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현대 중동의 탄생
데이비드 프롬킨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동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하나는 유럽 국가들이 재편을 맡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가 왕조, 국가, 정치시스템만 구축해놓고 그것들이 지속될 수 있는 대책 마련에는 소홀한 탓이었다... 그러다 보니 1914 ~ 1922년 사이 영국과 연합국이 취한 조치는 유럽의 중동문제만 종식시켰을 뿐, 중동의 중동문제는 오히려 새로 불거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p863) <현대 중동의 탄생> 中


 데이비드 프롬킨(David Fromkin, 1932 ~ )는 <현대 중동의 탄생 A place to end all peace>에서 1차 세계대전 전후 오스만 투르크를 둘러싼 유럽 열강의 갈등이 현대 중동 문제를 가져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914년 당시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을 막 끝냈던 영국과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를 중립지대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당시 영국은 여러 면에서 중동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시켜야할 필요가 분명하게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영국 이해관계는 현재 중동 문제의 뿌리가 된다. 현대 중동의 모습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가를 이번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획득한 식민지 중에서도 전설로 가득찬 동방에 대해 가장 큰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의기양양함에는 뜻밖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었다.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 인도를 손에 넣어 승리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좋았으나, 수송로와 병참선이 지나치게 멀어져 여러 곳에서 끊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중동의 토착 정권들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유럽 국가들의 이런 팽창을 막으려고 했다. 중동을 지배할 의도는 없었으나 유럽의 경쟁국들이 그 지역을 지배하는 것 또한 결단코 막으려고 했다.(p51) <현대 중동의 탄생> 中


 전략적 관점으로 봐도 중동은 케이프타운에서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로 연결되는 노선의 끊어진 부분을 이어줌으로써, 아프리카, 아시아, 태평양에 걸친 영국제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곳이었다.(p464) <현대 중동의 탄생> 中


 그렇지만, 당시 영국이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방대한 영토를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은 그대로였지만, 주변 상황은 달라지고 있었다. 신흥 강국 독일의 급부상, 철도의 발달로 인한 육상 전력의 중요성 증대 등은 오랜 제국 영국에게 위협요소로 다가왔고, 영국은 이러한 위기를 중동에 대한 직접지배력의 확대를 통해 극복하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제물이 되어야만 했다.

 

  1871년 1월 18일부로 공식 출범한 독일제국(제2제국)이 그로부터 몇십 년 뒤에는 러시아를 누르고 영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최대 세력으로 부상한 것은 세계정치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국의 산업이 쇠퇴한 것도 정세 변화의 일부 요인으로 작용했다. 영국은 화학과 공작기계처럼 중요성이 날로 커지는 새로운 산업 분야에서도 독일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군사적 요인도 정세 변화에 한몫했다. 철도의 발달로 해군이 힘을 못쓰게 되어 육군과 해군의 전략적 균형이 바뀐 탓이다.(p57) <현대 중동의 탄생> 中


 식민지 수립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달랐지만 중동의 오스만제국이 언젠가는 와해될 것이고, 그러면 유럽 국가들이 거기서 떨어질 떡고물을 얻게 되리라는 점에서는 양측의 견해가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의 하나가 되었다.(p59) <현대 중동의 탄생> 中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가한 오스만제국은 당시 매우 허약해진 상태였다. 제국 내의 인종/언어 문제는 발전을 가로막았고, 한때 16세기에 빈을 포위하며 오스트리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제국의 위엄은 20세기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과거 크림전쟁(Guerre de Crimee, 1853 ~ 1856)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허약한 모습을 알고 있었던 영국이 오스만 제국을 손쉬운 상대로 본 것도 자연스러운 판단이었다. 


 오스만제국은 지리멸렬했다. 지배자들의 인종도 제각각이었다. 언어는 튀르크어를 사용했지만, 지배자 대부분이 발칸과 여타 지역 기독교 노예의 후손이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간의 공통점을 찾기 힘들었고, 많은 경우 서로에 대한 애착도 크지 않았다. 이렇듯 오스만제국은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사람들이 모자이크를 이룬 다민족, 다언어 제국이었다. 그나마 접착제 구실을 한 것이 종교였다. 오스만제국은 튀르크족의 나라라기보다는 무슬림 나라에 가까운 신정국가였다.(p62) <현대 중동의 탄생> 中



[사진] 갈리폴리 전투(출처 :https://warfarehistorynetwork.com/daily/military-history/what-events-led-to-the-battle-of-gallipoli/)

 

 그렇지만, 승리를 자신했던 영국은 1차 대전에서 다르다넬스 작전(갈리폴리 전투)을 실패하며 대(對)오스만 전선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데 실패하고 말고 영국 역시 과거와 달라진 제국의 모습을 확인하였다. 이후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었지만, 영국제국의 운명은 매우 불투명했고,  중동 문제에 직접적인 개입이 어려워진 시점에서 승전국들은 다른 대안을 생각해야 했다. 그 중 하나가 오스만 제국 해체를 위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였다.


  영국 경제는 1920 ~ 1921년 사이에 붕괴했다. 물가가 폭락하고, 수출도 둔화되고, 폐업하는 회사가 속출하고, 온 나라가 전례가 없을 정도의 대규모 실업과 씨름을 벌였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정치인들도 국내외에서 벌여놓은 각종 사업을 시행할 여력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는 외교정책의 모험을 감행했고, 국내에서도 사회적 평화를 얻기 위한 사업을 벌였다.(p590) <현대 중동의 탄생> 中

  

 1918년 1월 8일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제안한 '평화 14개 조항'이었다... 윌슨은 오스만제국과 미국이 교전 중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에 관련된 내용도 12조에 포함시켰다. 이런 내용이다. "12조. 현재의 오스만제국 중 튀르크인들이 차지하는 영토의 주권은 확실히 보장되어야 하며, 튀르크 지배를 받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확실한 생활의 안전과 방해받지 않는 자율적 발전의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에 앞서 작성된 초안에는 터키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내용이 명기돼 있었다.(p399) <현대 중동의 탄생> 中


