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40분경, 4.19 그날의 중요한 전기가 마련됐다. 오전 11시경 동국대생 2,000여 명과 성균관대생 3,000여 명이 교문을 나서 오전 11시 40분경 국회 의사당에 이르렀다. 그런데 서울대생들이 그곳을 점거하고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때 "동국대는 경무대로 가자"는 고함과 함께 동국대생들이 중앙청, 경무대 쪽으로 향했다. 서울대 사범대생들과 동성고 학생들, 성균관대생들 등 학생 1만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시위의 성격이 이때부터 확 바뀌었다.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들이 세종로를 지나면서 새로운 구호가 나왔다. "이승만 물러가라", "독재 정권 물러가라", 바로 이것이었다. 시위대의 표적은 경무대였다. _ 서중석, 김덕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 , p87/168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와 무차별 발포로 '피의 화요일'이 되버린 1960년 4.19 그 날. 부정선거와 독재정치를 규탄하던 이들은 혁명을 통해 독재자의 하야(下野)를 이끌어내며, 일단 혁명의 목적 중 하나를 달성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하려는 앞선 세대의 노력으로 한국 민주주의는 보다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거에는 부정선거가 아니면 집권할 수 없었던 세력이 이제는 합법적으로 정권을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제도는 성숙했으나, 민의(民意)는 쇠퇴했다고 봐야할 것일까. 4.19혁명 당시 젊은이 또는 어린이들이었던 현 70, 80대와 87년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던 50, 60대 상당수가 보수화되었다는 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일까.


 4월혁명 50주년을 맞아 <4월혁명 사료 총집>이 나왔는데, 편집위원장으로서 그것을 만드는 데 관여했다. 거기에 중요한 사료가 있다. 연세대 4월혁명 연구반에서 1960년에 만든 목격자 수습조사서다..  그 중 하나가 "이번 4.19 사태를 가져온 동기는 뭣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이다. 그것에 대한 응답을 보면 '독재 정치(독단적인 일당의)', '자유당 정부의 실정', '일당 독재', '정치적 부패', '경제적 불평등', 이런 것들이 들어가 있다. 부정 선거는 이보다 꼭 많은 게 아니더라. 부정 선거나 마산의거에 자극받아 4.19를 일으켰다고 보는 것보다 오히려 이게 더 많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15부정선거와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 전체의 상을 보여주는 것이자 그것에 대한 전반적인 단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바로 이런 상태에서 두 차례에 걸친 마산의거, 그리고 4.19, 4.26이 일어난 것이다. _ 서중석, 김덕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 , p99/168


 4.19혁명은 바로 뒤이은 5.16 쿠데타로 너무도 빨리 무너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혁명의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기득권 문제는 4.19혁명이 미완의 혁명임을 생각하게 된다... 


 민석홍 서울대 교수가 이승만 정권 붕괴 직후 4월혁명이 혁명인 이유 중 두번째로 든 것이 특권층 문제였다. '4월혁명은 특권적인 재벌이나 기업가층 몰락의 바탕을 마련했다.' 무서운 말이다.... 말하자면 돈을 많이 번 자들이 정상적으로 돈을 번 게 아니라는 광범위하고 강력한 국민 의식, 서민층의 불만이 쌓여 있었고 이게 4.19 때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으로 발동된 것이다. 그러면서 부정 축재자 처벌을 들고나와서 허정 과도 정권이나 장면 정부를 무척 애먹이게 된다. _ 서중석, 김덕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4> , p102/168


 사실, 특권층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기에 4.19혁명의 한계로 규정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기득권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오언 존스 (Owen Jones, 1984~ )의 하층 계급의 문제를 다룬 <차브>와 특권계층의 문제를 다룬 <기득권층>두 권의 책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민주적 혁명, 즉 기득권층이 착복한 권력과 권리를 평화적 수단을 통해 되찾는 일을 오랫동안 미뤄지고 있다. 그러한 혁명은 기득권층의 성공으로부터 배울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공격적인 사상투쟁이야말로 승리의 열쇠임이 증명되었다. 기득권층은 영국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얻은 바가 없다. 이는 여론조사가 지속적으로 보여주는데, 예컨대 대다수의 영국인은 부자증세를 원하고 공공 및 공익사업을 이윤창출 목적으로 전환하는 조치에 반대하며 정부 주요기관에 대한 신뢰도 심각하게 낮다. 그러나 기득권의 비공식적 구호처럼, '대안은 없다'는 감각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 체념하게 하고 저항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엄청난 이념적 승리임이 드러났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p276/310 


 기득권을 보호하는 또다른 장치는 대중의 분노가 사회의 상부가 아닌 최하층에게로 굴절되는 현상이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저소득 노동자에게 임금을 적게 지불하는 고용주를 향해 분개하기보다, 호사스런 생활을 한다는 실업수당 청구인들 쪽을 시샘하게 만든다. 연금을 보장받을 수 없는 민간부문 노동자는 여전히 연금이 보장되어 있는 공공부문 노동자를 부러워하도록 선동당한다. _ 오언 존스, <기득권층>, p27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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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들은 법을 잘 지켜야 할 대상으로 인식할 뿐, 현실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처음부터 법률문제는 '포기가 곧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법률문제에 시달려본 구술자 중에는 판검사들이 변호사를 통해 돈을 받는다고 믿고 변호사에게 거액을 건넨 사람도 있습니다.(p233)... 시민들이 이런 고통을 겪는 동안 법조인들이라고 해서 그들만의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실비, 휴가비, 전별금 등이 관행이었던 시절에도 판검사들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법시험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신성가족의 일원이 된다 해도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했습니다. (p234)... 의사소통이 단절된 틈바구니에서 자라난 브로커라는 직업도 애환이 많았습니다. 법대 졸업생으로 청운의 꿈을 품고 또는 가정형편 땜누에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건만, 기본급으로는 생활이 너무 어렵고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235/276


