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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3 - 상 - 2015년 개역판,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3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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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증식과정에서는 총자본의 일부만이 기여하지만, 노동과정에서는 총자본이 소재적으로 참가한다... 잉여가치가 총투하자본의 산물이라고 여겨질 때, 잉여가치는 이윤이라는 전환된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정한 가치액이 자본인 것은 그것이 이윤을 얻기 위하여 투하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품가치 = 비용가격 + 이윤으로 전환된다. 이리하여 우리가 여기에서 처음 대면하는 이윤은 잉여가치와 동일한 것인데, 다만 그것의 신비화된 형태일 따름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42 


 <자본론 3 :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conomie>부터는 이윤(利潤, profit)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된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가 <자본론> 1권과 2권을 통해 잉여가치가 가변자본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면, 3권에서는 잉여가치의 실현은 상품의 형태로, 총자본에 대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오해는 가변자본을 실현시키는 수단인 생산수단의 소유가 자본가에게 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우리는 '잉여가치'라는 본질(本質)대신 '이윤'이라는 현상(現象)만을 보게 된다. 


 자본의 가변부분만이 잉여가치를 창조하지만, 이것이 가능한 것은 다른 부분들이 투하되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불변자본을 투하함으로써만 노동을 착취할 수 있으며 가변자본을 투하함으로써만 불변자본을 가치증식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은 동일하다. 이런 관념은, 그의 이윤의 현실적 크기가 가변자본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총자본에 비례하며, 따라서 잉여가치율이 아니라 이윤율에 의하면 규정되기 때문에 더욱 강화된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49 


 잉여가치는 투하자본 중 가치증식과정에 들어가는 부분에 대한 증가분일 뿐 아니라 이 과정에 들어가지 않는 부분에 대한 증가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잉여가치는 소비된 자본에 대한 가치증가분일 뿐 아니라 생산에 투하된 모든 자본에 대한 가치증가분이기도 하다... 자본가에게 명백하게 된 것은, 이 가치증가분은 자기가 자기의 자본으로 수행하는 생산활동에서 생긴다는 것, 따라서 자본 그것에서 생긴다는 것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40


 마르크스는 이와 같이 '이윤'이라는 현상에 '잉여가치'라는 본질이 가려졌음을 지적한다. 동시에, 이러한 은폐된 비밀은 주체의 변용(變容)도 가져온다. 자본가가 이윤실현의 주체가 되면서 이윤추구를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들을 구체적으로 자본의 회전시간을 짧게하고, 노동투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불변자본의 투하량 증가)한다. 그리고, 여기에 기업간, 산업간 경쟁(競爭)이 추가되면서 이윤은 평균이윤으로 수렴한다.


 이율윤(s/C=s/(c+v), 총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은 잉여가치율(s/v, 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과 숫자상으로 다르지만, 잉여가치와 이윤은 사실상 동일한 것이고 숫자상으로도 동등하다 할지라도, 이윤은 역시 잉여가치가 전환된 형태며 잉여가치의 원천과 그 존재를 둘러싼 비밀이 은폐되고 모호하게 된 형태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56


 회전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이 유휴자본은 자본 전체에 비하여 더욱 적어지기 때문에 다른 사정들이 불변이라면 취득되는 잉여가치는 그만큼 더욱 커진다는 것 등이다.(p86)...  근대적 산업체계에서 고정자본을 증대시켜야 할 필요성이 점점 더 커짐에 따라 이윤에 눈먼 자본가들은 노동일을 점점 더 연장하게 된 것이다.(p96)... 고정자본 사용의 절약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노동조건들이 대규모로 사용되는 것의 결과다. 노동조건들의 대규모 사용은 기계학과 화학의 발견들이 상품가격을 인상하지 않으면서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며 언제나 필수조건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127


 마르크스는 개별 기업이 얻는 이윤은 사회적 평균이윤으로 수렴한다고 보았다.(이윤이 평균이윤으로 전환) 동종(同種)산업 내에서는 동일한 생산방식의 채용을 통해서, 이종(異種)산업에서는 사회의 부동자금(은행, 주식시장)의 이동을 통해서 평균이윤율이 형성하게 된다. 같은 산업 내에서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어 초과이윤 발생 시 다른 기업들도 이를 차용하면서 이 기술은 보편화되면서 모든 기업의 이윤은 평균이윤율로 동일하게 된다. 반면, 다른 산업 내에서는 이윤율이 높은 산업이 있다면, 유휴자본은 새로 기업을 만들어 시장에 진입한다. 새로운 경쟁 기업의 출현으로 인해 생산량은 증가하고, 이윤율은 낮아지면서 이 역시 평균이윤율로 수렴한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의 오해와 착각(자본은 이윤을 만들어낸다)을 더욱 굳건하게 만든다.


 이윤율은 모든 생산분야에서 동일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윤율은 자본의 평균구성이 지배하는 평균적 생산분야들의 이윤율로 평준화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모든 다른 생산분야들의 이윤총액은 잉여가치의 총액과 동등하지 않을 수 없고, 사회적 총생산물의 생산가격의 합계는 가치의 합계와 동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p214)... 잉여가치가 이윤으로 분배되는 것은, 각각의 특정 생산분야에서 창조되는 잉여가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분야에 투하되어 있는 자본량에 비례하는 것이며, 따라서 동일한 크기의 자본은 그 구성이 어떻든 사회적 총자본이 생산한 잉여가치 총량에서 동등한 몫을 받는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215 


 자본은 이윤율이 낮은 분야를 떠나 이윤율이 더 높은 분야로 옮겨간다. 이윤율이 여기에서는 낮아지고 저기에서는 높아지는 것에 대응하여, 자본이 끊임없이 움직임으로써 - 자본이 서로 다른 생산분야들 사이에 분배됨으로써 - 수요와 공급 사이의 비율이 변동하여 결국 서로 다른 생산분야들에서 평균이윤이 동일하게 되고 이에 따라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환된다. 어느 주어진 국민사회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이 높으면 높을수록, 즉 그 나라의 상태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더욱 더 적합함에 따라, 자본은 이런 균등화를 더욱 더 넓게 실현하게 된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242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이윤을 더 크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자본의 집중화가 가속화된다.  그렇지만, 이윤의 본질은 잉여가치이고, 잉여가치는 가변자본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결과적으로 이윤율의 하락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 그 자체다.


