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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란 민족들이 깨어나 자기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이 없는 곳에서 민족을 발명한다. 다만 발명을 하더라도 애초부터 무언가 남들과 다른 특징이 있어야 써먹을 수 있는데, 물론 이러한 특징은 앞서도 말했듯이 순전히 부정적인 성격의 것일 수도 있다.(다시 말해서, 기득권의 참여 자격을 박탈하는 특징일 따름이며 장차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게 될 그들 실격자들 간에 그 이상의 아무런 적극적인 유사성이 없을 수도 있다.)

겔너의 핵심주장 즉 "‘민족(정체)성’에 의한 분류는 ‘문화적’ 분류이고 이것은 언어적 분류이다(아니 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주의를 기본적으로 언어중심의 운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화’와 ‘언어’는 근대적 조건에서 다소간에 서로 교환될 수 있는 용어이다.

우리는 스미스가 ‘근대화 이론’을 이미 불신의 대상이 된 낡은 패러다임으로 규정하면서, ‘전통’과 ‘근대성’의 개념이 유럽중심주의의 산물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 일단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통’ 대 ‘근대성’이라는 관념은 잘못된 것이고,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도 불가피하거나 불가역적인 전환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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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로서의 인류학자 - 레비스트로스, 에번스프리처드, 말리노프스키, 베네딕트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7
클리퍼드 기어츠 지음, 김병화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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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는 '저자'와 '작가'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저자는 기능을 수행하고 작가는 활동을 한다. 저자는 사제 역할을 하고 작가는 서기 역할을 수행한다. 저자에게 '글쓰기'는 자동사이다. "그는 세계의 왜를 어떻게 쓰는가 안에 철저히 흡수하는 사람이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타동사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쓴다. "그가 어떤 목표를 설정할 때 언어는 그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에게 언어는 실천을 떠받칠 뿐 실천을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의사소통 수단의 본질, '사유' 수단의 본질로 복원된다." _ 클리퍼드 기어츠,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p30

클리퍼드 기어츠 (Clifford Geertz, 1926~2006)의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Works and Lives: The Anthropologist as Author>에서 롤랑 바르트(Roland Gerard Barthes, 1915~1980)의 표현을 빌려 '문학으로서의 인류학, 사제로서의 인류학자'를 말한다. 저자와 작가. 이들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다시 말하지만 내가 방금 사용한 어휘에도 불구하고, 핵심은 '그곳'에서 겪은 것을 '이곳'에서 말하는 것으로 옮겨오는 경로의 문제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인 문제다. 아 문제는 '목격하는 나' 접근법을 취해 문화를 해석하는 모두에게 발생한다... 사회적 기호나 분석의 힘이 아닌 감수성을 민족지의 중심부에 두는 것은, 스스로에게 텍스트 구축에 대한 독특한 성격의 문제를 내는 것이다. 즉 문제는 당신 개인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설명에 신뢰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_ 클리퍼드 기어츠,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p101

그것은 주체와 타자의 문제이며, 언어의 문제다. 인류학자들은 학문의 성격상 연구자와 다른 이들과 소통하며 관찰한다. 소통을 통해 그들과 가까워진다면 객관성이 흐릿해질 것이며, 그들과 떨어져 관찰만 진행한다면 진정한 의미를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인류학자들은 '과연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인가?' 에 대한 문제와 부딪히게 된다. 이와 함께 연구자들은 언어의 문제와도 직면한다.

인류학은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만남을 포함한다... 많은 경우 거리두기는 타자를 원시적이고 기괴하며 이국적인 존재로만 주목하는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친숙한 '우리'와 이국적인 '그들'의 간극은 타자를 의미 있게 이해하는 데 굉장한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면 타자의 세계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민족지적 거리 유지는 ... 죽음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의 편협화 parochialization 혹은 민속화 folklorization라는 결과로 이어져왔다... 하지만 만약 인류학자와 타자의 거리를 줄일 수 있다면, 우리와 그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면, 진정으로 인간적인 인류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_ 클리퍼드 기어츠,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p26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객관적 사실, 대상과 관련을 맺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인류학자의 사고를 향하고 있는가. 언어가 대상을 지향하여 귀납적인 사실로부터 일반적인 법칙을 도출했을 때 인류학은 사회과학으로서 기능하는 반면, 언어는 인류학자의 '답정너' 식 결론의 도구로 작동할 것이며, 이때의 인류학은 문학이 될 것이다. <저자로서의 인류학자>에서 저자 클리퍼드 기어츠는 여러 인류학자들 - 레비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2009), 말리노프스키(Bronisław Kasper Malinowski, 1884~1942),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 등 - 의 저작 안에서 이러한 문학적인 면을 지적한다.

