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쓰기는 그리기에서 발달해 나왔다. 아마도 모든 민족은 색칠하기나 그리기, 긁기, 깎기 등의 수단을 동원해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다른 효용성을 일단 제쳐두면, 이들 그림은 메시지나 메모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유형의 기록과 메시지는 흔히 '그림문자'라고 불리지만, 이 용어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기록과 메시지에는 표기처럼 항구적이고 이동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들은 언어형식과 어떤 고정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따라서 언어형태의 미묘한 조절 기제를 공유하지 못한다. _ 레너드 블룸필드 , <언어 2>, p12


 레너드 블룸필드(Leonard Bloomfield)의 언어학 입문서인 <언어 Language>에서는 그림에서 시작된 문자가 어떻게 변천되었는가에 대한 과정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사물, 현상에 대한 사용된 그림이 보다 널리 사용되면서 '표준화'되고 점차 일반적인 표현방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자(漢字)의 상형(象形)은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점차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생각을 하면서 새로운 문자 표현을 요구했고, 이른바 육서(六書) - 상형(象形), 회의(會意), 지사(指事), 형성(形聲), 가차(假借), 전주(轉注) - 라는 원리로 발전되었음은 익히 아는 바다.  


 그림에서 실제 문자로 넘어가는 전이과정에 나타나는 또 다른 중요한 국면은 서자와 언어형식과의 연상관계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상황에는 그림으로는 드러낼 수 없는 자질이 담겨 있다.... 그림의 사용자가 이런 문제를 만났을 때, 그는 실제로 자기 자신한테 말을 하면서 고민스러운 메시지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언어화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언어는 결국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사물을 전달하는 의사소통의 한 방식이다. 이런 전제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림의 사용자가 차라 말을 하는 순서대로 일련의 서자를 배열하다가, 구어 발화의 각 부분(각각의 단어)을 모종의 서자로 표시하는 관습을 개발해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적인 문자표기는 이러한 단계를 전제로 한다.  _ 레너드 블룸필드 , <언어 2>, p15


 레너드가 말한 중요한 국면 - 서자(書字)와 언어 형식과의 연상관계- '그림이 표현할 수 있는 고비'를 만났을 때, 중국어는 개선(改善)을 통해 이를 극복했다면, 우리 글인 한글은 '그림 - 문자'라는 전통적인 관계를 끊고, '소리 - 문자'라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뛰어난 혁신(革新)의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신의 결과 일부에게만 열려있던 정보(情報)의 독점 체제가 무너졌기에 3.1운동을 비롯한 조선 후기와 근대의 여러 투쟁에 민중의 참여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쓰기는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다. 쓰기는 소수의 언어공동체에서만 어느 정도 오랜 시간 동안 사용되었으며, 이들 소수의 언어공동체 안에서도 아주 최근까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활동이었다.  _ 레너드 블룸필드 , <언어 2>, p11

 