 내일이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난 5년 동안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고, 그중에서도 사법개혁은 언론개혁과 함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지만, 문제점만 깊이 인식했을 뿐 아직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해결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는 사법부 문제, 이 문제를 이번 페이퍼에서는 여러 권의 책을 통해 대략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은 법으로부터 소외된 시민들, 핵심 엘리트 집단에 소속하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법조인들, 언제 잡힐지 모르면서도 살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브로커 집단들을 묘사하며, 법의 이해관계자들 모두가 불행한 현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의 기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우리나라 법조계의 제도적, 물적/인적 토대는 모두 일제시대에 마련되었다. 이 간단한 사실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프랑스와 독일의 법제를 받아들인 일본은 이를 그대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했다.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었던 전통적인 법과 제도는 대한민국의 형성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일본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제도와 개념이 식민지에 제대로 정착할 리 없었다. 개념과 현실의 틈새에서 고문, 조작, 과장, 각종 뒷거래가 독서벗처럼 자라나 일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만큼 모든 기반이 허약했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75/526 


 김두식의 다른 책 <법률가들>은 사법부 문제의 기원을 찾아가는 책이다. 일제 하 이른바 근대제도의 정착과정에서 전통과의 단절과 갑작스러운 제도의 이식은 혼란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혼란이 가라앉기 전 더 빨리 찾아온 해방은 사법부를 비롯한 극심한 혼란을 가져왔다. 일본이 남기고 황급히 떠나고 남긴 자산이 남한 내 부의 불평등 시초였다면, 사법부에서 이법회 문제는 학문과 권력에서의 불평등 시초였다. 1945년 해방으로 중단된 조선변호사시험 응시생 전원에게 합격증을 배부한 '이법회'문제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는 공정성 문제의 기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에 이들 수험생들이 시험에 응시해 합법적으로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기간동안 자격없는 이들에게 주어진 기득권의 문제는 법조계에 대한 일반의 '불공정'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적산(敵産)은 점령지대 안에 소재하는 적국 소유 또는 적국국민 소유의 재산을 말한다. 승전국인 미국 입장에서는 조선에 있는 일본재산은 모두 미국 것이었다. 승전국에 귀속된다는 의미에서 '귀속재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조선인 입장에서 보면 '적산'은 일제가 식민통치 기간 동안 수탈한 우리 재산이었다. 여기에서 수많은 혼선이 빚어졌다... 한동안 적산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적산 처리는 남한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갈리는 첫 분기점이었다. 정치적 힘이 곧장 경제적 힘으로 연결된 계기이기도 했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163/526


 일제시대 시험에 붙은 사람들을 법원에서 내쫒는다고 해서 일제유산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법조계만큼 해방전후 구분이 의미없는 분야도 없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의 경성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미 몇차례 운을 띄운 이법회 문제다. 이법회는 유태흥 대법원장이 말하는 '열패고(劣敗苦)'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36/526


 이법(以法)은 문자 그대로 '법대로' 하자는 의미였고, 자신들의 문제를 법으로 풀겠다는 의지를 보인 작명이었다. 이법회 회원들의 요구사항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이렇다. "이법회원들은 변호사시험 중단의 책임은 일본국 정부나 조선총독부나 시험위원회에 있다는 것이고, 만일 끝까지 시행하였더라면 응시자 전원이 합격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하여, 조선 불성취의 책임을 수험생 측에 전가시킨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고집하며, 응시자 전원에게 변호사시험 합격증서를 교부하라고 요구하였다 한다."(p438)... 이들의 실체가 중요한 이유는 그 숫자 때문이다. 1945년도에 합격증을 받았다고 알려진 106명은 22년 동안 시행된 이전의 전체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 총수에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38/526


 이와 함께, 해방 직후 한국전쟁은 또 다른 불행을 가져온다. 1961년 위청룡 검찰국장의 죽음에서 드러나듯, 조금이라도 북한과의 연계성을 의심받을 경우 좌익으로 몰려 인사상의 불이익은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법률가들. 한국전쟁 이후 이들 앞에 펼쳐진 세상은 반공(反共)을 국시로 한 군사정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군사정부에 협조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으로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위청룡의 죽음에 대해 완벽한 진실을 알 수는 없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위청룡의 인생은 크게 보면 두가지 이유로 망가졌다. 첫째는 삼팔선 이북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고, 둘째는 해방후에 너무 늦게 남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는 평남 평원에서 태어나 평양 지방법원에서 서기로 일했고 거기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조만식 선생을 흠모해 북한 검사가 되었고 오래되지 않아 밀려났다. 남쪽 사람들은 겪지 않았을 일이었다... 위청룡은 북한의 무모한 대남공작과 그에 맞서는 남한의 무리한 수사 사이에 끼어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억울한 법률가였다. 별이 저절로 굴러 손에 들어오던 시대였으나 동시에 누구도 안정하지 못한 시대였다. _ 김두식, <법률가들> , p428/526


 그렇지만,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군사정권의 압력에서도 과거의 사법부는 자신들의 사찰에도 너그러운 그들의 후배들과는 달리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사법파동을 위해 양심을 가진 판사들이 사직서를 던져가며 저항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법부는 인혁당 사건(1964), 동백림 사건(1967) 등을 거치며 서서히 몰락해 갔음을 우리는 한홍구의 <사법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법파동은 사법부 스스로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력에 맞섰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도였지만, 사법파동의 허망한 결말은 오히려 사법부로 하여금 저항의지를 잃게 만들었다. 이범렬에 이어 홍성우, 김공식 등이 법원을 떠나고, 1973년의 법관 재임용 심사로 평소 권력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던 법관들이 다 잘려 나가면서 법원은 힘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유신 이후에는 중앙정보부원들이 대놓고 판사실을 들락거리게 된 것이다. _ 한홍구, <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 p69/384 


 한홍구는 같은 책에서 박정희의 유신 정권 아래에서도 끊임없이 저항해온 사법부가 몰락한 결정적 계기를 '대법원장 비서관 뇌물 사건'으로 바라본다. 여러 검사와 판사, 변호사가 파면과 사임, 제명을 당한 이 사건을 통해 판사와 검사는 독립된 사법부가 아니라 안기부의 통제를 받는 기관으로 전락하는 굴욕의 역사가 1980년대 사법부의 역사였다. 


