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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건축 - 조선·대만·만주에 세워진 건축이 말해주는 것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최석영 옮김 / 마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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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는 사람의 뜻이 반영된다. 달리 말해, '목적이 없는 건축'은 없다. 건축물 어디인가에는 그 목적이 반영되기 마련이고, 건축에 관여한 사람들, 특히 건축주의 목적이나 설계자의 뜻을 읽어낼 수 있다. 일본이 지배했던 지역의 건축을 살펴보는 이 책은 건축에서 지배 의도를 읽어냄으로써 지배를 다시 묻고자 한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0/167

식민시대 건축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다시 살펴본다는 니시자와 야스히코 (西澤 泰彦)의 <식민지 건축 : 조선, 대만, 만주에 세워진 건축이 말해주는 것 日本の植民地建築―帝國に築かれたネットワ?ク>. 저자는 일본제국 시기 세워진 건축물들이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건축들과 다른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과 서구의 콜로니얼 건축은 달랐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는 일본의 전통 건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 중국 동북 지방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근처의 열강 지배지, 특히 중국 각지의 조계지나 조차지에서 콜로니얼 건축의 존재를 의식하고 세워졌다... 지배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성립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유럽의 콜로니얼 건축과 같았으나, 일본의 전통 건축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점은 달랐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33/167

식민지에 제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권력 중심 기관의 청사를 건설하는 것은 다른 열강과 같았지만, 제국주의 후발국가로서 일본은 자신의 전통양식을 주변부에 강조할 수 없었다. '검은 머리의 서양인'으로 자신들 역시 세계 무대에서 변방에 있음을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일본제국주의의 현실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서구 열강과 대립하게 되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바뀌게 되지만.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물류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사회적 지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조선 각지에서 재료를 조달해서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건축 재료의 확보는 지배력을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1/167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주의 시대 건축물은 현지의 재료들과 제국의 변경의 기술, 정보, 인적 네트워크에 의해 만들어지게 된다. 정작 식민지 본국과 일본 전통 문화는 소외된 채 제국의 변경은 직접적으로 세계 또는 변경들과 접촉하며 독자적인 양식을 만들어냈다.

식민지 건축의 보편성과 선진성은 건축가, 건축기술자, 도급업자 등 사람, 건축 재료, 건축에 관한 최첨단 정보의 확보와 이동으로 유익한 정보를 정확하게 손을 넣을 수 있어서 가능했던 측면이 강하다. 사람. 물건, 정보는 일본 국내와 개별 지배 지역 사이를, 그리고 대만., 조선, 중국 동북 지방 등 지배지 사이를 이동했다.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지배지 서로 간 이동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며, 이동의 방법으로는 항로와 철도를 들 수 있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34/167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식민지 건축>에서 일본 제국주의 시대 건축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특성을 도출한다. 독일과 함께 제국주의 후발주자로서, 불과 얼마 전까지 이웃국가들과 대등하거나 열등한 위치에서 외교관계를 맺었던 일본. 빠른 개항과 서구 문물의 수용을 통해 군사력 등 외적인 면에서는 앞서있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제국의 중심을 자처할 수 없었기에 서양의 문화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일본 건축은 식민 본국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건축을 예로 살펴볼 때, 일본의 지배지는 일본이라는 본국 아래 예속된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접해 있던 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 제국이라는 틀보다 넓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북동아시아라는 틀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부이긴 하나 일본의 식민지 건축이 세계 건축일 수 있엇던 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지역이 인근 지역과의 관계 속에서 경우에 따라서 세계적인 규모로 자리매김되게 하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35/167

주변부 자체 역량과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 식민시대 건축에서 본국의 기여는 철도, 항만 등 인프라 건축에 한정된다. 이러한 인프라의 구축이 사실 군사력의 효율적 활용을 위한 부수적 결과임을 생각해본다면, 결국 식민지 건축에서 일본 본국의 기여는 거의 없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는 건축에 한정된 것이 아닌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 전반에서 보여지는 부분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의 생각보다 식민시기 일본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일본의 탈을 쓴 식민권력층과 친일세력에 의해 잔혹한 식민역사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식민지 건축이 일본의 지배를 상징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는 식민지 건축의 숙명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식민지 건축은 파괴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철거된 식민지 건축은 적었고 적극적으로 파괴된 것은 각지의 신사와 충령탑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상황이 섞여 있었다. 하나는 식민지 건축인 기존의 건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해방 후의 사회 현실, 또 하나는 식민지 건축을 새로운 정권이 사용함으로써 권력의 이행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38/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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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건축이 없어져도 식민지 건축이 존재했던 사실은 엄연하게 남아 있고 연구에 끝은 없는 것이다. 야외에 전시된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부재를 보았을 때 그것을 한층 강하게 느꼈고 끝나지 않은 연구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실감했다.