 허웅 선생의 국어 운동은 국민의 글자생활은 한글만으로, 언어생활은 쉽고, 바르고, 고운 말로,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말글의 가치를 높이 받드는, 국어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활동이었다. 선생이 주창한 '한글은 우리 겨레와 민중을 위한 글자로 태어난 것이다'라는 생각은 글자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한 정신이다. 한글만 쓰면 모든 국민들이 모두 편하게 글자생활을 하며 모두가 문화와 정보를 누릴 수 있게 되지만, 한글-한자를 섞어 글자생활을 하면, 일정한 교육을 받은 지식층만이 문화와 정보를 누리게 된다는 점에서 한글만 쓰기를 주창한 것이다._ 허웅, <우리 옛말본> 서문 ,p16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의 인쇄기가 없었다면, 종교개혁(宗敎改革)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역사의 평가를 볼 때, '인쇄기'라는 하드웨어가 아닌 '문자'라는 소프트웨어가 후대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설명할 수 없을만큼 클 것이다. 아마도 그 영향력은 개인적으로 청동기 시대의 '철기 혁명'에 버금가지 않을까. 한글날은 맞아 우리글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독일 전역에서 하급 사제들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승들에 의해 루터의 주장이 널리 알려졌다. 이들이 개신교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들에 의한 모든 것은 70여년 전에 발명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종교 개혁은 서적 출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518년에 독일에서는 단지 200여 권의 책이 출판되었으나 1519년에는 무려 900권이 출판되었던 것이다. 1521년 제국 회의에서 루터의 저서를 모두 불태우라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는 이미 50만 부 정도가 팔려나간 후였다. _ 마틴 키친, <케임브리지 독일사> , p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나르키아 anarchia(지배자 없음)"라는 말은 5세기 중반에 쓰임새가 확인되나 "아나키즘"이라는 말처럼 더 오래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다.(p16)... 무질서를 이해하는 데에는 아주 다양한 가능성이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노모스 Nomos가 지켜지지 않는 상태를 "불법 상태"와 "무법 상태"로 생각했다. 이 둘은 단지 단지 폴리스의 질서라는 표본이 있었으며, 또한 개념적으로 이들이 단지 뚜렷하거나 그렇지 않게 구별될 수 있었던 그러한 시대에서부터 나왔다. 이러한 나쁜 상태는 모든 가능한 비참한 상태, 특히 전제정치의 온상으로 간주되었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5 : 아나키/아나키즘/아나키스트>, P21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15번째 주제는 아나키, 아나키즘, 아나키스트(Anarchie, Anarchismus, Anarchist)다. 호메로스(homeros, BC 8C ? ~ ?)로까지 기원을 찾아갈 수 있는 '아나키즘'은 '법률(Nomos)'의 상대어로서 역사속에 자리한다. 다만, 이 단어가 담는 두 가지 의미는 부정적으로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아나키를 '불법 不法'인 상태로 규정할 때, 이것은 다른 형태의 악(惡)이 된다. 폭정(暴政)의 원인이자 결과로서, 아나키는 민주정이 낳은 최악의 결과로 인식되어 왔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군주정, 귀족정, 국가가 필요하다는 논지를 낳았다.


 마키아벨리 Machiavellis는 <로마사 논고 Discorsi>에서 정치체제 이론의 틀 내에서 '아나키'를 최초로 명확하게 언급하였다... 군주제는 쉽게 전제정이 되며 귀족정은 과두제가, 민주정은 쉽게 아나키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키아벨리에게서 민주정이 아나키를 만든다는 표현이 명확하게 발견된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5 : 아나키/아나키즘/아나키스트>, P27


 18세기에는 아나키 개념이 폭정과 새롭게 연결되었다. '폭정 Despotie'이 '폭정적 despotic' 및 '포악한 despotical'과 함께 이미 홉스를 통해서 당시 정치적 논의에 도입되었으며, 아나키 개념의 수용은 나중에야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관에서 순환 모형의 새로운 변형이 제시되었다. 아나키는 폭정/압제정을 만들고, 폭정/압제정은 아나키를 생성한다. 이와 함께 아나키와 폭정은 서로 비교되고 평가되었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5 : 아나키/아나키즘/아나키스트>, P34 


  아나키가 갖는 두 번째 의미가 보다 구체적으로 강조된 것은 18세기 이후 시점이다. 이로부터 '아나키'는 '폭정'과 '불법'이 아닌 '무법 無法'이라는 개념으로 구체적으로 '혁명'과 '자유'와 결합되면서, 아나키에 보다 긍정적 이미지가 부여되었다. 


  빌레펠트 Bielefeld는 다음과 같이 아나키를 정의한 문구를 제시한다. "우리는 '국가'가 어떤 '지도자'도 갖지 못하며 각자가 '법'을 무시하면서 자신만의 환상을 따라 살고 따라서 무질서와 혼란이 판치는 상태를 아나키라 부른다. 우리는 이로부터 이것이 정부가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악덕이며, 이러한 상태가 국가의 파멸보다도 오히려 더 심각한 상태임을 즉시 이해하게 된다. '폭정' 내지 '압제정'과의 결합과 분리를 통하여 '아나키'의 연관 영역이 확장됨과 아울러 독자적인 지배 형태 이론으로부터의 최종적인 분리를 통하여서 이들 두 개념은 역사적/사회적 차원으로 보다 강력하게 들어오게 된다... '폭정'과 '아나키'는 자유, 질서, 법과 대립되는 특징적 상태였다. 비록 개별적으로 차별화가 시도되더라도 여전히 이 두 개념은 있어서는 안 될 것에 대한 표현이었다. '아나키'와 '폭정'의 연관은 나중에서야 해소되었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5 : 아나키/아나키즘/아나키스트>, P37


