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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311 B187 미적 대상들을 그러한 것으로 판정하기 위해서는 취미가 필요하나, 미적 기예[예술] 그 자신을 위해서는, 다시 말해 그러한 대상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천재가 필요하다... B188 자연미는 하나의 아름다운 사물이며, 예술미는 사물에 대한 하나의 아름다운 표상이다.(p344) <판단력 비판> 中


V307 B181 천재란 기예에 규칙을 주는 재능(천부의 자질)이다. 이 재능은 기예가의 선천적인 생산적 능력으로서 그 자신 자연에 속하므로, 사람들은 또한 "천재란 선천적인 마음의 소질[才質]로서, 그것을 통해 자연은 기예에게 규칙을 주는 것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p338) <판단력 비판> 中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 > 중 <숭고의 분석학> 편에서 미(美, 아름다움)을 판정하기 위해서는 쾌/불쾌의 취미가 필요하지만,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천재(天才)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천재를 통해 자연이 기예에게 규칙을 주고 이로 인해 아름다움이 일어난다는 칸트의 말에서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BC 43 ~ AD 17)의 <변신 이야기 Metamorphoses> 중 유명한<퓌그말리온의 기도 Pygmalion's prayer>를 떠올리게 된다.


퓌그말리온은 눈처럼 흰 상아를 놀라운 솜씨로 성공적으로 

조각했는데, 이 세상에 태어난 어떤 여인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는 

없었소. 그는 자신의 작품에 그만 반해버리고 말았소. 

그 얼굴은 진짜 소녀의 얼굴이었소. 그대는 그녀가 살아 있다고, 

곧은 행실이 막지 않는다면 움직이고 싶어한다고 믿었으리라. 그만큼 그의 작품에는 기술이 들어 있었소.(p477)  (247 ~ 252) <변신이야기>10권 <퓌그말리온의 기도>中


퓌그말리온이 마치 진짜 사람처럼 만든 소녀의 얼굴은 칸트의 설명대로 자연으로부터 부여 받은 기예의 규칙 덕분에 자연을 잘 모사했을것이고(복제품), 이로 인해 오비디우스의 말처럼 퓌그말리온의 소녀상은 아름다움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퓌그말리온의 소녀상은 아름다운 예술품이지, 사람은 아니었다. 소녀상(像)은 퓌그말리온의 상상력을 구체화한, 인간의 모사품이었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복제(複製)에 대해 말한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 ~ 1940)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barkeit>을 찾아보자.

 

 1900년 전후에 기술적 복제는 그것이 전승된 예술작품 전체를 대상으로 만들고 예술작품의 영향력에 심대한 변화를 끼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의 작업방식에서 독자적인 자리를 점유하게 될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p102)<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中


 벤야민은 1900년대 사진 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많은 모사품을 양산한 당대의 현실에 주목하고, 기술적 복제로 인해 사물의 역사적 증언 가치, 사물의 권위, 아우라(Aura)가 빠져나감을 지적한다. 반대로, 아우라는 원본만이 가질 수 있는 독창적인 것이겠다. <퓌그말리온의 기도>에서 소녀상은 사진은 아니지만, 사람을 모사한 복제품이라는 점에서 아우라가 없는 존재다.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 원작(Original)이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이 원작의 진품성(眞品性)이라는 개념의 내용을 이룬다. 진품성의 영역 전체는 기술적 복제의 가능성에서 벗어나 있고, 물론 기술적 복제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복제의 가능성에서도 벗어나 있다.(p104)...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 가치는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복제의 경우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손을 떠나게 되면 사물의 역사적 증언 가치 또한 흔들리게 된다. 이로써 흔들리게 되는 것은 사물의 권위이다.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을 아우라(Aura, 독특한 분위기)라는 개념 속에 요약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p106)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中


 퓌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작품(소녀상)의 아름다움에 빠져 여신 베누스(아프로디테)에게 '내 상아 소녀'를 닮은 여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렇지만, 그의 본심을 알고 있던 여신은 소녀상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이들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림] Pygmalion and Galatea(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ygmalion_and_Galatea_(Normand).jpg)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 곧장 자신의 소녀의 상(像)을 찾아가서

침상 위로 머리를 숙이고 입맞추었소. 소녀가 따뜻하게 느껴졌소.

그는 다시 입을 가져가며 손으로는 가슴을 만져보았소.

그가 만지자 상아는 물러지기 시작하더니 딱딱함을 잃고는

손가락들에 눌렸소.(280 ~ 284)...

사랑하는 남자는 소망하던 것을 다시 또 다시 손으로 만져 보았소.

그것은 사람의 몸이었소, 그의 손가락 아래 혈관들이 고동쳤소.(p479) (288 ~ 289) <변신이야기>10권 <퓌그말리온의 기도> 中


 사랑하는 남자의 기도로 생명력을 얻게 된 소녀상. 신의 능력으로 소녀는 아름다운 조각상에서 아우라 넘치는 존재로 태어나게 되고, 퓌그말리온에게 아름다운 존재에서 숭고한 존재로 거듭난다. 칸트는 개념없이 필연적인 흡족의 대상으로서 인식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다른 것과 비교하면 다른 모든 것이 작아지는 것이 숭고함이라고 <판단력 비판>에서 설명한다. 다만, 숭고함은 밖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 있기에, 소녀상이 여인 갈라테아(Galatea)로 변화한 것은 아름다움에 숭고함이 더해진 것이라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아우라는 2+1으로 주어진다. 적어도 퓌그말리온 개인에게는.


