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아닌 홍범도(洪範圖 , 1868~1943)장군에 대한 후대의 사상검증과 그 결과로 육사에서 흉상이 철거된다는 어이없는 결정이 만만치 않은 역풍을 가져온 듯하다. 흉상 철거의 근거는 홍장군이 1920년대 만주지역에서 자행된 일제의 민간인 학살 등이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넘어가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 등은 이미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기에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920년대 독립군을 바라보는 이른바 좌익 계열의 연구가의 관점에 있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1919년 8월 국내진공작전을 대담하게 감행, 함경남도 혜산에 진입해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하고, 10월에는 강계, 만포, 자성 등을 기습해 일본군을 타격했다... 청산리 대첩 이후 독립군 부대들의 대규모 승전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이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김좌진 독립군부대와 홍범도 독립군부대가 1921년 우수리강을 건너 소련 땅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다.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 주력부대들은 청산리대첩 이후 일본군의 야수적 탄압에 겁을 먹고,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민중들을 내팽개치고 투쟁의 현장에서 벗어나 안전한 북만 땅으로 도피해 갔던 것이다... 이것은 독립군이 자산계급의 군대였고 부르주아민족주의를 사상적 바탕으로 하는 군대였으며, 활동에서 분산성과 산만성을 갖고 자파 중심으로 서로 배척하고 질시한 데 있었다. _ 박경순, <196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4


 홍범도 장군과 독립군을 바라보는 좌익 연구가들은 민족주의 성향의 부르주아적 한계를 대일항쟁의 한계로 인식하고 비판한다. 홍범도 장군의 삶과 철학은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들 다수처럼 변절되지 않은 한결같았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관점에 따라 21세기 뉴라이트 사관의 역사학자들에게는 공산주의자로, 레프트 성향의 역사학자들에게는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이와 같은 후대의 왜곡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 독립투사들이 홍범도 장군 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장군 생전에 생겨나지도 않은 북측 정권의 악행으로 사상범으로 몰려 사후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서, 서기 전(BCE)에 태어나 그리스도교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천당에 가지 못하는 단테 알레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의 <신곡 La Divina Commedia>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중세의 교조주의와 다를 것 없는 오늘날 정부의 행태가 많은 반발을 일으키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31 착한 스승은 내게 “너 지금 보는 이 영혼들이 누군지를 넌 묻지 않느뇨? 그럼 너 더 나아가기 전에 내 알리고 싶노라.

34 저들이 죄를 짓지 않았고 공이 있다 해도 그것은 너 믿는 믿음의 한 몫인

성세聖洗를 못 받았기에 넉넉치 못하니라.

37 그리고 그리스도교 이전에 있었던 만큼 맞갖게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였나니 나 역시 이들 중의 한 사람이로다.

40 다른 죄 때문이 아니라 다만 이 탓으로 우리는 버림을 받고 오직 이 흠집 까닭에 가망도 없이 우리는 뜬 소망 속에 사느니라.”

43 내 그 말을 듣자 마음이 큰 슬픔에 사로잡혔나니 뛰어나게 값진 사람들이 림보(지옥 제1환)에 걸려 있음을 안 탓이어라. _ 단테 알레기에리, <단테의 신곡 - 상>, p68/634



 친일(親日)과 반일(反日) 사이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현실에서 조금은 덜 알려져 있지만, 1930년대 항일투쟁의 역사를 되짚어보려 한다. 앞서와 같이 1920년 경신참변(庚申慘變) 등으로 위축된 항일무장투쟁은 무너지는 듯했으나, 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때마침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과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키며 중국내륙으로 침탈해 오는 일본군에 대한 투쟁을 전개해간다. 투쟁의 중심이 김일성(金日成, 1912~1994), 김 책(金 策, 1903~1951), 최용건(崔庸健, 1900~1976) 등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 금단의 영역으로 언급을 피한 것이 오늘날 친일세력의 부활과 확장을 가져온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페이퍼의 마지막은 친일파들이 홍범도 장군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단서가 되는 부분을 옮기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친일 행적을 반공 이념으로 덮으려는 움직임이 마음을 답답하게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풀지 못한 숙제가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작은 위안을 삼는다...  


