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성서해석에서 이성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성서 해석은 텍스트의 자료나 역사적 자료를 꼼꼼하게 연구하면서, 사람들이 이성적 능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성서해석과 성서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이성은 <에티카>와 같이 철학이나 정치학 연구를 위해 필요로 하는, 추상적 사유 내지 이를 가능케 하는 고도의 지성이라기보다는 성서를 읽고 나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판단력과 같은 이성이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48 


  <스피노자의 [윤리학] 읽기>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모두 스피노자 철학 입문서로, 스피노자의 개인 철학과 정치 철학이 어떤 관련을 갖는지를 이해시켜준다. <윤리학 (에티카)> 에서 우리는 지성을 사용해서 인간의 욕망을 파악했다면, <신학정치론>에서는 이성을 사용해서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스피노자가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고 급기야 인간의 이성과 지성, 그리고 판단능력을 마비시키는 점이었다... 종교와 신학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비판적 이해를 통해 종교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신학정치론>의 가장 주요한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41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를 통해서 우리는 스피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전반의 내용 즉, 고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신의 뜻이 대리인을 통해 행해진 사례 - 모세 등 - 를 통해, '국가에 의해 제약된 종교', '개인의 자유에 의해 제약된 국가'를 이상적인 정체(政體)로 제시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 드러난 정치철학은 '자유'라는 자연권을 기반으로 '종교'-'국가'-'개인'의 관계 정립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흐름을 가지고 스피노자 선집에 담긴 스피노자 철학을 리뷰를 통해 보다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페이퍼의 마지막은 저자가 번역한 <신학정치론/정치학논고>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짓는다...


 스피노자는 종교의 본질인 정의와 자비가 오직 통치자의 권리를 통해 법과 권리라는 실질적 힘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주력한다. 이럴 경우, 통치권은 주권을 보유한 사람에게만 있기 때문에 종교는 오직 명령권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만 권리를 통한 실질적 힘을 획득할 수 있으며, 신은 지상의 군주를 도구로 해서만 인간을 다스린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184


 스피노자가 신학과 종교의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한 이유는 바로 종교의 설립이 국가가 제정한 법령에 의해서만 그 존재를 인정받았듯이 종교의 자유 역시 주권자의 명령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의 근거가 되는 생각의 자유는 일종의 자연권에 속한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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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도 정신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신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알지 못했다"[E, 3부 정리2 주석], 이는 스피노자의 유물론적 원리가 되며, 그것은 내가 다음의 연구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세 가지 논제로 요약될 수 있다. 


 1. 신체의 해방 없이는 정신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2. 집합적 해방 없이는 개체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3. 이런 정리들의 쓰인 형식은 앞서 존재하는 정신의, 영혼의 의도를 현실화하거나 물질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체들 사이의 신체로서 그 자체로 물질적 실존을 소유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22


 워런 몬탁 (Warren Montag)은 <신체, 대중들, 역량 - 스피노자와 그의 동시대인들 Bodies, Masses, Power>에서 신체, 역량, 대중들의 관계를 스피노자 철학의 범위  안에서 '해방'이라는 주제로 따라간다. 그리고,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유물론(唯物論)에서 바라보는 스피노자 철학의 개관을 알게 된다. 본문에는 여러 내용이 있지만, 이번 페이퍼에서는 저자가 말한 세 가지 논제를 중심으로 내용을 따라가 보자.


 1. 신체의 해방 없이는 정신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우리들이 사물들의 탐구에 종사하는 동안에는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결코 어떤 것을 추론해서도 안 되며, 오직 지성 안에만 있는 것들을 사물 안에 있는 것들과 혼동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최선의 결론은 어떤 특수한 긍정적인 본질로부터 또는 참답고 타당한 정의(定義)로부터 도출된다._스피노자, <지성개선론>, p84


 [정리1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이거나, 또는 오직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연장의 양태일 뿐이다._스피노자, <에티카>, p96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 ~ 1677)는 <지성개선론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에서 추상적인 것으로부터의 추론이 아닌, 지성 안에 있는 것으로부터의 추론에 대해 말한다. 지성으로부터 참된 인식으로의 나아감. 인간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도구들로부터 복잡한 것들을 만들어 내듯, 지성도 타고한 힘으로 지혜의 정점(sapientiae culmen)으로 나아간다. 여기에서 정신과 신체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다. 몬탁은 이러한 스피노자의 인식 위에 해방의 문제를 '신체'와 '신체들의 변용'으로 돌린다. 정신이 신체와 동일하다면, '신체의 해방 없이는 정신의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임은 지극히 당연하다.


