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론>의 저자가 내가 박수갈채를 보낸 수백 가지 훌륭한 것을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우리의 체계는 매우 다르다. 우리 각자의 의견이 많은 점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두 고대인들 각각의 이론과 거리가 있기도 하지만 그의 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더 가깝고 나의 체계는 플라톤에 더 가깝다. 그는 더 대중적이고 나는 어떤 경우에 어쩔 수 없이 약간 더 난해하고(acroamatique) 더 추상적이다._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신인간지성론 1 >, p20


 존 로크 (John Locke, 1632 ~ 1704)의 <인간지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 ~ 1716)의 <신인간지성론 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이 두 권의 책의 관계는 이란성 쌍둥이와 같다. 본유관념으로부터 시작해서 학문의 분류에까지 같은 목차를 공유했다는 점에서 형식적으로는 일치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각각 경험론과 합리론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내용상으로는 대척점에 있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 BC 384 ~ 322)와 플라톤(Platon, BC 428/427 ~ BC 348/347),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 ~ 1274)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 ~ 430)가 서로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면, 근세에서는  로크와 라이프니츠의 체계가 이들을 대신한다. 여러 주제 중에서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본유관념(innate idea)과 관련한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개인적으로 '경험'과 '관념'을 강조한 이 대목이 <인간지성론>과 <신인간지성론>의 가장 큰 차이를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이제 마음이 이른바 백지(white paper)라고 가정해보자. 이 백지에는 어떤 글자도 적혀 있지 않으며 어떤 관념도 없다. 그럼 어떻게 하여 이 백지에 어떤 글자나 관념이 있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나는 한 마디로 경험(experience)에서라고 대답한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궁극적으로 경험에서 유래한다._존 로크, <인간지성론 1>, p150


 필라레테스  : "영혼이 처음에는 빈 서판(Table Rase)이고 어떠한 기호들도 없으며 어떤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정하는 우리 쪽 사람들은 영혼이 어떻게 관념을 얻게 되는지, 그리고 무엇을 통해서 그렇게 많은 양의 관념을 획득하는지 묻습니다. 이에 대해서 그들은 한 마디로 대답합니다. 경험을 통해서!"


 테오필루스 : 제 생각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는 이 빈 서판은 자연이 허락하지 않은, 그리고 단지 철학자들의 불완전한 개념에 기초한 허구(fiction)일 뿐입니다.... 제가 한 증명에 따르며, 영혼이든 물체든 모든 실체적인 것은 각각의 다른 실체들과 고유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실체는 내재적 명명들(denominations intrinseques)에 의해서 다른 실체와 다릅니다. 저 빈 서판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 빈 서판에서 관념들을 제거하고 난 후에는 거기에 무엇이 남는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_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신인간지성론 1 >, p118


 세상에는 여러 라이벌들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저서에서 상대방들의 주장을 인용하여 비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인간지성론>과 <신인간지성론>과 같이 책 내용 전반에 걸쳐 첨예하게 대립하는 책들은 찾기 어렵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과 '관념'에서 출발한 생각의 차이가 계속 이어지기에, 독자들은 경험론과 합리론의 만날 수 없는 차이를 실감하게 되고, 마치 눈 앞에서 불꽃튀는 두 사상가들의 대결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리뷰에서 다루기로 하자. 


 그동안 정리를 미뤄두었던 <인간지성론>부터 먼저 정리를 시작해서 <신인간지성론>, 코플스턴의 <합리론> <영국경험론>으로 나아가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듯하다. 물론, 마무리는 <칸트>가 되어야 근대철학 마무리가 된다 하겠지만.


 상황을 봐서 번외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 스티븐 핑거(Steven

Pinker, 1954 ~ )의 <빈 서판 Blank State>까지 다룰 수 있다면, 인간 지성과 관련한 고대부터 현대까지 내용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약간 다른 주제지만, 인공지능(AI)과 관련해서는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 1912 ~ 1954)부터 시작해서 다시 정리할 계획을 세워본다. 정말, 독서의 길은 끝이 없는 듯하다. 예전에 이럴 줄 알았더라면... 달라졌을까?...


