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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리 피렌(Henri Pirenne, 1862 ~ 1935)은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Mahomet et Charlemagne>에서 두 가지를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게르만 민족의 로마 제국 멸망은 고대 사회의 단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湖水)'로 만들었던 로마에게 게르만의 침입은 제국의 성격을 바꿀 정도의 충격을 주지 못했다. 반면,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을 이끈 원동력은 이슬람(Islam)의 진출에 있음을 앙리 피렌은 강조한다.

 

고대 전통이 단절된 원인은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이슬람의 진출이었다. 이 진출의 결과는 동방과 서방의 최종적 분리였고, 지중해적 통일성의 종말이었다. 이제 이슬람교도의 호수가 된 서지중해는 과거에 늘 그랬던 것 같은 상업과 사상의 교통로가 더 이상 아니었다. 서방은 봉쇄되었고, 닫힌 세계에서 자체의 자원으로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변화로 메로빙거 왕조과 쇠퇴했고 그 대신 게르만적인 북방에 기원을 둔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가 등장했다(p334)...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이 나타났지만, 전반적으로 로마 교회와 봉건제에 의해 지배된 유럽은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전통적인 용어를 빌리면 중세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동향은 800년에 새로운 제국(서로마 제국)이 건설됨으로써 완성되었다.(p335)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中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저자는 이슬람의 지중해 장악이 가져온 서구 유럽의 봉쇄가 유럽의 변화를 가져왔음을 강조한다. 서아시아에서 시작되어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에 까지 팽창한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제국과 서유럽의 게르만 왕국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유럽에서 전통의 단절을 가져올 정도의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팽창하는 정책을 택했을까? 


 무아위야와 그 부족은 칼로써 칼리프 지위를 획득했다. 그것은 혈연과 수니파 교리에 의해 결합된 전사와 상인의 사회이며 동시에 신정체제였다. 그 체제는 정치에서는 실용주의를, 종교에서는 절제를 강조했다. 칼리프 보위의 찬탈자가 성공하려면 아랍의 호전성을 잘 막아서 다른 곳으로 전환시킬 줄 알아야 하고 또 전쟁을 통해 국가 부흥의 과정을 공고히 할 줄 알아야 했다. 따라서 팽창 정책은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둔 새로운 체제의 핵심 정책이 되었다.(p150) <신의 용광로> 中


 이슬람의 팽창정책은 무아위야(Muawiyah bin Abi-Sufyan, 602 ~ 680)가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Ali ibn Abu Talib, 601 ~ 661)를 제거하고 칼리프의 지위에 오른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정권이 국내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로 관심을 돌리듯, 무아위야 왕조는 정복전을 통해 자신들이 신의 선택을 받았음을 입증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슬람은 두 가지 선물을 받게 된다. 하나는 세계사에 유래없이 빠른 기간에 이루어진 광대한 이슬람 제국이며, 다른 하나는 이슬람 내부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과 대립이다.


[그림] 푸아티에 전투(출처 : https://www.britannica.com/event/Battle-of-Tours-732)


 732년 푸아티에(Battle of Tours-Poitiers) 전투는 이와 같이 팽창하는 이슬람의 침입을 막아낸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푸아티에 전투가 없었다면 유럽은 이슬람의 지배 하에 놓였을 것이며, '기독교의 유럽'이 아닌 '이슬람의 유럽'이 되는 위기의 상황을 극복한 성전(聖戰)이었다는 것이 유럽학자들의 인식이다. 그렇지만, <신의 용광로 God's Crucible: Islam and the Making of Europe, 570~1215>의 저자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David Levering Lewis)는 이러한 시각에 의문을 던진다. 