V256 B95 진정한 숭고함은 오직 판단하는 자의 마음에서 찾아야지, 그것에 대한 판정이 마음의 그러한 정조를 야기하는 자연객관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마음은 그러한 것들을 고찰함에 있어 그것들의 형식은 고려함이 없이 상상력에 대하여, 그리고 전적으로 일정한 목적 없이 상상력과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상상력을 순전히 확장하는 이성에 대하여 자신을 내맡겨서, 그럼에도 상상력의 전체 힘이 이성의 이념들에 걸맞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면, 자기 자신의 판정에서 마음은 고양됨을 느낀다.(p264) <판단력 비판> 中


 소녀상은 이제 아름답고 숭고한 그리고 유일한 존재인 '갈라테아'가 되어 아우라도 갖추게 되었다. 칸트의 말에 따르면 숭고함은 이성(理性)과 연결된다. 이제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아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별 문제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사회적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퓌그말리온에게 갈라테아는 이성적 존재가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퓌그말리온이 느낀 숭고함을 가지지 못한다면(즉, 숭고함의 객관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갈라테아는 같은 이성적 존재로 공인(公認)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퓌그말리온의 주관적인 숭고함이 객관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는 퓌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조각상에 빠진 소위 '히키코모리 + 오타쿠'에 불과하게 된다. 


 이제 불쌍하게 오해받게 된 퓌그말리온을 구해보자. 칸트는 이러한 사태를 예견했는지 <순수 이성 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 에는 이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다.


A197 B242 우리는 우리 자신도 의식할 수 있는 표상들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 이 의식은 원하는 만큼 확장될 수도 있고, 정밀하고 정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은 오로지 언제나 표상으로, 다시 말해 이 시간관계 또는 저 시간관계상에 있는 우리 마음의 내적 규정들로 머문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이 표상들에다 하나의 객관을 세우기에 이르는가? 바꿔 말해, 변양들인 표상들의 주관적 실재성을 넘어 표상들에다 내가 모르는 어떤 종류의 객관성을 부가하기에 이르는가? 객관적 의미는 다른 어떤 표상과의 관계에서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다시금, 어떻게 이 표상이 또한 그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마음 상태의 규정인 표상에 고유한 주관적 의미를 넘어 객관적 의미를 얻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될 것이니 말이다. '한 대상과의 관계맺음' 이라는 것이 우리 표상들에게 대체 어떤 새로운 성질을 부여하며, 우리 표상들이 이를 통해 갖게 되는 권위는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가 탐구한다면, 우리는 한 대상과의 관계맺음이란 다름아니라 표상들의 결합을 일정한 방식으로 필연적이게 한다는 것, 그리고 표상들을 하나의 규칙에 종속시킨다는 것을 안다. 뒤집어 말해, 우리는 우리의 표상들의 시간관계에서 일정한 순서가 필연적임에 의해서만 우리의 표상들에게 객관적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을 안다.(p431) <순수 이성 비판 > 中


 해당되는 내용은 길었지만, 간략하게 줄이면 다른 사람들도 퓌그말리온 집에 와서(공간적 경험) 동시에 갈라테아를 보고(시간적 경험), 사람임을 인정한다면(범주) 같은 시공간에서의 범주 판단을 통해 미적 판단의 객관적 타당성이 부여될 수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것이다.


 경험이란 '지각에 의하여 객관을 규정하는 인식'이기 때문에, 경험 즉 경험판단은 객관적 타당성을 지니는 판단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경험의 가능성의 근거를 묻는 것은 경험판단의 '겍관적 타당성'의 근거를 묻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경험의 가능성의 형식적 제약으로서의 공간, 시간, 범주에 의해서 비로소 경험(경험판단)이 가능하게 되는 것을 증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p17) <칸트 사전, '객관적 타당성'> 中


 요약하자면, <변신 이야기>에서 퓌그말리온의 기도로 생명력을 얻게 된 갈라테아. 아름다운 소녀상에서 (퓌그말리온에게) 숭고한 존재로 거듭나면서, 다른 조각품에는 없는 아우라를 획득하게 되었다. 갈라테아가 획득한 아우라는 이 경우 숭고함과 연결된 이성(reason)으로 볼 수 있겠다. 다만, 숭고함이라는 미적 감정이 주관적 판단에 한정된다는 비판에 대해 우리는 같은 시공간에서의 체험을 통해 객관성이 확보될 수 있음을 보았다. 일단 여기에서 멈추도록 하자. 여기에 더해 이성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본유관념(本有觀念)인가 하는 물음까지 나아가면,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와 존 로크(John Locke, 1632 ~ 1704)까지 나와야 하니, 이분들은 다음 기회에 모시는 것으로 하고, 이 정신 없는 페이퍼를 인단 정리하도록 하자...


