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무엇을 거절당했으며 무엇을 희망했었는가. 혼인을 거절하고 혼인을 희망했었다. 단순히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지순한 것을 거절당한 것은 이 편이며 거절한 것은 그 편이 아니었던가? 길상의 두려움은 서희에 대한 자기의식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보는 데 있었다. _ 박경리, <토지 6>, P112/482


  박경리(朴景利, 1926 ~ 2008)의 <토지 6>는 길상과 서희의 어색한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서희가 상현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배우자로 길상을 생각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김훈장 등 주변인은 물론 결혼 당사자인 길상마저 이를 거부할 정도로 서희의 결혼 결정은 적지 않은 파장을 용정에 가져왔다. 무엇이 문제일까.


 야망은 불순물이다. 불순물은 혼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현과 사이에 질러놓았던 지름목은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드러내려는 서희의 모험을 길상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서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던 그러나 길상은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다. 서희와의 거리는 절체절명의 것이다. 왜냐? 자존심 따위, 사내로서의 오기 따위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랑의 순결 때문이다. 순결을 지키고 싶은 때문이다.(p20).... 시초부터 야망의 수단이 아닌 길상과의 결합은 가능할 수 없었다. 적어도 길상과의 결합에 그것 이외 어떤 구실로 서희는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었겠는가. _ 박경리, <토지 6>, P21/620


 결혼(結婚)을 하려는 또는 피하려는 길상과 서희의 생각은 다르다. 서희를 사랑하기에 되려 거리를 두는 길상과 자신의 야망을 위해 결혼을 결심한 서희.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그래서 부부의 날이 5월 21일이라고 한다)는 결혼이기에 생각이 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이들의 결혼은 두 사람의 생각 차이 외에도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래서, 이번 페이퍼에서는 앨런 맥팔레인 (Alan Macfarlane, 1941 ~ )의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Marriage and Love in England 1300~1840>의 도움을 빌려 결혼과 사랑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인류학자 로버트 로우이(Lowie)에 의하면 대부분의 인류사회에 있어서 결혼을 성사시키고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관습적 견해이다. 원시부족뿐 아니라 서구의 몇몇 사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서 낭만적 사랑은 무색해진다. 낭만적 사랑이 없을 수는 없으나,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사안에서 로맨스는 중요치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_ 앨런 맥팔레인,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 p179


 저자 앨런 맥팔레인은 대부분 인류 사회에서 오랜 기간 동안 결혼에 '사랑'이라는 감정 요인이 거의 관여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이로부터 오늘날에는 보편화된 '낭만적 사랑'에 기초한 '연애결혼'은 오직 잉글랜드, 미국 등 영미(英美)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특성을 저자는 '맬서스주의적 결혼체제'라고 부르며,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에서 잉글랜드의 근대성과 연관짓는다. 이런 면에서 '개인의 감정'에 기반한 결혼은 근대적 양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자녀들이 가족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구실을 제공해 준다. 자녀들은 '사랑'을 위해 결혼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부관계를 부모형제에 대한 유대보다도 최우선에 둔다. 따라서 아프리카에서는 '연애결혼(love marriage)'은 가족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이동시키는 이데올로기적 발판을 제공함으로써 자녀들이 부모세대를 떠나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사회적으로 상승이동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변동은 위로 향하는 부의 흐름에서 아래로 향하는 부의 흐름으로 전환하는 과정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또한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라 남편-아내의 관계를 가장 중요한 심리사회적 유대관계로 분리시키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_ 앨런 맥팔레인,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 p182

 사실, 맥팔레인이 본문에서 지적한 '부모'는 단순하게 혈연적 부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속한 집단, 관습의 총체이며, 결혼 당사자가 이러한 관습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사자 의사'를 존중하는 제도가 우선 정착될 필요가 있었다.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결혼 당사자의 의견에 우선권을 준 이 같은 제도가 과연 산업화의 노동자 공급에 어떤 역할을 했을지는 별도의 페이퍼로 미루도록 하고, 여기서는 1910년대 간도 지역 서희-길상의 결혼 속에서 매우 서구적인 생각이 담겼다는 정도를 담자. 


 부르주아들이 즐겨 쓰는 결혼 전략은 소개에 의한 결혼이었다. '중매장이들'이 이 분야의 전문가 역할을 했는데, 대개 좋은 집안의 친지인 노처녀들로서 나무랄 데 없는 평판을 지니고 있어 모두에게 신뢰를 주는 인물이어야 했다. 이들은 서로 조건이 어울려 보이는 젊은이들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부모, 자크 샤스트네의 부모, 에드메 르노댕의 아저씨 부부는 이처럼 소개를 받아 결혼했다. _ 필립 아리에스 외, <사생활의 역사 4> , p350


  미래의 배우자를 고르는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한 가지 조건이 탁월하면 다른 불리한 점은 무시될 수 있었다. 결혼 체제에서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아마도 재산과 혈통 사이의 용이한 교환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그러한 교환이 극도로 어려웠다. 예컨대, 낮은 카스트의 재산 많은 청년이 브라만의 가난한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부유한 유산계급(bourgeois) 청년은 귀족 신분과의 결혼에 장벽을 느꼈다. _ 앨런 맥팔레인,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 p241


 우리보다 앞서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하는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도 신분을 뛰어넘는 결혼은 매우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 이제 막 신분제가 철폐된 조선 사회에서 서희의 결정이 가져온 충격이 컸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순결한 사랑'을 지키고자 결혼을 거부한 길상의 결정까지 함께 놓고 생각한다면 어느 시대 못지 않게 개인의 감정을 중시하고, 평등하게 바라보는 근대화된 시대상을 그리게 된다. 서희의 결혼 목적만 빼놓고 생각한다면.


 대부분의 사회에서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은 재생산, 즉 자손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중요성이 있다(p219)... 결혼은 남녀 간에 견해차이가 있었고, 그와 동시에 가문의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p223)... 반려자를 얻는 이상적 결혼, 우정으로서의 결혼은 결혼에 대한 기독교적 이상인데, 기독교적 이상이 제시하는 결혼의 세 번째 존재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상호교제, 도움 그리고 위로였다.' _ 앨런 맥팔레인,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 p229


 

그렇지만, 가문과 자신의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우는 몽테크리스토 백작(Le Comte de Monte-Cristo) 에드몽 당테스와 같은 서희의 모습을 본다면,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결정이 아니라 관습에 누구보다도 철저한 결정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신분, 재산 등을 고려하지 않는 서희의 모습에서 냉혹한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anism)에 충실한 인간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같은 서희의 면모가 길상으로 하여금 서희를 사랑하면서도 거리를 둘 수밖에 만들었던 것은 아닐런지.  결국, 이렇게 끝나는 듯하던 이들의 관계지만 용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닥친 불의의 사고로 극적으로 맺어지는 것을 보면서, 사고를 통해 이들이 '거리'를 분명 느끼면서도 결혼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비록, 그 운명이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못하겠지만.