일기를 쓰는 사람의 과제는, 리비도적인 그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저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또한 "작가에서 개인으로 전환시키는 일종의 회전고리를 통해 매혹하고...... '나는 내가 쓰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자발적'인 글쓰기 형태를 선택함으로써 나 자신이 삼류 배우 중에서도 제일 어설픈 배우임을 알게 되었으니. _ 클리퍼드 기어츠,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p114

문학으로서의 인류학과 과학으로서의 인류학. 감성과 이성, 어느 편이 더 인간을 이해하는 인류학(anthropology)의 목적을 충족시키는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저자로서의 인류학자와 작가로서의 인류학자에 대한 비교는 이와는 다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알고 싶고 알아야 하는 것이 인류학자의 의견인가 아니면 다른 이들의 삶인가 하는 것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은 비교적 쉽게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저자로서의 인류학자>는 이러한 면을 잘 깊어준 책이라 생각된다...

이국적인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한 것처럼 만남의 즉각성에서 물러나 사고의 균형을 찾음으로써, 혹은 E-P가 한 것처럼 그들을 아프리카 항아리에 그려진 형상으로 변형시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런 즉각성 속에서 자신을 잃고, 어쩌면 영혼까지 잃어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_ 클리퍼드 기어츠,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p99

너무나 방대하고 포착하기 어려운 실체인 서구적 상상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쉽게 말할 수 있는 차원에서 이야기하면, 그것은 이런저런 부류의 타자들과 실제로 접촉을 하면서 타자의 타자성이 표상하는 바를 원래와는 좀 다르게 구축하는 경향이 있다. _ 클리퍼드 기어츠, <저자로서의 인류학자>,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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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와 마찬가지로 인도양에서도 그러한 연안 항해는 전쟁 중인 지배자들과 국제 외교의 그늘에 가려 역사적 각광을 받지 않은 채 번성했다. 근해 운항은 수천은 아닐지라도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채 오로지 예측 가능한 바람의 리듬으로만 이어진 여러 민족과 국가들 간의 연결을 촉진했다. 긴밀하게 상호 연관된 몬순 세계는 그렇게 생겨나 동아프리카 해안과 홍해에서부터 인도와 스리랑카, 그리고 멀리 동남아시아와 중국까지 뻗어 갔다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이집트 돛단배는 대략 기원전 3200년 것으로 추정되는 항아리에 등장한다.6 상이집트 아비도스에서 발굴된 장례용 배는 총길이가 대략 25미터로 길고 좁았으며 대략 30명이 저었다. 초창기 선박의 또 다른 인상적인 사례는 카이로 인근 기자의 피라미드 곁에 나란히 놓여 있다. 목재 수요가 엄청났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삼나무 통나무를 레바논 해안에서 나일 강으로 대량으로 실어 날랐다

"석조 도시"는 단순한 건축학적 유행 이상이었다. 석조 도시의 출현은 번영하는 도시 상인 계층의 성장과 일치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부를 지배했고 따라서 정치권력에 접근해 갔다. 석조 도시 건축은 가장 오래되고 명망 있는 도시 가문인 와웅그와나를 정점으로 스와힐리 사회 내에 서로 다른 집단들이 존재한 현실을 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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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자원이 빈약한 섬에 식량 공급원을 증대해 보려는 이런 무모한 시도는 인류 역사에서 독보적이다. 지구 상에서 최초로, 사람들은 식량 공급원이 있는 곳으로 가는 대신 공급원을 이동했다. 나중에 섬에서는 농경이 시작되었다.

라피타인들의 태초의 항해는 탐험의 여정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의도적인 식민화의 여정이었다. 이전에 무인도였던 땅에 위치한 가장 초기의 유적지들은 임시로 거쳐 가는 야영지라기보다 식민지로 건립된 명백한 영구 정착지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주자들은 그곳에 한 세대 이상을 머물렀고 그다음 다시 새로운 섬을 찾아 바다로 나갔다. 신속한 라피타 식민화가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되었다.

의례적 교환이라는 이 질서 정연한 제도는 각종 부차적 행위, 특히 도끼와 까뀌 돌 같은 필수품을 물물 교환하는 일상적인 교역 활동의 보호막이다. 쿨라 고리에서 즉흥적인 것은 거의 없는데 교환은 꼼꼼하게 정해 둔 날짜에 따라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은 정기 모임에서 신중하게 모집된다.

신성한 최고 족장 투이 통가*가 세심하게 통제되는 체제를 관장했는데, 이는 통가 제도를 넘어 멀리 서쪽의 피지와 동쪽의 사모아까지,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인위적으로 조성된 연계에 바탕을 둔 통치 체제였다. 친숙한 항로를 따라가는 장거리 여정은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유대를 다지는 전략적 결혼과 결합하여 이 "제국"의 핵심을 이루었다.