 카롤링거 왕조의 유럽 사람들은 카를 '마르텔(해머)'이 거둔 푸아티에 승리 덕분에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그 반대로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패배가 더 바람직한 게 아니었을까?(p433) <신의 용광로> 中


  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이 제기된 이유는 무엇일까. 에브로 강과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남쪽의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661 ~750)과 북쪽의 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 481 ~ 870)은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두 제국이었다.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들 간의 관용과 상호의존을 바탕으로 꽃을 피워낸 이슬람 문명은 개방적인 반면,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서유럽 문명은 폐쇄적이었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문화는 서로 융합하여 그보다 더 오랫동안 800년도 넘게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어났다. 이슬람교는 시칠리아에서처럼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다른 문화에 대해 강력한 상징적 특성을 보여주었는데, 남부 아랍의 힘야르족, 유대인, 그리스인, 시리아인, 메소포타미아인, 콥트인, 베르베르족, 아프리카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터키인, 몽골족, 심지어는 중국인에게 이미 그 점을 보여 주 바 있었다. 이슬람교는 주어지는 모든 것을 도덕적 갈등 없이 결합했다. 알안달루스에서는 이베리아-라틴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긍정적인 요인이 되었다.(p210) <중세 1> 中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무엇보다도 백성의 사회생활을 코란의 원칙으로 통치해야 했다. "알라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진정으로 증명하라." 예언자는 그렇게 명령했고 아브드 알-라흐만은 그에 순응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 부당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하라."... 이 문명화된 정책에서 곧 저 유명한 콘비벤시아 convivencia, 즉 역사적으로 유명한 관용과 상호 의존의 기풍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이곳 알-안달루스에서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은 오랫동안 유럽 대륙에 하나의 역할 모델을 제공하는 공존의 문명을 누렸다.(p311) <신의 용광로> 中


 한 중세학자는 샤를마뉴 시대를 이렇게 요약했다. "카롤링거 사회는 세 집단으로...... 이루어졌다. 싸우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p434)... 샤를마뉴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남녀노소의 자유들은 처음에 서서히 그리고 나중에 가속적으로 사라졌고, 노예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농노로 전락했다. 경제와 정치의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기어올라 권력을 움켜잡은 소수의 사람들은 세속과 교회의 유력자 대열에 합류했고, 그들의 많은 재산은 카롤링거 왕조의 전쟁기계와 영주들의 화려한 생활양식을 지탱했다.(p435) <신의 용광로> 中


 이러한 사회 분위기 차이는 이슬람에서 상업(商業)이 발전하게 되고, 유럽에서는 농업(農業)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방대한 제국에 거주하는 인구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우마이야 왕조에서 상업이 융성했다면, 이슬람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사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유럽은 농업사회로, 이후 중세 봉건 사회로 나아간다. 상업사회인 우마이야 왕조와 농업사회인 프랑크 왕국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재현(再現)이라고 여겨질 만큼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종교에 따라 경제적 길드로 편성된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교도는 영리하고 활발하게 경쟁하면서 물건을 사고팔고 수입하고 수출했으며 거기에서 나오는 이득을 도시에 쏟아 부었다. 아브드 알-라흐만의 은화는 국제무역 통화의 일부로 사용되었고, 아랍 공동체가 방대한 자원의 은과 구리를 통제했기 때문에 실현 가능한 역동적 현상이었다. 대조적으로 피핀 왕조의 프랑크 왕국에는 정금 正金 통화가 거의 없었다.(p317) <신의 용광로> 中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던 시점에, 지중해 북쪽 해안 지대인 셉티마이아와 프로방스에 사는 갈로-로마인들은 경제적 동력이 멈춰선 상태였고 농업과 상업도 고대 로마 초창기 때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독교권의 문명과 비교해볼 때, 아랍 문명은 유기적 통합, 문화, 테크놀로지, 정치적 조직 등의 측면에서 메츠와 파리에 작용하는 원시적 힘보다 훨씬 우월했다.(p237) <신의 용광로> 中


 안-안달루스에서 중시되는 일은 비즈니스였고, 카롤링거의 유럽과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비즈니스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전쟁 준비가 곧 전사 계급의 존재 이유였다... 프랑키아에서는 모든 자유인이 마치필드(군사 소집)에 신고했야 했지만, 알-안달루스에서는 세금 거두는 사람에게 성실하게 납부액을 신고하기만 하면 되었다.(p491) <신의 용광로> 中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3차 산업 중심의 이슬람 제국으로의 편입이 1차 산업 중심의 프랑크 왕국보다 유럽에게 있어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저자의 질문은 새롭지만, 의미있는 질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질문은 마치,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을까, 아니면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을까 하는 질문으로 느껴지도 한다. 


