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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에 관한 최소한 한 가지 해석은, 정체성의 범주가 단일해질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는 것이 바로 모든 정체성 안의 ‘차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젠더 트러블」은 최소한 두 가지 종류의 다른 도전과 마주해애 했다. 이제 나는 이런 문제들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내 후속 작업에서는 그게 시작되기를 바란다._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335

전작「젠더 트러블」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성차‘를 양성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기를 거부하고, 젠더가 사회적 규범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헤겔, 라캉의 해석과는 또다른 궤를 통해 보다 실체화시켰다면, 「젠더 허물기」에서는 교황청과의 논쟁등을 통해 보다 정치철학적 면모를 보인다.

「젠더 허물기」에서 언급된 철학자 중 눈에 띄는 인물은 개인적으로 미셸 푸코다. 그의 세계가 「말과 사물」에서 「성의 역사」로 이어졌다면, 버틀러는 「성의 역사」에서 드러난 문제를 「젠더 허물기」를 통해 정치적 해결점을 찾는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본문 중에 제시된 버틀러의 주장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에피스테메(episteme)에서 보다 행동화된 주장으로 실체화되는 일련의 과정이 스스로 젠더의 규범화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느낌을 받는다...

누가 또 무엇이 실제이자 진실로 간주되는지의 문제는 분명 지식의 문제이다. 그러나 푸코가 밝히듯, 그것은 또한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진리‘와 ‘실재‘를 갖고 있거나 보유한다는 것은 사회 세계에서 대단히 강력한 특권이자, 권력이 마치 자신은 존재론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는 방편이다... 지식과 권력은 결국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은 함께 세계에 대한 사유를 하기 위한 미묘하고 분명한 일단의 기준을 설정하는 일을 한다._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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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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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더는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는 작인의 장소나 안정된 정체성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시간 속에 희미하게 구성되고, 외부공간에 제도화되는 어떤 정체성이다. 젠더 효과는 몸의 양식화를 통해 생산되고, 따라서 이 효과는 몸의 제스처, 동작,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양식들이 안정된 젠더 자아라는 환영을 구성하는 일상적 방법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정형화된 젠더 개념은 본질적 정체성의 모델이라는 토대에서 빠져나와, 구성된 사회적 일시성으로서의 젠더 개념을 요구하는 토대로 이동하게 된다. 의미심장하게도, 만일 젠더가 내부적으로 불연속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제도화되는 것이라면, 본질의 외관은 바로 그 구성된 정체성, 즉 수행적 성과물이 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49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는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에서 젠더를 불연속적이며, 수행적 성과물로 정의한다. '남성'여성'의 안정적 이분법 체계를 기존 권력 구조의 산물로 규정하고, 그의 결과물인 '이성애'를 거부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젠더 트러블>. 우리는 책을 통해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체계를 거부하고, 불안정적이고 불연속적인 새로운 질서를 만난다.  버틀러가 본문에서 던지는 첫 질문은 과연 '섹스와 젠더는 구분될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한 버틀러의 답은 '섹스는 젠더다' 이며 구분될 수 없다고 단언하지만, 엄밀하게는 '구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이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기존 권력 구조의 정치적 조작이기 때문에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섹스를 담론 이전의 것으로 생산하는 것은, 젠더라 지칭되는 문화적 구성장치의 결과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담론 이전의(pre-discursive) 섹스'라는 결과를 생산하면서, 바로 그 담론적 생산 작용은 은폐시키는 권력관계를 포과하기 위해 젠더의 공식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할까?(p98)... 따라서 섹스는 담론 이전의 해부학적 사실성으로 볼 수 없다. 사실, 섹스는 그 정의상, 지금까지 줄곧 젠더였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99


 '주체'의 문제는 정치학, 특히 페미니즘 정치학에서 중대한 문제다. 왜냐하면 사법적 주체라는 것은 정치학의 사법적 체계가 굳어지면 필경 '보이지 않는' 어떤 배타적 관행을 통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체의 정치적 구조화는 특정한 합법화의 목표, 배타적 목표를 갖고 진행되는 것이며, 이 정치적 조작(操作)은 사법 권력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는 정치적 해석이 있기에 효과적으로 은폐되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사법적 권력은 자신이 그저 재현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생산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87


 버틀러는 이분법 대신 '젠더'안에서 통합된 관념을 제시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섹스가 젠더라고 말하지만, 젠더가 섹스인 것은 아니다.(섹스는 젠더의 충분조건이다.)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구별/구분을 벗어나 통합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젠더 트러블>에서 저자는 우리 몸의 소화기관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몸은 하나가 아니다. 가늘고 긴 소화관이 입으로부터 항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구분짓는다. 평소 우리는 이러한 점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음식을 먹을 때 우리 몸은 '윗턱-아래턱'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느낀다. '음식'이라는 타자를 통해 우리 내면 안에 위치한 외면이 인식되는 것처럼 이분법 체계가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우리 내면과 외면을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이처럼, 우리의 세상은 불안정하고 모호하다.