 이같은 분위기에서 유대인들의 독립운동인 시온주의(Zionism) 는 보다 활성화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을 자극시키는 이러한 움직임을 당시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지지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현대 중동 문제의 가장 커다란 씨를 뿌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민족주의가 정치적 악폐를 근절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간주되었던 만큼 누군가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답으로 민족주의를 제시할만도 했다.(p421)... 연합국이 팔레스타인에 가진 유대인의 열망을 지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 시온주의 운동은 유대인 국가의 보호국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그 경우 시온주의 운동이 영국을 보호국으로 택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p452) <현대 중동의 탄생> 中


  영국 외무부는 미국의 유대인 사회와, 특히 러시아의 유대인 사회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정부는 계속해서 러시아 유대인들이 러시아 정부가 연합국 진영에 계속 남아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다. 러시아의 위기가 심화될수록 영국 외무부는 더욱더 유대인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혔다.(p456) <현대 중동의 탄생> 中


  1921년 6월 처칠은 하원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랍인들이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부를 확대하고 그곳의 자원을 개발하는 정도의 유대인만 정착시키고, 그 이상의 유대인 정착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p782)... 1922년 7월 22일에는 국제연맹이, 영국이 요르단 강 서안에 밸푸어선언을 실행하도록 명시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을 최종 승인했다.(p792) <현대 중동의 탄생> 中


 <현대 중동의 탄생>은 1922년 이루어진 연합국간의 협정이 현대 중동의 모습을 결정짓는다고 지적한다. 석유의 중요성이 지금처럼 부각되지 않은 시기에 중동은 지정학적 위치에 의해 이미 그 운명이 결정되고 말았다.


 1922년의 타결은 단일한 법령, 조약, 혹은 문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중동문제가 대개는 그해에 성립된 법령, 조약, 문서들로 정리되어 붙게된 명칭이다.(p857)... 중동에서의 러시아 문제도, 정치적 국경은 러시아가 터키,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과 체결한 조약들 및 어느 정도는 영국과 맺은 교역 협정으로 1921년부터 모습을 드러냈고, 오스만제국의 술탄제가 종식되고 터키 민족국가가 창설된 것 또한 1922년 대국민의회 투표에서 만들어진 결과였으며... 중동의 영국 세력권에 적용될 법령과 조약도 대부분 1922년에 확정되었다.(p858) <현대 중동의 탄생> 中


 중동 분규가 특별했던 것은, 1922년 초 영국과 프랑스가 합의한 내용에 따라 그 즉시 모습을 드러냈거나 혹은 종국에는 모습을 드러내게 될 나라들의 규모와 경계는 물론이고 그 나라들의 존립권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더욱 본질적 문제가 내포돼 있다는 점이다. 그곳이 지금까지도 국가의 생존을 위해 빈번히 투쟁을 벌이는 세계적 분쟁지역이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쿠르드족의 정치적 미래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정치적 운명과 같이 독특하고 해결 불가능한 사안들의 저변에, 중동에 이식된 유럽의 현대적 정치시스템이 중동이라는 생소한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본질적 문제가 내재돼 있는 까닭이다.(p864) <현대 중동의 탄생> 中


 또한 저자는 본문에서 이러한 지정학적 문제 외에도 외부에서 이식된 현대 정치 시스템의 문제가 중동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오랜 무슬림의 전통 지배 체제를 부정하고 강제로 서구의 시스템을 강요는 중동의 또다른 분열요소가 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2010년 '아랍의 봄'을 통해 뒷받침 된다.



[사진] 아랍의 봄(출처 : https://www.history.com/topics/middle-east/arab-spring)


 <현대 중동의 탄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중동의 수많은 국가가 만들어진 이유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다툼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책에 서술된 중동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유대 - 아랍 민족의 갈등과 수니 - 시아 파의 종교 반목을 활용하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모습을 통해, 현재 이들이 시리아 내전 등으로 발생한 중동 - 아프리카 난민 문제에 인도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지난 세기 자신들이 뿌려놓은 갈등의 씨앗을 생각한다면, 이들 지역에 대한 난민 수용은 단순한 인도주의 차원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책임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아랍 난민 수용 문제에 대해 직접 책임 있는 일부 유럽 국가들과 우리 나라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100년전 독립의 희망으로 봤던 민족자결주의가 사실은 영국 패권 유지와 오스만 제국의 해체를 위한 이론 근거였음을 <현대 중동의 탄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족자결주의라는 추상적인 관념이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을 주고, 많은 희생을 불러왔는지를 생각해보면 중동의 불행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현대 중동의 탄생>은 제법 두껍다. 그러지만, 본문만 9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지만, 내용은 깊지 않아 현대 중동 문제와 기원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중동 문제에 관심있는 이들은 한 번정도 읽기를 권하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PS. 난민 문제에 대해 인도적 차원에서 고려해야한다는 개인의 생각은 여전하지만, 유럽은 몇 명 받아들였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조금 받아들였는가하는 단순한 수치 비교는 적절하지 않다 생각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5-16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16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9-05-17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지역을 중동이라고 해야 할 지, 서남아시아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어요.
문화적인 면이 우리 나라와는 많이 다른 지역이라서 책으로만 알게 된 것들은 어쩐지 많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겨울호랑이님, 요즘 날씨가 많이 더워졌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9-05-17 18:21   좋아요 0 | URL
^^:) 우리 입장에서는 서남아시아가 유럽 입장에서는 중동이 될 것 같네요. 날이 많이 흐린 초여름날씨네요. 서니데이님께서도 좋은 주말 되세요. ^^:)
 
