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性理學)은 조화로운 국정 운영을 보장할 수 있는 문관 계층을 양성하는 방법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태조의 손자인 세종대왕은 이런 기본 방침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려, 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했다... 문맹을 줄이도록 장려하는 것이 성리학의 중요한 이념이므로 태조는 이미 왕실이 후원하는 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시한바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국어를 기록하려면 한자를 사용해야 했는데, 한자는 한국어의 음을 정확히 표기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방대한 문자를 일반 백성들 모두가 사용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단순화된 문자 체계인 한글을 만들었다. 이 문자의 창제 원리는 1445년에 간행된 책 <훈민정음>에 해설되어 있다... 한글의 도입은 전통주의자인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들은 한글을 도입하면 다른 신분의 사람들에게도 과거 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제공하여 자신들의 권력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다.(p131) <역사의 책> 中


  <역사의 책 The History Book>은 세계사에서 의미있는 주요 사건과 그 의미를 제시한 책이다. 이 책에서 언급한 사건 중 우리나라와 관련된 사건은 하나가 실려있는데, 그 사건이 바로 '세종대왕이 새 문자를 도입하다(1443년)'다. <역사의 책>에서는 우리 역사의 수많은 사건 중 한글 창제를 세계사에 의미있는 유일한 사건으로 평가하는 것일까. 이번 페이퍼에서는 한글날을 맞아 이를 찾아보려 한다.


 <역사의 책>의 한글 창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글은 표음문자이며, 백성들 모두가 폭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문자이며, 당시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를 받아 19세기에 한글이 재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차례로 따라가보자.


 먼저, 한글은 우리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자라는 면에서 중요하다. 월터 J.옹(Walter J. Ong, 1912 ~ 2003)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Orality and Literacy>에서 '쓰기'가 자연스러운 '말하기'와는 달리 '의도적'이며, '의식적'인 행위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적인 행위를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손쉽게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모 24자로 만들어진 한글은 이 점에서 독창적이고 우수한 문자다.


  '쓰기'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소리를 정지된 공간으로 환원하고, 소리로 된 말 그 혼자만이 존재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현재로부터 그 말을 분리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구술로 하는 말하기와는 대조적으로 쓰기는 완전히 인공적이다. '자연스럽게' 쓰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없다... 쓰기(writing)나 스크립트(script)는 반드시 무의식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하기와는 구분된다... 쓰기는 그 밖의 인공적인 작품과 마찬가지로, 아니 어떠한 작품 이상으로 두말할 것 없이 가치 있으며 실제로 인간의 내적인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p129)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中 


 자기 생각을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쓰기'라고 했을 때, 쓰기에 어떤 언어가 사용되는가는 중요하다. 특히, 몸짓이나 표정 등으로 비언어적 의미가 동반되는 '말하기'와는 달리, 글을 통해 모든 것을 담아내는 쓰기에서 작은 단어의 선택은 전체 뜻을 좌우하기도 하기 때문에, 말과 글의 대응은 더욱 중요해진다. 예를 들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의 <교회의 바빌론 포로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서주 De Captivate Babylonica Ecclesiae> 에는 대명사 hoc의 사용을 통해 자신의 교리를 입증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는 말과 글의 대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런 면에서 우리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우리 글이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대명사 'hoc'(이것)이 몸을 지시하는 것은 성의 유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중성이 없는 히브리어에서 '이것'은 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나는 'hic est corpus meum'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언어의 용법과 상식은 그리스도가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말할 때 주어 '이것'은 빵을 가리키는 것이지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해준다. 이 말은 "이 빵은 내 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p171) <교회의 바빌론 포로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서주> 中


 한글 창제는 이처럼 우리 생각을 우리 글로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한글이 표음 문자이며, 이로 인해 우리 문화(文化)는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다는 것 역시 한글 창제의 효과라 여겨진다. 이는 마셜 맥루헌(Herbert Marshall McLuhan, 1911 ~ 1980)의 <구턴베르크 은하계 The Gutenberg Galaxy>의 내용으로 뒷받침된다.