 불변자본에 비하여 따라서 또 총자본에 비하여 가변자본이 점점 더 감소한다는 것은, 사회적 총자본의 평균 유기적 구성이 점점 더 고도화한다는 것과 동일하다. 이것은 또한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이 점점 더 발달한다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한데, 이 점은 기계와 고정자본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함으로써 동일한 수의 노동자들이 동일한 시간에 일반적으로 더 많은 원료와 보조재료를 생산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증명된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265


 가변자본의 상대적 감소, 따라서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의 발달에 따라 동일한 양의 노동력을 운동시키고 동일한 양의 잉여노동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큰 총자본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p276)...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달하면 할수록 동일한 수의 노동력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큰 자본량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생산성의 상승은 자본주의적 기초 위에서는 필연적으로 영구적인 외관상의 과잉노동인구를 만들어낸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278


 반면, 이윤율은 상승하는 경향도 보이는데, 이는 노동절약적인 기계의 도입을 통해 노동생산성이 향상되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이윤율의 하락 경향은 상쇄된다. 하락하는 경향과 상쇄되는 요인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 내의 상충되는 요인들은 결과물로 과잉잉구와 과잉자본을 동시에 만들어 낸다. 이러한 내적 모순은 결국 공황을 불러오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잉여가치량은 잉여가치율과 노동자의 수를 곱한 것과 같지만, 잉여가치율은 결코 총자본에 대해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가변자본에 대해서만 계산된다. 그런데 자본가치의 크기가 주어져 있다면, 이윤율의 상승 또는 하락은 잉여가치량의 증대 또는 감소 없이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p293)... 이윤율은, 노동자가 덜 착취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투하자본에 비해 더 적은 노동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저하한다... 이윤율이 저하하더라도 이윤량은 투하자본의 크기가 증대함에 따라 증가하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집적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생산조건들이 자본의 대규모 사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307


 요컨대 과잉생산이라는 명백한 현상에 대한 반론들은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제한들은 생산 일반에 대한 제한들이 아니며, 따라서 또한 이 특수한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제한들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순은, 이 생산양식이 생산력을 절대적으로 발전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 생산력의 발전은 이 생산양식의 특수한 생산조건과 끊임없이 충돌한다는 점이다. 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322


 산업자본의 이윤율과 관련한 설명이 끝난 후, 마르크스는 산업자본과 상업자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개별 기업이 이윤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생산 뿐 아니라 유통까지 담당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를 개별 기업이 담당하게 될 경우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이를 전담하는 자본(상업자본)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상업자본은 이윤의 일정 부분(투입비용에 사회적 평균이윤 몫만큼)을 받으면서 역할을 수행한다.


 상품자본으로서 자본의 존재와, 자본이 유통영역(시장)에서 상품자본으로서 겪는 탈바꿈은 산업자본의 재생산과정, 따라서 그 총생산과정의 한 단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산업자본은 유통자본의 기능에서는 생산자본의 기능과 구별된다. 유통자본과 생산자본은 동일한 자본이 두 개로 분리된 다른 존재형태들이다. 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338


 상업자본이 산업자본보다 높은 평균이윤을 얻는다면 산업자본의 일부는 상업자본으로 전환할 것이고, 더 낮은평균이윤을 얻는다면 그 반대과정이 일어날 것이다. 상업자본보다 쉽게 그 기능과 용도를 변경시킬 수 있는 자본종류는 없다. 상업자본은 스스로는 어떤 잉여가치도 생산하지 않으므로, 평균이윤의 형태로 상업자본에게 돌아가는 잉여가치는 생산자본 전체에 의해 생산된 잉여가치의 일부라는 것은 명백하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355


 상업자본의 경우에는 평균이윤율은 하나의 주어진 크기다. 상업자본은 이윤 또는 잉여가치의 창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총자본 중 차지하는 비율에 따라 산업자본이 생산하는 이윤량에서 자기의 배당을 끌어내기 때문에, 상업자본은 일반적 이윤율의 형성에 참가한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389


 산업이 발달은 대자본이 출현을 요구하게 되며, 신용의 형태로 산업자본에게 자금이 주어지고, 이른바 '이자낳는 자본'이 등장하게 된다. 화폐 소유자에게 이자(李子, interest)의 형태로 귀속되는 이러한 자본의 형태는 신용제도를 창조하면서, 자본주의 사회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자본이 현실적으로 운동하는 자본으로서  존재하는 곳은 유통과정이 아니라 오직 생산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이자낳는 자본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른데, 바로 이것이 이자낳는 자본의 특수성을 이루고 있다. 화폐를 이자낳는 자본으로서 가치증식시키려는 화폐소유자는 그 화폐를 타인에게 넘겨주고 그것을 유통에 투입하며 그것을 자본으로서 상품화한다. 그 화폐는 자기를 넘겨주는 사람에 대해서 자본일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처음부터 자본으로서 넘겨지게 된다. 다시 말해 그 가치는 소유자로부터 일정한 기간만 떠나는 것이며 오직 일시적으로 소유자의 점유로부터 기능자본가의 점유로 옮겨가는 것인데, 따라서 그 가치는 지불되어 버리는 것도 아니고 판매되어 버리는 것도 아니며 대부될 뿐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437


