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사 1 - 한국인의 역사적 전개 한국경제사 1
이영훈 지음 / 일조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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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들은 지적 공백상태에서 서구의 학문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수입하였다. 지적으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 경험 자체가 빈약하고 단순하였다... 이같은 현실적 제약에 눌려 남한의 역사학자들은 알게 모르게 인간 사회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과정으로 그린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정립한 한국사상 韓國史像에 공감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24


  이영훈(李榮薰, 1951 ~)의 <한국경제사 1 : 한국인의 역사적 전개>는 저자 자신이 구분한 4개 시대 중 제1시대(기원전 3세기 ~ 기원후 7세기), 제2시대(8~14세기), 제3시대(15~19세기)의 3개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데, 이 시기의 변곡점들은 고전 출현, 삼국통일, 조선건국과 일본에 의한 강점(저자에 따르면 일본에 의한 근대문명 이식)이다. 한국경제사지만 이 책의 주된 분석 대상은 조선시대이며, <한국경제사 1>에서의 초점 중 하나는 노비제 국가 조선이다.


 새로운 연구는 14~17세기가 한국사에 있어서 노비제의 전성기임을 명확히 하였다. 그 이전의 삼국, 통일신라, 고려 시대에 노비의 인구 비중은 그리 크지 않으며, 아무래도 10% 미만이었다. 그에 비해 15~17세기의 노비는 전체 인구의 30~40%에 달하였다. 그리고 노비의 일부분은 세계사적으로 노예의 범주에 속하였다. 노비 인구의 팽창은 생산자 대중에 가해진 인격적 예속이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26


 저자는 15세기의 시대 변화에 주목한다. 앞선 시대인 고려시대 이전 사회의 특성이 공동체 중심 사회라면,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로 변화했고 그 과정에서 높은 조세(역)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이들이 노비로 전락하면서 시대적 단절이 야기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15세기는 커다란 전환기였다. 토지가 개인의 재산으로 바뀜에 따라 사회가 신분관계로 분열하였다. 그 이전의 신라~고려 시대는 농민, 수공업자의 생산활동, 국왕/귀족의 수조 收租활동, 사원을 중심으로 한 종교활동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에 기반을 둔 사회였다. 왕도에 집결한 귀족, 관료, 중앙군의 공동체가 지방의 군현공동체를 지배하는 체제였다. 그 공동체사회가 15세기에 이르러 각 사람이 양반, 상민, 노비라는 신분으로 구분되고 대립하는 신분제사회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앞서 강조한 대로 인구의 13~40%가 노비로 떨어졌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47


 그렇다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단절을 가져온 계기는 무엇인가. 저자는 '정호(丁號)'에서 그 차이를 찾는데, 고려시대의 정호 제도가 토지와 인구에 대한 역(役)이 부과되었다면, 조선시대의 역은 오로지 인구에 대한 부과라는 점에서 일종의 퇴행이 일어났다고 파악한다. 


 고려의 정호는 토지와 인구의 구조적 결합이었다. 그에 비해 15세기 초의 호는 토지와 무관한 순수한 인적 구성이었다. 전술한 대로 조선왕조는 양전을 행함에 있어서 토지를 5결의 규격으로 구획하고 거기에 천자문으로 정호 丁號를 달았다. 그 과정에서 8결 또는 17결을 표준적 규모로 했던 고려의 정호가 크게 해체되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48


 1468년, 보법을 시행한 지 4년 만에 세조가 사망하였다. 이후 양반관료들은 세조의 개혁을 하나씩 취소하거나 수정해 갔다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는 양반관료의 이해관계를 각인하는 형태로 변질되어 갔다. 1471년 토지 5결을 1정으로 간주하는 보법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취소되었다. 이로써 토지와 인구의 구조적 결합으로서 정호를 기초로 했던 고려왕조의 백성 지배체제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조선왕조는 개별 호에 대해 호가 보유한 토지와 무관하게 호의 인정 수를 기준으로 군인을 선발하는 순수 인신지배체제로 전환하였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56


 토지와 인구에 대한 역 부과가 아닌 인구에 대한 역 부과가 극심한 신분의 양극화를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토지를 고려하지 않은 역 부과는 대규모 토지, 농장을 소유한 계층에게 상대적으로 세부담을 경감시켜주었던 반면, 토지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과도한 부담을 안겨주게 된다. 특히, 역성(易姓)혁명과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과 같은 정치사건은 세조 이후 지방의 사림(士林)의 세력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양민들의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인적 교류는 왕조의 교체기를 맞아 더욱 활발해졌다. 역성혁명과 뒤이은 정치적 격변은 양반관료로서 실세한 많은 사람들을 농촌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처변 妻邊 등의 다양한 연고를 좇아 멀리 경상도와 전라도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들은 그 지역의 강세한 지방세력을 피해 주로 속현이나 향/부곡에 정착하였다. 그렇게 그 모습을 드러낸 농촌사회의 새로운 지배세력을 가리켜 보통 품관 品官이라 하였다... 세조 연간에 군대 편성에서 진관체제 鎭管體制가 성립함에 따라 중앙군의 위상이 격하되었다. 한성은 더 이상 고려의 개경과 같은 지배세력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67

 

  저자는 이러한 논의를 조선시대 초기로부터 한국사 전반으로 확장시켜 일본 강점 시대 이전 사회를 전근대적 노예사회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 뉴라이트 사관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다른 실증적 자료에 의한 반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에 대한 반론은 <한국경제사 1>내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 이전 '정호제도'를 토지와 인신에 대한 역부과임을 저자가 밝히고, 이것이 조선시대와 앞선 시대의 다른 점이라고 언급했음에도 한국사회에서 토지지배로 가지 않았다는 설명은 무엇인가. 만약 이것이 온전한 토지에 대한 과세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에도 토지와 건물에 과세되는 재산세와 인구에 대해 과세되는 주민세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렇게 토지지배와 무관한 인신지배는 이전의 왕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요컨대 한국사에서 지배계급의 생산자 대중에 대한 지배체제가 인신지배에서 토지지배로 이행한 적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생산자 대중이 노예에서 농노로 진화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역사의 진행은 14세기 이후 17세기까지 인격적 예속이 강화되는 역의 추세였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26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조선시대를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논지를 함께 제기한다. 납공노비를 노예로 볼 수 있는가하는 문제와 노예제 생산양식이 과연 지배적 생산양식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저자는 노예제로 단정할 수만은 없다는 점도 함께 제기한다.