 표음 문자 알파벳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효과의 핵심은 과잉 의미를 제거한 것이 아니다. "과잉 의미"란 "내용(content)"적인 개념이고, 그 자체가 알파벳적 기술의 유산이다. 즉, 모든 표음 문자로 된 된 글은 말을 대신한 시각적 기호이다. 말은 표음 문자로 쓰여진 글의 "내용'이다. 이는 어떤 다른 종류의 글의 내용은 아니다. 글이 상형 문자나 표의 문자로 쓰여진 것은 장(Gestals) 혹은 개인이나 사회적으로 다양한 상황을 스냅 사진으로 찍은 것이다.(p97)... 알파벳에 의해 인간은 탈부족화 혹은 개별화되어 "문명"화되었다. 문화는 인간에 의하여 문명 이상으로 훨씬 더 발전할 수 있다. 단, 표음 문자인 알파벳이 없이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처럼 부족적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p100) <구텐베르크 은하계> 中


 표음문자인 알파벳의 사용에 의해 서양 문명은 탈(脫)부족화를 이룰 수 있었고, 이러한 우수성으로 서양 문명이 다른 문명을 압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 맥루헌의 주장이다. 일본도 표음문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일본도 부족상태로 남아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다소 무리하다라고 비판할 수 있겠만, 실제 일본어가 한자와 함께 사용되고 있는 상태임을 생각해본다면, 자신의 문자만으로 언어 표현이 가능한 알파벳의 우수성을 강조한 저자의 의도가 무리한 것만은 아니라 여겨진다. 

 

 알파벳 정도 또는 알파벳 이상의 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면에서 '한글' 역시 우수한 표음문자임을 생각해본다면, 우리 문화 역시 탈부족화한 독창적인 문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이 MS-Word가 장악한 word Processor 시장에서 '한글' 프로그램이 우리나라에서 무너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라 여겨진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한글은 우리가 문화제국주의 시대에서 한국문화를 지켜주는 방파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널리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한글은 사상과 정보를 폭넓게 공유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촛불혁명으로 대표되는 시민의식의 표현이 가능했던 것이 인터넷(Internet)으로 대표되는 IT 인프라가 구축되었기 때문이지만, 여기에 내용을 담을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자처럼 글자를 찾아서 입력을 해야한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독창적인 인터넷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허웅 선생의 국어 운동은 국민의 글자생활은 한글만으로, 언어생활은 쉽고, 바르고, 고운 말로,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말글의 가치를 높이 받드는, 국어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활동이었다. 선생이 주창한 '한글은 우리 겨레와 민중을 위한 글자로 태어난 것이다'라는 생각은 글자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한 정신이다. 한글만 쓰면 모든 국민들이 모두 편하게 글자생활을 하며 모두가 문화와 정보를 누릴 수 있게 되지만, 한글-한자를 섞어 글자생활을 하면, 일정한 교육을 받은 지식층만이 문화와 정보를 누리게 된다는 점에서 한글만 쓰기를 주창한 것이다.(p16) <우리 옛말본> - 해제 중 -


 한글날을 맞아 세종 대왕의 한글 창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한글이 가져다 준 여러 선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손쉽게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오해없이 소통하며 세계의 다른 문화를 우리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역사의 책>에서 한글 창제를 세계사적 사건으로 바라본 것은 무리없는 판단이라 생각한다. 


다만, <역사의 책>에서는 '한글 창제'시기를 중세 세계 The Medieval World에 할당했지만,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근대 초기 The Early Modern Era에 배정하였다. 양반 계층 중심의 관료제 국가, 중앙집권 국가였던 조선(朝鮮)시대를 봉건시대(封建時代)인 중세(中世)에 해당한다고 본 것은 다른 의미에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페이퍼를 마무리하기 전 바른 글쓰기에 대해서 이오덕(李五德, 1925 ~ 2003) 선생의 <우리글 바로쓰기>의 한 대목을 옮겨본다. 


 

아이들은 이렇게 해서 글을 쓴다. 아이들은 머리로 이야기를 꾸며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책에 나오는 말을 문법에 맞게 맞추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입으로 늘 하고 있는 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글은 재미가 있고 감동을 준다. 만약 아이들에게 자기가 보고 듣고 한 일들을 쓰게 하지 않고 책에 나온 어른들의 글에 따라 쓰게 하거나 책에 나온 낱말을 문법에 맞추어서 쓰게 하는 짓을 글짓기 공부라 해서 시킬 때 아이들은 글을 못 쓰게 된다. 쓰더라도 아주 맛없는 글, 죽은 글밖에 못 쓰게 된다.(p181) <우리글 바로쓰기 5> 中


 아이들처럼 글쓰는 것. 그것은 잃어버린 동심을 찾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오래전 내가 어렸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렸을 적 쓴 일기를 펼쳐본다. 


