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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전해지는 것은 사유뿐이다.

완전한 침묵 속에서만 듣는 것이 시작되며, 언어가 사라질 때에만 보는 것이 시작된다.

기행문인《묵상》에서 제8일과 제11일차 이야기의 제목이기도 한 위 두 문장을 통해 책에 담긴 큰 줄기를 발견한다. 르 코르뷔지에의 글과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에서 느낀 저자의 감상은 수도원이라는 공간과 공간에서 묻어나는 신성의 기원이 무엇인가를 어렴풋하게나마 독자에게 알려준다.

언어라는 주관적 인식과 표현이 중단된 그 시점에 참모습이 보이고, 인간적 사유가 멈춰진 그 시간부터 신의 뜻을 알 수 있다면, 수도원이라는 신과 인간의 대화의 공간의 참모습은 그 공간을 걷어내고 공간에 담긴 삶의 모습을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은 아닐런지.

본문의 글과 사진을 통해 이성으로만 파악할 수 없는 의식의 저편을 그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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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건축 - 조선·대만·만주에 세워진 건축이 말해주는 것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최석영 옮김 / 마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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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는 사람의 뜻이 반영된다. 달리 말해, '목적이 없는 건축'은 없다. 건축물 어디인가에는 그 목적이 반영되기 마련이고, 건축에 관여한 사람들, 특히 건축주의 목적이나 설계자의 뜻을 읽어낼 수 있다. 일본이 지배했던 지역의 건축을 살펴보는 이 책은 건축에서 지배 의도를 읽어냄으로써 지배를 다시 묻고자 한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0/167

식민시대 건축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다시 살펴본다는 니시자와 야스히코 (西澤 泰彦)의 <식민지 건축 : 조선, 대만, 만주에 세워진 건축이 말해주는 것 日本の植民地建築―帝國に築かれたネットワ?ク>. 저자는 일본제국 시기 세워진 건축물들이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건축들과 다른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과 서구의 콜로니얼 건축은 달랐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는 일본의 전통 건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 중국 동북 지방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근처의 열강 지배지, 특히 중국 각지의 조계지나 조차지에서 콜로니얼 건축의 존재를 의식하고 세워졌다... 지배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성립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유럽의 콜로니얼 건축과 같았으나, 일본의 전통 건축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점은 달랐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33/167

식민지에 제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권력 중심 기관의 청사를 건설하는 것은 다른 열강과 같았지만, 제국주의 후발국가로서 일본은 자신의 전통양식을 주변부에 강조할 수 없었다. '검은 머리의 서양인'으로 자신들 역시 세계 무대에서 변방에 있음을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일본제국주의의 현실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서구 열강과 대립하게 되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바뀌게 되지만.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물류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사회적 지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조선 각지에서 재료를 조달해서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건축 재료의 확보는 지배력을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1/167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주의 시대 건축물은 현지의 재료들과 제국의 변경의 기술, 정보, 인적 네트워크에 의해 만들어지게 된다. 정작 식민지 본국과 일본 전통 문화는 소외된 채 제국의 변경은 직접적으로 세계 또는 변경들과 접촉하며 독자적인 양식을 만들어냈다.

식민지 건축의 보편성과 선진성은 건축가, 건축기술자, 도급업자 등 사람, 건축 재료, 건축에 관한 최첨단 정보의 확보와 이동으로 유익한 정보를 정확하게 손을 넣을 수 있어서 가능했던 측면이 강하다. 사람. 물건, 정보는 일본 국내와 개별 지배 지역 사이를, 그리고 대만., 조선, 중국 동북 지방 등 지배지 사이를 이동했다.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지배지 서로 간 이동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며, 이동의 방법으로는 항로와 철도를 들 수 있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34/167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식민지 건축>에서 일본 제국주의 시대 건축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특성을 도출한다. 독일과 함께 제국주의 후발주자로서, 불과 얼마 전까지 이웃국가들과 대등하거나 열등한 위치에서 외교관계를 맺었던 일본. 빠른 개항과 서구 문물의 수용을 통해 군사력 등 외적인 면에서는 앞서있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제국의 중심을 자처할 수 없었기에 서양의 문화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일본 건축은 식민 본국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건축을 예로 살펴볼 때, 일본의 지배지는 일본이라는 본국 아래 예속된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접해 있던 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 제국이라는 틀보다 넓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북동아시아라는 틀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부이긴 하나 일본의 식민지 건축이 세계 건축일 수 있엇던 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지역이 인근 지역과의 관계 속에서 경우에 따라서 세계적인 규모로 자리매김되게 하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35/167

