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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2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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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사진에 등장한 사람들은 아직 사진의 소년처럼 파열되고 신에게 버림받은 듯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었다. 그들 주변에는 어떤 아우라(Aura)가, 시선이 그것을 파고드는 동안 그 시선에게 충만한 안정감을 주었던 어떤 매질(媒質)이 있었다. 그리고 이 아우라에 상응하는 기술적 등가물도 분명히 있다. 즉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어두운 그늘까지 이어지는 명암의 절대적 연속체가 그것이다. _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p175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1940)은 복제기술에 의해 파괴되는 아우라(Aura)에 주목한다. 일회적인 의식(儀式)과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가치는 복제기술이 만들어 내는 복제물의 반복적인 생산과 일시적 가치로 대체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아우라의 소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벤야민은 한 걸음 더 들어가 예술을 바라보는 대중의 태도에 주목한다.


 상(像)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서로 밀접하게 엉켜 있는 데 반해, 복제물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에서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이 갖는 특징이다. _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p184


 복제기술은 복제된 것을 전통의 영역에서 떼낸다. 복제기술은 복제를 대량화함으로써 복제 대상이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대신 대량으로 나타나게 한다. 또한 복제기술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그때의 개별적 상황 속에서 복제품을 쉽게 접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품을 현재화한다. _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2판)>, p47


 핵심 부분이란 바로 예술작품의 진품성이다. 어떤 사물의 진품성이란, 그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과 함께 그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가치까지 포함하여 그 사물에서 원천으로부터 전승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 개념이다.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가치는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복제의 경우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손을 떠나게 되면 사물의 역사적 증언 가치 또한 흔들리게 된다. 이로써 흔들리게 되는 것은 사물의 권위, 사물의 전통적 무게(의미)이다. _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2판)>, p46


  의식에 깃들었던 예술이, 복제기술에 의해 파괴된 옛 터전을 떠나 새롭게 자리한 곳은 정치(政治)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이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재현되어 아우라를 간직했었다면, 사진과 영화에 의해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보다 많은 관객들에게 노출된다는 사실은 관객들이 수용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비평가, 행위가로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를테면 피카소와 같은 회화에 대해서 가졌던 가장 낙후된 태도가 채플린과 같은 영화에 대해 갖는 가장 진보적 태도로 바뀐 것이다. 여기서 진보적 태도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라보고 체험하는데 대한 즐거움이 전문적인 비평가의 태도와 직접적이고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_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p134


 이처럼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사진의 작은 역사>를 통해 기술복제 시대의 미학(美學)을 대중과 정치에서 발견한다. 지난 20세기 기술복제가 가져온 접점 - 대량생산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와 대중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는 민주주의의 만남 - 다음에 벤야민은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대결을 예상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의 예상과는 조금은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매스 미디어 대신 개인 미디어의 등장, 파시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 대신 민주주의 정체 내에서의 성향 대립은 기술복제시대를 가능케 했던 기술이 이제는 보다 예리한 메스가 되어 우리 사회를 분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보다 심화되는 인간소외의 현실 속에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사진의 작은 역사>는 '아우라'라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선 깊은 통찰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카메라에 비치는 자연은 눈에 비치는 자연과 다른 법이다. 다른 이유는 무엇보다 인간이 의식을 갖고 엮은 공간의 자리에 무의식적으로 엮인 공간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_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p168


 예술 생산에서 진품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그 효력을 잃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능 또한 변혁을 겪게 된다. 예술이 의식에 바탕을 두었었는데, 이제 예술은 다른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 _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2판)>, p53


대중은 예술작품을 대하는 일체이 전통적 태도가 새로운 모습을 하고 다시 태어나는 모태(matrix)이다. 양은 질로 바뀌었다. 예술에 참여하는 대중의 수적 증가는 참여하는 방식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 P143

