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0 - 군대에 부는 혁명의 바람, 낭시 군사반란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4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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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치적 조건과 법은 새로운 갈등을 낳았으니, 헌법을 빨리 제정하면 혁명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보다 혁명을 더욱 철저히 해야 이제까지 이룬 성과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더욱 자기 확신에 빠질 수 있었다. 여전히 파리와 지방에서는 민중이 봉기하여 크고 작은 소요사태를 일으켰고, 국경지대에서는 외국 군대가 침략할까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더욱이 파브라 후작의 음모에서 보았듯이 왕당파는 국내외에서 계속 일을 꾸며 혁명의 성과를 지우려 하고 있었으니, 1790년을 생각할 때 전국연맹제의 화합보다는 새로운 체제가 탄생하는 가운데 옛날부터 물려받은 재정적자와 새로운 문화조건 때문에 생기는 갈등을 더 강조해야 마땅할 것이다. _ 주명철, <1790> , p10/366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4권 <1790 - 군대에 부는 혁명의 바람, 낭시 군사반란 Liberte>에서는 혁명(革命)이라는 급격한 변화가 가져온 혼란의 모습이 낭시 군사 반란을 통해 선명하게 그려진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의문을 던진다.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 기관'인 군대에서 시민의 가치관은 여전히 유효한가. 왕의 백성으로서 한 명의 군인이었을 때는 제기되지 않았던 물음은 이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구성원이 되면서 문제가 된다. 여기에 혁명을 지지하지만 역량이 부족한 병사들의 다수는 시민인 반면, 역량이 넘치지만 반혁명적인 성향인 장교단 등 지배계층의 이해가 충돌한 결과를 낭시군사반란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유용한 말, "민주 군대는 있어도 군대 안의 민주주의는 없다"라는 말을 1790년 프랑스의 왕의 군대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병사들은 민간인의 정치클럽에 드나들었고, 거기서 배운 정치생활을 병영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그들은 일종의 의사결정기구인 위원회를 조직해서 자신들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결정한 뒤 장교들에게 그 결정대로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하여 일사불란한 명령계통을 중시하는 군대의 기강이 무너졌다. _ 주명철, <1790> , p13/366

군인들의 불복종행위는 가장 큰 골칫거리입니다. 그런데 모든 장교직은 귀족과 특권층이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혁명에 충성한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병사들은 어떻습니까? 병사들은 애국자입니다만 식견이 많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장교들은 식견이 많지만 애국자가 아닙니다. 이러니까 불행한 일이 발생합니다. _ 주명철, <1790> , p71/366

이러한 혼란의 배경에는 국회와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다툼이 자리한다. 루이 16세를 지지하는 우파와 보다 적극적인 공화정을 지지하는 좌파간의 대립은 여론전의 형태로 나타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하려는 움직임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하고 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시민의 권리가, 공동체에서 유일하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기를 들고 있는 집단인 군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1790년에 국회가 모든 정치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의원들이 제정한 헌법, 법률, 명령이나 시행령을 왕에게 승인하고 시행하도록 요구하는 과정에서, 겉으로는 간청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강요하다시피 의지를 관철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왕당파는 왕의 지위가 낮아지고 점점 권력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틈만 나면 국회와 그 지지세력에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했다. 아직 혁명/반혁명의 구도가 어느 한편의 완전한 승리로 깨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애국자 신문 못지않게 왕당파 신문도 반혁명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 한몫했다. _ 주명철, <1790> , p12/366

여론 전쟁이 낭시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었다. 대부분의 주민은 현실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 저명한 시민은 자신들이 겪을 손실을 전혀 계산하지 않았고 오직 국가의 행복만 생각하면서 국회가 제정한 법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법은 사실상 오랫동안 억눌렸던 비참한 계급에게 유리했다. 이들은 그 법에 찬동했고, 그 법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대립했다. 낭시의 주둔군도 분열과 무관할 수 없었고, 전국을 휩쓸던 혼란의 분위기에 말려들었다. _ 주명철, <1790> , p319/366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4번째 <1790>은 혁명의 과정에서 빚어진 혼란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질문을 받게 된다. 과연 변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가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의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따라 가치의 적용이 제한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제약이 누군가에게는 부당하게 느껴질 수 있을 때, 우리 모두는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혁명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혼란상 속에서 서서히 반혁명의 움직임은 내부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한마디로 낭시에서는 반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_ 주명철, <1790> , p318/366

