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제국사 1469-1716
존 H. 엘리엇 지음, 김원중 옮김 / 까치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16세기 스페인의 성취는 본질적으로 카스티야의 성취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17세기 스페인의 재난 역시 카스티야의 재난이었다. 오르테카 이 가세트는 합스부르크가 스페인에 대한 비명(碑銘)으로 사용할 수 있을 다음과 같은 글을 씀으로써 이 역설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했다.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만들었고,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파괴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438


 존 H. 엘리엇(John Huxtable Elliott, 1930 ~ 2022)의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Imperial Spain>는 15세기 중반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졌던 세 왕국 -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 의 전성기를 배경으로 한다. 포르투갈은 16세기에 일시적으로 스페인(에스파냐)에 병합되고 다시 분리되지만. 위에서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 1883~1955)가 언급했듯 스페인 제국 역사의 중심은 카스티야였으며, 시작 또한 여왕 이사벨 1세(Isabel I de Castilla y Aragon, 1451~1504)였다. 제국 스페인의 역사는 이사벨의 선택의 결과였다.


 이사벨이 왕위계승자로서 인정을 받자 그녀의 혼인은 국제적 관심사가 되었다. 그녀의 배우자감으로 세 명의 유력 후보자가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샤를 7세의 아들 발루아의 샤를과 결혼하여 전통적인 프랑스-카스티야 동맹을 강화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의 오빠가 원했던 것처럼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결혼하여 카스티야의 미래를 서쪽 이웃과 연결시킬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녀는 아라곤의 후안 2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페르난도와 결혼함으로써 후안 2세가 강력하게 책동했던 카스티야-아라곤 간의 통합을 성사시킬 수도 있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19


  상업 중심, 지중해 연안의 아라곤과 목축 중심, 대서양 연안의 카스티야는 분명 상이한 조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토양의 카스티야의 전사들을 뒷받침하는 아라곤의 관료제가 없었다면 제국은 유지될 수 없을 터였고 그런 면에서 이들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제국을 창조한 역동성은 거의 전적으로 카스티야에 의해서 제공되었다. 카스티야의 활력과 자신감은 카스티야인들에게 새로운 스페인 제국에서 자연스럽게 지배권을 쥐게 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뒤에는 행정 경험이 풍부하고 외교술과 통치술이 숙달되었던 아라곤 연합왕국이 있었다. 이 점에서 두 연합왕국간의 통합은 상호 보완적인 파트너간의 통합이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43


 그렇지만, 오늘날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CF 간의 유명한 엘 클라시코(El Clasico)에서 보듯  과거로부터 치열한 라이벌이었던 두 지역을 하나로 묶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가능했지만, 문화적, 경제적으로는 매우 힘든 일이었고 그 결과 제국은 초기부터 매우 연약한 구조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제국의 구조를 유지시키기 위해 그들은 결국 철저한 신앙의 힘에 의존하게 되고 그 결과 순수 가톨릭 중심주의는 이전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활력을 주던 무슬림과 유대인을 축출하는 정책으로 이어지면서 폐쇄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종교재판소의 설치가 무엇보다도 스페인 왕들의 지배영역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고안된 종교적 조치이기는 했지만 그것의 중요성이 결코 종교적 영역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신생 스페인의 경우처럼 정치적 통일이 절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나라에서 신앙의 통일은 카스티야인, 아라곤인, 카탈루냐인을 성(聖) 교회의 궁극적 승리를 보장하는 단일한 목적 속에 하나로 결속하게 하는 대체물로서 작용했다.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117 


 여기에 더해 결혼을 통해 제국을 정치적으로 유지시키려는 노력은 페르난드의 지나친 반(反)프랑스 움직임과 만나 스페인을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원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카스티야와 신대륙은 신성로마제국의 보급창고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었으나, 스페인은 카를 5세의 정복전쟁을 위해 다른 의미에서 식민지가 된 것이었다.