 푼수 없이 지껄인 길상이나 체모 잃고 울어버린 서희, 푼수 없었다고 느끼는 이상, 체모 잃었다고 느끼는 이상, 이들 사이에는 엄연한 거리가 있는 거고 거리를 의식하면 할수록 멍울은 굳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더 깊은 고뇌를 안고 돌아가는 것이다.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때론 절망이, 때론 희망이 교차하는 마음은 끝없이 방황하면서. 그러나 이들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왔다. 그것은 용정을 향해 달리던 마차가 어떻게 되어 그랬던지 뒤집힌 사건이다. _ 박경리, <토지 6>, P159/482


 이번 주에 읽은 <토지 6>에서의 결혼을 둘러싼 서희와 길상의 미묘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한 근대적 사고를 길상에게서 발견하는 한편, '가문'을 지키기 위해 신분의 차이는 신경쓰지 않는 보수(保守)주의적인 서희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이 결혼으로 온전히 봉합되지 않았음을 길상의 귀마동(歸馬洞)에서의 환상에서 확인하게 된다. '꿈'이라는 환상을 통해 길상은 자신의 미래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부르다흐는 꿈-생활의 특성을 다음과 같은 명제로 요약한다. <꿈의 본질적 특징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1) 지각 능력이 공상의 산물을 감각 인상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정신의 주관적 활동이 객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2) 수면은 자아의 권능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잠이 들면서 일종의 수동적 상태가 된다.... 자면서 보는 형상들은 자아의 권능이 중지된 결과 생겨난 것들이다. _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 p48/505



 말 한 필은 서쪽에서 돌아오고 다른 한 필은 동쪽에서 돌아오는 게요, 실은 그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말이 돌아오는 거지만, 한데 사내와 여인은 옛날의 그들은 아니오. 아니거든. 머리칼은 햇볕에 타서 삼올 모양으로 누렇게 뜨고 얼굴에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굵은 주름, 거미줄 같은 잔주름, 이빨은 빠져서 양 볼이 꺼지고 파파할멈 할아범의 모습들이오. 허나 그보다 슬픈 것은 사내와 여인이 서로를 알지 못하며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일이었소. 그네들은 타인이며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요. 제가끔 자기 갈 길을 탄식하는 게지."_ 박경리, <토지 6>, P173/482


PS. <토지>를 읽다보면 길상이 환상에 빠지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만약,  무당이 이런 길상을 보면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도 길상은 스님이 되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약 내가 소설 속에 잠시 등장할 수 있다면 소설 속 인물 누구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


  <토지 5>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주어진 주말 미션은 소설 속의 인물에게 조언을 하는 과제다. 누구에게 어떤 조언을 해야 하나. 그보다 내가 소설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 역시 한 명의 인물로 육화(肉化)될 필요가 있었기에, 어떤 인물이 될 것인가가 중요했다. '행인3' 역할로는 어떤 조언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소설 시간 밖의 존재가 소설 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일. 그것을 먼저 해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유명한 사례의 한 인물을 가져오기로 결정했다. 마니피캇(Magnificat).



[그림] 마니피캇(출처 : 위키백과)

 

 천사는 마리아에게로 가서 "기뻐하소서, 은총을 받은 이여. 주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당황하며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당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습니다.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 그는 크게 되어 지극히 높은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입니다..."  _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루카복음> (1:26 ~ 32), p284


 <교부들의 성경주해>에서 수도승 요한은 이 사건에 대해 '시간 밖의 존재가 시간 안으로 들어온 신비'라고 말하는데, 소설 밖의 독자가 소설 안으로 진입하는 사건 역시 이러한 신비에 부합하지 않을까. 기꺼이 천사 가브리엘(Gabrielus)의 캐릭터를 가져온다. 인물과 역할을 선정했으니, 이제는 두 개의 과제가 남는다. 누구한테 나타날 것인가와 무슨 예언을 할 것인가.


 야망은 불순물이다. 불순물은 혼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현과 사이에 질러놓았던 지름목은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드러내려는 서희의 모험을 길상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서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던 그러나 길상은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다. 서희와의 거리는 절체절명의 것이다. 왜냐? 자존심 따위, 사내로서의 오기 따위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랑의 순결 때문이다. 순결을 지키고 싶은 때문이다.(p20).... 시초부터 야망의 수단이 아닌 길상과의 결합은 가능할 수 없었다. 적어도 길상과의 결합에 그것 이외 어떤 구실로 서희는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었겠는가. _ 박경리, <토지 6>, P21/620


 소설 내용 상 길상과 서희가 이제 곧 맺어지는 시점에 이르렀기에 처음에는 길상 또는 서희에게 조언을 생각했었다. 이들의 미래를 보여주면서 결혼을 만류하는 조언.  구체적으로 나중에 너희 둘이 결혼해서 둘이 경영하는 길서상회가 돈을 많이 벌게 되지만, 서희는 간도에서 진주로 내려가고 길상은 독립운동하면서 틈이 생길 예정이다,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또, 길상에게는 너는 나중에 관음탱화(觀音幀畵)를 그려야 하고, 독립운동도 할 사람이 처자식을 어찌 돌볼 것인가라는 조언을, 서희에게는 너는 결혼보다는 조씨 가문에 대한 복수가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느냐, 결혼을 수단으로 생각하면 배우자가 불행해진다. 그럼 서로 겉돌게 되니 잘 생각해라... 이런 조언을 하려다 보니 가브리엘이 아니라, 맥베스의 세 노파/세 유령 이 되버린 듯 한다. 불행한 운명을 예언하는 것이 괜히 서희를 자극해서 더 폭주할 수 도 있을 듯하고, 내가 아니더라도 이번 주 길상과 서희는 다른 챌린저로부터 많은 조언을 받을 것 같아서 이들에게 조언하는 마음은 거둔다.


맥베스 [마녀들에게] 말해라. 너희는 누구인가?

마녀1 맥베스 만세! 글래미스 성주 만세!

마녀2 맥베스 만세! 코더의 성주 만세!

마녀3 맥베스 만세! 훗날 왕이 되리라. _ 세익스피어, <맥베스>, 1막 3장, 645


유령1 맥베스, 맥베스, 맥베스, 맥더프를 조심하라. 파이프를 조심하라. 이상이다.