 홍범도는 1921년 9월 연해주지방에서 고려공산당 중앙간부 명의로 ‘우리 고려 노동군중에게’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독립군이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거둔 승리를 자랑스럽게 언급하는 한편, 싸워야 할 대상은 일제뿐만 아니라, 동족 내부의 관료와 유산자, 가짜 공산당원 등도 해당된다고 구체적으로 밝혔던 것이다. 그 성명서의 일부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 환기하며 단합할 지어다. 우리 의병대들을!! 그들은 일찍 서북간도에서 일본 군벌주의자를 박멸하는 전쟁에 아름다운 이름과 거룩한 성적을 날아내였나니라. 동무들이여! 손에 잡은 총을 더욱 굳게 잡고 참된 자유를 각오하는 혁명자를 단합하여 우리의 행렬을 채우라. 주의할 지어다 우리의 수적晩賊은 자못 일본침략주의자뿐 아니라 동족 사이에도 있나니라. 자세히 말하면 관료급 유산자이며 홍○와 같은 외홍내백한 가면공산당원들이로다. (중략) 동무들이여 잊지 말지어다. 일본 군국주의자와 전쟁하는 동시에 세계 만방에서 압박받는 노동자 동지들이 후원하리라. 또는 이 동지들이 멀지 아니하여 압박계급과 대전을 개하리니 이 대전은 참으로 우리를 해방시키고 세계로 하여금 진리의 낙원을 형성하리니 정신을 가다듬어 전투준비에 급급할진저.-1921년 9월 15일 고려공산당 중앙간부(제3국제공산당 고려부) 각 의병대 수령 홍범도·최진동·허재욱·안무·이청천(윤상원,〈자유시사변과 홍범도〉,《역사연구》10, 역사학연구소, 2002, 271·277쪽) _장세윤, <홍범도>, p23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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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9-06 1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글을 더 기다리게 하는 반가운 페이퍼네요. 홍범도 장군께서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질투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정작 장군은 한 길을 보며 간 분이었는데 말이죠.

겨울호랑이 2023-09-06 13:04   좋아요 2 | URL
각자 자신의 관점에 따라 시대와 인물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역사가의 연구임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역사는 하나의 관점 대신 다양한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해석된 결과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상과 이념만이 옳고 나머지는 다 그르다는 식의 접근은 인문학이 아닌 종교겠지요...

베이글 2023-09-06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풀지 못한 숙제가 다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말씀이 저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답답하게만 보였던 이 사태를 능동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준 말씀입니다.

오늘도 좋은 글과 책 소개 감사합니다.
좋은 오후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3-09-06 14:51   좋아요 1 | URL
네, 많이 힘든 요즘이지만 돌이켜보면 박근혜 탄핵 직전 인 2016년에도 극심한 혼란 속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골이 깊은 만큼 산도 높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베이글님 평안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
 

 친일파라는 용어는 통시대적인 용어가 아니라 우리 역사의 특정한 시기(기간)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일본(정부)의 정책에 동조하거나 협력한 이들은 전근대에도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침략에 협력한 조선인들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이들을 친일파라고 부르지 않았다. 통상 학계나 친일파 청산 관련 법령에서 규정하는 "구한말 이래 일제의 국권침탈과 식민 지배와 일제의 대외 침략에 적극 협력한 부류"가 곧 이 책에서 다루는 친일파다. _ 변은진, 박한용, 이용창, <일제강점기 친일세력 연구-조선귀족, 중추원, 친일단체(1910~1937)를 중심으로>, p20/588


 제78주년 광복절. 지난 해부터 3.1절, 광복절 등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전부터 기념일의 의미를 훼손하는 극우집단의 소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공공의 장(場)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현실은 참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오늘도 대통령은 광복절에서 광복보다는 건국, 좌익척결, 일본과의 우호,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이해할 수 없는 경축사를 했다. 또 다시 참담해지는 마음.


[관련기사]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사 특이점https://www.huffington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212073


  광복절을 맞아 뉴스타파에서 예전에 만든 <친일과 망각>을 다시 본다. 자신의 현재를 지키기 위해 과거를 잊기를 강요하고, 광복 대신에 건국을, 독립 대신에 반공을 보다 높이 외치는 이들. 시간이 흘러 기억하는 이들도 사라지고, 친일파 대신 친일파 후손들이 부와 권력을 넘겨받은 지금 우리가 친일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지나간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말고, 현재 화합을 이뤄야 한다는 이들의 목소리가 얼핏 타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친일과 망각>은 우리에게 친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나는 과거문제를 잊기 위해서라도 이걸 묻기 위해서라도 나는 과거 문제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정리하는 그런 이리 빨리 됐으면 좋겠어요.' 


