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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도사는 길고도 긴 밤이 끝나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그것은 밤이기보다 깊이 모르게 파여 내려간 계곡 이쪽 저쪽에 매어 놓은 동아줄을 타고 가는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계곡 바닥에서는 용의 혓바닥 같은 지열이 솟아오르고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달려오고, 방금 보았던 광경이 긴 밤 저쪽에서, 긴 동아줄 저쪽에서 마치 서산 마루에 가라앉기 시작하는 불덩어리, 붉은 해같이 떠오른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함께 혼합된 것이었으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어우러짐, 그 광경은 혈흔같이 축소되기도 했고 시뻘건 탁류같이 확대되어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온통 붉은 빛, 미친 빛깔, 진홍의 제전 같은 것, 붉은 광무(狂舞)...... 밤은 가는데 어둠이 내려온다. 서서히 안개비가 내리듯이 어둠이, 정수리에서 발끝을 질러나가는 점막이, 모든 것이 정지된다. _ 박경리, <토지 20> , p562/608(4/29)


 <토지> 독서챌린지 40주차이자 마지막 페이퍼. 이번주 미션 주제는 '토지를 마무리하는 소감'이다. <토지 20>의 마지막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해방처럼 끝난다. '온화, 원망, 이끄시는 대로'의 꽃말을 갖는 해당화를 서희가 휘어잡으며 마무리되는 모습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친일과 독립투쟁의 지원이라는 양면을 모두 갖는 서희 자신이 짊어졌던 삶의 고뇌가 끊어지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까. 많은 인물들의 화해가 사람들간의 만남을 통해서 또는 관음상을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산에 숨어든 사람들 사이에 빚어진 갈등은 이어질 민족간의 대참상의 암시일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랐을까. 둑길에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중 한 사람이 앞서가며, "일본이 항복했소!" 하고 외쳤다(p584)...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이냐......" 속삭이듯 물었다.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_ 박경리, <토지 20> , p586/608


 그러나 인생이란 겨울 햇볕과도 같이, 쏟아지는 폭설과도 같이, 쩡! 하고 굉음을 지르며 스스로 몸을 가르는 빙하(氷河)와도 같이, 그리고 동천에 얼어붙은 달과도 같이, 물론 봄의 환희와 여름의 정열도 있지만, 어디 사람의 삶만이 그러했겠는가. 삼라만상, 억조창생 생명 있는 것은 그 모두가 시간[縱]과 자리[橫], 혹은 공간이라는 엄연한 십자가 밑에서 만나고 이별하며 환희와 비애를 밟고 지나가는 것이다. 욕망의 완성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불행인 동시 축복이다. 종말이 없는 염원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_ 박경리, <토지 20> , p342/608


  <토지>를 읽으며 계속 들었던 의문이 있었다. 월선의 죽음과 간도로부터 돌아오는 옛 평사리 사람들의 이야기로 끝나는 토지 2부와 진주로 돌아온 이후 이야기 사이의 간극이 크다는 점이었다. 2부 이전과 3부 이후에서 느껴지는 작품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평사리에서 간도로 이주해서 다시 진주로 돌아오는 2부에서는 공간적인 이동이 주된 흐름이라면, 3부 이후에서는 일제 하에서 시간적 흐름이 강조된다. 또한 2부에서는 공간적 이동 속에 개인 감정과 행동이 미시적으로 보여진다면, 3부 이후에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 개인의 존재는 작아지는대신 새로운 주체로서 민족,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일본 문화에 대한 비판 등의 하나의 축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2부와 3부 사이에 갈라진 '틈'을 발견한다. 결코 작지 않은 틈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을 수 있다면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그 무엇이 있을까?


 천수를 다하고 간 늙은이 죽음이 뭐 그리 애절할 리도 없고 가족을 제외하고, 영팔노인으로서는 동료들을 다 먼저 보낸 처지인 만큼 인연 맺은 사람도 드문 터에, 더더구나 애통해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심정은 착잡했다. 누구의 죽음이라서가 아니라 죽음 그 자체를, 땅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목숨의 명운을 너 나 할 것 없이 생각하며 말없이, 더러 떠드는 사람이 있어도 그 음성은 공허하게 텅 빈 것만 같은 산속에서 울리다간 사라진다. _ 박경리, <토지 20> , p408/608


 이에 대한 하나의 답(答)을 <토지> 독서챌린지 직전에 이뤄진 작품 해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해설 후 Q&A 시간에 김연숙 교수는 (여러 답이 있겠지만) 자신은 '인간(人間)'이라는 답을 주셨다. 토지에 등장하는 600여 명의 사람들이 각기 저마다의 생각과 행동으로 <토지>의 전반을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빛내고 있기에 <토지>를 관통하는 주제는 '인간'이라는 설명이었다. 개인적으로 더 고민해야 할 부분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이었다.


 이를 받아들여,  <토지>의 구도에서 시간을 '하늘(天)'로, 공간을 '땅(地)'으로 치환한다면, 그 사이 인간이 있는 구도가 될 것이다. 천/지/인이 만드는 작품 세계. 이것이 <토지>의 세계일까. 더 나아가 이로부터 건(乾)괘와 곤(坤)괴로 시작하는 <주역(周易)>을 떠올리게 된다. 세상 만물의 근원인 하늘과 땅의 힘들이 인간들에게 작용해서 펼쳐지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은 나머지 62괘에 대응하는 세상의 모습이 아닐런지.  그렇게 본다면, <토지>를 <역易>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반드시 이러한 관점과 맞는 것은 아니지만, <토지> 해설서 중 하나는 음(陰)과 양(陽)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법도 있음을 알려준다. 


 <역 易>은 건괘와 곤괘로부터 시작한다. 건괘와 곤괘 그리고 나머지 62괘. 총 64괘다... 건곤은 <역> 이라는 책으로 들어가는 문이면서 동시에 '변화'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다. 건곤은 변화를 일으키는 어떤 힘이다. 정이천은 건괘에서 건을 이렇게 정의한다. "건은 천天이다. 천은 하늘의 형체를 말하는 것이고, 건은 하늘의 성질이다. 건이란 강건함이니, 강건하여 쉼이 없는 것을 건이라고 한다."... 하늘이 기능하는 성질이 건乾이며 건建 이다. 그렇다면 땅이 기능하는 성질이 곤坤이고 순順이다. 그러므로 건곤이란 천지라는 우주가 작용하는 힘과 기능이다. 이 두 가지 힘이 천지만물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건곤은 전체 생명의 궁극적 근원으로서 모든 생명의 원천이란 뜻이다. 동시에 건곤은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사물과 현상에 적용될 수 있는 대립적인 개념쌍이기도 하다. _ 정이천, <주역 역전> , p18 범례


 <토지>의 경우, 외적 행동과 대비되는 말씀과 대화와 지적 담론의 역할에 대한 작가의 사고가 치밀하게 형상화에 작용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작품은 1부에서 가장 행동이 치열하고 2부에 이르면 그 정도가 완화되며 3부에서는 사건들이 분산된다는 느낌을 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1부와 2부의 사건 전개에서 말씀과 대화는 하나의 초점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흩어져 있다. 이에 비해 4부와 5부에서 말씀과 대화는 왕성하게 펼쳐지고 하나로 통일되며 행동의 측면은 약화된다. 행동과 말씀이 서로 간에 밀물과 썰물처럼 들고 나면서, 또는 태극의 음양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이 한쪽이 강화되면 다른 쪽이 약화되고 다른 쪽이 강화되면 반대쪽이 약화되면서 작품이 진행되는 것이다. _ 최유찬, <박경리의 <토지> 읽기> , p135


 겨우 1번 읽은 것으로 작품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때문에,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는 더 깊이 고민해야 할 부분응로 여겨진다. 여태까지 읽은 <토지>가 완독(完讀)에 치중했기에 큰 흐름에서 소외된 이들에 대한 부분, 작품 안에 담긴 여러 소주제에 대한 고민은 독서 챌린지를 마무리하는 지금 아쉽게 느껴진다. 이에 대해서는 틈틈히 보완하는 것으로 하고, 10개월에 걸친 독서 챌린지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 생생지위역 生生之謂易.