 해방에 이르는 길은 다른 곳, 대답을 전제하지 않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신체들에 대해 정신들을 더 이상 초월적인 것으로 고려하지 않았을 때, 정신적 결정들, 의지의 행위들이 자신의 창조에 관한 신처럼 신체들과 무관한 실존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이 원인이라고 말해지는 물리적 행위들에 전적으로 내재하는 것으로 보일 때, 무엇이 벌어질까? 우리의 주의는 뜻밖에 그리고 비가역적으로 인간의 내면성의 현상들, 의지의 행위들, 주어지거나 없어진 동의, 찬성이나 반대 그리고 그것들이 토대가 되는 권리와 법의 전적인 사법적 장치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려진다. 그리고 종속은 물리적/물질적 문제, 신체들이 하고 하지 않는 것의 문제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를 변용하는지의 문제가 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88


 2. 집합적 해방 없이는 개체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몬탁이 해석하는 신체는 단일(單一)한 개체 단위가 아니다. 신체는 생존을 하기 위해 상/하위 단위, 다른 신체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스피노자의 '신체'는 사회적 관계를 필연적으로 만들게 된다.


 신체는 공기, 물, 영양, 즉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아주 많은 이질적인 신체들의 섭취를 요구하며 그것이 없다면 신체는 빠르게 소멸할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바로 신체의 생존을 위해 다른 인간의 신체들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수많은 부분들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생존의 조건으로서 자연의 일부를 형성하는 인간 사회를 포함하여 다른 신체들, 보다 큰 신체들, 보다 큰 단일체들, 보다 큰 집합들의 다른 부분들 가운데 한 부분을 구성하면서 다른 신체들과 상호작용을 해야만 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75


(2) 우리가 정치를 역량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개체는 유의미한 분석 단위가 되지 않는다. 개체로서, 즉 분리된 자율적인 것으로서 개체의 역량은 이론적으로 무시될 정도로 미미하다. 사실상 자연 상태라는 통념은 이것이 분리되고 고립된 개체들의 사회 이전 상태인 한에서, 스피노자에게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고립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거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않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상 시민사회를 열망하며 그것을 결코 완전히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이 따라나온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62


 이와 함께 몬탁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역량'과 '권리'를 동일하게 보고 있는 마트롱(Alexandre Matheron)의 해석을 빌린다. 이로부터 결국, 작은 신체보다 큰 신체가 더 큰 역량과 권리를 갖는다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서 결정적인 행위의 주체는 '개인'이 아닌 '다중'이다. 마트롱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를 통해 <윤리학>과 <신학-정치론> <정치학>이 같은 기하학적 구조를 가졌음을 말했다면, 몬탁은 양태(樣態)에 따라 정치철학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로부터정치 주체로서 다중에 의한 '집합적 해방 없이는 개체의 해방은 없다'가 도출된다.


 (1) 스피노자는 역량과 권리를 분리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자연은 자연의 역량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최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 전체의 보편적 역량은 집합적으로 고려된 모든 개체들의 역량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개체는 자신의 역량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최고의 권리를 소유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61


 <정치론>에서 그(스피노자)는 분명하게 말한다. 권리가 역량만큼이라면, 개체 하나만으로는 단지 작은 역량이나 권리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개체가 어떠한 실재성을 갖는 것이라면, 개체의 권리는 국가와 관련해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권리는... 각 개인의 역량 potentia이 아니라 다중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38


 3. 이런 정리들의 쓰인 형식은 앞서 존재하는 정신의, 영혼의 의도를 현실화하거나 물질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체들 사이의 신체로서 그 자체로 물질적 실존을 소유한다