 내부와 외부의 구분도 그렇지만, 몸의 경계도 원래 정체성의 일부였던 것을 더러운 타자로 방출하거나 전환하면서 확립된다... 주체의 '내부'와 '외부' 세계의 분리를 통해 구성되는 것은, 사회적 규제와 통제라는 목적을 위해 희미하게 유지되는 구분선이고 경계선이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사실상 내부가 외부로 되어버리는 배설경로 때문에 혼란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런 배설 작용은 다른 정체성-변별화 형식이 획득되는 모델이 된다. 사실상 이것은 타자들이 배설물이 되는 양상이다.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가 완전히 구분되려면 몸의 전체 표면이, 있을 수 없는 침투 불가능성을 이뤄내야 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37


 그럼에도 우리가 '외면'과 '내면' 또는 '남성'과 '여성'으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앞서 말한 사법적 권력 구조의 산물이다. 우리의 인식이 이처럼 권력 구조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러한 상식은 필연적 결과가 아닌 우연적 산물에 불과하다. 때문에,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1940)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진품이 갖는 아우라(Aura)에 대해 강조한 것과는 달리, 버틀러는 '젠더 패러디'라는 용어를 통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근본적 우연성은 규제에 의해서 자연스럽거나 필연적이라고 추측되는 인과론적 통일성의 문화적 배치에 직면한 섹스와 젠더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애적으로 일관된 법 대신 연기에 의해 탈자연화된 섹스와 젠더를 보게 된다. 이 연기는 섹스와 젠더의 구분을 선언하고 조작된 통일성의 문화적 기제를 극화하는 것이다... 젠더 패러디는 젠더가 그 양식에 따라 스스로 형태를 갖추는, 원래의 정체성 자체가 원본 없는 모방본이라는 것을 폭로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44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체제에서 필요로 하는 '이성애' 를 부정하는 버틀러가 '이성애'를 부정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드래그'로 대표되는 일종의 가로지르기 행위다. 그리고 그 행위는 '수행적'이라는 동사(verb)로 활성화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이로부터 기존 질서를 '명사(noun)'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차별점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섹스가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자아를 지칭하는 장소에서의) 젠더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때만, 또 섹스가 (이성애적이어서 자신이 욕망하는 다른 젠더와의 대립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변별화하는 장소에서의) 욕망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때만 젠더는 섹스, 젠더, 그리고 욕망에 관한 경험의 통일성을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남성이나 여성, 양 젠더의 내적 일관성이나 통일성은 안정되고 대립적인 이성애를 필요로 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126


 영속적 본질이라는 개념이 허구적인 구성물, 즉 강제적인 속성의 정렬을 통해 일관된 젠더 연쇄로 생산된 구성물이라면, 본질인 젠더나 명사인 남성, 여성의 존속 가능성이 의심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영속적 본질이나 젠더화된 자아의 외관, 즉 정신과 의사 로버트 스톨러가 '젠더 핵심(gender core)'이라고 부른 것은 문화적으로 설정된 일관된 선을 따라 속성들에 대한 규제가 생산해낸 것이다... 젠더는 명사가 아니며, 자유롭게 떠도는 일군의 속성도 아니다. 우리는 이제 젠더의 본질적 효과가 젠더 일관성의 규제적 관행 때문에 수행적으로 생산되고 강제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의 형이상학이라는 물려받은 담론 안에서 젠더는 수행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여기서 수행적이라는 의미는 목적한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는 언제나 행위이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131


 이와 같이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통해서 규범에 의해 영향을 받는 '젠더'에 대해 말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권력의 재배치'에 대해 말한다. 재배치되는 권력은 '문화/규범' 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규범들은 다시 '젠더'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젠더' 역시 '규범'을 만드는 또다른 변인(變因)임을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규범에 의해 결정지워지는 젠더가 아니라, 규범에 영향을 미치는 젠더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젠더'가 '규범'을 만들고, 다시 '젠더'를 만드는 일종의 순환구조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그렇게 끊임없이 새롭게 결정되는 '젠더'. 마치 <주역 周易> <계사전 繫辭傳>에 나오는 '생생지위역 生生之謂易'이라는 표현처럼 새롭게 변화하는 젠더를 버틀러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젠더 트러블>의 논의를  통해 버틀러는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얻었을까. 아마도 잃은 것은 '젠더 정체성'이고, 얻은 것은 '정치성'이 아닐까. <젠더 트러블>을 통해 '~이 아닌'으로 정의되었던 기존 도식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기존 질서에 '명사성'을 부여하고 스스로의 체제에 '동사성'을 가져오고, '젠더'안에 동성애를 가져오면서, 기존 질서를 정(靜)으로 새로운 질서를 동(動)의 구분지으며 거대 담론을 만들어 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안의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젠더 트러블>에서 받는다. 다만, 이렇게 거대 담론이 되면서. 페미니즘의 정체성이 약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인상을 받는데, 이 부분은 행동주의자인 주디스 버틀러의 성향과도 연결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젠더 트러블>에 표현된 저자의 생각이 <젠더 허물기>에서는 어떻게 확대될지와 <안티고네의 주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현될지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는 다음으로 넘기도록 하자...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표명되는 관점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 확립한다._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p363