 자본은 지금 사물이지만 사물로서 자본이다. 화폐는 지금 사랑에 몸부림치는 사물이다. 화폐가 대부되자마자 또는 재생산과정에 투하되자마자, 화폐가 잠을 자든 안자든 집에 있든 여행을 하든 낮이든, 밤이든 화폐에는 이자가 생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501 


 이자낳는 자본의 속성에서 생산될 수 있는 모든 부는 자본에 속하며, 자본이 지금까지 수취한 모든 것은 자본의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식욕에 대한 하나의 할부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류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잉여노동은 자본 자체의 내재적인 법칙에 따라 자본에 속한다는 것이다. 자본은 분명히 몰록[Moloch, 사람의 목숨을 희생으로 요구하는 신]이다.(p506)... 이자낳는 자본에서는 자본물신의 관념이 완성되고 있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508 


 이자낳는 자본의 관심은 이윤이 아니다. 화폐의 가격으로 지불되는 이자가 상업자본가들의 관심이 된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는 생산단계와 유통단계의 분화로 인해 자본이 산업자본과 상업자본으로 나뉘어졌고, 결과적으로 이윤이 이자와 기업가이득으로 분할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 걸음 나아가, 상업자본의 융성은 (이윤이 고정된 상태에서)산업자본의 쇠퇴로 이어질 수 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자본론 3-(상)>까지 논의된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본론 3-(하)>에서 계속 마르크스의 주장을 이어서 들어보도록 하자. To be continued.....


 이자낳는 자본은 상품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범주이지만, 특수한 종류의 상품으로 되며, 이자는 이것의 가격인데, 이 가격은 보통 상품의 시장가격과 마찬가지로 그때그때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확정된다. 그러므로 이자율은 끊임없이 변동하지만 주어진 어느 순간에는, 상품의 그때그때의 시장가격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균일한 것으로 나타난다. 화폐자본가는 이 상품을 공급하고, 기능자본가는 그것을 구매하며 그것에 대한 수요를 형성한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이자율을 확정하는 이런 과정은 일반적 이윤율을 낳는 균등화에는 적용되지 않는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467


 이자율도 '화폐의 가격'으로서 규칙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화폐 형태로 있는 자본 그것이 상품으로서 제공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것의 가격의 확정은 다른 모든 상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시장가격의 확정이기 때문이며, 이리하여 이자율은 항상 일반적 이자율로서, 얼마의 화폐형태로 있는 자본의 화폐에 대해 얼마로서, 양적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윤율은 동일한 분야 안에서도, 상품의 시장가격이 동일하더라도 개별자본들이 동일한 상품을 생산하는 조건들이 다름에 따라 변동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별자본의 이윤율은 상품의 시장가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가격과 비용가격 사이의 차액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470

  <자본론 3-(상)>에서 논의되는 모든 문제들은 '잉여가치'와 '이윤'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노동에서 가치가 생산된다는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 Theories of Labour Value)에 근거하여 생산수단이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 소유가 되면서, 잉여가치라는 본질이 이윤이라는 실체에 가리워졌음을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이로인해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자본가는 자신에게 귀속되는 이윤만을 생각하는 일종의 주인 - 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가 발생함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안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의 인식론도 발견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정리하는 것으로 넘기자... 


 모든 문제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생긴다. 즉 상품들이 단순히 상품으로서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생산물로서 교환되며, 자본은 잉여가치 총량에서 각각의 크기에 비례해 일정한 몫을 - 동일한 크기의 자본에게는 동일한 분배 몫을 -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_ 마르크스, <자본론 3 - 상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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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마지막 날. 이번 달을 돌아보면 유난히 '성(性)' 관련 이슈가 뜨거웠던 한 달이었다. 월초에 고(故)박원순 서울시장의 자살과 성추행 고소건으로 전국민에게 충격을 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월말에 외교관과 군인에 의한 성범죄가 문제가 된 것을 보면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대한민국을 뒤흔들만큼 크게 보도된 것에 반하여, 후자는 거의 언론에 의해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차이는 있다. 그렇지만, 보도 내용을 들여다 보면 가볍게 넘길 사안들이 아니다.


