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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분자 RNA - 생명의 기원에서 백신과 유전자 치료까지, RNA에 관한 모든 것
김우재 지음 / 김영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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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저장과 전달이라는 이 고귀한 지위를, 그 기능만으로도 여왕이 되어 편하게 놀고 먹을 수 있는 이 고귀한 지위를 DNA에 넘겨주고 때로는 단백질의 기능을, 때로는 DNA의 기능을 대신하는 존재가 있다. DNA와 비슷하지만 그 구조와 구성 성분이 조금 다른 이 핵산의 한 종류를 우리는 RNA라고 부른다. _ 김우재, <꿈의 분자 RNA>, p54/295

김우재 교수의 <꿈의 분자 RNA>는 코로나19 이후 새롭게 질병치료의 기준이 된 RNA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DNA로부터 정보를 전사받아 단백질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RNA. 책에서는 RNA에 대한 개략적인 개념으로부터 CRISPR-CAS9에 이르는 현재 바이오 제약분야의 주요 이슈를 알기 쉬운 용어로 일반에게 소개한다.

mRNA라는 약어를 풀면 messenger ribonucleic acid, 즉 '전령 리보핵산(전령 RNA)'이 되는데, 여기서 '전령'이란 유전체의 정보를 단백질로 전달한다는 의미다. mRNA는 '번역'이라는 과정을 통해 DNA의 염기서열 정보를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로 변환시켜 주는 일을 수행한다. 그 역할이 마치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전령과 같기 때문에, mRNA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_ 김우재, <꿈의 분자 RNA>, p21/295

DNA에서 RNA로 정보가 발현되는 과정을 '전사'라고 한다. DNA와 RNA는 모두 핵산으로 이루어진 친척 사이라서, 정보의 전달 과정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책에 적힌 내용을 노트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도 된다. RNA에서 단백질로 정보가 전달되기 위해서는 핵산이라는 DNA와 RNA의 기본 단위를 아미노산이라는 단백질의 기본 단위로 '번역'해야 한다. _ 김우재, <꿈의 분자 RNA>, p144/295

저자는 생물학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을 위해 전문용어 대신 비유를 통해 이론을 알기 쉽게 풀어가며, 덕분에 독자들은 최근 생물학의 흐름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제임스 D. 왓슨 (James Dewey Watson)의 <이중나선>과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의 한계로부터 독자들을 끌어내어 보다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책에서 도킨스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은 아니다. 그렇지만, DNA와 유전자를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새롭게 바꾸고, 신(神)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한 그들의 진화학이 더는 유효하지 않음을 저자는 본문을 통해 보여주는데, 이는 '진화학=도킨스'로 생각하는 일반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분명하다.(적어도 필자 자신에게는 그렇다) 본문에서 도킨스 대신 저자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는 학자가 바로 스티븐 제이 굴드 (Stephen Jay Gould)다. 날카로운 독설가 도킨스에게 밀려 다소 평가절하되는 굴드는 이 책에서 진정한 과학자로 새롭게 비춰진다.

굴드가 '이기적 DNA'라는 개념과 싸운 이유는 그것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기적'이지 않을 가능성마저 지워버리는 획일성 때문이었다. 굴드는 유전자의 '이기성'과 싸운 것이 아니라 '모든'이라는 수식어와 싸웠던 것이다.(p187)...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지닌 이러한 내재적 모순은 첫째, 도킨스가 '이기성'이라고 명명한 유전자의 속성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 결과이고 둘째, 다윈의 자연선택을 유전자 수준에서 정의하려고 할 때 비롯되는 비극의 결과다. 이미 기무라 모토, 잭 레스터 킹과 토머스 주크스의 중립 가설로 인해 유전체 수준에서 자연선택은 포기되어야 했다. _ 김우재, <꿈의 분자 RNA>, p190/295

마르크스(K.Marx)가 '유신론'에 대항하기 위해 '유물론'이라는 도그마를 들고 나왔듯, 도킨스는 '유전자'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그렇지만, 마르스크 사상의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상부구조의 사상이 갖는 또다른 독단성의 한계와 마찬가지로, 도킨스의 '유전자 결정론'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기적인 유전자'의 철저한 계산과는 달리 무한한 시간 속의 수많은 착오의 산물이라는 진화(進化 evolution)의 기본 개념과 충돌하며 한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꿈의 분자 RNA>는 DNA와 단백질이라는 결정적인 '상태' 대신 RNA라는 '상태'와 '변화'로의 관점 변화는 DNA라는 도그마의 붕괴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기적 유전자>를 벗어나 '포스트 도킨스'의 관점으로 '유전자 가위' 시대의 현대 생물학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안내서라 생각된다...