새로운 헌법을 받아들인 낭시 시민들은 병사들이야말로 자신들이 공격당할 때 기꺼이 지켜줄 친구로 생각했다. 병사들은 지금 체제에서 자신을 시민과 같은 존재로 보기 시작하면서 이제 자유의 열매들을 따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규율을 어기는 잘못을 저지르면서 아주 분명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아직 그 벌을 받지 않았다. 애국심에 불타는 병사들이 그 애국심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지만 인정해야 한다. _ 주명철, <1790> , p321/366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반혁명은 혁명보다 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기존질서 속에서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은 조그만 변화에도 반발하며 더욱이 혁명이 시작되기 전부터 반혁명세력,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수구세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태초에 반혁명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것을 혁명이라 했다. 그때부터 혁명이 아닌 것, 혁명에 저항하는 기존의 것을 반혁명이라 불렀다. 마치 새 체제가 생기면서 이미 존재하던 체제를 구체제라 부르듯이." _ 주명철, <1790> , p36/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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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8-18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제 1권 들쳐볼까 하는데 정말 머나먼 길인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님 리뷰 보니 책 말고 10권 다 리뷰 기다릴까봐요 ㅎㅎ 너무 재밌는데요 ㅎㅎ 이거 읽기 전에 <짧게 쓴 프랑스 혁명사> 가와노 겐지 지음 이 책을 먼저 읽는데 영 재미가 없어요ㅠㅠ

겨울호랑이 2022-08-18 22:00   좋아요 1 | URL
저자가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쓰던 시기가 마침 촛불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이기도 하여 서문과 여러 곳에서 저자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독자들에게 생생한 혁명의 모습을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 더해져서 우리에게 더욱 와닿는 작품이 되었다 여겨집니다. 저도 매우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만, 꼬마요정님께서 원하시는 시간 내에 리뷰를 다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네요...ㅜㅜ 이번에는 딴길로 새지 않도록 한 눈 안팔겠습니다... 꼬마요정님 감사합니다! 하루 마무리 잘 지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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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강만길 저작집 1
강만길 지음 / 창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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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경제계의 뚜렷한 변화 발전은 역시 상업 분야에서 두드러지며, 이와 같은 17세기 상업계의 현저한 발전이 곧 장차 도고상업을 일어나게 할 바탕이 된 것이라 이해된다. 17세기 후반기 상업계의 발전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첫째 대외국무역의 발달, 둘째 금속화폐의 전국적 유통, 셋째 국내 상업계에 있어서의 상업인구의 현저한 증가 등이다. 17세기의 대외무역에서 크게 진전을 보인 것은 역시 대청(對淸)무역이었고, 그것이 종래의 개시무역(開市貿易) 중심에서 후시무역(後市貿易) 중심으로 성격이 바뀐 점에 특징이 있다 할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07