 1. 성범죄 외교관 기사 : http://www.hani.co.kr/arti/politics/diplomacy/955549.html


 2. 정보사 군인 기사 : https://newstapa.org/article/bzBVH  


 사태의 위중함을 놓고 본다면, 외교관의 범죄는 뉴질랜드와의 외교문제로까지 악화될 우려가 있는 중대 사안이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외교부의 대처는 평온하기만 하다. 해당 외교관은 문제가 되자 뉴질랜드에서 벗어나 현재 필리핀 총영사로 근무하고 있다고 하니, 외교부의 성인지감수성에 대해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정보사 군인의 경우는 자신이 보호해야할 대상인 북한이탈주민을 성폭행한 충격적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결코 가벼운 건이 아니다. 과거 성폭행을 당한 여성을 경찰서에서 성폭행한 전례를 떠올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 공권력에 대한 불신은 커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가볍지 않은 사안이다. 이번 사안을 통해 패트리샤 힐 콜린스(Patricia Hill Collins, 1948 ~ )의 <흑인페미니즘 사상 Black Feminist Thought>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된다. 저자는 비판사회이론으로서 흑인페미니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초국가적, 탈식민지 맥락에서, 카리브 해, 아프리카 지역에서 흑인 주도의 국민국가나 아시아에서 새로이 형성된 국민국가의 여성들은 종족, 시민권, 종교에 부여된 새로운 의미와 씨름하는 중이다. 유럽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나라 출신의 여성들이 유럽의 국민국가에 이주함에 따라 유럽은 점차 다문화적인 사회가 되고 있지만, 이 여성이주민들은 새로운 형태의 종속을 경험하고 있다.(Yuval-Davis 1997). 이러한 다양한 집단의 여성이 표현하는 사회이론은 그들만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회이론은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종족, 민족, 종교가 서로 복잡하게 맞물려 작동하는 여러 억압의 내부에서 여성들 자신의 체험에 언어와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즉 미국 흑인여성의 비판사회이론 역시 이와 유사한 권력관계를 반영한다._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페미니즘 사상>,p35


  저자는 과거 식민지 주민들의 유럽 이주가 불러온 여러 문제들 중 특히 여성들이 겪는 위와 같은 어려움속에서 미국 내 흑인 여성의 문제를 함께 발견한다. '흑인' 이라는 억압받는 계급 내에서도, 더 억압받는 계층인 흑인 여성의 문제를 다룬 이 책의 내용은 2017년 현재 북한이탈주민의 수가 3만명을 넘어선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남북화해의 시대를 채 맞기도 전에 발생한 이 사건은 재발방지를 위해 엄중하게 다뤄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언론보도나 진상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거의 듣기 힘들다. 진실을 판단하는 기준이 어쩌면 이렇게 선택적인 것인가?


 위력에 의한 성범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철저하게 조사되어야 하고, 법에 따라 엄중하게 판결되어야 하며,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마치 실내조명처럼 선택적으로 사안이 보도되고, 여론몰이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이 언론이라는 조명에 따라 좌우되는 것 또한 경계한다. 조명계획이 아닌 여론조작은 누구의 삶을 쾌적하고 매력적으로 하는 것인가...

 

 조명계획이란 조명 기구를 이용해 빛과 그림자를 조절하여 공간을 더욱 쾌적하고 매력적으로 설계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다_ 안자이 테쓰, <공간을 쉽게 바꾸는 조명>,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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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07-31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론몰이는 정말 저열한 방법이죠... 요새 뉴스에서 많이 보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7-31 16:27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여론이 진실보도가 아닌 프로파간다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요즘입니다...
 


 여성이 전통사회에서 자기 뜻에 반해 무시되거나, 대중적/직업적 영역에서 자신의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도록 강제되거나, 종교적 억압의 베일 뒤에 숨겨야 한다면, 그들은 쉽사리 차별을 받을 것이고, 남성의 재산처럼 취급되며, 전리품으로 탈취되고, 가정 안에서 다양한 인권침해의 대상이 될 것이다.(p499) <세계 인권 사상사> 中 


 <세계인권사상사 The History of Human Rights: From Ancient to the Globalization Era>에서 저자 미셀린 이샤이(Micheline Ishay)는 여성의 문제 분석 중 하나를 전쟁의 문제와 연관시켜 분석한다. 오랜 전통사회에서 여성들은 인권이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책에서의 저자 분석이다. 그렇지만, 여성의 인권 침해 문제를 전통사회의 모순(Ancien Regime)으로 넘길 수 있을까? 미 투 운동(Me Too movement)이 불러온 파급효과는 여성의 인권 침해 문제가  나라, 계층, 인종에 관련 없이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미 투운동으로 폭로된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한 세상 사람들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서 직장 내 성적 비행이 너무나 많은 여자들의 일상적 경험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차렸다.(p327) <페미니즘의 책> 中


 <페미니즘의 책 The Feminism Book>은 2017년부터 들불처럼 번지는 미 투 운동을 소개한다. 2006년 오프 라인에서 시작된 미 투 운동은 2017년 알리사 밀라노(Alyssa Milano)로 부터 시작된 온라인 미 투운동으로 발전하면서 힘을 받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여성 뿐 아니라 남성과 성소수자들의 동참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책의 설명이다.


 '미 투(Me Too)'라는 용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 말은 2006년에 타라나 버크가 성범죄 생존자들의 결속을 촉진하기 위해 처음 사용했다 이것이 미투운동의 시작이었다.(p324)... 2017년 10월 5일 <뉴욕타임스>의 특집기사가 발표되고 이로부터 10일 후에 한 친구의 권유로 배우 알리사 밀라노는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에게 댓글로 '미 투(Me too)'라고 써달라고 부탁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밀라노의 게시물은 최초의 온라인 '미 투'였다.(p325)...  온라인 미 투운동이 힘을 얻자, 일부 남자들과 여러 트랜스젠더들도 자신의 직장 섬범죄 경험담을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했다. 배우 케빈 스페이시는 젊은 남자들에게 고소당한 사람 중 한 명인데 자신의 혐의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성희롱이 여러 업계에서 흔히 일어난다는 사실 또한 명백해졌다.(p326) <페미니즘의 책> 中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모든 사람은 여하한의 조건과 관계없이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누린다는 세계 인권 선언(世界人權宣言,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UDHR)의 정신과도 부합한다.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등등한 권리와 자유가 억압받는다면, 이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견해 또는 그 밖의 견해, 출신 민족 또는 사회적 신분, 재산의 많고 적음, 출생 또는 그 밖의 지위에 따른 그 어떤 종류의 구분도 없이,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모든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p28) Article2 Everyone is entitled to all the rights and freedoms set forth in this Declaration, without distinction of any kind, such as race, colour. sex, language, religion, political or other opinion, national or social origin, property, birth or other status,(p29) <세계 인권 선언> 中