 이상의 <신체, 대중들, 역량>들의 관계를 종합해보자. <지성개선론>에서 언급되었듯이, 스피노자는 현존하는 모든 지각으로부터 참다운 관념으로 나가고자 했다. 지각되기 위해서는 동일한 정신-신체가 필요하며, 인간 해방의 문제는 결국 신체의 해방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신체들은 '생존'하기 위해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이들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생존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크기의 신체들은  그 크기 만큼의 역량을 갖는다. (마트롱이 해석한) 스피노자는 권리와 역량을 별도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가 가장 강한 권리를 갖는다는 점에서는 얼핏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와 동일한 결론에 이른듯 보이지만, 국가의 배후가 되는 다중(multitude)의 역량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왕권신수설'의 홉스와는 다르다는 것이 책 전반의 큰 줄기다. 


 스피노자는 단지 정신들의 해방, 신체로는 결코 표현될 수 없는 정신의 자유, 이미 실행된 것으로 보일 수 있을 때 가장 잘 확증되는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자유를 요구한다. 단지 그 자신과 자신의 권리들의 소유자인 개체의 해방이 아니라 그것의 외부에서는 개체가 실존하지 않으며 그것과 별개로 개체의 자유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집합체의 해방을 요구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20


 대중들의 본성과 역량이 설명되는 가장 공통적인 형상figure 가운데 하나는 대개 국가 업무에 대한 눈에 띠지 않는 배경이지만 불안한 시기에는 어떤 것도 그것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바다의 형상이다. 죽음이든 불화든 국가에서 사소한 균열은 대중 행동과 질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들의 진실은 정치 체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의 외부, 성난 다중의 역량에 있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41


  결국, <신체, 대중들, 역량>은 유물론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분석하는 책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몬탁의 관점을 이해한다면,  네그리의 3부작 <제국> <다중> <공동체>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일단 이들에 대한 정리는 다음으로 넘기자. 그런 면에서 몬탁의 <신체, 대중들, 역량>은 스피노자와 네그리를 연결해주는 튼튼한 다리라고 정리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제국>은 이미 많이 넘겨서... 빨리 정리해야겠다... ㅜㅜ 



스피노자는 단지 정신들의 해방, 신체로는 결코 표현될 수 없는 정신의 자유, 이미 실행된 것으로 보일 수 있을 때 가장 잘 확증되는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자유를 요구한다. 단지 그 자신과 자신의 권리들의 소유자인 개체의 해방이 아니라 그것의 외부에서는 개체가 실존하지 않으며 그것과 별개로 개체의 자유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집합체의 해방을 요구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20

대중들의 본성과 역량이 설명되는 가장 공통적인 형상figure 가운데 하나는 대개 국가 업무에 대한 눈에 띠지 않는 배경이지만 불안한 시기에는 어떤 것도 그것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바다의 형상이다. 죽음이든 불화든 국가에서 사소한 균열은 대중 행동과 질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들의 진실은 정치 체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의 외부, 성난 다중의 역량에 있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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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모자 2021-04-18 17: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을 유물론적으로 극대화해서 뇌과학에 적용한 책도 있습니다ㅋ 안토니오 다마지오 - [스피노자의 뇌]도 나중에 읽어보세요~

겨울호랑이 2021-04-18 18:18   좋아요 2 | URL
[스피노자의 뇌]가 그런 내용이군요. 황금모자님 덕분에 좋은 책 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정부의 권리와 권력(jus et potestas imperii)을 매우 큰 것으로 파악한다고 할지라도, 정부의 권리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이미 이 사실을 충분히 분명하게 밝혔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경험은 국가의 보존은 무엇보다도 먼저 신민의 충성과 덕 그리고 명령 수행에 있어서 한결같은 마음에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들에게 충성과 덕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방법은 쉽게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지배자나 피지배자나 인간들이며 그들은 노동(labor)보다 욕망(libido)을 추구하기 때문이다.(p360)...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어떤 기만도 남지 않게 국가를 구성하고, 모든 사람들 각자의 기질이 어떻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이 사적권리보다 공적 권리를 우선시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과제이며 여기에서 해야할 일이다._B.스피노자, <신학-정치론>,p361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Benedictus de Spinoza,1632 ~ 1677)의 <신학-정치론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를 읽던 중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 소중한 존재이고, 자유를 비롯한 이들의 이익과 권리가 상호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잠시 이야기를 돌려 칸토어(Georg Ferdinand Ludwig Philipp Cantor, 1845~1918)의 집합론을 살펴보자. 칸토어는 집합론에서 일대일 대응을 통해 두 무한 집합의 크기가 다를 수 있음을 증명했다.