 조선시대가 되어 전체 사회구성에 있어서 노예제 범주가 대폭 확장했음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노비 가운데는 주인가와 떨어져 자신의 가족과 토지를 보유한 납공노비의 범주가 있었다. 납공노비의 토지는 법적으로 그들의 소유였다. 납공노비는 그들의 토지에 부과된 조세와 공물을 조선왕조에 납부하였다. 그에 관한 한 납공노비는 일반 양인농민과 마찬가지로 공민이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88


 15~17세기 조선시대 노예제 생산양식인 가작 家作농업이 동시대의 지배적 생산양식이었을까. 이 같은 가설을 논박하기는 어렵지 않다.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생산양식은 조선왕조와 전부 佃夫와의 관계였다. 국가가 전국의 토지를 국전 國田으로 지배하고 일반 백성이 그 토지를 차경하면서 조세와 공물을 납부하는 관계야말로 동시대의 가장 규정적인 생산관계를 이루었다.  _ 이영훈, <한국경제사 1>, p389


 <한국경제사 1>에서는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에서 제기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보다 넓고 깊게 이루어진다. 좌파인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역사철학의 틀을 통해 극우 역사사상인 뉴라이트 역사관이 나오는 상황이 다소 역설적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역사사료에 충실하고자 한 실증분석은 책이 갖는 장점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제한적인 데이터에 대한 좁고 한정적인 해석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예를 들어, 세조 시대 이후 향촌에 정착한 양반들의 움직임을 단순하게 반(反)도시화, 근대화에 역행되는 움직임으로만 볼 수 있을까. 조카를 죽이고 숙부가 왕이 된 사건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들 사건은 지방 귀족에 의한 주민 착취의 의미를 결코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한 한계는 다른 자료를 통해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16세기 후반이면 농촌사회에서 이른바 사족 士族으로 불리는 양반신분의 범주가 뚜력하게 대두하였다. 그렇게 양인의 범주로부터 양반신분이 분리되면서 양역을 부담하는 일반 양인을 상민 常民으로 천시하는 신분감각이 발달하였다. 요컨대 조선왕조의 신분제는 초기의 양천제에서 점차 양반-상민의 반상제 班常制로 바뀌어 갔다 - P359

조선왕조는 소규모 가족경영을 지배체제의 기초로 삼은 농노제 내지 공납제 국가였다. 조선왕조의 지배세력으로서 양반관료는 대규모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였다. 조선왕조는 양반관료와 대립하면서 결탁하였다. 그 같은 지배연합은 토지에 대해서는 소유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은 몰인격적 지배체제를, 인구에 대해서는 공적 예속의 양인과 사적 예속의 노비를 구분하는 지배체제를 창출하였다.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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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 신론 - 개정판
윤내현 지음 / 만권당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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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은 오늘날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상류와 중류 및 난하의 하류 동부 연안에 있는 갈석산을 서쪽 경계로 하여 한반도 북부의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을 그 강역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조선의 서부 변경, 즉 난하의 하류 동부 연안에 있었던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이 서한 제국의 원조를 받아 고조선의 서부 영역을 침략, 잠식하고 끝내는 오늘날 요하로부터 멀지 않은 지역까지를 차지해 위만조선이 성립되었다. 그 후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오늘날 요하까지 차지해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게 되었다.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에도 고조선은 오늘날 요하 동쪽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고조선을 구성하고 있었던 연맹부족을 통어할 능력을 이미 상실하고 왕실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_ 윤내현, <한국 고대사 신론>, p443


  윤내현(尹乃鉉, 1939~ )의 <한국 고대사 신론 韓國 古代史 新論>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신화 속의 국가 고조선(古朝鮮) 역사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기한다. 우리에게 단군  왕검(檀君王儉)에 의해 설립되어, 한 무제(漢 武帝, BCE 156~87)가 보낸 군대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일대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후 이후 낙랑군이 고구려(高句麗)에 의해 복속된 것으로 알려진 고조선과 삼국시대 이전 시대의 역사. 이 역사에 대해 저자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한국 고대사 신론>에 실린 여러 논문을 통해 상세한 의문들과 이에 대한 학설을 제기한다. 고조선사에는 문헌 상의 기록 뿐 아니라 고고학적인 유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기본적인 흐름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 저자의 이러한 물음의 근간에는 명사(名詞) 문제가 자리한다. 고유명사와 보통명사의 문제.  


 이상과 같이 패수가 여러 강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그것이 원래 고유명사가 아니었고 일반적으로 강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에서 연원했기 때문이다... 강에 대한 언어의 어원이 같았을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고대에 고조선이 살던 지역 강들의 보통명사인 펴라, 피라, 벌라가 향찰(鄕札)식으로 기록됨으로써 후에 여러 강들이 패수라는 동일한 명칭으로 나타나게 되어 혼란을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결론을 말하면, 고조선의 서쪽 경계였던 패수는 오늘날 난하 또는 그 지류였는데 후에 위만조선의 성장, 한사군의 설치 등에 의해 한의 세력과 문화가 팽창함에 따라 고조선 지역에 있었던 여러 강들이 패수(浿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_ 윤내현, <한국 고대사 신론>, p99


 윤내현은 <한국 고대사 신론>을 통해 패수(浿水), 평양(平壤) 등의 위치 비정 시 지명에 대한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볼 것을 주문한다. 이를 거슬리는 해석은 마치 신라 향가 <처용가 處容歌>에서의 '서울'을 오늘날 서울, 한양 지역으로 비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서울의 의미가 수도(首都)이기에 보통명사의 관점에서 신라 시대의 서울과 고려시대의 서울, 조선시대의 서울이 달라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 이를 고려하지 않은 해석은 고대사를 미스터리로 빠뜨리고, 더 나쁘게는 신화(信話)의 세계, 증명되지 않은 무의식과 미신의 시대로 밀어넣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연구는 고조선을 신화의 세계에서 역사의 세계로 바라본 의미있는 학문적 성과라 여겨진다.