현대 중동의 탄생
데이비드 프롬킨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동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하나는 (1922년의 타결을 통해) 유럽 국가들이 재편을 맡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가 왕조, 국가, 정치시스템만 구축해 놓고 그것들이 지속될 수 있는 대책 마련에는 소홀한 탓이었다.(p8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트 게임 -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숨겨진 전쟁
피터 홉커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즈볼스키 백작과 영국 대사 아서 니콜슨(Arthur Nicolson) 경 사이에 역사적인 영러 협상이 극비리에 체결되었다. 티베트와 관련하여 두 나라는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철도, 도로, 광산, 전신의 양보를 얻으려 하지 않으며, 대표를 보내지 않고 종주국인 청나라는 통해서만 라싸와 이야기를 한다는 데 합의했다.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의 세력권 안에 있으며, 자신들의 세력권 밖에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양국은 페르시아의 독립을 존중하고 다른 나라들이 그곳에서 자유롭게 교역을 하도록 약속하면서도, 가운데 중립 지대를 두고 두 세력권으로 분할하기로 합의했다.(p656) <그레이트 게임> 中


 <그레이트 게임 The Great Game>은 19세기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과 러시아간 일어난 충돌을 배경으로 한다. 1907년 최종 협상에서 논의된 지역이 티베트,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이란)라는 사실 속에서 우리는 이들 두 제국의 대결이 주로 중앙아시아에서 집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러시아의 전략


  이미 18세기 시베리아로 진출하고 청나라와 네르친스크 조약(1689)을 체결하며 동진(東進)을 완료한 러시아는 풍부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영국과 같은 진정한 세계 제국(帝國)이 되기 위해서는 소비 시장(市場)이 필요했다. 서쪽으로는 스웨덴, 폴란드 등 유럽국가와 마주하고, 동으로는 청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가 내려갈 수 있는 곳은 남쪽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남쪽에는 팽창하는 러시아를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는 영국이 있었다.


 러시아의 국내 시장은 너무 작고 가난해서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반면 경쟁자인 영국은 더 고급스러운 기계를 사용해 유럽과 아메리카 양쪽에 싼값으로 물건을 공급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신의 문간인 중앙아시아에 잠재력이 큰 거대한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 시장은 워낙 외졌기 때문에 경쟁자와 마주치지 않았다. 영국이 중앙아시아에 들어오는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아야 했다.(p145) <그레이트 게임> 中


 히바를 손에 넣게 되면 러시아는 엄청난 부를 안겨주는 인도 무역의 영국 독점을 끝낼 수 있었다. 히바를 손에 쥐면 "인도의 교역을 포함한 아시아의 모든 교역"이 히바를 거쳐 카스피 해로 가고 거기서 다시 볼가 강을 거쳐 러시아와 유럽 시장으로 가능 경로로 재조정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영국의 인도 통치도 크게 흔들릴 것이고, 결국은 무너지게 될 것이다.(p126) <그레이트 게임> 中


 중앙아시아와 유럽권 러시아를 연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카스피 해 동쪽 연안에 항구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람과 물자는 볼가 강을 따라 이동하다가 카스피 해를 가로질러 이 항구에 이를 수 있었다. 캅카스(코카서스)의 러시아 주둔지에서 그 항구까지 배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히바를 정복하고 골치 아픈 투르크멘 사람들을 진압하면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타슈켄트, 코칸트에 이르는 철도를 사막에 놓을 수 있었다.(p407) <그레이트 게임> 中



[그림] 우즈베키스탄 도시 히바와 중앙아시아(출처 : 구글지도)


2. 영국의 전략


 18세기 표트르 대제(Pyotr Velikiy, 1682 ~ 1725)이래 뒤늦게 유럽으로 편입한 러시아와 달리 19세기 이미 세계 최대 제국으로 자리잡은 영국은 이미 충분한 해외식민지(시장)를 가지고 있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면, 그것은 인도(India)때문이었다.


 메이오 경은 인도를 방어하는 최선의 방법은 전진 정책이나 군사적 모험이 아니라, 경비가 소홀할 수밖에 없는 광대한 국경 지대 둘레를 영국에 우호적인 완충 국가들로 사슬처럼 둘러싸는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나라는 아프가니스탄이었다.(p431) <그레이트 게임> 中


 새로운 시장 확보를 위해 캅카스(코카서스) 지역의 확보를 노리는 러시아, 대영제국의 한 축인 인도를 지키기 위한 영국의 대결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레이트 게임'이라 불리는 1세기 동안 벌어진 두 제국의 충돌은 주로 아프가니스탄(Afganistan)을 중심으로 발생하게 된다.


 3. 두 제국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실패


[그림] 제1차 영-아프간 전쟁(출처 : https://about-history.com/first-anglo-afghan-war-1839-1842-part-the-great-game/)


 영국과 러시아, 여기에 페르시아까지 가세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침공을 했지만, 많은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은 침략을 허용하지 않았고, 영국과 러시아는 2차례에 걸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심각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레이트 게임은 이후에도 약 50년에 걸쳐 계속되는데, 이는 두 제국이 거둔 다른 지역에서의 승리때문이었다. 동지중해에서의 영국 승리와 시베리아 지역에서의 러시아 승리는 각자에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아픈 기억을 지우는 작은 위로가 되었다.


 페르시아는 앞서 보았듯이 자신들이 한때 소유했던 동부 지방을 되찾으려 했다.(p227)...  러시아의 침식에 맞서 아프가니스탄에 인도를 보호해줄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하기는 커녕 영국군이 겪은 사상최악의 참사로 꼽을 만한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이교도 야만인 무리에 불과한 존재들이 집에서 만든 무기로 무장을 하고 지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것은 영국의 자존과 위엄에 엄청난 타격을 주는 일이었다.(p352) <그레이트 게임> 中


 이제 아프가니스탄 국격합동위원회가 일을 시작했다. 위원회는 여러 번 의견이 충돌하여 시간을 질질 끌다가 마침내 1887년 여름에 동부를 제외한 국경의 모든 부분에 합의하는 의정서에 조인했다. 어쨌든 전쟁은 피했다.(p547)... 그러나 동쪽으로 더 나아간 파미르 고원에서는 국경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이제 그레이트 게임의 초점은 이 황량한 지역, 오늘날에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에 맞추어졌다.(p548) <그레이트 게임> 中


4. 영국의 승리 : 크림전쟁


 간호사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 ~ 1910)이 활약한 것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크림전쟁(Guerre de Crimee,1853 ~ 1856)을 통해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를 노리던 러시아의 야심을 분쇄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영국은 이집트 - 시리아 - 이라크 - 인도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다. 여기에 수에즈 운하 주식 매입, 해저 케이블 매설, 키프로스 지배(1878) 등을 통해 동지중해의 지배권을 확보하면서 영국은 지브롤터에서 인도에 이르는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다.