 집합론을 처음 연구한 사람은 칸토어로, 1874년에 그는 대수적 수(algebraic number)보다 실수가 더 많음을 보였다. 이는 두 무한 집합의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 초월수의 존재를 새롭게 보인 것이었다... 대수적 수와 실수가 모두 무한히 많은데도 실수가 대수적 수보다 '많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칸토어는 두 집합 A와 B 사이에 전단사함수(bijection)가 존재하면 그들의 크기, 즉 "기수(cardinality)가 같다"라고 정의했다. 이는 A의 원소와 B의 원소 사이에 일대일대응(one-to-one correspondence)이 있다는 뜻이다. 만일 A와 B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존재하지 않고 A와 B의 부분집합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있으면 A는 B보다 기수가 작다라고 한다. 결국 칸토어가 보인 것은 모든 대수적 수의 집합의 기수가 모든 실수의 집합의 기수보다 작다는 것이다._ 티모시 가워드 외, <Mathematics 1>, p1013


 칸토어의 설명이 다소 와닿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부분에 대해 보다 대중적으로 친숙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의 설명을 빌려보자. <수리철학의 기초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에서 러셀은 수열의 순서를 바꾸고, 수열수 비교를 통해 크기가 다른 무한 집합의 이야기를 쉽게 설명한다. 


  먼저 보기를 들어 설명하자. 다음의 수열로부터 출발해 보자.   1,2,3,4, ..., n, ... 

 이 수열은 가장 작은 무한수열수, 즉 칸토어가 w라고 부른 수열수를 가지고 있다. 지금 최초라 나타나는 짝수를 맨 마지막으로 옮기는 조작을 순차적으로 되풀이 해 이 수열을 띄엄띄엄 드물게 했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수열을 얻을 수 있다. 1,3,5,7,...2n+1... 2,4,6,8... 2n . 이 수열의 수열수는 2w다. 


 여기에서 두 수열 1,2,3,4.... , n과 1,3,4,5,..., n+1,..., 2을 비교해 보면 첫째 수열은 둘째 수열에서 최후의 항, 즉 2를 제외한 부분부열과 대등하지만, 둘째 수열은 첫째 수열의 어떠한 부분수열과도 대등하지 않다. 이는 첫째 수열의 수열수가 w라고 했을 때, 둘째 수열의 수열수는 w+1로서 정의에 의해 둘째 수열이 첫째 수열보다 크다. _러셀, <수리철학의 기초>,p103


 두 무한 집합이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잘 설명되지만, 개인적으로는 러셀의 설명 방식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가 충돌했을 때의 가치 판단의 기준을 세우게 된다. 러셀은 책에서 무한 집합에서 교환 법칙이 성립하지 않음을 말한다. 즉, 1+w와 w+1은 다르다는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과 권리가 충돌할 때 이는 종합적인 판단이 아닌, 사안별 접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하나의 항을 수열의 마지막이 아닌 최초에 더하면 그것 또한 수열이므로 1+w=w이다. 따라서 1+w=w이다. 따라서 1+w는 w+1과 같지 않다. 이는 관계에 대한 산술 전체에 통용되는 성질이다._러셀, <수리철학의 기초>,p104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관점에 따라 어떨 때는 시장 경제의 자유를, 다른 때는 국민 정서를 언급하면서 다른 기준을 적용하며 비판을 일삼는 일부의 행태가 옳다는 것이 아니다. 사안 별로 개인과 이익의 상충점을 소거해가면서 결과적으로 일대일 대응이 될 수 없는 남는 부분수열이 어느 집합에 속하는지를 보다 납득할 기준(이 기준은 사회 전체의 합의가 필요하겠지만)에서 판단되면 좋을 것이다. 다만, 숫자로 표현되는 수학의 세계와 사회과학의 세계는 다르기에 쉽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소 장황했지만, 이러한 생각이 시작된 시작점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3월호에 실린 "분열을 팔아야 먹고 사는 언론"의 기사를 읽고서였다. 이와 연관해서 배리 글래스너(Barry Glassner)의 <공포의 문화 The Culture of Fear: Why Americans Are Afraid of the Wrong Things>를 읽으며, 언론이 어떻게 공포를 조장했는가를 살폈고 여기에서 다시 스피노자로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공포의 문화>에서 <신학-정치론>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지나친 비약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실로 대중의 변덕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대중에 대해서 거의 절망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이성이 아니라 오직 감정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며, 대중은 모든 것에 달려들고 탐욕이나 사치로 인해서 쉽게 타락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자기의 기질에 따라서 이끌어 가고자 한다._B.스피노자, <신학-정치론>,p360