 역易에 최종적인 끝과 완성은 없다. "끝이 곧 새로운 시작이다 終則有始". 그래서 마지막 64번째 괘가 미제(未濟)다. '아직 강을 건너지 못했다' 혹은 '아직 다스리지 못했다'는 의미다. 기제가 곧 미제인 것이다. 완성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미완성이다. 끝일아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처음의 건곤으로 돌아가 새로운 창조와 실천으로 혁신해야 한다. 건곤은 모든 변화와 생성을 일으키는 시초다. 역에는 완성과 종말이 없다. 끊임없이 생성하고 다시 생성하는 역동적인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_ 정이천, <주역 역전> , p18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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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5-01 1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의 10개월에 이르는 긴 여정으로 토지를 읽으셨네요. 읽어 내시는것도 힘든데 거기에다 챌린지로 글도 쓰셔야하는 여정인데도 아주 입체적인 책읽기를 계속 하신 겨울호랑이님!
그동안 수고하셨고 좋은 글 많이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2-05-01 14:40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매주 과제에 강제로 끌려왔네요 .덕분에 겨우 읽었습니다만, 부족함이 많습니다... 다만, 부족함을 알게된 것을 소득이라 한다면 더 채우도록 과제를 부여받은 독서챌린지였다고 정리하게 됩니다. 참 갈길이 멉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2-05-01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근래 주역을 어설프게 어슴푸레 알게 되었는데요, 알수록 참 매력있는 사상인 것 같습니다. ㅎㅎ
서양 사상보다 훨 깊은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2-05-01 16:10   좋아요 1 | URL
저도 잘 알지 못하니 참 조심스럽습니다만, 철학이라는 부분에 한정해서 본다면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다만, 서양에 전래된 주역이 이진법과 같은 부분으로 서양과학에 영향을 미쳤고, 이러한 부분이 컴퓨터, 파동이론, 양자학까지 확장/연결된다고 본다면 (그래서, 서양철학+서양과학 vs 동양철학 구도로 본다면) 쉽게 가늠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2-05-01 17:40   좋아요 1 | URL
괘가 서양 이진법의 기원이군요. ^^
그런거 같습니다. 괘가 웬지 모르스 부호를 닮았습니다. ㅋ

겨울호랑이 2022-05-01 17:43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네요. 과거 문명교류의 흔적들이 여러 곳에서 남아 있는 듯 합니다.^^:)

mini74 2022-05-01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0주라니 대단하세요. 토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군요. 겨울호랑이님이 소개하신 인간이란 주제, 음양의 주역, 재미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더 호랑이님 *^^*

겨울호랑이 2022-05-01 17:2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미니님. 토지를 읽은 사람들만큼 해석의 길이 저마다 다를 것 같아요. 또, 같은 사람이 읽어도 읽을 때마다 분명 시선이 멈춰지는 부분이 다를 것 같네요. 그런 면에서 토지는 분명 여러 번 읽을 작품이라는 생각을 이번 독서 챌린지를 통해 배웠습니다.^^:)
 


 전세는 일본에 극악상태였다. 작년 7월에 괜찮다, 끄떡없다, 걱정 말라 하고 말해오던 사이판섬의 일본군은 전멸했고 유황도(硫黃島) 오키나와(沖繩)를 내어놓는 것은 시간문제로 박두해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도조 같은 미치광이 과대망상증환자가 물러선 것만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도 있겠다. 본토결전을 외치며 일본 국민 전원의 옥쇄 감행의 위험은 다소나마 엷어졌다 할 수도 있겠고 어딘가 구멍을 찾아내어 구명책을 강구할 가능성이 바늘귀 떨어진 것만큼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군부의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누비고 지나갈 것인가, 고이소나 요나이도 군인, 칼은 칼로써 망한다는 이치를 말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움일 뿐이며 식민지 조선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인 그들 국민 자체가 불운이며 불행이다. _ 박경리, <토지 20> , p263/510 (4/22)


 이번 주 <토지> 독서 챌린지 주제는 '내 마음대로 결말을 예상해본다면?'이다. 독서 챌린지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쉽지 않은 주제라 고민하지만, 나름 전체적인 틀을 잡고 인물 배치를 해보려한다. 태평양전쟁에서 사이판 함락이 1944년 7월이었고, 현재 시점은 1945년 8월 이전의 어느 날, 머지않아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기대와 불안감이 한껏 고조된 상황이다. 그리고, 곧 맞이할 해방에 서로 다른 처지에서 해방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모습을 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논의의 주제는 마침내 한반도로 옮겨갔다. 루스벨트는 비공개 석상에서, 조선의 신탁통치에 영국의 동참을 요구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요청하지 않으면 처칠이 몹시 분개할지 모른다고 대꾸했다. "영국은 틀림없이 불쾌해할 것이오." 스탈린은 이를 드러내고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 "처칠이 우릴 죽이려들지도 모르지요." 루스벨트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스탈린은 영국의 참여를 요청하는 데 동의한다면서 유쾌하게 말했다. _ 톰 홀랜드, <일본 제국 패망사> , p886/1261


 해방 직전의 전세는 일본에 현저하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일전쟁에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고, 동남아 전선에서는 남태평양 여러 곳에서 고립된 일본군들이 죽어가고 있었으며, 만주 지역의 관동군들은 다른 전선으로 이미 빠져 나간 상황이었다. B-29 등장 이후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본격화되면서 일본 경제는 급속하게 황폐화되었고, 이는 식민지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일본 패방으로 막을 내리는 <토지>의 마무리는 해방 이후의 혼란상과도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이후 민족 분단의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서 서희와 길상의 아들들인 최환국과 최윤국의 인생을 대비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여기에 양현까지 포함해서 이들을 각각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로 표현해 보면 어떨까.


 미술 선생을 한 최환국은 윤국의 학병 지원 이후 최씨 집안의 당주로서 민족주의자로서 지방에 자리를 잡지만, 최윤국은 군대에서 충칭 지역 전선에 투입된 후 중국군에 포로로 잡혀 마오저뚱 휘하 팔로군 부대에 배속되고, 해방 이후 조선의용군의 한 명으로 북측으로 돌아오고, 한국전쟁으로 남으로 내려오게 된다. 양현은 고향에서 병원 개업 후 공산주의자로 변한 윤국과 대립하는 환국의 모습에서 회의를 느끼고 미국으로 건너가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길상은 일본 패망 이후 석방되어 아들 환국과 함께 지내지만, 아들 환국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어 종교적, 예술적으로 갈등을 겪는다. 서희는 이런 가족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늙어간다.

 

 산으로 들어갔던 산 사람들과 이범호는 해방 이후 남조선노동당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남부군으로 지내며, 일본에서 살던 찬하 부부와 쇼지는 해방 이후 조용히 살 계획을 가지고 제주도로 들어가 4.3을 맞는다. 명희는 사학 재단을 설립해서 학교를 만들고, 명빈과 함께 운영하며 노후를 보낸다. 홍이와 인실은 모두 만주에서 해방을 맞지만, 국공 내전을 겪으며 홍이는 대만으로 이주하고 인실은 중국 본토에 남는다... 대략 이런 구도로 큰 이야기 틀을 잡고 이야기를 전개시키면 어떨까. 다만, 여기서 한 인물이 남는데 이에 대한 배치가 쉽지 않다. 김거복이다.


 그의 친일 행적을 생각하면, 남은 자산을 정리하고 히로시마로 넘어가 피폭 당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결론을 짓고 싶지만, 현실성이 떨어지는 듯하다. 현실적이라면, 아들을 목사로 만들고 개신교 계 신문사를 차린다는 이야기로 가야할까, 그리고, 등장인물 자녀 중 한 명을 사법고시를 패스시켜야 하는데 누구로 할지도 아직은 미정이다. 만약 작품을 이정도 선에서 마무리짓는다면, <토지> 6부를 시작하더라도 큰 무리없는 시작이 되지 않을까.