 카를 5세가 엄청난 돈이 드는 외교정책을 추진하고 그 비용을 대기 위해서 부채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카스티야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국가의 수입원들은 황제의 비용을 대기 위해서 수년 후의 것까지 저당잡혔고, 그중 많은 부분은 국외에서 이루어졌다. 부채에의 의존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데에 한 몫을 했다. 무엇보다도 국왕의 재정정책에서 장기적 전망의 부재는 재원의 헛된 낭비를 의미했고, 그 재원을 끌어내기 위해서 사용된 방법들이 카스티야의 경제 성장을 방해하려고 일부러 고안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228


 카를 5세( Karl V, 1500~1558)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Felipe II de Habsburgo, 1527~1598) 시기 스페인은 오스트리아와 분리된 별도의 제국이 되어 포르투갈을 병합하는 등 전성기를 맞지만, 여전히 독립을 둘러싼 네덜란드와의 전쟁, 대서양에서의 사략(私掠)행위를 둘러싼 잉글랜드와의 대립은 결국 스페인을 외부에서 무너뜨렸고, 스페인 제국 내에서 식민지 경제가 독자적으로 운용되면서 일어나는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아메리카가 새로운 제국정책을 뒷받침하는 재원을 제공하는 동안 그 제국 정책은 11580년 포르투갈의 합병이라고 하는 펠리페의 대성공으로부터 지리적 방향성을 획득했다. 포르투갈의 스페인 제국에의 통합은 펠리페에게 새로운 대서양 해안과 그것을 보호하는 데에 도움을 줄 함대를 제공했고, 아프리카로부터 브리질 그리고 캘리컷으로부터 몰루카 제도에 이르는 제2의 제국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치세 후반기의 제국주의를 가능케 한 것은 새로운 귀금속 유입과 함께 이 포르투갈 영토의 합병이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303


  이처럼 <스페인 제국사 1469-1716>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정치적 결합으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척박한 토양과 상대적으로 열등한 산업, 통합되지 않은 지역간의 갈등 등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한 정치적 선택으로 태어난 국가가 대항해시대라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극적으로 일어났으나, 결국 태생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스페인 역사 형성에서 중요한 이 시기 역사는 오늘날의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이해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일독(一讀)을 권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1576-79년 동안 아메리카가 유럽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들었다. 광산 채굴에 소요되는 비용이 높아졌기 때문에 은이 줄어들었고 이민자들을 위한 기회도 줄어들었다.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아메리카로 들어오는 물건도 점점 적어졌다. 그러나 스페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은 아메리카 식민지에 스페인 경제와 유사한 형태의 경제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스페인이 아메리카에 수출해온 주요 품목들이 아메리카 정주자들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332

안달루시아는 귀족이 지배하는 대규모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 되어갔고, 이 거대한 새로운 부에 의해서 부유해진 카스티야의 귀족들은 아직 부르주아지가 취약하고 그것도 북쪽 몇몇 도시들에 산재해 있었던 상황에서 거의 무제한의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되었다. 반면에 발렌시아에서는 국왕이 식민화와 재정주 과정을 보다 면밀하게 감독할 수 있었다. - P25

중세 아라곤 연합왕국에는 부유하고 역동적인 도시 과두귀족들이 있었고, 때문에 해외의 상어적 이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곳에는 또한 왕과 신민 간의 관계에서 계약적 개념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것은 여러 제도들 속에 효과적으로 실현되고 있었으며 제국을 운영하는 데에 좋은 경험이 되었다. - P30

동시대의 카스티야는 외부적이기보다는 내부적 지향성을 띠고 있었고 교역보다는 전쟁에 경도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카스티야는 목축적이고 유목적인 사회였고, 그런 습관과 태도는 끊임없는 전쟁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레콩키스타는 여러 가지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이교도에 대한 십자군 원정이기도 했지만 약탈을 위한 군사 원정이기도 했고, 또한 사람들의 이주이기도 했다. 레콩키스타의 이 세 가지 측면 모두가 카스티야인들의 생활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 P30

전통적으로 카스티야의 메세타(meseta)는 풍년이 들면 곡물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량을 생산했다. 그러나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비스카야 등 일부 지역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고 대개 카스티야로부터 배편으로 식량을 공급받아야 했으며, 아라곤 연합왕국도 안달루시아나 시칠리아로부터 곡물을 수입했다. 그러나 흉년이 들면 카스티야 역시 외국 곡물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 P128

카를 5세의 유럽 영토들 가운데 치세 초반에 제국을 운영하는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한 곳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였다. 그러나 이들 두 영토의 재원이 차례로 고갈되자 카를은 새로운 수입원을 찾아 다른 영토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 수 없었다. 1540년에 그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제 나의 스페인 왕국들에 의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 - P221