 그렇지만, 미 투 운동에는 이와 같은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억압받는 이들이 SNS를 활용하면서 자신의 부당한 처지를 알리는 미 투는 다른 한 편으로는 다른 의미에서의 '마녀 사냥'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가지고 있기에,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존재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를 고려했을 때, 보다 신중하게 미 투의 목소리를 받아들여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미투운동에 대한 반대론자들은 미투운동이 전제적이면서도, 그 운동이 여자들을 영구적 피해자로 묘사할 위험이 있다고, 성범죄 혐의를 받은 남자들이 대응할 권리도 없이 '미디어 린치'를 당해왔다고 주장했다.(p327) <페미니즘의 책> 中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윤리형이상학 Die Metaphysik der Sitten 1: Metaphysische Anfangsgrunde der Rechtslehre>을 통해 법이론과 덕이론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에 대해 논증한다. 여기에서 그는 법이란 서로 다른 이들의 자유가 공존할 수 있는 조건으로 정의하는데, 법정은 각자의 자유와 그 한계를 논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리를 통과한 후에야 주장들은 객관성(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AB33 VI230 법이란 그 아래서 어떤 이의 의사가 자유의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다른 이의 의사와 합일될 수 있는 조건들의 총체이다. 행위가 또는 그 행위의 준칙에 따른 각자의 의사의 자유가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는 각 행위는 법적이다/권리가 있다/정당하다/옳다(p151) <윤리형이상학> 中


 다시 세계 인권 선언을 들여다보자. <세계 인권 선언>은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지키기 위해 재판을 받을 자격있음이 명시되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권리 침해를 주장했을 때, 이러한 혐의에 대해 모든 사람은 방어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 해당 조항의 내용이다.


 제10조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를 가려내고, 자신에게 가해진 범죄 혐의에 대해 심판받을 때 독립적이고 불편부당한 법정에서 다른 사람과 똑같이 공정하고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자격이 있다.(p60) Article10 Everyone is entitled in full equality to a fair and public hearing by an independent and impartial tribunal, in the determination of his rigths and obligations and of any criminal charge against him.(p61) <세계 인권 선언> 中


 <세계 인권 선언>의 내용을 가지고 '미 투'운동을 다시 생각해 보자. 이에 따르면, 피해자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권리를 가지고,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자신의 방어권을 가진다. 이들은 각자의 권리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진위 여부는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그 전까지는 주관적인 주장이다. 성추행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은 주관적인 것이기에 이에 대해서 타인은 비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시에, 주관적인 감정이 공론장(public sphere)으로 표출된다면, 주관적인 감정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타당성이 있어야 함도 당연할 것이다. 


 최근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이 생전에 성추행으로 피소되고 이후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논란이 있지만, 우리는 성추행 피해자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되,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개인적으로 이번 사건을 악용하는 정치적인 움직임도 분명 느껴지지만 이는 또 다른 문제라 생각되기에 다른 페이퍼에서 기회가 되면 다루기로 하자.


 우리는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주장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피해를 주장하는 목소리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한 판단은 객관적인 증거를 통해 입증될 때까지 보류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이 상황을 대처하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더해 박원순과 같은 뛰어난 인물도 타인에게 성적 수치심을 안겨줄 수 있다면, 나의 말과 행동은 과연 어땠을까. 이번 일을 통해 보다 경각심을 가지고 나를 돌아보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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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07-15 14: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피해자라고 주장했다고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떤 판단이라도 신중해야 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07-15 14:30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소송의 일방이 고인인 이번 사안은 더 엄중한만큼, 보다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7-15 20: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많은 걸 생각하게 되는 리뷰입니다.
우선 칸트 주장은 보편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만 만약 그런 전제가 타당하지 않다면 그의 주장은 쉽게 무너집니다.
그리고 박원순 같은 사람도 실수한다는 말씀에 대해 그의 사생활과 공적 일은 분리될 수 없다는 전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죄추정 원칙은 맞지만 자살 원인의 개연성이 현재 너무 높습니다. 그점이 증거가 되는 듯 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07-15 22:00   좋아요 3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에 일부 공감하지만, 다르게 생각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칸트의 사상의 근간이 보편법칙에 있기 때문에 보편법칙 가정이 무너질 경우 건축물처럼 세워진 그의 사상이 무너진다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사상은 대륙법 체계의 근간이 된 것 또한 사실입니다. 또한, 국제법에도 그의 보편주의 영향이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칸트 철학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을 그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사상이 현실에 깊이 영향을 미친 경우가 이 경우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런 이유로 제 페이퍼에서는 세계 인권 선언에 담겨 있는 내용안에서 칸트 철학의 해당 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북다이제스터님의 개인의 사생활과 공생활이 다를 수 있다는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저는 그의 사생활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제가 인식하는 박원순의 모습은 공적으로 드러난 공인(公人)으로서의 모습입니다. 그의 사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므로 섣부르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합니다. 이처럼 공생활과 사생활이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다면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됩니다.
세번째로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고소가 들어간 것을 확인한 직후 자살한 정황을 봤을 때, 이들간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렇지만, 저는 현재로서 이들간에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짓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오늘 쓴 페이퍼는 박원순에 대한 변명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도 사람이니만큼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현재까지 언론에서 알려진 많은 부분이 그의 잘못을 가리키고 있어 보이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현 상황에서 언론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가능성도 생각해 볼 때, 추후 조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판단을 보류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일방의 주장으로 이미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왔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우리가 비록 이런 위기 속에 있지만, 아까 말씀드렸던 사회적 합의와 갈등의 조정, 그리고 국민적 컨센서스를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도약할 수 있는 상황에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외국의 사례를 봐라, 둘째는 통계를 봐라, 셋째는 빅 데이터를 봐라, 이렇게 보면 미래가 보이고 세상이 보인다는 게 제 지론이지요. 큰 그림을 얻는 거에요.(p30) <박원순과 도올, 국가를 말하다> 中