 한국 문헌에는 고조선의 도읍이 오늘날 평양이었던 것으로 흔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대 한국어에서 평양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서 '대읍' 또는 '장성'을 뜻했던 것으로서 그것은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평양은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서 굳이 오늘날 평양으로만 한정시켜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_ 윤내현, <한국 고대사 신론>, p194


 <한국 고대사 신론>에서 제기한 문제는 기본적으로 고대사에 대한 열린 시각을 요구한다. 수많은 사건들과 세월에 의해 뒤덮이고 소수의 유물과 기록에 대해 과거의 역사를 추정하는 고대사의 경우 현대 남겨진 유물만으로 역사를 끼워 맞추는 해석으로 한계가 있음을 저자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남겨진 유물은 분명 한 시대의 단면을 보여줄 수 있지만, 시대의 전반적인 흐름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지나친 실증주의(實證主義)적인 접근 방식이 갖는 한계 또한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평양 지역에서 중국식의 유적이 발굴되어 그것이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으로 보고되자, 고조선이 오늘날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위치했을 것으로 본 견해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평양지역에서 발견, 발굴된 유적을 면밀하게 검토해본 결과, 그것은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것은 동한의 광무제가 고구려의 배후를 친 후 설치했던 군사 지역의 유적인 것이다. _ 윤내현, <한국 고대사 신론>, p106


 윤내현의 <한국 고대사 신론>에서는 역사 특히 고대사를 바라볼 때 현재가 아닌 당시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당대인의 시각에서 과거의 사실이 복원되었을 때 비로소 오늘날의 해석이 가능하며, 진정한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윤내현의 <고조선 연구>, <한국 열국사 연구>의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고, 여기서는 큰 흐름만 잡도록 하자... 


 중국의 옛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서한(전한) 초까지는 요수가 오늘날 난하에 대한 호칭이었다. 그런데 서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한 후에는 요수가 오늘날 요하에 대한 명칭으로 이동했다. 다시 말하면 요수는 고대에 중국의 동북부 국경을 이루는 강에 대한 호칭으로서 서한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요수라는 강 이름도 동북쪽으로 이동을 했던 것이다. _ 윤내현, <한국 고대사 신론>, p142

중국의 상 왕국에는 국명과 동일한 상이라는 명칭의 읍이 있었고 서주 왕국에도 국명과 동일한 주라는 명칭을 사용한 종주와 성주가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고조선에도 국명과 같은 조선이라는 명칭의 지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낙랑군에 속해 있던 25개 현 가운데 하나였고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영역에 설치되었던 낙랑, 진번, 임둔의 3군 가운데 하나였으므로,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었던 조선의 크기는 위만조선 전체 면적의 75분의 1 정도의 좁은 지역이었던 것이다. - P134

고조선 국가 구조의 기층을 형성햇던 소읍은 일정한 지역의 정치적 중심이었던 진번, 임둔 등과 같은 대읍에 종속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지방의 대읍은 중앙의 대읍인 평양, 즉 왕검성에 종속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국가 구조는 소읍, 대읍, 평양(왕검성)의 순서로 읍이 누층적 관계를 형성한 읍제국가였다. 읍의 거주인은 혈연관계에 기초한 집단이었으므로 읍의 누층적 관계는 부족의 층서관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 P232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멸망은 한국 고대에 있어서 읍제국가의 붕괴와 열국시대의 개시를 가져왔으므로 한국사의 범주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사의 주류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며, 한국사의 주류를 고조선으로부터 열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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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09-30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열하일기를 읽을 때나 사기를 읽을 때 한사군, 패수 등등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답답하더라구요. 분단 상태라 북쪽을 발굴하기 힘든 것도 짜증나고, 중국이 유적지 발굴하고는 폐쇄해서 비공개하는 것도 답답합니다. 일본은 자꾸 한국 역사를 축소하려고 하고 말이죠. 비전문가이고 잘 모르는 저도 답답한데 전공자 분들이나 학계에 계신 분들은 얼마나 답답할까요...

겨울호랑이 2023-09-30 23:29   좋아요 2 | URL
역사를 바라보는 기준이 민족과 국가가 된다면, 아무래도 이들 개념의 기원인 근대 민족주의와 역사의 관계가 밀접해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사료가 되는 사건의 기록, 유물 등 자료와 이에 대한 해석이 역사학이라는 학문을 이루는 두 줄기라고 볼 때, 특히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근현대사의 얽힌 국가들의 이해가 앞선 시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네요... 치밀한 연구와 학자의 양심이 언젠가는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밝혀주리라 기대해 봅니다.. ^^:)

Redman 2023-10-01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선 윤내현의 주장에 대해 먗 가지 궁금증을 적어봅니다
1. 글에 적어준 윤내현의 주장은 얼마나 당대 기록과 자료의 지지를 받는지 궁금합니다. 삐딱한 시선에서 보면, ˝남겨진 유물만으로 역사를 끼워 맞추는 해석˝을 윤내현도 저지르지 않았나 싶고, 자신의 해석이 그다지 역사적 증거에 충실하지 않은 걸 본인도 아니 자신의 논리적 비약과 억지스러운 해석에 조금이나마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런 비판을 한 것 같다는 의심이 듭니다. 사실 그의 방법론과 논지 전개 방식 자체가 전문학자라고 보기에는 너무 허술하기도 하고요

2. 어떻게 고대인의 시각을 복원할 수 있을까요? 플라톤 철학을 전공한 이상인 교수님도 고대 그리스 철학을 고대 그리스인의 눈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고대 그리스의 눈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쪽으로 의견을 바꿨습니다. 윤내현은 기록이 고대 그리스보다도 현저히 적은 고조선은 당대인의 시각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고대인의 시각에서 볼 수 있으며, 고대인의 시각에서 과거를 복원한다 해도 그것이 정말 당대인의 시각과 합치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당대인의 시각으로 본다는 것에 지나치게 매달리면, 역사 서술이라는 행위 자체에 내포된 현재성을 간과하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10-02 07:58   좋아요 0 | URL
말씀주신 사항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선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윤내현의 주장이 다른 학설과 차이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타당성과 신뢰성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닌 제가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저자의 여러 논문 내용이 어느 정도 정리된 <한국고대사신론> <고조선 연구(상)> <고조선연구(하)> <한국 열국사 연구>에 수백 페이지에 걸쳐 저자의 주장과 근거가 있고, 학계에서 이와 관련한 치열한 논쟁이 있는 현실에서 비전문가인 일반독자의 타당성과 신뢰성에 대한 평가는 큰 의미가 없다 생각됩니다. 차차 다른 책들도 리뷰로 정리를 할 계획입니다만, 불과 몇 페이지의 리뷰에 저자의 주장과 근거를 다 정리할 수는 없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자의 연구에 대한 평가는 부족한 리뷰보다 원문에 근거해서 내려주시는 편이 더 좋을 듯 합니다.