[출처] 만화 슬램덩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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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7-05 23:3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이렇게 엄청나게 읽고 소화하시는 겨울호랑이님도요?!! 마지막 슬램덩크 대사 저는 더 격하게 공감입니다.😭

겨울호랑이 2021-07-05 23:39   좋아요 4 | URL
에고 아니에요... 예전에 어찌나 놀았던지 요즘은 놀다 지쳐서 책을 봅니다... ㅜㅜ

독서괭 2021-07-06 13:12   좋아요 4 | URL
미미님 글이 제마음이네요ㅋㅋ

五車書 2021-07-06 19:40   좋아요 4 | URL
저 컷에 요즘 제 모습이 담긴 것 같아요…

붕붕툐툐 2021-07-06 21: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너무 멋지셔~ 읽는 책 수준 봐... 하.... 짱짱!!👍👍

겨울호랑이 2021-07-06 21:37   좋아요 3 | URL
에고 아닙니다... 부족함이 많아 책을 읽긴 합니다만... 제것으로 만들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감사합니다^^:)
 

 

<군주론> 25장에서 마키아벨리는 "운이 인간사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마키아벨리는 우리의 자유가 완전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운은 대단히 강력한데다가 "우리 행동의 절반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숙명이 전적으로 운의 손아귀에 안에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없애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의 우리의 자유와 우리에게 속한 영광을 빼앗지 않기 위해 모든 일을 도맡아하려 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고수하며, 우리 행동의 절반 정도는 운의 지배를 받기보다는 순수하게 우리의 통제 아래에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_퀜틴 스키너, <마키아벨리>, p69


 퀜틴 스키너(Quetin Skinner, 1940 ~ )는 <마키아벨리 Machiavelli>를 통해 그의 삶을 '외교관', '군주의 조언자', '자유의 이론가', '피렌체의 역사가'로 구분하고, 각각의 시기를 그의 대표작인 <군주론 II Principe> <로마사 논고 Discourses on Livy>, <피렌체사 Istorie Fiorentine>을 개괄한다. 스키너는 <마키아벨리>에서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를 특히 비중있게 서술하는데, 이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운(運 fortuna)'과 '비르투 virtu'다. 스키너는 마키아벨리가 이들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는 대신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고 해석한다. 구체적으로, '포르투나'와 관련해서는 보에티우스(Ancius Boethius, AD 480~524)와, '비르투'와 관련해서는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 ~ BC 43),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 4 ~ AD 65)와 대립하면서 자신만의 이론을 펼쳤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운과의 동맹을 기대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운의 여신이 우리를 향해 미소 짓게 할 수 있는가? 마키아벨리의 대답은 도덕가들이 이미 내놓은 답변들을 정확하게 되풀이하고 있다. 그는 운의 여신이 용감한 자, "덜 신중하고 더 공격적인" 자의 친구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녀가 주로 비르(vir), 즉 진정한 남자다움을 가진 남성의 비르투에 반응한다는 생각을 발전시켜나간다._퀜틴 스키너, <마키아벨리>, p70


 고대의 저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의 도덕관념에 따르면 통치자로 하여금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고 그에게 영광을 가져다줄 수 있는 주된 자질은 후함, 자비로움, 경건함, 정의감이라는 비르투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비르투를 갖춘 군주란 국가의 보전을 위해 어떤 일이든 기꺼이 필요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리하여 비르투라는 용어는 - 그것이 도덕적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 목표를 달성하게 만들어주는 일련의 자질들을 의미하게 된다._퀜틴 스키너, <마키아벨리>, p109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포르투나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포르투나의 '절대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포르투나는 격정적이며 변화무쌍하며, 비르투가 없는 이들을 경멸하기에, 시의적절한 행동과 기민함, 때로는 상대를 속일 수 있는 양면성 등이 마키아벨리의 비르투에 속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덕목 역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또한 상황에 따라 비르투가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비르투는 절대 덕목이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신념이란 바로 국가를 성공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단서가 상황의 힘을 인정하는 것,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시류(時流)와 조화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의미한다._퀜틴 스키너, <마키아벨리>, p98


 절대 덕목과 절대 질서를 부정하는 마키아벨리의 논리는 <로마사 논고>로 이어진다. <군주론>에서의 비르투가 군주의 덕목이라면, <로마사 논고>에서 비르투는 시민의 자질이다. 때문에, '비르투의 확산'은 <로마사 논고>의 또 다른 주제가 된다.