사람들은 위대한 예술작품들을 더 이상 개인들의 창조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들은 집단적 구성물이 되었고, 너무 강력해져서 그것들을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축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건에 걸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기계적인 복제방식들은 일종의 축소기술인 셈이고 또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작품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러지 않고서는 그 작품들은 전혀 이용할 수 없게 된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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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의 기준에 대하여 / 비극에 대하여 외 미학 원전 시리즈 3
데이비드 흄 지음, 김동훈 옮김 / 마티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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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에게 아름다움과 숭고는 구분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별개의 현상은 아니다. 사랑이나 미움, 슬픔과 환희와 같은 정념이 거의 지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워져서 감정으로 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름다움으로 인해 유발되는 감정도 정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화될 수 있다... 흄은 숭고의 현상을 아름다움으로 인해 고양되는 감정의 고양과 관련하여 고찰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아름다움과 숭고를 본질적으로 다른 현상으로 구분한 버크와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p137) - 해제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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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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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만 본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일종의 선택 행위다... 우리는 결코 한 가지 물건만 보지 않는다. 언제나 물건들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다... 타인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 자신 역시 가시적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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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2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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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2>에서는 <미학 오디세이>에 이어 근대 이후 현대 예술(미술) 중심으로 미학(美學)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작가가 생각하는 현대 예술이 그 이전 시대의 예술과 구분되는  특징은 무엇일까? 작가는 그것을 '의미 정보의 분리'라 해석하고 있다.


1. 현대 예술과 의미 정보의 분리


'현대 예술은 그림 밖의 어떤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지시하는 게 있다면 오직 자신뿐이다. 여기서 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로의 전환이 시작된다. 예술 작품의 정보 구조를 우리는 둘로 나눌 수 있다. 가령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 ~ 1640)의 <파리스의 심판>을 생각해보라. 우린 이 작품 속의 장면이 어떤 장면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그림1] 파리스의 심판 (출처 : http://cfile27.uf.tistory.com/image/1172CC3B4FFCF6B2366F4D)


이게 바로 그 작품의 '의미 정보'다. 이제 이 내용을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그럼 그림 속엔 순수한 형태와 색채만 남는다. 이게 바로 작품의 '미적 정보'다. 의미 정보를 중시한 고전 회화에선 형태나 색채가 주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엔 내용이나 주제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색과 형태라는 형식 요소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즉 미적 정보만 있을 뿐이다.'(p43)


2. 화폐의 금태환 금지... 화폐와 신용의 결합


현대예술과 의미의 분리라는 지점에서 한 가지 다른 생각이 들게 된다. 다소 엉뚱하지만 1971년 달러의 '금 태환 정지'선언과 현대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1971년 이전에는 '금(金 gold)'와 '달러 dollar'는 서로 묶여 있었기에 달러 발행액도 제한적이었다. 이와는 달리 금과 달러의 연관고리가 끊어지는 조치가 금 태환 정지다. 이 시점 이후 달러와 금은 제갈길을 가게 된다.


가. 달러 위기


'1950년대 말부터 서구의 눈부신 경제성장에 비해 미국경제는 정체하고 국제수지도 만성적이고 대폭적인 적자를 누적시켜 금 준비와 대외 단기달러채무 잔고의 비율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롯된 달러의 지위 동요는 1960년 가을에 표면화되어 그 후 이런 경향은 만성화되고 심각화되어 금융 위기인 달러 위기(dollar 危機)로 이어졌다.'


[그림2] 금 본위제(출처 : 한미경제협의회)


나. 금본위제의 붕괴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인한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발생하고, 전비조달을 위한 통화량 증발에 의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달러 가치가 급락하자 일부 국가들이 금태환을 요구하였고, 결국 금태환 정지선언인 1971년의 8·15 닉슨 조치는 이런 달러위기의 타개를 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나 이 조치에 따라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 국제 통화제도는 혼란에 빠지고 세계무역은 축소화의 경향을 지지게 되며 한편 후진국에는 악영향을 주었다... 금환본위제는 국제수지 자동조절기능의 약화와 통화팽창 가능성이란 약점때문에 1929년 대공황을 계기로 1931년 붕괴하게 된다. 따라서 이때의 무역정책을 보면 강력한 보호무역조치가 만연하는 경향이 나타났었다. 특히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은 국제통화질서를 회복하기 어려운 결정타를 가하였다. 주식시장의 붕괴는 급속히 전 세계로 확대되어 유럽각자의 연쇄적인 파산을 불러일으켰고, 그 후 미국마저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하여 주요선진국은 일시적인 변동환율을 채택하게 되었다. 여기서 금본위제도는 붕괴되고 말았다.' (이상 출처 : [위키백과])


마치 금태환 정지라는 사건 이후 달러가 금으로부터 독립된 것처럼, 현대 예술은 의미 정보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것은 상호 관계 속에서 유지되기 때문에 달러와 현대 예술 역시 그 자체로 독립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이들은 각각 새로운 의미와 결합을 하게 된다. 먼저 통화부터 살펴보자.