2. 역사를 거칠게 분류하면 과거의 사실과 이에 대한 해석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중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일어나는 부분은 해석 부분이겠지요.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어떤 실을 통해 꿸 것인가가 사실과 해석의 문제라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한국 고대사의 문제는 해석의 문제 이전의 사실의 문제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이상인 교수님의 철학 문제는 해석의 문제라 여겨지고요. 제가 리뷰에서 언급한 부분에서 고대인의 시각에서 보자는 것은 일례로, ‘평양‘, ‘패수‘ 그리고 ‘낙랑‘의 명사들을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생각한 고대인들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대의 지명 변천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에 대한 근거로 해당 단어가 여러 지명에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론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 있겠지요. 이처럼 한국 고대사의 문제는 해석 이전의 사실에 대한 논의라는데 철학과 차이가 있다 여겨집니다. 플라톤이 적도(또는 중용)의 개념을 설명할 때 고대 그리스에서 포도주에 적정량을 넣어 희석시키는 것으로 비유해서 설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고대인의 생활양식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깨어진 조각이 없는 부분은 부득이하게 현대의 사고로 연결할 수 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완벽한 사상의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과거의 한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저는 가능하다면 사건이 발생한 당대의 상황에 대한 최대한의 고려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상이 제가 리뷰에서 언급한 사건을 바라보는 고대인의 시각에 대한 의견이었습니다... 제가 드린 답변이 Redman님께 충분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섣부른 제 의견이 저자의 진의를 왜곡시키고 Redman님께 혼란을 드리지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해당 부분에 대해 의문을 갖고 저자의 책을 직접 읽으신다면 많은 의문이 해소되리라 생각하며 답을 마칩니다. 함께 생각해 볼 문제를 제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Redman 2023-10-02 10:30   좋아요 1 | URL
상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 3.1운동 100주년 기념 연구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박경순 지음 / 굿플러스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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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고 긴장되게 돌아갔다. 일제는 사회주의 소련의 위력이 강화되고 피압박 민중들의 혁명투쟁이 확대 발전되고 있는데 놀라, 그것을 말살하려고 갖은 악행을 다 벌였다. 특히 세계적 공황으로 인한 심각한 내부 정치/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를 식민지 조선에 대한 착취와 수탈의 강화, 대륙 침략의 길에서 찾았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16


 박경순은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에서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민족주의자 중심의 1920년대 항일투쟁의 한계를 지적한다. 저자의 관점에 의하면 이들 민족주의자들은 비록 1920년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의 성과를 낼 수 있었지만, 지속적인 투쟁을 이어가지 못하고 소련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경신참변(庚申慘變) 등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탄압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노선을 내걸고 항일무장투쟁에 떨쳐나섰던 민족주의운동세력들 역시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조선 민중의 혁명적 힘을 믿지 못하고, 민중 위에 군림하는 자산가계급의 군대에 불과했다. 민족해방운동을 승리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올바른 지도사상도 없었으며, 주동적 투쟁방략도 갖추지 못했다. 적극적인 투쟁을 회피하였고, 특히 조선 민중들과 깊숙이 결합하여 있지 못했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5


 지속적으로 항쟁을 이끌어갈 지도자의 부재, 구체적인 전술과 전략의 부재, 현지인들과의 긴밀한 유대관계 유지 실패가 저자가 바라보는 1920년대 항일투쟁의 실패 이유다. 대부분의 항일 세력들이 소멸한 이후,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을 저자는 김일성(金日成, 1912~1994)에서 찾는다. 그렇다면,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어떤 점에서 달랐는가? 저자에 의하면 이는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한계점 극복으로 요약된다.


 참다운 민족해방의 길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대중투쟁은 그 자체만으로 혁명의 길로 나가지 않는다. 민족해방투쟁의 승리를 이룩하고 민족적 독립과 민중해방의 새 세상을 달성할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올바른 지도이념과 지도노선이 있어야 하고, 혁명 투쟁을 올바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정치적 참모부가 있어야 한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1


 저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이 단순한 일제에 대한 증오나 미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개혁의 움직임으로 파악한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이다. 아비지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의 사상이 항일 투쟁의 방향을 설정했다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현실적 적용에 대한 고민은 식민지에서의 반(反)제국주의 투쟁방식을 결정짓게 만들었다.


 김일성은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 상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를 독자적인 신념과 판단에 기초해서 결정하고, 우리의 구체적 현실과 실정에 맞게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사대와 교조를 반대하고 어디까지나 자주적 관점, 창조적 태도에 기초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길을 걸어 나갔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78


 '지원의 사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김형직 선생의 혁명사상을 가리킨다. 김형직 선생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획득한 자신의 이상과 염원, 사상과 정신을 지원(志遠) 이라는 두 글자에 담았다... '지원의 사상'은 민중중시사상, 무장투쟁에 관한 사상, 숭고한 혁명정신을 정수로 하고 있다(p39)... '지원의 사상'은 결국 총칼을 들고 민중의 힘, 민족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달성할 데에 대한 원대한 사상이었으며, 새세대청년지도자 김성주는 이 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항일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사상, 새로운 길을 열어나갔다. 그리고 그 첫 출발점이 바로 타도제국주의 동맹의 결성이었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40


 노동계급의 계급적 해방을 민족적 해방에 앞세우고 종주국 노동계급의 투쟁을 식민지 나라의 민족해방보다 중시하는 것은 당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공인된 노선이었다. 이러한 기존 노선이 갖고 있는 문제점과 한계를 김성주 학생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또한 러시아와는 달리 낙후한 반봉건국가인 조선과 같은 식민지 나라들에서 무산혁명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역시 중요한 연구주제였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45


 이러한 사상적 투쟁과 함께 김일성은 농촌혁명화 사업을 통해 대중과의 결합을 보다 공공히한다. 농촌의 여러 마을을 하나로 묶고 결집된 세력을 바탕으로 춘황투쟁(春荒鬪爭), 추수투쟁(秋收鬪爭)을 통해 농민들의 이익을 지키고,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가면서 만주 지역에서의 지지기반을 다져나갔다.