당시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는 서구 여러 국가의 협조와 인정으로 이루어진바, 일본의 지배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홍콩, 상하이, 톈진 등 서구 국가가 지배하는 동아시아 지역에 건립된 건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자신의 지배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서양 건축 규범을 따르는 건물로 지배에 필요한 시설을 정비하는 것이 유효했다.

이 같은 양식의 지붕을 가진 건물이 출현했다는 것은 대만총독부 청사나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볼 수 있는 서양 건축 규범을 따르는 건물을 세울 필요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만주사변 이후에 유럽과 일본 사이에 생긴 동아시아 지배 구조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만주사변 이전에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는 유럽과의 협조와 인정을 통한 것이었고, 유럽의 지배틀에 편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지배 능력이 문제시되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서양 건축 규범의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유럽의 동아시아 지배틀에서 벗어난 일본은 타국에 능력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동아시아에서 유럽의 건축과 비견될 건축을 할 이유도 없어졌다.

재료 면에서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 벽돌이 주재료가 되어 벽돌 구조 건축이 널리 사용된 상황은 서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에서는 조적 구조가 드물었지만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는 벽돌의 내화 성능, 저렴한 가격, 재래의 벽돌 제조 기술 등의 요인 덕분에 보편적인 구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과 서구의 콜로니얼 건축은 달랐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는 일본의 전통 건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 중국 동북 지방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근처의 열강 지배지, 특히 중국 각지의 조계지나 조차지에서 콜로니얼 건축의 존재를 의식하고 세워졌다. 다롄의원이나 창춘 야마토 호텔을 비롯한 만철이 지은 일련의 건물이 그 전형이고, 종주국 일본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건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지배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성립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유럽의 콜로니얼 건축과 같았으나, 일본의 전통 건축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점은 달랐다.

건축을 예로 살펴볼 때, 일본의 지배지는 일본이라는 본국 아래 예속된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접해 있던 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 제국이라는 틀보다 넓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북동아시아라는 틀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각 지역에 세워진 건물을 보거나 정보를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건축가들이 건축에 관한 당시의 최첨단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일부이긴 하나 일본의 식민지 건축이 세계 건축일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지역이 인근 지역과의 관계 속에서 경우에 따라서 세계적인 규모로 자리매김되게 하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건축의 보편성과 선진성은 건축가·건축기술자, 도급업자 등 사람, 건축 재료, 건축에 관한 최첨단 정보의 확보와 이동으로 유익한 정보를 적확하게 손을 넣을 수 있어서 가능했던 측면이 강하다. 사람·물건·정보는 일본 국내와 개별 지배 지역 사이를, 그리고 대만·조선·중국 동북 지방 등 지배지 사이를 이동했다.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지배지 서로 간 이동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한데, 포틀랜드 시멘트처럼 일본의 식민지·지배 지역 밖으로 수출되거나 세계의 건축 정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 배경에 일본에 의한 정치적·군사적 지배가 있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으나, 이동을 가능하게 한 방법과 공간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동의 방법으로는 항로와 철도를 들 수 있다.

식민지 건축이 일본의 지배를 상징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는 식민지 건축의 숙명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식민지 건축은 파괴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철거된 식민지 건축은 적었고 적극적으로 파괴된 것은 각지의 신사와 충령탑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상황이 섞여 있었다. 하나는 식민지 건축인 기존의 건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해방 후의 사회 현실, 또 하나는 식민지 건축을 새로운 정권이 사용함으로써 권력의 이행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가 발전하자 식민지 건축에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역사적 건축의 하나로서 식민지 건축의 문화적 가치 또는 사회적·문화적 유산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특히 재개발에 돌입한 도시의 자산으로 활용한다는 움직임이었다.