젠더의 속성이 표현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적이라면, 이런 속성들은 자신이 표현하거나 드러낸다고 하는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구성할 것이다. 표현과 수행의 차이는 결정적이다. 젠더의 속성과 행위둘, 몸이 자신의 문화적 의미를 보여주고 생산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수행적인 것이라면, 어떤 행위나 속성이 재단될 수 있는 선험적 정체성이란 없다. 그리고 진정하거나 거짓된 젠더 행위, 사실적이거나 왜곡된 젠더 행위 또한 없다. 결국 진정한 젠더 정체성이라는 규정은 규제가 만든 허구임이 드러날 것이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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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4-21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앞에 서문 몇 쪽 겨우 읽다 어려워서 포기할까...하는 중입니다 ㅋㅋㅋ

겨울호랑이 2021-04-21 15:44   좋아요 2 | URL
아... 처음 서문에 전체 주체가 압축되다보니 엄청 높아보이는데, 우선 본문을 부담없이 읽어보시고 서문을 다시 보시면 어떨까 생각을 해봅니다... 버틀러의 용어가 다소 낯설게 다가오긴 합니다만, 그냥 끝까지 가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긴 합니다... 제가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겠지만요...

황금모자 2021-04-21 16: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주디스 버틀러는 헤겔 철학 수용사로 박사를 받아서 헤겔 철학이랑 연관지어서 생각하면 좀 더 와닿습니다. ‘Identity‘의 번역어 ‘정체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기서 ‘정‘자가 ‘올바를 정‘입니다. 옳다고 여겨지는 기준을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 기존의 페미니즘/퀴어 이론은 그 반대의 기준을 제시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 방법은 결국 정-반-합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변증법의 순환에 갇히게 됩니다. 버틀러는 이 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이 아닌‘으로 설정되는 방식을 버리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수행성을 택한 것이지요. 버틀러가 제시한 가면의 비유, 드래그가 수행성의 일환입니다. 수행성 연구로 어빙 고프먼 - <자아 연출의 사회학>도 추천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04-21 17:01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황금모자님 설명을 들으니 더 명확해지네요. 고프먼의 책 추천도 감사합니다^^:)
 
자본론 3 - 상 - 2015년 개역판,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3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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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증식과정에서는 총자본의 일부만이 기여하지만, 노동과정에서는 총자본이 소재적으로 참가한다... 잉여가치가 총투하자본의 산물이라고 여겨질 때, 잉여가치는 이윤이라는 전환된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정한 가치액이 자본인 것은 그것이 이윤을 얻기 위하여 투하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품가치 = 비용가격 + 이윤으로 전환된다. 이리하여 우리가 여기에서 처음 대면하는 이윤은 잉여가치와 동일한 것인데, 다만 그것의 신비화된 형태일 따름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42 


 <자본론 3 :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conomie>부터는 이윤(利潤, profit)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가 <자본론> 1권과 2권을 통해 잉여가치가 가변자본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면, 3권에서는 잉여가치의 실현은 상품의 형태로, 총자본에 대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오해는 가변자본을 실현시키는 수단인 생산수단의 소유가 자본가에게 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잉여가치'라는 본질(本質)대신 '이윤'이라는 현상(現象)만을 보게 된다. 


 자본의 가변부분만이 잉여가치를 창조하지만, 이것이 가능한 것은 다른 부분들이 투하되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불변자본을 투하함으로써만 노동을 착취할 수 있으며 가변자본을 투하함으로써만 불변자본을 가치증식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은 동일하다. 이런 관념은, 그의 이윤의 현실적 크기가 가변자본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총자본에 비례하며, 따라서 잉여가치율이 아니라 이윤율에 의하면 규정되기 때문에 더욱 강화된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49 


 잉여가치는 투하자본 중 가치증식과정에 들어가는 부분에 대한 증가분일 뿐 아니라 이 과정에 들어가지 않는 부분에 대한 증가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잉여가치는 소비된 자본에 대한 가치증가분일 뿐 아니라 생산에 투하된 모든 자본에 대한 가치증가분이기도 하다... 자본가에게 명백하게 된 것은, 이 가치증가분은 자기가 자기의 자본으로 수행하는 생산활동에서 생긴다는 것, 따라서 자본 그것에서 생긴다는 것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40


 마르크스는 이와 같이 '이윤'이라는 현상에 '잉여가치'라는 본질이 가려졌음을 지적한다. 동시에, 이러한 은폐된 비밀은 주체의 변용(變容)도 가져온다. 자본가가 이윤실현의 주체가 되면서 이윤추구를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들을 구체적으로 자본의 회전시간을 짧게하고, 노동투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불변자본의 투하량 증가)한다. 그리고, 여기에 기업간, 산업간 경쟁(競爭)이 추가되면서 이윤은 평균이윤으로 수렴한다.