 서구 역사가들은 푸아티에 전투를 엄청나게 중요한 무슬림의 패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는 경제적으로 후퇴한, 분열된, 동포를 죽이는 퇴행적 유럽을 형성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카를 이후의 유럽은 자신이 이슬람과 정반대되는 문명이라고 자처하면서 종교 박해, 문화 배타주의, 세습 귀족 정치를 미덕으로 여겼다는 설명이다.(p268) <신의 용광로> 中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와  <신의 용광로> 둘 다 역사의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는 점에서 각자의 의미가 있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가 게르만 민족의 침입이 중세를 가져왔다는 관점 대신 이슬람의 부상이 중세를 가져왔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면, <신의 용광로>는 이러한 앙리 피렌의 입장을 받아들이되, 새로운 변화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의미를 달리 갖는다. 즉, 푸아티에 전투가 유럽의 새로운 시대를 연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과연 그 순간이 의미있는 순간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유럽이 이슬람화되었다면 더 빠른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의 변수는 워낙 많기에, 이처럼  '만약(if...)'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이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지나가는 이야기에 불과하듯.) 이보다는 무아위야조(朝)의 팽창정책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권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외부로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는 노력을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며,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말하는 '마호메트가 없었다면 샤를마뉴도 없었을 것이고, 샤를마뉴가 없었다면 마호메트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내용 속에서 국제관계에서 적대적 공생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한, 폐쇄사회에서의 종교(宗敎)와 권력(權力)의 결탁은 오늘날 분단체제 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분명 의미있는 지점이라 여겨진다...


[사진]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의 나스르 왕궁(출처 : 이슬람)


[사진] 알람브라 사자들의 안뜰(Patio de los Leones)의 중앙(출처 :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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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4-02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퇴근 길에 아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독했습니다.

역사에서 투르 푸아티에 전투를
아주 거대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
던데 무슬림 세력이 이겼다면
어땠을 지 궁금하네요.

<신의 용광로> 땡기는데 절판
책이네요...

2020-04-02 1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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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2 2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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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04: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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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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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15: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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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2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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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6 17: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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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6 17: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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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1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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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12: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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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존슨(Paul Johnson, 1928 ~ )의 <모던 타임스 2 : Modern Times: The World from the Twenties to the Nineties>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80년대를 다룬 책이다. 1권과 마찬가지로 주요 인물의 성격과 태도를 상세히 묘사하며, 이들이 세계사를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서술하는 방식은 마치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에서 조운이 유선을 구한 장판전투(長坂戰鬪)나 관우가 유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오관참육(五關斬六)을 그리는 것과 같은 호쾌함을 주기에 전체적인 현대사의 사건을 파악하는데 유용하다. 


[그림] 장판전투(출처 : 위키백과)


 그렇지만, 역사(歷史)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현대에 교훈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저자가 매카시즘(McCarthyism)을 다룬 장에 유독 시선이 머무른다. 1950년대 미국 정부의 고위직에 공산주의자가 침투해 체제전복을 꾀하고 있다는 근거없는 고발로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 전역에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을 일게 한 이 사건에서 데자 뷰(deja vu)를 느끼게 된다.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 ~ 1957)가 여러 사람의 인생에 피해를 입힐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미국의 명예 훼손에 관한 법률이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그의 근거 없는 주장을 그대로 발표했다. 사실 그들은 그럴 권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무책임한 비방을 일대 스캔들로 만든 것은언론, 특히 통신사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마녀 사냥으로 확대되었던 1970년대와 비슷하다. 둘째 일부 사회나 단체, 특히 할리우드와 워싱턴의 도덕적 비겁함 때문이다. 그들은 곳곳에 만연한 불합리와 비이성에 굴복했다.(p176) <모던 타임스2> 中