 독서 챌린지 주제라 두서 없이 뒷이야기를 만들어 보았으나, 이야기가 너무 산으로 가는 것 같다. 이미 있는 인물들을 역사적 흐름에 세워 놓는 것도 쉽지 않은데, 새로운 작품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이번 챌린지를 통해 실감한다. 부족한 상상력을 보완한 책들을 마지막에 실으며, 이번주 독서 챌린지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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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사는 데 뜻이 있는 거요. 부귀영화야말로 헛된 꿈이오."

 "실패한 사람의 자기 위안 아닌가요?" "나는 가끔 거지가 부러울 때가 있소. 그들은 자유인이니까." "정말 자유인일까요?" "아암, 자유인이지요. 그들에게는 집착할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한 끼 걱정만 하면 되니까."

 "그들은 가진 자보다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어요. 무형유형으로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유는 저당 잡히게 마련이니까, 내 얘기가 틀렸단 말인가요?"

 "그래도 모든 사람은 유형무형은 많은 것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간들은 미망(迷妄)에 빠져서 고통스러워하지." _ 박경리, <토지 19> , p197/634


  <토지> 독서챌린지 37주차. 이번 주 독서챌린지 주제는 ''내가 만약 소설 속 인물이었다면?" 이지만, 이에 앞서 이번 주에 읽은 책 내용을 먼저 정리해보자. <토지 19>에서는 윤국과 양현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찬하와 오가타가 아들 쇼지를 데리고 만주로 여행을 간다. 그 중에서 영광과 유인배와의 대화, 찬하와 오가타와의 대화 중에서 공통된 소재가 있는데 바로 '자유 自由'다. 이들이 말한 자유가 무엇일까? 나라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개인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 중에서도 경제적인 자유일까, 정치적인 자유일까 등등. 


 용무가 없는 여행이란 항상 그러한 것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탈출이다. 그러나 배를 탔을 때나 기차를 탔을 때는 그것이 탈출이기보다 유리(遊離)현상으로 나타난다. 탈출하는 대지를 잃기 때문에 개체에 응결되는 자각과 동시에 운명과의 수직선을 그리며 불확실한 의식의 세계는 확대된다. 그것은 죽음의 행로가 이러할지 모른다는 쓸쓸함이며, 자유의 개념이란 결국 개체에 대한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_ 박경리, <토지 19> , p290/634


 <토지>에서 언급된 자유가 '일체의 구속이 없음'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라면, 이들은 정말 '자유' 자체를 원했을까, 아니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원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거지는 가진 것이 없기에 오히려 구속받지 않을 수 있었던 반면, 찬하와 오가타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속박될 수 밖에 없다는 역설. <토지>에서 말하듯 자유란 절대적인 상태가 아닌 관계에 대한 인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 대해 에리히 프롬 또한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다.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은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에서  더 큰 자유가 오히려 사회에 대한 더 강한 결합으로 이끌기에 결과적으로 자신을 얽매이는 것으로 해석한다.  프롬의 결론에 따르면 마치 망망대해에서 갈증에 못 이겨 마신 바닷물이 더 큰 갈증을 불러오듯,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가 더 큰 강압으로 돌아오게 된다. 사회로부터의 분리불안이 사회의 간섭을 희망한다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 ~ 1873)의 <자유론 On Liberty>은 자유를 위한 사회의 간섭을 정당화한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이뤄지는 사회의 간섭과 강제는 아이러니 하지만,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이 '개인'이 되면 될수록, 자발적인 사랑과 생산적인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결합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자유와 개체적 자아의 본래 모습을 파괴하는 끈으로 세계와 자신을 묶어서 일종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_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 p25/226


 인간의 개체화 과정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방금 말한 의미에서 개성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지 못하면,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때까지 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던 기본적인 관계를 단절당하면, 이 불균형 때문에 자유는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자유는 의심과 동일해지고, 의미와 방향을 잃은 삶과 동일해진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이나 세계와의 관계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더라도 불안을 없애주겠다고 약속하면, 자유에서 벗어나 그 관계 속으로 도피하거나 복종으로 도피하려는 강력한 경향이 생겨난다. _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 p34/226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것은 자유를 포기한다는 말이다. 한번 이렇게 하고 나면 나중에 다시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그 결과 이는 자신을 팔아버리는 행위도 허용해주는 원리, 즉 자유의 목적을 자기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자유 상태에 있을 때 누리는 이점을 향유할 수 없다. 자유의 원칙이 자유롭지 않을 자유 free not to be free까지 허용하지는 않는다. 자유를 포기할 자유는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의 원칙은 우리가 자유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자유를 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의 자유는 함부로 누리지 못하도록 제한을 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원칙 안에서 각 개인은 행위자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_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 선집> <자유론> , p408/962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 1909~1997)의 설명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벌린의 설명에 따르면,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유는 '당위'가 된다. 자신의 자유뿐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 이러한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유의 기원을 찾기 위해 우리는 계몽시대의 '도구적 이성'까지 거슬러 가야 한다..


 이사야 벌린 Isaiah Berlin의 정의에 따르면, 소극적 자유란 '타인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각자가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이며, 이에 비해 적극적 자유란 '합리적으로 결정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의 상태나 능력'을 뜻한다. 그는 자유의 근본적인 의미는 타인들에 의한 사슬로부터, 감금으로부터, 노예 상태로부터의 자유에 있으며, 그 나머지는 이런 의미의 확장이거나 은유일 뿐이라고 본다.... 벌린이 적극적 자유를 문제 삼는 이유는, 그것이 함축하는 '이성에 따른 자기 지배 혹은 자기실현'의 의미가 자유를 이해하는데 혼란을 초래하고 나아가 자유를 억압하는 명분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성의 주체로서의 '자기'의 범주를 국가나 민족 공동체로 확장하게 되면, '자유롭기 위한 강제'의 역설이 '참된'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_ 문지영, <자유> , p116/252


 국가에 봉사하는 '관직'의 의무에 합당하게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 일컫고, 반면 그런 관직의 의무에서 벗어나 단지 '식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개진하는 것을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 일컫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성의 '사적' 사용은 도구적 이성을 가리킨다. 그런 경우 공동체의 구성원은 '단지 수동적 태도만 취하게 하는 기계적 장치'의 일부로 기능하며, 이성 사용의 보편타당성 여부를 따져서는 안 되고 국가의 명령과 관직의 의무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반면 이성의 '공적' 사용에서는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전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_임마누엘 칸트 외, <계몽이란 무엇인가> , 해제, p25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을  

'근대화(近代化)'라는 명목으로 국가 단위에서 이성(理性)을 강요했을 때 발생하는 도구적 이성의 문제. 이것은 근대화(Modernization)에서 비롯한 현대사회의 문제점이 아닐까. 현대사회의 불안과 소외, 이것을 <토지 19>에서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토지> 초반부에서 목매달아 죽은 여인의 원혼이 서린 나뭇가지가 병에 효험이 있더라는 전근대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지배했다면,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사회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현대사회의 문제로 대체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 서희로 대표되는 1세대 남짓의 시간 동안 발생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변화가 우리 사회의 필요가 아닌, 외부의 필요에 의해 강제된 것이기에 충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없었음도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며, 작품 속 인물들을 다시 들여다 보자. 내가 만약 소설 속 인물이었다면?