유령2 잔인하고 용감하고 담대하라. 인간의 힘을 우습게 알라. 여자 몸이 낳은 자는 맥베스를 해하지 못하리라.

유령3 사자의 용기를 지키고 오만하며, 누가 안달하는지 누가 속이 상하는지 반역자가 어디 있는지 걱정을 마라. 맥베스는 절대로 패하지 않으리라. 울창한 버넘 숲이 던시네인 산으로 그에게 맞서 오기 전엔. _ 세익스피어, <맥베스>, 4막 1장, 665


 다음으로 마음에 끌리는 인물은 월선이다. <토지> 전체에서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안쓰러운 여인. 그렇지만, 사랑하는 이와 사랑을 주는 이가 있기에 결코 불행하다고 볼 수만은 없는 여인. <토지> 전체에서 마니피캇과 가장 어울리는 인물은 월선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월선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까.


월선이 이곳으로 옮긴 것은 병이 무거워지면서 국밥장사를 할 수 없게 된 때문이다. 월선은 자기 병이 그렇게 중병이 아니며 장사 안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회복될 수 있는 것이라고 우겼다. 그것이 다 홍이 때문이라는 것은 뻔한 일.(p156)... 영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에도 여러 번 보내었고 월선이 치명적 병을 앓고 있으며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에도... _ 박경리, <토지 8>, p158/654


 의사가 왔어도 병자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진통제를 쓰는 것, 보혈주사를 놓아주는 것이외 다른 방법이 있을 순 없었지만 의사가 다녀간 후면 월선은 반드시 홍이를 찾았다. 고통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을 용이에 대해선 일절 말이 없었다. _ 박경리, <토지 8>, p372/654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올려다 본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산판 일 끝내고 왔다." "임자,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용이 돌아와서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p378)...  시신이 놓인 방에서 물러 나려다 홍이 뒤쫓아왔다. "옴마!" 가슴 위에 모아놓은 뼈뿐인 손을 잡고 다시. "옴마!" 홍이 계속하여 옴마! 옴마! 부르며 방에서 뛰쳐나간다. _ 박경리, <토지 8>, p379/654


 아무래도 머지 않아 월선은 손을 쓸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죽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수태고지(Annunciation)에서는 생명의 탄생을 예언하지만, 여기서는 죽음을 예언한다는 것이 사뭇 마음에 걸리지만 수태고지 이후 시메온/한나 예언자의 고통에 대한 예언이 이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월선에게는 평안한 죽음을 약속하며 마음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 듯하다.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아기 어머니 마리아를 향하여 말했다. "두고 보시오. 이 아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이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며 또 그는 배척당하는 표징이 됩니다. 당신의 영혼을 칼이 꿰뚫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심중의 생각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_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루카복음> (2:34 ~ 36), p293


 비록 치료하기 힘든 병에 걸려 고생하지만, 주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투병 생활을 하고 곁엔 마음으로 따르는 아들 홍이가 지켜주며, 임종 순간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용이가 돌아와 곁에서 삶을 마무리 한다는 이야기. 결코 죽음의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월선은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월선의 모습은 내게 경외(敬畏)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 


 복음사가는 예수 탄생 예고의 장면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등장시키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천사는 또한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뜻모를 말로 정숙한 마리아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암브로시우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이 기적적인 출생에 대해 마리아가 아니라 가브리엘이 마리아 앞에서 두려워해야 마땅하다(테오파네스) _ 아서 A. 저스트2세, <교부들의 성경주해> <루카복음서>, p68


 독서챌린지 과제로 페이퍼를 작성하면서, 새삼스럽게 월선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면 참 가슴아프면서도 곁을 지켜주고 싶은 인물. 이제 얼마 뒤면 월선의 죽음이라는 정해진 소설 속의 시간은 다가오겠지. 책을 몇 번을 읽더라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 순간 속에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한편으로는 행복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1-09-12 0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겨울호랑이님 토지가 재독이세요?? 줄거리 다 아시네용~ㅎㅎ
저도 길상이와 서희 결혼은 반대입니다. 부부로서 행복하지 않은 거 같아요. 그리고 제 맘 속 최고 인물도 월선이에요~!!^^

겨울호랑이 2021-09-12 06:58   좋아요 1 | URL
이번에 토지 독서 챌린지 신청하고 급하게 선행학습을 했어요 ㅋ 대강의 줄거리를 파악하고 챌린지 기간 중 세세히 문장을 들여다 보는 중입니다. 붕붕툐툐님 말씀을 들으니 제 조언이 지지를 받는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겨지네요^^:)
 

 

맷돌 밑부분에 쳐놓은 거미줄에서는 바야흐로 무서운 사투가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모기 모양이나 모기보다는 한결 완강하고 정력적으로 생긴 날벌레와 그 날벌레보다 작은 거미 한 마리와의 싸움이었다. 파득거리는 벌레의 날래에서 무시무시하게 큰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길상은 물 묻은 손을 뻗쳐 거미줄을 확 젖혔다. 거미는 몸을 움츠리고 가사상태를 위장하면서 다리 두 개를 뻗쳐 벌레는 잡고 놓질 않는다. 두 개의 다리는 흡반이 달린 문어 다리 같았다. 순간적으로 견딜 수 없는 증오심에서 길상은 거미를 문들어 죽이고 말았다. _ 박경리, <토지 5> , p336/670 


 토지 독서챌린지. <토지 5>에서 서희와 그를 따르는 평사리 사람들은 용정에 정착한다. 서희는 자신의 수완을 발휘해서 많은 재산을 쌓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점차 안정적으로 정착해간다. 서희와 함께 하는 길상 역시 집안일을 돌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상이 본문에서 펼쳐진다. <토지 5> 중 일부를 읽은 이번 주 독서에서는 길상이 세수하면서 우연히 보게 된 거미와 날벌레의 싸움 장면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필사적으로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거미와 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날벌레. 먹지 않으면 죽고 반대로 먹히면 죽는 치열한 삶(生)의 현장을 길상은 그야말로 하늘(天)이 되어 지켜본다. 이 순간, 이 자리에서만큼은 길상이 하느님 또는 '신의 대리인'에 다름아니다.  