 무기획득 투쟁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는 사업도 역시 매우 중시되었다. 이 사업의 핵심 고리는 농촌마을들을 혁명화하는 것이었다. 농촌마을들을 혁명화하는 것은 항일무장투쟁의 군중적 토대를 구축하는데서 관건이 되는 핵심 사업이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항일무장투쟁은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기초해서만 발선해 나갈 수 있다.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농촌혁명화사업은 그만큼 중요했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134


  박경순의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에서는 만주지역에서의 1930년대 항일투쟁이 급격히 소멸한 시점에 김일성의 독립운동의 의의에 대해 조망한다. 지속적인 투쟁을 위한 사상적 기반 마련과 농촌 지역에 대한 거점 확보를 통한 유격대 활동. 본문에 언급된 내용은 사회주의 세력의 항일투쟁을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한다.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대한 한국사회의 시선을 생각하면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분명 나름의 의의가 있지만, 동시에 여러 한계점도 생각하게 된다.


 본문에서 저자는 김일성의 투쟁에 여러 의미를 부여하지만, 객관적으로 이전 1920년대의 무장투쟁과는 여러 면에서 소규모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일제의 만주 침략에 큰 장애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한 병력이 1932년 만주국(滿洲國)을 설립케 한 일본 관동군(關東軍)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까. 이런 점에서 본다면 본문에 언급된 여러 전과는 1937년 보천보 전투(普天堡 戰鬪)에서 드러나듯 영향력면에서 다소 과장되어 보인다.


 김일성부대는 왕덕림과의 교섭을 단념하고 노정을 바꿔 최종 목적지인 왕청지구로 향했다. 왕청지구로 향할 당시 김일성부대에는 18명밖에 남지 않았다. 40명으로 출발했던 김일성부대가 왜 18명밖에 남지 않았을까?(p151)... 김일성은 대오 16명을 이끌고 1933년 2월 요영구를 거쳐 마촌으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소왕청 마촌에 혁명사령부를 정하고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민족해방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152


 다른 한 편으로,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연구의 초점이 김일성에 맞춰져 있다는 것또한 한계로 생각된다. 아무리 항일무장세력이 몰락했다고 하지만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 항일투쟁은 김일성 등 사회주의 세력밖에는 없었을까? 대략적으로 언급하더라도 지청천(池靑天, 1888~1957)의 대한독립군, 양세봉(梁世奉, 1896~1934)의 조선혁명군 또한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활동한 무장투쟁세력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에만 초점을 맞춘 점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보다는 <1930년대 사회주의 세력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김일성을 중심으로>가 보다 정확한 내용을 표시하는 것이 아닐까. 2권을 읽기 전 잠시 연구의 한계점에 정리해 본다.


 김일성 부대는 광대한 지역에서 적에 대한 습격전투를 벌여 적을 소탕하고, 적의 공격을 성과적으로 격퇴했다. 일제가 축소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35년 한 해에만 무려 1,196회의 대소 전투를 벌여 일제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조선인민혁명군 북만원정대는 단순히 전투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전투 못지않게 북만에 살고 있는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가 그들을 의식화 조직화함으로서 민족해방혁명의 대중적 지반을 확대하는 것 역시 중심적인 목표였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66 


 만주지역에서 독립투쟁은 1932년부터 1936년까지 민생단 사건(民生團事件)이라는 대대적인 학살 사건으로 고비를 맞이한다. 이 시기 천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밀정으로 몰려 처형되면서 조중 연합은 약화되었다. 이렇게 갈라진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어떻게 다시 극적으로 항일연합전선을 수립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2>에서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일제가 퍼뜨린 민생단침투설은 당과 대중단체, 군대의 모든 책임적 자리를 자파일색으로 갈아치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패권주의와 출세욕에 불을 붙여 주는 인화물질 같은 것이었으며, 그들이 민생단의 이름을 걸고 올리는 천정부지의 숙반실적은 유격구의 혁명역량을 모조리 교살해 치우려는 모략가들에게 끝없는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38

3.1운동의 교훈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상층은 더 이상 항일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계급적 제한성은 일본의 식민지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본의 통치 질서를 인정하고 그 틀 안에서 자신들의 협소한 계급적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약간의 양보만을 꿈꾸었다. 이러한 계급적 제한성으로 인해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개량주의자로 굴러 떨어지거나 일제와 타협하면서 ‘민족적 자치‘를 부르짖는 민족배신자로 전락했다. - P25

길회선 철도부설 반대투쟁은 새세대청년지도자 김성주의 지도하에서 조선민중이 중국 민중들과 함께 빛나는 승리를 이룩한 첫 대규모 반일대중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중국 동북침략의 야망을 실현해보려고 갖은 흉계를 꾸며오던 일제침략자들과 그와 야합한 중국반동군벌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그들을 놀랍게 한 것은 조중 민중의 단결이었다. - P60

조선의 혁명가들은 카륜회의 이후 항일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하기 휘한 준비사업을 꾸준히 벌여왔다. 그 결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충분하게 갖추어 놓았다. 오랫동안 준비 끝에 항일무장투쟁의 믿음직한 핵심공간들이 튼튼히 꾸려지고, 정치 군사적 경험이 축적되었으며, 대중적 지반이 구축되고, 활동의 중심지대도 마련됐다. 특히 9.18 직후 있었던 대중적인 추수투쟁의 승리로 대중들의 투쟁적 기세도 매우 높아졌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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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강만길 저작집 1
강만길 지음 / 창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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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경제계의 뚜렷한 변화 발전은 역시 상업 분야에서 두드러지며, 이와 같은 17세기 상업계의 현저한 발전이 곧 장차 도고상업을 일어나게 할 바탕이 된 것이라 이해된다. 17세기 후반기 상업계의 발전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첫째 대외국무역의 발달, 둘째 금속화폐의 전국적 유통, 셋째 국내 상업계에 있어서의 상업인구의 현저한 증가 등이다. 17세기의 대외무역에서 크게 진전을 보인 것은 역시 대청(對淸)무역이었고, 그것이 종래의 개시무역(開市貿易) 중심에서 후시무역(後市貿易) 중심으로 성격이 바뀐 점에 특징이 있다 할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07