 1854년 9월 영국과 프랑스는 흑해에 있는 러시아의 중요한 해군 요새 세바스토폴을 포위했다. 이 요새를 차지해 파괴하는 것이 터키의 독립 유지에 긴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349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양쪽에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p371)... 승전국들의 주요한 목적은 러시아가 근동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패전국들은 흑해 지역과 관련하여 가혹한 조항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흑해와 그 연안에 전함을 띄우지도 못하고, 해군 기지를 비롯한 기타 요새를 건설하지도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또 다뉴브 강 어귀, 그리고 그들이 점령했던 터키의 도시 바툼과 카르스와 더불어 발칸 북부 영통를 내주었으며, 술탄의 영토에 사는 기독교인을 종교적으로 보호할 권리를 포기했다.(p372) <그레이트 게임> 中


5. 러시아의 승리 : 극동지역


 반면, 러시아는 아이훈 조약(愛琿條約, 1858) 등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를 확보하면서 극동지역에서 남하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영국은 인도에서 세포이 항쟁(Sepoy Mutiny, 1857 ~ 1858)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기에,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로 진출할 기회를 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시베리아 주둔군이 그 전 3~4년동안 청나라를 제압하며 얻어낸 영토였다. 그동안 러시아 지휘관들은 영국이 인도처럼 중국도 손에 넣을까 봐 걱정이 되어 한편으로는 아무르 강을 따라 동진했고, 또 한편으로는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하여 태평양 연안으로 남진했다... 러시아는 거의 아무런 희생 없이 청나라 영토 가운데 약 100만 제곱킬로미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영토는 영국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p384) <그레이트 게임> 中


 육군의 젊은 장교들도 대부분 아시아에서의 전진 정책을 지지했으며, 그곳에서 영국의 의도를 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사실 밀류틴이 근본적으로 재조직하고 있던 육군 전체가 극동에서 거둔 성공을 발판으로 새로운 정복을 갈망했다. 크림에서 당한 패배의 기억을 씻어낼 기회를 노리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p388)... 다른 문제들에서 벗어난 알렉산드르는 영국보다 먼저 중앙아시아에 진입해야 한다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그나티예프는 영국이 아프가니스탄과 러시아, 페르시아, 중국과 잇따라 큰 대가를 치르며 전쟁을 벌였고 인도에서 유혈 봉기까지 일어났기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로 바뀌어 분쟁에 더 얽히는 것을 피하는 징후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했다.(p389)... 바야흐로 중앙아시아를 향한 러시아의 대남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p392) <그레이트 게임> 中

 

 그렇지만,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과 러시아는 다시 한 번 처참한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서 이들 제국의 중앙아시아 전략은 커뮤니케이션 수단 확보로 전환되었다. 군대와 포를 나를 수 있는 철도를 중앙아시아에 건설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는 동시에 제국 유지를 위한 SOC를 확보하려는 영국간의 첩보전이 그레이트 게임의 후반부를 장식하게 된다.


 트란스카스피아 철도는 이 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전에 인도를 향해 전진하던 러시아군은 아주 먼 거리와 악몽 같은 땅을 가로질러 병력, 포, 다른 중장비를 대량 운송해야 한다는 거의 대책 없는 과제에 부딪혔다. 그러나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를 잇는 마지막 300킬로미터 거리의 철도가 완공되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무려 10만 병력을 페르시아나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집결시킬 수 있었다.(p564) <그레이트 게임> 中


 6. 그리고 엔드 게임(End Game)


 지지부진했던 1세기에 걸친 영국-러시아의 대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러일전쟁(1904 ~ 1905)이었다. 시베리아 진출로 얻은 자신감과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급부상한 러시아였기에 극동 지역에서 신흥국 일본에게 당한 패배는 충격적이었다. 여기에, 대한해협에서 발트 함대를 잃으면서 군사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게 된 러시아는 결국 1907년 영러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그레이트 게임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러시아가 극동에서 군사력과 해군 기지를 강화하는 것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 지역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직접 영향을 주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가 가차 없이 조선으로 침투하는 데 긴장했다. 이렇게 되면 일본과도 거리가 매우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예고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물은 포트아서에 있는 러시아의 커다란 해군 기지였다. 러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p642)... 일본은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마지막 전진 행동을 막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티베트는 자신의 땅에서 영국을 막지 못했다.(p652) <그레이트 게임> 中


 <그레이트 게임>은 <중국의 서진> 이후의 중앙아시아를 배경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갈등과 대립을 그리고 있다. 19세기 세계의 1/4을 지배하면서 점차 해가 지고 있던 노제국 영국과 새롭게 떠오른 신흥국 러시아의 대립은 중앙아시아에서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다 결국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의 몰락으로 마무리 되었다는 것이 그레이트 게임의 시작과 종결이다. 


 그레이트 게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중국의 서진>때와는 달라진 제국(帝國)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시대의 제국이 영토를 점령하고 병합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던 영토 중심의 제국 모습이었다면, 그레이트 게임에서 제국이 중점을 둔 것은 교통, 통신 수단, 자본을 통한 지배였다. 이는 지난 시대의 제국이 면(面)의 지배라면, 제국주의 시대의 지배는 선(線)의 지배라는 점으로도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제국들의 지배 형태 변화를 우리는 <그레이트 게임>에서 일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 더 나가면 우리는 제국주의 일본의 패배원인 또한 여기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무렵 영국이 취한 두 가지 조치 덕분에 인도에서 영국의 힘이 크게  강화되었다. 하나는 극도의 비밀을 유지하며 이집트의 총독으로부터 새로 개통한 수에즈 운하의 주식 40퍼센트를 매입한 것이다. 이 수로 덕분에 영국과 인도 사이의 해로가 약 7,000킬로미터 줄었다... 인도와 영국 사이의 연락선에 이루어진 두 번째 중요한 개선은 1870년의 직통 해저 케이블 설치였다. 오 년 전에 육상 전신선을 완공하기는 했지만 테헤란을 거쳤기 때문에 전시에는 간섭이나 절단에 취약했다. 새로운 해저 케이블은 그보다 훨씬 나았다(p458)... 새로운 통신이 시작되면서 화이트홀은 인도 일을 그 전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p459) <그레이트 게임> 中