완전한 현생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6만 년 전이나 어쩌면 그보다 앞서 동남아시아에 정착했다. 4만 5천 년 전에 이르자 현생 인류는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했다. 그들은 1만 5천 년 전쯤에 북아메리카로 건너갔다. 앞서 본 대로 그즈음에는 소수의 고기잡이들과 항해자들이 뉴기니와 남서태평양 지역, 즉 솔로몬 제도와 비스마르크 제도에 이미 오래전에 정착해 있었다. 기원전 1500년 이후에 그들의 후계자, 농경인이자 뛰어난 항해자인 라피타인이 기준 가시선 항법에 의존해 섬에서 섬으로 항해했고 마침내는 먼바다로 나가 산타크루즈 제도까지 진출한 다음 기원전 800년까지 궁극적으로 통가와 사모아 섬에 도달했다. 거기서 항해자들은 여러 세기 동안 탐험을 중단했다.

캐롤라인 제도의 항로 안내인들은 어떤 천정 별이 각각의 섬들 바로 위로 지나가는지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미지의 바다를 탐험할 때 그들은 뱃머리를 돌려 천정 별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한 채로,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항해했다. 그들은 또한 북극성, 남십자성의 다섯 가지 위치 및 13개의 별자리를 바탕으로 한 일종의 항성 나침반을 사용했다. 항성 방위는 32개의 나침반 방위 표시를 규정했다.

이것은 에타크etak, 카누가 정지해 있다는 관념이 허상이라는 것을 잘 아는 항로 안내인들이 이용하는 거리 표시 체계이다. 그들은 마음속 이미지, 즉 그들이 가는 경로에 대하여 기준 섬의 상대적 위치를 가지고 생각한다. 따라서 수평선 위에 놓인 별의 위치가 이동 중인 섬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 준다는 마음속 이미지는 항법 장치로서는 전적으로 말이 된다. 이런 식으로 항해가는 자기 주변에 움직이는 사물의 숫자를 최소화한다. 그는 머릿속으로 카누와 별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는 반면 섬은 움직이는 것처럼 사고한다. 바다에 대한 그러한 인식 속에서 그는 카누가 목적지 섬으로부터 동일한 방위에 위치하듯이 기준 섬이 카누로부터 동일한 방위에 위치할 때 자신이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거리 항해는 특권적 행위였다. 대부분의 폴리네시아인들은 초호*에서 고기를 잡고 텃밭을 일구며 고향에 머물렀다. 경작 가능한 토지는 심지어 더 넓은 섬에서도 사회적 삶의 근간이었다. 농경과 연관된 사회 구조는 상속과 토지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출생 순서가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오세아니아 원해의 식민화를 추진한 원동력은 땅과 상속권에 대한 추구일지도 모른다. 위신과 권력도 해양에서의 전문적 능력, 대양의 비밀을 해독하는 지식으로부터 나왔다. 대양을 건넌 사람들에게 폴리네시아 바다는 장벽이 아니라 섬과 섬을 잇는 바닷길 고속도로의 네트워크였다.

에게 해 농사의 불확실성은 발굽 동물을 비롯한 각종 식량을 저장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했음을 의미했는데 이런 저장 과정에는 틀림없이 이웃한 공동체들, 심지어 섬들 간의 분담이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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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타인들의 태초의 항해는 탐험의 여정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의도적인 식민화의 여정이었다. 이전에 무인도였던 땅에 위치한 가장 초기의 유적지들은 임시로 거쳐 가는 야영지라기보다 식민지로 건립된 명백한 영구 정착지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주자들은 그곳에 한 세대 이상을 머물렀고 그다음 다시 새로운 섬을 찾아 바다로 나갔다. 신속한 라피타 식민화가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되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조상을 공경했다. 조상들의 이름은 항해의 전설처럼 대대로 전해졌다. 조상들의 위업은 허구적인 것이든 아니든 여기저기에 고립된 사회들을 잇는 구전 전통의 사회적 접착제였다. 대양의 민족들이 한 섬에서 다른 섬으로 이동했을 때 그들은 신적 존재들, 문화의 영웅들,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풍성한 지식의 광맥을 함께 가져갔다.

의례적 교환이라는 이 질서 정연한 제도는 각종 부차적 행위, 특히 도끼와 까뀌 돌 같은 필수품을 물물 교환하는 일상적인 교역 활동의 보호막이다. 쿨라 고리에서 즉흥적인 것은 거의 없는데 교환은 꼼꼼하게 정해 둔 날짜에 따라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은 정기 모임에서 신중하게 모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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