카탈루냐의 점진적 회복은 프랑스와의 끊임없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근대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경제 변화의 전조였다. 이제 반도에서의 경제적 무게 중심이 중심부로부터 주변부로 이동해가고 있었다. 주변부는 과세부담이 중심부보다 덜했고, 경제적 피로도 덜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는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만들었다. 이제 17세기에 와서 처음으로 스페인이 카스티야를 개조시킬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 P4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 사건, 정치, 인간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페르낭 브로델 지음, 임승휘.박윤덕 옮김 / 까치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기들에 대한 콩종튀르(conjoncture)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종종 구조(structure)의 더딘 역사를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이 기준이 되는 수면(水面)과 비교해야 한다(p446)... 더디게 움직이는 것과 빠르게 움직이는 것 사이를, 그리고 구조와 콩종튀르 사이를 분리하는 것은 여전히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논쟁의 한복판에 남아 있다... 결국 문제는 모순되는 연대기들을 조율하는 것이다. 콩종튀르에 따라서 국가와 문명들, 그 국가와 문명의 주역들, 그들의 한계와 의지들이 어떻게 부침했는가? 난세는 국가의 팽창에 유리한 것으로 보였다. 문명의 번성은 종종 경기가 하강하던 시기에 나타났다. 강대한 제국의 문명들이 자신을 과시한 시기는 거대한 해상제국들의 가을이었다. 이스탄불, 로마, 마드리드의 제국이 그러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447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 사건, 정치, 인간 La Mediterranee a l'epoque de Philippe II vol.3>은 <지중해> 3부작의 마지막이면서, 구조-콩종튀르-사건의 가장 표면에 있는 역사를 그린다. 대중들에게 사건(event)로 기억되는 역사적 사실. 저자 브로델은 상세하게 이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사실 보셀 화약(和約)의 체결은 로마의 입장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교황의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평화조약에 체결되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전파되었다. 협정이 깨어진 것은 어쨌든 교황 덕분이다. 아직 남아 있던 전쟁의 불씨가 이토록 신속하게, 그것도 단 한 사람에 의해서 다시 타올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거센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상기시켜준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62


 브로델이 그려낸 사건사에서 개인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프랑스 발루아 왕조와 오스트리아-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조 간 화의를 내용으로 한 보셀 화약을 파기시킨 파울루스 4세 교황(Papa Paolo IV, 1476-1559)이나, 북유럽 저지대에서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네덜란드 독립운동을 제압하지 못한 알바 공작(Gran Duque de Alba, 1507-1582), 레판토 해전을 승리로 이끈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 1547-1578)의 경우는 개인의 의지, 능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펠리페 2세는 이 계획에 동조했지만, 알바 공작은 예산 부족과 유럽의 상황을 이유로 반대하면서 국왕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가짜 위인은 사실 소인배였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공격할 줄 알았던 근시안적인 정치가였다. 그가 내린 총사면령은 너무 뒤늦은 조치였다. 결국 스코틀랜드 여왕은 잉글랜드로 망명했고 스코틀랜드는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고 말았다. 끝으로 알바 공작은 불안한 잉글랜드를 공격하기는커녕, 결코 유리한 입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협상이나 술책에 의존하려고 했다. 1569년, 먼 거리와 상황으로 인해서 사태를 책임졌던 것은 에스파냐 국왕이 아니라 신중한 알바 공작이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206


 그럼에도 개인이 거둔 빛나는 승리는 두드러진 사건에만 머무르게 된다.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결국 콩종튀르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최후의 갤리선 간 해전이라는 레판토 해전(1571)에서 거둔 에스파냐-베네치아 연합함대가 거둔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완승(完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판토 해전의 의미가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은 레판토의 패전이 오스만 투르크 해군의 궤멸을 의미하거나 에스파냐의 우위가 확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놀랍게도 이 예기치 않은 승리는, 1571년 10월 7일에 벌어졌다. 그러나 이듬해 동맹군은 모돈[메토네]에서 패퇴했다. 1573년에 재정이 바닥난 베네치아는 전쟁을 포기했다. 1574년 투르크는 라 굴레트와 튀니스에서 승리했다. 십자군의 모든 꿈은 이렇게 역풍을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우리가 사건들, 즉 빛나는 역사의 외피에만 집착하지 않는다면, 수천 가지의 새로운 현실이 팡파르 없이 조용히 나타나서 레판토 너머로 이어진다. 투르크의 마법은 깨졌다(p245)... 결국, 1574년의 승리 이후, 특히 1580년대 이후에 투르크의 대함대는 안으로부터 해체되었다. 1591년까지 지속되는 바다의 평화가 투르크 함대에게는 최악의 재앙이었다. 그 평화로 말미암아 투르크 함대는 항구에서 썩어나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판토 해전 하나가 이렇게 많은 결과들을 야기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그러나 레판토 해전은 분명히 이것들에 기여했다. 역사적 경험으로서 그 사건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아마도 "사건사(histoire evenementielle)"의 한계를 보여주는 두드러진 사례이기 때문일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246


