war/american-civil-war-history)


 우리에게 링컨(Abraham Lincoln, 1809 ~ 1865)과 노예제 폐지, 톰 아저씨의 오두막으로 유명한 남북전쟁이지만, 그 실상은 남부의 전쟁자본주의와 북부의 산업 자본주의간의 패권 전쟁이자, 글로벌 자본 간의 격돌이었다. 링컨은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1811 ~ 1896)에게 남북전쟁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라고 말했다지만, 결국 노예제 폐지는 명분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미국 남부에서 면화 재배가 확대되고 영국의 소비자들, 최종적으로는 유럽 대륙의 소비자들이 미국 남부의 면화 공급에 점점 의지하게 되면서 미국 남부와 유럽 사이의 제도적 연결이 점점 더 심화되었다... 이 모든 네트워크의 중심에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면화의 흐름과 그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자본의 흐름이 있었다._스벤 베커트, <면화의 제국>, p193


 같은 시기에 읽은 <면화의 제국>, <자본, 제국, 이데올로기>, <산업혁명>등을 종합한다면, 19세기에 만들어진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란 면화로 대표되는 열등한 상품 경쟁력을 만회하기 위해 총칼로 식민지를 만들어 상품공급지와 소비지로 만들어 막대한 이윤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전쟁 자본주의에서 산업 자본주의로 이행하며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경제력 우위 수준에 따라 보호주의와 자유주의를 번갈아 사용하고, 대량 생산을 통해 가격경쟁력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과학 기술이 활용되며, 필요에 따라 이데올로기로서 '인권', '자유' 등의 개념이 남발되는 것을 이들의 책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비춰볼 때, 과연 오늘날 서구의 부(富)의 기원이 무엇인지, 그들이 동양에 대해 갖는 편견의 근거는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역사는 순환하는 것이어서, 그들이 그토록 경멸하던 중국, 인도의 발전을 이제는 경계하는 지경에 이른 것을 보면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


 잉글랜드를 구출한 것은 지배자들이 아니라, 자신만의 협소한 목적을 추구한 것이 분명하지만 새로운 생산 도구와 새로운 산업 경영 방법을 창안할 만한 지혜와 자질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인도와 중국의 평원에는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남녀들이 낮에는 함께 일하고 밤에는 따로 잠자는 가축들보다 외견상 거의 나을 게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같은 아시아의 생활수준과 기계화되지 않은 그런 공포는 산업혁명을 거치지 않고 인구수만 늘리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인 것이다._T. S. 애슈턴, <산업혁명>,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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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정치적 폭발의 요소들은 그 얼마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1870년에서 1871년 사이 독일로 인한 국가적 자존심의 곪아터진 상처, 그로 인해 프랑스 군대가 겪은 치욕, 공화파와 왕정파 사이의 오랜 적대감, 그리고 공화국과 교회 간의 그 못지 않은 적대감, 계속되는 경제적 불만, 특히 농업 분야의 부진,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길한 것은 맹렬한 반유대주의의 부상이었다. _ 메리 매콜리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 p405


 메리 매콜리프 (Mary Mcauliffe)는 1871년부터 1929년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얽히는 과정을 3권의 책에서 담아냈다.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Deutsch-Franzosischer Krieg, 1870 ~ 1871)의 패전과 파리 코뮌(La Commune de Paris, 1871)의 상처를 안은 프랑스는 50억 프랑이라는 막대한 전쟁 부채와 알사스-로렌 지방을 넘겨주면서 큰 위기에 봉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는 국가 차원의 노력을 기울인다.