PS. 퓌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Aphrodite)에게 사랑받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아프로디테의 고향이 키프로스(Cyprus이고, 퓌그말리온이 키프로스의 왕이었던 것과 연결되 보인다. 특히, 그의 손자 아도니스(Adonis는 아프로디테의 연인이었는데, 그가 코린트의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키프로스와 코린트의 갈등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


 키뉘라스는 약간의 백성들을 데리고 퀴프로스(Kypros)에 도착하여 파포스(Paphos) 시를 세우고 그곳에서 퀴프로스 왕 퓌그말리온의 딸 메타르메와 결혼하여 옥쉬포로스와 아도니스를 낳고 이들 외에도 세 딸 오르세디케와 라오고레와 브라이시아를 낳았다. 그의 딸들은 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을 사서 이방의 남자들과 동침하다가 아이귑토스에서 죽었다.(p270)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제3권 14.3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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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7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07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칸트의 3대 비판서인 「순수 이성 비판」, 「실천 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이 각각 진•선•미를 다룬 3부작이라면, 그의 사상적 라이벌 데이비드 흄 역시 「오성에 관하여」, 「도덕에 관하여」, 「정념에 관하여」에서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부족하게나마 칸트를 읽었으니 이들 사상을 비교해 보면서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어가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ps. 당연하겠지만, 국회의원 이나 미스코리아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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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7-05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전 아예 살 생각도 쿨럭... ㅋㅋ

겨울호랑이 2020-07-05 13:28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아직 읽은 것도 아니고 이제 첫 걸음인걸요. 칸트 비판서를 읽긴 했지만, 이해했다고 하기엔 너무도 부족한 현실입니다. 이렇게 해 놓으면 창피해서라도 읽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올렸습니다. 레삭매냐님 감사합니다.^^:)

syo 2020-07-05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돈 받고 하세요..... 알라딘에다가 고료 내놓으라고 하시란 말씀이에요....ㅋㅋㅋㅋㅋ

겨울호랑이 2020-07-05 13:44   좋아요 0 | URL
반사. ㅋ 제 부족한 글을 사줄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보다는 syo님의 재치있는 글이야말로 묶어서 책을 내시는 것이 이웃분들의 바람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2020-07-05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05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0-07-05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히 겨울호랑이님의 지성을 존경합니다^^
한가지 아쉬운것은 제가 이 책들을 읽어낼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0-07-05 16:35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뒤늦게 겨우 밀린 숙제를 했을 뿐인걸요... 저도 겨우 읽긴 했지만, 제대로 소화하려면 몇 십번을 더 읽어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는 제가 말씀을 드리기에는 조심스럽지만, 조금 재미없음을 감수하신다면 투자한 시간이 절대 아깝지 않은 독서 시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솔직하게는 생각보다 재미없습니다....)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음미하려고 하는 더욱 세련된 감정은 주로 두 가지 종류인데, 숭고함의 감정과 아름다움의 감정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감정에서 생겨난 감동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기분 좋게 angenehm 한다.... 숭고함은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매료시킨다.(p15)... 숭고한 것은 언제나 반드시 거대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숭고한 것은 단순한 것이 틀림없고, 아름다운 것은 장식적이고 치장된 것일 수 있다.(p16)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채용된 덕들 adoptierte Tugende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순수한 덕 die echte Tugend은 숭고하고 존경할 만하다. 우리는 전자의 느낌을 지배하고 있는 심성을 선한 마음씨라 부르고, 그런 마음씨를 가진 부류의 사람들을 마음이 곱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원칙에 따라 덕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고귀한 마음씨를 가졌다고 하며, 그런 사람만을 정의로운 사람이라 부른다.(p31)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Beodachtungen u"ber das Gefu"bl Scho"nen und Erbabenen >에서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 ~ 1804)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만들어 내는 감정과 이들의 혼합과 균형이 세상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를 설명한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 ~ 1797)의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를 떠올리게 하는 책 제목 속에서 우리는 칸트의 미학(美學)을 엿볼 수 있다.


 두 가지 감정을 자기 안에서 하나로 조화시킨 사람들은 숭고함의 감동이 아름다움의 감동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점과, 그리고 아름다움에서 비롯한 감동의 수반이나 변형이 없다면 숭고함의 감동도 사라져버리고 그 즐거움 또한 오래 갈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p21)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숭고함이나 아름다움의 그 어떤 성분도 특별히 눈에 띌 만큼 점액질적인 혼합물에 속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 고유한 심성은 우리가 고려하려는 맥락에 속하지 않는다.(p42)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칸트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인간의 본성(本性)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고, 이들을 축으로 인간을 성(性),별, 민족(民族) 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2장 - 인간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성질에 관해 - 에서 인간의 성격은 이들 요소가 어떤 비율로 혼합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가를 설명하는데, 칸트의 이러한 설명은 마치 <필레보스 Phile'bos>에서 플라톤(Platon, BC 428 ~ BC 427)이 '좋은 것'을 '즐거움(쾌락)'과 '지혜'의 혼합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한 것을 연상시킨다. 플라톤이 적정한 혼합을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듯, 칸트 역시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적절한 조화를 가장 높은 가치로 쳤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에서 숭고함은 아름다움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은 중국의 <주역 周易 >의 영향을 받은 듯 음(陰)과 양(陽)을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이름으로 설명한 느낌을 준다. 이는 칸트보다 한 세대 앞선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 ~ 1716)가 <주역>에 관한 주석을 달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혀 근거가 없는 추측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다... 3장 - 여성과 남성의 상호 관게에서의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구별에 관해 - 과 4장 - 숭고함과 아름다움의 열어 감정에 기인하는 한에서의 민족 특성에 관해 - 에 담긴 칸트의 사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영구평화론 Zum ewigen Frieden. Ein philosophischer Entwurf >의 저자와 같은 저자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차별주의자 칸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대체로, 이러한 차별은 당대 유럽 문화의 특성에 원인을 두었겠지만.