 중국 문자 가운데 이른바 하늘(天)에는 다섯 의미가 있다. 첫째, 물질지천(物質之天) 즉 땅과 상대적인 하늘이다. 둘째, 주재지천(主宰之天) 즉 소위 황천상제(皇天上帝)로서 인격적인 하늘이다. 셋째, 운명지천(運命之天) 즉 우리 삶 가운데 어찌 할 도리가 없는 대상을 지칭한 것이다. 넷째, 자연지천(自然之天) 즉 자연의 운행을 지칭한 것이다. 다섯째, 의리지천(義理之天) 즉 우주의 최고 원리를 지칭한다. _ 풍우란, <중국철학사(상)> , p61


 펑유란(馮友蘭, 1894 ~ 1990)의 <중국철학사 中國哲學史>에 나오는 천(天)의 의미는 소설의 인물들 각자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거미의 생사를 좌우한 길상은 주재지천의 하늘을, 거미에게 다가운 갑작스러운 죽음의 손길은 운명지천의 하늘일 것이며, 거미와 운명의 싸움을 한 날벌레는 자연지천의 하늘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의리지천을 느꼈을까... 


 신변에 위기를 느꼈음에도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거미는 그만큼 기아선상에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굶주린 것에게서 먹이를 빼앗고 죽이기까지 했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처사였더란 말인가. 비를 바라보면서 길상은 생각한다. 이런 경우 자신의 손길이 벌레에게 있어서 하느님이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심판은 과연 옳았던가? 인간의 경우에도. _ 박경리, <토지 5> , p336/670


 이러한 상황에서 길상은 자신의 행동이 과연 올바른 행동이었는지를 돌아본다. 문단의 마지막 문장처럼 이번 페이퍼에서는 길상의 생각을 인간의 경우에 적용시켜 보려 한다. 날벌레를 구하려는 길상의 행동이 '측은지심 惻隱之心' 이라는 인간 본성 - 사단(四端) - 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이러한 판단이 거미에게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대상일 수 있을 것인가. 인류의 보편적 원칙이라는 황금률(黃金律, Golden Rule).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의 원칙이 되어야 하겠지만, 이러한 법칙을 보편적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거미는 인간이 아니므로 적용대상이 아닐수도 있겠지만, 길상의 생각 속에서 벌레는 의인화가 되어 있기에 적용시켜 본다.) 물론,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와 같이 형이상학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답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순수한 이론적 원칙들을 [자명한 것으로] 의식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순수한 실천 법칙들을 의식할 수 있다."(KpV, A53=V30) 선의 이념을 가진 이성적 존재자는 선험적으로 도덕법칙을 의식하며, 이런 도덕법칙들의 최고 원칙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KpV, 7 : A54=V30)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GMS:4, 421) _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p370


 



이러한 보편적 법칙의 현실 적용과 관련하여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 ~ 1881)의 <죄와 벌>을 떠올리게 된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알료나 이바노브나(전당포 여주인) 살해는 다분히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에 근거한다. 한 사람의 살해가 더 큰 효용(效用,Utility)을 가져온다면, 그 살해를 긍정할 수 있다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이론과 주장은 스스로를 '주재지천'의 하늘에 앉힌다. 얼핏 논리적으로 보여지는 그의 이론이지만, 그의 이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 수 없다면 우리 모두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에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 생명에 대한 근원적 존중 때문일까. 각자 나름의 논리가 있지만, 서로 부딪치는 논리에서 우리는 우리가 갖는 '정의(正義)'라는 개념이 흔들림을 느낀다. 이처럼 흔들리는 가치관 속에서 보편적인 행동원칙을 찾아 행동하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한 사람의 생명 덕분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고,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인데, 이건 간단한 계산 아닌가! 그 허약하고 어리석고 사악한 노파의 삶이 사회 전체의 무게에 비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그 노파의 삶은 바퀴벌레와 이(蝨)의 삶보다 더 나을 것이 없고, 어떠면 그보다 더 못하다고도 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_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상)>, p161/680


 그래, 바로 맞아! 그게 인간의 법칙이야...... 법칙, 소냐! 바로 그래......! 그리고 난 알아, 소냐. 머리와 정신이 견고하고 강한 사람이라야만 사람들의 주권자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야! 더 많이 용기를 내어 일을 감행하는 사람만이 사람들 눈에는 옳아 보이는 것야. 보다 많은 것을 무시하는 자만이 그들의 입법자가 되고, 더 많은 일을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이 그 누구보다도 옳은 사람이 되는 거야!  _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하>, p351/838

 

다른 한 편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살해는 역설적으로 탐욕의 화신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정화(淨化)시키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지라르(Rene Girard, 1923 ~ 2015)의 <폭력과 성스러움 La Violence et le Sacre> 에 표현되듯 '살해'라는 폭력을 통해 '탐욕의 화신'이 '불쌍한 전당포 여주인'으로 전환되는 신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해서는 리뷰에서 자세히 다루는 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알료나 역시 자신은 성실하게 삶을 살았을 뿐이라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정도만 짚도록 하자.


 수많은 제의 속에서 희생은, 때로는 아주 무시하지 않는 한 느껴지기 마련인 <아주 성스러운 것>으로, 때로는 그 반대로 아주 심한 위험에 처하지 않고서는 저지를 수 없는 일종의 <죄악>으로, 이처럼 상반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희생물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다. 왜냐하면 그 희생물이 성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희생물은 죽임을 장하지 않으면 성스럽게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양가성 ambivalence>이라는 이름을 받을 만한 순환논리가 들어 있다. _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 p10 


 라스꼴리니코프의 정의(正義)와 알료나의 성실함/생활력이라는 가치가 충돌하는 <죄와 벌>이라는 한정된 사회에서 우리는 어느 가치에 더 우선권을 주어야 할 것인가. 이보다 훨씬 더 다양한 가치와 이해당사자가 충돌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접점을 찾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논리를 알기쉽게 설명한 고병권의 <다시 자본을 읽자>를 통해 살펴보자. 