 <공포의 문화>는 조만간 리뷰로 정리하도록 하고, <신학-정치론>은 스피노자 철학을 쉽게 설명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와 함께 페이퍼에서 다루는 것으로 하며, 글을 마무리하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철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손실은 사회화되고, 이윤은 사유화된다는 것이다.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3월호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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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3-20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맘에 크게 와닿는 글이 넘 많습니다. ^^
손실은 사회화되고 이윤은 사유화 된다는 말은 넘 절감되고 멋입니다. ^^

개인과 공동체 이익이 서로 충돌할 때 종합적 판단이 아닌 사안별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씀도 크게 맘에 와닿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큰 방향에서 어긋나면 각 개별 사항을 흔히 다르게 대우하는 상황이 넘 많아 좀 아쉽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3-20 18:35   좋아요 1 | URL
이번 페이퍼에서 많은 내용을 퍼와서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더 공감되셨으리라 생각해 봅니다.ㅋ 감사합니다. 사실, 물리의 법칙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사람 심리가 추가 변수가 들어간 사회과학은 예외 사항이 많음을 느낍니다. 그게 사회과학의 매력이기도 하겠지만요.. ^^:)

초란공 2021-03-20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디플로마티크의 마지막 인용문이 한번 더 머리를 치네요^^;;

겨울호랑이 2021-03-20 22:26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두서없이 썼네요. 초란공님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 2021-03-20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에서 자신의 세를 불리는 방법이 분열이지요. 실제로 불리했던 후보나 정당이 케케묵은 이슈를 들고 나와도 그 아래 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흔히 볼수 있습니다.
양분된 의견중 하나를 자신의 진영을 대표하는것처럼 주장하는 쪽에 이용당하지 않고 사안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3-20 23:35   좋아요 1 | URL
동감입니다.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분열을 많이 보게됩니다. 특히, 자신이 일정 집단을 대표한다는 생각이 믿음으로 나타났을 때, 갈등은 파국으로 이끌고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퍼지는 악순환이 이루어지는 둣합니다...
 

 

 푸코에 의하면 광기의 경험에는 '거대한 분리선'이 있다. 한편에서 광기는 설명될 수 없는  어두운 미지 세계의 영역이라면, 다른 한편에서 광기는 설명될 수 있는 오류의 한 조건이다. 이러한 분리선에 따라 동일자와 타자, 초월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공포와 통제의 구분이 이뤄진다._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p26, 해제 中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 ~ 1984)는 <광기의 역사 Histoire de la folie l' ge classique>에서 광기(狂氣)의 경험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설명될 수 없는 광기'와 '설명될 수 있는 광기'. 이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늘 두려움과 공포에 잠겨 있고 자신이 결코 좋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늘 영혼이나 몸이 위험에 처해 있거나 둘 다 위험에 처해 있어서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므로, 안전하게 가둬두지 않으면 어디에 있을지를 알 수 없다." 이들의 마음이 어둡고 혼탁한 원인은 대부분 시커먼 체액에 있었다. 흑답즙, 또는 구워지고 태워진 자극적 황담즙의 찌꺼기가 몸을 부패시킨 탓이었다.(p128)... 이와 동시에, 우울증은 한편으로 교양 있는 계층 사이에서 뭔가 멋져 보이는 이상, 학자와 천재가 특히 잘 걸리는 것처럼 보이는 고통이 되었다._앤드루 스컬, <문명과 광기>,p130

 