 이율윤(s/C=s/(c+v), 총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은 잉여가치율(s/v, 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과 숫자상으로 다르지만, 잉여가치와 이윤은 사실상 동일한 것이고 숫자상으로도 동등하다 할지라도, 이윤은 역시 잉여가치가 전환된 형태며 잉여가치의 원천과 그 존재를 둘러싼 비밀이 은폐되고 모호하게 된 형태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56


 회전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이 유휴자본은 자본 전체에 비하여 더욱 적어지기 때문에 다른 사정들이 불변이라면 취득되는 잉여가치는 그만큼 더욱 커진다는 것 등이다.(p86)...  근대적 산업체계에서 고정자본을 증대시켜야 할 필요성이 점점 더 커짐에 따라 이윤에 눈먼 자본가들은 노동일을 점점 더 연장하게 된 것이다.(p96)... 고정자본 사용의 절약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노동조건들이 대규모로 사용되는 것의 결과다. 노동조건들의 대규모 사용은 기계학과 화학의 발견들이 상품가격을 인상하지 않으면서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며 언제나 필수조건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127


 마르크스는 개별 기업이 얻는 이윤은 사회적 평균이윤으로 수렴한다고 보았다.(이윤이 평균이윤으로 전환) 동종(同種)산업 내에서는 동일한 생산방식의 채용을 통해서, 이종(異種)산업에서는 사회의 부동자금(은행, 주식시장)의 이동을 통해서 평균이윤율이 형성하게 된다. 같은 산업 내에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어 초과이윤 발생 시 다른 기업들도 이를 차용하면서 이 기술은 보편화되면서 모든 기업의 이윤은 평균이윤율로 동일하게 된다. 반면, 다른 산업 내에서는 이윤율이 높은 산업이 있다면, 유휴자본은 새로 기업을 만들어 시장에 진입한다. 새로운 경쟁 기업의 출현으로 인해 생산량은 증가하고, 이윤율은 낮아지면서 이 역시 평균이윤율로 수렴한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의 오해와 착각(자본은 이윤을 만들어낸다)을 더욱 굳건하게 만든다.


 이윤율은 모든 생산분야에서 동일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윤율은 자본의 평균구성이 지배하는 평균적 생산분야들의 이윤율로 평준화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모든 다른 생산분야들의 이윤총액은 잉여가치의 총액과 동등하지 않을 수 없고, 사회적 총생산물의 생산가격의 합계는 가치의 합계와 동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p214)... 잉여가치가 이윤으로 분배되는 것은, 각각의 특정 생산분야에서 창조되는 잉여가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분야에 투하되어 있는 자본량에 비례하는 것이며, 따라서 동일한 크기의 자본은 그 구성이 어떻든 사회적 총자본이 생산한 잉여가치 총량에서 동등한 몫을 받는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215 


 자본은 이윤율이 낮은 분야를 떠나 이윤율이 더 높은 분야로 옮겨간다. 이윤율이 여기에서는 낮아지고 저기에서는 높아지는 것에 대응하여, 자본이 끊임없이 움직임으로써 - 자본이 서로 다른 생산분야들 사이에 분배됨으로써 - 수요와 공급 사이의 비율이 변동하여 결국 서로 다른 생산분야들에서 평균이윤이 동일하게 되고 이에 따라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환된다. 어느 주어진 국민사회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이 높으면 높을수록, 즉 그 나라의 상태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더욱 더 적합함에 따라, 자본은 이런 균등화를 더욱 더 넓게 실현하게 된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242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이윤을 더 크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자본의 집중화가 가속화된다.  그렇지만, 이윤의 본질은 잉여가치이고, 잉여가치는 가변자본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결과적으로 이윤율의 하락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 그 자체다.


 불변자본에 비하여 따라서 또 총자본에 비하여 가변자본이 점점 더 감소한다는 것은, 사회적 총자본의 평균 유기적 구성이 점점 더 고도화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이것은 또한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이 점점 더 발달한다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한데, 이 점은 기계와 고정자본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함으로써 동일한 수의 노동자들이 동일한 시간에 일반적으로 더 많은 원료와 보조재료를 생산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증명된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265


 가변자본의 상대적 감소, 따라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의 발달에 따라 동일한 양의 노동력을 운동시키고 동일한 양의 잉여노동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큰 총자본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p276)...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달하면 할수록 동일한 수의 노동력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큰 자본량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생산성의 상승은 자본주의적 기초 위에서는 필연적으로 영구적인 외관상의 과잉노동인구를 만들어낸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278


 반면, 이윤율은 상승하는 경향도 보이는데, 이는 노동절약적인 기계의 도입을 통해 노동생산성이 향상되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이윤율의 하락 경향은 상쇄된다. 하락하는 경향과 상쇄되는 요인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 내의 상충되는 요인들은 결과물로 과잉잉구와 과잉자본을 동시에 만들어 낸다. 이러한 내적 모순은 결국 공황을 불러오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잉여가치량은 잉여가치율과 노동자의 수를 곱한 것과 같지만, 잉여가치율은 결코 총자본에 대해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가변자본에 대해서만 계산된다. 그런데 자본가치의 크기가 주어져 있다면, 이윤율의 상승 또는 하락은 잉여가치량의 증대 또는 감소 없이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p293)... 이윤율은, 노동자가 덜 착취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투하자본에 비해 더 적은 노동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저하한다... 이윤율이 저하하더라도 이윤량은 투하자본의 크기가 증대함에 따라 증가하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집적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생산조건들이 자본의 대규모 사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307