 다른 개념어와 마찬가지로, 아나키 역시 프랑스 대혁명(French Revolution, 1789) 이후 이전의 부정적 의미를 쇄신한다. 혁명이 가져온 무질서, 혼돈의 상태는 단순한 카오스(chaos)가 아닌 코스모스(cosmos)를 내재한 가능태(可能態)이며, (거칠게 표현해서) 음(陰)에서 양(陽)이 나오듯, 아나키에서 자유로 나간다고 긍정적인 이미지가 새롭게 부여된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겠지만, 19세기 지식인들에게 혁명은 새로운 세계의 태극(太極)상태로 인식되었을까도 생각해 본다.


 19세기 초반에 사회적 차별화와 아나키 개념의 역동화라는 특징 속에서 의미의 확산은 의미의 분극화와 변화적 특성을 가지게 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사상적 특징과 표현 방식이 바뀌었다... 민주정은 아나키를 낳는다는 표현은 새로운 뉘앙스를 풍기게 되었다. 아나키는 무엇보다도 "무질서 desordre", "혁명 revolution", "봉기 insurrrection"라는 맥락에서 존재한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5 : 아나키/아나키즘/아나키스트>, P54


 헤스는 한편으로는 확실히 프루동을 넘어서서 모든 권위와 계급을 지양하는 것으로서 아나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의 긍정적 위치로서 아나키를 찾아냈다.(p98)... 헤스는 프랑스혁명으로 절대적-역사적 새로운 시작이 제시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역사에 대조적으로 "새로운 역사"가 등장하게 된다. "개인은 다시금 자신과 함께 시작하고, 그 역사는 기원 1년에 시작하고, 급속하게 이동하면서 정신의 도약 위에서 추상적 자유의 아나키로부터 노예제를 거쳐서 최후의 순간으로 가는 길을 만들고, 마침내는 실제적 자유에 도달한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5 : 아나키/아나키즘/아나키스트>, P99


 개념사 사전은 우리에게 '아나키'안에 담겨진 두 의미 '불법'과 '무법'의 의미 확장 역사를 보여준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와 질서 이전의 태고의 상태. 어느 쪽을 더 크게 보는가에 따라 이 단어는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다가올 수 있는 단어임을 실감한다. 개념사 사전과 관련한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아나키의 두 번째 의미로부터 떠오르는 책이 있어 옮겨본다.