 <뉴스타파 -민국 100년 특집>의 윤경로 친일 인명사전 편찬 위원장의 말은 우리가 왜 친일을 기억해야 하는가를 잘 알려주는 문장이라 여겨진다. 일신의 안녕을 위해 가야할 길을 가지 않은 자와 힘든 길인 줄 알면서도 가야할 길을 간 이들을 살피고 이를 통해 미래에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광복절의 의미가 아닐까. 그러지 못한 것은 적시에 정리되어야 할 것이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는 반민특위에만 해당되는 것만은 아니라 여겨진다.




 친일파는 그저 단지 일본과 친한 이들이 아니라, 일제의 흉포한 식민통치에 부역하고 민족을 배반한 자들이다. 청산되지 못한 세력의 계보에 속해 제국의 군인, 경찰, 밀정, 낭인들이 저지른 발길질과 뺨 때리기 정치를 칭송하기에 친일파인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이들은 모두 그런 의미에서의 '친일파'다. 기꺼이 제국의 신민이 된 자들이며, 그 체제를 온몸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친일행위자들만이 아니라, 이들을 옹호하고 이들이 만들어놓은 기득권을 고스란히 쥐고 지금도 그 반역의 역사를 이어나가려는 자들은 모두 다 '친일파'다. '친일파'는 따라서 '역사적 개념'이며 '정치적 개념'이자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소멸되어야 할 세력의 '실명'(實名)이다. _ 오익환외, <반민특위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묻는다>,  p28/284


 일제의 요구는 시기마다 달랐고, 친일파 또한 이러한 요구에 맞춰 각 시기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고 그 영향도 각각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컨대 '합병' 이후 일제가 '매국'을 요구할 리 없다. 이때부터는 식민통치에 대한 협력이 본질적인 요구이며, 친일파는 여기에 보조를 맞추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전쟁협력행위가 일제의 핵심 요구였고 여기에 맞춰 친일파들은 내선일체·황국신민화를 부르짖으며 전쟁협력행위에 복무했다. 나라를 팔아넘기라는 요구에는 매국이, 식민통치에 협력하라는 요구에는 직업형 친일이, 전쟁에 조선인들을 동원시키라는 요구에는 전쟁협력형 친일이 각각 대응된다. 매국과 전쟁협력 가운데 어느 것이 죄가 무거운가 하는 식의 법률적 접근은 역사적 현상인 친일문제를 제대로 해명하는 데 부적절할 수 있다. 결국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의 변화 과정과 관련해서 역사적으로 친일파들의 행위를 검토해야 한다. _ 변은진, 박한용, 이용창, <일제강점기 친일세력 연구-조선귀족, 중추원, 친일단체(1910~1937)를 중심으로>, p390/588

 이 모든 사태의 기점(起點)에 바로 반민족적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反民特委)의 와해가 놓여 있다. 1949년 6월 6일, 그날이 우리 역사의 운명을 가른 것이다. 이날을 우리는 모두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반역의 역사가 당시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이라는 자의 명령으로 시작된 날이며, 이후 우리 현대사의 무수한 희생과 굴곡,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왜곡된 역사의식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_ 오익환외, <반민특위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묻는다>,  p28/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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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8-16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기생식물이 숙주가 사라지지 않는 한 생존 기반이 사라지지 않듯 윤짜장 같은 극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친일의 생존 기반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네요.

겨울호랑이 2023-08-16 15:28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다만, 극우가 힘을 받으면서 그동안 숨겨왔던 이들의 속내가 다 드러나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문제점까지 보다 깊이 그리고 널리 알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레이스 2023-08-18 0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 경축사에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저렇게 말하지? 했더니 남편이 웃더군요.

겨울호랑이 2023-08-18 08:18   좋아요 1 | URL
이제는 친일 발언이 나올 것으로 예상을 하게 됩니다만, 그래도 막상 들으니 마음이 참담해집니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광개토대왕비(碑)와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많은 32자.