 마키아벨리는 비르투라는 핵심적인 개념을 분석함에 있어 기본적으로 자신이 <군주론>에서 이미 제시했던 노선을 따라갔다. <로마사 논고>에서는 만일 어느 도시가 위대함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시민 전체가 이와 동일한 자질을 소유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펼쳤다._퀜틴 스키너, <마키아벨리>, p126


 어떻게 해야 비르투라는 핵심적인 자질을 시민들에게 폭넓게 심어줄 수 있을까? 마키아벨리는 좋은 운이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정한다.(p127)... "초기의 운"이 필요한 이유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수립하는 일이 "대중의 비르투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대중의 "다양한 의견들"은 "적합한 정부를 구성하는데" 늘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왕국 혹은 공화국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살아 있는 동안 현명하게 통치하는 한 명의 군주를 갖는 것"보다는 이후의 운이 "대중의 비르투"에 의지할 수 있도록 "국가를 조직할 수 있는 군주"를 갖는 것이다. 국가통치술의 가장 심오한 비결은 어떻게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_퀜틴 스키너, <마키아벨리>, p129


 결국, 마키아벨리는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포르투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비르투를 자신의 주저들인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에서 강조했다. <군주론>에서는 1인 군주의 비르투가 강조되었다면, <로마사 논고>에서는 공화정에서의 시민들의 비르투가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이들간에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공화정에서 시민들의 비르투를 갖추기 위해서는 '불쏘시개' 역할을 할 모범이 될 1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본다면, <로마사 논고>는 <군주정>의 확대된 형태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두 저서 사이에 연속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스키너의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의 삶과 저서를 잘 연결시키는 좋은 입문서다. 이를 바탕으로 마키아벨리를 정리하는 계획을 세워보자. 먼저, 보에티우스, 키케로, 세네카들의 철학 <로마사 논고>의 바탕이 된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개별 리뷰에서 정리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으면 어떨까. 이와 함께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몽테스키외(Montesquieu Charles Louis de Secondat, 1689 ~ 1755)의 <로마인의 흥망성쇠 원인론 Considerations sur les causes de la grandeur des Romains et de leur decadence>을 정리한다면 마키아벨리 사상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 1937 ~ )의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의 어록>을 추가하는 것을 지금은 말리고 싶다.

 

말이 나온 김에 이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페이퍼를 마무리하자.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의 입을 빌려 체사레 보르지아에 대해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대업을 눈 앞에 두고 포르투나의 버림을 받은 비운의 인물'로 그려내며, 마키아벨리가 그의 죽음을 애석해했다고 해석한다. 이는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 어록>등에도 이어지지만, 이는 스키너의 해석과는 다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체사레의 몰락을 가져온 교황 율리우스2세(Iulius PP. II, 1443 ~ 1513)와 같은 수준의 평가를 내리는 반면,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의 카이사르(Imperator Julius Caesar, BC 100 ~ BC 44)의 재현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 상 이를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에 일단은 미루도록 하자. 소설 속 이야기와 사실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은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와 정사 <삼국지 三國志>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은 내가 마지막이길 바란다...


 마키아벨리는 보르자가 가진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흠모했지만, 놀라운 정도로 지나친 자신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1502년 10월 마키아벨리는 "내가 이곳(이몰라)에 있는 동안 수립된 공작의 정부는 그의 좋은 운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듬해 초 그는 더욱 못마땅한 어조로 공작이 여전히 자신의 "전례 없는 행운"에 의존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고 언급했다. 1503년 10월에 다시 한번 보르자를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생겼을 때, 그가 이전에 가졌던 의혹들은 보르자가 가진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확신으로 굳어져갔다._퀜틴 스키너, <마키아벨리>, p33


 마키아벨리는 보르자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판단은 <외교문서집> 못지 않게 <군주론>에서도 부정적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운으로 자신의 지위를 얻었으며", 운이 떠나자마자 그 지위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_퀜틴 스키너, <마키아벨리>,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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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5-23 18: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큰글씨책으로 가지고 있어요. 더클래식 책입니다.
군주가 되었거든 인색하라, 라는 글을 흥미롭게 읽었어요. 고전을 읽는 시간은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시간 같아요.
참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인간은.