 최소 국가는 우리를 불가침 不可侵의 개인들로 취급한다. 즉 우리는 이 국가 안에서 도구나 수단이나 자원으로 타인에 의해 어떤 방법으로도 이용될 수 없다. 최소 국가는 우리를 존엄성을 가진 개인적 권리들의 소유자인 인격으로 취급한다. 우리의 권리들을 존중함으로써 우리를 존중하는 최소 국가는, 우리에게 허락하여, 개인적으로나 또는 우리가 선택하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삶을 선택하고 우리의 목표와 스스로가 바라는 이상적 인간상을 실현하게 허락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실현 과정에서 우리와 동일한 존엄성을 지닌 다른 개인들의 자발적인 협동의 도움을 받는다._로버트 노직,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 p408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1938 ~ 2002)의 <아나키에서 유토피아 Anarchy, STate, and Utopia>가 그것인데 이 책으로부터 우리는 '국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소환되면, 자연스럽게 소환되어야 할 책이 존 롤스(John Rawls, 1921 ~ 2002)의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다. 마침 요즘 정치인 누군가에 의해 '공정'이 이슈가 되고 있느니만큼, 시의적절한 내용 정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예정대로라면. 아나키와 관련하여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 An Anarchist History Of Upland Southeast Asia>을 함께 정리한다면, 아나키즘에 대해 근원적으로 생각해보고 그 의미를 현대적으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ps. 책 한 권을 읽으면 다음에 읽어야 할 책 2권 이상이 나오니, 다단계도 아니고 독서의 끝이 없어 보인다. 잘린 머리에서 머리 2개가 나온다는 괴물 휘드라와 싸운 헤라클레스의 심정이 이러할까. 헤라클레스가 휘드라의 머리를 불로 지져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듯, 밝은 지혜의 힘으로 읽어야 할 책을 줄이는 것이 이 승산없는 싸움을 지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러자면, 지혜를 구해야 되는데, 얘는 또 어떻게 찾아야 할런지... 지혜를 찾을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두 번째 고역으로 에우뤼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한테 레르나의 휘드라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헤라클레스는 불타는 장작을 던져 휘드라가 밖으로 나오게 한 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헤라클레스는 몽둥이로 휘드라의 머리들을 쳐서 떨어뜨렸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머리 하나가 떨어져나가면 그 자리에서 두 개의 머리가 자라났기 때문이다. 이올라오스는 가까이 있는 숲 자락에 불을 놓아 불타는 장작으로 휘드라 머리들의 뿌리들을 태움으로써 다시 자라나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헤라클레스는 다시 자라나는 머리들을 제압한 뒤 불사의 머리를 베어 그것을 레르나를 지나 엘라이우스(Elaious)로 가는 길가에 묻고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았다._아폴로도스,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신화 Bibliotheke by Apollodoros>, <헤라클레스와 그의 자손들> 5장 2, p13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괭 2021-06-20 13: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휘드라와 같은 책 다단계… 잘 맞는 비유 같네요. 그래도 겨울호랑이님은 열심히 머리를 베어내고 계시네요^^

겨울호랑이 2021-06-20 22:10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독서괭님. 휘드라의 머리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가 나오는 듯하지만, 그저 놓지 않고 가다보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위안을 찾습니다 ^^:)
 


 독일연방은 "자기 본래의 목적이나 정치적 본질로 볼 때에 실질적인 국가연합이다.... 하지만 자신의 내적, 외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특정한.... 관계 속에서 전체와 상황 속에 개입되었고, 이 상황 속에서 하나의 연방국가가 되었다." 즉 연방국가와 국가연합은 서로에게 수단과 목적의 관계이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36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18번째 주제는 동맹(Bund)다. 본문에서는 '동맹'이 역사 안에서 '연맹(Bundnis)', '연방주의(Foderalismus)', '연방국가(Bundesstaat)'라는 변주로 나타났는가를 다룬다.  


 이 시기의 역사를 거칠게나마 '동맹'을 중심으로 요약해 보자.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800~1806)이라는 이름뿐인 제국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 크고 작은 영주들의 '동맹'이었다는 사실과 30년 전쟁을 마무리하는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 1648)의 결과 독일 영주들의 자치권이 강화되었고, 프로이센이 등장하였으며, '라인 동맹'을 통해서 독일 서부가 프랑스의 위성국으로 전락했고, 이후 '관세 동맹'으로 독일 제2제국으로 나아가는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것이 큰 흐름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서 '동맹'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변화되었다.


 같은 신분 계급 내에서 형성된 동맹 관계가 점차적으로 계급 간 동맹으로 확대되는 시기가 중세 이전의 '동맹'의 의미였다면, 종교 개혁과 30년 전쟁은 '종교'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이 보다 강화되었다. 이후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에 의한 라인동맹의 결성(1806), 프로이센 중심의 관세동맹(1834) 체결, 소(小)독일주의를 기초로 한 독일제국의 성립의 긴박한 역사 흐름 속에서 '동맹'이라는 의미는 다르게 받아들여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바라봤을 때, 우리는 다른 개념어들과는 달리 '동맹 bund'이라는 단어는 독일의 역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가 독일어 'bund'에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 또한 우리의 현실과 연계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계획했던 동맹 제도들이 마련되지 않았고, 따라서 조약에서 약속한 것보다 라인동맹국들의 통치권이 더 강력하게 유지되는 것으로 보였지만 나폴레옹이 라인동맹을 이용해서 제멋대로 규정을 위반했기 때문에 체제의 법과 현실 사이에는 구舊 제국에서 관습법을 통해 통제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모순이 발생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28