 이에 대해서는 앤드루 스컬(Andrew Scull)의 <광기와 문명 Madness in Civilization>이 실마리를 제시한다. 안좋은 체액에서 비롯된 몸과 마음의 질병, 또는 신(神)에 의한 형벌이 '설명될 수 없는 광기'라면,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처럼 하나에 마니아 성향을 보이는 천재들의 광기는 설명될 수 있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종류의 광기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설명될 수 있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개념으로 바꿀 수 있을까.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의 정신과 의들이 저마다, 그리고 분명 독립적으로, 강력한 전류를 사용해 환자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가했다. 이들의 증상을 강제로 포기시키려는 카우프만 치유법이 환자들에게 행해졌다. 카우프만 치유법이란 마비된 것으로 보이는 사지에 몹시 고통스러운 전기 충격을 한 번에 몇 시간 동안 가하면서, 군사훈련을 수행하기 위한 구령들을 외치는 것이었다. 목표는 환자가 굴복해 자신의 증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인간 도살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치도록 하는 것이었다._앤드루 스컬, <문명과 광기>,p420


 사회적으로 득(得)이 있기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 ~ 1890),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의 광기는 인간의 극한까지 밀어붙인 아름다운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들의 광기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명에 이바지하는 광기는 숭배까지 받지만, 전쟁에서 포탄 쇼크로 상처받은 광인들은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도록 명령받는다. 정상화(正常化)라는 명분으로 행해지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본다면, 푸코가 말한 '거대한 분리선'이라는 개념 역시 사회 공동체의 입장에서 바라본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이데올로기 - 그것은 사악한 일에 그럴듯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악인에게 필요한 장기간에 걸친 강인함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이론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악행을 은폐하게끔 도와주고, 비난과 저주를 듣는 대신 칭찬과 존경을 듣도록 도와준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1>


 또한, '광기'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만이 '설명될 수 있는 광기'가 지배하는 사회가 '설명될 수 없는 광기'를 합법적 권력을 사용하여 '감시와 처벌'을 행한다라는 현실이 설명된다. '정의'의 이름으로 광기어린 악(惡)의 무리에 대항하는 반대편의 광기어린 집단을 우리는 '정의의 사도'라고 부르며, 선(善)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사고들의 근원은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과거 동네마다 한 명씩은 있었던 '사람 좋은 바보 형'들이 오늘날 보이지 않게 된 이유와 함께 '광기 Madness'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함을 느낀다... 

광기의 고전적 인식과 원시적 치료법은 근대적 치료법과 단절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계보학적 연계성을 갖고 있다고 푸코는 설명한다. 광인이 감시와 심판을 받고, 유폐의 대상이 되고 있는 19세기의 과학적 정신의학은 고전주의 시대의 수용소를 대체한 정신병원의 구조를 통해 결국 광인에 대한 새로운 억압형태를 나타낼 뿐이다._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p30, 해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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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 ~ 2004와 질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 ~ 1995를 '차이'의 철학자라고 부르는 데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데리다의 철학을 말할 때 해체주의라는 수식어를 빼고 말할 수 없고, 해체주의는 '차이'의 데리다식 버전인 '차연 差延'이라는 단어를 빼고 설명하기 힘들다. 들뢰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들뢰즈의 철학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단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차이'가 될 것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18


  데리다와 들뢰즈 철학 입문서인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는 두 철학자들의 공통된 주제인 '차이'로부터 이들 철학의 전반을 살피는 방향으로 나간다. 두 철학자 모두 '차이'를 다루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데리다는 보다 '기호 - 대상' 이라는 언어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들뢰즈는 '전체 - 부분'이라는 관점에서 체계 측면에 중점을 둔다는 면에서는 이들 사상에 차이가 있다.

 

 데리다는 우리의 가장 일반적인 표상 체계인 '언어'가 이러한 목소리를 어떻게 억압해왔는가를 밝힘으로써 지금까지 왜곡된 서구의 사상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한편 들뢰즈는 표상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표상주의에 의해 억압된 존재들의 다양하고 차별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철학의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31 


 들뢰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실상은 존재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개념 이라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진 도식에 맞는 부분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아직까지 설명되지 못한 부분 또한 분명 있기에 기존 개념은 한계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개별 존재는 각자가 가지는 고유한 특성인 '차이 자체'가 있다고 바라본다. 