 여성을 아름다운 성 das schone Geschlecht이라고 정의한 사람은 어쩌면 그들에게 아첨하고 싶어 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그는 자신이 믿고 있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적절하게 표현했다.(p51)... 아름다운 성은 남성만큼이나 지성을 갖추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아름다운 지성 ein shoner Verstasnd일 따름이다. 반면에 남성의 지성은 심오한 지성 ein tiefer Verstand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숭고함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p53)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여러 민족들을 생각해볼 때 나는 이탈리아인과 프랑스인은 대개 아름다움의 감정의 측면에서 다른 민족과 구별되고, 독일인과 영국인 그리고 스페인인은 흔히 숭고함의 감정에서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다고 생각한다.(p79)... 독일인들은 운 좋게도 숭고함에서나 아름다움에서나 모두 잘 혼합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숭고함의 감정에서 영국인과 같지 않고, 아름다움의 감정에서 프랑스인과 다르다면, 그런 두 가지 감정들을 결합시키려 할 경우 독일인은 양 자 모두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p85)... 아프리카의 니그로는 본래 유치함을 넘어설 만한 감정이라고는 갖고 있지 못하다... 두 인종간의 차이는 본질적이며, 그것은 피부색에서와 마찬가지로 심성의 역량에서도 크게 나타난다.(p93)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독일 남성이 아니면 글을 읽기 심히 불편한 부분이 있고, 여기에 더해 다분히 국뽕 MSG가 물씬 첨가된 느낌을 주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이 쓰여진 년도가 프로이센이 전성기에 있던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sse, 1712 ~ 1786)의 치세 시기인 1765년도 쓰여진 것임을 생각해본다면, 완전히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당시 프로이센은 7년 전쟁을 통해 떠오르는 신흥강대국이 되고 있었으니, 조국의 미래에 대한 낙관이 칸트에게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동시에, <영구 평화론>은 프로이센이 프랑스에게 연패를 당하고 거의 몰락하던 시기에 쓰여진 저작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시대상황이 칸트의 사상에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이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칸트의 작품 안에 담긴 유럽의 근대사상의 한계와 함께 나아가 일본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본질을 거칠게나마 그려보는 것으로 그치자.


 [그림] Frederick the Great( 출처 : https://withberlinlove.com/2014/08/03/sunday-documentary-frederick-the-great-and-the-enigma-of-prussia/)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별 관계를 살펴보면, 오직 유럽인들만이 강력한 경향성의 감각적인 매력을 수많은 꽃들로 장식했으며, 그들만이 그것을 여러 도덕적인 것들과 엮어놓은 비밀을 발견할 것이다.(p94)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 中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은 칸트의 저작 중 비교적 쉽게 읽히는 책이다. 그렇기에, 다른 책과 함께 비교해서 읽는 것이 즐겁게 읽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예를 들면,  이 책에 영향을 준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비교해서 읽어도 좋을 듯하다. 또한, 칸트의 생애 내에서는 초기 저작에 속하는 이 책과 비교해서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 >을 보는 것도 의미있을 듯하다. 프랑스 대혁명(1789) 이후 노철학자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대한 생각은 과연 얼마나 바뀌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밌는 지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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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8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8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6-08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유발 하라리의 <극한의 경험>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과 함께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숭고함도 일종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
결국 요즘 주로 드는 생각은 ‘칸트가 죽어야 인류가 산다’는 느낌입니다. ‘ ㅎㅎ

겨울호랑이 2020-06-08 21:2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극한의 경험>은 예전에 읽어보았는데, 숭고함의 측면에서는 미처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을 들으니,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추천해주신 <여행의 기술>은 처음이지만, 곁들어 읽어봐야겠습니다.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면에서 칸트가 근대를 대표하는 인물인만큼 근대를 넘어서기 위해서 칸트를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anti-칸트‘가 아닌 합리론과 경험론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서양철학을 대신할 새로운 시대의 철학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도 여겨집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0-06-08 21:33   좋아요 1 | URL
네ㅎㅎ... 겨울호랑이 님께서 이미 <극한의 경험> 읽으신 거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 나름 ‘극한의 경험’=‘숭고함의 경험’으로 읽어서 기억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칸트가 오랫동안 합리론과 이성 관련 일련의 책을 쓴 이유 중 하나가 데이비드 흄 이론을 뒤집기 위함이었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그렇다면 칸트 이론 정반대인 흄 이론만으로도 칸트 대안으로 이미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여튼 전 칸트가 흄을 극복하지 못 했다고 믿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0-06-08 21:43   좋아요 1 | URL
제가 아직 데이비드 흄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읽어보지는 못해서 대략의 내용만을 알고 있습니다만,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을 듣고 보니 빨리 읽어보고 싶어 집니다^^:) 다만, 흄이 나중에 회의주의에 빠진 것에 반해 칸트는 이성에 대해 낙관하는 편에 서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칸트의 흄에 대한 반박이 충분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6-08 21:46   좋아요 1 | URL
제가 원래 회의주의 책을 좋아하는 탓도 있습니다. ^^
 

