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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의 주장 동문선 문예신서 288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순 옮김 / 동문선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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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티고네는 어떤 언어를 통해서 자기 행동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가, 또는 어쩌면 그 주권의 부인을 거부하는 것인가?...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언설(utterance)이 갖는 발화 수반 수행문(illocutionary)의 실패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의 저항은 매장 행위와 매장한 인물간의 분리를 거부하면서 다시 화자가 그 말의 주인임을 주장하는 언어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나는 내 행동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I will not deny my deed)"라는 말은 "나는 부인하지 않습니다(I do not deny)", 즉 나는 강요에 못이겨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가 되고, 이는 다시 말해서 나는 억지로 부인하기를 거부할 것이라는 말이고, 내가 부인하지 않게 될 것은 나의 행위(my deed)라는 말이다.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25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바라본 주인공 안티고네는 여러 면에서 두 개의 모순이 충돌하는 인물이다. 부계로는 아버지이자, 모계로는 오빠인 오이디푸스와의 관계 속에서는 혈연의 모순 문제가 발견되며, 크레온과의 설전을 통해 자신의  죽은 오빠인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는 '행위'와 이를 변호하는 자신의 '발화'에서도 모순을 드러낸다. 버틀러에 따르면 친족을 매장하는 행위는 여성적이지만, 크레온과 말다툼을 통해 행위를 변호하는 발화는 남성적인 것으로 또다른 모순이다. 이처럼 버틀러가 바라본 안티고네는 헤겔과 라캉의 해석과는 달리 전형성을 갖지 못한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안티고네의 매장 행위와 그녀의 언어적 저항은 둘 다 코러스, 크레온, 그리고 메신저로 하여금 그녀를 '남자답다'고 부르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안티고네는 어떤 남성적 통치권의 형태, 누군가와 공유할 수 없는 남성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남성적 통치권은 그 상대편이 여성적인 동시에 열등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27


 안티고네는 친족 신의 이름을 걸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친족 신의 명령을 위반함으로써 행동한다. 그 위반은 친족에게 금기의 차원이나 규범의 차원을 주지만 동시에 그것의 취약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실 이 두 행위는 서로 맞서는 것이기보다는 서로를 거울처럼 되비치고 있다.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29 


  개인적으로 버틀러의 해석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크레온의 역할이다. 헤겔의 <안티고네> 구조에서 크레온은 '국가법'의 상징이며, 라캉의 <안티고네> 구조에서는 상징계에서 욕망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존재다. 반면, 버틀러에게 크레온은 안티고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 아니라, 안티고네의 거울이 되고, 안티고네와의 논쟁을 통해 교차점이 되면서 모순으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끌어내는 '조력자'다.


 안티고네는 자신이 반대하는 것의 위상이나 언어를 전유해서 크레온의 통치권을 가장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오빠에게 운명지어진 영광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안티고네의 죽음은 극 전체에서 언제나 이중적이다. 즉 그녀는 살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아이들을 낳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오이디푸스가 자식들에게 했던 저주, 평생 동안 '사형을 선고받는' 저주를 받아 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살지 못했던 삶을 의미하고, 그리하여 크레온이 마련한 삶 속의 무덤으로 다가갈 때 그녀는 지금껏 내내 자신의 것이었던 어떤 운명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존속될 수 없는 욕망, 안티코네가 더불어 살아가는, 다름 아닌 근친상간의 욕망 그 자체가 아닌가?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50


   <안티고네>라는 드라마에서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는, 금기 그 자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한다. 즉 금기를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무엇인가를 빼앗는 권력 작용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금지하고 있는 그 죄 자체를 자리바꿈(displacement)함으로써 자신을 증식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자는 말이다. 근친상간의 금기와 그에 대한 무서운 비유는 근친상간이야말로 친족에 가장 중추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감추는 친족계보를 그려낸다. 그러면서 규범의 한가운데에 '일탈(aberration)'을 세워두는 것이다.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113


 결국, 버틀러는 <안티고네의 주장>을 통해 여러 모순이 뒤섞인 보편적이지 않는 '안티고네'라는 인물이 갖는 모순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기대한다. 기존의 체계가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를 대체하는 법칙과 체계는 안티고네의 죽음으로부터 도래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안티고네의 죽음은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알리는 새로운 서막으로 버틀러는 해석한다. 