주변부 자체 역량과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 식민시대 건축에서 본국의 기여는 철도, 항만 등 인프라 건축에 한정된다. 이러한 인프라의 구축이 사실 군사력의 효율적 활용을 위한 부수적 결과임을 생각해본다면, 결국 식민지 건축에서 일본 본국의 기여는 거의 없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는 건축에 한정된 것이 아닌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 전반에서 보여지는 부분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의 생각보다 식민시기 일본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일본의 탈을 쓴 식민권력층과 친일세력에 의해 잔혹한 식민역사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식민지 건축이 일본의 지배를 상징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는 식민지 건축의 숙명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식민지 건축은 파괴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철거된 식민지 건축은 적었고 적극적으로 파괴된 것은 각지의 신사와 충령탑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상황이 섞여 있었다. 하나는 식민지 건축인 기존의 건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해방 후의 사회 현실, 또 하나는 식민지 건축을 새로운 정권이 사용함으로써 권력의 이행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_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민지 건축>, p138/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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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건축이 없어져도 식민지 건축이 존재했던 사실은 엄연하게 남아 있고 연구에 끝은 없는 것이다. 야외에 전시된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부재를 보았을 때 그것을 한층 강하게 느꼈고 끝나지 않은 연구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실감했다.

당시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는 서구 여러 국가의 협조와 인정으로 이루어진바, 일본의 지배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홍콩, 상하이, 톈진 등 서구 국가가 지배하는 동아시아 지역에 건립된 건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자신의 지배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서양 건축 규범을 따르는 건물로 지배에 필요한 시설을 정비하는 것이 유효했다.

이 같은 양식의 지붕을 가진 건물이 출현했다는 것은 대만총독부 청사나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볼 수 있는 서양 건축 규범을 따르는 건물을 세울 필요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만주사변 이후에 유럽과 일본 사이에 생긴 동아시아 지배 구조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만주사변 이전에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는 유럽과의 협조와 인정을 통한 것이었고, 유럽의 지배틀에 편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지배 능력이 문제시되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서양 건축 규범의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유럽의 동아시아 지배틀에서 벗어난 일본은 타국에 능력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동아시아에서 유럽의 건축과 비견될 건축을 할 이유도 없어졌다.

재료 면에서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 벽돌이 주재료가 되어 벽돌 구조 건축이 널리 사용된 상황은 서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에서는 조적 구조가 드물었지만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는 벽돌의 내화 성능, 저렴한 가격, 재래의 벽돌 제조 기술 등의 요인 덕분에 보편적인 구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과 서구의 콜로니얼 건축은 달랐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는 일본의 전통 건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 중국 동북 지방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근처의 열강 지배지, 특히 중국 각지의 조계지나 조차지에서 콜로니얼 건축의 존재를 의식하고 세워졌다. 다롄의원이나 창춘 야마토 호텔을 비롯한 만철이 지은 일련의 건물이 그 전형이고, 종주국 일본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건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지배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성립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유럽의 콜로니얼 건축과 같았으나, 일본의 전통 건축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점은 달랐다.

건축을 예로 살펴볼 때, 일본의 지배지는 일본이라는 본국 아래 예속된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접해 있던 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 제국이라는 틀보다 넓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북동아시아라는 틀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각 지역에 세워진 건물을 보거나 정보를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건축가들이 건축에 관한 당시의 최첨단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일부이긴 하나 일본의 식민지 건축이 세계 건축일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지역이 인근 지역과의 관계 속에서 경우에 따라서 세계적인 규모로 자리매김되게 하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건축의 보편성과 선진성은 건축가·건축기술자, 도급업자 등 사람, 건축 재료, 건축에 관한 최첨단 정보의 확보와 이동으로 유익한 정보를 적확하게 손을 넣을 수 있어서 가능했던 측면이 강하다. 사람·물건·정보는 일본 국내와 개별 지배 지역 사이를, 그리고 대만·조선·중국 동북 지방 등 지배지 사이를 이동했다.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지배지 서로 간 이동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한데, 포틀랜드 시멘트처럼 일본의 식민지·지배 지역 밖으로 수출되거나 세계의 건축 정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 배경에 일본에 의한 정치적·군사적 지배가 있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으나, 이동을 가능하게 한 방법과 공간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동의 방법으로는 항로와 철도를 들 수 있다.