 이에 대해 19세기 말 일본학자들은 "백제와 신라는 이전부터 고구려의 속신으로서 조공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조선반도에 침입하여 백제를 쳐부수고 또한 신라를 토벌하여 그 두 나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며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는다. 여기에 대해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 ~ 1950)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은 위에서 1) '래(來)'는 '오다'라는 뜻의 동사가 아니라 '~ 이래'처럼 특정 시점으로부터 현재까지로 시간을 제한하는 허사(虛辭) 성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실질적인 동사는 '도(渡)'라는 점, 그리고 2) 뒤의 '以爲臣民'은 '以(此)臣民'에서 대상을 나타내는 목적어 '此'가 생략된 형태인데 3)이 문장의 대주어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므로 그 토벌의 대상인 왜나 백제는 상식적으로 '以爲臣民'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_ 정인보, <조선사 연구 下> , p896


 이러한 설명을 바탕으로 위당은 해당 문구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백잔(백제)과 신라는 이전에는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줄곧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 이래로 바다를 건너오기에 (대왕은) 백잔과 왜구를 쳐부수고 신라로 하여금 이들을 신민으로 삼게 하였다. _ 정인보, <조선사 연구 下> , p895


 아직까지도 광개토대왕비의 해당 문구와 관련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결국 문제는 숨겨진 주어의 문제인 듯하다. 우리 말의 특성상 주어는 명시적으로 표현되기보다 암묵적으로 문장 내에서 해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의 실증사학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논란 아닌 논란이 되버린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의 연장선상에서 국민의 힘과 윤석열 대통령의 저열한 '주어 없음'의 해명을 바라보게 된다. 명확하지 않은 표현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놓고 자신의 본의가 아니라는 식의 해명 속에서 일제 식민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을 발견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들이 벌이고 있는 현대사의 왜곡을 생각한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관련기사] 또 '주어 없음'으로 빠져나가려다... '나경원 시즌 2' 실패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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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04-26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경원 당시 새누리당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BBK를 설립하였다고만 언급되어 있지 ‘내가‘ 설립하였다고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을 ‘내가 설립했다‘라고 광고하는 것은 명백히 허위˝라고 주장했다. 정당 논평사의 ‘레전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우리말은 영어와 달리 주어를 일일이 넣지 않고 생략하는 경우가 매우 흔한 데다, 이 경우는 맥락상 주어가 이명박 본인이라는 게 너무나도 분명하다는 점을 판사까지 지낸 공당의 대변인이 몰랐을 리 만무했다.

이런 철면피한 대응을 본받아 새누리당의 후신인 국민의힘에서도 검사 출신 대변인이 똑같은 수법을 써보려 했지만, 이번엔 주어가 확실히 들어간 녹취록 원본이 공개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나와같다면 2023-04-26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사를 듣고 제일 먼저 떠오는게 2007년 나경원의 ˝주어 없다‘ 였습니다
그 사건이 정신적으로 타격이 되었나봐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벼락처럼 떠오른걸 보니..

겨울호랑이 2023-04-27 06:58   좋아요 1 | URL
말장난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어법에 대해 영문법의 기준을 적용시켜 위기를 모면하는 저들의 행태가 이제 지긋지긋하네요. 법 없이도 도덕,윤리적인 기준으로 잘 돌아가는 사회에 법의 기준을 들이대면서 비상식적으로 망쳐가는 저들의 끝은 결코 좋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渼沙_常水 2023-04-27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펑가함을써 민족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주제입니다. 물론 자긍심만을 추구하려는 일본의 역사왜곡이 문제이지만요. 그러기에 누구라도 수용 할 수 있는 개관적인 근거와 논리가 필요합니다. 요즘뿐 아니라 어느시대에도 정치꾼들의 말은 명분도 대의도 없이 그저 利만을 추구하는 이전투구인지라 뉴스도 안봅니다. 何必曰利하는 그런 사람들 이야기 말고 책속의 좋은 이야기만 하였으면 합니다. 좋은책 소개 항상 감사 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4-27 09: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전체적인 흐름과 사실을 바탕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이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끌어내어 오늘의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지표로 삼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 신념을 위해 역사를 왜곡, 해석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진실에 바탕을 둔 신념과 신념을 위해 짜집기 한 사실. 점차 엇나가는 두 길 사이에서 혼란과 갈등이 생겨나는 것 같네요... 渼沙_常水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이란 무엇인가? 피해자가 원하는 해결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는 사죄는 누가 어떻게 가해 행위를 했는가를 가해국이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애매하지 않은 명확한 표현으로 국내 및 세계에 표명하고, 그러한 사죄가 진지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후속 조치가 수반될 때 비로소 피해자들이 진정한 사죄로 받아들일 수 있다. _ 조윤수, <일본군 '위안부'> , p140/250