 21세기에도 빨갱이, 좌파 등의 이야기로 상대를 공격하고 온갖 거짓뉴스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1950년대 미국의 사례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든다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Ike" Eisenhower, 1890 ~ 1969)는 '감추어진 손'이라 할만한 은밀한 통치 스타일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그는 재임 기간 내내 이런 통치 스타일을 즐겨 사용했다. 그의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이 밝혀졌다. 아이젠하워는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이다.(p178) <모던 타임스2> 中


 폴 존슨은 <모던 타임스 2>정치에서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을 통해 미국을 번영의 시기로 이끈 아이젠하워가 어떻게 매카시즘을 잠재울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부터 트럼프(Donald John Trump, 1946 ~ )가 왜 그토록 북한문제에 매달렸는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배울 수 있다. 아직, 문재인과 트럼프 두 대통령이 역사의 평가를 받기에는 이르지만, 적어도 이들이 택한 가치가 무엇인지는 역사가 답해주고 있다...  


 평화는 미국 선거에서 언제나 필승의 카드였다...  공화당 후로보 대통령에 당선된 1952년의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불필요한 전쟁이자 반복된 실책으로 여겼다. 그는 교착 상태에 빠진 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이 전술은 효과를 거두었고, 9개월이 안 되어 불완전하나마 협정을 타결 지을 수 있었다. 그는 반공 히스테리를 막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 심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사실 그는 문제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매카시즘이 선풍을 일으킨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고, 한국전쟁이 끝나면 매카시즘도 곧 시들해질 것임을 알았다. 그는 평화를 위한 노력에 우선 순위를 부여했다.(p177) <모던 타임스2>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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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자리도, 도시의 운명도, 주민의 안전도 수시로 위협받고 사라지며 새로운 존재들로 대체되는 것이 가나안에서의 삶이었다. 그런 까닭에 가나안에서 우기와 건기를 지배하는 신의 지위는 더욱 높아갔고 주민의 삶은 더욱더 신에 종속되는 동시에 순간의 안전과 아름다움에 매몰되었다. 순간이 지배하고, 신의 지배력이 절대화되는 땅 가나안에 아람 사람 아브람과 그 일행이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p26) <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 中


 <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라는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책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책이다. 본문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기까지의 과정이 잘 정리되었으며, 여러 그림과 유물의 사진이 이 시대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와 다른   책의 내용으로 다소 아쉬움을 갖게 된다. 


 역사(歷史 history)란 무엇일까. 역사란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성쇠(興亡盛衰)에 대한 기록이다. 때문에, 역사의 주체는 당연히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주체, 야훼가 등장한다. 그리고, 책에 대한 아쉬운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저자들은 가나안에서 신(神)의 존재가 다른 문명보다 특별했다 느꼈을까. 그래서인지, 책에서 전체 사건은 '신과의 계약 - 파기 - 벌 - 용서'의 성서적 해석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은 이러한 해석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장치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여로보암(Jeroboam, BC 998 ? ~ BC 977 ?)에 의한 남유다 - 북이스라엘의 분열계기를 설명한 대목을 살펴보자. 솔로몬(Solomon, BC 971 ? ~ BC 931 ?)의 우상숭배로 인한 파멸적 결과로 이 사건을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은 성서적 해석을 크게 넘지 않은 것으로, 역사적 해석이라 보기 어렵다.


 '다른 신을 좇지 말라'는 야웨의 명령, 두 번에 걸친 권유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왕비들과 함께 그들의 신을 좇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의 계승자, 야웨 하나님의 축복으로 제국의 번영을 가져온 지혜의 왕이라는 자신의 본래 자기에서 떠난 것이다. 결국 솔로몬은 야웨로부터 제국의 분열을 선언받는다.(p198)... 여로보암의 반란은 새 의복을 열두 조각으로 찢고 그 가운데 열 조각을 취하도록 한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에 용기를 얻어 일으킨 것이었다.(p199) <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 中


 그렇다면, 역사적 해석이란 무엇일까. 역사를 E.H.카의 유명한 역사에 대한 정의 -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 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통해 과거의 사건을 재해석하고, 과거와 현재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라 한다면, 우리는 큰 흐름 속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큰 흐름 속에서 반복, 재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 해석이라면 사건에 이러한 의미를 찾는 과정이 아닐까.