 1983년 1월 1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업자에게서 뇌물을 받고 부하에게서 상납을 받은 '전' 철도청장 안창화의 구속을 발표했다. 이때 검찰은 유태흥 대법원장의 '전' 비서관 강건용(이사관)이 "구속 중인 형사피고인을 보석으로 풀려나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피고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뇌물 액수가 크다는 데 있지 않았다. 강건용이 구속될 때만 아무도 이 사건이 일파만파 번져가 검사 두 명의 파면, 서울지검장과 서울지검 남부지청장의 인책 사임, 부장판사 두 명의 사임. 변호사 세 명의 제명 등 사법사상 전무후무한 파문을 낳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을 통해 안기부는 검찰과 법원에 대한 확실한 힘의 우위를 과시했다. _ 한홍구, <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 p147/384


 <법률가들>, <사법부>에 서술된 사법부의 지난 역사는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 법조인들과 사법파동 이후 남은 판사들의 권력지향적 모습, 1987년 민주화 이후 국정원으로 축소된 권한을 대신한 검찰권력의 대두로 요약된다. 그 사이 진정으로 시민과 법 앞에 공정성을 위한 저항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움직임은 '잔 속의 태풍(A Storm In The Teacup)'에 불과했던 것이 민과 법조인들 사이의 채울 수 없는 틈을 만들지 않았을까. 자신의 눈을 '무지의 베일'이 아닌 선글라스로 가린 법조인들의 모습은 정의로운 판관(判官)이 아닌 기름부음을 받은 왕(王)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 또한 당연할 것이다. 법에 기댄 권위자에 의한 통치.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시민들의 삶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면 '아주 많이' 좋아진 것은 재벌과 검찰이었다. 과거에는 독재자가 정보기관이나 권력기관을 서로 견제시켰고 재벌의 힘도 상당히 통제했다. 그러나 철저하지 못한 민주화는 민주공화국 대신 삼성공화국과 검찰공화국을 불러왔다. 재벌의 불법행위를 단속해야 할 검찰은 재벌에 의해 관리되는 '떡찰'이 된 지 오래다. 통제받지 않는 두 권력, 삼성과 검찰의 결탁은 진정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이제 검찰개혁은 한국 민주주의의 존망을 가름할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_ 한홍구, <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 p354/384


 플라톤(Platon, BC428 ? ~ BC348)은 초기에 <국가 정체 Politeia>를 통해 철인(哲人)에 의한 정치를 주장했지만, 후기에는 <법률 NOmoi>에서 법률에 의한 지배로 그의 통치철학으로 사상의 변화를 말한다. 이러한 변화가 사람에 의한 이데아의 실현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법률(法律)이라는 시스템의 구축으로의 변화라고 한다면, 오늘날 스스로 권력화한 사법부의 모습은 법률에 근거한 법률가의 정체에 다름 아니다.


 5권 473d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이 : ho philosophos)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basileus) 또는 '최고 권력자'(dynastes)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지혜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 권력'(dynamis politike)과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 : philosophia)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kakon paula)은 없다네. _ 플라톤, <국가 정체> , p365


4권 712a 일체의 권력(dynamis)에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원칙)이 마찬가지로 타당합니다. 곧, 최대의 권력이 한 사람에게 있어서 지혜로움(phronein) 및 절제 있음(마음이 건전함)과 한데 합쳐질 때, 그때에 최선의 정체(나라 체제 : politeia he ariste)와 그런 법률의 탄생이 실현을 보지, 그 밖의 방법으로는 결코 그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p315)...  722e 정말로 nomoi(법률)인 것들, 바로 이것들을 우리는 국법이라 말하는데, 이것들의 전문(前文 : prooimion)은 일찎이 아무도 말한 적이 없으며, 설사 그걸 지은 사람이 있었더라도, 그게 햇빛을 보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참주적 지시로 언급되었던 것, 즉 자유롭지 못한 자들로 우리가 말한 의사들의 지시들에 비유되었던 것, 이것은 절대적인 법(nomos akratos)으로 여겨지고요. _ 플라톤, <법률>, p246


 스스로 신성가족화하고, 이러한 신성가족에 저항했을 때 어떤 대가가 따르는 지는 우리는 지난 사건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과거와는 달리 올림푸스로 가는 길이 '사법고시'라는 외길이 아닌 '로스쿨 law school'이라는 여러 길이 났음에도 이 여정에 오를 수 있는 이들은 최소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선택된 이들이라는 현실속에서 우리는 보다 진지하게 이러한 사법부의 문제에 대해 장단기적인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법부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다음 문제 중 하나임이 분명하지만, 이 문제를 풀게 될 지 아니면 시험지까지 도로 빼앗기게 될 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우리의 못다한 숙제를 마저 하기 위해서라도 내일 3월 9일 선거와 선택은 우리에게 중요할 것이다...


 저는 법원이나 검찰에서 가족이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바로 이 신성가족을 떠올립니다. 법원 신성가족의 일원이 되러면 사법시험이라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판사직 진입이라는 더 좊은 관문도 통과해야 합니다... 돈과 압력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가족 내부의 청탁은 변호사들의 청탁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됩니다. 변호사들의 청탁은 어떤 순수의 탈을 써도 결국은 돈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117/276


 이 거대한 가족구조 안에서 혼자 깨끗한 척해봐야 검찰 분위기가 바뀔 리가 없고, 싸가지 없다고 찍힌 검사 꼴만 될 뿐입니다. 그 검사가 싸가지 없는 이유는 이 거대한 신성가족을 무시하고, 그저 '현재 검사인 사람만 검사'라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가치를 무너뜨린 사람에게는 호적에서 파내는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게 마련입니다. 신성가족은 프리미엄도 누리지만, 그에 따른 의무도 준수해야 합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130/276


이 모든 문제는 변호사와 의뢰인, 변호사와 판검사들 사이의 소통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변호사와의 안면이 왜 중요합니까? 판검사들이 일반적으로 법정에서 오가는 공식적인 이야기에는 신경을 덜 쓰고, 뒤로 안면 있는 변호사가 전해주는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_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p237/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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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은) 이어 "이런 분들이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서로 경쟁해서 원칙 있는 정치를 펼쳐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노 후보의 발언 직후 연설장에 않아 있던 정 대표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으며 노 후보는 발언 직후 연설장 분위기가 미묘해지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대해 정 대표는 노 후보 발언 직후 종로 4가 한 음식점에서 국민통합21 주요 당직자들을 소집해 긴급 대책회의를 갖고 "노 후보가 단일화 정신을 훼손한 채 이미 대통령이 된 것을 전제로 전횡을 하는 듯한 졸렬함을 드러냈다"며 지지를 철회키로 의견을 모았다. _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 편 : 노무현 시대의 명암 2>, p318/642


 오늘 새벽의 안철수-윤석열의 단일화 뉴스는 선거(사전투표) 전날 이뤄진 전격적인 선언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이로부터 2002년 12월 18일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결렬화를 떠올리는 듯하다. 선거에 미칠 파급력면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단일화 성사와 파기는 원심력과 구심력처럼 서로 다른 방향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조금은 다르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정치인 안철수의 '새정치' 여정의 끝에서 20여년 전 홍사덕(洪思德, 1943~2020)의 무지개 연합을 떠올리게 된다.