 이성의 광기는 오늘날의 이성을 특징짓는 명백한 기형성을 훨씬 능가한다. 이성은 인간을 통해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세계의 질병에 대해 반성해야만 자신의 합리성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한 자기 비판 속에서 이성은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진리의 원칙을 고수하고 그 밖의 어떠한 동기도 지향하지 않음으로써 동시에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된다. 자연 지배는 인간 지배로 전환되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성의 자연성은 지배하려는 경향 속에 내재되어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역설적으로 이성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따라서 이성은 화해의 도구가 되는 경우에만 동시에 도구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진보와 퇴보라는 방향의 변화는 철학이 어떻게 정의되어왔는지를 반영한다. _ 막스 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 비판> , p218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자유의 상실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선택권마저도 더 이상 시민으로서의 우리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보호 권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문제들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세 가지 불안 요인으로 종합된다. 첫 번째 두려움은 삶의 의미의 상실, 즉 도덕적 지평들의 실종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만연하는 도구적 이성 앞에서 소멸하는 삶의 목표들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자유/자결권의 상실에 관한 것이다. _ 찰스 테일러 , <불안한 현대사회> , p32/294


 <토지 19>의 시대적 배경은 1940년 초중반이다. 급격한 사회 변화와 함께 전쟁이라는 한계 상황. 이러한 이중고 앞에서 등장인물들은 각각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처해나간다. 남매로 자란 윤국과 양현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서희, 친구의 아들을 입양해 키우고 이 사실을 아들에게 알리지 않는 찬하. 이들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들에게 다른 좋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절박한 상황 속에서 가까운 이들과 헤어지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을 서희와 찬하의 모습에서 읽을 수 있기에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후 전개되는 <토지>의 내용을 알고 작품 밖에서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다. <토지 19> 안에서 이야기되는 '자유'라는 근대 이데올로기와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함께 생각하며, 작품 속 인물들의 선택을 이해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자유'와 관련해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AD 354~430)는 '자유의지'를 선(善)과 악(惡)을 판단할 수 있는 중간선으로 생각한다. 다만,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기에 절대선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이 따라야 하는 것이 '신의 길'임을 함께 말한다.  또한, 노자(老子, Laozi, BC571 ?~?)는 무위(無爲)를 통해 '도(道)'를 따를 것을 이야기한다. 이들 모두가 '분리'가 아닌 '따름'을 통해 더 좋은 결과를 지향한다면, '분리'를 통해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근대의 '자유'는 어쩌면 우리를 더 큰 강제로 이끄는 다른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으로부터의(from ) 자유(freedom)'가 아닌 어떤 상태로의 자연스러운 귀의를 통한 궁극적인 자유가 우리에게 더 큰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닐런지...


 48. 누구든지 넉넉한 정도 이상으로 바라면 물욕이다. 이러한 물욕은 곧 탐욕이고 탐욕은 곧 부정한 의지이다. 그러므로 부정한 의지야말로 모든 악의 원인이다. 만약 그것이 자연본성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자연본성을 보존해 줄 것이고 자연본성에 해로울 리 없으며, 따라서 부정할 까닭이 없다. 따라서 모든 악의 뿌리가 자연본성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고, 이 말로도 자연 사물들을 (나쁘다고) 공격하려는 사람들을 논박하기는 충분하다고 본다(p370)... 52. 그러니까 사람이 무지해서, 올바로 행할 것을 선택하는 자유의지를 갖추고 있지 못하거나, 육의 습관이 저항하기 때문에 죽음의 유산의 광폭한 위력이 어떤 면에서 천성적으로 뿌리를 내려 사람이 무엇을 해야 올바로 행함인 줄은 알고 그렇게 하기 원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할 능력이 없거나 한다. _아우구스티누스, <자유의지론> , p377


 도를 따름으로써 성인-군주는 이원성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뚜렷이 구분되는 측면들과 계기들은 서로를 해치려고 싸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상호 주고받음을 통해 협력한다. 이것은 유익한(그리고 리드미컬한) 효력의 교환으로 이어진다. 이 효력(德)은 군주에 의해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에서 펼쳐지고 공동체에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에 점점 커지는 "위신(德)"의 형태로 "그에게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조차도 그가 주었던 것을 얻는 것이다. 도와 그것의 효력인 덕은 가장 넓은 차원에서는 세상 전체에 "작용하고" 있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70/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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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쪽 어깨를 감싸쥐다가 임이는 발딱 일어섰다. 그리고 상근이 멱살을 잡았다. 뼈뿐인 손이 상근의 뺨을 갈겼다. 상의가 달려들었다. 상조도 달려들었다. 삼 대 일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상조는 임이 손등을 물었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격투였고 늙은 고모와 어린 조카들이 뒤엉킨 광경을 비극이라 해야 할지 희극이라 해야 할지, 어쩌면 가장 원시적인 것이었는지 모른다. 두 아이와 함께 보따리를 들고 들어온 호야네가 겨우 뜯어말렸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임이는 임이대로 두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임이는 말을 못하고 입술만 실룩거렸다. 그러더니 드디어 두 다리를 뻗고 통곡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음산한 겨울 해는 졌다.(P179)... 지갑을 꺼낸 상의는 돈을 다 털어냈다. "고모 이거 받아요." 어리둥절해하는 임이 손에 돈을 쥐여준 상의는. "고모 미안해." 하면서 눈물을 닦고 급히 달려나왔다. _ 박경리, <토지 17> , p206/572


  <토지> 독서챌린지 33주차. 이번 주에 읽은 <토지 17>에서는 홍이와 보연 부부는 보연이 사두었던 금(金)으로 인해 체포되어 끌려가는 고초를 겪게 되었다. 한순간 엄마와 아빠를 잃어버리게 된 아이들은 임이를 의심하고, 결국 임이와 조카들은 몸싸움을 벌인다. 큰 불행 앞에 생겨난 내분은 가족 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렇지만, 가족이기에 이러한 갈등이 물에 씻은 듯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아이들은  외삼촌 삼화가 나타나자 안심을 하고, 오랫만에 만난 외삼촌을 어떤 의심도 하지 않고 따라나선다. 오랜 친분보다 앞서는 혈연(血緣)을 <토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천일 부부는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에 서운함을 느끼지만, 진화심리학의 관점에 따르면 이와 같은 아이들의 선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들 얼굴에는 이미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생명이란 얼마나 신비스런 것이다. 삶에의 의지는 영악하고 핏줄을 당기는 힘은 불가사의하다. 천일이 부부가 혼신으로 아이들을 감싸왔지만 저토록 스스럼없지는 않았다. 신뢰하고 의지하면서도 아이들은 엄청난 사건을 겪은 뒤 두려워하며 자신들을 숨기려 하고 방어하려는 기색이 늘 있었다. 그랬는데 한두 번 본 외삼촌에게 모든 긴장을 풀며 기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솔직히 말해서 천일 부부는 다소 서운했다. _ 박경리, <토지 17> , p199/572


 데이비드 M. 버스(David M. Buss)의 <진화심리학 핸드북The Handbook of Evolutionary Psychology>에는 유기체들이 더 많은 유전자를 공유한다는 사실로부터 정서적으로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담겨있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 또한 평상시가 아닌 위기 상황(비용이 큰 상황)에서는 본능적으로 가까운 친척들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졸지에 부모를 잃게된 홍이 부부네 아이들의 선택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지만, 천일부부의 서운함에도 나름의 근거가 있다.


 생물종으로서 우리의 생활사에는 혈연선택이 강력한 힘으로 작용해왔다. 혈연선택은 미성년 양육, 값비싼 투자, 식량과 노동의 배분, 정치, 일상의 사회적 상호작용에서부터 유언과 유서를 통해 유산의 수혜자를 지정하는 최후의 이타적 행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거의 모든 사회 영역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가친척은 근연도에 따라 감정적 근접감을 느끼고, 다른 이의 안녕을 염려하며, 큰 비용을 감수해서라도 그들을 돕고자 한다. _ 데이비스 M. 버스, <진화심리학 핸드북1> , p847 


 현대의 환경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필요한 지원을 친구들에게 의존하면서 균형을 엄격히 유지하지만, 비용이 클 때는 친족의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때는 반드시 균형을 맞추거나 보답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많은 연구가 밝혀냈다. 사람들은 비용이 적고, 만성적이고, 쉽게 추적 가능한 이타주의에 대해서는 상호 이타주의를 활용하는 반면에, 비용/이익이 큰 이타주의의 경우에는 혈연선택을 활용한다고 결론지어도 무방할 것이다. _ 데이비스 M. 버스, <진화심리학 핸드북1> , p848


 주디스 리치 해리스(Judith Rich Harris, 1938~2018)는 <양육가설 The Nurture Assumption>에서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받는 영향보다 또래집단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또래집단을 단순한 친구들이 아닌 공적  영역으로 확장시켜 본다면 오랫동안 함께 봐온 천일부부도 아이들과 관계를 맺어온 집단의 소속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 부부의 서운함 또한 자연스러울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친척으로부터 느끼는 아이들의 안도감과 소속집단의 일원으로 천일부부가 느끼는 서운한 감정. 모두 독자로서 공감가는 부분이다. 