다. 통화와 신용(信用)의 결합


통화는 금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발행액의 제한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가치 평가를 위해서 다른 요소 '신용(信用)'와 결합된다. 물론 이전에도 채권등이 있지만, 현대의 채권은 단순한 채권채무관계 증서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통화정책의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관계가 새롭게 맺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최근 양적완화정책으로 대표되는 국채발행과 중앙은행의 국채매입은 이러한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림3] 통화지표의 구성 내역 ( 출처 : 한국은행 <우리나라의 통화지표 해설>)


2. 고전 예술과 현대 예술 


그렇다면, 현대 예술은 무엇과 결합했을까? 현대 예술은 (가치 평가를 위해) 미적 정보와 결합했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 ( )안은 겨울호랑이 해석


'의미를 중요시한 고전주의 예술에선 대상의 형태가 가장 중요했다. 색채는 단지 대상의 형태를 분명히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현대 예술에선 대상성이 사정없이 파괴된다. 형태와 색채는 대상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구성을 이룬다. 결국 고전주의 예술은 의미 정보를 추구한 반면, 현대 예술은 의미 정보를 단순화하는 가운데 미적 정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p249)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 Heisenberg, 1901 ~ 1976)의 불확정성 원리는, 세계를 확실하고 고정된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현대 예술이 확실하고 고정된 필연성에서 도피하고 다의성을 띠는 경향은, 이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의 위기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열린 작품이 부정적 측면만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우린 그 속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새로운 인간 유형이다.'(p291)


<미학 오디세이2>에서는 이처럼 현대 예술의 미적 의미와 다의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름다움의 상징은 여신(女神)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미술의 아름다움은 조각으로 대표된다. 대리석안에 상(像)의 idea가 숨겨져있다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 ~ 1564)의 말처럼 그리스 조각상에는 수학적 비례를 갖춘 많은 미의 이상이 표현되어있다.


[그림4] 아리아스(출처 : 나무위키)


반면, 고대에는 어느 정도 미의 정형성이 있었다고 한다면, 현대예술은 다양성을 인정한다. 


[그림5] 아리아스(부제: 피카츄) (출처 : 겨울호랑이 핸드폰)


 위의 사진을 보고  아리아스라고 이름을 붙였을 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성이 고대 예술과 현대 예술의 차이라 생각된다.(너무 무리했을 수도 있겠다.) 비록, 모두의 공감을 얻기 힘들더라도, 적어도 겨울호랑이가 연의를 아리아스보다 예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현대예술의 열린 개방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미학 오디세이2>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마그리트(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 1898 ~ 1967)의 여러 작품을 통해 잘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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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4-18 17: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에 나오는 미술 작품에는 ‘정보’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예술 작품들은 색과 형태라는 형식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어요. 과거에 눈으로 보는 감상 행위는 무의미해졌어요. 그래서 요즘 예술 작품들은 난해해요. 예술 작품 속 심미적 가치가 좋아서 그걸 사들이는 컬렉터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 컬렉터들은 경제적 가치를 보고 작품을 수집합니다. 재료비, 캔버스 크기, 호수 등 작품 거래 가격을 매기는 데 영향을 주는 특별한 ‘정보’만 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4-18 17:51   좋아요 1 | URL
^^: 네 저도 cyrus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어느 정도 ‘의미 정보‘가 공유되어야 감상자의 의견과 느낌이 나올 수 있을텐데, 예술가의 주관적인 미가 기준이 되니 이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예술을 음미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 이 지점이 현대 예술을 어렵다고 느끼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인 것 같아요...

2017-04-18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18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04-18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리아스 조각상 아래 연의 아리아스 나타나서 빵ㅋㅋ 두상에서 조각상처럼 빛이 나ㅋㅋ
비교해 보다보니 닮은 듯도....호오~ 이 장르는 개념미술이군....ㅎ

겨울호랑이 2017-04-18 18:24   좋아요 1 | URL
ㅋ 뭐 장르랄 것도 없고 딸바보 아빠의 주책없는 망언이겠지요^^:

AgalmA 2017-04-18 18:26   좋아요 1 | URL
사랑하지 않으면 깊은 의미도 보이지 않는 법^^

겨울호랑이 2017-04-18 18:35   좋아요 1 | URL
^^: AgalmA님께서 잘 받아주시는군요..사실 제가 봐도 피카츄쪽에 가까워요 ㅋㅋ

서니데이 2017-04-18 1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예쁜 연의사진이네요.
반짝반짝하는 느낌입니다.
아이들은 볼 때마다 조금씩 크는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님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7-04-18 18:36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리뷰엔 연의가 언제나 구원투수로..ㅋㅋ 좀 너무한 아빠지요?