 1982년 2월 18일 수요일 날씨 맑음


 숙제를 하고 있을 때 밤에 쓰는 일기를 생각했다. '게으름뱅이처럼 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숙제를 다하고 나면 자유다. 또 거기에 밤에 쓰는 일기도 다 쓰면 자유다. 잠잘 때 쓰는 일기는 싫었다. 그렇지만 일기는 왜 쓰냐고 묻는다면, 다 크면 어렸을 때 생각을 잘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라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기를 쓴다.


 국민학생(초등학생)도 마음껏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이제는 기억할 수 없는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쉬운 한글이 주는 멋진 경험이 아닐까 생각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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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10-09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글 날 가장 어울리는 공들인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10-09 18:0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저 역시 페이퍼를 정리하면서 한글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10-09 18:17   좋아요 1 | URL
러시아 키릴 문자도 표음 문자인데 다소 복잡하여 소위 카톡 보내는데 어려움을 많이 느끼더라구요. 그래서 소위 카톡을 말로 하고 문자로 전환하던데, 한글의 편리성과 위대함을 새삼 느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10-09 18:22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요즘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러시아 역사책을 읽으시던데, 러시아 문화와 언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듯합니다. 이미 러시아어 능통자이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이라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

雨香 2019-10-09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자 문화권임에도 표음문자 한글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문화적 축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 처럼 IT 시대에 걸맞는 문자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듯 하고요.

겨울호랑이 2019-10-09 18:12   좋아요 0 | URL
그러습니다. 한자와 한글을 함께 익혀야 하는 것이 어렸을 때는 부담이 되지만,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만, 말을 어렵게 쓰는 것을 특권처럼 생각하는 인식은 바뀔 필요가 있다 여겨집니다. 저 또한 말을 어렵게 쓰는 편이라 고쳐야 하는데 생각만큼 쉽질 않습니다...ㅜㅜ

2019-10-10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0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0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2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10-16 0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버럴리스트 어린 겨울호랑이ㅎㅎ 겨울호랑이 님 어릴적 일기 넘 정감가네요^^ 제 일기는 집 떠나 있는 사이 버려져서 참 아쉬운데 그때 뭐라고 썼나 가끔 궁금합니다.
중학교 때부터는 가지고 있는데요. 국가와 사회에 대해 시시때때로 고민을 하는.... 교육의 힘이었다고 봐야 할까요. 지금으로선 매우 저답지 않다고 할(-,-);; 읽으면 오글거려요

겨울호랑이 2019-10-16 01:25   좋아요 1 | URL
^^:) 어릴 때 일기를 보면 가끔 이럴 때가 있었나 싶습니다. 저는 얌전히 지낸 학생인줄 알았는데, 당대 기록을 보니 제가 전투 민족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나더군요 ㅜㅜ 그래서 인간의 기억은 부정확하다 여겨집니다. 지금 일기장은 일기를 쓰기 싫어하는 작은 호랑이 연의랑 보고 있습니다. 아빠도 어렸을 땐 게으름뱅이였네 하면서 웃다보면 자신도 일기를 쓰고 싶다하니 과거 일기가 여러모로 유용합니다 ㅋ
 

 

'전 인류가 한 무리로 머물러 있을 수 없듯이 매한가지로 전 인류가 단 하나의 언어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다양한 민족 언어의 형성이 이루어진다...동물이 단지 자기 땅과 자신들의 비교적 협소한 영역만을 가질 수 있음으로 인해, 인간은 지구 어디에서나 거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지구의 거주자는 지구 어디에서나 관찰되며 이렇게 되면, 그의 언어는 또한 지구의 언어가 되고, 모든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언어가, 모든 민족에게는 민족의 언어가 있게 된다.'(p154)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Johann Gottfried von Herder, 1744 ~ 1803)<언어의 기원에 대하여> - 제 3 자연법칙 中 - 