 안티고네는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어떤 행위가 금지되었어도, 그녀는 금지된 행위를 하며, 그 행위는 어떤 기존 규범에 단순 동화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녀는 행동할 권한이 없는 사람으로서 행동하면서, 인간됨의 전제 조건이 되는 친족이라는 어휘를 뒤덮는다. 그러면서 은밀히 우리에게 인간이 된다는 것의 전제 조건이 정말 무엇이어야 하는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안티고네는 그 어떤 최종적인 동일시도 불가능한 주장의 언어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배제되어 있는 호칭의 언어 안에서 말한다... 또한 그녀가 자신에게 속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한, 안티고네는 정치적 규범들의 어휘 안에 있는 어떤 교차점(chiasm)으로 작동하게 된다. 만일 친족이 인간이 된다는 것의 전제 조건이라면, 안티고네는 정치적 비유어의 오용을 통해서 이룩된 새로운 영역의 인간에 대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영역의 인간은 인간보다 못한 것이 인간으로서 말할 때, 젠더가 뒤바뀌고, 친족이 자신이 토대한 법 위에서 비틀거릴 때 생겨난다.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138


 이처럼 버틀러의 해석은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에 중점을 둔 헤겔의 해석이나 안티고네의 한계, 극한에 중점을 둔 라캉의 해석과는 달리 안티고네의 내적 모순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이로부터 기존 질서의 전복 가능성을 끌어내며 <젠더 트러블>에서 제기한 문제와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느껴진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버틀러의 해석에 대해 몇 가지 의문점을 갖는다. 먼저, 자신의 전복적 질서를 끌어내기 위해 작품 외적인 요소를 끌어들인 부분은 다소 무리한 전개로 느껴진다. 소포클레스의 3부작 순서에서 <안티고네>가 먼저 쓰여졌다는 작품 외적 사실이 '과거의 저주'가 현재를 규정한다는 논리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버틀러의 젠더의 수행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된다. 버틀러는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안티고네가 '발화'를 통해 남성성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여성적 행위를 변호한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논리를 펼치지만, 이러한 논리는 이미 규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전제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젠더는 수행적이며 행위'라는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의 주장과 이 부분의 해석은 충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는 천천히 정리하도록 하고, 기왕 정리한 김에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다뤄진 <안티고네>도 조만간 정리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소포클레스는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를 쓰기 수 년 전에 <안티고네>를 썼지만, <안티고네>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일어나는 행동 다음에 일어난다. 이 뒤늦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저주는 그 저주 자체에 앞서 저주가 명하는 행위 때문에 어떤 시간성을 성립하게 된다. 저주의 말은 이미 언제나 일어났던 것을 미래로 가져간다._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p103

안티고네의 죄는 혼란스럽게 얽혀 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계승하고 전달하는 친족의 계보가 이미 명백한 근친상간적 행위 때문에 혼란스러워진 부계적 위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근친상간 행위는 안티고네의 존재 조건이고, 그녀의 오빠를 아버지로 만들며, 언어적으로는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친족 위치를 다 차지하는 서사, 친족과 젠더의 일관성을 희생시키면서 그 모든 위치를 다 차지하는 어떤 서사를 시작하게 한다-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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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05-05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티고네라면 라캉의 논의에서 중요한 재료로 다뤄졌던 기억이 나는데, 버틀러의 안티고네도 궁금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5-05 22:26   좋아요 1 | URL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버틀러는 라캉과 같이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상징계의 극한에 선 안티고네는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보입니다. 이미 추풍오장원님께서는 <안티고네>에 대한 라캉의 입장을 알고 계시니 같은 도구를 사용해 다른 길로 가는 <안티고네의 주장>을 더 재밌게 읽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친족법‘과 ‘국가법‘의 대항으로 본 헤겔, ‘남성의 법‘과 ‘여성의 법‘ 다툼으로 본 이리가레이, ‘죽음을 향한 숭고함, 아름다움‘으로 본 라캉의 해석과는 또 다른 버틀러의 해석.