 단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레판토는 해전에서의 승리일 뿐이고, 육지로 둘러싸인 지중해라는 물의 세계에서 한 번의 승리로 대륙으로 길게 뻗은 투르크의 뿌리를 잘라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성동맹의 운명은 로마에서만큼이나 빈에서,  폴란드의 새로운 수도인 바르샤바에서,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결정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이 지상의 국경에서 공격을 받았다면...... 그렇지만 그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결국 에스파냐는 필요한 만큼 오랫동안 철저하게 지중해에 개입할 수 없었다. 언제나 핵심은 거기에 있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268


 중요한 것은 지중해의 양대 세력이 거의 같은 시기 서로의 시선을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에스파냐 제국은 신대륙에서 얻어지는 막대한 금은과 함께 포르투갈 합병으로 인해 거대해진 대서양 영토로, 오스만 투르크는 발칸 반도로부터 시작되는 중부유럽으로의 확장과 아프리카-인도 항로에 관심을 가지면서 지중해는 더 이상 찾지 않은 평화로운 쇠퇴의 시기를 맞게 된다. 돈 후안의 빛나는 사건은 콩종튀르의 분기에서 전환점이 아닌 과정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브로델은 <지중해> 3부작을 통해 역사의 거대한 흐름으로부터 인간이 만들어낸 작은 사건을 구조에서 보여준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인가, 아니면 환경인가. <지중해>를 읽으면서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은 개인으로 현현한 시대정신(Zeitgeist)이지만, 그러한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수많은 요소의 합(合)임을 생각하게 된다...


 에스파냐가 지중해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투르크는 지중해에서 그들의 노력을 유지했을 것이다. 평화, 16세기 말의 준(準)평화는 서로가 적을 내버려둠으로써 성립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에스파냐가 북아프리카에서 기회를 놓쳤다면, 그것은 레판토 해전 이후 몇 년 동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16세기 초였다. 당시에 에스파냐는 자신이 추구하지 않았던 아메리카를 획득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땅에서는 과거에 에스파냐의 "역사적" 임무라고 불렀던 것, 그리고 오늘날 한층 더 새로운 표현인 에스파냐의 "지리적" 임무를 저버리고 새로운 그라나다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315


 이는 투르크의 강력한 전쟁을 전제로 하는가? 그런 정책은 존재한다. 술레이만 대제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른바 쇠퇴는 잘못된 평가이다. 투르크는 막강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고, 야만적이지 않고 오히려 잘 조직되고 훈련된 신중한 세력이었다. 투르크가 갑자기 지중해의 잘 알려진 땅들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향했을지라도, 이것은 투르크가 "쇠퇴하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가 아니다. 투르크는 단지 운명을 따랐을 뿐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3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럽에게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는 매력적인 지역이다. 투르크는 페르시아 문제를 두고 고심한다. 결국 이 시기 내내 지중해의 역사는 자율적이지 않다. 지증해의 운명은 인근 지역 또는 먼 지역의 운명과 연결된다. 이 연결 고리는 매우 중요해 보인다. 고난의 1558-1559년에 이르러, 위기감이 고조되고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서 지중해는 이제 자신의 전쟁을 치르며 홀로 분투하게 될 것이다.  - P17

섬(코르시카)는 자원에 비해서 너무 많은 인구를 부양하고 있었고, 전쟁은 불행을가중시킬 수밖에 없었다(p51)... 코르시카의 잘못이라고는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것뿐이다. 이 섬이 합스부르크 왕가 대발루아 왕가의 전쟁에서 중요했던 이유는 섬 자체보다는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파르마, 심지어 시에나 이상으로, 프랑스의 코르시카 점령은 신성 로마제국 황제와 그 동맹세력 사이의 연결을 방해했다. - P52

캅카스 산맥의 맞은편 전역, 캅카스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모든 지역이 카스피해로 열린 통로와 함께 오스만의 지배 아래에 복속된 것이다. 이것은 작은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독특한 활력의 신호이고, 사실 유일한 신호도 아니다. 그러나 지중해의 역사가에게 중요한 것은 지중해에서 먼 카스피 해 방향으로 투르크의 힘을 고정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심력에 의한 방향 전환이 적어도 1590년까지 지중해 무대에서투르크의 부재를 설명해준다.  - P359