 각기 다른 이유로 '정치 자체의 위기'를 걱정하는 양대 세력에게 2000년 4월 13일로 예정된 제16대 총선은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4.13 총선을 염두에 둔 정치적 이합집산이 활발해진 가운데, 가장 먼저 주목을 받은 이는 뛰어난 언변과 수려한 용모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홍사덕이었다.(p38)... 홍사덕은 1월 8일자 <한겨레>인터뷰에서 "국운을 개척하는 심정으로 새로운 정치를 하기 위해 무지개 연합을 만든다"고 선언했고, 그 결과 1월 19일 '무파벌/지역타파/개혁신진'을 표방한 '무지개연합'을 공식 출범시켰다. 그러나 그는 출범식 선언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 전인 1월 27일에 한나라당에 입당함으로써 그의 홈페이지에는 격한 비판이 빗발쳤다._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 편 : 노무현 시대의 명암 1>, p39/618


 10년 넘도록 실체가 모호한 새정치를 표방하면서 여러 차례 번복하고, 단일화 이후 자신의 몸값과 안랩 주가를 올렸던 1,900억대 재력가 안철수와 20~30억이 없어 자신의 뜻을 접고 한나라당에 들어간 홍사덕을 직접 비교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도 생각하게 되지만, 적어도 국민과의 약속을 눈깜박할 사이에 뒤집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여겨진다. 안철수와 홍사덕을 통해 우리나라 정치에서 양당제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와 함께 다당제 정치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안철수의 재산을 생각하면 그에게 부족한 것이 돈은 아니었을텐데, 그럼에도 그가 독자적으로 완주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홍사덕의 무지개연합이 보여준 한계점은 한국정치에서 '돈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점이라면, 안철수의 새정치가 보여준 한계점은 무엇일까. 정치테마주로서 '안랩'의 주가 부양이 정치인 안철수가 아닌 경영인 안철수에게 더 중요했기 때문일까. 정말 잘 모르겠다...


 PS. 홍사덕과 기자들과의 대담 내용을 보면서 우리나라 기자들도 저런 깊이있는 질문을 할 때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되는 것을 보면 사회가 계속 발전해온 것만은 아닌 듯하다.


 정치가 현실인 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1주일 만에 뒤집어도 된다는 것까지 의미하진 않을 게다. 그와 같은 '변절'에 대해 홍사덕 자신이 내세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간이 조금 지난 뒤 홍사덕은 기자들과 주고받은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 : 자신이 생각하는 당을 만들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답 : 어림짐작 20억, 넉넉히 계산하면 30억이다.

 문 : 결국 20억이 없어서 한나라당을 선택한 건가?

 답 : 좋은 뜻 있는 사람에겐 돈이 따르지 않는 것이다.

 문 : 무지개 연합을 시도했지만 돈이 안 모여서 한나라당으로 갔다고 했는데, 한나라당으로 가니 돈 사정이 좀 풀리나?

 답 : 여기는 큰살림이니까 나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문 : 홍사덕 위원장은 말을 참 잘한다. 그런데 말솜씨보다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이다. 아무리 말솜씨가 좋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궁색하면 말같이 들리지 않는다. 무지개연합이라는 새 정치를 주창하다가 한나라당이라는 헌 정치를 하려 하니 요즘 당신이 하는 말이 말같지 않다는 생각 안 해보았나? _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2000년대 편 : 노무현 시대의 명암 1>, p43/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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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2-03-06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당신이 하는 말이 말 같지 않다-
사이다:-).
현재 언론도 언젠가는 부패도가 내려갈 터닝포인트를 갖게 되지 않을까요. 막연하게라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3-06 12:50   좋아요 1 | URL
저도 2000년의 언론 기자가 이렇게 핵심을 잡아 이야기하는 글을 읽고 시원함과 함께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함께 느낍니다. 개인적으로는 MBC 100분 토론에서 유시민 작가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언론 현실에 대해 밝힌 생각에 공감하게 됩니다. 레거시 미디어가 개선되기를 바라기보다 뉴미디어에 의한 대체가 더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갱지님 감사합니다.^^:)
 

  2021년 8월 15일 광복절 밤에 의미있는 행사가 있었다. 독립투쟁의 장군 홍범도(洪範圖, 1868 ~ 1943)의 유해 봉환식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대 무장독립투쟁의 상징으로 봉오동 전투(1920)와 청산리 전투(1920)년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운 인물, 그렇지만 1921년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 이후 잊혀져간 장군. 쓸쓸하게 중앙아시아에서 말년을 보내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 <홍범도>가 상영되는 고려극장에서 경비를 서다 괴한과의 격투 후 며칠 뒤 사망한 인물. 이 정도가 일반에게 알려진 홍범도에 대한 대강이 아닐까 싶다.


 1920년대 일본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부대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金佐鎭, 1889 ~ 1930)과 '북로군정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줄곧 일본군의 가장 중요한 추적 목표가 되었던 인물은 홍범도였고 독립군 부대의 통일과 단결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도 그였지 않은가? 후일 북로군정서의 활약이 널리 알려졌던 것은 군정서가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던 배경이 있다. 반면에 홍범도 부대는 러시아에 있던 대한국민의회의 지원을 받았고 대한국민의회가 1920년 2월 중순 이후 상하이 임정과 불편한 관계가 되자 아무래도 홍범도는 임정과는 그리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_ 장세윤, <홍범도> , p242/348 


 홍범도와 상해임시정부와의 껄끄러운 관계에 더해 그가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사실은 그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일 수 없는 주요한 이유가 된다. 유해봉환식에 사용된 사진 속의 권총 역시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 ~ 1924)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일정부분 레닌,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 ~ 1940)과 사상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레닌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고 위로했으며, 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줘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면서 홍범도에게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 범도는 매우 기뻤다. 그는 레닌에게 합리적 한인정책을 펴달라고 했다. 면담이 끝난 뒤 범도는 레닌, 트로츠키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p278)... 1927년 10월 범도는 소련공산당에 당원으로 가입하였다. 당증번호는 578492번. 사회주의 사상이나 이론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 취지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_ 장세윤, <홍범도> , p282/348 


 다만,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 ~ 1953)과 대척점에 있던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를 보면 민족주의에 대한 레닌의 생각은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스탈린과 달랐던 듯 하다. 일본의 중국 침략을 비난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의 입장을 인정한 레닌에 대해 홍범도가 우호적인 마음을 가졌던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미국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영국으로 그레이트 게임의 파트너로 일본에 우호적인 상황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사회주의/공산주의'는 분명 하나의 선택지였을 것이다. 