 강만길(姜萬吉, 1933 ~ )은 <조선 후가 상업자본의 발달>에서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상업부문에서의 급격한 변화에 주목한다. 이전시대 벽란도(碧瀾渡)를 중심으로 활발할 해외활동을 펼치며 고려시대의 중심지였던 개경(開京)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외무역을 엄격히 제한한 정책의 변화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물론, 조선시대의 쇄국정책이 고려세력의 탄압만을 위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대외무역을 정부에서 주도하고, 관련 이권을 한성부(漢城府) 일대의 상인들이 독점하는 형태의 조선 전기 상업은 국가독점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임진(壬辰)과 병자(丙子) 양 난을 겪으며, 중앙정부 권위의 쇠퇴와 대외무역에 사(私)무역의 비중이 커지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조선왕조 초기는 민간상인의 외국무역이 일절 금지됨으로써 고려시대의 활발하였던 외국무역을 주도하던 개성상인에게 타격을 주었고, 관부수요품(官府需要品) 및 대중국관무품(對中國官貿品)의 조달권을 비롯한 각종 상업상의 특권을 서울시전상인이 장악함으로써 개성상인은 고려시대의 정부 조달상(調達商)의 위치를 상실하여 곤경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개성상인은 왕조교체로 입은 타격을 극복하기 위한 활로를 국내의 행상로(行商路) 개척에서 구하여 성공할 수 있었으며, 왕조후기에 국내외 상업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자 의주(義州)와 동래(東萊)를 연결하는 외국무역을 주도하는 한편, 행상활동을 통하여 확보한 상업조직망을 이용하여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하는 도고상업을 전개하여 자본집적에 성공해갔다. 개성상인 자본의 성장과정은 한편으로 서울시전상인 및 공인 등 특권상인(特權商人)과의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9


 이러한 상황에 더해 상평통보(常平通寶)로 대표되는 화폐 유통이 촉진되면서, 중개무역을 담당하던 상인들은 화폐를 통해 대규모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를 기반으로 상업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지배력 강화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마치, 근대 서양에서 금융자본에 의한 산업자본 지배를 떠올리게 하는 이같은 모습 속에서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얼핏 발견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맹아(萌芽)'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이러한 그림자는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설명에 따르면 3층 구조 중 2층 시장경제의 발전 위에 서 있는 최상위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보다는 역(逆)피라미드 구조의 조선 후기 상업구조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엽에 걸쳐 위정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던 전황(錢荒) 문제는 곧 이 시기에 있어서의 금속화폐의 급격한 유통으로 빚어진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였다. 17세기 말 이후 금속화폐의 유통이 일반화해가고, 특히 그것이 농촌사회에 침투해감으로써 그곳에 심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p214)... 요컨대 금속화폐의 전국적 유통이 이루어져가던 초기에는 그것 때문에 부의 편중화가 촉진되었고 나아가서 나아가서 상업자본과 고리대자본의 집적이 이루어졌으며, 이와 같은 경제적 변동이 곧 조선후가 상업계에 도고상업을 발달하게 한 바탕이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15


  저자는<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에서 18세기 이후 조선상업을 사상(私商)의 성장과 함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둘러싼 사상도고(私商都賈)와 관상도고(官商都賈)의 대립 속에서 각각 자본의 축적과 경쟁의 모습을 발견하지만, 시작부터 중앙집권적인 국가였던 조선과 봉건제라는 지방분권의 전통을 가진 서양과는 시장경제의 출발점부터 달랐던 점을 먼저 고려해야 하지 않았을까.


 금난전권(禁亂廛權)은 시전이 가진 본래적인 특권적 도고상업을 벌임으로써 시전상인의 자본규모가 확대되어갔고, 이 때문에 도시 상업계 내에서의 상인과 수공업자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낳게 된 것이었으니, 상업자본에 의한 수공업자, 즉 공장(工匠)의 압박 내지 지배 현상이 발전하였던 것이다(p20)... 시장이 공장의 원료와 제품을 매점하는 수단으로는 정부가 허가하는 금난전권이 최대한으로 이용되었고, 따라서 이 시기의 시전과 공장 사이에는 특정 상품, 즉 원료와 가공품의 전매권을 둘러싼 치열한 분규가 일어나고 있었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1


 18세기 이후부터는 서울시전상인과 공인(貢人) 등 특권상인층의 도고상업체제에 강력히 저항하면서 사상인층의 도고상업이 성장해가고 있었는데, 개성상인은 국내 상업계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사상도고(私商都賈)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상인층의 하나였으며, 또한 이와 같은 도고상업을 통하여 상업자본은 집적되어갔던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49