 우리가 이처럼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기에 외국어(특히 영어) 공부를 초등학교부터 시작해서 사회인이 되어서까지 해왔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10년 이상의 시간을 영어 공부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편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예전보다 영어 실력은 좋아졌다고 하지만, 사교육 私敎育에 들어간 비용 대비 효과를 생각한다면 예전보다 썩 좋아진 것 같지 않다. 영어 공부는 우리에게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 이번 페이퍼에서는 최근에 읽은 외국어 학습 관련 서적을 통해 한국인이 영어를 배울 때 겪는 어려움과 학습법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플루언트>에서 저자는 한국인이 영어를 배울 때 겪는 어려움을 다음과 같은 5가지 요인으로 정리하고 있다. 영어는 한국어와 언어 言語의 차이를 가지며, 영문화와 한국 문화의  문화 文化의 차이에 의해서 우리는 영어를 배울 때 어려움을 겪게 된다. 언어를 잘 한다는 것은 언어안에 포함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이 영어를 배울 때 가장 큰 걸림돌 5가지를 분석해 보았다. 다시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첫째, 한국인과 미국인은 생각의 순서가 반대다. 미국인은 작은 것에서 크 것 순으로, 한국인은 큰 것에서 작은 것 순으로 생각한다. 둘째, 한국어에 비해서 영어는 빌트인된 뉘앙스 숫자가 너무나 적어서 단어를 꼬아 모자라는 표현을 보중한다. 셋째, 한국어 단어는 직관적이고 영어 단어는 추상적이다. 넷째, 영어는 주어의 선택이 제한적이고 동사가 방향을 결정한다. 다섯째, 영어 단어는 같은 단어라 해도 그 모양이 여러 가지다.'(p111)


 '언어를 진정으로 마스터 했다는 것은 그 언어가 내포한 인생관과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다. 철학은 개념을 정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차원 높은 대화를 하면 굳이 염두에 두지 않아도 철학적인 단어가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다.'(p285)


한편, 다른 책에서는 영어 문장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플루언트>는 Top- Down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대한민국 영어교육이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진실>에서는 Bottom-up 방식의 학습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영어를 한국어에 맞춰 해석하지 말고, 언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말한다. 


 '자, 영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정리해 보자.

 1. 영어는 주어에서부터 확장되는 단어 순서대로 이해한다.

 2. 영어는 주어에서부터 확장되는 단어 순서대로 펼쳐지는 그림이다.

 이 두 가지가 "문법 없이, 암기 없이 바로바로 말 만들 줄 아는 영어"의 절대 핵심이다.'(p128)

 '우리는 너무나 완벽을 꾀하는 공부를 해온 것이 문제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영어를 대했으면 한다. 이것이 바로 원어민이 영어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배워나가는 방법이다... 우리도 이렇게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영어를 배워야 한다.'(p229)


 두 권의 책에서 말하는 바를 종합해보면, 언어는 문화의 소산 所産이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조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의 영어 학습 경향인지는 모르겠지만, 공통적으로 두 책 모두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발음 pronunciation은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외국 악센트가 있는 사람은 그 나라의 매너를 조금 어겨도 용서가 되지만 그 나라 언어의 발음을 마스터 한 사람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문화적, 관용적 태도까지 마스터 했을 것으로 보고 만약 사소한 문화적 행동이나 매너라도 어기면 무례하거나 의도적으로 그랬을 것으로 여겨 적대감을 갖게 된다.'(p48)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왔던 발음 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자. 발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지금까지 해왔던 학습법을 생각하면 다소 생소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외국인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쉽게 이해된다. 어떤 외국인을 만났을 때, 그가 서툰 한국어를 말하다가 갑자기 다음과 같이 <상춘곡 賞春曲>을  읊는다고 상상해보자. 그런 경우에 우리는 그의 한국어 발음을 비웃을 것인가. 나는 그의 한국어를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그를 다시 볼 것 같다. 같은 기준으로 외국인들 역시 우리의 영어 실력을 평가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우리의 학습법을 바꿔야할 이유를 한 가지 더 가지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 두 책에서는 외우기보다 이미지 image 를 통해 학습하는 방법, 유사 어휘를 활용한 학습법 등을 효과적인 학습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책에서 제시한 이러한 방법들은 분명 언어를 공부할 때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내용이 마음에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외국어 학습법의 책이 대동소이 大同小異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내가 찾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내게 있어 문제는 외국어 학습 동기 incentive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영어를 공부하는 상황이 나의 선택이라기보다는 해야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 멀어졌고, 그래서 영어 공부를 부담스럽게 느꼈던 것은 아니었는지. 최근에는 영어를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번역본과 영문본을 같이 보고 있는데, 병행해서 읽다보니 시간은 다소 걸리지만, 두 가지 면에서 장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첫 번째 장점은 저자의 의도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다. 일례로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의 <국부론 Wealth of Nations>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보이지 않는 손'이 언급된 단락을 살펴보자.