 강만길(姜萬吉, 1933 ~ )은 <조선 후가 상업자본의 발달>에서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상업부문에서의 급격한 변화에 주목한다. 이전시대 벽란도(碧瀾渡)를 중심으로 활발할 해외활동을 펼치며 고려시대의 중심지였던 개경(開京)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외무역을 엄격히 제한한 정책의 변화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물론, 조선시대의 쇄국정책이 고려세력의 탄압만을 위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대외무역을 정부에서 주도하고, 관련 이권을 한성부(漢城府) 일대의 상인들이 독점하는 형태의 조선 전기 상업은 국가독점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임진(壬辰)과 병자(丙子) 양 난을 겪으며, 중앙정부 권위의 쇠퇴와 대외무역에 사(私)무역의 비중이 커지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조선왕조 초기는 민간상인의 외국무역이 일절 금지됨으로써 고려시대의 활발하였던 외국무역을 주도하던 개성상인에게 타격을 주었고, 관부수요품(官府需要品) 및 대중국관무품(對中國官貿品)의 조달권을 비롯한 각종 상업상의 특권을 서울시전상인이 장악함으로써 개성상인은 고려시대의 정부 조달상(調達商)의 위치를 상실하여 곤경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개성상인은 왕조교체로 입은 타격을 극복하기 위한 활로를 국내의 행상로(行商路) 개척에서 구하여 성공할 수 있었으며, 왕조후기에 국내외 상업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자 의주(義州)와 동래(東萊)를 연결하는 외국무역을 주도하는 한편, 행상활동을 통하여 확보한 상업조직망을 이용하여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하는 도고상업을 전개하여 자본집적에 성공해갔다. 개성상인 자본의 성장과정은 한편으로 서울시전상인 및 공인 등 특권상인(特權商人)과의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9


 이러한 상황에 더해 상평통보(常平通寶)로 대표되는 화폐 유통이 촉진되면서, 중개무역을 담당하던 상인들은 화폐를 통해 대규모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를 기반으로 상업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지배력 강화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마치, 근대 서양에서 금융자본에 의한 산업자본 지배를 떠올리게 하는 이같은 모습 속에서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얼핏 발견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맹아(萌芽)'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이러한 그림자는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설명에 따르면 3층 구조 중 2층 시장경제의 발전 위에 서 있는 최상위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보다는 역(逆)피라미드 구조의 조선 후기 상업구조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엽에 걸쳐 위정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던 전황(錢荒) 문제는 곧 이 시기에 있어서의 금속화폐의 급격한 유통으로 빚어진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였다. 17세기 말 이후 금속화폐의 유통이 일반화해가고, 특히 그것이 농촌사회에 침투해감으로써 그곳에 심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p214)... 요컨대 금속화폐의 전국적 유통이 이루어져가던 초기에는 그것 때문에 부의 편중화가 촉진되었고 나아가서 나아가서 상업자본과 고리대자본의 집적이 이루어졌으며, 이와 같은 경제적 변동이 곧 조선후가 상업계에 도고상업을 발달하게 한 바탕이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15


  저자는<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에서 18세기 이후 조선상업을 사상(私商)의 성장과 함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둘러싼 사상도고(私商都賈)와 관상도고(官商都賈)의 대립 속에서 각각 자본의 축적과 경쟁의 모습을 발견하지만, 시작부터 중앙집권적인 국가였던 조선과 봉건제라는 지방분권의 전통을 가진 서양과는 시장경제의 출발점부터 달랐던 점을 먼저 고려해야 하지 않았을까.


 금난전권(禁亂廛權)은 시전이 가진 본래적인 특권적 도고상업을 벌임으로써 시전상인의 자본규모가 확대되어갔고, 이 때문에 도시 상업계 내에서의 상인과 수공업자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낳게 된 것이었으니, 상업자본에 의한 수공업자, 즉 공장(工匠)의 압박 내지 지배 현상이 발전하였던 것이다(p20)... 시장이 공장의 원료와 제품을 매점하는 수단으로는 정부가 허가하는 금난전권이 최대한으로 이용되었고, 따라서 이 시기의 시전과 공장 사이에는 특정 상품, 즉 원료와 가공품의 전매권을 둘러싼 치열한 분규가 일어나고 있었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1


 18세기 이후부터는 서울시전상인과 공인(貢人) 등 특권상인층의 도고상업체제에 강력히 저항하면서 사상인층의 도고상업이 성장해가고 있었는데, 개성상인은 국내 상업계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사상도고(私商都賈)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상인층의 하나였으며, 또한 이와 같은 도고상업을 통하여 상업자본은 집적되어갔던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49


 중세 왕-제후 간의 느슨한 (수평관계에 가까운) 수직관계에서 제후들은 지역상인들을 육성하고 그들과의 결탁이 필요했던 유럽과는 달리, 고려시대 이후 수백 년 동안 중앙의 통제를 받았던 조선시대에서 상업의 역사는'경쟁에서 독점'으로 가면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이 아니라, 독점권을 두고 벌이는 정치력의 다툼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해운의 경강상인과 육상의 개경상인과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만상(灣商)과 동래상인(東萊商人)은 하나의 독점권 또는 네트워크 권력으로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새로운 패권세력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실체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경강상인의 미곡매점상업은 서울 시내 양곡의 가장 중요한 공급원인 강상미를 매점하고, 서울 시내의 곡가를 앙등시킴으로써 큰 이익을 얻는 방법이 주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지방에 흉년이 들어 미귀(米貴) 상태가 되면, 그들이 이미 비축해두었던 강상미 혹은 공가미 등을 지방으로 운반 판매하여 취리(取利)하기도 하였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06