 양육가설은 아이들이 하얀 백지 같은 뇌를 갖고 태어나며 부모들은 그 백지를 멋진 그림으로 채울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부모로부터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의 대부분은 후천적으로 학습하는데, 몇 가지 진화론적 사실ㄷ르은 부모가 학습을 독점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_ 주디스 리치 해리스, <양육가설> , p299/1096


 집에서 획득한 지식과 기술, 의견이 또래집단이 선택 사항으로 간주하는 영역이 있다면, 즉 동질성이 강요되지 않고 개별성이 허용되는 영역에 있다면 아이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할 것이다... 공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집에서 배울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또래집단에서 배운다. _ 주디스 리치 해리스, <양육가설> , p763/1096


 친족 비유의 메세지는 간단하다. 사람들을 대할 때 피를 나눈 가족들처럼 친절하게 대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 밑에 깔린 전제를 이해한다. 친족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지만, 비친족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친족들은 비친족들보다 더 많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그래서 유전자가 유기체로 하여금 친족에게 유익한 행동을 만들면, 자기 사본에게 이익을 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 이득 때문에 친족을 돕는 유전자들은 세대가 거듭됨에 따라 개체군 내에서 증가하기 마련이다. _ 스틴븐 핑거,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p662


 이와 함께, 현대 진화심리학은 '혈연 이타주의는 아래로 흐른다'는 사실을 밝혀내며 '내리사랑'을 과학적으로 입증한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큰 것 또한 당연하겠지만, <토지>에서는 이와는 반대되는 무정한 부모의 모습 또한 함께 그려낸다. 인실의 아이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자신이 받은 지원을 적합도로 전환하는 수혜자의 능력은 이타주의 배분의 결정적 인자다. 현재와 미래의 필요성, 표현형의 질, 다른 친족의 투자 활용 능력, 번식 가치 등 많은 요인이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연령은 번식 가치를 드러내는 대략적인 지표로, 연구자가 연령을 고려할 때마다 지원은 연상의 개인으로부터 연하의 개인을 향해 흐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_ 데이비스 M. 버스, <진화심리학 핸드북1> , p849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오가타와 자신과의 핏줄을 버리면서 인실은 자기 자신을 땅속에 묻어버렸다. 깡그리 묻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두만강을 건너면서, 새로이 태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용정, 해란강 강가에서 중학교에 갓 들어간 밤송이 같은 소년들이 강물에 돌을 던지며 모래밭을 뒹굴며 목이 터져라 부르던 선구자의 노래였다. 인실을 오늘 존재하게 한 것은 항상 죽음과 맞선 시간 때문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7> , p228/572 


 오가타와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버리고 떠난 인실. 본능(本能)에 앞선 인실의 선택은 바로 민족(民族)이라는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어머니에게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본능에 앞선 결단을 내리게 만드는 관념 - 민족 - 을 과연 근대(近代)라는 시대의 이데올로기로 생각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 또한 유기체가 아닌 문화적 존재로서 또하나의 유전자 - 밈 Meme - 로 읽어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생명보다 중한 것, 그것은 단순히 여자의 순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찬하는 알았다. 인실에게 생명보다 더한 것이란 조국과 내 겨레를 배신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_ 박경리, <토지 17> , p260/572


 우리는 전근대 시대, 심지어 고대 세계에서도,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공유하지 않거나 그들의 도시국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을 보는 방식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누비아인과 아시아인들을 보는 방식에서, 서로 다른 '백성들' 사이에 그어진 메소포타미아와 성서에서의 구분에서, 민족정체성과 민족성이라는 '근대적' 개념과 아주 비슷한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민족들과 민족주의를 순전히 근대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이 정말 정당화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민족적 유대와 정서는 '역사의 질료이고 인류의 보편적 속성'이라는 오래된 견해로 되돌아가야만 하는가? _ 김원중, <민족주의와 역사> , p415/927


 근대적인 민족단위 및 정서들과 스미스가 '족류(공동체)'라고 이름 붙인 이전 시대의 집단적 문화단위 및 정서들 사이에 차이와 유사성이 존재함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분석의 필요성이 도출되고, 그와 같은 분석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들이 형식/정체성/ 신화/상징/커뮤니케이션 기호체계라고 주장한다. _ 김원중, <민족주의와 역사> , p416/927


 인실은 '민족'의 관점에서 아이 문제를 고민하고 결단했지만, 그 마음까지 정리하지는 못한다. 어머니로서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 이것은 인실이 봉인(封印)한 본능이다. 찬하가 자신의 아이를 키워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실의 마음은 격류에 둑이 무어지듯 허물어져 가고 비로소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현실은 정지된 시간이 아니다. 또 추상적인 것 현상적인 것에 비하여 물질이 가시적이며 확실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시 밖을 생각하면, 확실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눈앞에 있는 것은 하나의 점(點)에 불과해. 시간 역시 정체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현실의 시간들은 한순간에 불과한 거고, 한 점에다가 한순간을 붙잡아서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아도 그게 뭐겠어? 가시 밖을, 불확실한 것을 탐구하고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는 현실 속에서만이 창조는 가능해. 창조는 생명이야. 창조 없는 곳에선 파괴뿐이고 사람이 짐승으로 전락하지. _ 박경리, <토지 17> , p37/572


 정지된 시간 속에서 인실이 내린 결단은 흐르는 시간 속에 무너져 가고, 시간 속에서 인실의 굳은 마음도 풀려가면서 새롭게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니었을까. 인위적인 제도나 관념에 따른 선택이 아닌 물 흐르듯 본능에 맡긴 자신의 감정 속에서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는 인실. 이러한 인실의 모습을 읽으면서 생물의 본성(本性)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요. 자기 자식을 눈앞에 두고 친구의 자식이거니 생각하고 있는 오가타를 볼 때 나는 과연 인실 씨하고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지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내 이성이 마비된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죄악이다! 하고 생각하곤 하지요. 그간 세월이 많이 흐르지 않았습니까. _ 박경리, <토지 17> , p220/572


 그 순간 인실은 막연했던 것이 손에 꽉 잡히는 것을 느낀다. 고아원에도 가지 않았고 이름 모를 남의 손으로 건너가 생사조차 모르게 되지도 않았고 조찬하가 아이를 길러주었다는 사실, 그것이 얼마만 한 축복인가를, 인실의 눈에서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살아 있다는 것도. _ 박경리, <토지 17> , p261/572


 이와 함께 아이를 보지 않기로 한 오가타의 선택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의 선택 또한 본성에 반(反)하는 결정이다. 단순히, 부성(父性)이 모성(母性)보다 진하지 않다는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이것은 모성과는 다른 '부성의 발현'으로 읽힌다. 자신과 인실 사이의 아이를 다시 거둬야겠다는 마음과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내려진 오가타의 선택은 인실과는 또 다른 선택이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사랑을 뒤로 미루는 모습. 아이를 안 본다는 점에서는 인실과 같지만, 과정에서는 자신의 본성보다 아이의 양육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접었다는 점에서 오가타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준다. 이러한 오가타의 선택을 통해 단순히 인간을 생물/유기체로만 해석할 수 없음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어젯밤 꼬박이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앞날을. 그 아이를 만주까지 끌고 와서 홀아비인 내가 기르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정으론 그 아이와 헤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이제부터 삶을 진지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감정 내 인생이지...... 그 애는 다정한 부모와 누나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것을 파괴할 권리가 내게 있는가. 내일을 알 수 없는 떠돌이같은 아비를 따라서 겪어여 하는 새로운 세계, 물론 이와 같은 전시가 아니라면 나는 결코 그러진 않을 겁니다. 산카상이 원한다면 성장하기까지 그대로 두는 게 어떨까 싶어서."  _ 박경리, <토지 17> , p316/570