에스파냐의 정책은 1578~1583년의 시기에 대서양과 서유럽으로 옮겨갔다. 그와 동시에 펠리페 2세의 치세 전반부를 결산한 1575년의 파산 직후, 귀금속의 유입으로에스파냐가 쓸 수 있는 전쟁 자금이 갑자기 늘어났다. 이 "전환기" 이후 1579년부터1592년까지 "은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것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펠리페2세의 정책이 다른 곳에서처럼 네덜란드에서도 지나치게 격해지고 대담해졌다. - P3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 집단적 운명과 전체적 움직임 - 하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페르낭 브로델 지음, 남종국.윤은주 옮김 / 까치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명이라는 존재 속에서 변화하는 것, 움직이는 것이 꼭 문명을 구성하는 전부도, 가장 좋은 면도 아니다. 결코 아니다. 문명 속에는 단기적인, 지속적인, 때로는 장기지속적인 콩종튀르와 구조가 있다. 하나의 문명이 다른 문명의 영역으로 의미 있는 침투를 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난폭한 무력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혹은 역사의 사건들이 만드는 우연이라는 변수들만을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다. 하나의 패턴이 처음부터 너무나 굳건하게 정해져 있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p516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 집단적 운명과 전체적 움직임 La Mediterranee a l'epoque de Philippe II vol.2>는 16세기 지중해 시대의 문명(文明 Civilisation)에 초점을 맞춘다. 앞선 2-1권에서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가져다 준 정치, 경제가 주제였다면, 2-2권에서는 그러한 정치, 경제체제의 결과물인 사회의 변화가 주제다.


 우리는 경제적 콩종튀르와 비경제적 콩종튀르를 분리해야만 한다. 후자 역시 시간의 길이에 따라서 측정되어야 하고, 위치가 정해져야 한다. 세기적인 트렌드와 유사한 것으로는 장기적인 인구 변동, 국가와 제국의 크기 변화, 한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 유동성의 유무, 산업 성장의 강도가 있다. 장기적인 콩종튀르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산업화, 국가 재정, 전쟁 등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p713


 결과적으로 브로델은 본문을 통해 자연의 만들어낸 구조사(構造史)의 큰 흐름이 이미 결정적인 흐름을 만들어냈고, 이러한 흐름은 국면사((局面史)를 통해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냈음을 말한다. 서로 다른 상황과 움직임 속에서 여러 계층, 집단은 저마다의 입장에서 각 상황에서는 최선의, 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다. 다만, 부분의 최적화가 전체적인 최적화를 달성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였고, 그에 따라 지중해의 역사 속에서 부르주아, 귀족, 왕, 유대인, 베네치아 등등의 세력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며 당대의 시대상을 만들어왔다.


 문명은 번영의 시기 ,단기적으로 혼란을 가중시키는 창조의 시기, 경제적인 승리를 구가하는 시기, 단기적인 사회적 시련의 시기를 거치며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그러나 토대는 그대로이다. 토대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적어도 천 배는 더 견고하다. 문명이 천 번을 죽는다고 해도 토대는 견뎌낸다. 수세기 동안 단조로운 이동이 계속되지만, 전체적인 토대는 변하지 않는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p540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에서 브로델의 결론은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는 더이상 세계의 중심, 세계의 바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제조업에서의 주도권이 북유럽으로 넘어가고, 영국-에스파냐 전쟁(1585 ~ 16045) 이후 동지중해를 중심으로 교역이 다시 활성화되고 있었지만, 이미 콩종튀르(Conjoncture) 관점에서 분명 지중해는 활력을 잃고 있었다. 이 시기 지중해의 번영과 쇠퇴는 다른 중심지에 의해 종속되는 변수였다는 사실은 세계 패권(hegemony)를 둘러싼 전쟁은 대서양과 북유럽 플랑드르 지역에서 치뤄지고 있었으며, 지중해 연안국들은 이러한 흐름을 되돌릴 힘을 이미 상실했음이 브로델에 의해 상세하게 논증된다.


 전쟁은 없었다. 이것은 또한 지중해가 더 이상 전쟁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 즉 전쟁비용을 치를 수 없었다는 증거였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이고, 만물의 자식이며, 수많은 수원을 가진 강이고, 해안이 없는 바다였다. 전쟁은 모든 것의 창조자이지만, 평화 그 자체의 창조자는 아니었다(p700)... 이제 대전쟁은 대서양을 따라 북쪽과 서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전쟁의 거점은 세계의 심장이 뛰는 그곳에서 수세기 동안 머물렀다. 이러한 이동 자체가 지중해의 후퇴를 말해주었고, 두드러지게 보여주었으며, 확고하게 만들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p701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를 통해 우리는 '지중해의 황혼(黃昏)'을 보게 된다. 에스파냐의 칼레 해전 패배 이후 다시 돌아온 듯한 베네치아의 번영도, 유대인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에스파냐의 움직임도 이미 거대한 판 위에서 결정된 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구조적 움직임에 대한 고려가 없는 가정, 예를 들면 '에스파냐가 네덜란드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제국을 유지했더라면 어떠했을까?'라는 물음은 마치 체스(Chess)에서 폰(pawn)이 여왕(queen)처럼 움직이는 것을 가정하는 것만큼 무의미할 것이다. 이제는 지중해에서 1권 구조사와 2권 국면사를 넘어 이제 마지막 사건사를 다룬 3권으로 넘어갈 차례다...