서니데이 2017-04-19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에서는 연의 얼굴을 조금 더 크게 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은데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셨나요.
겨울호랑이님, 따뜻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7-04-19 21:21   좋아요 1 | URL
^^: 네 서니데이님 아무래도 북플 사진이 많이 적지요? 오늘은 황사가 있어서인지 조금은 목니 칼칼하네요..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서니데이님, 편안히 하루 잘 마무리 하세요^^:
 
추의 역사 + 미의 역사 세트 - 전2권
움베르토 에코 지음, 오숙은.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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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美)의 역사(Storia Della Bellezza)>와 <추(醜)의 역사(Storia Della Bruttezza)>는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1932 ~ 2016)의 서양 예술(특히, 미술)에 나타난 미(美)와 추(醜)에 대한 이야기다. <미(美)의 역사(Storia Della Bellezza)>는 고대 그리스부터 20세기까지 예술 작품 속의 미(美)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시대에 따라 달라져온 '미(美)'의 개념을 살펴본다. 미(美)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미(美, beauty)

관념론은 미(美)란 정신에 의해 감지되는 것에 의해 성립된다고 본다.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가 미(美)는 이해(利害)를 떠난 순수한 감정에 있다고 본다든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1831)처럼 이념의 직관적인 형식하에서의 파악으로 나타난다고 한 것이 그 예다. 유물론에서는 지금까지 미는 객관적으로  갖추어진 것이고, 대상이 갖는 전체와 부분의 균형, 조화에서 나온다고 했다... 미는 이러한 활동을 미술이나 예술 상의 작품 속에서 형상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철학사전>, 중원문화(2009)


미(美)라고 하는 개념은 정신에 따라 감지되는 것이며, 시대별로 미(美)가 다른 양상에서 시작된다는 관점은 사전적 의미일 뿐 아니라 이 책 <미의 역사>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아름다움이란 절대 완전하고 변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기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원리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물리적인 아름다움(남자, 여자, 풍경의) 뿐만 아니라 하느님, 성인, 사상 등의 아름다움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움베르트 에코, <미의 역사>, p14


여느 책과 마찬가지로 서문은 책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특히, <미의 역사>에는 저자가 생각하는 미(美)의 개념과 책의 의도가 잘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서문의 중요성은 더해진다.


'다양한 미의 개념 뒤에는 모든 세기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몇 가지 독특한 규칙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그것을 발견해 내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 차이들을 밝혀 보려할 것이다. 그런 차이 밑에 숨어 있는 통일성을 찾아내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 <미의 역사>, p14


'완벽함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이상은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라는 한 단어로 대표된다. 이것은 칼로스(kalos, 일반적으로 "아름다운'으로 옮겨진다)와 아가토스(agathos, 대개 "선한"으로 옮겨지지만 일련의 긍정적인 가치를 모두 포괄한다)를 결합한 단어이다.' 움베르트 에코, <추의 역사>, p23


그리스인들의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라는 말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선(善)과 미(美)의 결합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선'과 '미'의 결합은 자연스럽게 '악(惡)'과 '추(醜)'의 결합으로 이어지면서 보다 복잡해진다.  그 결과 <미의 역사>의 후속편인 <추(醜)의 역사(Storia Della Bruttezza)>에서 추(醜)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반미(反美, 아름다움의 반대)', '비미(非美), 아름답지 않은 것 또는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한 것)', 독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추(醜)'.


'반미(反美)'라는 개념은 전통적인 관념으로 받아들여지는 절대적인 미(美)의 상대어이며 근대 이전에 주로 받아들여진 '추의 개념'이라 할 것이다. 한편, '비미(非美)'라는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초기 기독교 사상에서 '악(惡)'을 '선의 결핍'으로 정의한 초기 기독교 사상 속에서 나타나는 개념이다. 이러한 '비미(非美)'의 모습은 마치 '천국(天國)에 들어가기 위한 연옥(煉獄)'의 모습으로 잘 설명된다고 여겨진다. '추의 자율성' 부문에 대해서는 저자 움베르트 에코는 <미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추(醜)의 제시를 통해 독자들의 판단으로 미루고 있다. 서문에 나타난 대강을 살펴보면, '추(醜)의 자율성(自律性)' 에 대한 단초(緞綃)는  로렌크란츠의 <추의 미학>에서 찾을 수 있다.