 차르 러시아와 전세계 피억압 민족들의 발전에 내재하는 혁명 역량을 레닌은 경탄할 만한 깊이로 평가했다. 일본은 노예화를 목적으로 중국을 침략했다. 중국은 해방을 목적으로 일본에 대항했다. 이 두 현상을 똑같은 정도로 '비난하는' 위선적인 '평화주의'는 레닌의 경멸을 샀을 뿐이었다. 제국주의 억압 전쟁과 대조되는 민족해방 전쟁은 레닌에게 일국 혁명의 다른 형태에 불과했다.... 레닌의 아류들, 특히 스탈린은 피억압 민족 투쟁의 진보적, 역사적 의의에 대한 레닌의 가르침으로부터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임무를 도출했다. 이것이 이들의 치명적 오류다.(p756)... 이 모든 오류를 통해 스탈린은 민주주의나 '민주주의 독재'를 저속하게 이상화시켰다... 스탈린 일당은 이 오류의 방향으로 서서히 나아가면서 민족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과 완전히 결별한 채 중국 혁명을 재앙으로 몰고 갔다. _ 레온 트로츠키, <러시아 혁명사> , p757


 <홍범도>에서 저자 역시 '홍범도'라는 인물을 바라볼 때 지나친 영웅주의가 아닌 사회적 인물로 평가하길 당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를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라는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의 신념, 행동으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과거 독립투쟁가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31 착한 스승(베르길리우스)은 내게 "너 지금 보는

이 영혼들이 누군지를 넌 묻지 않느뇨?

그럼 너 더 나아가기 전에 내 알리고 싶노라.


34 저들이 죄를 짓지 않았고 공이 있다 해도 

그것은 너 믿는 믿음의 한 몫인

성세 聖洗를 못 받았기에 넉넉치 못하니라.


37 그리고 그리스도교 이전에 있었던 만큼

맞갖게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였나니

나 역시 이들 중의 한 사람이로다.


40 다른 죄 때문이 아니라 다만 이 탓으로

우리는 버림을 받고 오직 이 흠집 까닭에

가망도 없이 뜬 소망 속에 사느니라."


133 그를 우러러 모든 이가 그에게 영광을 드릴 때

누구보다도 먼저 그이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거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보았노라. _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제4곡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 ~ 1321)의 <신곡 La Divina Commedia>에서는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 ~ BC 399), 플라톤(Platon, BC 424 ~ BC 347) 과 같은 인물들도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벌을 받는다. 그나마 림보(Limbo)에 머물러 최소한의 벌을 받는 것으로 설정되지만, 예수 탄생 이전에 태어나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없었던 이들도 믿음이 없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는 설정은 오늘날 관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중세의 이러한 구원관과 일제 하 독립투쟁가들의 사상을 문제삼는 것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최근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1886 ~ 1947),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 1898 ~ 1958) 등에 대한 재평가도 분명 이뤄져야할 것이다. 늦은감이 있지만 이들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쟁가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 변화는 다행이라 여겨진다.


 다만 우리가 주의할 점은 홍범도의 투철한 생애와 민족운동을 개인적 관점이나 '영웅사관'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즉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은 그가 살던 시기의 사회와 민족, 국가가 요구하던 시대적 과제와 모순을 척결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홍범도라는 뛰어난 인물을 사회와 고립된 한 개인의 입장이 아닌, 민족과 사회 등 여러 분야와 관련을 맺으며 존재하는 '사회적 인물'로서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_ 장세윤, <홍범도> , p323/348


 민족을 사랑하고, 일본에 적극 저항한 인물. 1920년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대파했지만, 바로 뒤이어 일어난 간도참변(경신참변 庚申慘變, 1920)으로 간도 지역 조선인 마을에 큰 피해가 생기자 자유시로 건너간 그의 행적 속에서 위엄있지만 자애로운 외강내유(外剛內柔)의 인물의 모습을 발견한다.


 농부로서 홈범도 대장은 시넬(러시아식 군복)과 또는 기다란 가죽끈을 어깨에 걸쳐 멘 야전가방은 벗지 않았다. 가방 속에는 나간 권총이 있었다. 레닌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란다.  아, 선생님. 어찌 그렇게 일하십니까? 시넬을 입고 가방을 멘 채...... 이 홍범도는 시넬과 가방을 벗어놓고는 밥도 못먹는다오 하는 그는 조선 낫으로 그냥 가을을 하였다. 선생님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도와?...... 왜놈들을 벨 때 돕자는 사람이 있으면 눈물나게 반가웠지만 조를 벨 때 돕자는 건 그리 반갑지 않어. _ 장세윤, <홍범도> , p288/348


 나(홍범도)는 요즈음 중국과 러시아령 사이를 여행하면서 각처를 두루 돌아보고 동포들을 방문하여 보았다. 그들은 산에서 사슴을 쏘고 시장에서 땔나무를 팔며, 감자를 심어 양식으로 삼고 엿을 팔아먹고 살았으니 이들은 모두 지난날의 의병 장령이었다. 그들은 쓰러져 가는 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로지 노래하고 읊조리는 것은 조국뿐이며 자나깨나 조국이었다. 술을 마신 후에는 비분강개하여 서로 노래 부르고 통곡했다. 세속의 소위 명예나 공리 따위는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다. 오직 몸 속 가득한 끓는 피는 충의와 비분에서 터져 나왔고 (그들의 투쟁은) 죽은 후에라야 끝날 결심이었으니 이 어찌 참된 의사 義士가 아니겠는가? 나는 심히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_ 장세윤, <홍범도> , p161/348