겨울호랑이 2021-05-24 06:52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고전에 담긴 인간상이 오늘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그 자체로 인간 본성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는 것이 고전의 매력이라 생각됩니다.^^:)
 

 

스피노자의 성서해석에서 이성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성서 해석은 텍스트의 자료나 역사적 자료를 꼼꼼하게 연구하면서, 사람들이 이성적 능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성서해석과 성서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이성은 <에티카>와 같이 철학이나 정치학 연구를 위해 필요로 하는, 추상적 사유 내지 이를 가능케 하는 고도의 지성이라기보다는 성서를 읽고 나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판단력과 같은 이성이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48 


  <스피노자의 [윤리학] 읽기>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모두 스피노자 철학 입문서로, 스피노자의 개인 철학과 정치 철학이 어떤 관련을 갖는지를 이해시켜준다. <윤리학 (에티카)> 에서 우리는 지성을 사용해서 인간의 욕망을 파악했다면, <신학정치론>에서는 이성을 사용해서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스피노자가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고 급기야 인간의 이성과 지성, 그리고 판단능력을 마비시키는 점이었다... 종교와 신학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비판적 이해를 통해 종교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신학정치론>의 가장 주요한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41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를 통해서 우리는 스피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전반의 내용 즉, 고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신의 뜻이 대리인을 통해 행해진 사례 - 모세 등 - 를 통해, '국가에 의해 제약된 종교', '개인의 자유에 의해 제약된 국가'를 이상적인 정체(政體)로 제시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에 드러난 정치철학은 '자유'라는 자연권을 기반으로 '종교'-'국가'-'개인'의 관계 정립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흐름을 가지고 스피노자 선집에 담긴 스피노자 철학을 리뷰를 통해 보다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페이퍼의 마지막은 저자가 번역한 <신학정치론/정치학논고>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짓는다...


 스피노자는 종교의 본질인 정의와 자비가 오직 통치자의 권리를 통해 법과 권리라는 실질적 힘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주력한다. 이럴 경우, 통치권은 주권을 보유한 사람에게만 있기 때문에 종교는 오직 명령권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만 권리를 통한 실질적 힘을 획득할 수 있으며, 신은 지상의 군주를 도구로 해서만 인간을 다스린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184


 스피노자가 신학과 종교의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한 이유는 바로 종교의 설립이 국가가 제정한 법령에 의해서만 그 존재를 인정받았듯이 종교의 자유 역시 주권자의 명령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의 근거가 되는 생각의 자유는 일종의 자연권에 속한다._최형익,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 읽기>,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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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도 정신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신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알지 못했다"[E, 3부 정리2 주석], 이는 스피노자의 유물론적 원리가 되며, 그것은 내가 다음의 연구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세 가지 논제로 요약될 수 있다. 


 1. 신체의 해방 없이는 정신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2. 집합적 해방 없이는 개체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3. 이런 정리들의 쓰인 형식은 앞서 존재하는 정신의, 영혼의 의도를 현실화하거나 물질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체들 사이의 신체로서 그 자체로 물질적 실존을 소유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22


 워런 몬탁 (Warren Montag)은 <신체, 대중들, 역량 - 스피노자와 그의 동시대인들 Bodies, Masses, Power>에서 신체, 역량, 대중들의 관계를 스피노자 철학의 범위  안에서 '해방'이라는 주제로 따라간다. 그리고,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유물론(唯物論)에서 바라보는 스피노자 철학의 개관을 알게 된다. 본문에는 여러 내용이 있지만, 이번 페이퍼에서는 저자가 말한 세 가지 논제를 중심으로 내용을 따라가 보자.