버틀러는 ‘안티고네‘라는 인간 자체에의 균열을 통해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마치 「판관기」속의 삼손이 데릴라에 의해 블레셋인들에게 잡힌 후 죽기 전 마지막 힘을 다해 건물을 무너뜨리듯, 버틀러의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우리는 기존 양성적 질서를 넘어선 ‘버틀러의 주장‘을 발견한다. 이에 대해서는 [리뷰]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근친상간의 금기가 자기 내부에 스스로의 균열을 안고 있는 만큼, 그것은 근친상간을 단순히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근친상간을 사회적 해체에 꼭 필요한 어떤 유령으로서 유지하고 또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유령 없이는 사회적 관계가 나타날 수도 없는 그런 것으로 말이다. 따라서 《안티고네》라는 드라마에서 근친상간에 대한 금기는, 금기 그 자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한다. 즉 금기를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무엇인가를 빼앗는 권력 작용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금지하고 있는 그 죄 자체를 자리바꿈(displacement) 함으로써 자신을 증식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자는 말이다. 근친상간의 금기와 그에 대한 무서운 비유는 근친상간이야말로 친족에 가장 중추적 가능성이라는 것을 감추는 친족계보를 그려낸다. 그러면서 규범의 한가운데에 ‘일탈(aberration)‘을세워두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근친상간의 금기가 사회적으로 존속 가능한 친족 일탈의 토대가 될 수도 있는가 하는 점이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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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5-02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버틀러를 삼손에 비유하신 저 표현 너무 멋져요!! 다른 내용은 알듯 말듯 어렵네요.😳

겨울호랑이 2021-05-02 14:1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본문에서는 자세하게 논의가 전개되는데, 제가 핵심만 적어서 그런 것 같네요. 리뷰에서는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바람돌이 2021-05-02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티고네는 그리스신화에서 드물게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판단기준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던데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있는걸까요? 가끔 저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에서 너무 너무 어려운 이론들을 뽑아내는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네요. ^^;;

겨울호랑이 2021-05-02 17:01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안티고네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단순히 ‘휘브리스‘로 해석하기엔 여운이 많이 남는다 보여집니다. 그래서, 이로부터 근대 이후의 과제들의 근원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이어져 온 것같네요^^:)
 

이 책의 요점은 (가끔 생기는 드래그에 대한 비하에 저항하는 것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드래그를 진정한 모범적인 젠더의 표현물로 치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젠더의 당연시된 지식이 실제에 대한 선제적이고 폭력적인 경계선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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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규범의 상실은 본질적인 정체성을 불안하게 만들고, 중추적인 ‘남자‘ 와 ‘여자‘ 주인공들에게서 강제적 이성애라는 당연시된 서사를 제거함으로써,  확산된 젠더 배치의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젠더의  패러디적 반복은 단단한 심층과 내적 본질이라는  젠더 정체성의 환영 또한 폭로한다. 미묘하고도 정치적인 방식으로 강제되는 수행성의 결과로서, 젠더는  하나의 ‘행위‘ 이다. 말하자면 균열, 자기 - 패러디,  자기 비판에 열려 있는 행위이다. 젠더는 자신을 과시하면서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것‘ 의  과장된  전시를  통해 그 근본적인 환영적 지위를 드러낸다.-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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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종속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4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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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자유를 존중하고 공평무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공공의 이익 general good을 위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제약도 용납될 수 없다. 정의 또는 정책적 필요라는 적극적 고려 때문에 상이하게 취급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법은 차별 대우를 해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부터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에는 이런 입증 책임의 면제라는 혜택이 적용되지 않는다. -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 p15


  공리주의자(Utilitarianism)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 ~ 1873)은 평소 입법과 도덕의 유일한 기준을 공리(功利)로 보고, 이를 근거로 개인 이익(私益)과 사회 이익(公益)의 조화를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입증해야 하지만, 밀은 <여성의 종속 The Subjection of Women> 서두에서는 이 문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문제와 관련한 잘못된 인식이 사회 곳곳에 자리잡고, 이어져 왔기 때문에 논증이 어려운 문제가 '여성의 종속 문제'라는 것이 밀의 설명이다.