 이제 18일이면 한 시대를 호령했던 장군은 대전 현충원에 안치될 것이다. 편히 쉬시라 말씀드리고 싶지만, 같은 곳에 위치한 간도특설대의 백선엽(白善燁, 1920 ~ 2020)과 같은 이들이 이웃이라 선뜻 그런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장군 그리고 독립유공자들이 편히 쉬실 수 있을 때가 오도록 우리가 항상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사진] 장군의 귀환https://www.mpva.go.kr/hongbeomdo/selectBbsNttList.do?bbsNo=325&key=1651)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쉽게 말하기 어렵겠지만,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시리즈를 출판한 출판사 역사공간에서는 <홍범도> 개정판에서 아래의 문장 다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에 그의 유해가 크즐오르다에서 고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인 1962년 3워 1일 한국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59년부터 1965년까지 크즐오르다에서 발행되는 재소 한인들의 한글신문 <레닌기치> (1991년부터 <고려일보>로 제호가 바뀜)에 소설 <홍범도>가 연재되었다. 그리고 1984년 11월 초에는 크즐오르다의 묘지에 반신동상이 세워졌으며, 1989년 5월 26일에는 크즐오르다에 '홍범도 거리'가 명명되었다. _ 장세윤, <홍범도> , p299/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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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8-16 16: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명문에 감동받았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8-17 10:18   좋아요 3 | URL
독립을 위해 애쓰신 모든 분들의 삶에 비할 데 없이 부족한 글이지만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mini74 2021-08-16 19: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해봉환식을 보는데 훌쩍거리게 되더라고요. 자유시참변과 그 후의 고된 삶들. 현충원의 잘못된 이웃들은 빨리 이사가길 바라며~ 이렇게 글 남겨주셔서 참 좋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8-16 22:14   좋아요 1 | URL
저 역시 눈물이 나더군요... 너무도 뒤늦게 모셔온 것에 대한 죄송함, 감사함 그리고 다행이라는 안도감 등 여러 마음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비록 누추한 곳에 모셨지만, 현충원 자리가 과분한 이들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줘야 겠지요... mini님 감사합니다.^^:)

초란공 2021-08-16 19: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유해를 모시는데도 결정되기 전까지 북한과 물밑 신경전을 벌였더군요.

겨울호랑이 2021-08-16 22:18   좋아요 2 | URL
초란공님 말씀처럼 직전까지 북한과 치열한 외교전이 있었다지요. 국력에서 앞서서 장군의 유해를 남쪽으로 모셨지만, 장군의 고향이 평양인 점과 카자흐스탄이 과거 소련의 일부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북측의 주장도 이해할만하다 여겨집니다. 장군을 모셨으니 잘 모셨다는 평가를 받도록 이후 처리를 잘 해야겠습니다...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은 담화를 발표하여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하에 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문제이다"라고 인정했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금 표명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1994년 무렵부터 군'위안부'는 자유 의지로 매춘을 한 '공창 公娼'이라는 의견이 각료들 사이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 후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는 군'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10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1946 ~ )의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은 위안부(慰安婦) 문제를 둘러싸고 극우세력들이 제기하는 주장에 대한 답이 간결하지만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의 <제국의 위안부>, <반일종족주의>에서도 인용되는 극우 논리는 무엇이고, 사실(fact)는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일본 극우 세력들의 논리를 요약하면 군 위안부의 주체는 군(軍)이 아닌 민간업체 중심이었으며, 모집된 이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모집된 이들로 일체의 강제성이 없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일본(군)은 오히려 모집된 위안부들에게 행해진 폭력 등에 대해 엄중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로 수렴한다. 반면, 자발적으로 모집된 이들 위안부들은 이러한 일본의 처사에 대해 배은망덕하게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문제는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에게 있다. 조선에서의 모집은 조선인에 의해 주도된 것이기 때문에 조선 내부 문제이며,  구체적으로 미개한 조선 시대의 가부장제의 문제라는 것이 주된 논지다. 이러한 일본과 한국 극우들의 논란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에서는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


 일본 정부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좁은 의미의 강제'만이 문제인 것처럼 말합니다... 군이나 관헌이 현장에서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면 책임이 없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군이 모집을 지시했다면, 바로 군이 최고책임자인 것입니다.(p29)... 업자 및 여성의 도항과 전지, 점령지에서의 이동에는 군이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군 위안소로 사용할 건물은 군이 접수해서 업자에게 이용하도록 했으며, 건물의 개조도 군이 했습니다. 또한 군위안소 이용규칙, 이용요금 등도 군이 결정했습니다. 여성들의 식료품, 의복, 침구, 식기 등을 군이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위안부'의 성병 검사는 군의 軍醫가 했으며, 각 부대는 군위안소를 감독, 통제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군과 정부의 공문서가 공개되어 있으므로, 간행된 자료집을 통해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업자가 아니라 군이 주역이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36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에서는 모집 주체가 민간업체가 아닌 군에 있음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모집 주체로서 '군'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민간에 의한 모집이라는 근거가 되지만, 모집된 이들이 군의 허가 없이 동남아시아 최전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휴전 시에도 민간인 통제선 바깥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엄격하게 처벌되는 상황에 과연 군의 묵인 또는 참여가 없이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그런 면에서 일본군의 책임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주보란 군대 내에 있는 물품 판매소인데, 규정이 개정되면서 "야전 주보에서는 전항 前項 외에 필요한 위안시설을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추가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필요한 위안시설'의 주요시설로 위안소가 설치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군'위안부'제도는 군의 부속 병참시설로서 설치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한층 더 확실해진다고 생각합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37


 이와 함께, 위안부들의 자발성 문제가 제기된다. 일본 극우의 논지는 이에 대해 공창(公娼) 제도는 당시 세계적인 추세였으며, 일본 역시 이에 이러한 추세와 함께 있었을 뿐이며, 모집된 이들에 대한 강제성은 없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에서는 국제조약에 따르려는 움직임은 일본 본토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실제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나마 조선, 대만 등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 규정이었음을 말한다. 실제로, 중국에서 감염된 일본군 성병 환자를 역학 조사한 결과 위안부 비율은 대략 조선 : 중국 : 일본 = 52: 36 : 12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데(p93), 90%에 달하는 다수의 위안부들이 식민지 또는 점령지에서 살던 이들이라 점을 감안해본다면, 위안부 모집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뒤집기에 부족 할 것이다.