 이 시기 개성상인 개인의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의 종류와 그 수입량을 짐막할 수 있지만, 한편 중국무역에 종사하던 개성상인이 '홍경래란'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던 사정도 아울러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개성인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 반이조성(反李朝性)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본성장도와 그것에 따르는 정치적 관심도 등이 바탕이 된 것이라 할 수 있겠고, 또한 조선왕조의 중앙정부 및 그것과 결탁되어 있는 서울시전에 대하여 항상 대립된 위치에 있던 그들이 반중앙정부군, 즉 홍경래군과 결탁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55


 개성상인과 의주상인의 관계, 개성상인과 동래상인의 관계로 미루어보면, 개성상인은 국내의 각 상품생산지를 그 조직적인 상업망을 통하여 파악하는 한편, 의주상인과 동래상인을 조종하여 대중국무역과 대일본무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 두 외국무역을 연결시킴으로써 국제간의 중개무역을 전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59


 이처럼 조선 후기 상업에 있었던 일련의 변화를 정치의 관점에서 해석했을 때 조선 후기 농업부문에서의 대규모 유민의 증가와 몰락 양반의 증가가 노동력 공급의 증가와 함께 생산성의 증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소상인들의 활동에는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는 현상과 충돌없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영훈(李榮薰, 1951 ~ )의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이러한 점을 파고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이에 대해서는 향후 책의 리뷰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하고 일단 미루자.


 대규모 정기시(定期市, fair)의 형성을 통해 사람과 물자가 교류되고, 이를 바탕으로 도시가 발달하며 산업의 발달로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점차 독점화되는 과정으로 진행된 유럽과는 달리, 경제적 중심지와 정치적 중심지가 일치되는 고려시대 이래 우리의 특수성은 권력투쟁적 경쟁의 모습을 띄었고,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기 위해 집중화의 양태를 띄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점에서 조선 후기 상업의 변화를 끊임없는 권력 분화를 통해 성장한 서양의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응시키려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생각건대, 이 시기는 분산되어 있던 소생산자 중심의 생산계에 도고상업(都賈商業) 등으로 가치액이 증대된 상업자본이 침투하여 채무관계와 생산자재의 대여관계 및 합자관계 등을 통하여 점차 소생산자층을 예속시킴으로써 임금노동자화하고 있던 시기였다. 또 한편 주로 자연품만을 매매하던 상인이 상품경제의 발달, 자본규모의 확대, 도시의 발달 등으로 가공품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그것을 스스로 제조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제조와 판매를 겸하고 있던 소생산자층을 흡수하고, 대상인의 예하에서 분산된 소생산자로부터의 상품수집자 혹은 대상인 상품의 소비자에의 산매자(散賣者)의 위치에 있던 소상인층까지도 이제 점차 직접생산자로 전환시키면서 대상인에 대한 예속도를 높여가던 시기였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56


 일반적으로 봉건사회 말기와 근대사회 초기의 상업계는 한때 자기모순적 상황 속에 빠지게 된다. 즉 이 시기에는 농촌 중심의 소생산지와 도시의 교역이 활발해지고 또 대외무역도 폭넓게 이루어져서 상업계 전반에서 현저한 발전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업계의 발전은 한편으로 부등가(不等價) 교환의 소지를 무너뜨리며 개별자본 간의 심한 경쟁을 유발하여 이 시기의 상업은 양도 이윤에만 의존하는 차원에서 탈피하지 않는 이상, 그것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 자체의 기반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여건 밑에서 상업자본은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그것에 일정한 이익을 제공하는 대신 상업특권을 획득하며, 이 특권을 무기로 하여 소상품생산자를 시장으로부터 차단시키는 것이었으니, 시전 설치 지역에 있어서의 금난전권의 가혹한 적용이 그것이었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23


 비록, 조선 후기 상업의 모습에서 자본주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겠지만, 이러한 변화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라 여겨진다. 홍경래의 난(洪景來亂, 1811~1812)에 개성상인의 개입에서 보듯, 조선 후기에 일어난 수많은 민란의 배후에는 이들 개성상인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와 함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확산되던 천주교 세력과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동학의 세력 확산에도 관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의 경우 오랜 기간 전국을 떠돌며 장사를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추측이 전혀 근거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은 자본의 축적을 통해 '자본의 시대'가 아닌 '혁명의 시대'를 위한 준비였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근대(Moden)'이라고 부르는 시대에서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민혁명 등의 요소가 순차적으로 등장해서 작동해야한다는 역사적 필연주의에서 벗어나는 시각을 가진다면, 자본의 축적 대신 새로운 사상의 제시를 통한 계몽시대의 구현을 위한 자생적 근대화 노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를 검증하기 위한 연구는 전문가들에 의해 수행되어야겠고, 평범한 일반 독자의 한 의견이라 무게감있는 주장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꽃피우는 것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리뷰를 갈무리한다...


 봉건사회 말엽의 상업부활기 및 상업자본 집적기에는 상인자본이 수공업자와 소비자 대중 사이를 격리시키고 그사이에 스스로의 위치를 확보하며 나아가서 수공업자를 지배하는 것이었지만, 서울시전의 경우 공장과 소비자를 격리시키는 방편을 금난전권에 의한 공장 원료의 매점(買占)에서 구하고 있다. 금난전권은 일반적으로 '어용(御用)시전이 가진 본래적인 전매(專賣)특권'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그것은 왕조후기의 상업발전을 배경으로 한 관상도고(官商都賈)의 자본집적의 방편으로서의 특권적 매점상업권(買占商業權)이라는 데서 그 경제사적 의미를 구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시전상인이 공장과 도시소비자 사이를 격리시키는 방편으로서 금난전특권을 이용하고 있음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76


 유교사회로서의 조선왕조 사회는 근본적으로 상업에 대한 말업관(내지 천업관(觀)이 고정관념화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해소하고 상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또 종래 전통사회체제 내에서의 천민적(賤民的)이고  유리민적(流離民的)인 상인층에 대신하여 근대적 상인인으로서의  자질 높은 새로운 상인층의 형성을 위해서는 몰락양반층의상업계 투신이 바랄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60