 19세기에 이미 제국의 지배형태가 커뮤니케이션에 기반한 지배로 변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팽창은 영토 중심의 침략활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변화된 제국의 패러다임을 충분히인식하지 못했기에 , 일본은 초기 무력침공으로 자신의 세력을 뻗쳐 나간 것은 아니었을까. 결과적으로 중일전쟁(中日戰爭)에서 일본군은 광대한 중국의 영토를 침략했지만, 일본의 지배는 철도, 도로를 중심으로 한 선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길게 늘어선 선들은 결국 끊어지고, 고립되어 자멸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 출처 : 위키백과)


 과거 산업화 시대의 지배가 선(線)에 의한 지배라면, 21세기 제국의 지배형태는 '문화(文化 culture)'라는 점(點)의 형태로 다시 변화했다. 그런 면에서 문화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제국주의(문화 제국주의)의 본질을 꿰뚫고 이를 잘 활용하고있는 미국이 현재까지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현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진다.


 반면, 이러한 미국에 대항해 SOC를 기반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를 통해 새롭게 G2로 도약하는 중국의 모습안에서 지난 20세기 제국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너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어쨌든 비록 1세기 전의 이야기지만, 지금 세계정세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그레이트 게임'의 시대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 생각한다.


 다만, 책 <그레이트 게임>은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다. 두 제국의 갈등을 그리면서도, 전체적인 그림보다는 첩보전에 활약한 개인의 모습에 초점을 두었기에 첩보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점이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한 <중국의 서진>보다는 아쉬웠다. 물론, 이러한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도 분명 있겠지만. 책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을 느끼며 길었던 리뷰를 마무리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雨香 2019-03-28 1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대로 첩보 부문을 빼면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좋은 책일 것 같습니다.
최근 근대사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전후 사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고,
작년에 대강 훓었던 러시아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듯합니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이고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3-28 11:31   좋아요 2 | URL
우향님께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2019-03-28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8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8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8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하동서설 - 감춰진 동이(東夷)의 실체와 고대 한국
부사년 지음, 정재서 옮김 / 우리역사연구재단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사년의 <이하동서설>은 중국의 고대 문명을 남북 간의 이항구조로 파악하던 전통적인 관념을 뒤집고 동서 간의 대립으로 인식을 전환시켰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으며, 이(夷) 곧 동이의 실체를 드러내고 정치적, 문화적 지위를 부각시켰다는 점에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p42)... 다만 부사년은 은(殷)과 이(夷)의 관계에 대해서는 하(夏), 주(周)와 대립된 동방의 국가라는 차원에서 친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종족적, 지역적, 기원적으로 구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아 애매한 느낌을 준다. 은(殷)을 고조선과 같은 계통으로 보는 반면 이(夷)의 활동 범주를 대륙 내지인 산동(山東) 등에 국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고대 한국은 동이계로 간주하지 않는 셈인데 다소 의외라 하지 않을 수 없다.(p43) <이하동서설 : 해제> 中


 <이하동서설 夷夏東西說>은 중국 역사학자 부사년(傅斯年, 1896 ~ 1950)에 의해 이 주장된 내용으로, 중국 고대사를 '하(夏)'와 '이(夷)'의 대립으로 본다는 면에서 1930년대 당시 중국 학계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학설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 동쪽의 거대한 지역은 하천에 의해 충적된 대평원이어서 산동반도에 있는 산 몇 개를 제외하면 모두가 해발 1,200m 이하의 평지다... 이에 반하여 서쪽의 거대한 지역은 산과 산 사이에 끼인 고원지대여서 도시는 늘 하천의 양안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는 동쪽의 평지를 동평원구(東平原區), 거대한 산 속에 끼인 서쪽의 고지를 서고지계(西高地系)라고 간략히 부르겠다.(p231)... 분명 이(夷)와 은(殷)은 동쪽 체계에 속하고 하(夏)와 주(周)는 서쪽 체계에 속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p235)<이하동서설> 中


 부사년은 먼저 서쪽 고원 지대와 동쪽 평원 지역으로 이루어진 중국 지형에 주목하고 이러한 지형으로부터 '동(東) - 서(西)' 간의 대립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이하동서설>에서 말하는 동이(東夷)는 특정 종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구이(九夷)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는 다양한 민족이 포함된다. 또한, 은(殷) 또는 상(商)은 동쪽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넓힌 고대 중국의 제국(帝國)이었다.


 무릇 은상(殷商)과 서주(西周) 이전, 혹은 은상이나 서주와의 동시기에 지금의 산동성 전 지역과 하남서의 동부, 강소성(江蘇省)의 북부, 안휘성(安徽省)의 동북부 전체, 아울러 하북성의 발해(渤海) 연안 및 바다 건너 요동(療東)과 조선의 양안(兩岸)까지 일체의 지역의 모든 부족과 모든 성씨들을 전부 '이(夷)'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夏) 한 시대의 대사(大事)란 바로 이러한 이인(夷人)들과의 투쟁이었다.(p155) <이하동서설> 中


 [지도] 하나라 영토 지도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luemir98&logNo=60210194759&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kr%2F)


  동이(東夷) 가운데에는 부여(夫餘), 읍루(揖婁), 고구려(高句麗), 구려(句麗)[맥이(貊耳)], 예(濊), 한(韓)[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왜(倭) 등이 있다.(p268) <이하동서설> 中