 1. 신체의 해방 없이는 정신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우리들이 사물들의 탐구에 종사하는 동안에는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결코 어떤 것을 추론해서도 안 되며, 오직 지성 안에만 있는 것들을 사물 안에 있는 것들과 혼동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최선의 결론은 어떤 특수한 긍정적인 본질로부터 또는 참답고 타당한 정의(定義)로부터 도출된다._스피노자, <지성개선론>, p84


 [정리13]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신체이거나, 또는 오직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연장의 양태일 뿐이다._스피노자, <에티카>, p96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 ~ 1677)는 <지성개선론  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에서 추상적인 것으로부터의 추론이 아닌, 지성 안에 있는 것으로부터의 추론에 대해 말한다. 지성으로부터 참된 인식으로의 나아감. 인간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도구들로부터 복잡한 것들을 만들어 내듯, 지성도 타고한 힘으로 지혜의 정점(sapientiae culmen)으로 나아간다. 여기에서 정신과 신체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다. 몬탁은 이러한 스피노자의 인식 위에 해방의 문제를 '신체'와 '신체들의 변용'으로 돌린다. 정신이 신체와 동일하다면, '신체의 해방 없이는 정신의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임은 지극히 당연하다.


 해방에 이르는 길은 다른 곳, 대답을 전제하지 않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신체들에 대해 정신들을 더 이상 초월적인 것으로 고려하지 않았을 때, 정신적 결정들, 의지의 행위들이 자신의 창조에 관한 신처럼 신체들과 무관한 실존을 갖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이 원인이라고 말해지는 물리적 행위들에 전적으로 내재하는 것으로 보일 때, 무엇이 벌어질까? 우리의 주의는 뜻밖에 그리고 비가역적으로 인간의 내면성의 현상들, 의지의 행위들, 주어지거나 없어진 동의, 찬성이나 반대 그리고 그것들이 토대가 되는 권리와 법의 전적인 사법적 장치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려진다. 그리고 종속은 물리적/물질적 문제, 신체들이 하고 하지 않는 것의 문제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를 변용하는지의 문제가 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88


 2. 집합적 해방 없이는 개체의 해방은 있을 수 없다.


 몬탁이 해석하는 신체는 단일(單一)한 개체 단위가 아니다. 신체는 생존을 하기 위해 상/하위 단위, 다른 신체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스피노자의 '신체'는 사회적 관계를 필연적으로 만들게 된다.


 신체는 공기, 물, 영양, 즉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아주 많은 이질적인 신체들의 섭취를 요구하며 그것이 없다면 신체는 빠르게 소멸할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바로 신체의 생존을 위해 다른 인간의 신체들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수많은 부분들로 구성될 뿐만 아니라 생존의 조건으로서 자연의 일부를 형성하는 인간 사회를 포함하여 다른 신체들, 보다 큰 신체들, 보다 큰 단일체들, 보다 큰 집합들의 다른 부분들 가운데 한 부분을 구성하면서 다른 신체들과 상호작용을 해야만 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75


(2) 우리가 정치를 역량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개체는 유의미한 분석 단위가 되지 않는다. 개체로서, 즉 분리된 자율적인 것으로서 개체의 역량은 이론적으로 무시될 정도로 미미하다. 사실상 자연 상태라는 통념은 이것이 분리되고 고립된 개체들의 사회 이전 상태인 한에서, 스피노자에게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고립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거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않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상 시민사회를 열망하며 그것을 결코 완전히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이 따라나온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62


 이와 함께 몬탁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역량'과 '권리'를 동일하게 보고 있는 마트롱(Alexandre Matheron)의 해석을 빌린다. 이로부터 결국, 작은 신체보다 큰 신체가 더 큰 역량과 권리를 갖는다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에서 결정적인 행위의 주체는 '개인'이 아닌 '다중'이다. 마트롱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를 통해 <윤리학>과 <신학-정치론> <정치학>이 같은 기하학적 구조를 가졌음을 말했다면, 몬탁은 양태(樣態)에 따라 정치철학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로부터정치 주체로서 다중에 의한 '집합적 해방 없이는 개체의 해방은 없다'가 도출된다.