식민지 건축을 둘러싼 어제와 오늘의 움직임을 보면 지배의 유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식민지 건축을 말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식민지 건축이 지배를 상징하는 이상 그것의 말살은 일제의 지배 사실을 역사상에서 없애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부재 일부는 충청남도 천안시의 독립기념관에서 야외 설치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는데, 이는 일제 지배의 사실을 후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식민지 건축을 마주하는 것은 지배국과 그 국민에게, 즉 일본과 일본인에게 지배를 바로 보게 하는 것이다. 식민지 건축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과거 피지배 국가와 국민에게 아픈 역사를 극복하는 씨앗이다. 식민지 건축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 교육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역사 인식을 둘러싼 동아시아 국가들의 다툼도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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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철 건축은 일본 국내에서 교육받은 일본인 건축가가 동아시아의 일본 식민지에 파견돼 공부한 결과를 일본 바깥에서 보여준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높은 수준에 도달한 건축물 몇몇은 중국 내 세계적 수준의 건축물들을 접하면서 쌓은 견문과 지식이 낳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요코하마정금은행 다롄지점이나 초대 대만은행 본점 등 식민지 은행의 점포는 대부분 지배 지역에 거점을 둔 건축가가 설계했다. 이것이 식민지 건축의 본래 특징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대만은행 본점과 만주중앙은행 본점만 도쿄에 거점을 둔 니시무라 요시토키가 설계했는데, 이는 만주사변 발발과 만주국 성립 등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변하고 일본과 지배 지역 간 결합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설할 수 있다.

식민지 은행 건물은 은행 조직이 변한 뒤에도 살아남은 사례가 많다. 조선은행 본점은 1950년 한국은행 본점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쓰였다. 한국은행이 기존 건물 서쪽에 고층 빌딩을 새로 지어 본점을 이전한 후에 구 조선은행 본점 건물은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으로 개편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노무라가 대만에서 조선으로 이동한 것은 그의 대만총독부 영선과장 경력에 조선총독부가 주목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대만총독부 청사 설계에서 보여준 노무라의 업적을 고려해 당시 설계 중이던 조선총독부 청사 설계에 그의 경험을 살리고자 했다.

오노기가 대만총독부에서 만철로 옮겨 간 일이다. 이는 만철 건축 조직이 지배 지역인 중국 동북 지방에서 활동하는 데 큰 의미를 띠었다. 즉, 이민족 지배나 일본과는 다른 기후나 풍토를 겪어보지 못한 만철의 일본 건축가·건축기술자들이 만철 본사가 다롄으로 이전하면서 작업을 시작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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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이들 도시에는 지배의 흔적을 보여주는 건물들, 예를 들면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구 조선은행 본점), 중화민국총통부(구 대만총독부), 다롄빈관(구 야마토 호텔) 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건물을 마주하지 않고, 먹거리와 선물에만 관심을 보이는 일본인의 자세는 우습고, 도시의 역사를 알려고 하지 않는 증거를 내보이는 꼴이다.

시대에 상관없이 다른 국가에 대한 침략과 지배가 그 국가의 사람들에게 크나큰 피해를 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와 함께 수반된 무력 충돌과 전쟁은 승패에 상관없이 양 국민 모두에게 피해를 남긴다. 허나 가해국의 사람들은 그 피해로부터 눈길을 돌리기 쉬운 법이다. 그뿐 아니라 피해를 준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잘못을 범한다. 이것은 타국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다시 일으킬 위험을 낳는다. 지금 침략과 지배를 다시 묻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고 그 재발을 허용하지 않는 데에 있다.