 요컨대 과잉생산이라는 명백한 현상에 대한 반론들은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제한들은 생산 일반에 대한 제한들이 아니며, 따라서 또한 이 특수한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제한들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순은, 이 생산양식이 생산력을 절대적으로 발전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 생산력의 발전은 이 생산양식의 특수한 생산조건과 끊임없이 충돌한다는 점이다. 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322


 산업자본의 이윤율과 관련한 설명이 끝난 후, 마르크스는 산업자본과 상업자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개별 기업이 이윤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생산 뿐 아니라 유통까지 담당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를 개별 기업이 담당하게 될 경우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이를 전담하는 자본(상업자본)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상업자본은 이윤의 일정 부분(투입비용에 사회적 평균이윤 몫만큼)을 받으면서 역할을 수행한다.


 상품자본으로서 자본의 존재와, 자본이 유통영역(시장)에서 상품자본으로서 겪는 탈바꿈은 산업자본의 재생산과정, 따라서 그 총생산과정의 한 단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산업자본은 유통자본의 기능에서는 생산자본의 기능과 구별된다. 유통자본과 생산자본은 동일한 자본이 두 개로 분리된 다른 존재형태들이다. 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338


 상업자본이 산업자본보다 높은 평균이윤을 얻는다면 산업자본의 일부는 상업자본으로 전환할 것이고, 더 낮은평균이윤을 얻는다면 그 반대과정이 일어날 것이다. 상업자본보다 쉽게 그 기능과 용도를 변경시킬 수 있는 자본종류는 없다. 상업자본은 스스로는 어떤 잉여가치도 생산하지 않으므로, 평균이윤의 형태로 상업자본에게 돌아가는 잉여가치는 생산자본 전체에 의해 생산된 잉여가치의 일부라는 것은 명백하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355


 상업자본의 경우에는 평균이윤율은 하나의 주어진 크기다. 상업자본은 이윤 또는 잉여가치의 창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총자본 중 차지하는 비율에 따라 산업자본이 생산하는 이윤량에서 자기의 배당을 끌어내기 때문에, 상업자본은 일반적 이윤율의 형성에 참가한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389


 산업이 발달은 대자본이 출현을 요구하게 되며, 신용의 형태로 산업자본에게 자금이 주어지고, 이른바 '이자낳는 자본'이 등장하게 된다. 화폐 소유자에게 이자(李子, interest)의 형태로 귀속되는 이러한 자본의 형태는 신용제도를 창조하면서, 자본주의 사회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자본이 현실적으로 운동하는 자본으로서  존재하는 곳은 유통과정이 아니라 오직 생산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이자낳는 자본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른데, 바로 이것이 이자낳는 자본의 특수성을 이루고 있다. 화폐를 이자낳는 자본으로서 가치증식시키려는 화폐소유자는 그 화폐를 타인에게 넘겨주고 그것을 유통에 투입하며 그것을 자본으로서 상품화한다. 그 화폐는 자기를 넘겨주는 사람에 대해서 자본일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처음부터 자본으로서 넘겨지게 된다. 다시 말해 그 가치는 소유자로부터 일정한 기간만 떠나는 것이며 오직 일시적으로 소유자의 점유로부터 기능자본가의 점유로 옮겨가는 것인데, 따라서 그 가치는 지불되어 버리는 것도 아니고 판매되어 버리는 것도 아니며 대부될 뿐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437


 자본은 지금 사물이지만 사물로서 자본이다. 화폐는 지금 사랑에 몸부림치는 사물이다. 화폐가 대부되자마자 또는 재생산과정에 투하되자마자, 화폐가 잠을 자든 안자든 집에 있든 여행을 하든 낮이든, 밤이든 화폐에는 이자가 생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501 


 이자낳는 자본의 속성에서 생산될 수 있는 모든 부는 자본에 속하며, 자본이 지금까지 수취한 모든 것은 자본의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식욕에 대한 하나의 할부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류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잉여노동은 자본 자체의 내재적인 법칙에 따라 자본에 속한다는 것이다. 자본은 분명히 몰록[Moloch, 사람의 목숨을 희생으로 요구하는 신]이다.(p506)... 이자낳는 자본에서는 자본물신의 관념이 완성되고 있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508 


 이자낳는 자본의 관심은 이윤이 아니다. 화폐의 가격으로 지불되는 이자가 상업자본가들의 관심이 된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는 생산단계와 유통단계의 분화로 인해 자본이 산업자본과 상업자본으로 나뉘어졌고, 결과적으로 이윤이 이자와 기업가이득으로 분할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 걸음 나아가, 상업자본의 융성은 (이윤이 고정된 상태에서)산업자본의 쇠퇴로 이어질 수 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자본론 3-(상)>까지 논의된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본론 3-(하)>에서 계속 마르크스의 주장을 이어서 들어보도록 하자. To be continued.....