 중세 왕-제후 간의 느슨한 (수평관계에 가까운) 수직관계에서 제후들은 지역상인들을 육성하고 그들과의 결탁이 필요했던 유럽과는 달리, 고려시대 이후 수백 년 동안 중앙의 통제를 받았던 조선시대에서 상업의 역사는'경쟁에서 독점'으로 가면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이 아니라, 독점권을 두고 벌이는 정치력의 다툼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해운의 경강상인과 육상의 개경상인과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만상(灣商)과 동래상인(東萊商人)은 하나의 독점권 또는 네트워크 권력으로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새로운 패권세력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실체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경강상인의 미곡매점상업은 서울 시내 양곡의 가장 중요한 공급원인 강상미를 매점하고, 서울 시내의 곡가를 앙등시킴으로써 큰 이익을 얻는 방법이 주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지방에 흉년이 들어 미귀(米貴) 상태가 되면, 그들이 이미 비축해두었던 강상미 혹은 공가미 등을 지방으로 운반 판매하여 취리(取利)하기도 하였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06


 이 시기 개성상인 개인의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의 종류와 그 수입량을 짐막할 수 있지만, 한편 중국무역에 종사하던 개성상인이 '홍경래란'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던 사정도 아울러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개성인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 반이조성(反李朝性)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본성장도와 그것에 따르는 정치적 관심도 등이 바탕이 된 것이라 할 수 있겠고, 또한 조선왕조의 중앙정부 및 그것과 결탁되어 있는 서울시전에 대하여 항상 대립된 위치에 있던 그들이 반중앙정부군, 즉 홍경래군과 결탁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55


 개성상인과 의주상인의 관계, 개성상인과 동래상인의 관계로 미루어보면, 개성상인은 국내의 각 상품생산지를 그 조직적인 상업망을 통하여 파악하는 한편, 의주상인과 동래상인을 조종하여 대중국무역과 대일본무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 두 외국무역을 연결시킴으로써 국제간의 중개무역을 전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59


 이처럼 조선 후기 상업에 있었던 일련의 변화를 정치의 관점에서 해석했을 때 조선 후기 농업부문에서의 대규모 유민의 증가와 몰락 양반의 증가가 노동력 공급의 증가와 함께 생산성의 증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소상인들의 활동에는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는 현상과 충돌없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영훈(李榮薰, 1951 ~ )의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이러한 점을 파고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이에 대해서는 향후 책의 리뷰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하고 일단 미루자.


 대규모 정기시(定期市, fair)의 형성을 통해 사람과 물자가 교류되고, 이를 바탕으로 도시가 발달하며 산업의 발달로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점차 독점화되는 과정으로 진행된 유럽과는 달리, 경제적 중심지와 정치적 중심지가 일치되는 고려시대 이래 우리의 특수성은 권력투쟁적 경쟁의 모습을 띄었고,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기 위해 집중화의 양태를 띄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점에서 조선 후기 상업의 변화를 끊임없는 권력 분화를 통해 성장한 서양의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응시키려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생각건대, 이 시기는 분산되어 있던 소생산자 중심의 생산계에 도고상업(都賈商業) 등으로 가치액이 증대된 상업자본이 침투하여 채무관계와 생산자재의 대여관계 및 합자관계 등을 통하여 점차 소생산자층을 예속시킴으로써 임금노동자화하고 있던 시기였다. 또 한편 주로 자연품만을 매매하던 상인이 상품경제의 발달, 자본규모의 확대, 도시의 발달 등으로 가공품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그것을 스스로 제조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제조와 판매를 겸하고 있던 소생산자층을 흡수하고, 대상인의 예하에서 분산된 소생산자로부터의 상품수집자 혹은 대상인 상품의 소비자에의 산매자(散賣者)의 위치에 있던 소상인층까지도 이제 점차 직접생산자로 전환시키면서 대상인에 대한 예속도를 높여가던 시기였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56