 상인(商人)이 세웠던 제국은 전성기 때 무력이 몹시 강대하였으며, 패망한 이후에도 쓰러뜨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쪽으로 해동에서 일어나 서족으로 기양(岐陽 : 섬서성 기산(岐山)일대)에까지 이르렀던 이 대제국이 당시의 문화 수준에서 건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위대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특수한 무기나 견고한 사회조직에 힘입고서야 비로소 이룰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p122) <이하동서설> 中


 부사년은 이러한 '동-서' 대립 구조의 사례로 다음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제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춘추(春秋)전국(戰國)시대 이래 후한(後漢)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대립이 있어 왔으나, 이후 이(夷)가 동화되면서 이러한 갈등은 점차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진(秦)이 6국을 통합한 것은 서가 동을 이긴 것이요, 초(楚)와 한(漢)이 진(秦)을 멸망시킨 것은 동이 서를 이긴 것이요, 평림병(平林兵)과 적미군(赤眉軍)이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왕실에 대적한 것은 동이 서를 이긴 것이요, 조조(曺操)가 원소(袁紹)에 대립한 것은 서가 동을 이긴 것이다. 그러나 양한(兩漢) 때에 이르면 동서의 융합은 이미 상당히 심화되어 대치하는 형국이 삼대에 미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p238) <이하동서설> 中


 저자 부사년은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동-서' 대립이라는 일련의 역사법칙을 도출해낸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립 속에서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하동서설>에서 동이(東夷)라는 단어지만, 사실 부사년이 말하고 싶었던 바는 '하(夏)'다. 1928 ~ 1937년까지 은나라의 중심지였던 은허(殷墟) 발굴을 주도한 그는 중국 역사를 보다 이른 시기인 '하'나라로 끌어올리기 위해 '이하동서설'을 주장하였고, 이 책은 이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주장한 학설은 이후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해 <이하동서설>의 연구결과는 현재 거의 폐기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하동서설'은 중국 '동북공정 東北工程'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핵심 이론 중 하나라는 점과 그가 만든 대립구도를 바탕으로 많은 재야학자들의 이론이 생산되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변증법적 규칙을 따라 전국 시기에 융합 혼재하게 되었으니 이 과정이 바로 하(夏), 상(商), 주(周) 왕조가 교체되어 온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중 두드러진 민족 간의 갈등이 바로 동서방간 이(夷)와 하(夏)의 투쟁인 것이다. 진(秦) 왕조가 시작된 이래 2,000년간에 걸친 고대 중국의 민족적 갈등은 남북간 투쟁으로 개괄될 수가 있으므로 광대한 연해지방 이인(夷人)들은 혹은 북쪽으로 이주하여 베링 해협을 건너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거나,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여러 섬들 및 심지어는 남태평양을 거쳐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p325) <이하동서설 : [부록] 동이(東夷)와 그 역사적 지위> 中


 대개 은나라 사람들은 동방의 이인(夷人)들 가운데에서 가장 선진적인 일부였을 것이며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지니고 갔던 일정한 사회풍습은 은상(殷商)과 떼놓을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사물의 발전추이란 언제나 불균형성을 띠고 있어 선진성과 낙후성이 곧잘 동시에 공존하기도 하므로, 광범위한 동방의 이인(夷人) 지역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원시부락과 그들의 사회적 유물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p314) <이하동서설 : [부록] 동이(東夷)와 그 역사적 지위> 中


 <이하동서설>과 [부록]에 수록된 글 속에서 우리는 동이(東夷)가 중국 문명의 발전을 위한 하나의 반(反) 역할을 수행하는 변증법의 요인에 불과함을 확인하게 된다. 후한 시대 이후 중화 문명이라는 하나의 합(合)으로 녹아들어갔다는 그의 학설 속에서, 고구려 역사가 중국 지방 정부의 역사라는 구도로 발전된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야 사학에서 이러한 '동 - 서' 대립 구도를 그대로 차용해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존재하는 것은 우려가 되는 지점이다. 

 

 이처럼 <이하동서설>은 우리가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역사책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하동서설>을 읽어야 한다면, 이것은 올바른 역사관의 확립을 위해서가 아닐까. 역사(歷史)는 진실(眞實)이어야 하고, 객관적 사실에서 교훈(敎訓)을 끌어내는 것은 후대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바른 역사관의 정립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하동서설'은 목적 역사관의 한계를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고 여겨진다. 역사관은 아니지만,  관련하여 고(故) 리영희님(李泳禧, 1929 ~ 2010)의 언론관과 관련한 명언을 마지막으로 이번 리뷰를 마친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8-20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0 0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1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1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2 0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2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2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2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3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3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실크로드 세계사 - 고대 제국에서 G2 시대까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은 진동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간 네트워크를 따라 전달되었다. 그 길을 따라 순례자와 전사 戰士, 유목민과 장사꾼들이 여행하고, 먼 곳에서 온 물건이 거래되었으며, 사상이 교류하고 수용되고 다듬어졌다. 이 길은 번영뿐만 아니라 죽음과 폭력, 질병과 재앙도 실어 날랐다. 끝없이 뻗은 이 연결망은 19세기 말 독일 지질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 Ferdinand von Richthonfen에 의해 명명된 이후 그 이름으로 불렸다. 바로 실크로드 silkroad다.(p14) <실크로드 세계사> 中


[사진] 실크로드(출처 : 위키백과)


 피러 프랭코판(Peter Frankopan)은 <실크로드 세계사 The Silk Road : A new history of the world>속에서 고대부터 2010년대까지 문명 교류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유럽이 세계사의 중심인 시기는 매우 짧았으며, 오랜 기간 세계의 중심은 중앙아시아였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세계 유수의 지적 증심지는 유럽이나 서방이 아니라 바그다드와 발흐,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였다... 그들은 사상을 주고받으면서 철학과 과학, 언어와 종교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p16)... 그러나 근대 초기에 진보의 주역이 바뀌었다. 15세기 말 두 차례의 해양 탐험이 가져온 결과였다... 갑자기 서유럽은 지방의 벽지라는 위치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통신과 수송과 교역 시스템의 구심점으로 탈바꿈했다.(p17) <실크로드 세계사> 中 


 중앙아시아 중심의 세계사를 표방하는 <실크로드 세계사>는 로마보다는 페르시아가, 십자군보다는 셀주크 투르크가 역사의 중심에 놓여 있다. 마치, 지도를 거꾸로 보는 것과 같은 인식 변환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고대 사회가 결코 분리된 각각의 문명권이 아닌 서로 영향을 깊이 미치고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약 900 페이지에 이르는 내용을 읽을 때마다 벽에 부딪치고 말것이다. 그러니, 일단 아래의 내용을 인정하고 넘어가자. 인류 역사는 고대부터 교류의 역사였다.