 '옳음 대 옳음' , '권리 대 권리'의 충돌이라는 겁니다. 둘 다 '노모스'(nomos)를 갖추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이율배반'(Antinomie)이 생겨납니다. 대립하는 주장인데 둘 다 옳으니까요. 이런 모순에서는 논리, 즉 로고스가 더는 기능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여기에는 '힘'이 재판관으로 들어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_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 p210/284


 고병권이 해설한 <자본론 Das Kapital>의 논리 중 하나는 이율배반의 상황에서 둘 다 옳다고 했을 때 힘의 논리가 들어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리바이어던, 사회계약이 출현했다고 보면 되겠다. 더 나가면 원래 출발점인 <토지 5>에서 가출해서 이번 페이퍼에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테니 이만 멈추는 것으로 하되, <자본>을 관통하는 '착취'의 개념이 '모순'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까지만 담도록 하자. '필요노동'이라는 공통된 개념에 대해 '이윤율'과  '잉여가치율'이라는 상반된 해석에서 오는 차이. 이것이 <자본> 전체를 관통하는 '착취'의 시작이며,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의 일부로,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씨앗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내가 '모순'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역설'입니다. 앞서 이율배반, 즉 '대립하는 두 개의 주장이 모두 옳은' 상황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주장이 상반된 옳음을 동시에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역설(paradox)' 입니다. 하나의 견해(doxa)에서 반대 방향 내지 다른 방향(para-)이 생겨나는 것이죠. _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 p212/284


 '필요노동' 부분이 자본가에게 '필요한' 이유는 자본주의라는 독특한 사회형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본이 가능하려면 노동자의 존속이 '필요'합니다. 노동력이 재생산되지 않으면 잉여가치는 불가능하니까요. 따라서 자본이 가능하기 위한 토대로서 그것은 필수죠... 노동자에게 '필요'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노동자의 하루 노동시간, 즉 노동일 전체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이때 필요노동에 해당하는 부분은 역사적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인간에게 언제나 '필요한' 부분입니다. _ 고병권, <생명을 짜 넣는 노동> , p224/309


 <토지 5> 안에서 무심코 거미를 죽이고 고민에 빠진 길상의 옆에 앉아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와 함께, 이러한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들을 가진 이들이 각자의 종교를 가지고 기도를 올릴 때 이를 들어야 하는 하느님의 입장은 참 대략 난감할 듯하다. 이를 잘 표현한 영화 <브루스 올 마이티  Bruce Almighty>를 떠올리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9-04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04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9-04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토지의 한구절에서 몇 권의 책을 떠올리시며 페이퍼를 쓰신 건지! 그저 감탄에 입만 쩍 벌어지네요!! 저도 신의 입장이라면 곤란할 때가 많겠다 싶어요~ 신기하게 저도 토지 읽으면서는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을 많이 했는데 길상이 옆에 앉아 생각하셨다니 다 느낌이 비슷한가 싶네요!^^

겨울호랑이 2021-09-04 23:04   좋아요 1 | URL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거리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 내게 의미 있는 이는 얼마나 되는지.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런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는 구절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한 구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장편인 <토지>를 읽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는데, 아무래도 많은 구절이 지나가서일까요. 더 다양한 관점을 찾게 되는 것 같아 좋네요. 붕붕툐툐님 말씀을 들으니 보편적 이성보다는 보편적 감성이 더 쉽게 공감되는 것 같아요. 붕붕툐툐님 평안한 밤 되세요! ^^:)
 

 

 아들을 하나 이상 낳아만 준다면 김훈장은 날로 퇴락해가는 집만 남아 있는 김진사댁의 대도 이어줄 생각이었다. 생각이라기보다 간절한 희망이었다. 마음을 놓아서였던지 며느리를 본 후 김훈장은 며칠을 앓았고 앓고 난 뒤 그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더욱더 희어졌다. _ 박경리, <토지 4> , p21/672


  <토지 4>의 처음은 러일전쟁(日露戰爭, Russo-Japanese War 1904 ~ 1905)이라는 상황을 바라보는 김훈장과 조준구의 입장 차이를 보여준다. 유학(儒學)을 따르며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위해 노력하는 김훈장과 어른 없는 최참판댁 자산을 노리는데 여념이 없는 조준구. 이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당대 지배층들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이들 중 김훈장을 살펴보자. <토지인물사전>에 '봉건제적 질서에 충실한 보수주의자'로 설명된 김훈장. 가문의 후사를 이어야한다는 그의 강박관념은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신유학(新儒學) - 성리학(性理學)'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해,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1935 ~ ) 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에서 '신유학' 이데올로기는 한국 사회가 부계 중심 사회로 개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지적한다. 장자(長子) 중심의 승계는 얼핏 유럽 중세의 봉건제도와 연계점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유럽에서는 차남(次男) 이하 다른 자녀들은 성직자, 기사 등 다른 직업으로 진출한 데 반해 조선 시대의 엘리트 층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같은 듯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資本主義'와 관련한 다른 페이퍼에서 다루도록 하고 일단 넘기자.  


 장자는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아버지와 아버지 쪽 조상과 연결되었다. 다시 말해서 장자만이 선조들의 유일한 후사로서 후손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권리와 의무를 받는 '정체 正體'를 가졌던 것이다. 장자는 형제자매 집단을 대표하면서 세대를 잇는 이상적인 고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장자가 법적, 의례적, 경제적으로 우위에 놓이도록 만들었다. 이 같은 장자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난 것은 17세기이다. 이것은 이상사회에 대한 주자의 개념을 기초로 한 부계친 사고의 절정을 나타낸 것이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의 유교화 과정> , p241


 <토지 4>에서 김훈장은 가문을 잇는다는 가문의 책무를 완수한 후 자신의 시선을 비로소 나라로 돌린다. 이러한 그의 행동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안에서 김훈장은 어느정도 가문의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 그는 지배 엘리트 층으로서 문제를 자각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그의 모습이 오롯이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붉은 마음(丹心) 때문일까. 김훈장의 처지를 생각하면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라나 한 집안이 망하고 흥하는 것은 천운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인화가 없고 신의가 없고 예절을 잃으면 그것으로써 마지막이야. 지금 나라 꼴이 어떠한가? 동가숙서가식하는 천기보다 못한 지조 잃은 인사들이 황공하게도 임금을 볼모로 삼아서 오늘은 아라사요 내일은 왜국이요, 해서 자신의 영달에만 급급하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느냐.(p22)... 가통을 이어야 한다는 골수에 박힌 사상은 이 나라의 꽃이요 정기요 하며 의병의 항쟁을 흐느끼듯 칭송해 마지않던 감정을 누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p25)... 가통을 잇는다는 집념과 정열의 성취를 본 지금, 이제 그 정열과 집념은 갈 곳이 없게 되었다. 아니 갈 곳이 없다기보다 차디찬 재로 변해버린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31/672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다른 책  <조상의 눈 아래에서 Under the Ancestors' Eyes: Kinship, Status, and Locality in Premodern Korea>에서 향촌의 양반인 향반(鄕班)이 지방에서 영향력 유지를 위해 종법(種法)에 기초한 네트워크가 구성되었음을 말한다. 중앙의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사회권력으로서 향약(鄕約)에 근거한 김훈장의 힘은 바로 지방민들의 지지와 존경으로부터 나왔기에 '평사리의 존경받는 어른'으로 남기 위해서 그는 움직여야만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고유의 친족 이데올로기는 신분의 위계와 신분의 배타성을 찬미하면서 운명의 붉은 실처럼 신라 초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를 관통했다.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보다 우선시함으로써, 이 이데올로기는 출생과 출계를 기반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엘리트를 창출했고, 엘리트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엄청난 내구력을 부여했다.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727