 현지 부대가 업자를 이용하여 내지內地(일본 본국)에서 군'위안부'를 모집하고 있다고 하는, 내지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이 표면화되지 않도록 군과 경찰이 긴밀하게 연락을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내지에서는 위법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통제했지만, 식민지에서는 그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식민지에서는 군이나 경찰이 선정한 업자의 경우에는 위법적인 수단으로 군'위안부'를 모집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56


  내무성 통첩 제77호(1938년 2월 18일)라는 것도 부정확한 인용입니다. 이 통첩은 '위안부' 모집은 부녀 매매에 관한 국제조약, 즉 '추업을 위한 부녀 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과 '부인 및 아동의 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이라는 취지에 위배될 우려가 있으니, 이것에 저촉되지 않도록 지시합니다. 또 군의 양해와 연락이 있었다고 공공공연하게 말하는 업자는 엄중하게 단속할 것,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군의 강력한 요구 때문에 군'위안부'의 도항 渡航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나, 군이 이러한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숨기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지시가 확실하게 지켜졌다면 일본 내지에서 강제로 보내졌던 여성은 이미 유곽 遊廓 등에 인신매매된 여성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통첩이 조선, 대만에도 적용되었을까요? 일본 정부는 부녀 매매에 관한 국제조약을 조선, 대만 등의 식민지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책은 일본 내지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57


 공창제도가 노예제도라는 것을 숨겨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하려고 한 일본 정부가 '창기 단속 규칙'을 만들어 창기와 매춘하는 자가 대좌부 貸座敷, 즉 성매매 시설을 빌려서 자유의지로 성매매를 하고 있는 것처럼 꾸몄기 때문입니다. 일본 내지의 경우뿐입니다만, 창기는 싫으면 언제든지 폐업할 수 있는 '자유 폐업' 규정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법률상의 규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규정이 있다는 것을 창기 자신은 모르고 있었고, 가령 알았다 해고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기 때문인데, 업자 등의 방해로 신고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원자의 도움을 받아 운 좋게 경찰에 신고해서 수리되었다고 해도, 이번에는 업자가 재판을 걸어 선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합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77


 대체적으로 일본 극우들의 논리는 일본(군)이 주도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이러한 실증사관(實證史觀)에 입각한 논리 전개는 언뜻 과학적인 방법으로 보이지만, 사료(史料)에 없는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좋은 예를 우리는 이영훈(李榮薰, 1951 ~ )의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 후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페이퍼의 흐름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이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서두에서 소개한 대로 근년의 수량경제사 연구는 조선의 경제가 19세기에 들어와 정체를 거듭하다가 끝내는 심각한 위기 국면에 봉착하였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1860년대부터 본격화한 위기의 와중(渦中)에서 사회는 분열하고 정치는 통합력을 상실하였다. 보기에 따라 위기는 1905년 조선왕조의 멸망이 어떤 강력한 외세(外勢)의 작용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모든 체력이 소진된 나머지 스스로 해체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19세기의 역사상은 1950년대 이래 그들의 전통사회가 정상적인 경로로 발전해왔으며, 그들의 역사가 왜곡된 것은 제국주의의 침입 때문이라고 굳게 믿어온 한국의 많은 역사학자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82


 근대 시기 조선을 내재적 모순에 의해 망할 수 밖에 없는 사회로, 대안 없는 사회에서 일본이 근대화를 통해 근대 한국으로 만들었다는 논리 전개가 <반일종족주의>로 이어지는 것을 최근 저자의 행보를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리뷰에서 다루겠지만, 개략적으로 책의 주장에 대한 몇 가지 문제점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19세기의 생산성 저하 문제가 과연 조선만의 문제였는가? 그리고 이러한 위기에 대해 대처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는가? 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싶다. 


 먼저 대략 클라이브 폰팅(Clive Ponting)의 <녹색 세계사 A New Green History of the World: The Environment and the Collapse of Great Civilisations>에서는 19세기에 인구 증가로 인한 대기근, 전염병의 창궐, 대규모 산림 벌채로 인한 자원 고갈 등의 문제가 세계적으로 발생했음이 지적된다. 이처럼 문제의 세계적 규모를 생각한다면 19세기 생산성의 저하 문제는 조선만의 문제로 한정지을 수는 없다. 마치 2015년 메르스 유행때와 2020년 코로나 19 유행이 다르지만, 유행병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방역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과 논리 전개에서 무엇이 다를 것인가. 2015년 메르스는 오직 한국에서만 유행한 반면, 2020년 코로나 19는 범세계적인 질병임을 생각한다면, 19세기 생산성 저하 문제를 상관분석에 투입된 몇 개의 변수를 통해서 조선 내부의 문제로 결론짓는 것은 성급해 보인다. 또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동학(東學)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일으켜 조선을 삼키려 한 일본에서 찾는 저자의 의도 또한 지극히 의심스럽다 하겠다. 이러한 의심은 결과론적이지만, 후에 <반일종족주의>에서 실현된다.


 잉글랜드도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농업 방법을 들여와서 18세기 중엽에 이르자 인구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식량 생산이 증가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하지만 이것은 잠시였고, 1780년 무렵부터 19세기 말까지 전례 없이 인구가 증가하자 다시 인구가 농업 생산성을 위협하게 되었다. 인구는 1년에 1퍼센트씩 늘어나는데, 아무리 잉글랜드의 농업 체계가 개선되었다고 하더라도 곧 식량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_ 클라이브 폰팅, <녹색 세계사> , p137/534


 1817년에 벵골에서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고, 영국군과 인도군의 유행과 함꼐 봄베이 등 이전에는 콜레라를 겪지 않았던 인도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 갔다. 그 후 100년 동안 3,800만 명의 인도인이 콜레라로 죽었다. 콜레라는 인도로부터 배와 전쟁을 통해 전파되었다.... 19세기 초 이래 여러 차례 콜레라가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다._ 클라이브 폰팅, <녹색 세계사> , p272/534


 또한, 문헌자료는 쓰는 이들의 입장이 담긴 주관적인 자료라는 한계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뒤 모든 자료가 불타고 조선일보 신문 자료만 기적적으로 남았다고 해서 100년 후 사람들이 우리를 모두 조선일보 기사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았다고 해석한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억울해 하지 않는 소수도 물론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실증사관에 따르면 우리는 할 말이 없어진다. 어쨌든 조선일보는 현재 우리나라 발행부수 1위의 영향력있는 신문이니까.