 

 차라리 시간은 셋인데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이 셋은 영혼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다른 곳에서는 이것들이 안 보이며,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記憶)이고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注視)이며,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期待)다.(11권 20,26)...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기대에 해당하는 영역은 짦아지고 기억에 해당하는 영역은 길게 연장된다.(11권 28.38)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 ~ 430)에게 '시간'은 인간의 개념이다. 하느님(神)의 시간은 영원이며 불변이다. '시간'과 '공간'마저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창조 이전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시간은 인간에게 있어, '현재'로 존재한다. 우리는 영혼 안에서 시간을 가지고, '미래->현재-> 과거'라는 일련의 흐름으로 통해, 생명의 확장이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끊임없는 시간의  확장을 통해 하느님께  영혼이 흘러간다는 것이 아우구스투스의 '시간론'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연속적으로 바라본다면,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 ~ 1997)에게 시간은 연속적이되 각자 의미를 가진 독특한 상황들로 정리된다. 프랭클은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에서 (의미있는) 시간이 가진 '카이로스'의 특성에 주목한다.


 상황들은 각자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고, 의미도 각자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상황에 대응해 뭔가를 할 가능성"도 각자가 역시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카이로스 Kairos"의 특성을 갖고 있다.... 상황이 부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만 한다면, 상황이 붙들고 있는 의미를 채우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가능성을 현실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한번 하기만 한다면 '영원히' 지속되고, 더 이상 일시성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p61)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 中


 카이로스는 주관의 시간이며, 기회(機會)다. 빅터 프랭클의 말은 이 기회를 잘 살려 적절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순간을 사는 것이 아닌, 영원을 살 수 있다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카이로스에서 흐로노스로의 전환. 이것은 순간의 영원으로의 전환이며, 주관의 시간이 객관의 시간으로 흐름을 의미한다.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에서 흐로노스(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차이를 살펴보면서 다음으로 넘어가자.


 '흐로노스 chronos"는 우리가 잘 아는 베테랑 할아버지, 시간의 아버지 Father Time, 즉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 Kairos"는 완전히 반대의 예측 불가능한 주관적인 시간이다.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바로 아이작 뉴턴이 얘기하는 시간의 특징 aquabiliter fluit - 즉, 강의 물이 항상 일정하게 흐르듯 영원히 고정된 시간이 바로 흐로노스이다.(p35)... 그에 반해서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흔히 "기회 opportunity"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일정하게 아주 "적절한 때 right timing"을 의미한다. 흐로노스가 신적인 우주의 영원한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인간세상의 찰나, 즉 짤막한 현재의 시간이다.(p37)'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 中


 빅터 프랭클은 각 시간이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과거에 우리의 지나간 삶이 담긴 저장소라 해석한다. 그런 면에서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연속적 시간론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간 시간(과거) 속에서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고, 아무것도 잃어버릴 게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과거에 영원히 저장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일시성의 그루터기가 가득한 황야만 본다... 의미들은 독특하고 유일하기 때문에 영원히 변한다. 그러나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삶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p62)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 中


 반면,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 ~ 1995)의 시간론은 철저한 분리를 전제 한다. 레비나스 초기 철학에서 자아는 현재에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을 '홀로서기(hypostase)'는 말로 표현하면서, 연속적인 흐름보다는 관계성(關係性)에 주목한다. 이는 레비나스 철학 중 '타자와의 대면'으로도 연결되겠지만, 리뷰 몫으로 넘기도록 하자.

 

 지금, 곧 현재는 과거와의 단절을 전제한다. 현재라는 순간에 사람은 홀로 선다. 현재는 언제나 지나가기 때문에 홀로서기를 우리는 언제나 확인해야 한다. 홀로서기는 과거를 통해 설명될 수 없다. 현재는 항상 새로운 시작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한 순간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새로운 시작으로 긍정하는 그 무엇, 곧 자아(自我)와 관계한다. 자아는 현재 이 순간에 그 무엇, 곧 자아(自我)와 관계한다.(p128) <시간과 타자, 해설> 中


 과거와의 관계를 끊음으로서 새롭게 생명을 얻는 자아(自我). 이러한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레비나스의 시간론은 단속적(斷續的)이라는 면에서 아우구스티누스, 프랭클의 연속적(連續的) 시간론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한다.