. 즉, 언제든 침략과 지배를 다시 물어야한 한다. 전쟁을 겪은 세대든 아니든 그렇게 해야 하며, 이것이 새로운 것을 잃어버리는 행동은 아니다.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물류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사회적 지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조선 각지에서 재료를 조달해서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건축 재료의 확보는 지배력을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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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파트 -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
박철수 지음 / 마티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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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자 정부는 가용자원을 생산 부문에 집중시켰고, 주택건설은 필연적으로 민간 부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한국의 주택정책은 투기의존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고, 아파트 건설은 민간에게 맡기고 정부는 이를 정책과 제도로 지원하는 기조로 이어졌다. 이는 우리나라 아파트 탄생의 독특한 특징인 동시에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_ 박철수, <아파트> , p12/227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표현은 공동주택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모든 것이 개별로 이루어지는 우리나라의 아파트에 대한 매우 적절한 지적이자 문제의 핵심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이런 아파트 공간의 '자폐'와 '독점'은 사익의 확대와 공익의 무력화를 초래했다. 결국 경제적 효율성에만 주목한 아파트단지 개발은 온 국토를 "끝없는 직각과 직선의 세계이자 도시 속의 완벽한 요새"인 "아파트단지 공화국"으로 바꿔놓았다. _ 박철수, <아파트> , p10/227

박철수의 <아파트>는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인 부동산, 그 중에서도 최대 상품인 아파트 문제를 다룬다. 5.16 쿠데타를 통해 군부가 집권하면서 효율적인 감시체제 유지를 위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아파트. 그렇지만, 저자는 아파트 문제를 '건물' 아파트가 아닌 아파트 '단지'에서 찾는다. 공동택지지구에 별도의 치외법권(治外法權, extraterritoriality)이 적용되는 이질적인 아파트 단지. 단지 내에서 모든 것은 입주민들에 의해 자체적으로 조달되고 소비되기에 단지 내부와 외부는 단절된다.

우리나라의 주거 문제를 단순히 아파트가 많다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니다. 아파트가 많은 것이 문제라면 전 국민의 87% 이상이 정부기관(HDB, Housing Development Board)이 공급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싱가포르가 우리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일 것이다. 문제는 '아파트'가 아니라 '단지'이다. _ 박철수, <아파트> , p109/227

작은 필지로 구성된 도시조직은 도로 확장이나 지하철 노선 확장 등과 같은 도시계획적 차원의 공공사업이나 지역권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상황 변화에 대해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자율 조정 능력을 갖는다. 반면에 아파트단지에는 가역성(可逆性)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 아파트단지면 영원히 아파트단지로 굳어, 도시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당한다. _ 박철수, <아파트> , p119/227

사회계층의 통합(social mix)이라는 공동선의 추구와는 달리, 대규모로 특정 지역에 영구임대주택을 밀집시켰기 때문에 고립문화와 빈곤문화가 집단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국공유지나 공공이 주도하는 대단위 택지개발지구 안에서 가급적 많은 주택을 공급해야 했기에 대규모의 고립공간이 생성되었으며, 이는 곧 빈곤 지역의 집중을 야기했다(p102)... 공간적 분리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분리를 야기한다. 아파트의 보편화, 일반화 현상은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는 분양아파트단지와 공공재원으로 건설되는 임대아파트단지 사이의 반목과 배척이라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낳았다. _ 박철수, <아파트> , p103/227

아파트에 들어올 수 있는 비슷한 경제력을 가진, 비슷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이들은 외벽으로 둘러쌓여 보호받으면서 그들의 욕망을 실현한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자본주의 시대에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마저도 마치 맥도널드 햄버거와 같이 균일한 구조의 상품으로 표준화시켜 하나의 자산(資産)으로 인식한다. 자산으로 인식된 거주공간은 '최소비용으로 최대이윤'을 내려는 기업가 정신에 따라 발코니를 확장하고, 공용구간을 침범하는 행태를 거리낌 없이 보인다. 결국, 대규모 단지안에 사는 우리의 모습은 '거대한 군중 속의 개별화된 고독'의 또 다른 모습임을 확인하게 된다.

철저히 외부와 단절되며, 주거단지 하나가 완결된 공동생활의 단위가 되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공적 재원의 투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아파트단지 입주자는 자신들의 돈으로 단지 내의 모든 생활 편의시설과 어린이놀이터, 운동시설 등 외부공간을 구입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입주자의 비용으로 마련했으니 이주자들이 단지를 사유화하고 적극적으로 방어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점이 아파트단지의 공간적 폐쇄성을 야기하는 주된 원인이다. 여기에 무리지음과 서열화가 겹쳐 작동함으로써 사회 공간적 통합이라는 원리와 가치가 훼손된다. _ 박철수, <아파트> , p21/227