 들뢰즈는 이렇듯 개념으로 드러날 수 없는 그 자체의 차이를 개념적으로 드러나는 차이와 달리 '차이 자체 la difference en elle-meme'라고 표현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차이 자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p48)... 들뢰즈가 보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차이 자체'를 지니고 있으며, 그 차이는 틀에 박힌 개념이나 표상의 틀에서 깨어날 때 드러난다. 그때야 비로소 세상은 개념이 만들어낸 진부한, 너무나도 진부한 동일성의 틀로부터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49


 들뢰즈가 칸트의 도식으로부터 착안한 것은 상상력은 인식 활동에 종속될 경우에는 그저 개념을 위한 도식을 만들 뿐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개념으로부터 벗어날 경우 거꾸로 기존의 인식 활동이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도식을 만들 수 있다... 개념으로부터 새로운 개념이 나올 수는 없다. 새로운 개념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존의 개념이 파괴되어야 한다. 기존의 개념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개념이나 인식 활동이 아니라 개념의 밑바닥에 있는 도식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43

 

 들뢰즈는 베르그송 Henri Bergson, 1859 ~ 1941의 물질 개념의 설명을 수용하고, 개념으로 표상되는 물(物)이 단일한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의 총합이라고 해석한다. 그렇지만, 개념은 이러한 물의 다양성 중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으로 들뢰즈는 '기계'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보았다. 한 걸음 나아가 들뢰즈는 세상에 모든 것들을 '기계'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들뢰즈는 '기계론적 mecanique'인 것과 '기계적 machinique'인 것을 구분한다. 기계론적인 것이 미리 설계된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형성된 체계라면, 기계적인 것은 그러한 엄밀한 체계를 벗어난다. 들뢰즈에게 기계적이라는 표현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있어 언제나 변형될 수 있는, 잠정적이고 우연적인 배치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p112)... 들뢰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기계로 간주했다. 그 이유는 어떠한 존재이든 나름대로의 체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113


 들뢰즈의 기계 개념은 '절단 coupure'과 '연결'이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정신분석학의 의식과 무의식, 욕망과 충동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다만, 들뢰즈는 이러한 분석을 인간 심리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정치철학의 체계와도 연결시키며 분석대상을 넓혀간다. <안티 오이디푸스 L’Anti-Œdipe: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 <천개의 고원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enie>은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를 바라볼 수 있는 책으로 생각된다. 


 들뢰즈는 기계론적이고 개념적인 체계를 '수목 樹木적인 것'이라고 부르고, 기계적이고 이념적인 체계를 '리좀 rhizome적인 것'이라고 부른다.(p125)...  수목은 수직적이며 위계적인 구조를 상징하며 통일성과 동질성을 특성으로 한다. 반면, 땅속에서 수없이 줄기와 뿌리가 무한 증식하는 땅속줄기 식물들을 보자. 리좀은 수평적이고 탈중심적이며, 무한한 생산성과 다양성, 개방성이 특징이다.(p126)...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구분을 파시즘과 전체주의는 구분에도 적용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파시즘은 리좀적인 데 반해 전체주의는 수목적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129


 들뢰즈가 개념이라는 동일성의 원리에 억압되지 않는 '차이 자체'를 내세웠다면, 데리다는 차이라는 말 대신에 '차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p50)... 데리다는 굳이 차이가 아닌 '차연 differance'이라는 말을 고집한다. 세간에 너무 굳어져버린 차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차이의 의미를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51


 들뢰즈가 '개념'의 한계성에 보다 더 주목한다면, 데리다는 언어가 담지 못하는 한계성에 보다 더 주목한다. 음성 언어인 말과 문자 언어인 글이 가지는 서로 다른 특징은 온전하게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고 이 과정에서 소실되는 의미가 생겨나게 된다.