 문명의 첫 번째 실체가 경계를 설정하는 지리적 공간이라는 것 외에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문명은 공간이자 영역이다. 이때 공간이라는 말은 인류학자들이 양날도끼 혹은 깃이 달린 화살 지역이라고 말할 때에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한계를 부여하지만 그 인간에 의해서 끝없이 변화하는 공간이기도 하다(p536)... 변화는 분명히 일어난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 그 과정을 느낄 수도 없는 속도로 변화한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p537


 이베리아 반도를 강타했던 곡물 위기로 인해서 이베리아 반도는 북유럽 국가들에게 막대한 양의 정화를 지불해야 했고, 이렇게 북유럽은 또다시 에스파냐의 "적이지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 대변동은 에스파냐, 베네치아, 피렌체, 심지어는 프랑스에서까지 가격 변동을 일으켰고, 교역량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에서는 티에폴로 피사니 은행이 파산했다. 단기적인 위기, 경제생활의 극심한 혼란, 혼란의 전파와 변화무쌍한 성격이 지중해의 경제 변화의 새로운 지표가 될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p714


느리고 강력한 하나의 근본적인 움직임이 1550년부터 1600년까지 지중해 사회를 조금씩 뒤틀고 변화시켰다. 그것은 길고 고통스러운 변신이었다. 점차 커져가는 사회 전반의 불안은 공공연한 반란으로만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의 모습 전체를 바꾸는 사회적 성격을 가지는 격변이었음에 틀림없다... 사회는 나날이 광대해지는 토지재산을 보유한 부유하고 강력한 대귀족 가문과 점점 더 늘어나는 대다수의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들로 분명히 양극화되어가고 있었다. - P512

지중해라는 혼합의 영역 속에서 많은 문명 집단들이 번성했기 때문에 그 결과는 더욱 풍성했다. 한편으로는 문명 간의 교류와 새로운 요소의 유입이 다소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각각의 집단들은 독자성을 유지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낭만파 작가들이 오리엔트의 항구를 그릴 때와 같은 분위기의 너무나도 혼잡한 항구들에서 문명들은 서로 뒤섞였다. - P523

주는 자가 지배한다. 베풂의 이론은 개인이나 사회뿐만 아니라 문명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베풂은 장기적으로는 궁핍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베풂이 계속되는 한, 그것은 우위의 표지가 된다. - P6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 집단적 운명과 전체적 움직임 - 상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
페르낭 브로델 지음, 남종국.윤은주 옮김 / 까치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2부에서는 장기 지속의 역사를 넘어 좀더 개별화된 리듬의 역사, 즉 집단의 역사, 집단적 운명의 역사, 전체적 움직임의 역사를 파악할 생각이다. 이것은 사회사이다. 사회사에서는 인간이 사물을 이용해서 만들었던 것들로부터 출발한다. 이 책에서는 사회구조, 따라서 느리게 변해가는 구조에 관심을 가지려고 한다. 또한 구조의 움직임에도 관심을 둔다. 그리고 그것은 전문용어로 구조(structure)와 콩종튀르(conjoncture)라고 부르는 것, 즉 움직임이 없는 것과 움직이는 것, 느리게 움직이는 것과 빨리 움직이는 것이 서로 섞여 있는 것을 말한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11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 집단적 운명과 전체적 움직임 La Mediterranee a l'epoque de Philippe II vol.2>를 통해 우리는 에스파냐 제국이라는 구조 안에서의 콩종튀르를 통해 제국이 직면한 어려움을 확인할 수 있다. 1588년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의 패전 이후에도 상당기간 유지되었던 에스파냐의 패권. 브로델은 무적함대의 소멸이 직접적인 에스파냐 제국의 몰락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에스파냐 제국은 구조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고 변화하는 콩종튀르에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몰락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한 것이었다. 에스파냐의 문제. 이는 거대한 제국이 갖는 공간(空間)이었다. 