'DNA는 생명의 책'이라는 말과, '중심 도그마'라는 표현에서 풍기는 위계적 구조, 즉 DNA가 RNA나 단백질의 상위에 존재한다는 관념은 재고되어야 한다. 특히 유전자라는 개념은, DNA라는 생명의 책에 쓰여 있고 단백질을 코딩하는 일부의 영역이라는 차원에서 벗어나, RNA를 포함하는 더욱 광범위한 개념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_ 김우재, <꿈의 분자 RNA>, p178/295

pS. RNA가 '꿈'의 분자인 이유. 영문으로 '꿈'이라는 글자를 자판으로 두드려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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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은 과학의 이론적 측면에 주어지는 상은 아니다. 인류의 복지에 기여한 과학적 발견 및 기술에 주어지는 상이다. RNA 간섭이 이처럼 빠른 시간에 노벨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기술이 지닌 강력함을 방증한다. 현재 분자생물학을 연구하는 실험실에서 RNA 간섭을 사용하지 않는 실험자는 거의 없다 할 수 있다. RNA 간섭은 생물학자들이 꿈에서 그리던 유전자 조절의 만능 도구를 제공했다.

이 결과는 우리가 지금까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전사된 RNA들이 단백질로 번역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준다. 특히 mRNA의 경우, 기존 패러다임에선 단백질 번역을 위한 매개자라는 게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mRNA의 60퍼센트 이상의 부분이 단백질로 번역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결과임에 틀림없다.

미르의 발견 과정은 DNA의 구조가 발견된 것처럼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과학자들의 사고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 생물학자들은 RNA의 기능이 단지 전달자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RNA를 건너뛰고 DNA와 단백질의 상호작용만 연구해온, 집단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유전자 발현 과정에서 RNA는 단순한 ‘매개자’가 아니며, 나아가 적극적인 ‘조절자’로 자리매김했다.

미르는 일종의 자물쇠다. 미르는 mRNA라는 자전거가 도로를 달릴 수 없도록 묶어두는 자물쇠 역할을 한다. 거리를 달리는 많은 자전거들을 다양한 mRNA라고 생각해보자. 미르라는 자물쇠를 달고 있는 자전거들은 움직이지 않게 기둥에 묶인 자전거에 비유할 수 있다. 자전거들은 정해진 목표로 운송 중인 소포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그게 단백질이다. 미르라는 자물쇠에 채워진 자전거는 그 소포를 원하는 목적지에 가져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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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던 시기, 팬데믹이 심해질수록 돈을 버는 기업도 많았다. 이들 중 가장 문제가 된 기업들은 한때 전 세계 백신 접종의 상당수를 담당했던 화이자, 모더나, 얀센, 바이온테크 등의 거대 다국적 제약사들이다. 미국 정부가 부스터샷 추가 접종을 결정하기 전에도 화이자와 모더나 등 거대 제약사들은 정치권에 부스터샷 접종을 요구하는 로비를 벌이며 백신 판매를 통한 이익 추구의 욕망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코로나19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계 질서뿐 아니라 그 모순도 그대로 노출한다. 미중의 갈등을 단순히 대만이나 북한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군사 문제로 인식하는 정치인은 그 이면에 놓인 두 거대 국가의 미래를 건 싸움, 즉 첨단 과학기술 분야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두 국가가 120년 전처럼 세계대전의 형태로 전면전을 치룰 수 없는 이유는 두 국가가 경제적 공동 운명체로 이미 너무나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RNA를 바라보는 거대 제약사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코로나19 mRNA 백신의 대성공으로 2022년 1분기에만 RNA로 질병 치료를 연구하는 스타트업에 약 5000억 원이 투자되었고, RNA 치료제 임상시험도 4년 전에 비해 3배 가까이 증가했다

RNA 치료제는 2020년 기준으로 약 500개 이상의 신약 파이프라인(기업에서 연구개발 중인 신약 개발 프로젝트)이 존재하며, 미국이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임상시험을 시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 이어 RNA 치료제 시장을 주도하는 국가는 독일이며 캐나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 그 뒤를 이었고, 한국은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RNA 기반 치료제는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며, 신약 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꾸게 될 것이다.