 (1) 스피노자는 역량과 권리를 분리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자연은 자연의 역량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최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 전체의 보편적 역량은 집합적으로 고려된 모든 개체들의 역량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개체는 자신의 역량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최고의 권리를 소유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61


 <정치론>에서 그(스피노자)는 분명하게 말한다. 권리가 역량만큼이라면, 개체 하나만으로는 단지 작은 역량이나 권리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개체가 어떠한 실재성을 갖는 것이라면, 개체의 권리는 국가와 관련해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권리는... 각 개인의 역량 potentia이 아니라 다중의 역량에 의해 규정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38


 3. 이런 정리들의 쓰인 형식은 앞서 존재하는 정신의, 영혼의 의도를 현실화하거나 물질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체들 사이의 신체로서 그 자체로 물질적 실존을 소유한다


 이상의 <신체, 대중들, 역량>들의 관계를 종합해보자. <지성개선론>에서 언급되었듯이, 스피노자는 현존하는 모든 지각으로부터 참다운 관념으로 나가고자 했다. 지각되기 위해서는 동일한 정신-신체가 필요하며, 인간 해방의 문제는 결국 신체의 해방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신체들은 '생존'하기 위해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 이들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생존하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크기의 신체들은  그 크기 만큼의 역량을 갖는다. (마트롱이 해석한) 스피노자는 권리와 역량을 별도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가 가장 강한 권리를 갖는다는 점에서는 얼핏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와 동일한 결론에 이른듯 보이지만, 국가의 배후가 되는 다중(multitude)의 역량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왕권신수설'의 홉스와는 다르다는 것이 책 전반의 큰 줄기다. 


 스피노자는 단지 정신들의 해방, 신체로는 결코 표현될 수 없는 정신의 자유, 이미 실행된 것으로 보일 수 있을 때 가장 잘 확증되는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자유를 요구한다. 단지 그 자신과 자신의 권리들의 소유자인 개체의 해방이 아니라 그것의 외부에서는 개체가 실존하지 않으며 그것과 별개로 개체의 자유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집합체의 해방을 요구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20


 대중들의 본성과 역량이 설명되는 가장 공통적인 형상figure 가운데 하나는 대개 국가 업무에 대한 눈에 띠지 않는 배경이지만 불안한 시기에는 어떤 것도 그것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바다의 형상이다. 죽음이든 불화든 국가에서 사소한 균열은 대중 행동과 질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들의 진실은 정치 체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의 외부, 성난 다중의 역량에 있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p141


  결국, <신체, 대중들, 역량>은 유물론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을 분석하는 책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몬탁의 관점을 이해한다면,  네그리의 3부작 <제국> <다중> <공동체>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일단 이들에 대한 정리는 다음으로 넘기자. 그런 면에서 몬탁의 <신체, 대중들, 역량>은 스피노자와 네그리를 연결해주는 튼튼한 다리라고 정리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제국>은 이미 많이 넘겨서... 빨리 정리해야겠다... ㅜㅜ 



스피노자는 단지 정신들의 해방, 신체로는 결코 표현될 수 없는 정신의 자유, 이미 실행된 것으로 보일 수 있을 때 가장 잘 확증되는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자유를 요구한다. 단지 그 자신과 자신의 권리들의 소유자인 개체의 해방이 아니라 그것의 외부에서는 개체가 실존하지 않으며 그것과 별개로 개체의 자유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집합체의 해방을 요구한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 P120

대중들의 본성과 역량이 설명되는 가장 공통적인 형상figure 가운데 하나는 대개 국가 업무에 대한 눈에 띠지 않는 배경이지만 불안한 시기에는 어떤 것도 그것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바다의 형상이다. 죽음이든 불화든 국가에서 사소한 균열은 대중 행동과 질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러한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들의 진실은 정치 체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의 외부, 성난 다중의 역량에 있다._워런 몬탁, <신체, 대중들, 역량>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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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모자 2021-04-18 17: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을 유물론적으로 극대화해서 뇌과학에 적용한 책도 있습니다ㅋ 안토니오 다마지오 - [스피노자의 뇌]도 나중에 읽어보세요~