 포유류 번식의 생물학적 특징을 고려할 때, 전 세계에서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자녀에게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주고, 자녀와 더 적극적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번식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많은 아버지들이 직간접적으로 자녀에게 일정 수준 이상을 투자한다는 것이다.  _ 데이비스 M. 버스, <진화심리학 핸드북1> , p878

 

 이번주 독서 챌린지를 통해 홍이네 아이들과 천일 부부, 인실과 오가타의 아이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단순한 유기체, 또는 시스템 어느 일방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다는 정리를 하게 된다. 인간이 유기물들의 화학적 결합을 통해 만들어진 육체와 함께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는 마음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회문제를 바라볼 때 함께 고려해야 할 사항이 아닐까. 물리적 흐름에 역행하는 생명의 약동(Elan Vital)이 있다면, 이러한 '생명의 약동'에 저항하는 또다른 움직임 - 밈 Meme 등 - 이 인간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복합적임 힘으로 함께 작용하기에 이들을 한데 묶어 또다른 통일장(unified field)에서 하나의 이론이나 관점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유기체의 작용으로 해석하는 환원주의나 사회적 구조의 산물로 생각하는 사상 모두를 경계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글을 갈무리한다...


 "모든 특성은 유전적이다"는 약간은 과장되었지만 그리 크게 과장된 말은 아니다. 물론 가정이나 문화가 제공하는 내용에 의존하는 구체적인 행동 특성들, 가령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 어떤 종교를 믿는가, 어떤 정당에 가입하는가 등은 유전과 전적으로 무관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재능과 기질에 반영되는 행동 특성들, 가령 언어에 얼마나 능숙한가, 얼마나 종교적인가, 얼마나 자유주의적인가 또는 보수주의적인가 등은 유전적이다. _ 스틴븐 핑거, <빈 서판> , p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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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은 모든 중국인에게 거대한 문화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1421년까지 이 도시는 명 왕조의 수도였다. 거대한 도시의 성벽은 2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해 20년 넘게 건설되었고 제국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우뚝 서 있었다. 수도가 베이징으로 옮겨진 뒤에도 도시는 훌륭한 건축물과 상인들의 품위 있는 생활양식으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난징은 1850년부터 1864년까지 피비린내나는 내전 동안 태평천국의 수도였다. 1928년 장제스에 의해 중국의 수도가 되면서 또다시 주목을 받았다. 국민당은 난징을 거대한 식민도시인 상하이에 필적하는 근대화된 도시로 탈바꿈시켰다._ 래너 미터, <중일전쟁>, p139/477


 지금 남경(南京) 함락은 시간문제 아닌가. 장개석이는 벌써 천도를 선언하고 있어. 장학량이가 작년에 공산당하고 결탁해서 장개석이를 납치한 서안사건(西安事件), 그게 멸망의 징조였던 게야. 서안사건은 노구교사건(蘆溝橋事件)의 원인이지. 일본을 상대해서 중국은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이제는 만주가 문제아니야. 멀잖아 일본은 중국을 손아귀에 넣을 거다. 이런 판국에 조선이 독립을 해?... 손끝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갔음 갔지 조선이 독립을 해? 그 희망은 죽은 나무에 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허망한 게야. 왜놈 밑에서 못살겠다 한다면 모를까 독립을 쟁취하자, 그건 잠꼬대나 매한가지 _ 박경리, <토지 15> , p451/710


 <토지 15>의 마지막은 1937년 난징 대학살(南京大屠殺)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중일전쟁(中日戰爭) 당시 수도 난징에 진입한 일본군이 6주동안 중국군 포로들과 시민들을 향해 벌인 무차별적인 살상과 강간 행위로 약 3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처참한 사건. 중화민국의 수도를 점령한 일본의 승리가 미친 영향은 컸다. 일본의 중국 점령은 마치 시간 문제처럼 보였고, 그에 비례해 조선의 독립은  멀어져간 듯 했다. 이제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살아가는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시기. 난징대학살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토지> 4부 3권에서 이뤄진다. 사실, 일제 강점 이전 남한 대토벌 작전(南韓大討伐作戰, 1909)이나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598) 당시의 이들의 만행을 본다면 우리에게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겠지만, 서방세계가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무엇이 이러한 학살을 가능케 했는가. 


 "아무리 일본 인종이 극악무도하다 하더라도 일본인 전부가 악귀일 수는 없는 일. 군에 끌려나온 사내 모두가 짐승일 수는 없는 일. 한데 어찌하여 모두 악귀가 되고 짐승이 되었는가. 그런 만행은 다소간 정복자의 속성이라 하더라도 오만의 군대가 삼십만의 비전투원을 학살하다니, 자네들은 일본 군부의 작전이라는 생각은 아니했다 그 말인가?" _ 박경리, <토지 15> , p460/594


  "일본군은 왜 중국 대륙에서 저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까?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만......" 

 내 물음에 대한 우노의 답변은 명료했다.

 "하나는 일본 육군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관학교 출신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거기에 완벽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한 단계든 두 단계든 계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일은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사관학교 출신은 정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와 군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체험에 입각해 말하자면, 신임 장교가 병사들 앞에서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중국인을 시험 삼아 베거나 고문을 가해 군인다운 게 무엇인지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p189/974


 패잔병에게 폭행을 가하는 일본병사의 심리에는 일본병사가 중국병사 혹은 중국민중을 향해 품은 도착된 적개심이 잘 나타나 있다. 예기하지 않고 발발한 중일전면전쟁에 끌려나와 상궤를 벗어난 남경진격 난행군을 강요당해 적당주의적인 작전지도와 탄약보급 부족으로 많은 전상자를 낸 사실로부터 느끼는 분노가 군/정부나 상급 지휘관에게 향하는 대신에 항전하는 중국군과 항일적인 민중이 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나 고생하고 있는 거야" "많은 국민이 울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도착된 적개심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더욱이 전사한 동료의 원한을 갚는다고 하는 복수심 등이 증폭되어 쉽게 중국군민을 살육하는 심리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_ 가사라하 도쿠시, <남경사건>, p128/195


 <토지>에서 제기된 물음에 대해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1939 ~ ) 와 가사라하 도쿠시笠原十九司, 1944년 ~ )는 일본군 입장에서 학살의 문제를 바라본다. 사관학교 출신에 의해 장악된 군조직의 구조와 전투밖에 알지 못하는 그들의 안목 그리고 난징진입 직전에 이뤄진 상하이전투(1937)에서 중국군의 저항으로 큰 피해를 본 일본군의 감정이 전투 패배 후 저항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해 무제한적인 폭력의 형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이 관점에서만 바라볼 수 있을까. 일본군 내부가 아닌 관점을 조금 올려보자.