 힘에 바탕을 둔 지배를 정당화하는 법이 지배자와 노예, 주권국가와 종속국가, 또는 다른 독립국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비록 노예가 국가의 일부분은 아니었지만, 그들도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는 사실이 처음 인식된 곳은 자유국가였다.(p25)...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통틀어 힘의 법칙이 인간 행동을 규율하는 공인된 규칙이었고, 다른 것들은 그저 특별하고 예외적인 상황의 산물에 불과했다는 것, 그리고 사회의 일반적 문제들이 어떤 형태로든 도덕법칙의 규제를 받는 것이 아주 최근에 와서야 가능해졌다는 사실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 p27


  밀은 대표적인 잘못된 인식으로 '성(性)의 본성 차이'와 '가장 지배 체제'를 든다. '본성 本性'이라는 이름으로 차이는 제도화 되었고, 가정에서는 '가장 지배 체제', 사회에서는 '절대왕정'의 기초가 되었다. 이처럼, 밀은 <여성의 종속>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절대적 = 자연발생적'이라는 공식에 의문을 던진다.


 남성과 여성의 타고난 본성 nature 때문에 그들이 각각 현재와 같은 기능과 위치를 담당하게 되었고, 또 그것이 본성에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p47)... 인간 중 어느 정도가 그런 상황에 있는지, 또는 그런 상황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에 상관없이, 인간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성향을 타고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만 갖춘다면 그들이 왜 그렇게 되는지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 p48


 절대왕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자연의 섭리에 맞는 정부 형태라는 논리를 펴왔다. 이들은 가장(家長) 지배 체제 patriarchy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부모가 자식을 지배하는 것이 옳듯이, 가장이 다스리는 체제가 인류 사회 최조의, 그리고 자연 발생적인 통치 형태라는 것이다. -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 p32 


 밀은 특히 여성 문제를 특별한 문제로 생각한다, 이는 여성 문제가 '지배 계급의 적극적 지배 욕구'가 개입된 문제이며, 지배 계급(남성)은 '교육'을 통해 이를 달성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별한 '억압 - 종속'의 관계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여성은 한 가지 점에서 종속 상태에 있는 다른 계급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들의 지배자가 단순히 복종하고 떠받드는 것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남성은 여성이 복종하는 것 그 자체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여성의 마음까지도 지배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교육의 힘을 통째로 빌려 그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 p37 


  여성 자신들이 해야 할 말을 다 들려주기 전까지는, 남성이 여성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지식 - 그들의 장차 모습이 아니라, 그저 지금까지 보여준, 그리고 현재 이 시점에서 보여주는 모습만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 이라는 것은 지극히 불완전하고 피상적이다.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런 시점은 아주 더디게 올 것이다. -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 p54

 

  밀은 문제 해결을 위해 여성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것을, 남성들은 편견없이 여성들의 목소리를 경청(敬聽)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여성들이 자유 경쟁에 따라 자유롭게 자신의 일을 한다면, '시장의 원리'에 따라 조정된다는 것이 공리주의자 밀의 주장이다.


 실제로는 여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확실하게 안다고 착각하는 남성들이 많은데, 사실 어떤 남성이건 또는 모든 남성을 통틀어서, 여성의 이런저런 특징에 대해 전문가라고 불릴 정도의 지식을 가지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p56)...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자기 본성에 따라 행동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여성이 그 본성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연이 두려워 자연이 하는 일을 가로막으려 하는데, 그것은 정말 쓸데없는 짓이다... 무엇이든지 여성이 상대적으로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일이라면 자유 경쟁에 맡기는 것이 여성에게 가장 도움이 된다. -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 p57


 <여성의 종속>에서 밀은 에서 19세기 당시 사회가 '성의 차이'와 이로 인한 사회적 역할 분담 문제를 당연시하는 현실에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지배 계급인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가 제도적으로 뒷받침되고, '교육'에 의해 문제제기도 못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한다. 그 방향은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밀의 주장은 요약된다.