 '역사가는 사실의 잠정적인 선택과 그 선택을 이끌어준 잠정적인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가 연구하는 동안 사실의 해석 그리고 사실의 선택 및 정돈 그 두 가지는 이러저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미묘한 그리고 아마도 얼마간 의식되지 못하는 변화들을 겪는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도 역시 포함되는데, 왜냐하면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며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a contin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는 것이다.'(p50)


 역사의 반복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할 때, 과거의 인간과 사례를 불러내어 반복한다는 것. 사람은 여태껏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태에 직면할 때, 그것을 기존 지식으로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하며, 그리고 실제로는 다른 일을 해버리는 것에는 어떤 불가피성이 있다. 둘째, 과거의 사태를 부정하고 잊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반복되는 것. 이 강박적 반복은 '억압된 것의 회귀'(프로이트)이다. 이것 또한 피할 수 없다.(p45) <역사와 반복> 中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시모프(Isaac Asimov, 1920 ~  1992)의 <아시모프의 바이블 : 오리엔트의 흙으로 빚은 구약 Asimov's Guide to The Bible: The Old Testament>의 내용은 보다 역사적 해석에 가깝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 속에 내재된성(聖)과 속(俗)의 권력다툼은 중세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으로 재현되었고, 오늘날에도 여러 형태로 변형 반복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출처 : https://www.conformingtojesus.com/charts-maps/en/israel_and_judah_map.htm)


 솔로몬 왕국의 가장 큰 위험은 내부에 있었다.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적대 의식은 결코 소멸되지 않았고 단지 휴면 상태에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한 눈을 뜬 채로 말이다. 그 한 눈은 바로 예언자 집단이었다.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의 시대에도 왕권과 사무엘이 지도하는 예언자들의 권력 사이에 알력이 있었다.(p438)... 솔로몬의 관대한 종교정책은 예언자 집단, 특히 (유다 출신보다는) 이스라엘 출신 예언자들을 소외시켰다. 이스라엘인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을 신앙의 중심지로 삼는 것을, 따라서 이스라엘의 여러 성소들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종교적 감정은 민족주의와 뗼 수 없는 관계였다. 이스라엘의 예언자 아히야는 에브라임 사람인 여로보암을 주목했다. 여러보암은 예언자 집단과 많은 이스라엘인 불평분자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다.(p439) <아시모프의 바이블 : 오리엔트의 흙으로 빚은 구약> 中