 결정적인 사실은 이제(라인동맹 성립 이후)부터는 공동의 상위 권력이 소멸되고(강대국의 보호를 받는 동맹 foedus clientelare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독일은 더 이상 국가들의 국가 Staatenstaat가 아니라 국가들의 동맹(국가연합) Staatenbund라는 사실이었다... "라인동맹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영토를 갖고 있지 않고, 동맹 제후들만 통치 지역을 보유하고 있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29


  강한 이웃을 두고 싶어하지 않았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cardinal-duc de Richelieu et de Fronsac, 1585~1642) 이래의 프랑스 외교정책에 좌우되며 끝없이 분열을 거듭하던 독일 제후국들. 나폴레옹에 의해 '라인연방' 강제 가입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빠진지 불과 30년 뒤에 관세동맹으로부터 시작되어 성취한 독일 통일은 분단 체제에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만, 독일 통일이 프로이센의 군사력에 의존한 바가 컸다는 사실은 우리가 걸러서 받아들여야겠지만, 관세동맹이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평화 통일 이전에 자유로운 경제 교류가 선행되어야한다는 좋은 교훈을 안겨준다. 이에 대해서는 독일 역사와 관련된 <30년 전쟁> <강철왕국 프로이센> <몽유병자들>의 리뷰로 넘기기로 하고, '동맹'의 개념어에 대한 페이퍼는 이만 줄이자...


 프로이센의 주도권에 거는 희망(그리고 우려)은 더 큰 경제 단위가 형성되고서야 비로소 실용적인 기반을 획득했다. 1833년에 북독일과 남독일이 관세동맹 Zollverein을 통합하면서 스스로를 "총연맹 Gesamtverein"이라고 칭했다... 새로운 관세동맹은 구성 국가들의 연방제적 평등을 엄격하게 지켰는데 - 결정은 만장일치로만 내려졌고, 그 기간은 8년으로 연장 기간이 12년으로만 제한되었다 - 그 뒤에는 프로이센의 사실상 패권이 독일연방에서 메테르니히 Metternich의 패권보다 더 효율적으로 숨겨져 있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40


 관세동맹은 이제 그야말로 실제로 통일 사상의 고향이 되었고, 그 가운데에서 이 사상은 점점 큰 힘으로 발전할 것이다. 정치 산업 국가로서 최적의 통일을 이루라는 경제적 요청이 프로이센의 지휘 아래에서 충족되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이정표가 될 만한 일이었다... 언제부터 독일에서 통일에 대한 요구와 인식이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는가? 공동체적 국가 이익이 독일의 상당 부분을 하나로 묶고 이렇게 결합된 국가에서 개별 정치를 행하는 가능성을 배제시켰을 때부터, 관세동맹이 시작되고 발전할 때부터였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 동맹>, P141


새로운 정당성으로서 국가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토대가 1815년에 형성된 독일연방에 침투해 1848년에는 국가연합을 잠정적으로 폭파시켰고, 1867/71년에는 최종적으로 (협의의) 연방국가로 전환시켰다. 모든 기준에 공통된 사항은 연방이 점점 더 국가화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연방국가 Bundes-Staat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다. 프로이센이 패권을 잡는 "군주제 연방국가 monarchischer Bundesstaat"가 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이원주의가 해체되는 방법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단 한번뿐이었던(그래서 독일어로도 한 가지 용어로만 불리는) 국가회 Nationalisierung와 산업화 Industrialisierung의 구조적인 문제를 보여준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8: 동맹>, P12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1-05-11 16: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분트, 분데스리가...