 이자낳는 자본은 상품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범주이지만, 특수한 종류의 상품으로 되며, 이자는 이것의 가격인데, 이 가격은 보통 상품의 시장가격과 마찬가지로 그때그때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확정된다. 그러므로 이자율은 끊임없이 변동하지만 주어진 어느 순간에는, 상품의 그때그때의 시장가격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균일한 것으로 나타난다. 화폐자본가는 이 상품을 공급하고, 기능자본가는 그것을 구매하며 그것에 대한 수요를 형성한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이자율을 확정하는 이런 과정은 일반적 이윤율을 낳는 균등화에는 적용되지 않는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467


 이자율도 '화폐의 가격'으로서 규칙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화폐 형태로 있는 자본 그것이 상품으로서 제공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것의 가격의 확정은 다른 모든 상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시장가격의 확정이기 때문이며, 이리하여 이자율은 항상 일반적 이자율로서, 얼마의 화폐형태로 있는 자본의 화폐에 대해 얼마로서, 양적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윤율은 동일한 분야 안에서도, 상품의 시장가격이 동일하더라도 개별자본들이 동일한 상품을 생산하는 조건들이 다름에 따라 변동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별자본의 이윤율은 상품의 시장가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가격과 비용가격 사이의 차액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470

  <자본론 3-(상)>에서 논의되는 모든 문제들은 '잉여가치'와 '이윤'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노동에서 가치가 생산된다는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 Theories of Labour Value)에 근거하여 생산수단이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 소유가 되면서, 잉여가치라는 본질이 이윤이라는 실체에 가리워졌음을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이로인해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자본가는 자신에게 귀속되는 이윤만을 생각하는 일종의 주인 - 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가 발생함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안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의 인식론도 발견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정리하는 것으로 넘기자... 


 모든 문제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생긴다. 즉 상품들이 단순히 상품으로서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생산물로서 교환되며, 자본은 잉여가치 총량에서 각각의 크기에 비례해 일정한 몫을 - 동일한 크기의 자본에게는 동일한 분배 몫을 -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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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마지막 날. 이번 달을 돌아보면 유난히 '성(性)' 관련 이슈가 뜨거웠던 한 달이었다. 월초에 고(故)박원순 서울시장의 자살과 성추행 고소건으로 전국민에게 충격을 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월말에 외교관과 군인에 의한 성범죄가 문제가 된 것을 보면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대한민국을 뒤흔들만큼 크게 보도된 것에 반하여, 후자는 거의 언론에 의해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차이는 있다. 그렇지만, 보도 내용을 들여다 보면 가볍게 넘길 사안들이 아니다.


 1. 성범죄 외교관 기사 : http://www.hani.co.kr/arti/politics/diplomacy/955549.html


 2. 정보사 군인 기사 : https://newstapa.org/article/bzBVH  


 사태의 위중함을 놓고 본다면, 외교관의 범죄는 뉴질랜드와의 외교문제로까지 악화될 우려가 있는 중대 사안이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외교부의 대처는 평온하기만 하다. 해당 외교관은 문제가 되자 뉴질랜드에서 벗어나 현재 필리핀 총영사로 근무하고 있다고 하니, 외교부의 성인지감수성에 대해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정보사 군인의 경우는 자신이 보호해야할 대상인 북한이탈주민을 성폭행한 충격적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결코 가벼운 건이 아니다. 과거 성폭행을 당한 여성을 경찰서에서 성폭행한 전례를 떠올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 공권력에 대한 불신은 커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가볍지 않은 사안이다. 이번 사안을 통해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 1948 ~ )의 <흑인페미니즘 사상 Black Feminist Thought>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된다. 저자는 비판사회이론으로서 흑인페미니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초국가적, 탈식민지 맥락에서, 카리브 해, 아프리카 지역에서 흑인 주도의 국민국가나 아시아에서 새로이 형성된 국민국가의 여성들은 종족, 시민권, 종교에 부여된 새로운 의미와 씨름하는 중이다. 유럽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나라 출신의 여성들이 유럽의 국민국가에 이주함에 따라 유럽은 점차 다문화적인 사회가 되고 있지만, 이 여성이주민들은 새로운 형태의 종속을 경험하고 있다.(Yuval-Davis 1997). 이러한 다양한 집단의 여성이 표현하는 사회이론은 그들만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회이론은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종족, 민족, 종교가 서로 복잡하게 맞물려 작동하는 여러 억압의 내부에서 여성들 자신의 체험에 언어와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즉 미국 흑인여성의 비판사회이론 역시 이와 유사한 권력관계를 반영한다._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페미니즘 사상>,p35


  저자는 과거 식민지 주민들의 유럽 이주가 불러온 여러 문제들 중 특히 여성들이 겪는 위와 같은 어려움속에서 미국 내 흑인 여성의 문제를 함께 발견한다. '흑인' 이라는 억압받는 계급 내에서도, 더 억압받는 계층인 흑인 여성의 문제를 다룬 이 책의 내용은 2017년 현재 북한이탈주민의 수가 3만명을 넘어선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남북화해의 시대를 채 맞기도 전에 발생한 이 사건은 재발방지를 위해 엄중하게 다뤄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언론보도나 진상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거의 듣기 힘들다. 진실을 판단하는 기준이 어쩌면 이렇게 선택적인 것인가?