 현재는 자기하고만 관계한다. 자유를 가지고 현재를 눈부시게 해야만 했던 이 관계는, 그러나 현재를 동일화 속에 가두어버린다. 과거에 관해 자유로우나 그 자신의 포로가 되어 있는 현재는, 현재가 연루되어 있는 존재의 무게를 생생하게 나타낸다. 현재가 과거와 단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력은 현재의 한가운데에 있다. 현재를 으스러뜨리는 숙명은 현재를 [과거로부터] 상속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숙명은 현재를 [과거로부터] 상속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숙명은 현재에게 강요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현재는 탄생을 선택하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이다.(p133) <존재에서 존재자로> 中


 이처럼 레비나스와 프랭클의 시간론은 다소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독일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가진 삶과 죽음의 극한(極限)을 봤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사선(死線)을 넘어서 레비나스가 '존재와 존재자'를 발견했다면, 프랭클은 '의미'를 찾는다. 같은 경험에서 나온 다른 깨달음. 이제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 <존재에서 존재자로>로 넘어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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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5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5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5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신이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매번 정신은 스스로를 넘어서는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심각한 불안감을 느낀다. 정신이라는 탐색자는 자기 지식이 아무 소용없는 어두운 고장에서 찾아야만 한다. 찾는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창조해야 한다.(p8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찾기 Recherche'에서 본질적인 것은 마들렌 과자나 포석들(鋪石) 안에 있지 않다. 한편으로 '찾기'는 단순히 추억해 내고자 하는 노력, 기억에 대한 탐색이 아니다. '찾기'는 '진리 verite 찾기'라는 표현에서처럼 그 말이 지닌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른 한편 잃어버린 시간 le temps perdu은 단지 지나간 시간 le temps passe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리는 (낭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기억이 찾기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수단은 아니다.(p20)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 ~ 1995)는 <프루스트와 기호들 Proust et les signes>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내용을 '진리 찾기'로 규정한다. 그렇지만, 진리는 결코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들뢰즈에 따르면 진리는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기호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기호의 폭력이 난무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진리는 결코 미리 전제된 선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사유 안에서 행사된 폭력의 결과이다. - 이것만큼 프루스트가 강조한 테마는 거의 없다. 명시적이고 규약적인 의미는 결코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외현적(外現的)인 기호가 감싸고 있고 그 기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런 의미 sens 만이 오로지 근본적이다... 마주침의 [속성인] 우연과 강요의 [속성인] 압력을 프루스트의 두 가지 근본적인 테마이다. 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p41)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그렇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진리를 찾는 이는 누구인가? 들뢰즈는 사랑에 빠졌지만, 애인(알베르틴)의 거짓말로 고통받는 이가 진리를 찾는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사교장, 공연장 등에서 수많은 기호들의 압력을 받으며 진리 찾기를 강요받는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 슬펐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았고, 나 이상으로 자신에게 엄격하면서도 관대한 그녀는,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날 떠난다면 내가 더 이상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질투를 느낀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고 믿었다.(p35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中 


 <누가> 진실을 찾는가? 그리고 <나는 진실을 원한다>라고 할 때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프루스트는 인간이란, 설령 순수하다고 가정된 정신이라 할지라도, 참된 것에 대한 욕망, 진실에 대한 의지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우리가 진실을 찾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리고 우리를 이 진실 찾기로 몰고가는 어던 폭력을 겪을 때만 우리는 진실을 찾아 나선다. 누가 진실을 찾는가? 바로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가는 어떤 기호의 폭력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진실은 친화성 affinite이나 [진리를 인식하고자 하는 인식 주체의 자발적인] 선(善) 의지를 통해서 찾게 되는게 아니다. 진실은 비자발적인 기호들로부터 <누설되는 것이다>(p40)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내 소년 시절을 통해 메제글리즈가 이미 더 이상 콩브레 토양과는 닮지 않은 땅의 기복 탓에 멀리 가면 갈수록 시야에서 사라지는 지평선처럼 접근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면, 게르망트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것으로, 그 '길'의 종점과도 같은, 적도나 극지방, 혹은 동양처럼 일종의 추상적이고 지리적인 표현이었다... 나는 그 두 길을 서로 다른 두 실체로 간주하며 오로지 정신적인 창조물에만 속하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했다.(p238)... 나는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을, 내 정신적인 토양의 깊은 지층으로, 아직도 내가 기대고 있는 견고한 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p31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진리 찾기라고 규정한다면, 이는 기호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실적인 메제글리즈와 관념적인 게르망트. 이들은 배움의 두 측면이며, 주인공(혹은 화자)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배움을 펼친다는 것이 들뢰즈의 해석이다. 그리고, 진리 찾기의 방향은 미래로 향한다.