 

'사실 그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지도 않고, 공공의 이익을 그가 얼마나 촉진하는지도 모른다. 외국 노동보다 본국 노동의 유지를 선호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고, 노동 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gain)을 위해서다. 이 경우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p552)


'He generally, indeed, neither intends to promote the publick interest, nor knows how much he is promoting it. By preferring the support of domestick to that of foreign industry, he intends only his own security ; and by directing that industry in such a manner as its produce may be of the greatest value, he intends only his own gain, and he is in this, as in many other cases, led by an invisible hand to promote an end which was no part of his intention'(p292)


 한국어 번역본은 우리에게 모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용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런 경우 원서를 옆에 두고 함께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영어로 쓰여진 단락은 상대적으로 쉬운 표현이 사용되게, 외국어임에도 때로는 영어 원서가 이해를 돕는다고 생각된다. 두 번째로 원문 표현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영어로 쓰여진 작품의 멋진 표현이 궁금해서 영어책을 읽는다면 우리의 영어 실력은 저절로 늘지 않을까.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의 비극 < 리어왕 King Lear> 중 일부를 번역본과 현대 영어로 풀이된 단락을 살펴보자.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나쁜 운명에 처할 때, 그것은 대개 우리 자신의 행동이 지나친 탓이건만, 그 재난을 해나 달, 별의 탓으로 돌리다니. 마치 우리가 필연에 의해 악당이 되고, 하늘의 뜻에 의해 바보가 되며...'(p35)


'This is a classic example if the idiocy of the world : when we're down and out - often because of our own excesses -we put all the blame on the sun, the moon, ans the stars, as if they forced us, to be bad, or the heavens compelled us to be villainous or stupid.'(p37) 


신이 멋지게 생각되는 표현을 찾아보고 수 차례 읽다보면 머리와 가슴 깊이 남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내 것이 되어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장점을 스스로 느끼게 되니, 보다 편하게 영어를 대하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영어뿐 아니라 다른 언어도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영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영어 학습법에 관한 책을 이외에도 여러권을 읽었지만, 가슴에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은 '내가 왜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서가 아닐까. 최근 읽은 영어 학습법에 관한 책을 덮으면서 내게 필요한 것은 '영어 공부의 왕도 王道'가 아니라 '영어를 배워야 하는 목적 目的'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학습법은 그 다음 과제로 넘겨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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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7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07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7-08 0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알쓸신잡 6회에서 정대승 박사가 ‘언어에 담긴 문화‘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했죠^^ 반말 문화인 영어를 쓰더라도 한국인은 그걸 한국어로 번역해 받아 들이므로 모욕으로 듣는 거라고... 알쓸신잡 후기 이거 또 정리해야 하나ㅎㅎ;; 내용이 많아 책읽기 시간을 넘 잡아 먹어서 리뷰쓰기 은근 귀찮더라고요ㅎ;;;

겨울호랑이 2017-07-08 06:20   좋아요 1 | URL
^^: AgalmA님께서 작성하신 후기 보면 최소 3회 이상 프로그램을 보신 후 작성하시는 듯 하네요. 개인적으로는 알쓸신잡도 좋지만, 1일1그림과 다른 페이퍼를 더 보고 싶네요..ㅋㅋ

단발머리 2017-07-08 0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외국어 학습에 왕도는 없다고 하지만, 혹시 내가 모르는 왕도가 있는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자주 듭니다.
킹 리어와 함께라니~~
너무 우아하네요 ㅎㅎㅎ

겨울호랑이 2017-07-08 06:4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전에는 잘 몰랐는데 셰익스피어 작품의 대사를 읽어보니 그 표현의 날카로움과 아름다움은... 마음을 울리는 문학 작품은 우리를 절로 원서의 세계로 끄는 것 같습니다. 비록 효과적으로 학습하는 법은 모르겠지만, 재밌게 배우는 방법은 이제서야 알게된 것 같습니다^^

나와같다면 2017-07-08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ecause for South Koreans,
people in North Korea are not just any bodies
왜냐하면, 한국인들에게 북한 주민들은 그저 아무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몇해전 이렇게 시작되는 오준 유엔 대사의 유엔 안보리 발언이 생각납니다

특별히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발음이 네이티브가 아니더라도..

말하는 사람의 진심이 돌덩이처럼 가슴에 와 닿는 그런 언어

겨울호랑이 2017-07-08 13:02   좋아요 0 | URL
네^^: 나와같다면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용하는 언어에 무엇을 담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 생각되네요^^:

서니데이 2017-07-08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의의 새로운 사진이네요. 볼 때마다 크는 것 같아요.^^
외국어는 배우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데, 그래서인지 원서를 읽는 분들이 부러워요.
요즘 영문 원서를 읽고 계신가봅니다.
겨울호랑이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7-07-08 16:23   좋아요 1 | URL
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 크는 것 같아요. 저도 익숙하지 않지만, 영어를 가까이 하려고 합니다.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