 

 에스파냐 거대 제국은 당시로서는 유례없이 거대한 해상과 육상 수송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제국에서는 끊임없는 군대의 이동 외에도 수많은 명령과 소식들이 날마다 전달되어야 했다. 펠리페 2세의 정책은 이러한 연결망, 군대의 이동과 귀금속의 수송, 환어음의 원활한 유통을 필요로 했다. 이것이 바로 펠리페 2세의 제국 경영의 상당 부분을 설명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이며, 또한 프랑스가 에스파냐에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준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35


 북유럽 저지대와 이베리아 반도, 남부 이탈리아와 신대륙에 걸친 거대 제국을 하나로 연결시키기에는 너무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시간의 제약을 극복하기 힘들었기에 정치면에서는 적절한 행정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경제면에서는 상품과 이에 대응하는 화폐의 교환이 늦춰질 수밖에 없었고, 유통속도(Velocity) 또한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상품 순환의 지체는 이 세계의 고질적인 병폐였다. 상품, 화폐, 환어음이 사방으로 움직이고, 서로 스치고 마주치고, 서로를 기다려야 했다. 모든 상거래 중심지는 상품, 화폐, 환어음이 만들어내는 다각적이고 변화무쌍한 콩종튀르를 끊임없이 경험했다. 그러나 느리게 순환하는 상품, 화폐, 환어음은 오랫동안 길 위에 머물러 있었다. 16세기에 개인 은행들에게 닥친 비극이 고객의 돈을 너무 느리게 순환하는 상품 거래에 부주의하게 투자하는 바람에 시작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기나 공황 사태가 발생하면, 며칠 안에 대금 지불이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했다. 거리라는 치명적인 지체 요인에 발목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42


 화폐 순환은 인간 삶의 일부 영역만을 관통한다. 중력의 영향으로 강물의 활발한 흐름이 낮은 지대를 향하는 것과는 달리, 화폐의 순환은 경제생활의 높은 단계로 간다. 순환은 끊임없는 불평등을 낳는다. 역동적인 지역 - 도시 - 과 농촌처럼 화폐가 없는 지역 사이에, 근대적인 지역과 전통적인 지역 사이에, 개발 지역과 저개발 지역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했다. 경제 활동 분야들 사이에도 불평등이 존재했다. 왜냐하면 수송, 산업, 무엇보다도 상업과 징세가 화폐 흐름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135


 신대륙에서 들어온 막대한 금과 은은 에스파냐 본국에서 빠르게 제국의 내외부로 흘러나갔다. 산업의 중심지였던 북유럽 저지대 국가들로의 유출과 상업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의 금, 은 유출은 불가피했다. 신대륙으로부터의 막대한 금과 은이 도착했지만, 제국의 모세혈관까지 혈액을 공급하기 위한 출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대륙에서의 막대한 수입 이상의 지출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1580년 이후 에스파냐만큼 아니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진정한 은화 분배 중심지가 이탈리아의 중요 상업도시들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핵심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는 넘쳐나는 에스파냐 은화의 일부를 레반트 지역으로 유출키시는 역할을 통해서 큰 이익을 얻었다. 그것은 수월하게 이익을 남기는 일이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은화와 환어음뿐만 아니라 금화까지도 네덜란드 구석구석에 공급하면서 이익을 얻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185


 북유럽이 필요로 하는 금과 환어음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지나치게 많은 양의 은화가 북유럽으로 유출됨으로써 시장이 혼란에 빠질 수 있었다. 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금화는 인기가 높았고, 부피가 작으므로 쉽게 송금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금화와 은화는 계속해서 교환되었다. 그러나 상인들은 병사들의 급여 일부를 은화로 지불하거나 가능하면 직물로 지급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운 업무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음을 분명하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195


 그 결과 제국은 재정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과중한 세금 징수는 제국 내 민심의 이반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제국이 세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1588년 무적함대의 몰락이 가져온 대서양 패권의 소멸때문이었다. 대서양 항해의 안전성이 위협받으면서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기존 레반트 지역의 무역이 재활성화되었고, 에스파냐 제국은 이로부터 지중해 패권 또한 위협받게 되었다.


