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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에 귀의하고 불교의 삼매를 잠심하여 연구해도 성인을 버리고 지혜를 끊으며, 칠정과 육욕을 단절할 방법이 없었다. 범인의 경지를 초월하고 진세를 벗어나는 ‘세외법‘을 추구하였으나 도리어 명교인 유가 낙토樂의 ‘세간법世間‘을 밟아야 했다. 유가의 용세 정신은 진세의 인연을 해탈하는 선의 풍모와 부처의 골격을 주조해내지 못하였다. 이렇게 벗어날 수 없는 모순에는 곧 그가 불교의 교설에 의심을 품고서 불교를 버리고 유학을 숭상하는 데로 향한 정신적 위기가 잠복해 있었다. 주요" - ‘주정희靜‘ - ‘주경主敬‘의, 선에서 빠져나와 유가로 돌아오는 그의 길고 긴 변천의 역정이 마침내 동안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 P259

이통의 마지막 결론은 다음과 같다. "오직 일상생활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혹일에 나아가 공부를 하면 거의 점차 자기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마말일 뿐입니다." (동상) 이일분수에 대한 이런 전면적 인식은 곧 그들로 하여금 철학상의 추상적인 이기상즉, 도기상즉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이사상즉으로 확장하게 하였으며, 즉사궁리를 강조하는 데서 나아가 즉사응사를 강조하도록 하였다. - P382

실제에 근거하여서 편찬하는 주희의 이런 태도 때문에 그의 <팔조명신언행록>은 북송 시대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서가 되며, 그가 고심하여서 지은 <통감강목>보다 학술적 가치의 생명력이 더 길었다. 태극 본체론의 구조를 세운 일로부터 도통과 정통의 확립에 이르기까지 주희는 한천정사에서 체계와 규모를 대략 갖춘 이학과 경학의 광대한 집을 전체적으로 완성하였다.  - P672

사실 그는 삼구의 회합 이후 이미 날카롭게 깨닫고 있었다. 그가 추구하려 한 것은 존덕성과 도문학의 통일, 곧 경건과 앎을 동시에 닦는 방법으로서, 또한 황종희가 말하는 ‘경건과 의를 동시에 유지하고, 명절함과 성실함을 나란히 진보시키는‘ 방법이다. 이는 ‘존덕성‘을근본으로 하며, ‘도문학‘에서는 널리 배움에서 요약함으로 돌아가고, 잡스런 데서 정밀한 데로 들어가 평생 학문 저술에 대해 ‘강설이 또한 많은 것근거를 억지로 찾아내서 반드시 취하려 하는 것, 흐름을 따라 말단을 좇는것, 유추하여서 추구하는 것‘ 등의 병폐를 단번에 쓸어버리고 총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순희 4년 정유년(1177)에 평생의 경학 저술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때의 지도적인 사상이다. - P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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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점들이 소년 주희를 대단히 강력하게 끌어들였기 때문에 좋고와 유자휘의 선학 논쟁에서 주희는 좋고 쪽으로 향하였고, 종교의 제자 도겸의 ‘소소영령한 선을 한 번 보고는 마음을 기울였던 것이다. 소홍 17년(1147)에 유자휘가 세상을 떠난 뒤 주희는 종교와 도겸의 주지도를법문의받음으로써 장장 10년에 걸쳐 도교와 불교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반대로유자회의 세 글자 부적이 추구하는 주정의 법문은 그에게서 오랜 시간 시들어 떨어져버렸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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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거의 언제나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갈등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와 조직이 이런 상황을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갈등의 사회화는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과정이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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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로자 - 만화로 보는 로자 룩셈부르크
케이트 에번스 지음, 폴 불 엮음, 박경선 옮김, 장석준 해제 / 산처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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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이자 사회운동가 로자 룩셈부르크 (1871~1919)의 삶을 다룬 그래픽 노블. 이 안에서 우리는 한 인물의 삶과 함께 「자본의 축적」의 개요를 만나게 된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주의는 전쟁을 통해 매번 새롭게 ‘부활‘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로자 룩셈부르크는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평화‘를 지향하는 그의 이론과 삶을 쉽게 그려낸 책이다.

마지막으로 그토록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부르짖던 로자가 죽임을 당한 시점이 제1차세계대전 종전 후였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자본주의는 세계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다른 모든 경제를 말살시키려 든다. 적수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이 서 있는 토양에는 다른 경제적 매개가 필요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실 자본주의는 스스로 파멸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모든 산업 형태를 지배하게 되는 종점에 다다르면, 스스로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내부 모순으로 분열이 일어나고 더 이상 존재가 불가능해진다... 무력은 자본주의가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며, 자본의 축적은 무력을 항구적 무기로 이용한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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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4-12 13: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막스 갈로가 쓴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를 읽었습니다만. 지금 품절이군요.