  2018년 8월 14일부터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어 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그렇지만, 요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극우 세력의 움직임은 매우 걱정스럽다.  1993년 고노담화 이후 시간이 갈수록 퇴행되어가는 일본의 역사인식과 이에 편승하는 일본과 한국 극우의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맞이한 기념일. 저절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출처] 뉴스타파 : 거리를 뒤덮은 혐오, 수요시위를 방해하는 사람들 


 고노 관방장관 담화(1993. 8. 4.)


 소위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정부는 재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해 왔으나 금번 그 결과가 정리되었기에 발표하기로 했다. 금번 조사 결과 장기적이고도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었으며, 많은 위안부가 존재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운영되었으며, 위안소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대해서는 구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 위안부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담당하였으나 그 경우도 감언·강압 등에 의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위안소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하에서 참혹한 것이었다.


 또한 전지로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일본을 제외하면 한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당시 한반도는 일본국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강압 등에 의해 총체적으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졌다.


 어쨌든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하에 수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다시금 출신지 여하를 떠나 소위 종군위안부로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심신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와 반성의 심정을 말씀드린다. 또 그와 같은 마음을 일본국이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대해서는 지식인들의 의견 등도 구해 앞으로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역사의 진실을 피하는 일 없이 오히려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 나가고자 한다. 우리들은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와 같은 문제를 영원히 기억해 똑같은 잘못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번 표명한다. 또한 본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소송이 제기되어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고 있어, 정부로서도 앞으로 민간 연구를 포함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여 나가고자 한다. _ 조윤수, <일본군 '위안부'> , p120/250


 올해 기림의 날에는 조윤수의 <일본군 '위안부' - 역사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기억하다>를 읽었다. 이 책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대중교양서로서 알기 쉽게 내용을 정리하면서도 문제점을 명확하게 짚고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책 내용 중 특히 인상 깊은 부분은 몇년 전 논란이 되었던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의 위안부 관련 내용과 반론을 정리한 부분이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 두 권의 책을 굳이 읽지 않더라도 문제의 핵심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 책이 가진 큰 매력이라 여겨진다.


 박유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 군인들과 동지적 관계에 있었으며 군인을 ‘위안’한다는 사실만으로 삶의 긍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중에는 일본 군인을 동지나 운명공동체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많은 여성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여성을 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 동원한 일본군과 정부의 책임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위안부’ 피해를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전쟁에 기인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고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벌이지고 있는 피해이기 때문이다. 동지적 관계였다는 시점으로는 현재 세계 각지에서 벌이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 피해에 대해 어떠한 건설적인 대안도 제시할 수 없다. _ 조윤수, <일본군 '위안부'> , p98/250


 독자들은 일본군에 의한 인권 유린 사안을 전장에서 꽃핀 휴머니즘으로 승화시키고 문제의 본질을 (제국주의)국가 권력에 의한 폭력에서 남녀 가부장제의 모순으로만 치환하는 <제국의 위안부> , 반인권 행위를 법적 정당성 문제로 몰아가는 <반일종족주의>의 문제점을 확인하며, 사안의 문제점을 바로 볼 수 있는 시각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영훈은 『반일 종족주의』에서 당시에는 공창제도가 인정되었고, ‘위안부’는 공창제도를 군이 이용한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1920년대부터 공창제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1924년 1월 와세다대학 교수 아베 이소오安部磯雄 등이 제출한 ‘공창제도 폐지 청원서’를 보면 “공창제도는 사실상 전율스런 인신매매와 참담한 노예제도를 동반하는 벗어날 수 없는 나쁜 제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공창제도는 인신매매와 자유구속이라는 2대 죄악을 내용으로 하는 사실상의 노예제도”라는 것이다. 합법이니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공창제하에 놓여 있던 여성들의 대부분은 인신매매에 의해 동원되었고 전차금에 얽매여 업자에게 구속된 사실상의 성노예였다. _ 조윤수, <일본군 '위안부'> , p68/250


 이와 함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얼마 전 읽은 <성모 마리아 찬가> 중 일부를 떠올리게 된다. 제목 그대로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찬미가 중 부부관계 요구를 거절하여 남편에게 폭행당한 여인의 치유와 관련한 시(詩)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군과 위안부의 관계가 작품에서처럼 부부는 아니지만,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폭행은 작품 속 남편의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여러분은 성모 마리아가 소녀를 

어떻게 보호하셨는지 놀라운 일을 듣게 될 겁니다. 