 부당하게 배분된 이 엄청난 세금은 당시의 이용 가능한 모든 수단들을 통해서 징수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세금 중 일부만이 왕실 금고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카스티야는 확실히 제국에 가장 좋은 납세자였다... 간혹 있었던 확실하지 않았던 잉여는 제국의 전체적인 재정 적자 속에 소멸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잉여는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펠리페 2세의 통치를 받는 나머지 유럽 지역에서처럼 카스티야에서도 적자는 관행이 되었다. 따라서 모든 국가의 재정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236


 에스파냐의 실패 이유는 무적함대가 패한 이후 대서양에서의 항해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의 패배는 동맹세력의 파산인 동시에 대서양 여러 지역에서의  후추 무역의 쇠퇴를 의미했다. 판매 가격의 상승으로 컨소시엄 소유의 후추는 베네치아 시장에서 레반트로부터 들어온 후추보다 더 비싸졌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274


 브로델은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에서 광대한 공간(space)이라는 구조를 갖추었으나, 변화하는 콩종튀르에 대응하는 충분한 속도(speed)를 갖추지 못한 에스파냐 제국의 사회사를 보여준다. 느린 속도는 제국을 동맥경화 상태로 만들어 정보, 행정, 교역면에서 효율적인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비록 치명상은 입지 않았으나, 군사적으로 제국은 한풀 꺾인 상태였고 그 결과 높아진 대서양 항해 위협은 경쟁자인 베네치아, 오스만 투르크에게 몰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미 펠리페 2세이 아버지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부터 내재했으나, 강대한 제국의 위용 아래 숨겨졌던 약점들이 하나 둘 터져나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은 내외부적으로 어떤 도전을 받았는가. 이는 2-2권으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제 제국에는 과거의 장식들만이 남아 있었다. 카를 5세의 웅대한 정책은 펠리페 2세 치세 초기, 1559년에 평화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에 이미 1557년의 재정 파탄으로 갑자기 유죄선고를 받고 청산되어야 했다. 모든 것을 재구성하고 재출범시켜야 했다. 펠리페 2세의 통치 초기에 이루어진 강력한 평화정책은 제국의 약화를 보여주는 신호였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409


인구 증가 없이 그 모든 영광의 역사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인구혁명은 가격"혁명"보다 더 중요했으며, 어떻게 이 사건이 아메리카의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기 전에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인구 증가야말로 인간이 능력 있는 일꾼이었다가 점차 큰 부담으로 바뀌는 16세기의 승리와 재앙을 만들었다. 1600년경 인구 부담이 경제발전을 중단시키고, 범죄 같은 그동안 숨어 있었던 사회적 위기 현상을 조장했다. 이로 인해서 17세기에는 모든 혹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후퇴가 일어나고 곧 씁쓸한 내일을 맞게 될 것이다. - P72

문제는 16세기의 팽창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나타난 후퇴 국면을 만회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했는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상업 자본주의의 전성기가 지나가고 난 뒤에 산업 자본주의가 그 뒤를 잇게 되었고, 산업 자본주의는 16세기 "귀금속 화폐"의 2차 등귀가 시작되면서부터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게 되었다. 결국 산업이 경제 후퇴를 만회했다는 뜻이다. - P105

가장 많은 양의 은을 유출시킨 원인은 에스파냐 국왕 자신과 전반적인 정책 기조였다. 푸거 가문이 그들의 슈바츠 광산에서 채굴한 은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사용하여 수익을 올린 것과는 달리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은을 국내 투자에 사용하여 다양한 투자 이익을 창출하는 대신에 국외로 유출시키게 되었다. 해외 유출량은 카를 5세 시절에 이미 상당했고, 펠리페 2세 시대에는 방대한 양이 되었다 - P165

국가는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덜 겪었다. 국가 재정은 세 가지 부문, 즉 재정 수입, 지출, 부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세 번째이자 결코 덜 중요하지 않았던 부채는 가격 상승의 여파로 자동적으로 완화되었다. 그러나 지출과 수입은 동일한 리듬으로 증가했다. 모든 국가는 수입을 증대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가격 상승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확실히 국가는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한 지출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16세기에 서서히 확대된 엄청난 수입을 확보하고 있었다. - P233

에스파냐 경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대략 1580~1590년대에 큰 전환기를 맞았는데, 첫 번째로 농업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펠리페 2세가 1580년에 합병할 당시 포르투갈은 안에서부터 썩은 나라였고,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나 영양 결핍과 질병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16세기 말 유럽 전체의 후퇴에 앞서서 에스파냐를 강타한 전염병은 이를 잘 설명한다. 이러한 위기는 근본적인 균형을 뒤흔들었다. - P312

북유럽이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의 제조업 제품을 체계적으로 모방했고, 이렇게 생산된 저렴한 제품을 통해서 조금씩 이탈리아의 제조업 제품을 시장에서 몰아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유럽의 값싼 노동력 덕분이었다. 또한 대량으로 생산된 저질의 "새로운 모직물"은 가짜 상표를 붙이고 가짜 봉인을 해서 레반트 시장에서 베네치아 모직물인 것처럼 판매되었다. - P3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