식민지 건축이 일본의 지배를 상징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는 식민지 건축의 숙명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식민지 건축은 파괴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철거된 식민지 건축은 적었고 적극적으로 파괴된 것은 각지의 신사와 충령탑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상황이 섞여 있었다. 하나는 식민지 건축인 기존의 건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해방 후의 사회 현실, 또 하나는 식민지 건축을 새로운 정권이 사용함으로써 권력의 이행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가 발전하자 식민지 건축에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역사적 건축의 하나로서 식민지 건축의 문화적 가치 또는 사회적·문화적 유산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특히 재개발에 돌입한 도시의 자산으로 활용한다는 움직임이었다.

식민지 건축을 둘러싼 어제와 오늘의 움직임을 보면 지배의 유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식민지 건축을 말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식민지 건축이 지배를 상징하는 이상 그것의 말살은 일제의 지배 사실을 역사상에서 없애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부재 일부는 충청남도 천안시의 독립기념관에서 야외 설치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는데, 이는 일제 지배의 사실을 후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식민지 건축을 마주하는 것은 지배국과 그 국민에게, 즉 일본과 일본인에게 지배를 바로 보게 하는 것이다. 식민지 건축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과거 피지배 국가와 국민에게 아픈 역사를 극복하는 씨앗이다. 식민지 건축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 교육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역사 인식을 둘러싼 동아시아 국가들의 다툼도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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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철 건축은 일본 국내에서 교육받은 일본인 건축가가 동아시아의 일본 식민지에 파견돼 공부한 결과를 일본 바깥에서 보여준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높은 수준에 도달한 건축물 몇몇은 중국 내 세계적 수준의 건축물들을 접하면서 쌓은 견문과 지식이 낳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요코하마정금은행 다롄지점이나 초대 대만은행 본점 등 식민지 은행의 점포는 대부분 지배 지역에 거점을 둔 건축가가 설계했다. 이것이 식민지 건축의 본래 특징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대만은행 본점과 만주중앙은행 본점만 도쿄에 거점을 둔 니시무라 요시토키가 설계했는데, 이는 만주사변 발발과 만주국 성립 등 동아시아 국제관계가 변하고 일본과 지배 지역 간 결합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설할 수 있다.

식민지 은행 건물은 은행 조직이 변한 뒤에도 살아남은 사례가 많다. 조선은행 본점은 1950년 한국은행 본점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쓰였다. 한국은행이 기존 건물 서쪽에 고층 빌딩을 새로 지어 본점을 이전한 후에 구 조선은행 본점 건물은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으로 개편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노무라가 대만에서 조선으로 이동한 것은 그의 대만총독부 영선과장 경력에 조선총독부가 주목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대만총독부 청사 설계에서 보여준 노무라의 업적을 고려해 당시 설계 중이던 조선총독부 청사 설계에 그의 경험을 살리고자 했다.

오노기가 대만총독부에서 만철로 옮겨 간 일이다. 이는 만철 건축 조직이 지배 지역인 중국 동북 지방에서 활동하는 데 큰 의미를 띠었다. 즉, 이민족 지배나 일본과는 다른 기후나 풍토를 겪어보지 못한 만철의 일본 건축가·건축기술자들이 만철 본사가 다롄으로 이전하면서 작업을 시작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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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에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이들 도시에는 지배의 흔적을 보여주는 건물들, 예를 들면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구 조선은행 본점), 중화민국총통부(구 대만총독부), 다롄빈관(구 야마토 호텔) 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건물을 마주하지 않고, 먹거리와 선물에만 관심을 보이는 일본인의 자세는 우습고, 도시의 역사를 알려고 하지 않는 증거를 내보이는 꼴이다.

시대에 상관없이 다른 국가에 대한 침략과 지배가 그 국가의 사람들에게 크나큰 피해를 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와 함께 수반된 무력 충돌과 전쟁은 승패에 상관없이 양 국민 모두에게 피해를 남긴다. 허나 가해국의 사람들은 그 피해로부터 눈길을 돌리기 쉬운 법이다. 그뿐 아니라 피해를 준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잘못을 범한다. 이것은 타국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다시 일으킬 위험을 낳는다. 지금 침략과 지배를 다시 묻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고 그 재발을 허용하지 않는 데에 있다.

. 즉, 언제든 침략과 지배를 다시 물어야한 한다. 전쟁을 겪은 세대든 아니든 그렇게 해야 하며, 이것이 새로운 것을 잃어버리는 행동은 아니다.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물류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사회적 지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조선 각지에서 재료를 조달해서 지은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볼 수 있듯이 건축 재료의 확보는 지배력을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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