 2016년 촛불 혁명과 이어진 탄핵과 대통령 선거.  <박원순과 도올, 국가를 말하다>는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자 중 한 명이었던 박원순 시장과 도올 김용옥 교수의 대담을 담고 있다. 경제, 문화, 교육, 국방 등 민감한 사회 현안에 대해 노철학자는 원론과 방향에 대해 말을 한다면, 행정가는 현실을 바탕으로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하며 합의점을 찾아가는 책으로 기억된다.


 2020년 7월 9일. 박원순 서울 시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아직은  자세한 내용을 모두 알 수 없지만, 바로 직전 직원 성추행 피소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 사건과 박원순 시장의 갑작스런 죽음은 정황상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민권운동가로서 3선의 서울 시장으로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고인. '성추행 피소'건은 그에게 큰 수치심을 안겨 준 것은 아닐까. 평소 인권(人權)을 강조하던 그였기에 만약 이로 인해 유죄판결을 난다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한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마음이 아프지만, 정말 조심스럽게 넘겨짚어본다. 그렇지만, 이 역시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

 

 고프먼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수치심을 겪는 사람은 개별성과 존엄성을 지닌 고유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 이하의 존재다. 보다 일반적인 면에서 보면 일탈자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면서, 자신을 수치심을 느끼는 이들보다 위에 있는 '정상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처럼 수치심은 사회 구성원을 서열화하는 작용을 한다.(p422) <혐오와 수치심> 中


 박시장의 이러한 선택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박시장이 성추행을 저질렀다면 엄중하게 조사가 이루어져야 했고, 판결 결과에 따라 처벌 또는 무혐의 등의 조치가 이루어져야 했다. 만일 피소가 사실이라면 개인에게는 소명의 기회를, 사회 전체로는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계기로 삼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박 시장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물론, 그의 선택에는 사실 조사 이전에 언론에 의한 무차별 보도, 검찰에 의한 마녀사냥식 수사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보안법 전문가로서, 인권운동가로서, 서울시장으로서 그가 세운 수많은 업적이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잊혀지는 것 같아 아쉬움이 생긴다. 물론, 상황을 잘 알지 못하기에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고인의 불명예스러운 마지막 길만 사람들에게 남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든다.


 죄책감은 [죄를 저지른] 사람과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한 구분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존엄을 존중하는 것과 완전히 양립할 수 있다.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하면서도, 그 사람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고 궁극적으로 사회에 재통합될 수 있다는 생각을 여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p425) <혐오와 수치심> 中


 이와 함께, 고인이 느꼈을 '다가올 수치심에 대한 두려움'은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하여 안타깝다. 자신의 주변인물들이 겪을 심적인 고통과 함께 (만일 성추행 의혹이 직접적인 원인이라면) 피고소인이 안게 될 마음의 짐 도 고려하여 한 번 더 생각해봤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만 뒤늦게 해본다. 


 유능하면서도 인간적인 정치인이었기에 그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동시에, 인간이 가지는 한계와 최근 불거지는 여러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다음 과제 중 하나는 성인지 감수성이 아닐까 싶다. 성(性)과 관련한 사건이 일회성 관심을 받고 흐지부지 되는 결론으로 끝나지 않도록,  제도적인 방지책 마련과 사회의 인식 확산을 이제는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모든 생각의 근거는 박시장의 죽음이 성추행 피소와 연관되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이에 대한 판단은 좀더 명확하게 드러날 때까지 미뤄두도록 하자... 현재 분명한 것은 박시장이 우리 곁을 떠났다는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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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0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10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추풍오장원 2020-07-10 1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문가는것까지 비아냥대는 사람들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군요..

겨울호랑이 2020-07-10 11:17   좋아요 2 | URL
죽은 이에 대한 애도까지 정쟁의 소재로 삼기까지 하겠습니까... 물론 비상식적인 소수는 어디에나 있겠지만요....

2020-07-10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10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20-07-10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번 비극을 보면서 저는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말했던 ‘이중사고‘를 새삼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전직 지방자치단체장, 전직 국회의원, 전직 장관 등등 유별나게 잘난 척, 깨끗한 척 했던 사람들이 왜 이토록 ‘이중적‘인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에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아이러니 왜이러니... 아이러니 다이러니 다를게 없잖니...중독은 달콤해 멈출 수가 없어...