거대 제약사들이 암이 아니라 감염병을 표적으로 mRNA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제약사들의 인본주의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우리가 mRNA 백신의 개발사에서 배워야 할 교훈 중 하나는 민간의 거대 제약사는 철저히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냉엄한 현실이다. 거대 제약사가 감염병 백신의 개발에 나서는 이유는 감염병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계속 언급하겠지만 과학의 발달은 도구의 발달에 의해 제약된다. 도구의 제약 속에서 과학자들은 가장 흥미로운 질문을 찾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환경에서 단서를 찾아 자연의 비밀을 벗긴다.

이 질문을 현대 생명과학의 언어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정보(달걀)가 먼저인지 기능(닭)이 먼저인지’로 환원할 수 있다. 생명은 정보와 기능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라도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생명이라고 부를 수 없다. 정보만을 가진 바이러스는 생명이 아니며, 기능만을 가진 육회도 생명이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생물종에서 정보는 DNA에, 기능은 단백질에 부여되어 있다. 따라서 생명의 기원을 논하는 질문은 ‘DNA가 먼저인가, 아니면 단백질이 먼저인가’로 환원된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DNA도 단백질도 아니다. 가장 그럴듯한 답은 RN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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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 음악과 언어로 보는 인류의 진화, 뿌리와이파리 오파비니아 6
스티븐 미슨 지음, 김명주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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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는 대단히 복잡한 의사소통 체계다. 언어는 현대인의 조상과 친척들이 썼던 의사소통 체계가 점점 진화하여 더욱 복잡한 것이 된 결과임이 틀림없다. 학자들은 이 의사소통 체계들을 뭉뚱그려 '원시언어(proto-language)'라고 부른다. 원시언어의 성격에 대한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한쪽은 원시언어가 '구성적(compositional)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쪽은 '전일적(holistic)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한다._ 스티븐 미슨,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p18


 스티븐 미슨(Steven Mithen)의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The Singing Neanderthals>는 인류의 원시 의사소통 수단의 성격에 주목한다. 원시언어는 '정보' 전달에 보다 유용한 형태였을까, 아니면 감정 전달에 보다 효과적인 수단이었을까.  이제는 언어와 음악으로 완전히 기능이 완전히 분화되버렸지만, 저자는 이러한 기능 분화 이전의 시대에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이 살았음을 주목한다.


 언어는 구어건 문어건 몸짓언어건, 한 사람 이상의 타인과 생각이나 지식을 주고받기 위한 의도적인 수단으로,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 내밀한 감정에서부터 일상적 사건, 그리고 우주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것에 대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p41)... 음악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의사소통 체계다. 그러나 한 곡이 이 세상에 대해 뭔가를 '말하지'는 않더라도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음악은 지시를 한다기보다는 '조작'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언어는 주로 지시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_ 스티븐 미슨,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p43


 저자의 말처럼 네안데르탈인의 의사소통 수단이 언어가 아닌 음악이었다면,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이유 중 하나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와 경쟁에서 패배했음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정보를 전달하는데 유용한 언어를 사용한 호모 사피엔스와 감정을 전달하는데 유용한 음악을 선택한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 사피엔스가 언어를 통해 추상적 사고를 통해 농경사회로 진입하여 국가, 종교를 만들어 조직화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보다 예술적이었던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는 보다 자유롭게 살아가면서 서서히 밀려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언어가 진화했다면 네안데르탈인의 큰 뇌, 성도, 청각능력, 혀와 숨쉬기를 위한 운동제어력을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언어가 진화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압도적이다. 네안데르탈인의 해부학적 발달과 분화적 성취에 대한 설명을 발전된 형태의 'Hmmmm'에서 찾아야 한다. _ 스티븐 미슨,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p328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에서는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원시의사소통 수단인  'Hmmmm'으로부터 음악과 언어의 분화에 대해 고고학적인 근거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저자가 채 말할지 않은 행간 사이에 어쩌면 우리는 숨겨진 인류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는 구조화된 현대 사회에 저항하는 자유로운 예술인의 원형(原形)은 아닐까 하는 상상으로까지 이어진다...