 일반적으로 봉건사회 말기와 근대사회 초기의 상업계는 한때 자기모순적 상황 속에 빠지게 된다. 즉 이 시기에는 농촌 중심의 소생산지와 도시의 교역이 활발해지고 또 대외무역도 폭넓게 이루어져서 상업계 전반에서 현저한 발전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업계의 발전은 한편으로 부등가(不等價) 교환의 소지를 무너뜨리며 개별자본 간의 심한 경쟁을 유발하여 이 시기의 상업은 양도 이윤에만 의존하는 차원에서 탈피하지 않는 이상, 그것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 자체의 기반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여건 밑에서 상업자본은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그것에 일정한 이익을 제공하는 대신 상업특권을 획득하며, 이 특권을 무기로 하여 소상품생산자를 시장으로부터 차단시키는 것이었으니, 시전 설치 지역에 있어서의 금난전권의 가혹한 적용이 그것이었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23


 비록, 조선 후기 상업의 모습에서 자본주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겠지만, 이러한 변화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라 여겨진다. 홍경래의 난(洪景來亂, 1811~1812)에 개성상인의 개입에서 보듯, 조선 후기에 일어난 수많은 민란의 배후에는 이들 개성상인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와 함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확산되던 천주교 세력과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동학의 세력 확산에도 관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의 경우 오랜 기간 전국을 떠돌며 장사를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추측이 전혀 근거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은 자본의 축적을 통해 '자본의 시대'가 아닌 '혁명의 시대'를 위한 준비였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근대(Moden)'이라고 부르는 시대에서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민혁명 등의 요소가 순차적으로 등장해서 작동해야한다는 역사적 필연주의에서 벗어나는 시각을 가진다면, 자본의 축적 대신 새로운 사상의 제시를 통한 계몽시대의 구현을 위한 자생적 근대화 노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를 검증하기 위한 연구는 전문가들에 의해 수행되어야겠고, 평범한 일반 독자의 한 의견이라 무게감있는 주장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꽃피우는 것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리뷰를 갈무리한다...


 봉건사회 말엽의 상업부활기 및 상업자본 집적기에는 상인자본이 수공업자와 소비자 대중 사이를 격리시키고 그사이에 스스로의 위치를 확보하며 나아가서 수공업자를 지배하는 것이었지만, 서울시전의 경우 공장과 소비자를 격리시키는 방편을 금난전권에 의한 공장 원료의 매점(買占)에서 구하고 있다. 금난전권은 일반적으로 '어용(御用)시전이 가진 본래적인 전매(專賣)특권'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그것은 왕조후기의 상업발전을 배경으로 한 관상도고(官商都賈)의 자본집적의 방편으로서의 특권적 매점상업권(買占商業權)이라는 데서 그 경제사적 의미를 구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시전상인이 공장과 도시소비자 사이를 격리시키는 방편으로서 금난전특권을 이용하고 있음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76


 유교사회로서의 조선왕조 사회는 근본적으로 상업에 대한 말업관(내지 천업관(觀)이 고정관념화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해소하고 상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또 종래 전통사회체제 내에서의 천민적(賤民的)이고  유리민적(流離民的)인 상인층에 대신하여 근대적 상인인으로서의  자질 높은 새로운 상인층의 형성을 위해서는 몰락양반층의상업계 투신이 바랄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60

18세기 이후 개성상인이 인삼의 재배와 홍삼 가공업을 경영하게 되는데, 이것은 외국무역과 국내의 도고상업을 통하여 형성 성장한 개성 상인 자본이 생산부문에 침투해가는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경강상인 자본의 조선도고 경영과 함께 문호개방 이전 조선사회 토착자본의 경제사적 수준과 그 존재양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P19

조선왕조 상업사상(商業史上)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한마디로 도고상업시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7세기 이후의 상업, 즉 우리가 ‘상업부흥기‘라 생각하고자 하는 시기 이후의 상업은, 관상이라 지칭할 수 있는 상인이나 사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상인의 경우를 막론하고, 당시의 사람들이 도고상업이라 부르던 매점상업 형태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 P22