 

  한편으로는 중앙으로부터 갈수록 소외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능하지만 결코 간섭을 멈추지 않는 국가의 압력에 시달리면서 엘리트 신분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향촌의 양반(향반 鄕班)'은 점차 '지역주의 전략'에 기대어 본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 향촌 지배권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구사한 가장 효과적인 장기 전략은 종족제도의 체계화와 강화였고, 이 제도는 17세기에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473


  <토지>저자 박경리(朴景利, 1926 ~ 2008)는 당대 서민들의 생각이 동학(東學) 사상에 잘 드러난다고 본다. 동학농민혁명에 드러난 민의(民意)는 동학교도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이러한 작가의 생각은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로부터 대표성을, 표영삼(1925 ~ 2008)의 <동학>에 나타난 일본상려관에게 보낸 글을 통해 도덕성과 반외세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전자는 무위하고 후자는 종양(腫瘍)으로써 왕실 붕괴, 국가 파탄의 촉진제가 될 것이지만 수구 사상에서는 정예한 근위병(近衛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 두 줄기를 타고 뻗어난 들판, 그 들판을 메운 서민들은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이들은 모두 수구파다. 수만 동학이 개혁을 부르짖고 일어섰으나 시초부터 그들은 인륜 도덕을 강렬하게 내포한 집단이었으며 그들의 기치는 위국진충(爲國盡忠)이며 소파왜양(掃破倭洋)이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75/522


 일본 상려관은 펴보아라... 천도란 지극히 공평하여 다만 착한 사람은 음덕이 있게 하고 악한 사람은 벌이 있게 했다. 너희들은 비록 변경에 살고 있으나 받은 성품은 하나의 이치임을 또한 알지 못하는가... 아직도 욕심 많은 마음으로 다른 나라에 자리잡고 앉아 공격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으며 살육을 근본으로 삼으니 진실로 어떤 마음이며 필경 어찌 하자는 것인가... 우리 스승님의 덕은 넓고도 가없어 너희들에게도 구제의 길을 베풀 수 있으니 너희들은 내 말을 듣을 것인가 안 들을 것인가. 우리를 해칠 것인가 아니 해칠 것인가... 스승님은 이미 훈계하였으니 평안하고 위태로움은 너희들이 자취하는 것인 바 죽도록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우리는 다시 말하지 않으리니 서둘러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 계사 3월 초2일 자시 조선국 삼사원우초 _ 표영삼, <동학 2>, p276 


 인내천(人乃天)에 기반한 반외세(反外勢)를 주창한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삼대조(三代祖)가 미관밀직에 있었으며, 등과를 못한 향반으로 살아가야 했던 김훈장은 마을에 연고가 없는 경화사족(京華士族)인 조준구와는 달리 앞장서 움직여야할 이유가 있었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과 함께 자신의 지지 기반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이러한 이유가 김훈장을 의병장으로 떠밀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 1598) 당시의 양반 출산 의병장들의 동기도 이같은 요인이 부분적으로는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어느 덧 김훈장은 마을 사람들 이야기 속에서 의병장으로 등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차츰 전설적인 인물로 변모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 자신의 자존심의 소이였다. 왕시, 김훈장을 두고 화심리에 사는 장암 선생 수제자로서 학식이 깊다고 믿었으며 자랑으로 생각했던 그 심리와 흡사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마을 사람의 공통 심리였다. 꼭히 믿는 것도 아니면서 즐거움을 위해 믿어보는 것이다. 희망이 적은 그들의 감정적 사치였을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245/522


  작가는 작품 안에서 지배층의 두 움직임 수구(守舊)와 개화(開化) 모두를 비판한다. 김훈장으로 대표되는 전자의 움직임은 물론, 조선 후기의 변혁 움직임 역시 제대로 된 방향성을 찾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무너지고 말았음을 작가의 목소리로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작품 안에서 작가의 목소리는 한 인물을 지적한다. 반계 유형원.


 중국의 정신문화, 그 속에서도 유교를, 유교 중에서도 철학과 인륜 도덕의 정주학(程朱學)을 숭상하였던 이조 오백 년 동안 그 이지적이며 귀족적인 사상을 골육으로 한 절도 높은 선비들과 왕실에 밀착된 명문 거족들은 기존의 정신적 가치를 옹호하며 또는 외향적 기득권을 주장하며 지금도 수구(守舊)를 고집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참으로 부수기 어려운 거대하고 준엄한 조선의 산맥 그 자체는 아니었는지. _ 박경리, <토지 4> , p73/522


 하기는 햇볕 안 드는 뒷방에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을 시조로 하는 경세학파(經世學派)의 불우한 사류(士類)들과 현실적인 중인 계급의 일부가 있어 진실한 개화에의 꿈을 기르고 있었으나 이네들은 일본을 업고 재주를 부리는 정치적 무대도 능력도 없었으며 민주주의라는 낯선 장단에 춤을 추며 백성들을 모아보는 주변도 없었고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후 수구파들이 열어놓은 혈로(血路) 아라사에게도 줄이 닿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이네들은 조선의 토종이었던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4> , p76/522


 작품 안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은 유형원(柳馨遠, 1622 ~ 1673)이다. 조선 후기 반계의 경세사상(經世思想)이 갖는 한계점을 작가는 지나가듯  말했지만, 제임스 버나드 팔레 (James Bernard Palais, 1934 ~ 2006)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 유형원과 조선 후기 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 Yu Hyongwon and the Late Choson Dynasty>에 의하면 그 영향력은 스치듯 지나갈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중국(中國)을 중심으로 한 중화(中華)사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청일전쟁 후 방향성을 잃었지만, 도덕성에 근거한 윤리사상은 조선 후기 변화되는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진지하게 모색했다는 점을 말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토지>에 드러난 박경리 작가의 비판은 다소 매섭게도 느껴진다.