 difference와 differance은 프랑스어에서 둘 다 '디페랑스'로 발음된다. 3음절의 모음 e와 a에 의해 표기로는 구분되지만 말로 구현될 때 두 단어의 차이는 소멸되고 만다. 분명히 문자로는 차이가 나지만 말소리로 따지면 차이가 없는 것이다. 데리다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철학적 맥락을 지닌다.(p52)... 한마디로 a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존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즉 , "알파벳의 차이는 눈으로 볼 수 있고 글로 쓰일 수도 있지만, 발음이 같기 때문에 그 차이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a는 죽음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음성 언어'라는 폭군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다. 데리다가 e가 아닌 a를 붙인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차이가 어떠한 경우에도 고정되고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진행되는 과정에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61


 그렇다면, 과연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데리다에 의하면 존재의 의미가 명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 자체이다. 의식 - 무의식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텍스트라는 체계이며, 의미이기 때문에, 이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데리다의 입장이다. 이러한 부분은 들뢰즈의 다양체가 가진 '다양성'과도 통할 수 있다. 들뢰즈의 '다양성' 개념은 모든 물질이 무한한 이미지의 총합이라는 면에서 데리다의 이중인상과도 연결되지만, 이로부터 이들 사상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예술작품의 의미가 텍스트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텍스트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라면 당연히 그것들이 얽히는 중간에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 자체는 텍스트의 안과 밖의 구분 자체가 허물어진 경계 자체일 뿐이다. 이 경우 예술작품의 의미는 텍스트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가변적일 수 있다. 말하자면 텍스트를 구성하는 어떠한 고정된 의미라도 쉽사리 '해체'될 수 있는 것이다. 데리다가 본 예술작품의 의미란 바로 이것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96


 무의미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가 삼지 않는가의 문제가 헤겔과 데리다의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낸다.(p147)... 데리다에게 의미란 무의미와 대립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의미란 항상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의미와 무의미가 서로 중첩되어 의미가 무의미이기도 하며 무의미가 의미이기도 한 사태를 데리다는 이중인상 surimpression이라고 부른다.(p148) ... 데리다는 무의미와 의미의 얽힘 혹은 이중인상으로 이루어진 차연의 논리를 주장한다.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은 바로 이러한 차연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잠정적인 체계에 불과하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150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들뢰즈가 '차이 자체'를 인정하며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연결관계 형성에 대해 분석한다면, 데리다는 존재의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에 집중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리마톨로지 Grammatologie> <마르크스의 유령들 Spectres de Marx> <법의 힘 Force de Loi> 등을 보면 그의 사상 자체가 여러 주제의 중첩임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개별 리뷰로 정리하도록 하고,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라는 입문서 수준에서는 이 정도로 거칠게나마 윤곽을 잡도록 하자...


 데리다와 들뢰즈가 개념을 폄하하는 것은 세상을 개념으로 파악할 경우 세상의 다양성이 사라져버린다는 우려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철학이 개념에 저항한다는 것은 곧 현실의 풍부함을 되찾겠다는 노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철학에는 개념을 최고의 가치로 숭상하면서 이 세상을 개념과 동등한 것으로 취급하려는 기존 철학자들의 사상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24 


PS. 들뢰즈의 책이 데리다의 책보다 더 접하기 쉬운데, 이는 들뢰즈 철학을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들뢰즈의 창' 시리즈도 한 몫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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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27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들을 보니 열공하고 싶은 마음이 팍팍 드네요.
독서 계획표를 짜야겠어요. 스피노자, 칸트, 들뢰즈, 니체 등
책을 읽다 보면 많이 거론되는 분들이네요.

겨울호랑이 2020-09-27 21:41   좋아요 0 | URL
‘들뢰즈의 창‘ 시리즈는 들뢰즈의 시각에서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철학자들의 사상을 잘 정리한 책들이라 여겨집니다. 페크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

바람돌이 2020-09-27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설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힐것 같은데 막상 저들의 오리지널 책을 들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구요. ㅎㅎ 무슨 새로운 개념들이 그리 많은지..... 전 겨울호랑이님 해설로 만족하겠습니다. 페크님도 겨울호랑이님도 화이팅하셔서 무지한 저에게 기쁨을주세요. ^^

겨울호랑이 2020-09-27 21:45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뿐 아니라 저를 포함한 대다수의 독자들이 철학자들의 사상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대강의 의미를 이해하고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면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들로서는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는 낯설어도 자주 접하다보면 글의 의미를 터득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책을 펼쳐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