 이 책은 어떤 배움 apprentissage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는 한 작가의 배움의 과정의 이야기다. 메제글리즈 Meseglise 쪽과 게르망트 Guermantes 쪽은 추억의 원천들이라기보다는 배움의 원료들이자 배움의 선(線)들이다. 그것은 수련 formation의 두 측면이다.(p22)... 이 배움은 배움의 목적들과 원리들을 통해서 [수단인] 기억을 넘어선다. '찾기'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 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석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放出 emettre)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p23)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 삶의 수많은 작은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나란히 보내는 여러 다양한 삶 중에서도 가장 변화가 많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지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이 삶은 우리 안에 서서히 진행되어, 우리를 위해 의미와 양상을 변화시켜주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진리 발견을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고,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채로 준비해온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 눈에 보이게 된 날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p31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또한, 들뢰즈는 기호들의 세계에서 궁극적인 기호인 예술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작가를 지망하는 주인공에게는 문학이 궁극적인 기호로 작용하며, 예술을 통해서만 진리는 비로소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예술의 세계는 기호들의 궁극적인 세계이다. 예술의 세계에서의 기호들은 <물질성을 벗은>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은 관념적 본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예술의 세계에서 기호들의 의미를 깨달은] 그때부터,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는 [먼저 거쳐 온] 다른 모든 세계들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감각적 기호들에 대해서 그렇다.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들은 감각적 기호들을 자기의 일부로 편입한다.(p37)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기호와 의미의 진정한 통일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본질이다. 그리고 기호가 자신을 방출하는 대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한에서 본질은 기호를 구성한다. 또 의미를 파악하는 주체에게로 의미가 환원되지 않는 한에서 본질은 의미를 구성한다. 배움의 과정에서 최종적 결론 혹은 최종적으로 깨닫게 되는 계시가 바로 본질이다.... 오로지 예술의 층위에서만 본질은 드러난다.(p68)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내 의식은, 내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열망에서부터 저기 정원 끝 내 눈앞 지평선 너머 보이는 곳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 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 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스크린에서 우선 내게 가장 내밀하게 느껴진 것,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지배하던 손잡이는, 바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철학적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었다.(p15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그렇다면, 시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진실은 시간안에서 우리에게 인식되기에, 시간을 빼놓을 수 없다. 들뢰즈의 네 가지 시간 구조는 각각의 진실을 가지고 있으며, 주인공은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부르는 헛되이 보내버린 시간의 의미를 찾는 것. 예술을 통한 절대적인 시간의 획득. 이것을 들뢰즈는 배움의 성과로 해석한다.  


 진실을 찾는 것은 해석하고 해독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기호  그 자체의 전개와 섞여 버린다. 바로 이 때문에 '찾기'는 항상 시간에 관계하며, 진실은 항상 시간의 진실이다... 이 점에서 중요한 구별은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의 구별이다. 되찾은 시간의 진실 못지 않게 잃어버린 시간의 진실도 있다. 하지만 더 분명하게는 각기 저마다의 고유한 진실을 가지고 있는, 시간의 네 구조를 구별하는 것이 적절하다.(p42)... 헛되이 보내 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p47)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우리가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그뿐 아니라 되찾는 시간과 되찾은 시간 등의 시간선들이 있다. 각각의 종류의 기호들은 확실히 [각각에 있어서] 특권적인 어떤 시간선에 상응한다. 사고계의 기호들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함축한다. 또 사랑의 기호는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감싸고 있다. 감각적 기호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되찾게 해주며, 그 시간을 잃어버린 시간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 마지막으로 에술의 기호는 우리에게 되찾은 시간을 준다. 이 되찾은 시간은 다른 모든 시간들을 포함하는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이다.(p51)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시간이란 이미 펼쳐져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즉 시간이 그에 맞추어 전개될 서로 구별되는 차원들은 아직 없으며 또 시간이 그 안에서 서로 다른 리듬들에 맞추어 분포될 서로 분리된 계열들조차 아직은 없다... 예술이 우리에게 되찾도록 해주는 것은 본질 속에 휘감겨 있는 시간들, 즉 본질로 감싸여진 세계 속에서 태어나는 시간들이다. 이 시간들은 영원과 동일하다... 우리에게 시간을 되찾게 해주는 것은 예술 작품밖에 없는 것이다. 예술 작품은 최고의 기호돌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의미는 근원적인 복합, 진정한 영원,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 속에 있다.(p79) <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잠든 사람은 자기 주위에 시간의 실타래를, 세월과 우주의 질서를 둥글게 감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생각해 내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위치한 지구의 지점과,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시간을 금방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서는 뒤섞일 수 있으며, 끊어질 수도 있다.(p19)... 이제 나는 확실히 잠에서 깨어났다. 내 몸은 마지막으로 한 바퀴 빙 돌더니, 확실성이라는 착한 천사가 내 주위 모든 것을 고정해 나를 내 방 이불 아래 갖다 눕혔고, 어둠 속에서 내 옷장, 책상, 벽난로, 길가 쪽 창문, 두 문을 대충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p2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들뢰즈의 주장을 요약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헛되이 보낸 시간의 의미를 찾는 배움의 과정으로, 주인공이 맞게 되는 수많은 기호 중 예술이라는 궁극의 기호를 통해 진실을 발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들뢰즈에게 (절대적) 시간은 진실이 표현되는 다른 차원이며, 진실 찾기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들뢰즈의 추론은, 단지 '되찾은 시간'을 비의지적인 기억 memoire involontaire의 경험과 혼동하는 해석,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비의지적인 기억의 단편적이고 우발적인 경험에는 결여되어 있는 풍성함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에 부여하는 기나긴 각성의 체득을 무시하는 해석들을 무너트릴 뿐이다... 예술 작품의 초시간적 extra-temporel인 차원을 발견하는 것은 기호의 체득에 비해 아주 독특한 경험이 된다. 결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비의지적인 기억이나 기호의 체득과 동일시 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두 층위의 경험과 화자가 거의 삼천 페이지에 이르는 작품의 끝에서야 뒤늦게 베일을 벗기는 전대미문의 경험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바로 시간에 관한 이야기라 말할 수 있게 된다.(p273) <시간과 이야기2> 中