 일본 정부와 군의 공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강제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강제가 있었다고 해도 강제하라던가, 강제했다고 군과 정부가 공문서에 기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과 범죄 행위를 일부러 공문서에 남겨두겠습니까?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41


 이러한 문헌자료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생존자들의 증언(證言)이다. 자신들의 몸으로 과거의 참상을 낱낱히 고발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이때문이다. 1991년 8월 14일.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30년 전. 고(故) 김학순(金學順, 1924 ~ 1997) 할머니의 용기있는 증언으로 일본군의 만행이 세상이 널리 알려졌지만, 일본은 30년 동안 이를 부정하고 있다. 


 군위안소에서 여성들이 어떠한 상태에 놓여있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서만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각 증언에 대한 사료 비판은 필요하지만, 사료 비판을 거친 여성들의 증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73


 일본군 '위안부(종군위안부)'였던 김학순 씨가 처음 공개적으로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던 것이 1991년입니다. 당시 군 '위안부'였던 여성들은 고령으로 별세 소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은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9


 30년 동안 위안부 할머니들의 진실 규명에 대한 요구에 대해 이들은 모집 주체, 자발성 등의 문제로 본질을 피해가려 하고, 때론 우리들도 여기에 흔들릴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바라볼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기본적인 사실이 아닐까? 언제나 기본적인 사실을 기억하고 한 걸음씩 나아갈 때 진실에 가까워질 것이다.


 부시 정권에서 국가안전보장회 아시아 선임부장을 역임한 마이클 그린 씨는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군'위안부'였던 여성들이) 강제로 당했는지 어떤지는 관계없다. 일본 이외에는 누구도 그 점에 대해 관심이 없다. 문제는 위안부들이 비참한 일을 당했다는 것으로, 일본의 정치가들은 이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13


 8월 14일 '위안부 기림의 날'이 8월 15일 '광복절' 앞에 있다는 사실은 우연이겠지만, 이 안에서 우리가 진정한 광복을 맞이하기 전에 풀어야 할 과제가 '위안부' 문제라는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와 함께 성폭력 피해 여중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안타까운 사고가 어제 발생했다. 일본에 대한 책임있는 자세를 요구함과 동시에 더이상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모두 돌아봐야 함을 '위안부 기림의 날'을 통해 생각해 본다...



위안이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는 스포츠, 영화, 연극 또는 책을 제공하는 등의 건전한 오락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본군 지휘부가 처음부터 생각했던 것은 여성을 물건 취급하여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24 - P24

군인마저도 움추러들게 하는 군위안소에서 컨베이어 벨트식으로 밀려오는 병사를 상대해야만 했던 여성들의 대우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_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p89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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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8-14 17:2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네요.
기림엔, 기억하자는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너무 많이 잊고 살고 있습니다.
위안부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8-14 15:16   좋아요 6 | URL
정말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과 일들이 우리에게 잊을 것을 강요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잊지 않아야할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위안부 문제, 세월호 문제 등이 여기에 속한다 생각합니다. 기억의 소거에 저항하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페넬로페님 짧지 않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8-14 15:3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실증주의 사관은 이미 불합리성을 증명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나라 주류 식민사관 역사학자들이 붙들고 있을 뿐.
자료가 다 있다고 한들, 골라담는 좌판이 되는...

시오노 나나미가 위안부 얼마나 상냥한 말이냐고 했다는 기사를 보고 익히 그녀의 사상은 알고 있었으나 여성인 그녀가 그런 말을 했다는데 분개.
책들을 다 버릴까 했습니다.
지식인들의 필력이 무서울때가 있습니다.ㅠ
이영훈도 그렇고 복거일도 그렇고....

겨울호랑이 2021-08-14 17:45   좋아요 4 | URL
데이터에 근거한 실증주의 과학의 한계를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알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 여겨집니다. 세부 데이터보다는 기본 가정에 전제되어 있는 문제점 등에 대한 비판과 공유가 필요한데 이러한 점이 잘 되지 않고 자신의 입맛대로 재단되는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반박하기 어려운 전문가들의 주장이 이때문에 무서운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붕붕툐툐 2021-08-14 23: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늘 위안부 기림의 날에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해요!!

겨울호랑이 2021-08-15 00:05   좋아요 3 | URL
붕붕툐툐님께서 함께 읽어주셔서 저 역시 감사드립니다 ^^:)

바람돌이 2021-08-15 02: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중학생들하고 수업시간에 일제강점기 통계 자료 2개 내놓고 토론시키면요. 정말 놀라울정도로 본질을 꿰뚫어보는 아이들이 많아요. 실증적 자료라는 것이 사실은 어떻게 취사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정말 조작되기 쉬운 자료인데 일방적으로 취사선택한 자료만 가지고 자신들의 관점을 객관적인양 내세우는 인간들은 최소한의 학자적 양심조차 없다고 생각되어져요.

겨울호랑이 2021-08-15 08:14   좋아요 4 | URL
그렇습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데이터를 취시선택하고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이들이 주류 지식인층에 적지 않다는 것은 분명 문제라 여겨집니다. 그래도 바람돌이님 말씀을 들으니 다음 세대는 한층 나은 모습이라 다행입니다^^:)

scott 2021-09-10 15: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 호랑이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금요일 가족 모두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ㅅ^

겨울호랑이 2021-09-10 16:39   좋아요 1 | URL
scott 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mini74 2021-09-10 16: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축하드려요 *^^*

겨울호랑이 2021-09-10 16:40   좋아요 1 | URL
미니님 감사합니다. 평안한 주말 되세요! ^^:)

독서괭 2021-09-10 1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호랑이님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09-10 16:40   좋아요 2 | URL
독서괭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금요일 밤 되세요!

그레이스 2021-09-10 16: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1-09-10 16:40   좋아요 3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

모나리자 2021-09-10 16: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겨울호랑이님~^^

겨울호랑이 2021-09-10 17:05   좋아요 1 | URL
모나리자님 감사합니다! 여유로운 주말 되세요^^:)

서니데이 2021-09-10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1-09-10 18:43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선선한 가을밤 되세요!^^:)

이하라 2021-09-10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09-10 22:25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 금요일밤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1-09-11 1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진심 축하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21-09-11 13:52   좋아요 0 | URL
페크님 감사합니다. 선선한 가을 주말 되세요! ^^:)

초딩 2021-09-11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겨울호랑이 2021-09-11 13: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초딩님 행복한 토요일 되세요! ^^:)

2021-09-11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11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