겨울호랑이 2021-05-11 16:12   좋아요 3 | URL
^^:) 그레이스님께서 말씀하신 단어의 어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19세기 이후에 정치적 입장의 스펙트럼이 "왼쪽"으로 확장됨으로써 한때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입장이 점차 중앙으로 밀려나 혁신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또한, 자유주의가 그 비판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세계관이나 정치적 목표와 동일시됨으로써 하나의 계급 이데올로기로 축소되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14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의 7 번째 주제는 '자유주의 Liberalismus'다. 자유주의의 의미 변천은 다른 개념어들의 역사와는 조금 다르게 흘러왔다. 처음부터 분명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진보', '개혁', '해방' 등의 단어와는 달리 '자유'라는 단어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상태이며, 단어가 주는 여유롭고 긍정적인 이미지는 이 단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도록 막아왔다.다만, 그 안에 정치용어로서의 싹은 분명히 자라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자유주의'는 급격한 의미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 분화에 결정적 역할은 한 이들이 바로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다.


  '리버랄리태드', 즉 탁월하며 신중하고, 편견이 없으며 관대한 사람의 태도를 의미할 뿐 아니라 종교적, 세계관적, 도덕적 규범 체계와 가치 체계에 대한 개방성과 관용, 자유로운 관계를 의미하기도 하는 '리버랄리태트'는 계속해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소통적 덕성이었다. 이 덕성은 일정한 교육 수준과 물질적 조건을 전제로 삼는다. 그것은 독립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버랄리태트는 또한 당파성의 반대말로서 언제나 정치적 자유주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였다. 그러나 반계몽주의적이고 반혁명론적인 생각과 주장의 맥락 속에서는 이 덕성의 효과들이 비판적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31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눈 자유주의를 부르주아 계급과 연계하면서,  '자유주의'는 급속하게 정치 사상 용어로 분화되기 시작한다. 정리하자면,  마르크스 이전의 '자유'가 유한의 육체에 대한 무한한 정신 상태로 구속받지 않은 형이상학적 의미를 가졌다면, 마르크스 이후의 '자유'는 물질로부터 자유로운, '가진 자들의 여유'로 의미가 세속화되었다.


 1840년대 중반에 마르크스 Marx와 엥겔스 Engels는 정치적 자유주의, 곧 "리버럴한 운동"을 전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에 귀속시켰다. 그들이 특히 영국과 프랑스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리버럴한 부르주아'라는 개념은 어떤 정치적 지향을 대변하는 자들의 계급적 상태를 표현했으며, 사회적 이해관계와 정치적 입장의 결합을 이데올로기 비판적으로 밝히려는 것이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91


 1852년판 <마이어 백과사전> 속의 자유주의에 대한 글에서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드러난다. "고대인의 리버럴한 정신"은 "자유로운 사람 그 자체의 표식"이었다. 이와는 다르게 "현대의 자유주의"는 "오늘날의 국가 생활 속에서 억압받는 자유롭지 못한 시민에 의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제약받지 않는 그들의 지배자에 대해" 수행된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108


 이러한 의미 분화 속에서 '자유주의'는 좌,우 양 극단과 결합된다. 어떻게 보면, 서로 대척점에 위치한 두 사상과 자유주의가 결합되었다는 사실이 모순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자유주의 안에 담고 있는 두 핵심요소가 다른 방향으로 자란 결과물임을 우리는 본문을 읽으며 확인할 수 있다.


 "우파"리버럴, 곧 민족적 리버럴들이 19세기의 마지막 30여 년 동안에 보수주의 세력들과 가까워진 반면에, 20세기 초에 일부 "좌파" 리버럴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정치적 협력이라는 생각에 자신들을 개방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124


 자유주의를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면 자유주의가 "뻔하고 단순하게 두 개의 분명하면서도 단순한 원칙들, 첫째로 정신의 세속화, 즉 정신의 비종교성과 천박함을 북돋는 것, 둘째로 정당한 소유자의 손에서 부당한 소유자의 손으로 재산을 이동시키는 것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62


 우리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에서 그려낸 역사 속에서 '자유주의' 안에 담겨진 모순된 의미가 큰 충돌없이 사용되어왔으나,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해 계급용어로 정의되면서 뜻이 갈라지고,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사용되면서 오늘날에는 다른 단어 못지 않은 강력한 정치용어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처음부터 정치적 자유주의는 그것이 세속화와 사회적 원자화의 부수적 현상이며, 물질주의와 상업 정신의 정치적 표현이고, 민주주의와 대중의 전제적 지배로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직면해 있었다. 그리하여 모순적인 현상이 나타났는데, '리버랄'이라는 말이 한편으로는 종종 비성찰적으로, 비정치적으로, 특정 정당과 무관하게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행동 양식과 목표를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결단력 없고, 소속감 없으며, 경솔하고 이기적인 정치적 태도를 비방하는 표현으로서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이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p13 