 이러한 밀의 주장에는 몇 가지 생각할 지점이 있다. 우선, 밀은 <여성의 종속>에서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가 처음부터 야만의 풍습이었으며, 역사 이래 다른 방향에 대한 어떤 고려도 없었음을 비판한다. 그렇지만, 과연 인류는 그러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을까?


 남성과 여성을 지배하는 제도의 경우는, 어느 모로 보나 정반대의 과정으로 만들어졌다. 우선 첫째, 약한 쪽을 강한 쪽에 완전히 복속시키는 현재의 이 제도가 더 좋은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단지 이론에 입각해서 그런 주장을 펴고 있을 뿐, 다른 양상은 전혀 시험해보지 않았다. -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종속>, p19


 여기에서, 과거 석기 시대의 수렵/채집 사회(hunter-gatherer society)에서 농경 사회(Agriculture society)의 이행했던 신석기 시대를 살펴보자. 당시 수렵/채집 사회에서 이루어진 성별 분업은 아마도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배분되었을 것이다. 사냥에 필요한 신체적 능력이 뛰어난 남성이 사냥을, 채집에 비교우위가 있는 여성이 채집을 맞는 것은 '시장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역할 배분이 아니었을까. 상대적으로 단순화된 사회에서 업(業)을 이어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석기 시대에 발생한 사회적 분업을 강압적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마셜 살린스 (Marshall Sahlins)의 <석기 시대 경제학 Stone Age Economics>에 의하면, 당시 채집을 담당하던 여성의 생산성이 수렵의 남성보다 안정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계급 문제를 사회적 관계로 바라본다면 석기 시대의 '여성'의 지위가 19세기의 여성의 지위보다 낮았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런 면에서, 별다른 고려없이 여성을 복속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왔고 강요되었다는 밀의 논지는 근거가 약하다. 


 또한,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변화가 과연 남성에 의한 일방적인 억압의 결과로만 보기도 어렵다. 보다 노동집약적인 농경 사회에서 가구((家口)는 소경제(petite economy)의 최소단위로, 성별 노동 분업이 보다 지배적인 경제전문화 형태로 나가기 위해서는 '보다 안정적인 경제 생활'을 원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합의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과정에서 남성 중심의 체제로 이행된 것이 역사의 발전 과정이라면, 모든 제도를 '지배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밀의 주장 또한 납득하기 어렵다. 단지, 밀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역사의 정점(apex)'으로 보고,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추정했을 뿐이다. 밀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당시에는 효율적인 제도와 사회적 선택의 결과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주장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또한, '교육'을 여성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정한 관점과 여성의 문제를 다른 계급 문제와 다르다고 보는 의견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과거 일제는 우리에게 식민사관(植民史觀)을 통해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기도 하고, 우리나라 군사정부 시절에는 반공(反共) 교육을 통해 국민들을 의식화를 꾀했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려했다는 것도 밀이 말한 '적극적 지배의 수단'과 같은 범주에 속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교육'의 부정적인 측면은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 수단'이라 할 수 있는데, 밀은 <여성의 종속>에서 교육을 '남성의 여성 지배를 위한 적극적 수단'이라고 한정적으로 사용한다. 그렇지만, 이를 근거로 여성 문제를 특별한 문제로 보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배계급이 '적극적 지배'를 원하는 것은 '남성 - 여성'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자본가 - 노동자' 계급 문제에서 본다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열정'을 끌어내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싶어하지 않는가. 때문에, '적극적 지배' 측면에서 여성의 문제를 특별하게 바라보는 밀의 관점은 설득력이 약하다.


 이와 같이 보여지는 밀의 <여성의 종속> 논리상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밀의 지적은 큰 틀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불평등과 차별을 호소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커지고 있는 현실은 평등한 사회로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의 반증이라 여겨진다. 또한, 여성의 경력 단절 등 사회 진출 문제는 중요한 사회 문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점에서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할 때라 여겨진다. <여성의 종속>이 출판된 지 150여년이 흐른 지금도 밀의  주장이 유효한 현실 속에서, 보다 평등한 사회를 위한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PS. <석기 시대 경제학>은 별도의 리뷰로 정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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