* * *

˝‘이중사고‘란 낱말은 이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우선 이것은 한 사람이 두 가지 상반된 신념을 동시에 가지며, 그 두 가지 신념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당의 지식층은 자신들의 기억을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할지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현실을 농락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이중사고‘의 훈련에 의해서 현실은 침해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만족해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의식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확하게 수행될 수 없다. 그런데 또한 이런 과정은 무의식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날조를 한다는 느낌이 들게 되고, 그로 인해 죄의식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당의 본질적인 행위는 완전히 정직하게 수행된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의식적인 기만을 감수하며 행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중사고‘는 ‘영사‘의 핵심이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 그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불필요해진 사실은 잊어버렸다가 그것이 다시 필요해졌을 때 망각 속에서 다시 끄집어내며, 객관적인 현실을 부정하는 한편으로 언제나 부정해 버린 현실을 고려하는 등의 일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중사고‘란 말을 사용할 때도 ‘이중사고‘를 해야 한다. 이 말을 사용하면 현실을 왜곡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여기에서 다시 ‘이중사고‘를 하면 바로 인정한 것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무한한 거짓말이 진실보다 언제나 한걸음 앞서가기 때문이다.”
—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겨울호랑이 2020-07-10 21:03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oren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상식을 가지고 말했고, 이를 바탕으로 지지를 받았던 이들의 행동이 그들의 말에 미치지 못해 실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한 편으로, 그나마 이들이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방향성에 대해 동감했기 때문이며, 그들이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주어진 조건에서 상대적으로 나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방향성에 비해 현실은 못 미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듭니다. 어쩌면 방향성에 대한 합의 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방향서에 대한 고민을 해야할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민주주의의 장점이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와 같다는데 있다 생각합니다. 앞에 쓰러지는 이가 있어도 바로 뒷열의 사람이 채우듯, 민주주의 제도 역시 어려운 현안에 대해 다른 이가 대신하면서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 여겨집니다. 같은 의미로, 소수의 정치인이 일탈이나 잘못된 일이 있어도 그것으로 시스템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팔랑크스가 나아가는 방향성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에 대한 고민은 필요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고민으로 방향성만 잘 합의된다면, 시스템에 따라 이에 맞는 인물들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수 있겠지요...

oren님께서 조지 오웰의 <1984> ‘이중사고‘로 좋은 말씀을 주셨습니다만, 저 역시 박시장의 피소 혐의가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 옵니다. 다만, 요즘 나오고 있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재판결과에서 볼 수 있듯 혐의만으로 죄를 특정할 수는 없기에, 쉽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아쉽게 여겨집니다... 참 답답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북다이제스터 2020-07-10 2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흔히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그래서 살인자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얘기를 하지 못합니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진심으로 할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맞을까요?
어려운 얘기인 것 같습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0-07-10 20:54   좋아요 2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야할 길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상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의 장벽에 막혀 이상에 미치지 못한 현실을 살고 있기에, 말과 행동이 다른 것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생각합니다. 비판을 한다면, 말과 행동의 다름이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는가의 여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을 가리기도 쉽지는 않습니다만...

나와같다면 2020-07-11 0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먹먹하고 안타까운 하루가 지나갔네요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런 질문이 머리 속에 가득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07-11 07:50   좋아요 3 | URL
저 역시 충격이 가시질 않네요...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일단은 그저 바라보고 일어나는 생각과 마음을 느껴 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백인종에게만 세계 헤게모니를 쥐어 주고 다른 인종, 특히 니그로 인종은 백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데 만족하거나 모든 것을 정복하려고 행진하기 전에 죽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암묵적인 그러나 명료한 현대 철학을 받아들인다. 이 철학은 바로 아프리카 노예 무역과 19세기의 유럽 확장이 낳은 산물이다.(p232)<니그로> 中 


  W. E. B. 듀보이스 (William Edward Burghardt Du Bois, 1868 ~ 1963)는 <니그로 The Negro>에서 흑인은 역사와 문화, 능력이 없다는 20세기 초반 미국사회의 편견이 잘못된 것임을 밝히면서 인종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저자인 듀보이스에 의하면 인종주의 편견의 기원은 제국주의 시대의 노예제도에서 비롯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서아프리의 베냉 지역에 존재했던 다호메이(Dahomey) 왕국이다. 


[지도] 19세기 다호메이 왕국(출처 : https://www.britannica.com/place/Dahomey-historical-kingdom-Africa)


 흑인에 반하는 현대인의 이른바 '본능적인' 편견은 무엇이라 말인가? (p139)... 우리는 피부색에 대한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편견의 원인을 신체나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을 현대 니그로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에서 찾아야 한다.(p141) <니그로> 中


  17세기 다호메이왕국의 번영은 노예무역의 활성화와 궤를 같이 한다.  다호메이 왕국은 지리적으로 베냉 협로라는 한계로 인해 국가 발전에 제약을 가지고 있었으나, 같은 시기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은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1664년까지 후추, 금, 상아가 기니 지역의 주된 무역품으로 다호메이 왕국이 무역에서 소외되었다면, 1672년 이후에는 노예가 새로움 무역품으로 떠오르면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게 된다. 이러한 다호메이 왕국의 노예무역에 대해서는 칼 폴라니(Karl Polanyi, 1908 ~ 1964)의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Dahomey and the Slave Trade: An Analysis of an Archaic Economy >의 내용을 따라가 보자.

 

 다호메이 사회를 커다란 긴장으로 몰아넣은 역사적 사건은 경제영역에서 벌어졌으며, 또 그 시작은 외부에서 비롯되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번창하기 시작하자 노예무역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는데, 이것이 다호메이에 바로 인접한 기니 해안을 강타하였던 것이다. 이 시간이 낳은 충격은 아주 독특하였다.(p61)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中


 플랜테이션 농장은 엄청난 이윤을 낳아주었고, 서인도제도는 왕실과 최고위 귀족들의 사적 재산이 되었다. 이제 이를 위해 노예를 조달하는 것은 '절대적 필요'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농장에서 거두어들여야 할 작물의 양은 엄청났으며, 이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노예노동이 꼭 필요했다... 다시 말하자면 국제경제에서의 변화가 큰 물결을 일으켰고, 이 물결이 대서양을 건너서 불과 20마일 길이로 펼쳐진 아프리카의 어느 해안 지역에 몰아닥친 것이다.(p63)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中


 칼 폴라니는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에서 지리적 어려움과 아프리카에 진출하기 시작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다호메이 왕국이 노예제도를 통해 축적된 부를 활용하는가를 보여준다. 노예무역과 인신공양으로 악명높은 다호메이 왕국에 다소 우호적인 칼 폴라니의 시각에 대해 비판점도 많지만, 이에 대해서는 책의 리뷰로 넘기 여기서는 간략하게 내용만 취하자. 다시 <니그로>로 돌아가서, 듀보이스는 노예확보를 위한 인간사냥이 가족과 국가의 약화라는 참혹한 결과가 아프리카에 주어졌음을 지적한다.