아파트를 갖는다는 것은 곧 욕망하는 재화인 아파트를 소유하기 위해 "자신감의 반쪽을, 자존심의 반쪽을, 심지어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의 반쪽까지도 포기한 채" 살아야하는 과정의 결과물이 되었다. "신분과 지위가 새로운 아파트 문화를 통해 발현"되고 재현되며 재생산된다. 중산층으로 불리는 경제 계층과 주거 형식으로서의 아파트가 완벽하게 화학적으로 결합하고 생활문화의 완전체로서 힘을 맘껏 휘두르는 사회가 곧 우리가 사는 사회,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_ 박철수, <아파트> , p90/227

한국사회에서 부동산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경기 부양을 위한 개발사업의 1순위가 아파트개발사업이며, 한국 금융삽업의 주력상품이 아파트 담보대출이라는 현실과 최근 치뤄진 제20대 대통령선거의 표심(標心) 중 큰 부분이 부동산에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은 부동산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을 실감케 한다. 이런 아파트(단지) 문제의 인식과 해결을 위한 방향성 제시가 이 책의 장점이라 여겨진다.

"현대도시의 일상생활이 생산성의 논리에 지배되면서 인간의 잠재력이 평균화되고 경험이 동질화되는 현상을 초래했으며, 이런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적 관계는 퇴보하고 인간성의 소외가 야기된다"는 지적은 벌써부터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이 1960년대의 유럽이 생산성과 경제적 효율에 몰두한 근대 도시계획에 던진 진지한 반성의 핵심이었다. _ 박철수, <아파트> , p10/227

우리 모두는 "공중에 떠다니는 포자들"이며, 살아온 세월과 시간은 추억과 기억을 애써 지우며 걸어온 길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모여 공간을 인간화하고 사회화한 곳이 장소라는 점에서, '장소 만들기'는 곧 사람이 주인 되는 공동체를 회복하는 선결조건이며,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꾼 것이 '커뮤니티 재생'이다. 사람과 장소가 결합하는 커뮤니티 재생은 결국 장소에 대한 감수성을 동력으로 개인의 시선이 이웃이나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넓어진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동력이기도 하다. 장소는 한 곳에 오래 뿌리내릴 때 비로소 완성된다. _ 박철수, <아파트> , p21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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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4-19 1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e북은 페이지 이렇게 표시하면 되겠네요!^^

겨울호랑이 2022-04-19 13:07   좋아요 2 | URL
네. 이렇게 표시하면 종이책 페이지와도 대략 호완이 될 것 같아요. 어느 이웃분께서 먼저 전자책 페이지 표시하시는 방식을 보고 저도 배웠습니다.^^:)

페넬로페 2022-04-19 2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이지 표시,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앞, 뒤 숫자가 의미하는게 무엇인가요?

겨울호랑이 2022-04-19 23:01   좋아요 2 | URL
네, 종이책은 페이지가 고정되어 있어 책에 있는 페이지를 그대로 기재하면 되지만, 전자책은 모니터 또는 리더기에 따라 페이지가 다르게 될 수 있어 페이지를 표시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분수로 표시하면 어느 정도는 인용확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분수로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어, ‘p30/360‘ 은 ‘전체 전자책의 페이지 수 360 중 30‘을 의미합니다. 이같이 표시하면 종이책으로 환산할 때에도 대략 위치 확인에 유리해 보입니다. 예시에서 종이책이 420페이지라 할 경우에는 420*30/360=35 페이지 근처에 해당 내용이 있다고 추정 가능합니다.(실제로는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앞 뒤 내용을 확인할 때 좋을 것 같아 이렇게 표시하고 활용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ㅋ

페넬로페 2022-04-19 23:07   좋아요 2 | URL
분수로 표시한 거군요.
저도 전자책 읽을 때 페이지 표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는데~~
겨울호랑이님, 잘 배웠습니다.
친절히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4-19 23:14   좋아요 2 | URL
아닙니다, 저도 좋은 아이디어 다른 분께 배운 걸요. 페넬로페님께서 유용하게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편한 밤 되세요! ^^:)

독서괭 2022-04-21 09:33   좋아요 2 | URL
ㅎㅎ 저도 이렇게 표시하고 있어요!

겨울호랑이 2022-04-21 10:03   좋아요 1 | URL
제가 배운 이웃분이 독서괭님이셨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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