 

 유교적 경세사상은 정책에 직접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정부의 도덕성을 강조한 그 논리는 국가가 인간의 약점, 부패, 부도덕으로 악화되었을 때도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유교의 기준에 따른 도덕적 질서를 창출하려는 궁극적인 목표는 유지됐다. 농업의 우위와 상업 및 이익 동기의 비도덕적 결과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중요하게 간주됐지만, 유교적 관원과 학자들은 경제적 활동의 어떤 이점을 인식했다.... 경세사상의 중심은 중국 고전에 서술된 중국 고대의 제도에 머물러 있었는데, 현실적 경세론의 실천에서 주요한 지혜의 원천은 중국의 역사와 제도를 서술한 방대한 방대한 문헌이었으며 조선의 안전을 유지한 주요한 버팀목은 1894년 청일전쟁까지 청이 제공한 보호였다. _ 제임스 B. 팔레,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 유형원과 조선후기 2> , p589


 이와 함께 <토지 4>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배경은 러일전쟁이다. 청일전쟁 후 대만과 요동반도를 점령하려던 일본의 계획이 삼국간섭(三國干涉 Tripartite Intervention)이 무산되면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대화 속에서 설명된다. 1885년 영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거한 거문도 사건(巨文島事件)에서 드러나듯, 극동지역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영국-일본 동맹은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일부였으며, 삼국간섭이 전쟁의 한 동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당시 일본이 러시아보다 한 수 아래의 전력으로 여겨졌던 만큼 전쟁 이전 여러 타협안이 오고 갔음을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 ~ )의 <러일전쟁 : 기원과 개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내어주기로 한 청나라 얼빠진 위정자들은 차치하고 늑대같이 한반도도 먹고 싶고 만주 땅도 먹고 싶고, 그도 유유자적하게 노리고 있던 아라사가 어찌 되었겠소? 그러니까 아라사는 기고만장했던 일본에게 찬물을 끼얹었던 게요. 당사자인 청나라도 아닌 아라사가 독일과 불란서라는 나라에 충동이질하여 협박을 했단 말씀이오. 아무리 일본이 전승국이라고는 하나 대국 아라사와 불란서 독일의 삼국을 상대하여 이길 재간이 있었겠소? 문명이 앞서고 신식 무기로 무장한 그네들을 말이오. 게다가 영국하고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부지리나 얻을까 싶어 관망하는 상태였으니 일본으로서는 눈물을 머금고 요동반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때부터 일본은 아라사에 대해서 보복의 칼을 갈았던 게지요. _ 박경리, <토지 4> , p60/672


 일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라사는 숙적이요 영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 각처에 저희들 식민지가 있는 만큼 아라사가 한반도로 만주로 하여 바다 쪽으로 진출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미련한 곰 같은 아라사가 그런다고 밀려나겠소? 한술 더 떴지요. 그러니까 지난 오월 우리 땅 용암포(龍岩浦)를 점거하는 사태까지 몰고 왔으니 일본이 콩 튀듯 할 수 밖에요. 이러니 일본과 아라사는 전쟁으로 판가름을 할 수." _ 박경리, <토지 4> , p66/672


 러시아의 만주 지배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상호 인정하자는 타협안이 대한제국의 중립화 정책과 부딪히면서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 직전의 치열한 외교전의 상황 속에서 개항 이후 여러 외교 문서에 등장했던 '조선은 자주국'이라는 조항이 얼마나 무의미한 조항이었는가를 우리는 <러일전쟁>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또한, '청일전쟁', '러일전쟁' 두 전쟁 직전에 맺은 조선과의 협약을 통해 조선의 물자, 식량 등을 마음껏 징발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그네들의 모습 속에서 '근대화 近代化'라는 껍질가 실상은 과거 무사도(武士道)가 군국주의(軍國主義)로 변신한 '제국주의 帝國主義'에 다름 아님을 실감한다.


 

 청일전쟁은 열강을 자극했다. 야심가인 신 외무장관 무라비요프도 황제의 뜻을 존중해, 러시아 해군이 원하지도 않는 부동항 뤼순, 다롄의 획득이라는 모험을 적극 시도했다.(p1195)... 일본은 러시아의 랴오둥(遼東)반도 조차(租借)에 대해서도 당초에는 신중한 태도였다... 그러나 일본도 러시아의 만주 전면점령에 이르러서는 일본에게 조선을 전면적으로 양도하라는 만한교환론을 정면으로 제기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만주를 장악한다면 한국은 일본의 것이라고 명확하게 주장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한국 황제는 한국이 중립국이 되기를 희망하는 노선을 처음으로 내세우며, 일본 정부에 교섭하자고 요청했다. 1901년 1월 일본정부의 가토 외상은 주청 공사 고무라의 의견을 듣고,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무라의 의견은 이미 단순한 만한교환론이 아니었고, 한국의 확보가 러시아의 만주 지배를 견제하는 거점이 될 것이라며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을 둘러싼 러일의 주장은 완전히 어긋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러일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_ 와다 하루키, <러일전쟁 2>, p1196 


 <토지 3>에서는 초반부의 주요 인물들이 한번에 퇴장하면서 작품의 전개가 빨라졌다면, 이번 주부터 들어간 <토지 4>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으로 급격하게 국운(國運)이 기운다. 급류처럼 빨라진 쇠망의 역사 속에서 이와 함께 읽을 좋은 책들이 많지만, '독서 챌린지 페이퍼'라는 글의 성격 상 짧게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페이퍼에서 잠시 언급한 <한국의 유교화 과정>, <조상의 눈 아래에서>,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러일전쟁>은 별도의 리뷰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번 주 <토지 4>는 개인적으로 유교 사상에 투철한 김훈장을 통해 조선 후기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와 충효(忠孝), 반계 유형원을 통해 후기 개화 사상의 한계와 러일 전쟁의 배경 등을 정리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조준구를 통해 친일(親日)이라는 부분도 다뤄볼 수 있겠지만, 이는 후반부의 인물인 배설자와 함께 종합적으로 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져 다음으로 넘긴다.  어쨌든 독서 챌린지의 끝은 지금 당장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으니까...