유수원의 이론에 따르면, 비시전계 상인의 활동을 철저히 억제하고 시전상인의 독점매매권을 확보하되, 일물일전 원칙을 지양하여 동종상품을 매매하는 몇 개의 시전을 두고 그들 사이의 자유로운 경쟁을 인정함으로써 소비자와 생산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된 것이며, 동종시전들이 결탁해 그 독점적 지위를 유지 강화하기 위하여 고율가격(高率價格)의 확보 또는 가격의 부당한 인상을 통해 일으키는 폐단은 아직 고려되고 있지 않으며, 또 시전의 지나친 금난전권 행사 때문에 소생산자층의 생산이 위축되고 도시 소상인층의 활로가 막히는 문제는 중요시되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 P46

요컨대, 조선왕조의 초기부터 곡물운반 분야에 있어서의 사선 운반이 활발히 발달하였고, 특히 왕조의 후기로 넘어오면서 경강 사선에 의한 곡물운수업은 더욱 활발하였다. 17~18세기 이후에 이르러서 경강선인은 삼남지방의 정부 세곡 및 관료귀족층의 소작료 운반의 대부분을 청부하였고, 이로써 그들은 실질적으로 전국에서 가장 대규모적인 운수업자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 P96

요컨대, 조선왕조 후기에 있어서 개성이 인삼의 인공 재배와 그것의 홍삼으로의 가공업의 중심지가 된 것은, 그곳의 토양과 기후가 인삼재배에 적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인삼이 인공으로 재배되기 전부터 개성상인들이 인삼의 국내외 상업의 주도권을 가지고 그것으로 상업자본을 집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개성상인이 인삼무역과 도고상업을 통하여 집적한 자본이 인삼의 재배와 가공업에 투입된 것이었다. - P171

조선후기 사회의 상업사적 특징은, 이 시기에 매점상업, 특권상업 등이 발달하고 그것을 통하여 상업자본이 집적되며, 집적된 상업자본이 생산부문에 침투하여 그것을 지배해가는 점에 있지만, 시전상업계에 있어서도 특권상업체제가 발달하고 그 때문에 시전자본이 증대하였으며 그 결과 시전자본이 원료 매점, 상품 매점, 공장 고용 등을 통하여 수공업자들을 압박 내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개 18세기 후반기부터는 이와 같은 시전상업계의 특권체제가 해소되어가는 반도고(反都賈)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으니, 이 반도고 세력의 중요한 요인의 하나 속에는 도시 수공업자의 저항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 P201

도시 내의 일반 상인이 도고권에 저촉받지 않고 자유로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하는 정책, 즉 통공정책의 실시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791년(정조 15)의 ‘신해통공(辛亥通共)‘이다. 신해통공의 주창자는 당시의 좌의정 채제공이었다. 그는 시전도고로 인한 폐단으로 첫째 모든 일상생필품의 전매화로 인한 소상품생산자, 소상인층 및 소비자층의 피해, 둘째 극심한 물가고, 셋째 유통질서의 문란 등을 들고, 이것이 모두 도고를 금하면 해소될 것이라 하고, 30년 이내에 설치된 시전을 폐지하고 육의전 이외 시전의 도고권도 폐지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 문제는 정부에서 신중한 토의를 거듭한 후 그대로 채택되었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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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16 2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역사책 읽기는 전문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어제 서촌 갔다가 경복궁 옆에 있는 역사책방 들렀었어요. 갤러리 ‘라‘도 옆에 있어요. 갑자기 생각나네요.