 'Hmmmm'의 분절을 통해서 구성적 언어가 생겼고, 이것은 인간이 사고를 하는 성격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때 우리 종은 온 지구를 차지하는 길로, 호모속 최초의 종이 약 200만 년 전에 출현했을 때부터 줄곧 해왔던 수렵채집인의 생활을 끝내는 길로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 1만 년 전에 끝나자마자 지구의 여러 곳에서 농경이 발명되었고, 이것은 최초의 도시와 최초의 문명을 낳았다. _ 스티븐 미슨,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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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바람을 맞으며 레이첼 카슨 전집 1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 에코리브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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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 가장자리에 서서 넓은 염습지 위를 움직이는 안개의 숨결을 느끼며, 수백만 년 동안 조용히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 모래톱 위를 나는 새들의 비행을 지켜보는 것은 이 지구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존재하는 대상에 관한 지식을 얻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것은 인간이 바닷가에 나타나 경이에 가득한 눈으로 대양을 바라보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27


 레이첼 카슨 (Rachel Carson, 1907~1964)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Under the Sea-Wind>를 통해 바다와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생명을 말한다.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의 매 장면을 눈을 감고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글에서 독자들은 영상에 제약되지 않은 바다 생명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겨울 동안 어린 거북은 남아 있는 노른자를 영양분 삼아 버텨냈을 것이다. 겨울이 길고 추위가 모래 속까지 스며들어 많은 새끼가 얼어 죽었다. 살아남은 새끼들은 약하고 무기력해서 태어날 때보다 줄어든 몸체를 알 속에서 잔뜩 웅크렸다. 그러다 알에서 깨어나면 부모 거북이 새로운 후손을 낳아 묻어놓은 모래 위를 힘없이 움직였다... 풀숲 끝자락에서 쥐가 거북의 보금자리를 노려보고 있을 때, 바로 옆에서 왜가리가 크게 날갯짓을 하며 북쪽 해안으로 날아갔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41


 저자 레이첼 카슨은 독자들에게 요구한다. 바다라는 삶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을 상상하되, 인간이라는 척도의 기준을 버릴 것을.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관점 대신, 자연이 허락한 기준인 빛과 어둠, 밀물과 썰물, 거스를 수 없는 해류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수온 등. 우리에게 단어로 존재하는 조건들이 바다 생물들에게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상상력의 날개는 활짝 펴질 것이다.


 진짜 바다의 시작은 해안으로부터의 거리가 아니라 깊이로 판단한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107


 바다의 생명체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려면 상상력을 적극 발휘해야 한다. 또 인간이 지닌 많은 특징과 인간 중심의 척도를 잠시라도 포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계나 달력으로 재는 시간과 세월은 해안의 새나 물고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바다에서의 삶이 지닌 특징을 알 수 없고, 우리 자신을 그 속에 투영할 수도 없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29


 그러면서도 저자는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들을 의인화한다. <바닷바람을 맞으며>안의 동물들은 열망하고 두려워하는 감정을 느끼는 존재로 그려지지만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그들을 이해하는데 춥고 배고픈 것을 피하려는 생명의 본능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 욕망이라는 요소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생명의 삶이 영위될 수 있다면, 인간의 욕망이란 불필요한 사족(蛇足)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숨쉬기 위한 고등어의 열망이 자신의 명예를 구하려는 아킬레우스의 열망보다 결코 못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다른 한편 물기기와 새우, 해파리, 새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그들을 실제 있는 그대로의 생명체로 이해하려면 인간의 행동에 대한 비유에서 지나치게 멀리 벗어나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물고기는 물리적으로, 인간은 심리적으로 반응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물고기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29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고등어 떼는 항구 입구의 바위를 지나 물살이 급하게 몰아치는 곳으로 향했다. 바닷물은 염분으로 인해 짜고 깨끗하고 차가웠다. 바위와 물고기가 뒤섞이다 보니 수면이 온통 여기저기 갈라져 산소를 구하는 움직임으로 들썩였다. 고등어는 주둥이로부터 꼬리지느러미까지 온몸을 흔들어대며 흥분에 겨워 돌진했다. 자신을 기다리는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며 또 강렬히 열망했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144


 바다 생명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이 담긴 <바닷바람을 맞으며>속에서 대부분 인간의 모습은 풍경화 속의 배경처럼 주변에 머무른다. 그렇지만, 이따금 미래 닥칠 재앙에 대한 예언과도 같은 다음 구절은 지나가듯 나타나지만, <침묵의 봄>에서와 같은 저자의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모든 만과 강에서 몰려나온 물고기들이 대륙붕을 가로지르고 고깃배들은 남쪽으로 향했다. 온갖 낚싯줄과 그물을 매단 배들이 겨울 바다 곳곳에 웅크리고 자리를 잡았다. 겨울 휴식처를 찾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북쪽 항구 곳곳에서 몰려온 저인망 트롤선이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송어와 넙치, 도미와 민어는 만과 해협을 벗어나면 어부의 그물로부터 안전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선박들이 오더니 긴 자루 같은 그물을 드리웠다가 끌어당겼다... 트롤망 어선은 매년 연안 어류의 겨울철 서식지에서 수백만 킬로그램의 물고기를 잡아들였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p211