 오늘날의 정치사상 중 '자유주의'사상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사상이 '자유지선주의 Libertarianism'다. 대표적인 자유지선주의 사상가 머리 로스바드 (Murray N. Rothbard, 1926~1995)의 <자유지선주의선언 For a New Liberty: The Libertarian Manifesto>은 자유지선주의의 관점에서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책이다. 현대 자유주의의 흐름에 대해서는 이 책의 리뷰를 통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하고, 이번 페이퍼에서는 자유지선주의 강령의 개략적인 성격을 소개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갈무리하자...  

 

 자유지선주의 강령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약속과 함께 가장 좋았던 시절의 미국을 실현하겠다고 제안한다. 자유지선주의자들은 이제 다행히도 한물간 지난 시대 유럽의 군주정 전통에 집착하는 보수주의자보다도 더욱 공고하게 미국을 건국한 위대한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 전통은 우리에게 개인의 자유에 대한 미국의 전통과 평화로운 외교정책, 최소 정부와 자유시장 경제를 물려줬다. 우리는 보수주의자들보다도 더 진정으로 전통적이고 더 뿌리 깊게 미국적이지만,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급진주의자보다도 더욱 급진적이다._머리 N.로스바드, <새로운 자유를 찾아서 : 자유지선주의선언>, p510


19세기 이후에 정치적 입장의 스펙트럼이 "왼쪽"으로 확장됨으로써 한때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입장이 점차 중앙으로 밀려나 혁신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또한, 자유주의가 그 비판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세계관이나 정치적 목표와 동일시됨으로써 하나의 계급 이데올로기로 축소되었다._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 P14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21-04-28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점이 좋은 거 같습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핵심을 다르게 보는 것 같습니다. ㅎㅎ
제가 이 책을 읽을 때 자유 개념이 바뀐 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아니라 ‘소유’에 대한 자유를 인정한 시기라고 보았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4-28 22:25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저는 미처 생각치 못했는데,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말씀하신 지점을 다시 짚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4-28 21:34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제가 잘 못 읽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미쳐 몰랐던 말씀이라서 드린 얘기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1-04-28 21:59   좋아요 0 | URL
역사의 흐름을 규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관점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중요한 것임에도 놓치는 부분이 없지 않음을 느낍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를 모르는게 제 자신의 한계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관점에서 말씀해 주시는 부분은 큰 도움이 됩니다. 제 생각 안에 갖혀 있는 것은 마치 아침에 면도할 때 한 방향으로만 깎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다른 방향에서 면도를 하면 훨씬 깔끔해진다는 면에서 감사드립니다.(물론, 7중날 면도기를 사면 제일 좋겠지만, 제 지식은 그 정도가 되지 못하네요..ㅋㅋ)
 