'1853년 카를 로젠크란츠(Karl Rosenkrantz)가 쓴 최초이자 가장 완벽한 <추의 미학 Aesthetik des Hasslichen>은 추와 도덕적 악(惡)사이의 유추를 끌어낸다. 악(惡)과 죄(罪)가 선(善)의 반대이고, 선의 지옥(地獄)을 나타내는 것처럼, 추는 '미의 지옥이다. 로렌크란츠는 전통적인 관념으로 돌아가서, 추는 미의 반대이며 미가 그 자체 내부에 지니고 있는 일종의 오류이기 때문에, 미학이론이나 미의 학문은 추의 개념을 함께 다룰 의무를 함께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추상적 정의에서 추의 다양한 구현에 대한 현상학으로 옮아가는 그 순간에, 일종의 "추의 자율성'을 얼핏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자율성은 추를 더욱 풍부하고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그저 다양한 미의 형식에 반대되는 일련의 것 이상이 되게 한다.' 움베르트 에코, <추의 역사>, p16


저자는 서문의 마지막에서 '추(醜)'에 대해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반응"이라고 정리한다. '미(美)란 정신에 의해 감지되는 것'이라고 볼 때 이 역시 당연한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추(醜)'의 자율성 역시 우리의 자연스러운 반응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 이런 추들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추를 조화나 비례, 완전무결함으로 이해되는 미의 반대라고 할 수 없다... "아름다운"의 모든 동의어들은 무관심적 평가의 반응으로 여겨질 수 있는 반면, "추한"의 동의어들 거의 모두는 격렬한 거부감이나 공포, 두려움까지는 아닐지라도, 어떤 혐오감의 반응을 포함하고 있다(p16)... 앞으로 온갖 다양성과 복합적 양상을 띤 추, 이 추의 역사를 따라가면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다양한 그 추의 형상들이 일으키는 여러 가지 반응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에 반응할 때의 뉘앙스이다.' 움베르트 에코, <추의 역사>, p16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는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품과 이를 이해할 수 있는 당대 문헌 내용이 풍부하게 인용되고 있다. 책에서는 분량의 제한이 있기에 시대별 상세한 서술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미학사(美學史)의 흐름과 미학의 중요 두 개념 미(美)와 추(醜)에 대해 윤곽을 잡을 수 있다는 내용면에서 좋은 미학 입문서라 생각된다. 미와 추 전체를 한 편의 리뷰에서 정리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에 마지막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생각하는 미(美)의 개념을 '조화'와 '비례'의 개념에서 살펴보면서 본 리뷰를 마친다.


조화(造化, Harmony)


'조화는 미덕이다. 건강과 모든 선(善) 그리고 신성(神性) 역시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물들 역시 조화에 따라 구성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 <철학가들의 생애> (BC 6세기 ~ BC 5세기)


[그림] 라오콘과 아들들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aeyun4542&logNo=220622925372)


비례(比例, proportionality)


 '모든 사물들은 아름답고 어떤 식으로든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비례가 없는 미와 즐거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수적인 비례가 맞아야 한다. 따라서 "숫자는 창조주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모델"이며 사물들 속에서 지혜로 이끄는 중요한 흔적이다.' 바뇨레조의 보나벤투라, <하느님에게 이르는 정신의 순례> (13세기)


[그림] 비트루비우스의 비례도( 출처 : http://blog.daum.net/orteauc/6916958)


부분들의 비례


'미는 개별적 요소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부분의 조화로운 비례 속에, 즉 한 손가락과 다른 손가락들과의 비례, 손가락들과 손의 나머지 부분과의 비례, 손의 나머지 부분과 손목과 팔뚝과의 비례, 팔뚝과 전체 팔의 비례, 그리고 마지막으로 폴리클레이토스의 <카논>에 쓰여 있듯이 한 부분과 나머지 다른 모든 부분들과의 비례 속에 있다고 단언한다.' 클라우디우스 칼레누스 < 히포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가르침> (2세기)