 <바닷 바람을 맞으며>는 제목 그대로 평안한 바닷가에서 보다 깊은 바다로 시선을 옮기며 그곳에 살고 있는 생명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바라보기에 아름다운 바다지만 삶의 터전으로 그곳 또한 치열한 생명의 약동이 있다는 것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결코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생동감있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평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글의 마지막은 <바닷바람을 맞으며>를 잘 설명한 서문의 글 일부를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며 끝맺는다...


 <바닷바람을 맞으며>의 구성은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해 분투하는 각각의 생명체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격렬한 투쟁에 입각한 다윈주의적 결정론이 아니라 기회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다.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던 생명체가 살아남는다.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이 바다 생명체에 대한 카슨의 이야기는 고요한 느낌을 전해준다. 카슨의 글이 특별한 것은 그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게 반응하는 자연의 냉철한 위력을 과학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것은 물론 물리적으로 관련있는 개별적인 생명체와 공감하는 동일시를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_ 레이첼 카슨,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문, p17

제비갈매기는 수면에 거의 붙은 채 강 상류로 1.5킬로미터 정도를 날아가 늪지 위를 크게 빙빙 돈 다음 다시 강어귀로 내려왔다. 아침 안개를 뚫고 물고기와 해초 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어부들이 목소리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들은 그물에 매달린 고기를 떼어내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물을 배의 평평한 바닥에 쌓으며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 P48

고래 사체는 몇 달 전 해안가로 떠밀려 왔는데, 겨울 내내 만 근처에 사는 까마귀와 그 친구들의 먹이가 되어주었다. 폭풍으로 인해 얼음 덩어리가 움직이며 고래의 사체를 밀어 보낸 것이다. 먹이를 보고 지른 툴루각의 환호성에 다른 세 마리 까마귀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툴루각의 뒤를 따라 순록 뼈에 붙어 있는 살점 몇 조각을 먹기 위해 툰드라를 가로질러 날아갔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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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8-29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때, 레이철 카슨의 책을
사모았는데... 읽지는 못했네요.

그 때 사지 못한 책이라 더 애잔
하다는 느낌이...

바다를 오염시키지 말아야 하는데
대멸종의 시대에 쉽지 않은 미션
입니다.

겨울호랑이 2023-08-29 21:21   좋아요 1 | URL
생명이 넘치는 바다에 독을 푸는 행위는 정말 인류에 씻지못할 죄악을 저지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마음을 다잡고 폭주를 막아야겠지요...

베이글 2023-08-30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줄곧 내면의 바다에 침잠해 있었는데, 너른 자연의 바다로 시선을 돌려주는 책이네요.

서문의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던 생명체가 살아남는다‘가 특히 눈길을 끕니다.

제가 머물 적절한 곳은 어딘지 지금 이 시기에 여기에 머물고 있는 것이 맞는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겨울호랑이 2023-08-30 12:35   좋아요 2 | URL
가끔은 확신에 차서 걸어가고 있는 길이 사실은 잘못가는 길이기도, 불확실하게 고민했던 길이 좋은 선택이었던 경험을 해봅니다. 아무래도 현실이라는 벽에서 넓게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다른 면에서 지금 어두운 현실에서 많이 힘이 들지만, 훗날 시간이 흐른 뒤에 돌이켜보면 좋은 반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베이글님 말씀처럼 저도 바닷가에서 육지 쪽이 아닌 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바다 건너에 있는 희망을 상상하게 됩니다. 베이글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호시우행 2023-09-02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십년 전 레이첼 카슨의 명저 <침묵의 봄>을 읽다가 치명적인 고발내용에 빨려들어 밤을 꼬박 지새웠던 기억이 소환되게 하네요.

겨울호랑이 2023-09-02 17:22   좋아요 0 | URL
저도 <침묵의 봄>을 읽은 후 바다 3부작을 접하는데, <침묵의 봄>과는 다른 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작가의 다른 면을 보게되었습니다 호시우행님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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