겨울호랑이 2022-08-16 23:25   좋아요 2 | URL
에고 과찬이십니다... 그저 여러 생각들을 해보려 하는 편입니다만, 많이 부족합니다... ㅜㅜ 경복궁 근처에 역사책방이 있군요. 근처에 갈 일 있으면 한 번 가봐야겠습니다. 그레이스님 좋은 곳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단호한 결심으로 모욕에 대한 복수를 꾀하여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도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복수한 것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 영혼이 그 일을 다른 눈으로 보고, 그 일의 다른 면을 떠올리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기를, 청년은 스스로를 갈고닦을 줄 알아야 하고, 장년은 좋은 행실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하며, 노년은 민간 일이건 군사 일이건 모든 업무에서 물러나 어떤 직책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일이나 업무는 그저 우리를 긴장시킬 정도로, 그리고 반대편의 극단이랄 수 있는 저 나른하고 졸린 게으름이 가져오는 불편함에서 우리를 지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마련해 두면 된다.

이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이 명성과 영광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얻기 위해 재산이나 휴식, 목숨과 건강 같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재산을 포기할 정도이며, 그렇게 해서 아무런 몸도 실체도 없는 허깨비를, 순전히 말에 불과한 것을 쫓아다니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한 인간을 그처럼 그에게 고유한 것에 준해서만 평가하지 않는 것일까? 그는 많은 사람을 거느리며 멋진 궁전, 대단한 명망과 엄청난 수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를 둘러싼 것이지,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폭군을 정의하기를, 한 나라 내에서 제 맘에 드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는 자라고 했다. 그리고 흔히 그 때문에 악덕 그 자체보다 악덕이 드러나고 공표되는 것이 그들의 명예를 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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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은 문화유산에 대해서 관대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과학으로 그 가치를 다시 세우자고 말한다. 현대 과학이 알려주는 경이로움을 전달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이 《코스모스》의 또 다른 미덕이다.

2014년 판 〈코스모스〉에서 대외적으로 내세운 상징이 ‘빅히스토리Big History’다. 역사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또 종적으로나 횡적으로 넓혀서 보자는 것이 빅히스토리다. 우주와 생명의 역사를 인류의 역사와 연결시켜서 통합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다시 보자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와 다른 하나의 연결과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보이지 않던 진실의 실체를 큰 맥락에서 이해해보자는 것이 빅히스토리다. 따라서 빅히스토리에서는 스스로 거시담론 또는 거대담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빅퀘스천Big Questions’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통합적인 노력을 한다.

지적설계론의 주장이 사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으나, 심리 기록과 관련 법률의 면밀한 검토를 통해 우리는 지적설계론이 과학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지적설계론은 하나만 위배되어도 과학의 범주에서 배제하기에 충분한 다음의 세 가지 기준을 위반하고 있다. 지적설계론은 (1) 초자연적인 인과관계를 허용하고 언급하는 점에서 수세기에 걸쳐 확립된 과학의 기본 규칙을 위반하고 있다. (2) 지적설계론의 핵심인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 논증은 1980년대 창조과학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 비논리적이며 결함을 가진 부자연스러운 이원론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3) 진화론에 대한 지적설계론의 부정적인 공격은 과학계에 의해 충분하게 반박되었다.

버거에게 호미닌 사이에서 다양한 종분화가 일어났다고 보는 입장과 폭이 좁게 천천히 진화하면서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렀다는 입장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분명하게 태터살의 입장에 섰다. "호모 날레디와 호모 세디바Homo Sediba를 보면 적응 방산adaptive radiationd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하지만 버거는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충고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인류학은 언제나 조각나 있는 분야였습니다. 완전한 골격이 우리에게 말해준 것은 턱이나 치열 또는 두개골처럼 작은 특정 해부학적 부위만을 보고 다른 부분이나 몸 전체에 대해 섣부르게 판단을 내리면 아주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버거는 미국의 고인류학자들 중에 특히 계통발생 대신 화석의 연대에 지나친 무게를 두는 사람이 많다는 점도 문제 삼는다. "화석들의 유연관계를 알기 위해 꼭 그것의 연대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 4년 동안 고인류학을 지켜보면 무언가의 연대만 알면 그 본질이 밝혀진 것이라는 태도가 팽배해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호미닌 종들이 어느 한 순간에만 존재했을 경우에만 통하는 얘기죠."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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