겨울호랑이 2021-04-18 18:18   좋아요 2 | URL
[스피노자의 뇌]가 그런 내용이군요. 황금모자님 덕분에 좋은 책 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정부의 권리와 권력(jus et potestas imperii)을 매우 큰 것으로 파악한다고 할지라도, 정부의 권리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이미 이 사실을 충분히 분명하게 밝혔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경험은 국가의 보존은 무엇보다도 먼저 신민의 충성과 덕 그리고 명령 수행에 있어서 한결같은 마음에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들에게 충성과 덕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방법은 쉽게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지배자나 피지배자나 인간들이며 그들은 노동(labor)보다 욕망(libido)을 추구하기 때문이다.(p360)...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어떤 기만도 남지 않게 국가를 구성하고, 모든 사람들 각자의 기질이 어떻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이 사적권리보다 공적 권리를 우선시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과제이며 여기에서 해야할 일이다._B.스피노자, <신학-정치론>,p361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Benedictus de Spinoza,1632 ~ 1677)의 <신학-정치론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를 읽던 중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 소중한 존재이고, 자유를 비롯한 이들의 이익과 권리가 상호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잠시 이야기를 돌려 칸토어(Georg Ferdinand Ludwig Philipp Cantor, 1845~1918)의 집합론을 살펴보자. 칸토어는 집합론에서 일대일 대응을 통해 두 무한 집합의 크기가 다를 수 있음을 증명했다.


 집합론을 처음 연구한 사람은 칸토어로, 1874년에 그는 대수적 수(algebraic number)보다 실수가 더 많음을 보였다. 이는 두 무한 집합의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 초월수의 존재를 새롭게 보인 것이었다... 대수적 수와 실수가 모두 무한히 많은데도 실수가 대수적 수보다 '많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칸토어는 두 집합 A와 B 사이에 전단사함수(bijection)가 존재하면 그들의 크기, 즉 "기수(cardinality)가 같다"라고 정의했다. 이는 A의 원소와 B의 원소 사이에 일대일대응(one-to-one correspondence)이 있다는 뜻이다. 만일 A와 B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존재하지 않고 A와 B의 부분집합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있으면 A는 B보다 기수가 작다라고 한다. 결국 칸토어가 보인 것은 모든 대수적 수의 집합의 기수가 모든 실수의 집합의 기수보다 작다는 것이다._ 티모시 가워드 외, <Mathematics 1>, p1013


 칸토어의 설명이 다소 와닿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부분에 대해 보다 대중적으로 친숙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의 설명을 빌려보자. <수리철학의 기초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에서 러셀은 수열의 순서를 바꾸고, 수열수 비교를 통해 크기가 다른 무한 집합의 이야기를 쉽게 설명한다. 


  먼저 보기를 들어 설명하자. 다음의 수열로부터 출발해 보자.   1,2,3,4, ..., n, ... 

 이 수열은 가장 작은 무한수열수, 즉 칸토어가 w라고 부른 수열수를 가지고 있다. 지금 최초라 나타나는 짝수를 맨 마지막으로 옮기는 조작을 순차적으로 되풀이 해 이 수열을 띄엄띄엄 드물게 했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수열을 얻을 수 있다. 1,3,5,7,...2n+1... 2,4,6,8... 2n . 이 수열의 수열수는 2w다. 


 여기에서 두 수열 1,2,3,4.... , n과 1,3,4,5,..., n+1,..., 2을 비교해 보면 첫째 수열은 둘째 수열에서 최후의 항, 즉 2를 제외한 부분부열과 대등하지만, 둘째 수열은 첫째 수열의 어떠한 부분수열과도 대등하지 않다. 이는 첫째 수열의 수열수가 w라고 했을 때, 둘째 수열의 수열수는 w+1로서 정의에 의해 둘째 수열이 첫째 수열보다 크다. _러셀, <수리철학의 기초>,p103