 아시모프는 남북국의 분열을 '계약 위반'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았다. 성소(聖所)의 위치를 둘러싼 왕과 예언자 집단의 대립. 이것은 정치와 경제의 이권(利權) 다툼이었고, 여로보암은 '단'과 '베델'에 성소를 두면서 자신을 지지한 예언자 집단에게 보답을  하게된다. 아마도 이들 예언자 집단은 두 곳에 성소를 두면서 이스라엘의 종교행사인 파스카(peschach, 유월절) 등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예루살렘(Jerusalem) 역시 3대 종교의 성지로 많은 순례자가 방문하고, 많은 돈이 이 지역에 뿌려짐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성소의 의미를 경제적으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북쪽 경계가 상업이 발달한 페니키아(Phœnicia)임을 생각한다면, 이를 상업을 기반으로 한 북쪽 집단과 유목을 중심으로 한 남쪽 집단의 패권다툼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는 역사 속에서 상업의 카르타고(Carthago)와 농업의 로마(Roma)의 포에니 전쟁으로 재현되었다고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소를 둘러싼 갈등은 로마 제국의 5개 대주교(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간의 갈등으로 재현된다는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 )이 말한 역사의 반복을 생각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역사는 형이상학적인 이념(理念)이나 사상(思想)이 아닌 정치(政治)와 경제(經濟)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안정과 이익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역사의 해석도 여기에 맞추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만약, 여기에 절대적 존재인 신(神)이 개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더 이상 역사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신의 선택을 받은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간의 선(善)-악(惡)의 대립으로 모든 세계관이 정리되겠지만,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끌어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러한 이유로 <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는 역사를 제목에 붙인 성경 입문서로, <아시모프의 바이블 : 오리엔트의 흙으로 빚은 구약>은 성경을 제목에 붙인 고대 근동 역사 입문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PS. 이 짧은 이야기를 하려고 너무 많이 떠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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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네의 급격한 세력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스파르타의 견제로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 ~ BC 404).  이 전쟁이 시작된 2년차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테네에 역병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아마 전쟁의 계절이 시작될 때 아테네에서 발생한 역병의 위력에 대한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작전을 중단했을 것이다. 투키티데스는 이 병을 앓았고 그 증상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병은 폐렴 흑사병, 홍역, 장티푸스, 그리고 여러 다른 병들과 유사한 증상을 보였지만, 정확하게 들어맞는 병명은 알 수 없다. 기원전 427년에 진정될 때까지, 이 병으로 중장 보병 4,400명, 기병 300명, 하층민 다수가 사망했다. 아테네 주민의 약 3분의 1이 휩쓸려나갔다.(p106)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中


 역병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전체 주민의 3분의 1이 쓸려나간 이 병으로 인해 아테네는 전쟁 초기 큰 인력손실과 함께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 ~ BC 429)를 잃어 국정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이러한 큰 피해로 인해 아테네인들은 승리에 대한 확신을 잃어갔다.


 스파르타의 제1차 침공 이후에는 잠잠하던 평화파가 적과의 타협을 다시 촉구하고 나섰다. 더욱 공격적인 전쟁을 주장하던 자들은 아티카가 입은 큰 손실과 펠로폰네소스에 대한 공격이 가져올 빈약한 성과를 지적할 수 있었다. 현재의 지출 수준으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포티다이아의 포위는 여전히 예산에서 주된 요소였다. 돈을 절약하고 아테네인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상당히 큰 승리가 필요했다.(p107)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中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긴 사건은 시칠리아 원정(Battaglia navale in Sicilia, BC 415 ~ BC413)였지만, 이러한 원정의 결정 배경에는 아테네인들의 초조한 심리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역병 또한 아테네 패배의 주요 원인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자신도 병을 앓았던 투키티데스는 당시 역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평소 건강한 사람들이 별 이유없이 갑자기 감염되었는데, 최초 증상은 머리에 고열이 나고 눈이 빨갛게 충혈되는 것이었다. 입안에서는 목구멍과 혀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고, 내쉬는 숨이 부자연스럽고 악취가 났다. 다음에는 재채기가 나며 목이 쉬었다. 얼마 뒤 고통이 가슴으로 내려오며 심한 기기침이 났다. 대부분의 경우 헛구역질과 함께 심한 경련이 일어나는데, 이런 경련은 어떤 사람들은 구역질을 하고 나면 곧 완화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한참 뒤에야 완화되었다.(p178)... 이 역병의 증상은 실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다.(p178)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49) 


 당시 아테네의 역병은 원인을 잘 모르는 병이었기에 환자와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함께 쓰러져가는 치명적인 질병이었지만, 투키티데스는 이 병의 무서운 점을 그 증상에서 찾지 않았다. 오히려, 투키티데스는 병으로 인한 고독과 절망과 이로부터 오는 사회적 혼란을 더 치명적인 결과로 해석한다.