비록 소녀가 남편의 권력 아래에 있었지만

신랑은 그녀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전에도 그랬듯이 순결한 상태로 남았고

이 일을 이후에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후렴)큰 연민과 자비와 숭고함, 

이 세 가지는 성모 마리아에게 넘칩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일 년을 함께 살았으며

남편은 그 소녀와 부부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소녀에게 큰 폭행을 하게 되었고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일을 말하기 송구스럽지만, 그는 소녀의 몸 가운데

아주 은밀한 부분을 칼로 잔인하게 찔렀습니다.


이 일을 누구도 묘사할 수 없었고

말로 형용하기조차 힘든 행위였으며

피사에 있는 외과 의사들도

그녀가 입은 상처에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자신이 당한 학대에 대해 항의를 했습니다.

그후 보니파시오라고 불리는 한 주교가  _ 알폰소 현왕, <성모 마리아 찬가>, p447

 

 끔찍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를 제대로 호소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작품 속의 소녀와 일본군 피해자의 처지는 공통점을 갖는다. 또한 그들의 아픔에 사회가 무관심했고, 공론화 된 이후에도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는 사회의 현실에서도 작품과 현실은 공통점을 갖는다. 이러한 공통점을 통해 <성모 마리아 찬가>의 도시의 시민들처럼 사건에 괴로워하면서도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너무도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말하기조차 고통스러워 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막았던 것은 아니었는가도 돌아보게 된다.


이 일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에 대해 깊은 연민의 정과

문제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조사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하지만 부부간의 문제를 확대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소녀를 남편에게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나의 증인이듯이 그 불한당은

즉시 고열에 시달렸고 심한 증상을 겪었습니다.


도시의 모든 사람이 그 고열로 인해 고통을 받으며

교회로 이주하였습니다. 이곳에 너무 많은 사람이

누워 있기 때문에 그 일부는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시련을 겪었습니다.

이 모든 결과가 그 젋은 남자가 저지른 

악의적인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_ 알폰소 현왕, <성모 마리아 찬가>, p448


 오랫동안 침묵했던 이유는 우리 사회에도 있었다. 한 여성이 46년 만에 진실을 털어놓기 전까지 우리 사회는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설마 몰라서 그랬을까? 일본 군인과 군속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남성이 30만 명이 넘는다. 그런데 몰랐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피해 여성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지,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는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인 문화가 한몫했다. 예전의 한국 사회 분위기에서 일본군에게 강제로 몸을 더럽혔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피해자들은 몸을 더럽혔다고, 민족의 수치라고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피해자임을 내세우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소환하여 자신이 당한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에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 세월이 지나도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피해를 밝힌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숨긴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_ 조윤수, <일본군 '위안부'> , p25/250


 <성모 마리아 찬가>에서는 고통당한 소녀의 절규가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절규에 대해 우리는 성모 마리아와 같이 귀기울여 들어왔는가. 들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오히려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들의 목소리를 음해하고 오히려 비난하는 현실 속에서 아픔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남편 때문에 상처를 입은

그 불쌍한 소녀도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열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소녀는 오른쪽 가슴에 큰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그녀를 교회로 데려갔는데 회색 빛 모직 천에 싸인 채

살아 있다기보다 죽어가는 상태였습니다. 


그녀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울부짖으며 말했습니다.

"성모 마리아님, 제가 당신을 믿었는데

왜 절 도와주시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약속한 것을 

저에게 주시지 않고 고열만 주셨습니다.

그 일이 제게 준 병은 너무 끔찍해서 

내 몸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후렴)큰 연민과 자비와 숭고함, 

이 세 가지는 성모 마리아에게 넘칩니다.  _ 알폰소 현왕, <성모 마리아 찬가>, p449


 오늘은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며, 내일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최근 국가 기념일을 둘러싼 논쟁이 될 수 없는 사안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앞으로 가야할 길이 참 멀게만 느껴지지만, 앞으로 나가는 대신 점차 뒤로 밀린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비록 현실과 현실 속의 마음은 어두워 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보다 앞선 이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과 노력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아픔을 겪는 모든 이들의 평안함을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청하게 된다... 