 위력에 의한 성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철저하게 조사되어야 하고, 법에 따라 엄중하게 판결되어야 하며,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마치 실내조명처럼 선택적으로 사안이 보도되고, 여론몰이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이 언론이라는 조명에 따라 좌우되는 것 또한 경계한다. 조명계획이 아닌 여론조작은 누구의 삶을 쾌적하고 매력적으로 하는 것인가...

 

 조명계획이란 조명 기구를 이용해 빛과 그림자를 조절하여 공간을 더욱 쾌적하고 매력적으로 설계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다_ 안자이 테쓰, <공간을 쉽게 바꾸는 조명>,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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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07-31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론몰이는 정말 저열한 방법이죠... 요새 뉴스에서 많이 보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7-31 16:27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여론이 진실보도가 아닌 프로파간다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요즘입니다...
 


 여성이 전통사회에서 자기 뜻에 반해 무시되거나, 대중적/직업적 영역에서 자신의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도록 강제되거나, 종교적 억압의 베일 뒤에 숨겨야 한다면, 그들은 쉽사리 차별을 받을 것이고, 남성의 재산처럼 취급되며, 전리품으로 탈취되고, 가정 안에서 다양한 인권침해의 대상이 될 것이다.(p499) <세계 인권 사상사> 中 


 <세계인권사상사 The History of Human Rights: From Ancient to the Globalization Era>에서 저자 미셀린 이샤이(Micheline Ishay)는 여성의 문제 분석 중 하나를 전쟁의 문제와 연관시켜 분석한다. 오랜 전통사회에서 여성들은 인권이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책에서의 저자 분석이다. 그렇지만, 여성의 인권 침해 문제를 전통사회의 모순(Ancien Regime)으로 넘길 수 있을까? 미 투 운동(Me Too movement)이 불러온 파급효과는 여성의 인권 침해 문제가  나라, 계층, 인종에 관련 없이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미 투운동으로 폭로된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한 세상 사람들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서 직장 내 성적 비행이 너무나 많은 여자들의 일상적 경험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차렸다.(p327) <페미니즘의 책> 中


 <페미니즘의 책 The Feminism Book>은 2017년부터 들불처럼 번지는 미 투 운동을 소개한다. 2006년 오프 라인에서 시작된 미 투 운동은 2017년 알리사 밀라노(Alyssa Milano)로 부터 시작된 온라인 미 투운동으로 발전하면서 힘을 받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여성 뿐 아니라 남성과 성소수자들의 동참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책의 설명이다.


 '미 투(Me Too)'라는 용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 말은 2006년에 타라나 버크가 성범죄 생존자들의 결속을 촉진하기 위해 처음 사용했다 이것이 미투운동의 시작이었다.(p324)... 2017년 10월 5일 <뉴욕타임스>의 특집기사가 발표되고 이로부터 10일 후에 한 친구의 권유로 배우 알리사 밀라노는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에게 댓글로 '미 투(Me too)'라고 써달라고 부탁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밀라노의 게시물은 최초의 온라인 '미 투'였다.(p325)...  온라인 미 투운동이 힘을 얻자, 일부 남자들과 여러 트랜스젠더들도 자신의 직장 섬범죄 경험담을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했다. 배우 케빈 스페이시는 젊은 남자들에게 고소당한 사람 중 한 명인데 자신의 혐의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성희롱이 여러 업계에서 흔히 일어난다는 사실 또한 명백해졌다.(p326) <페미니즘의 책> 中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모든 사람은 여하한의 조건과 관계없이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누린다는 세계 인권 선언(世界人權宣言,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UDHR)의 정신과도 부합한다.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등등한 권리와 자유가 억압받는다면, 이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견해 또는 그 밖의 견해, 출신 민족 또는 사회적 신분, 재산의 많고 적음, 출생 또는 그 밖의 지위에 따른 그 어떤 종류의 구분도 없이,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모든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p28) Article2 Everyone is entitled to all the rights and freedoms set forth in this Declaration, without distinction of any kind, such as race, colour. sex, language, religion, political or other opinion, national or social origin, property, birth or other status,(p29) <세계 인권 선언> 中