 

 이 역병의 가장 무서운 점은 이 병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알면 절망감에 사로잡히는 것과, 사람들이 서로 간호하다 교차 감염되어 양 떼처럼 죽어가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이 사람들이 죽어간 주된 원인이었다. 사람들이 환자 방문하기를 두려워하면서 환자는 방치된 채 혼자 죽어갔기 때문이다. 돌보는 이가 없어 식구가 모두 죽어간 집도 실제로 비일비재했다.(p179)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47 ~ 52)


 절망감과 고독감 속에서 환자들은 죽어갔고, 환자가 아닌 이들은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게 되면서 아테네는 향락에 빠지게 되었다. 페리클레스의 황금기라 불리던 시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아테네의 패권은 이미 몰락하고 있었다.


 아테나이는 이 역병 탓에 무법천지가 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목숨도 재물도 덧없는 것으로 보고 가진 돈을 향락에 재빨리 써버리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고상해 보이는 목표를 위해 사서 고생을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들에 대한 두려움도 인간의 법도 구속력이 없었다... 이렇듯 아테나이인들은 이중고에 시달렸으니,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갔고 도시 바깥의 영토는 약탈당하고 있었다.(p181)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53)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네는 원인을 모르는 병으로 전체 인구의 상당수를 잃었지만, 역사가 투키티데스는 역병의 치명적인 결과를 개인의 건강이 아닌 공동체의 붕괴에서 찾고 있다. 아테네는 이러한 역병으로 인해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퇴했다. 그리고, 2020년 2월 코로나19로 인해 전국이 마비된 현실안에서 우리는 아테네의 혼란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간 질병과 2020년 2월 28일 질병관리본부 기준 사망자 13명의 질병을 동등하게 비교할 수 있을까. 코로나 19의 실제 피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보이는 반응은 지나친 것은 아닐까. 질병의 피해보다는 마스크 착용과 사재기 등으로 인한 불안감이 질병보다 더 크게 우리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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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0-02-29 1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글에 크게 동감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전염병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냉정하게 각자 해야할 일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네요. 건강 유의하시고, 즐거운 독서 하시기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20-02-29 14:07   좋아요 2 | URL
blueyonder님 말씀처럼 이제는 전염병때문에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평안함 속에서 자가치유 능력을 믿고 생활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물론 평소 지병있는 환자들은 건강에 유의해야겠지만요.... blueyonder님께서도 건강한 하루, 행복한 하루 되세요!^^:)

북다이제스터 2020-03-01 18:37   좋아요 1 | URL
예전에 이런 바이러스 없지 않았을텐데, 앎이 이런 소란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앎이 항상 좋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20-02-29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캬, 좋은 지적이네요. 지금 읽으면 좋은 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2-29 14:0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곰곰발님^^:) 이 페이퍼를 나중에 읽었을 때는 별로 공감되지 않는 세상이 되길 기원해 봅니다.

AgalmA 2020-03-08 1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는 자비 검사가 400만 원이 넘어가서 염려가 돼도 서민들은 그런 의료 서비스를 선택하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한국은 그나마 의료보험이 잘 되어 있어서 16~20만원 가량이지만 몇몇 증상자는 그게 부담돼(확진자에겐 환불되지만 비확진자면 다 자비처리되니까) 검사 안 받다보니 병세가 더 깊어졌더군요.
부유한 사람들이 타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공동관심단지(CID)를 조성해 살고 있듯이 공동체 붕괴는 곳곳에 퍼져 있는데 이 질병 사태는 인종, 계층 갈등도 더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혐오 정서가 현실 공간까지 바꾸는 것도 같고 세상 곳곳이 차단의 장막으로 가득하네요.