 이에 반해, 폴 리쾨르(Paul Ricoeur, 1913 ~ 2005)는 <시간과 이야기 Temps et Re'cit>에서 들뢰즈와 의견을 달리한다. 배움의 끝에 '헛되이 보낸 시간'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들뢰즈의 의견과는 달리, 리쾨르는 '되찾은 시간' 속에서 주인공과 화자라는 두 개의 목소리가 통합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되찾은 시간에서 이루어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주인공의 목소리와 화자의 목소리라는, 적어도 두 개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주인공은 세속적이고, 애정적이고, 감각적이고, 미적인 모험들을 그것이 닥쳐오는 대로 하나씩 이야기한다. 여기서 언술 행위는,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할 때조차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형태를 택하고 있다. 그 결과 결말을 향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투사하는 "과거 속에서의 미래"라는 형태가 생겨났다. 이 점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화자의 목소리와 구별하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화자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에 의해 이야기되는 경험에 되찾은 시간과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의미를 두게 한다는 것이다.(p279) <시간과 이야기2> 中


 초시간적 존재(l'etre extra-temporle)로 주인공을 내려다 보고 있는 화자, 그리고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인공. 이들이 '되찾은 시간'에서 '글을 쓰겠다는 결정'을 통해 영원성이 시간성을 갖게 되는 것으로 리쾨르는 해석한다. 잃어버린 시간은 되찾은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온전히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화자의 절대적 현재로부터 두 단계 멀어지게 되는 유년기의 추억은 바로 비몽사몽의 과거 속에 삽입되는 것이다. 그 추억들은 마들렌 과자의 경험이라는 독특한 삽화를 중심으로 연결된다. 이 삽화는 그 자체가 표면과 이면을 가지고 있다. 즉, 표면적으로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추억들이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하다.(p281)... 우리는 의지적인 기억의 취약함을 선언하고 잃어버린 대상을 다시 발견하는 일을 우연에 맡기는 화자의 진술을 통해, 이 삽화의 표면에서 이면으로 옮겨가게 된다.(p282)... 화자가 유보시키고 있는 표지는 <되찾은 시간>에서 결말을 알고 다시 책을 읽을 때 그 의미와 효력을 갖게 된다.(p283) <시간과 이야기2> 中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p89)...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그것이 레오니 아무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아주머니의 방에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p9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되찾은 시간이라는 말은 때로는 초시간적인 것을, 때로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행위를 가리킨다. 오로지 글을 쓰겠다는 결정만이 되찾은 시간의 의미가 갖는 이원성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p300)... 글을 쓰겠다는 결정은 이처럼 근원적 전망에서 비롯된 초시간적인 것을, 잃어버린 시간이 되살아나는 시간성으로 옮긴다는 효력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되찾은 시간이 갖는 한 가지 의미 작용에서 다른 의미 작용으로의 이행을 이야기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그것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p301) <시간과 이야기2> 中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단지 의지적인 기억, 지성의 기억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이런 기억이 과거에 대해 주는 지식은 과거의 그 어떤 것도 보존하지 않으므로 나는 콩브레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마음조차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내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p84)... 영원히 죽은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에는 많은 우연이 개입한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라는 두 번째 우연은 첫 번째 우연의 은총을 오래 기다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p8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리쾨르의 주장을 요약하면, 화자와 주인공의 서로 다른 층위의 경험은 되찾은 시간 안에서 예술(글을 쓰겠다는 결정)을 통해 만나게 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품 후반부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독자들은 작품을 처음부터 새롭게 바라볼 것을 요구받게 된다. 초시간의 시간화. 결국, 들뢰즈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진실찾기'로 '근원적인 절대적 시간'을바라봤다면, 리쾨르는 '화자와 주인공의 시간속에서의 통합'으로 해석하며 '초월적 시간'의 '시간화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들뢰즈의 시간방향이 미래로 지향한다면, 리쾨르의 시간방향은 되찾은 시간의 이행을 의미하기에 과거로 지향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들뢰즈에게 시간은 진실찾기 끝에 도달한 결론인 반면, 리쾨르에게 (되찾은) 시간은 진실찾기의 출발점이 된다. 알파와 오메가. 
















이들의 해석은 이처럼 차이가 있음에도, 새로운 2020년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이들의 해석이 모두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 삶을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의미 찾기 과정으로 본다면, 우리는 많은 시간을 흘러 보냈고, 보내고 있으며, 맞이한다. 그리고, 과거-현재-미래의 삶의 의미는 우리와 주변의 상황들에 의해 기호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의미를 각각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들뢰즈의 관점이라면,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신 앞에서 선 단독자로서 영원의 상 아래에서 우리 삶을 조망하며 삶을 재해석하는 것이 리쾨르의 방식이 아닐까.


 2019년과 그 이전의 시간들을 매 순간 정리할 수 있겠지만, 개인의 삶의 끝에서 바라본 모습과 의미는 또 다를 것이다. 비록 지금은 2019년을 보내면서 아쉬운 점이 많은 한 해로 기억하겠지만, 혹시 누가 알겠는가. 먼 훗날에는 2019년이 내 인생의 분기점으로 기억될런지. 한 해를 보내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바라보는 들뢰즈와 리쾨르의 관점을 통해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며 한 해를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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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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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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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8: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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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0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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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7: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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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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