18세기 이후 개성상인이 인삼의 재배와 홍삼 가공업을 경영하게 되는데, 이것은 외국무역과 국내의 도고상업을 통하여 형성 성장한 개성 상인 자본이 생산부문에 침투해가는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경강상인 자본의 조선도고 경영과 함께 문호개방 이전 조선사회 토착자본의 경제사적 수준과 그 존재양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P19

조선왕조 상업사상(商業史上)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한마디로 도고상업시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7세기 이후의 상업, 즉 우리가 ‘상업부흥기‘라 생각하고자 하는 시기 이후의 상업은, 관상이라 지칭할 수 있는 상인이나 사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상인의 경우를 막론하고, 당시의 사람들이 도고상업이라 부르던 매점상업 형태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 P22

유수원의 이론에 따르면, 비시전계 상인의 활동을 철저히 억제하고 시전상인의 독점매매권을 확보하되, 일물일전 원칙을 지양하여 동종상품을 매매하는 몇 개의 시전을 두고 그들 사이의 자유로운 경쟁을 인정함으로써 소비자와 생산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된 것이며, 동종시전들이 결탁해 그 독점적 지위를 유지 강화하기 위하여 고율가격(高率價格)의 확보 또는 가격의 부당한 인상을 통해 일으키는 폐단은 아직 고려되고 있지 않으며, 또 시전의 지나친 금난전권 행사 때문에 소생산자층의 생산이 위축되고 도시 소상인층의 활로가 막히는 문제는 중요시되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 P46

요컨대, 조선왕조의 초기부터 곡물운반 분야에 있어서의 사선 운반이 활발히 발달하였고, 특히 왕조의 후기로 넘어오면서 경강 사선에 의한 곡물운수업은 더욱 활발하였다. 17~18세기 이후에 이르러서 경강선인은 삼남지방의 정부 세곡 및 관료귀족층의 소작료 운반의 대부분을 청부하였고, 이로써 그들은 실질적으로 전국에서 가장 대규모적인 운수업자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 P96

요컨대, 조선왕조 후기에 있어서 개성이 인삼의 인공 재배와 그것의 홍삼으로의 가공업의 중심지가 된 것은, 그곳의 토양과 기후가 인삼재배에 적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인삼이 인공으로 재배되기 전부터 개성상인들이 인삼의 국내외 상업의 주도권을 가지고 그것으로 상업자본을 집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개성상인이 인삼무역과 도고상업을 통하여 집적한 자본이 인삼의 재배와 가공업에 투입된 것이었다. - P171

조선후기 사회의 상업사적 특징은, 이 시기에 매점상업, 특권상업 등이 발달하고 그것을 통하여 상업자본이 집적되며, 집적된 상업자본이 생산부문에 침투하여 그것을 지배해가는 점에 있지만, 시전상업계에 있어서도 특권상업체제가 발달하고 그 때문에 시전자본이 증대하였으며 그 결과 시전자본이 원료 매점, 상품 매점, 공장 고용 등을 통하여 수공업자들을 압박 내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개 18세기 후반기부터는 이와 같은 시전상업계의 특권체제가 해소되어가는 반도고(反都賈)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으니, 이 반도고 세력의 중요한 요인의 하나 속에는 도시 수공업자의 저항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 P201

도시 내의 일반 상인이 도고권에 저촉받지 않고 자유로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하는 정책, 즉 통공정책의 실시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791년(정조 15)의 ‘신해통공(辛亥通共)‘이다. 신해통공의 주창자는 당시의 좌의정 채제공이었다. 그는 시전도고로 인한 폐단으로 첫째 모든 일상생필품의 전매화로 인한 소상품생산자, 소상인층 및 소비자층의 피해, 둘째 극심한 물가고, 셋째 유통질서의 문란 등을 들고, 이것이 모두 도고를 금하면 해소될 것이라 하고, 30년 이내에 설치된 시전을 폐지하고 육의전 이외 시전의 도고권도 폐지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 문제는 정부에서 신중한 토의를 거듭한 후 그대로 채택되었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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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16 2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역사책 읽기는 전문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어제 서촌 갔다가 경복궁 옆에 있는 역사책방 들렀었어요. 갤러리 ‘라‘도 옆에 있어요. 갑자기 생각나네요.

겨울호랑이 2022-08-16 23:25   좋아요 2 | URL
에고 과찬이십니다... 그저 여러 생각들을 해보려 하는 편입니다만, 많이 부족합니다... ㅜㅜ 경복궁 근처에 역사책방이 있군요. 근처에 갈 일 있으면 한 번 가봐야겠습니다. 그레이스님 좋은 곳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유교사회로서의 조선왕조 사회는 근본적으로 상업에 대한 말업관(내지 천업관(觀)이 고정관념화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해소하고 상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또 종래 전통사회체제 내에서의 천민적(賤民的)이고  유리민적인 상인층에 대신하여 근대적 상인인으로서의  자질 높은 새로운 상인층의 형성을 위해서는 몰락양반층의상업계 투신이 바랄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 P260

전통사회 해체기 및 근대사회로의 이행기로서의 조선후기 사회의 지방상업계가 당면한 문제는 상설시장의 발달과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상업도시의 형성 문제였다.  - P260

이와 같이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이 제시하고 전망한 당시 상업계의당면 문제는 그 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요청되는 문제들이었던 한편, 그것이 모두 당시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었다는 점이 아울러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연구작업이 도출한 또 하나의 결론은 앞에서 말한 실학자들이 제시하고 전망한 이 시기 상업계의 문제점 가운데 실제로 상업자본이 집적되었고, 나아가서 그 상업자본이 생산부문에 침투하며 그것을 지배해가고 있었던 사실이다. - P261

이리하여 시전상인 자본 역시 그 매점적이고 관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선후기에 형성된 최대 규모의 토착자본으로 성장하여 생산부문에 침투, 이를  지배해갔으나 개항 후의 자본주의 상품의 공세앞에 심한 타격을 받고 침체, 몰락해갔다. 그러나 한편 개항 이후에 이루어진 근대적 생산기구 속에 흡수되어 산업자본으로 전화(轉化)해가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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