 고대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로마를 서유럽의 시발로 보는 것은 로마가 줄곧 동방을 바라보고 있었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동방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인도를 페르시아만 및 홍해와 연결하는 교통량이 늘면서 고대의 초기 실크로드는 활기를 띠었다.(p59) <실크로드 세계사> 中


 후대에 '비단길'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실크로드를 따라 종교, 문화, 사상, 질병 등이 활발하게 퍼져나가게 된다. 14세기 유럽을 강타했던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이 이 길을 따라 전염되었으며, 이 길을 통해 헬레니즘(Hellenism) 문화가 통일  신라에도 전파되었고, 불교와 기독교 역시 이 길을 통해 동과 서로 퍼져나갔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전파되면서 서로 혼합되고 받아들이면서 영향을 끼쳤다. 동방 기독교는 영지주의(gnosis)와 결합하면서, 서방 기독교와 다른 모습을 보였으며, 중국의 불교는 도교(道敎)의 영향으로 선(禪)사상을 결합시키는 등 독자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7세기 초의 문헌들은 기독교 성직자들이 자기네의 생각을 불교와 조화시키려 노력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독교는 그저 불교와 상충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대체로 말해서 기독교가 바로 불교라고 중국에 갔던 한 선교사는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 사상과 불교 사상을 체계적으로 융합하려 노력했다.(p110) <실크로드 세계사> 中


 그리고, 이러한 문명의 교류와 발전의 중심지는 바로 중앙아시아였다. 동과 서의 교류 중심지로서 중앙아시아는 세계의 교역품과 금(金)과 은(銀)이 모이는 풍요로운 곳이었고, 티그리스- 유프라테스(Tigris- Euphrates) 강 사이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오랜 기간 인류에게 에덴(Eden)동산이었다. 그렇지만, 15세기에 들어 실락원(Lost Paradise)의 시대가 대항해 시대의 개막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메리카 식민지가 개척되던 초기 많은 양의 금과 은이 중앙아시아로 흘러가면서 중앙아시아는 크게 부흥하게 되지만, 분위기가 바뀌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그다드는 이슬람 세계의 풍요와 왕권의 중심지, 후원과 위신의 완벽한 상징이었다. (p165)... 많은 자료들은 대규모 교역품이 페르시아만을 드나들고 중앙아시아에 이리저리 뻗어 있던 육로를 따라 이동했음을 입증한다... 9세기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7 만점의 도자기를 실은 배가 난파한 사실은 당시 엄청난 교역 물량을 보여준다. 이 시대는 황금기였다.(p168) <실크로드 세계사> 中


 당시 황금시대가 시작된 것은 유럽뿐만이 아니었다. 발칸 반도에서부터 북아프리카까지 오스만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건설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자금은 계속 늘고 있는 조세 수입으로 충당했다.(p384)... 그러나 서아시아가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에서 흘러들어오는 금, 은과 기타 보물들의 홍수로 돈을 벌고는 있었지만, 가장 큰 수혜자는 수출품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바로 인도, 중국, 중앙아시아였다.(p386)... 유럽과 인도의 영화는 아메리카 대륙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p392) <실크로드 세계사> 中


[사진] 피사로의 잉카 제국 정벌(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ajamarca)


 15세기 유럽이 중심이 된 것은 과학, 종교, 자본주의의 결합을 통해 이룩한 것이었다. 풍요로운 부(富)를 과시하는 중앙아시아에 비해 가진 것이 없던 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통해 폭력을 행사할 시스템을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동양에 대한 인식의 변환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부정적인 의미에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형성되는 것도 이즈음부터다.


 유럽이 1490년대의 대탐험 이후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은 그들이 폭력 및 군국주의와 굳건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p423)... 싸움과 폭력과 살육도 정당성이 있는 한 미화되었다. 이것이 아마도 종교가 그렇게 중요해진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p424)... 유럽 각국 정부는 군비에 충당할 자금이 부족하자 대출 시장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미래의 세금 수입을 담보로 돈을 뜰어올 수 있었다... 정부 부채에 대한 그들의 투자는 애국심으로 포장될 수 있었다. 국가 재정에 투자하는 것은 출세하는 길이었고, 또한 부자가 되는 방법이었다.(p428) <실크로드 세계사> 中


 표면 아래서 강력한 흐름이 눈에 띄지 않은 채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가 뻣뻤해지고 있었다. 동방을 이국적인 초목과 보물로 가득한 놀라운 나라로 보던 태도를 바꾸어, 현지 주민들을 아메리카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쓸모없는 사람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p451)... 아시아에 대한 태도는 얻을 수 있는 이득으로 인한 흥분에서 노골적인 수탈에 대한 생각으로 바뀌었다.(p451) <실크로드 세계사> 中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시작된 식민지화는 19세기 들어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중국이 반식민지 상태에 빠지면서 제국주의(帝國主義) 시대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동시에, 중앙아시아 역시 교역의 감소와 더불어 쇠퇴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이는 비극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인도의 대부분이 영국의 손에 넘어가자 육상 교역로가 생명력을 잃었다. 구매력과 소비력, 자산과 관심이 결정적으로 유럽 쪽으로 옮겨갔다. 군사기술과 전술이 더욱 발전하면서 기병대의 중요성이 떨어진 것 또한 수천 년 동안 아시아를 이리저리 연결해주던 길을 따라 운송되던 물량의 감소를 촉진했다. 중앙아시아는 그 이전의 남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p457) <실크로드 세계사> 中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영국과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한 러시아의 대립은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1813 ~ 1907)으로 치닫게 된다. 이제는 전쟁터로 바뀐 중앙아시아는 러시아, 영국, 오스만 투르크의 격전장이 되버렸다. 아직 석유를 주동력으로 사용하기 이전, 이 지역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여기에는 세계적인 밀의 생산지 우크라이나가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에 관심을 기울인 이는 히틀러(Adolf Hitler, 1889 ~ 1945)였다.