PS. 개인적으로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미(美)'에 대해서 '아름다움'와 '아름다움의 대립자'간의 균형이 조화라고 해석했다는 면에서 '미의 상대성'을 잘 설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와 다른 해답을 제시했다. 그는 우주에 통일성과 다양성, 사랑과 증오, 평화와 전쟁, 정지와 운동처럼 서로 양립할 수 없듯 보이는 실재들인 대립자들인 존재한다면 이 대립자들 간의 조화는 그중 하나가 사라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둘이 계속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하는데서 성취된다고 말한다. 그럴 경우 조화는 대립자들의 부재가 아니라 그들간의 균형이다.' 움베르트 에코,<미의 역사>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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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6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16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르케스 찾기 2017-03-16 1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라,,
꼼꼼히
진심 잘 읽고 갑니다....

겨울호랑이 2017-03-16 12:13   좋아요 1 | URL
마르케스 찾기님 감사합니다^^: 아직 제가 미학에 대해 잘 모르기에 다른 미학책과 함께 읽으면 더 새로운 것을 찾을 것 같아요..

cyrus 2017-03-16 15: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를 따로 읽었지, 같이 읽어본 적은 없었어요. 두 권의 책을 같이 읽어보면 흥미로운 관점들을 발견할 수 있겠어요. 개인적으로 <추의 역사>가 좋았어요. 제가 어두운 분야를 좋아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7-03-16 15:28   좋아요 0 | URL
네, cyrus님 개별적으로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을 서로 대조해서 읽는 것도 독서의 집중도와 흥미 둘 다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추의 역사>는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아서일까요. 한 번 생각하고 펼쳐보게 되네요.. 이런 것도 일종의 편견이겠지만요..^^:

cyrus 2017-03-16 15:32   좋아요 1 | URL
<추의 역사>에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느낌의 그림 도판이 있어서 읽기 부담스러울 수 있어요. 저는 이 책을 맨 처음 읽었을 때 그림 보고 깜짝 놀란 적 있어요. ㅎㅎㅎ


겨울호랑이 2017-03-16 15:3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런것 같습니다. 특히, 다른 그림보다 <추의 역사> 뒷 부분에서 나무에 목매달린 아이들을 소재로 한 작품은 충격적으로 다가오네요.. 물론 저자는 ‘공포‘라는 감정도 ‘추‘의 한 갈래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충격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오거서 2017-03-16 1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의 역사, 추의 역사 두 책을 같이 읽으시는군요. 저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이라서 이런 시도는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7-03-16 20:31   좋아요 2 | URL
^^: 세트가 생겨서 읽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앞뒤로 연결해서 책을 읽으니 또 다른 것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거서님의 글을 읽다 보니, 국악과 클래식을 교차해서 듣는다면 더 좋은 음악감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만 해봅니다.. ㅜㅜ ..음악의 길은 참 멀다는 생각을 합니다. 쉽게 되지 않네요..^^:

오거서 2017-03-16 21:29   좋아요 3 | URL
책을 읽는 방법이 다양하면 그만큼 책읽기가 즐겁고 활자가 지식으로 경험으로 부뢀시키는 것이 쉬워지리라고 봅니다. 물론 책읽기와는 다르지만 음악 감상에도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해서 듣기도 하지만, 같은 곡의 다른 연주를 모아서 한 연주자씩 듣거나 한번에 두 연주를 플레이 하기도 합니다. 비교감상법이라고 하지요. ^^

겨울호랑이 2017-03-16 20:49   좋아요 2 | URL
요즘은 조성진의 피아노 연주가 귀에 잘 들어옵니다.^^: 19세기 쇼팽음악을 21세기의 시각으로 해석했다는 의미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냥 좋아 계속 듣고 있습니다. 아직은 비평할 입장이 되지 못해 당분간 좋은 연주자 음악을 즐길 계획입니다. 지금처럼 오거서님의 좋은 가이드 계속 부탁드립니다^^:

samadhi(眞我) 2017-03-18 1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남편의 평소 지론(?)과 꽤 비슷하네요. 우리 남편은 아무리 예뻐도 좀 쎄 보이면 못 생겼다고 치어다도 안 보거든요. ㅋㅋ 우리 남편이 선에 집착하는 편이라 아주 단순하게 해석해 봅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17-03-18 20:00   좋아요 1 | URL
그렇게 ‘진-선-미‘가 연결되네요^^: 단순히 이론만이 아님을 samadhi님의 사부님 지론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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