 그렇지만, 미 투 운동에는 이와 같은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억압받는 이들이 SNS를 활용하면서 자신의 부당한 처지를 알리는 미 투는 다른 한 편으로는 다른 의미에서의 '마녀 사냥'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가지고 있기에,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존재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를 고려했을 때, 보다 신중하게 미 투의 목소리를 받아들여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미투운동에 대한 반대론자들은 미투운동이 전제적이면서도, 그 운동이 여자들을 영구적 피해자로 묘사할 위험이 있다고, 성범죄 혐의를 받은 남자들이 대응할 권리도 없이 '미디어 린치'를 당해왔다고 주장했다.(p327) <페미니즘의 책> 中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윤리형이상학 Die Metaphysik der Sitten 1: Metaphysische Anfangsgrunde der Rechtslehre>을 통해 법이론과 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에 대해 논증한다. 여기에서 그는 법이란 서로 다른 이들의 자유가 공존할 수 있는 조건으로 정의하는데, 법정은 각자의 자유와 그 한계를 논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리를 통과한 후에야 주장들은 객관성(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AB33 VI230 법이란 그 아래서 어떤 이의 의사가 자유의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다른 이의 의사와 합일될 수 있는 조건들의 총체이다. 행위가 또는 그 행위의 준칙에 따른 각자의 의사의 자유가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는 각 행위는 법적이다/권리가 있다/정당하다/옳다(p151) <윤리형이상학> 中


 다시 세계 인권 선언을 들여다보자. <세계 인권 선언>은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지키기 위해 재판을 받을 자격있음이 명시되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권리 침해를 주장했을 때, 이러한 혐의에 대해 모든 사람은 방어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 해당 조항의 내용이다.


 제10조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를 가려내고, 자신에게 가해진 범죄 혐의에 대해 심판받을 때 독립적이고 불편부당한 법정에서 다른 사람과 똑같이 공정하고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자격이 있다.(p60) Article10 Everyone is entitled in full equality to a fair and public hearing by an independent and impartial tribunal, in the determination of his rigths and obligations and of any criminal charge against him.(p61) <세계 인권 선언> 中


 <세계 인권 선언>의 내용을 가지고 '미 투'운동을 다시 생각해 보자. 이에 따르면, 피해자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권리를 가지고,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자신의 방어권을 가진다. 이들은 각자의 권리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진위 여부는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그 전까지는 주관적인 주장이다. 성추행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은 주관적인 것이기에 이에 대해서 타인은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시에, 주관적인 감정이 공론장(public sphere)으로 표출된다면, 주관적인 감정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타당성이 있어야 함도 당연할 것이다. 


 최근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이 생전에 성추행으로 피소되고 이후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논란이 있지만, 우리는 성추행 피해자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되,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개인적으로 이번 사건을 악용하는 정치적인 움직임도 분명 느껴지지만 이는 또 다른 문제라 생각되기에 다른 페이퍼에서 기회가 되면 다루기로 하자.


 우리는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주장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피해를 주장하는 목소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한 판단은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입증될 때까지 보류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이 상황을 대처하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더해 박원순과 같은 뛰어난 인물도 타인에게 성적 수치심을 안겨줄 수 있다면, 나의 말과 행동은 과연 어땠을까. 이번 일을 통해 보다 경각심을 가지고 나를 돌아보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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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07-15 14: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피해자라고 주장했다고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떤 판단이라도 신중해야 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07-15 14:30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소송의 일방이 고인인 이번 사안은 더 엄중한만큼, 보다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7-15 20: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많은 걸 생각하게 되는 리뷰입니다.
우선 칸트 주장은 보편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만 만약 그런 전제가 타당하지 않다면 그의 주장은 쉽게 무너집니다.
그리고 박원순 같은 사람도 실수한다는 말씀에 대해 그의 사생활과 공적 일은 분리될 수 없다는 전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죄추정 원칙은 맞지만 자살 원인의 개연성이 현재 너무 높습니다. 그점이 증거가 되는 듯 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07-15 22:00   좋아요 3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에 일부 공감하지만, 다르게 생각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칸트의 사상의 근간이 보편법칙에 있기 때문에 보편법칙 가정이 무너질 경우 건축물처럼 세워진 그의 사상이 무너진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사상은 대륙법 체계의 근간이 된 것 또한 사실입니다. 또한, 국제법에도 그의 보편주의 영향이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칸트 철학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을 그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사상이 현실에 깊이 영향을 미친 경우가 이 경우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런 이유로 제 페이퍼에서는 세계 인권 선언에 담겨 있는 내용안에서 칸트 철학의 해당 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북다이제스터님의 개인의 사생활과 공생활이 다를 수 있다는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저는 그의 사생활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제가 인식하는 박원순의 모습은 공적으로 드러난 공인(公人)으로서의 모습입니다. 그의 사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므로 섣부르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합니다. 이처럼 공생활과 사생활이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면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됩니다.
세번째로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고소가 들어간 것을 확인한 직후 자살한 정황을 봤을 때, 이들간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렇지만, 저는 현재로서 이들간에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짓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오늘 쓴 페이퍼는 박원순에 대한 변명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도 사람이니만큼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현재까지 언론에서 알려진 많은 부분이 그의 잘못을 가리키고 있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현 상황에서 언론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가능성도 생각해 볼 때, 추후 조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판단을 보류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일방의 주장으로 이미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왔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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