 정부의 공공사업들이 경제에 미친 부양 효과는 실제적이기는 했지만 일시적인 것으로 1882년 초까지밖에 가지 않았다. 연초가 되자 고공 행진을 하던 상업은행 위니옹 제네랄의 도산과 함께 경제가 극적으로 주저앉았다.(p192)... 주가 폭락의 여파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특히 노동자 계층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현 사태와 뒤따르는 재정적 재난에 대해 정부를 비난했는데, 그 불만에는 좀 더 깊고 악의적인 감정도 섞여 있었으니, 사태의 책임을 유대인 은행가들에게 돌리려는 것이었다... 사실 로트실트가(로스차일드가)와 다른 은행들은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해 자금을 빌려준 터였지만, 프랑스 전역의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_ 메리 매콜리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 p193 


 프랑스는 공공사업을 통한 재정부양책을 사용하면서 전후 위기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어느 사회나 이러한 경제부양정책으로부터 소외받은 이들과 문제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는 이들은 있기 마련. 프랑스 내에 경제불평등 문제와 반(反)유대주의는 드레퓌스 사건( L'affaire Dreyfus, 1894 ~ 1906)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 바닥에 남아 있었다. 극심한 경제불평등은 문화를 가난한 이들로부터 분리했고, 결국 이 시기의 예술은 '가진 자'들의 것으로 될 수 밖에 없었고, 반유대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프랑스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벨 에포크 시기의 그림자는 짙었다. 


 졸라가 본 대로, 파리는 이전 해의 재앙들로부터 급속히 회복되고는 있었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시의회에 들어간 클레망소도 그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 몽마르트르의 빈민들을 위해 그의 일은 파리의 광범한 하층계급을 부단한 의제로부터 부각시켰다. 그가 특히 경각심을 느낀 것은 파리 극빈 지역 아동들이 처한 난국이었다. 그런 아동들, 특히 사생아들에 대한 최소한의 국가 보호도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체제하에 번창하는 파리 사람들은 불운한 자들을 위해 시간을 낼 여유가 없었다. _ 메리 매콜리프,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 p74


 이 시기 프랑스는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고, 다시 한 번 세계의 중심지로 영광을 누리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현실은 과거와 달랐다. 프로이센과의 전쟁 뿐 아니라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 1898)에서 보듯 해외식민지 확보 경쟁에서는 영국에게 뒤쳐졌던 것이 프랑스가 처한 현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지도층은 당시 일어난 민족주의 감정을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등을 통해 고취하길 원했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 에펠 탑등을 만들어지며 파리의 모습은 적어도 외적으로는 획기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와 함께, 경제적 부흥 노력과 국제 행사 개최를 계기로 유럽 여러지역의 예술가들이 프랑스로 몰려들면서, 프랑스 예술계는 본격적인 부흥을 시작하는데,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 1900 ~ 1918>는 이 시기를 잘 묘사한다. 


 1900년 10월 중순, 파블로 피카소는 바르셀로나를 떠나 파리의 붐비는 새 철도역인 오르세역에 도착했다. 며칠 후 만 열아홉 살이 되는 그는 의기충천해 있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그의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파리에 입장하는 얼마나 근사한 방식인가! (p15)... 이사도라에게 힘을 주는 것은 춤의 근본원리를 발견하겠다는 목표였다. 그녀는 진리가 기술보다 먼저임을 강조했다. "삶이 뿌리이고 예술은 꽃이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이는 10년 후 모스크바에서 나타나게 될 메소드 연기와도 다소 비슷한 것으로, 그녀는 고전발레의 인위성을 거부하고 정서적 관념들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동작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녀는 무용의 역사를 바꾸어놓을 발견을 하려는 참이었다._ 메리 매콜리프,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 1900 ~ 1918>, p86

 

 20세기 초에는 예술 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유럽은 끝없는 발전을 이루는 듯 보였다. 독일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 ~ 1955)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1905)하고, 마리 퀴리(Maria Skłodowska-Curie, 1867 ~ 1934)와 피에르 퀴리가 라듐을 발견(1898)하던 시기, 인간 이성(理性)에 대한 낙관을 가지고 벨 에포크(Belle Epoque)시대의 즐거움을 프랑스는 누렸다. 그렇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이 빛나는 황금시대는 막을 내린다. 3부작의 마지막 <파리는 언제나 축제, 1918 ~ 1929>에서는 전후(戰後) 프랑스가 떠오른 신흥 대국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면서 상처를 복구했는가가 그려진다. 프랑스 프랑화(貨)의 약세, 미국 금주법 시대(禁酒法時代, Prohibition era, 1919 ~ 1933) 등을 통해 많은 미국 예술가들이 프랑스에 건너오면서 프랑스는 새로운 부흥을 꿈꾼다는 이야기로 책은 마무리된다.  마지막은 마치 동화책의 결말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안다. 1929년 불어닥친 대공황이 유럽을 다시 한 번 잿더미로 초대했다는 사실과 유럽 사회에 팽배했던 반유대주의가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을 어떻게 끝냈는지를.