 Ps. 개인적으로 <토지>  후반부의 인물인 친일파 배설자의 모습에서 실존인물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 ~ 1909)의 양녀 배정자(裵貞子, 1870 ~ 1952) 그림자가 어른거림을 느낀다. 이름의 유사성, 친일 행적 등이 이러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듯한데, 배정자와 다른 배설자의 비참한 최후에서 친일파에 대한 작가의 감정을 읽는다면 지나친 것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텔게우스 2021-08-21 14: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두 책에서 언급된 도이힐러의 주장에 다소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에서 그의 주장은 장자 중심 상속과 부계 사회 구현이 성리학 이념 안에 본래 포함되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저는 언급된 <조상의 눈 아래에서> 인용문과 같이, 당시 조선 사회가 직면한 현실적 조건 하에서, 기득권층이 권력 유지를 목적으로 신분 질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에서 그러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1-08-22 08:16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저 역시 베텔게우스님 말씀처럼 도이힐러의 논조에 다소간 차이를 느꼈습니다. 조금은 다르긴 합니다만... 저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에서는 여말선초에 새로운 정치이념인 성리학 도입이 부계 중심의 구조로 개편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는 반면, <조상의 눈 아래에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관계와의 역사적 대립에서 결국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저자의 결론에서 논조의 차이를 느꼈습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차이는 전자가 여말선초, 후자는 신라~조선을 분석 대상으로 하는 ‘단기‘와 ‘장기‘라는 분석 시점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베텔게우스님께서 말씀하신 부분과 관련해서는 두 측면에서 생각해봐야 할 듯 합니다. ‘이기론(理氣論)‘에 따라 중국을 모든 사물의 근원인 ‘이‘로 보고 전통문화의 측면이 강한 조선을 ‘기‘로 해석하여 부계 전통에 강한 중국을 단순히 따라가려 했는지, 아니면 이러한 목적이 아닌 기존 ‘불교‘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위한 ‘성리학‘ 도입에서 오는 여파 때문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직 제가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지 못해 더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베텔게우스님 덕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용아, 나는 죽어도 무당은 안 될 기다. 용이가 다른 각시 얻어서 살아도 나는 무당 안 될 기다.'  계집애는 해죽이 웃었다. 아니 고달프게 웃었다. 신이 오르면 넉살 좋게 목을 뽑고 초혼가에 자지러지며, 천대에 대항하여 사내같이 굵게 놀던 월선네하고는 달리 말이 없고 또 말재주라고는 없던 월선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그러서는 힘껏 제 마음을 표시한 셈이다.(p494)... 물방앗간 옆에 쌓아올려 놓은 보릿대에 기대서서 월선이는 남의 얘기처럼 말했다. '아무 데 가믄 우떻노.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어매는 한탄하지마는.' 남의 말같이 하는데 월선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용이하고 살 수 없다면 애꾸눈이건 절름발이건 월선에게는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누구를 따라가든지 그는 제 집 없는 뜨내기의 신세인 것이다._박경리, <토지 1>, p496/530


 이번 주 <토지 1>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월선과 용이의 사랑 이야기다. 깊이 사랑하는 두 사람이지만, 상민과 천민의 신분 차이는 이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숨기고 각자 자신들의 가정을 꾸렸다. 스무 살 연상의 봇짐장수와 결혼한 월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하동으로 돌아왔지만, 용이의 본처인 강청댁의 핍박에 간도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떠난 월선을 찾던 용이의 기억에 담긴 지난 시간의 기억은 월선의 아픈 마음을 짐작케 한다.


 이후 월선은 간도에서 돌아오지만, 이번에는 용이의 아이를 가진 임이네의 등쌀에 힘든 나날들을 보내다 서희를 따라 떠나게 된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용이의 아들 홍이를 아들처럼 돌보다 결국 암(癌)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 월선. 의도치 않은 선행학습(?)으로 이들 사랑의 결말을 알아 버리고 나니 월선의 죽음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그리고 선(禪)문답 같은 이들의 대화에는 끊어질 듯 이어온 이들의 사랑이 짙게 배여 있다. 사랑의 붉은 실이 있다면, 용이와 월선의 손을 이어주지 않았을까. 홍연(紅緣). 




 마루에 올라선 용이는 털모자를 벗어던졌다. 솜을 두어 누덕누덕 기운 반두루마기도 벗어 던진다. 그러는 동안 말 한마디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올려다본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월선이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산판 일 끝내고 왔다." 용이는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야. 그럴 줄 알았습니다." "임자."...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용이 돌아와서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_박경리, <토지 8>, p292/504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 1914 ~ 1984)는 <죽음 앞의 인간 L'homme Devant la Mort>에서 '타인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아리에스는 자신의 죽음이 '두려움'이었다면, 다른 사람과의 이별은 육체적인 이별이었기에 사람들은 그 죽음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 안에서 죽음은 죄(악)과의 이별이었기에, 새로운 구원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타인의 죽음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용이와 월선의 헤어짐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아리에스가 말한 아름다움과는 결이 다르다. 용이와 월선은 그들의 고된 삶을 긍정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었다면, 아리에스의 '타인의 죽음'은 현실 부정을 통한 아름다움의 승화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차이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차이에서 오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차차 정리하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토지1> 속의 용이와 월선의 가슴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서 언젠가 다가올 아내와의 헤어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나에게 다가올 저 순간에 나는 과연 망설임없이 한(恨)없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기에 용이와 월선의 마지막이 더 아름다운 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죽음은 오히려, 그때까지 억압되어 있던 비장감(파토스)을 불러일으켰다. 예전에는 과도한 감정 표출(혹은 지나친 무관심)에 대응하기 위한 방패막이로써 간주되던 침실에서의 의례 혹은 애도의 의식들이 본연의 의례성을 상실하게 되고, 유족들의 고통이 자발적으로 표출되는 장으로 개조된다. 그런데 이들이 비통해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현실이 아니라, 고인과의 육체적인 이별이었다. 이제부터 죽음은 슬퍼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고인과의 육체적인 이별이었다. 이제부터 죽음은 슬퍼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순간으로서의 찬양의 대상이 된다. 죽음은 아름다움이었다._필립 아리에스, <죽음 앞의 인간>, p1102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1-07-17 1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은 끝까지 구구절절 마음 아리게 해용~ 겨울호랑이님의 독서챌린지를 격하게 응원합니당!!😊

겨울호랑이 2021-07-17 12:32   좋아요 2 | URL
둘의 이야기는 정말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인 것 같아요....ㅜㅜ 붕붕툐툐님 감사합니다. 무더운 날이지만 건강하게 보내세요!

samadhi(眞我) 2021-07-17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은 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겨울호랑이님이 발췌해 놓으니 시처럼 읽히네요.

겨울호랑이 2021-07-17 23:5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samadhi님. 작품 속에서 애잔하게 진행된 이들의 사랑은 독자들의 시간 속에서는 얼음 조각처럼 페이지 페이지를 장식하며 끊임없이 감정을 불러 오는 것 같습니다. ^^:)

samadhi(眞我) 2021-07-17 23:55   좋아요 1 | URL
다시 읽어보면 그 전엔 찾을 수 없었던 재미와 맛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21권을 생각하니 엄두가 안 나네요. 안 그래도 읽을 책 많은데 욕심 내지 않을랍니다. 겨울호랑이님이 올려주시는 것으로 대리만족 하렵니다.

겨울호랑이 2021-07-17 23:57   좋아요 1 | URL
^^:) 읽어야할 책이 많은데 시간은 정말 부족한 것 같아요. 좋은 작품도 선뜻 다시 읽기가 어렵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