겨울호랑이 2021-04-12 14:04   좋아요 2 | URL
아, 그렇군요. Falstaff님께서 알려주신 책을 동네 도서관에서 검색해 보니 마침 있네요.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deadpaper 2021-04-13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을 통해 부활한다니!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겨울호랑이 2021-04-13 23:3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deadpaper님.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로자는 이미 전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만약, 대공황을 지난 시점까지 살았다면, 공황의 본질에 대해서도 석학다운 분석을 내놓았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드네요...
 


 나는 어려서부터 배우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물불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뭐든 계속해서 배우고 싶었던 것이 나의 심정이었다. 때맞춰 공교롭게도 만주군관학교에서 생도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험에 응시하게 됐고, 예상대로 합격하여 1940년, 입교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p23)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 中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며칠전 타계한 고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이다.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정리한 책 안에서 자신은 당시를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군관학교 졸업 후, 자므스 부대와 간도특설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간도특설부대는 1944년 늦가을에 열하성의 승덕에 집결한 다음, 만리장성을 넘어 기동지구에 주둔하여 사방을 포위한 팔로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감행했다... 내가 간도특설대에 부임할 무렵, 간도지역은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밀려 이곳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은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고 없을 때였다. 특히 김일성은 연해주의 하바로프스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가 소련군에 입대한 후였다. 따라서 내가 간도특설부대에서 근무할 무렵 우리의 토벌대상은 모택동의 팔로군이었다.(p25)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 中

  
 책에서 백선엽은 자신의 회고록 대부분을 한국전쟁에 할애한다. 자신의 가장 빛나던 시기에 초점이 맞춰진 이 책에서 해방까지의 시기는 약 30페이지 정도다. 만주군인, 간도특설대로 활동한 것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것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이 배우기를 좋아해 주위의 권유로 때맞춰 만주군장교가 되었을 뿐이며, 간도특설대 근무 시에도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과 교전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에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 성장 이범익(李範益)의 건의를 받아들여 엔지현(延吉縣) 특무기관장 겸 젠다오 지구 고문인 오고에(小越信雄) 중좌가 주도해서 만든 조선인 특수부대다.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과 조선인 사관 9명을 먼저 선발하여 옌지현 명월구에서 같은 해 12월 15일 제1기 지원병 입대식을 열었다.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했다. <친일인명사전> 中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권유로 인해 만주군에 지원했다는 사실과 독립군과의 교전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의 행적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교편 대신 선택한 길에 설 경우, 독립군과의 전투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친일행적이 아닐까. 또한, 독립군과의 직접 교전이 없었다고해도, 해방 이후 1948년 정보국 국장 중위에서 1950년 사단장에 이르는 초고속 승진은 간도특설대 당시의 풍부한 전투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만주군 지원과 당시 경험으로 해방 이후 승승장구했다는 사실은 그의 적극적인 참여의 원인과 결과라는 점에서 친일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한다.

사실, 그의 회고록을 읽다보면 그의 친일은 행동 뿐 아니라 생각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행동이 생각의 결과임을 고려해본다면 당연하겠지만. 회고록 여러 곳에서 남겨진 그의 언행은 그 무엇보다 친일행적의 생생한 증거임을 확인하게 된다. 백선엽. 그에게 조국은 어디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남산의 박문사 자리에 기존 사찰 시설을 활용하여 한 동안 정보교육을 실시했다. 박문사(博文社)란 일제 강점기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해 지금의 신라호텔 면세품 상가 자리에 세운 일본 사찰이었다. 안중근 의사에게 살해당한 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일본인이 만든 절터에 중요한 군사기관을 세우는 것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p52)<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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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7-14 14: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어찌 매번 시의적절한 리뷰를 올리실 수 있으세요?ㅎㅎ

겨울호랑이 2020-07-14 14:06   좋아요 1 | URL
^^:) 제가 시류에 편승한 독서를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보 2020-07-14 1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문(博文) 한자 옆에 히로부미라고 기입해 놓으면 이해가 될 수 있겠네요. 인간은 누구나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을 해석하는 법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2020-07-14 21:20   좋아요 0 | URL
우보님 말씀을 듣고보니 그렇게 수정하는 것이 더 좋겠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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