 대학살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 비극의 중심에는 일본과 중국의 이념적 충돌이 있었다. 일본의 대동아주의는 190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에 변질되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이웃들을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고 진심 어린 착각에 사로잡혔다. 반면, 중국인들의 관념은 일본과 서양 침략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민족주의를 형성해왔다. 이러한 생각이 일본인들이 추구하는 세계관과는 맞을 리 없었다. 서로의 인지적 부조화는 일본군이 피해자들을 한층 경멸하도록 부채질했다. _ 래너 미터, <중일전쟁>, p160/477


 나는 일본의 들난 모습을 똑똑히 보아야겠어요. 처량하면 한 대로, 갈팡질팡하면 하는 대로 실체를 보아야겠어요. 눈감고 귀 막고 입 다물고 그래서는 안 되겠어요. 국민 전체가 완전히 천치가 돼 있단 말입니다. 무라카미상은 자존심 따위 논할 처지도 아니라 했지만 나도 자존심 따위 논할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애당초 자존심 따위는 있지도 않았으니까요. 자만심이었지요. 그 강국이라는 환상의 자만심이 우리들 생존을 위협하고 국가 민족을 존폐(存廢)의 기로까지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게 어째서 지엽적인 문제겠습니까.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요 문화의 어머니라 하며 노닥거리던 그들이 이제는 전쟁은 장기(長期)의 건설, 중국 백성의 행복을 위한 것, 하고 노닥거리고 있어요. _ 박경리, <토지 15> , p640/720


 래너 미터 (Rana Mitter, 1969 ~ )의 <중일전쟁-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Forgotten Ally: China's War with Japan, 1937~1945>은 이 사건을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일본의 변질된 대동아주의와 중국의 민족주의의 충돌이 빚어낸 참상이라는 것이 그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본다면, 이데올로기의 실현을 위한 일련의 행위들 또한 함께 목격되어야 할 것이다.


 <도쿄니치니치신문>(1937년 12월 15일)은 <대 전승! 환희의 열풍 / 드디어 왔다! 세기의 축제일 / 12월의 도쿄 거리에 17일 빨리 "설날" / 황성은 깃발, 깃발, 깃발의 물결>이라고 보도했다... '1억 국민대망의 <남경함락 공보>를 접한 14일 아침은 동아 東亞의 암운을 완전히 쓸어버린 듯이 태양이 찬란히 빛나는 청명한 날씨다. 새벽을 알리는 신문 배달하는 발자국소리가 각 가정에 들릴 때,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는 오전 6시 반, 유량한 나팔소리와 함께 임시뉴스를 발표하자 전 국민은 환호의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은 "만세"를 외쳤다. 국기가 각 문은 물론 시전 市電, 시 버스에까지 휘날리고, 여기저기에서 명랑한 만세 소리, 크리스마스나 설날을 일축한 세기의 축제일은 아코의사赤?義士)가 숙원을 이룬 날처럼 도래했다.' _ 가사라하 도쿠시, <남경사건>, p120/195


 일장기 앞에서 기미가요가 제창될 때, 거기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발성하는 힘이 있는 동시에, 제창한다고 하는 실천을 통해서 이 힘이 '일본인'이라는 공동성을 연출해 나가는 동력으로 배양되는 것이다. 이런 힘의 결집은 기미가요 가사의 의미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함께 제창한다고 하는 실천의 산물이다(p142).... 이렇게 상기된 기억은 새로운 공동성을 창출할 것이다. 기억에 근거한 이런 노래야말로 섬노래라는 이름에 부합할는지 모르겠다. 섬노래란 음계나 리듬으로 환원해서 설명되어서는 안된다. 함께 소리내어 부른다는 실천에 의해서 상기되는 기억으로서 이야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바로 함께 부르고 듣는다는 실천적 관계가 영위되는 장에서라야 비로소 가능할 터이다. _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 p143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 1957~) 의 <전장의 기억>은 기미가요(君が代)가, 정확하게는 기미가요의 제창이 전장으로 나가는 이들에게 고취하는 공동체의식에 주목한다. 일찌기 메이지 시대 국가의례를 통해 신흥강국의 이미지를 자국민들에게 각인시켰던 전례의 연장선상에서 소와 시대에 일어난 난징함락은 전승일로서 일본인들을 단결시켰음을 우리는 <화려한 군주>에서 이미 확인했다. 떠오르는 태양의 제국(Rising Sun)의 이미지는 이제 깃발로 형상화되었고, 이들의 진격은 이미지의 실현이 된다. 강한 공동체 의식으로 결합된 이들이 자기 동료의 죽음과 부상을, 그리고 자신에 대한 처지를 내부가 아닌 외부로 돌려 일어난 폭력. 그것은 난징학살의 성격을 설명한다. 문제는 이러한 의식화로 인해 효율적으로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피를 맛본 군중이 이제는 통제선을 넘어섰다는 데 있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때 한양(漢陽)을 점령하고 협상하려던 일본군의 생각이 선조(宣祖, 1552~1608)의 발빠른 몽진으로 틀어졌듯, 중일전쟁에서도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빠른 난징 포기로 인해 전황이 일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게 된다. 더구나, 선택된 정보의 제공으로 승리에 도취된 국민의 전쟁요구로 이제는 멈출 수 없는 전쟁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 일본육군. 이러한 일본육군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본 해군의 작품이 진주만 공격(Attack on Pearl Harbor, 1941)로 이루어진 점을 생각해본다면, 난징 시민의 피로 행해진 예식으로 악(惡)을 성공적으로 소환시켰으나, 이 악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결국 악에 몸을 빼앗겨 죽음으로 이른 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최후라 하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물음이 더 제기된다. 그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남경 함락 후 전선의 확대가 불가피해진 일본은 내심 당황하고 혼란에 빠진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띄운 것이 화평이라는 기구(氣球)였고 미국과 영국에 중재해줄 것을 은근히 요망했다.(p641)... 비연맹국(非聯盟國)이라는 이유로 일본이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 총회는 중국의 일본 침략 제소(提訴)를 받아들여 9개국 조약체결국회의(條約締結國會議)에 안건을 내놓는 등, 소련처럼 직접적인 군사원조는 아니했으나 분명히 중국 편에서 방자한 일본에 치를 떠는 영미를 믿을 수 없었던 일본은 중재 역할을 독일에게 가져가는데 문제는 상대, 장개석이 응할 수 있는 한계였다. 그것은 원상복귀 이외는 없었다. 갖은 지랄을 다 한 일본의 모든 행동이 도로(徒勞)로 끝나는 그 조건이나마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의 사정, 그러나 그들이 첫째 봉착한 것은 정부나 군부 이상으로 전쟁열에 들떠 있는 국민에게 뭐라할 것인가, 총동원하여 전쟁의 열기로 몰아붙여놓은 국민들을 납득시킬 방법이 있는가. 남경함락 후 전승에 취한 국민들은 날이면 날마다 일장기행렬, 등불행렬로 법석을 떨고 있었으니, 그러는 동안 각 파의 반목과 대립은 오기를 자극하고 고조시키면서 화평조건은 차츰 강경한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랬다. _ 박경리, <토지 15> , p642/720


 남경 거리에 피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 수십만의 원혼이 통곡하며 방황하는 모습이 보일 듯도 한데 심장에 철판을 깐 일본 정부는 도탄에 빠진 인민의 괴로움을 국민정부가 무시한다 하며 전가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남경 함락이 있은 지 한 달 가량이 지난 1938년 정월 16일, 실은 성명이 발표되는 그 시각에도 남경에서는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_ 박경리, <토지 15> , p644/720


 일본군의 학살로 실체화된 악은 외부에서 온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재된 것일까?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Ein Bericht von der Banalitat des Bosen>에서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도출해 내지만, 그 평범성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아이히만)가 살인의 방조자로 기소되었다면 유죄라고 인정했을까? 아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조건들을 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회고를 할 때에만 범죄일 뿐, 자기는 언제나 법률을 준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최선을 다해 수행한 히틀러의 명령은 제3제국에서는 '법의 효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p77)...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_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p349