그 소녀가 대답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성모 마리아가 말했습니다. "네 손을 나에게 주어라."

성모 마리아는 소녀를 일어나게 했고 자신의 다리 위에 올렸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몸이 화상과 위험한 상처로부터

완전히 회복된 것을 느꼈습니다.

(후렴)큰 연민과 자비와 숭고함, 

이 세 가지는 성모 마리아에게 넘칩니다.  _ 알폰소 현왕, <성모 마리아 찬가>, p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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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4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14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와같다면 2022-08-14 16: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이 가지고 계신. 제대로 땅에 닿지도 못한 채 들린 발뒤꿈치를 하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이 생각납니다

겨울호랑이 2022-08-14 16:52   좋아요 3 | URL
오래전 페이퍼인데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소녀상을 문제삼으며 독일까지 간 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문제해결 방안이 무엇인가를 물어보게 됩니다... 대체 언제까지 사과를 요구하냐고 따지지만, 사과내용에 맞는 역사교육을 하지 않으며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는 행태를 감싸는 이들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8-15 08:10   좋아요 2 | URL
나와같다면님 말씀을 듣고 프로필 사진을 바꾸었네요... 늘 눈 앞에 두고도 미처 떠올리지 못한 소녀상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한국전쟁은 그 기원과 원인, 결정과 발발, 전개와 귀결의 모든 면에서 국제적 수준, 동아시아 수준, 국내적 수준의 세 층위로 나타났다. 전쟁의 기원은 이 세 수준으로 인해 놓였고, 전쟁의 결정 역시 철저하게 그러하였다. 따라서 전쟁의 전개와 귀결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세 층위의 밀접한 유기적 관련 속에 한국전쟁은 위치하였다. 각각, 첫번째 층위는 미소대립과 냉전이었고, 두번째 층위는 중국혁명과 일본의 존재, 그리고 세번째 층위는 남북갈등과 각각의 내부정치와 사회의 수준이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64


 박명림(朴明林, 1963 ~ ) 교수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서 한국전쟁을 여러 층위로 구분하여 분석한다. 기존의 남북한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G2로 각각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두 강대국 미국과 소련의 이익과, 국민당-공산당으로 내전을 겨우 봉합한 중공과 패전국으로 전락한 일본의 이해관계를 함께 고려했을 때 비로소 전쟁의 진면목이 보인다는 것이다. 


 분석의 영역과 관련하여 우리는 네 가지 요소의 분리와 종합을 시도하고자 한다. 즉, 남한과 북한의 사회를 분석하면서 우리는 정치, 경제, 이념과 멘탈리티, 군사영역의 분리와 종합을 시도한다(p77)... 이 네 영역 중 가장 중심적인 문제는 역시 정치이며 48년 질서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하였던 요소는 일부에서 말하는 이념도 경제도 아니었고 바로 정치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80


  저자는 이러한 한국전쟁의 지층에 대해 4가지 영역으로 구분하여 분석을 수행한다.   구체적으로, 정치, 경제, 이념, 군사 영역의 4부분에 대해 남북 체제가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기 위한 여러 노력들을 교육, 토지개혁 등의 이슈를 통해 살펴본다. 이러한 체제들의 노력은 균열과 압력으로 작용하면서 체제를 변화시키는데, 저자는 해방 전후 한국전쟁에 이르기는 5년의 기간 중 변곡점을 1948년으로 본다. 


 필자가 이해하기에 한국전쟁의 연구를 위해서는 다음의 세 준거들이 필요하다. 즉, 농민,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주의가 그것들이다(p52)... 우리의 초점은 국가(state)와 정치사회(political society), 시민사회(civil society)의 관계에서 밑으로부터의 참여와 의사의 대표성 여부에 놓여 있다. 당연히 소련점령국과 미국점령군, 남북한 국가의 성격, 정당체제와 선거의 과정과 방법, 체제반대 세력에 대한 수용과 배제의 방법과 범위, 갈등의 정도와 수용 여부, 자율적 결사의 허용과 탄압의 문제 등에 초점이 놓일 것이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56