 중세의 전쟁 개념의 이해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사실은, 라틴어에서 기존에 사용되던 'bellum'이라는 단어가 게르만어에서 차용된 'guerra'라는 단어에게 자리를 비켜 줘야 했다는 것이다. 'guerra'의 원래 의미는 "침해된 (권리)질서"로 가정할 수 있다... 결국 'kriec'는 이런 식의 해석 보조수단에 이끌려 최정적인 의미가 '전쟁'="무력에 의한 권리중재"로 축소되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 전쟁>, p16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4번째 주제는 전쟁(krieg)이다. 개념사 사전은 원래 '분쟁'을 뜻하던 독일어 '전쟁 krieg'이 '무력으로 인한 권리 중재'로 의미가 축소되었고, 전쟁의 목적이 '평화'에서 '무조건적인 자기 주장'으로 바뀌었으며, 군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추상적인 전쟁'에서 국민 단위의 '총력전'으로 변화된 역사를 보여준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전쟁>에서는 전쟁의 의미가 무력에 의한 권리 중재로 축소되는 것은 중세(中世)의 봉건 질서 내에서 무력에 의한 내적 투쟁의 결과였음이 서술된다. 다만, 이 경우에도 전쟁의 목적은 이성과 신앙이 합일된 '신의 질서로의 회귀'였다면, 이에 대한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토마스 홉스 Thomas Hobbes는 인간의 발명을 통해 피할 수 있는 모든 단점들과 온갖 불행의 뿌리는 말하자면 전쟁이라는, 무엇보다도 내전이라는 동일한 확신에서 출발하면서 그리고 보장된 절대적인 평화를 위한 조건들을 이론적으로 제시하겠다는 일념으로 가장 날카롭게 전통적인 독트린과 단절했다... 홉스의 경우에는 인간의 본능적인 사회성 socialitas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적 상태 status naturalis"와 관련하여 평화와 전쟁의 관계를 뒤집었다. 그에게는 평화 pax가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bellum omnium in omnes이 자연 상태를 특징짓는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 전쟁>, p36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리바이어던에게로 권력 이양. 그 결과 이전에는 전쟁의 성격이 '대내 對內'와 '대외 對外'로 나뉘어지게 되면서, 전쟁은 하나의 수단이 된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사회의 안정을 지키는 합법적 행위. 이로부터 무력(武力)은 개인으로부터 국가로 넘어가고, 전쟁은 정치행위가 된다. 내부의 불안을 외부로 돌리려는 일련의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웰즈(Herbert George Wells, 1866~1946)의 <우주전쟁 War of the Words>에는 이러한 전쟁의 성격이 잘 표현된다.


 오로지 이런 외적인 전쟁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것은 어떤 혐의를 불러일으킨다. 즉 국가 간 전쟁을 찬양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발설되지는 않은 어떤 동기가 있는데, 그것은 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내전에 대한 공포, 즉 혁명에 대한 고백되지 않은 공포였다는 혐의 말이다. 이미 헤겔은 "행복한 전쟁은 내적인 불안을 막아주고 국가의 내적 힘을 확고하게 했다"고 확증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 전쟁>, p74




19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 근대 국민 국가의 형성은 상비군의 조직과 함께 모든 국가 구성원을 공동 운명체로 묶었고, 그 결과 근대 국가에서의 전쟁은 총력전(總力戰)의 양상을 보인다. 그 결과 19세기 남북전쟁까지만 해도 전장(戰場) 옆에서 전쟁을 구경하던 이들의 모습도, 전투 후 패잔병을 약탈하던 농부들의 모습도 이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애국(愛國)'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욕망이 강제로 통합된 하나의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추상적인 전쟁은  단지 그 고유의 영역으로 여겨진 군사적인 영역 내에서만 절대적이었다... 총력전의 특징은 경계를 해체하고 전 국민을 직접 - 군대라는 수단으로뿐만 아니라 - 전쟁에 관여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이 개념의 근본에는 현재의 전쟁에서는 "작은 정치적 목적이나 커다란 국민적 이해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 자체의 생존과 정체성이 문제가 된다는 견해가 놓여 있다. 여기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은 국가 속에 근거하는 국민이 자신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더불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신하거나 또는 확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총력전'은 단지 이데올로기적으로 합법화된 전쟁으로서 일종의 "이념 전쟁(이념의 유혈적 교체)"으로 생각할 수 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 전쟁>, p90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 전쟁>에서 우리는 '전쟁'이 '평화'로 가는 '과정'에서, '자기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바뀌어 온 것을 확인하게 된다. 전쟁이 수단으로 가장 극적으로 활용된 예가 '제국주의'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다음으로 읽어야 할 주제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다음 주제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3 : 제국주의>,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5 : 평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1-04-14 2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기 내부의 불안을 외부로 돌리려는 행위로서의 전쟁이라는 말이 콕 와닿네요. 대부분의 전쟁이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서 전 우리 사회 내부에서 타자에 대한 증오나 혐오가 늘어나는 것을 볼때마다 좀 섬뜩해져요.

겨울호랑이 2021-04-15 07:15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전쟁을 원하는 이들의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기에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는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주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