 1920년대 파리는 모든 방면에서 혁신의 온상이었다. 그 시절 이 빛의 도시는 문학, 미술, 건축, 음악, 패션 등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의 문화적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창조성과 함께 관용의 태도가 널리 번졌고, 적어도 어던 집단에서는 그러했다.(p111)... 프랑스라는 나라는 제1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극복했고, 비록 값비싼 - 특히 인명에서는 - 대가를 치른 승리였으나 1929년에 프랑스인들은 대체로 번영을 즐기며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_ 메리 매콜리프, <파리는 언제나 축제, 1918 ~ 1929>, p421


 이처럼 메리 매콜리프의 '예술가들의 파리' 시리즈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벨 에포크 시대를 여러 인물들의 교차 편집을 통해 잘 묘사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가들의 삶과 함께 그들과 분리할 수 없는 시대상을 볼 수 있다. 비록, 작품, 작가를 깊이있게 묘사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은 이 시리즈가 가진 장점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는 결코 분리해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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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2-15 2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페이퍼를 읽으니 프랑스의 역사를 다룬 박물관을 관람한 기분이에요. 벨 에포크 시대에 대해서는 막연히 낭만적인 느낌을 갖고 있었는데 마냥 좋은 시절은 아니었군요…

겨울호랑이 2020-12-15 20:54   좋아요 1 | URL
파이버님의 말씀처럼 많은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크게 발전한 시기, 산업화의 혜택으로 문화가 부흥한 시기로 인식된 벨 에포크 시대가 누군가에겐 깊은 고난의 행군시기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어쩌면 소수가 행복한 시기보다 다수가 평온한 시기가 더 좋은 시절은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파이버님 감사합니다.^^:)

prothoevero 2020-12-16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은 책에 추가했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12-16 13:56   좋아요 0 | URL
즐거운 독서 되세요, prothoevero님 감사합니다.^^:)

2020-12-22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3 0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12-25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불전쟁에서 참담한 패전...
그리고 이은 파리 코뮌의 실패

그런 시절을 뒤로 하고 벨에포크
시절이 왔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겨울호랑이 2020-12-25 19:17   좋아요 0 | URL
예나 지금이나 어려움은 힘 없는 이들에게서 행복과 경제력을 빼앗아 가진 자에게 나누어주는 불평등의 기폭제가 되는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벨에포크 시대는 말 그대로 그들만의 빛나는 시대였겠지요... 다만, 그런 불안정한 시대는 사상누각에 불과함을 역사는 잘 보여주지 않나 여겨집니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 ~ 1900」는 ‘파리코뮌- 빅토르 위고‘로부터 시작하여 ‘드레퓌스 사건 - 에밀 졸라‘로 마감되는 세기말 파리의 예술사다. 여러 면에서 이 책은 칼 쇼르스케의 「세기말 빈」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19세기 말 이성과 문화의 정점을 향해 달리던 두 제국의 황혼을 다뤘다는 소재면에서 발견할 수 있겠다. 차이점이라면 전자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찬란한 영화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프랑스 제국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과 후자가 다민족으로 이뤄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통합노력이 그려진 정도가 아닐까 한다.

19세기 제국주의 황혼에 핀 문화, 예술, 과학에 대한 비교는 다른 페이퍼로 미루고 이번에는 간략하게 19세기 파리 물랑루즈(Moulin Rouge)의 배경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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