 우리가 세번째로 설정한 방법론은 균열(cleavage) 또는 갈등의 구조와 위계라는 문제틀이다. 여기서 말하는 균열은 특정의제를 둘러싸고 관계된 행위 주체, 이를테면 국가와 국가, 집단과 집단, 계층과 계층 사이에 수직적 수평적으로 벌어지는 힘과 정책의 길항관계를 지칭한다. 그리고 그것이 구조라는 지형위에 어떻게 놓여 있는가 하는 측면을 포함한다(p76)... 정당성을 두고 대립하는 두 국가를 둘러싼 균열의 수준과 위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국가(state)와 체제(regime), 정부(government)의 구별이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76


 1948년 이전에 서울을 수도로, 태극기를 국기로 인식하는 공감대를 남북한이 공유했다면, 이후에는 각각의 체제를 국가로 인식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38선을 임시구분선에서 분할선으로 받아들이는 변화이기도 했다. 저자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서 한국전쟁을 내전, 지역전, 세계대전의 층위로 구분하고, 정치, 경제, 이념, 군사 영역에서 사회 체제 - 국가, 사회공동체 - 사이의 균열과 영향을 분석한다. 다만, 이러한 균열로 인한 변화는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다. 한 체제의 내생변수(endogenous variable)는 다른 체제의 외생변수(exogenous variable)로 영향을 미쳤다. 구체적으로, 북한의 토지개혁은 남한의 토지개혁에 영향을 미쳤고, 남한의 토지개혁 결과 또한 북한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토지개혁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분야에 있어 경쟁과 영향관계는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고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전쟁 직전의 배경을 형성하는 것이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이라면, 전쟁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정치의 영역이다. 이와 관련된 정치적 리더십의 관계가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에서 그려진다면,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에서는 농민을 중심으로 한 대중의 입장에서 바라본 한국전쟁의 배경이 서술된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전체적인 책의 얼개를 살펴보는 것으로 하고, 다음에는 보다 상세하게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1948년이전의 대립과 48년 이후의 대립의 근본적인 차이는 여기에 있었다. 이제는 정통성의 배타적 독점을 주장하는 '두 국가의 공존상태'가 도래한 것이다. 이 둘은 전부 사회적 갈등이라는 내적 계기가 냉정이라는 외적 계기를 매개로 하여 등장한 것이었다. 이 중첩으로 인하여 민족의 분할선으로서의 38선은 이미 세계의 분할선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38선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 의한 한국의 분할과, 같은 기준에 의한 동아시아와 세계의 분할의 중첩이었던 것이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63


 전쟁은 모든 정치적 선택 중에서 두 행위주체에 의해 가장 밀접히 맞물린 채 발생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어느 일방의 인식과 정책, 사회구조만을 분석하는 것은 부분적인 설명일 수밖에 없다. 두 쪽 모두를 동시에 분석하는 것은 부분적인 설명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졸버그(Aristide Zolberg)가 말한 바 있는 '대쌍관계동학'(對雙關係動學, interface dynamics)이라는 개념을 빌어 1945년에서 50년, 특히 필자가 '전간기'(戰間期) '48년 질서'라고 부르는 1948년에서 50년 사이의 남한과 북한의 관계를 분석할 수 있다고 본다. 대쌍관계동학을 이용한 접근은 남한과 북한 각각에 대한 독립적 이해와 그것들 사이의 관계의 다이내미즘을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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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6-24 11: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읽으시는군요. 읽은지 한 3-4년쯤 된 것 같은데 저도 재독하려고 찜한 책입니다. 겨울호랑이님이 이 책에 대해서 어떤 소감을 풀어내실지 궁금해집니다^^

겨울호랑이 2022-06-24 13:31   좋아요 4 | URL
여러 면에서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비교되면서도, 차이가 있다 생각됩니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외부적으로는 얄타체제와 같은 세계체제적인 측면에서, 내부적으로는 일제시대 식민지 상황으로부터 시작해 서서히 관점을 한국전쟁으로 모아간다면,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해방 전후로부터 1950년 6월 25일 38선에서 시작된 한국전쟁까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쓰나미를 표현할 때 전자가 대륙이동과 해류 등 기후적인 면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는다면, 후자는 쓰나미 전후 변화 상황을 보다 세밀하게 그렸다고 해야할까요... 한국전쟁의 거시사와 미시사. 이렇게 두 책들을 비교하게 되네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