[사진] 우크라이나 밀(출처 : https://www.agweb.com/article/higher_wheat_prices_more_complex_than_ukraine_turmoil_naa_ben_potter/)


 문제를 러시아의 영토가 빠른 속도로 확장되면서 자신감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p468)... 크림 반도와 아조프해에서 벌어지고 다른 곳들에서 잠깐 비쳤던 어렴풋한 전쟁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이익이 걸려 있었다... 러시아를 통제하고 암묵적으로 인도에서의 영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법은 크림 반도와 캅카스 전역의 통제권을 오스만에 넘겨주는 것이었다.(p477) <실크로드 세계사> 中


당시 식량부족으로 힘들어 하던 히틀러는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Unternehmen Barbarossa)을 통해 소련을 침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침공 결과는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Schlacht von Stalingrad)를 통해 독일의 패배로 끝나게 되지만, 이 지역에 대한 중요성이 감소한 것은 아니었다.


 [사진] 바르바로사 작전(출처 : http://www.stalkerzone.org/collapse-barbarossa-stopped-hitlers-death-machine/)


 히틀러는 1940년 7월 말 새로운 모험을 발표하면서 그것을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위장했다. 이제 볼셰비즘을 제거할 기회라고 그는 요들 장군에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 문제가 된 것은 원자재와 무엇보다도 식료품이었다... 바케는 독일의 문제에 소련이 해법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집착했다. 러시아 제국이 팽창하면서 스텝 지대는 유목민들의 목장에서 곡창지대로 서서히 변모했다.(p612)... 우크라이나는 열쇠였다. 흑해 북안과 카스피해 너머까지 펼쳐지는 풍요로운 농작물 평원을 손아귀에 넣으면 독일은 천하무적이 된다.(p613) <실크로드 세계사> 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을 대신해서 중앙아시아에서 소련과 대립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미국이 중앙아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레이건의 아래 말이 잘 표현하고 있다. 미국은 '검은 황금'이라 불리우는 석유의 생산지인 중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결코 잃어서는 안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란-이라크 전쟁(1980 ~ 1988)', '걸프전쟁(1990)', '미국 - 아프가니스탄 전쟁(2001 ~ )', '미국 - 이라크 전쟁(2003 ~ 2011)'등의 사건이 직간접적으로 미국과 연계되어 이어지게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시청자들에게 말했다. "이란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소련과 따뜻한 바다 인도양의 입구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소련이 왜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내 그 나라를 점령하고, 가능하다면 이란과 파키스탄까지 점령하려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리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이란에 매장된 석유는 세계 경제의 장기적인 건전성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p795) <실크로드 세계사> 中


 15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계속된 유럽-미국의 패권은 최근 중국(中國)의 부상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를 통해 새로운 실크로드를 만들어가는 중국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실크로드 세계사>는 마무리 된다. 


[그림] 일대일로(출처 : 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C%9D%BC%EB%8C%80%EC%9D%BC%EB%A1%9C)


 중국 정부는 물자와 에너지원에 연결되고 도시, 항구, 대양들에 접근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꼼꼼하고도 신중하게 구축하고 있다. 교역의 물량과 속도를 대폭 늘리기 위한 기반시설을 개선하거나 아예 새로 건설하는 데 막대한 돈을 투자한다는 발표가 매달 새로 나온다.(p854)... 시진핑이 2013년에 제시한 일대일로 一帶一路 비전에 막대한 자원이 투입된다는 것은 중국이 미래를 계획하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p862)<실크로드 세계사> 中


 <실크로드 세계사> 가 다루는 시대의 범위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약 900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다. 그렇지만, 해당 시기의 주요 사건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서술하기 때문에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다. 동시에,  실크로드의 역사 전체를 보여준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세계사의 우리의 시각이 확장됨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살펴보자.


  많은 경우 우리는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 개인의 극단적인 분노의 결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그처럼 엄청난 일이 개인의 단순한 증오에서만 비롯되었을까? 여기서 당시 히틀러가 단기간에 유럽을 지배하면서 식량과 원자재가 부족했었다는 점을 연계해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자원 부족을 절감한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게 되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자원을 소모하는 인구(人口)를 줄이려는 목적으로도 유대인 대학살을 감행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히틀러와 나치독일의 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유태인 학살은 나름의 위기 탈출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태인 학살을 독일 국내 문제, 히틀러 개인의 문제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조금 범위를 넓혀 본다면, 이처럼 새롭게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실크로드 세계사>는 이렇게 새로운 관점을 여러 곳에서 제시한다.


 이처럼, <실크로드 세계사>는 우리에게 문명권들간의 영향력과 배경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를 통해서 '국내'요인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을 버리고, 세계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실크로드 세계사>는 좋은 문명교류사 입문서적이라 여겨진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7-26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26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7-26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 개 주셨으니 기대되는 책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8-07-26 18:28   좋아요 0 | URL
두꺼운 페이지가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만, 북다이제스터님께서는 큰 부담없이 즐겁게 읽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읽자나 2018-07-26 1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국주의 특히 영국이 착취하는 것도 모자라 분쟁의 씨앗을 심어 놓았는지 보고 화났던 기억이...

겨울호랑이 2018-07-27 09:55   좋아요 1 | URL
네 읽자나님의 말씀처럼 현대 중동 문제의 씨앗을 유럽 열강들이 심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중동 및 아프리카의 난민 문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서니데이 2018-07-27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무척 더운 날씨입니다.
겨울호랑이님, 더위 조심하시고 건강하고 즐거운 금요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8-07-27 18:28   좋아요 1 | URL
정말 계속 더운 요즘이네요. 서니데이님께서도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