 두 무한 집합이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잘 설명되지만, 개인적으로는 러셀의 설명 방식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가 충돌했을 때의 가치 판단의 기준을 세우게 된다. 러셀은 책에서 무한 집합에서 교환 법칙이 성립하지 않음을 말한다. 즉, 1+w와 w+1은 다르다는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과 권리가 충돌할 때 이는 종합적인 판단이 아닌, 사안별 접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하나의 항을 수열의 마지막이 아닌 최초에 더하면 그것 또한 수열이므로 1+w=w이다. 따라서 1+w=w이다. 따라서 1+w는 w+1과 같지 않다. 이는 관계에 대한 산술 전체에 통용되는 성질이다._러셀, <수리철학의 기초>,p104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관점에 따라 어떨 때는 시장 경제의 자유를, 다른 때는 국민 정서를 언급하면서 다른 기준을 적용하며 비판을 일삼는 일부의 행태가 옳다는 것이 아니다. 사안 별로 개인과 이익의 상충점을 소거해가면서 결과적으로 일대일 대응이 될 수 없는 남는 부분수열이 어느 집합에 속하는지를 보다 납득할 기준(이 기준은 사회 전체의 합의가 필요하겠지만)에서 판단되면 좋을 것이다. 다만, 숫자로 표현되는 수학의 세계와 사회과학의 세계는 다르기에 쉽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소 장황했지만, 이러한 생각이 시작된 시작점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3월호에 실린 "분열을 팔아야 먹고 사는 언론"의 기사를 읽고서였다. 이와 연관해서 배리 글래스너(Barry Glassner)의 <공포의 문화 The Culture of Fear: Why Americans Are Afraid of the Wrong Things>를 읽으며, 언론이 어떻게 공포를 조장했는가를 살폈고 여기에서 다시 스피노자로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공포의 문화>에서 <신학-정치론>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지나친 비약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실로 대중의 변덕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대중에 대해서 거의 절망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이성이 아니라 오직 감정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며, 대중은 모든 것에 달려들고 탐욕이나 사치로 인해서 쉽게 타락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자기의 기질에 따라서 이끌어 가고자 한다._B.스피노자, <신학-정치론>,p360


 <공포의 문화>는 조만간 리뷰로 정리하도록 하고, <신학-정치론>은 스피노자 철학을 쉽게 설명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와 함께 페이퍼에서 다루는 것으로 하며, 글을 마무리하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철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손실은 사회화되고, 이윤은 사유화된다는 것이다.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3월호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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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3-20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맘에 크게 와닿는 글이 넘 많습니다. ^^
손실은 사회화되고 이윤은 사유화 된다는 말은 넘 절감되고 멋입니다. ^^

개인과 공동체 이익이 서로 충돌할 때 종합적 판단이 아닌 사안별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씀도 크게 맘에 와닿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큰 방향에서 어긋나면 각 개별 사항을 흔히 다르게 대우하는 상황이 넘 많아 좀 아쉽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3-20 18:35   좋아요 1 | URL
이번 페이퍼에서 많은 내용을 퍼와서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더 공감되셨으리라 생각해 봅니다.ㅋ 감사합니다. 사실, 물리의 법칙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사람 심리가 추가 변수가 들어간 사회과학은 예외 사항이 많음을 느낍니다. 그게 사회과학의 매력이기도 하겠지만요.. ^^:)

초란공 2021-03-20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디플로마티크의 마지막 인용문이 한번 더 머리를 치네요^^;;

겨울호랑이 2021-03-20 22:26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두서없이 썼네요. 초란공님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 2021-03-20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에서 자신의 세를 불리는 방법이 분열이지요. 실제로 불리했던 후보나 정당이 케케묵은 이슈를 들고 나와도 그 아래 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흔히 볼수 있습니다.
양분된 의견중 하나를 자신의 진영을 대표하는것처럼 주장하는 쪽에 이용당하지 않고 사안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3-20 23:35   좋아요 1 | URL
동감입니다.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분열을 많이 보게됩니다. 특히, 자신이 일정 집단을 대표한다는 생각이 믿음으로 나타났을 때, 갈등은 파국으로 이끌고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퍼지는 악순환이 이루어지는 둣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