 18세기 초 강력한 다호메이 왕국이 건설되었고, 지독한 전제 국가가 되어 19세기 초에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비슷한 왕국인 아샨티는 1719년에 정복을 시작해서 노예무역과 함께 발전했다. 이렇듯 서아프리카에서 국가 건설이 도시 경제를 대신하기 시작했지만, 이런 국가는 전쟁을 기반으로 세워졌고 인간 상품을 사고팔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장려했다. 토착 산업은 변화하고 와해되었고 가족의 유대와 정부는 약해졌다.(p154) <니그로> 中


 아프리카 대륙에서 많은 이들이 서인도 제도로 끌려가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은 칼 마르크스(Karl Marx , 1818 ~ 1883)가 <자본론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konomie>에서 설명한 시초축적의 역사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아프리카의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서인도로 갈 수 밖에 없다는 모습은 또다른 형태의 인클로저(Enclosure)운동으로도 비춰진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애서 '사탕수수가 사람들을 쫓아낸다' 로.


[그림]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아프리카 인(출처 : https://www.africanexponent.com/post/10712-the-bitter-history-of-african-slaves-and-sugar-production)

 

 시초축적의 역사에서는, 자본가 계급의 형성에 지렛대로 기능한 모든 변혁들은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획기적인 것은, 많은 인간이 갑자기 그리고 폭력적으로 그들의 생존수단에서 분리되어 무일푼의 자유롭고 '의지할 곳 없는' 프롤레타리아들로 노동시장에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농업생산자인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은 전체 과정의 토대를 이룬다.(p981) <자본론 1-(하)> 中


 <자본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유럽 자본주의 발전 중 일정 부분은 아프리카 부의 강제이전이 될 것이다. 이와 함께 강제이주된 이들은 새로운 가족제도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들은 아프리카 전통의 제도 대신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 ~ 1895)가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에서 설명한 노예제의 산물로서의 '일부다처제'를 강요받는다. 아프리카 대륙의 수탈과 가족제도의 붕괴는 이들을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영화 <기생충>의 지하실로 안내한다.  


 일반적으로 아메리카 노예제도가 사회에 끼친 영향 가운데 가장 심각한 상황은 일부다처제의 니그로 가정을 새로운 형태의 일부다처제로 대체한 것이다. 니그로 가정은 이제 보호받지 못하고, 덜 효율적이며, 덜 문명화된 새로운 형태의 일부다처제로 대체되었다.(p187) <니그로> 中

 

 사실상 일부다처제는 명백히 노예제의 산물이었으며, 몇몇 예외적인 지위를 가진 자들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일부다처제는 부자와 귀한 신분의 특권이며 주로 여자 노예의 구입을 통해 충원된다. 인민 대중은 일부일처제의 생활을 한다.(p72)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6 -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 - > 中


 이외에도 듀보이스는 <니그로>에서 노예제도로부터 시작된 아프리카와 흑인의 수탈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음을 담담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듀보이스의 담담한 서술은 독자들에게 흑인이 무지한 존재라는 편견이 얼마나 잘못된 오해인지를 일깨운다.  <니그로>안에 담긴 메세지는 가볍지 않지만, 듀보이스는 무겁게 말하지 않는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말하듯 편안하게 읽히는 짧은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아프리카, 빈곤, 인종 문제의 많은 부분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니그로>는 좋은 사회과학 입문서라 생각된다. 


PS. 개인적으로 <니그로>에서 언급된 시초자본 문제와 관련해서, 실비아 페데리치 (Silvia Federici)의 <캘리번과 마녀 Caliban and the Witch>를 떠올리게 된다. 수탈의 대상을 아프리카인이 아닌 여성으로 대치시켜 노예제도 이후의 자본주의 역사를 바라본 것이 <캘리번과 마녀>라 여겨진다. 이는 노동 문제, 인종 문제, 종교 문제, 성 문제 등 많은 문제가 '평등 平等'이라는 주제의 서로 다른  현상(現象 phenomenon)이라는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인클로저가 농민들로부터 공유지를 박탈했던 것처럼 마녀사냥은 여성들로부터 신체를 박탈했다. 따라서 신체는 노동의 생산을 위한 기계로 전락하지 않게 막아 주던 모든 예방장치에서 ˝해방되었다˝(p272)... 노예제가 폐지된 상황에서도 부르주아의 레파토리에서는 마녀사냥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식민화와 기독교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장으로 인해 식민화된 사회의 신체에 획실히 이식되어 피식민 공동체 스스로 자신들의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박해를 실행하는 상황에 이르렀다.(p341) <캘리번과 마녀> 中


 그들은 오늘날 발전의 맨 앞자리에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리뿐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더 위대하게 만들고자 하는 이상을 위해 싸울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여성 해방, 세계 평화, 민주 정부, 부의 사회화, 인류애를 위하여.(p229) <니그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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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4: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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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6: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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