  제임스 도즈의 <악한 사람들 -중일전쟁 전범들을 인터뷰하다 Evil Men>는 악을 외부에서 온 것이라는 태도와 그들 내부에 내재된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 모두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외부에서 온 것이라는 관점은 문제를 시스템으로 치환해 가해자들을 인간적인 연민으로만 바라볼 수 있으며, 행위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희석시켜 결국은 반성과 성찰없는 상태로 이끌 수 있다. 반면, 악을 그들 내부에 내재된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가해자들을 '악마화'하는 것이다. 가해자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몰아가는 이러한 시선 또한 그들과 우리를 분리시켜 반성의 여지를 없게 만드는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외상적 사건을 이해하려 하는 것은 외상적 사건의 가해자들을 이해하려하는 것과 같다. 즉 그들을 신비화된 괴물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유사한 역설로 악의 역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 가해자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있는 사람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도덕적 모욕이며, 가해자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개념화화기를 거부하는 것도 도덕적 모욕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그들을 악마로 만들어야 하지만 동시에 악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악마로 취급하면 안 되는데, 악마화하는 것은 곧 그들이 악마적인 특징들을 공유한다는 관점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의 인간성 전체를 묵살해버리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요구를 응징에 대한 요구와 구별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분개가 극단에 치우쳐 타인을 도덕적으로 거부하게 되면 증오와 구별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이는 위험한 정치적 결과 뿐 아니라 깊은 내면적 결과 또한 초래한다. 타자를 악마화할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생각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생각에 전념하게 된다. 게다가 악마화하기는 악의 다름에 대한 시각을 조장해서 화해 가능성 뿐만 아니라 방지 가능성까지 차단해버린다. 악이 어떤 식으로든 특별하거나,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다고 생각되면 악을 꾸준히 발생시키는 매우 평범한 상황적, 구조적 특징을 확인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악을 타자화하면 결국 타자를 악으로 만들게 된다. _ 제임스 도즈, <악한 사람들> , p44/239


 악의 타자성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다면 중요한 철학적 구별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떤 행동은 이해 불가능하며 우리의 본성과 이질적이라는 느낌은 '단지' 느낌이 아니다... 게다가 악의 타자성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면 증오 역시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은 상실이다. _ 제임스 도즈, <악한 사람들> , p45/239


 이와 같이 어려운 악을 바라봐야 하는 관점의 선택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까. 저마다 다른 결론에 이르겠지만, 제프리 버튼 러셀(Jeffrey Burton Russell, 1937 ~ )의  '악'에 대한 정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악마란 호전적인 힘이 인간적으로 또는 신적으로 구체화된 것이고, 이러한 호전적인 힘이 우리 의식의 밖에서 지각된 것이다. 이러한 힘 - 우리 스스로는 이러한 힘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듯하다 - 은 외경, 불안, 두려움, 공포와 같은 종교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악마는 신들만큼이나 종교적인 의미를 상당히 드러낸다(p37)... 악마란 기묘하고 한물간 존재가 아니라 인간 정신 안에, 또는 인간 정신을 압도하는, 거대하고 영원한 힘이 표출된 것이다... 악마는 이 세상이 겪는 고통 속에 진정으로 살아있다. 그리고 이러한 악이 사라지면 또 다른 악이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고, 그 각각의 악은 무자비한 고통을 가하면서도 진정으로 살아 있다. _ 제프리 버튼 러셀, <데블 The Devil> , p40


 러셀의 정의에 따르면 악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자리한다. 아렌트가 밝혀낸 '악의 평범성' 또한 이를 의미한다면, 우리는 전쟁 가해자들 또한 한 명의 인간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 명의 인간이 갖는 수많은 가능태(可能態)로 악은 실현 이전에 내재해 있지만, 이같은 가능태가 개인의 욕망과 이데올로기의 실현이라는 휘발유를 뒤집어 쓴 상태에서 전쟁과 같은 발화점을 만났을 때 가능태는 '악마'라는 현실태(現實態)로 구현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문제는 이 발화점이 개인마다, 사회마다 다르다는 점은 아닐런지...


 인간이란 종이 한 장 차이라구. 모두가 그래! 잔혹행위, 침략, 도륙, 세계사는 그런 것들로 하여 피에 물들여져 있는 거라구. 방어와 공격은 숙명, 그건 인간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수렁이라구. 집단의식과 자유주의는 영원히 승부 없는 줄당기기란 말이야. 흥, 소속감도 본능이요, 자유 지향도 본능이다! 그래 다아 본능이다! 본능! 인간이라고 뽐낼 것 하나 없다구. 그래 맞어. 바로 뽐내는 그 특성 때문에 인간이요, 그 특성 때문에 인간은 죄악의 진구렁창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 _ 박경리, <토지 15> , p576/594 


 일상은 전장을 준비했다. 그러나 동시에 전장은 전장을 준비한 일상의 의미세계를 변화시켜 가는 모멘트로도 충만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전장에서 일상으로 (p38)... 전장 동원이 분명 죽음으로의 동원인 이상, 전장은 '자기 나라 속의 난민'을 창출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동원은 의식과 정체성이 아니라 규율의 문제이며 신체적 실천의 문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변용은 신체적 문제이며 차츰 의식의 문제, 의미의 문제로 이행한다. 무의식 속에 습관화되어 익숙해져 버린 실천이 전장에서의 신체의 변용에 이를 때, 지금까지 말할 수 없었던 임계영역이 이번에는 말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머피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 자신 속에서 '외계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장 동원이 완수되려면 이 '외계인'의 말(잡음)은 봉쇄되어야 한다... 전장 동원은 '외계인'의 말을 봉쇄하고 '자기 나라 속의 난민'을 내부의 적으로 죽임으로써만 수행되는 것이다. _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 p40


 인간이란 궁극적으론 이기주의니까 남보다 내가 잘살아야겠다는 욕망을 부정할 순 없어. 그러니까 충용무쌍한, 천황의 적자(赤子)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국가의 이익,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약탈과 살상, 그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아니 찬양을 한다 하더라도, 아니지 아니 창조의 아버지 문화의 어머니라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자고로 전쟁이란 영웅들을 창출해낸 것만큼은 틀림없고오. _ 박경리, <토지 15> , p601/720


 난징학살 이후 중일전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전쟁이 가열된 전쟁은 더 큰 자원의 소모를 가져오고 체제는 총력전(總力戰) 체제로 넘어간다. 여기에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Pacific War 1941)까지 일어나면서 동원을 위한 독려는 더욱 확대되는데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바로 직전까지 타자(他子)였던 이들이 전선(戰線)의 확대로 공영권(共榮圈)안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이 시점의 한국인들에게는 선택이 주어진다. 친일과 반일이라는 파란 약과 빨간 약을. 개인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은 이때로부터 잉태되었다고 해석하다면 지나친 것일까....


 "오래가야 일본이 안 망하겠습니까? "중국이 손을 드는데도?" "남경을 내어주었다 해서 일본이 다 지배한 것도 아니고 중국인 전부가 항복한 것도 아니지요. 이미 장기전으로 들어갔고."(p514)... "장차 조선사람들은 어찌 될 것인지." "전쟁에 내몰겠지요." "그렇다면 조선사람들 씨가 안 마르겠냐?"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사람에게 무장을 시킨다는 것은 일본으로서 상당히 위험한 일이지요. 또 그런 만큼 일본은 다급해진 것이고 약화되었다 할 수도 있을 겁니다." _ 박경리, <토지 15> , p515/710


 <토지 15>의 마지막 난징대학살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30만명의 무고한 사람이 학살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이의 보도가 가져온 외교적 파장은 전후 알려진 아우슈비츠 수용소(Auschwitz concentration camp)의 영향과는 또다른 부분이었다. 이 사건과 함께 생각해본 '악의 평범성'과 역사적 의미는 작품 속의 의미와는 별도로 작품 밖의 독자에게 다가온다...


PS. <토지>에서 서희 일행이 간도에서 돌아오는 3부 이후는 이전 1, 2부와는 분명 다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1,2부에서는 악의 화신이 조준구라는 개인이었다면, 개인의 복수가 거의 마무리된 3,4부에서 악은 일본 제국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때문에, 이전에는 개인 심리가 작품 내에 깊이 있게 묘사된다면, 3부 이후에는 사회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인물의 대사에 드러난 심리 대신 사회 분위기에 묻어난 시대 정신. 이같은 변화가 <토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깔딱고개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이번 주 독서챌린지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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