겨울호랑이 2020-03-01 14:20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처럼 이번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많은 사회 문제가 더 잘 드러났음으 느낍니다. 이러한 문제를 잘 의식하고 해결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전화위복이 되지 않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그 자체로 총체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제1부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 곧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역사이다. 그것은 서서히 흐르고 서서히 변화하지만, 흔히 완강하게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역사, 늘 다시 시작하는 순환의 역사이다.(p20)... 이런 움직이지 않는 역사의 층위에 느린 리듬의 역사가 따로 형성된다. 이는 그 용어의 완전한 의미를 그대로 간직한다는 조건에서 사회사(histoire sociale)라고 부를 수 있다. 즉 집단과 집단화의 역사를 가리킨다. 이 큰 파도가 지중해의 삶 체를 어떻게 들어올리는가, 이것이 내가 이 책의 제2부에서 제기하려는 질문이다... 제3부는 전통적인 역사를 다룬다. 말하자면 인간의 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이며, 폴 라콩브와 프랑수아 시미앙이 말하는 사건사(ㅣ'histoire evenmentielle)이다. 비유하자면 조류가 자신의 강력한 움직임 위에 일으키는 파도, 곧 표면의 동요를 가리킨다. 이는 짧고 빠르고 신경질적인 요동의 역사이다.(p21)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 초판 서문 - > 中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 1985)는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La Mediterranee et le monde mediterraneen a l'epoque de Philippe II>에서 한정된 시공간에서 서로 다른 역사층위를 보여주며 이 시대를 역사적 시간 시간의 외부에서 조명한다.


 이렇게 우리는 여러 층위로 이루어진 역사를 해부해보았다. 달리 말하면 역사의 시간을 지리적 시간, 사회적 시간, 개인의 시간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다시 달리 표현하면 인간을 여러 성격으로 구분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p22)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 초판 서문 - > 中


  역사의 시간을 분할하여 사건을 바라보는 브로델의 역사관이 16세기 말 에스파냐 제국의 흥망을 어떻게 그려냈는지는 이후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다른 이야기지만,  브로델의 역사 층위 개념을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Jonathan James Nolan, 1970 ~ ) 감독의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면 너무 나간 이야기일까?  개인적으로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Dunkirk>에서 유사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2017년 여름, '다이나모 작전 Operation Dynamo'을 소재로 한 <덩케르크>를 내놓는다... 영화는 수십 만 명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고립되어 있던 덩케르크 해변을 배경으로 육지 The Mole, 바다 The Sea, 하늘 The air 세 군데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상황을 보여준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 공포의 여러 얼굴을 묘사하기 위해 세 개의 공간을 사용했다. 그런데 항구에서는 일주일, 바다에서는 하루, 하늘에서는 한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보여준다는 차이가 있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라도 공간이 달라지면 그 사건들 사이에 시간차가 발생한다는 의미다... 각 공간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 위기에 집중하다 보면 세 개의 시간차는 점차 줄어들어 결말부에 가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이 된다. 관객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조차 영화는 바다와 공중, 해변의 시간이 만날 때까지 각기 다른 시공간을 정밀하게 직조해 나간다. 놀란의 지적인 연출은 이러한 부분에서 발휘된다.(p145) <미국영화감독 1> 中


[그림] 영화 <덩케르크 Dunkirk> 포스터 ( 출처 : https://www.ebay.com/itm/Dunkirk-original-DS-movie-poster-27x40-D-S-2017-Advance-Christopher-Nolan-/312699658008?hash=item48ce5a1f18) 


 덩케르크 해변가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바다, 공중, 해변의 서로 다른 시간 교차. 그리고, 이러한 다른 시간의 교차를 통해 '전쟁' '죽음' 을 바라보며 의미를 찾는다는 점에서 유사함을 느낀다. 물론, 브로델의 역사 층위는 서로 다른 시간의 기반 위에서 상호 영향을 미치는 반면, 놀란의 작품 안에서 이들은 각각 고립된 시간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이들은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종합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브로델의 관점이나 영화 <덩케르크>에서 결론 부분에 이르러 서로 다른 시간들이 점점에서 만나면서 주제를 부각시키는 구성은 전체적으로 주제를 조망한다는 점에서 통한다 생각된다. 근거 없는 몇몇 생각으로 <지중해>의 인트로를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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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4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4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6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6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9-12-25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학기 영화보는 수업에서 덩케르크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나중에 올리겠습니다.ㅎ

겨울호랑이 2019-12-26 07:46   좋아요 0 | URL
네 NamGiKim 님의 리뷰를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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