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가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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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모든 사상의 기반은 다음과 같다. 즉, 귀족은 기사도의 이상을 실천함으로써 이 세상을 지탱하고 정화할 의무가 있다. 귀족의 진실한 생활과 귀족의 진실한 미덕은 사악한 시대에 대한 치유책이다. 교회와 왕국의 안녕과 평온, 정의의 힘은 귀족에게 달려 있다... 하느님의 의지로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것이 주어졌다. 그것은 신성한 법과 인간의 법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그것이 없다면 이 세상은 일대 혼란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 두 기둥은 기사단과 학자들이다. _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p139


  선(善)과 악(惡), 성(聖)과 속(俗), 교회와 왕정, 성직자와 귀족, 천상의 법과 지상의 법에 의해 유지되는 중세(中世)라는 이분법(二分法)의 시대. 그 중에서도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은 14~15세기 부르고뉴 공국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중세 문명의 시기를 조망한다. 


 몰아 감각은 커다른 위험을 가져온다. 이것은 기독교의 신비가들뿐만 아니라 인도의 신비주의자들이 도달한 결론이었다. 그 위험의 구체적 내용은 이러하다. 완벽하게 신을 명상하고 관조하고 사랑하는 온전한 영혼은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다. 신에 몰입하면, 자신의 의지는 더 이상 없고, 남은 것은 오로지 신의 의지뿐이다. 그리하여 몰아 상태에서 육욕에 사로잡히더라도 그 육욕은 죄가 되지 않는다. _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p375


 저자는 <중세의 가을>에서 예술 작품을 통해 그들의 내면 세계를 들춰낸다.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던 것처럼, 감성은 이성에 의해 제한되었다. 지나친 정념과 표현은 죄악으로 간주되는 시기였기에 인간의 감성(感性)은 신앙의 엑스터시를 표현하는 경우에 한해 허용되었고 이러한 제한과 억눌림은 하위징아가 중세를 모순과 갈등의 시기로 바라보는 관점 중 하나가 된다. 


 삶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태도에서 커다란 분수령이 있다면, 중세와 르네상스의 간극보다는 르네상스와 근대의 간극이 더 깊고 크다고 보아야 한다. 대체로 보아 예술과 인생이 서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하나의 방향 전환이 발생한다. 그 지점에서, 예술은 더 이상 인생의 즐거움을 이루는 고상한 것으로서 인생의 한 가운데 있지 않고, 인생 바깥에 초연히 위치하여 멀리서 감상하는 어떤 것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예술을 교육과 휴식의 순간에만 바라보며 높이 숭앙하는 어떤 것으로 취급한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과 세상을 구분하는 저 오래된 2원론이, 예술과 인생의 구분이라는 또 다른 형식으로 등장했다. _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p95


 그렇지만, 하위징아에게 중세는 모순과 갈등의 시기로 그치지 않는다. 억눌림과 제약이 심할수록 마치 페스트를 피해 교외로 나가 젊은 남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두운 현실을 피하듯, 중세의 어두움에는 빛의 씨앗도 함께 있음을 <중세의 가을>은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중세의 가을>의 전체 구조는 이분법이다. 그렇지만, 그 이분법마저 다음 시대로 나아가는 하나의 기둥이 되는데, 이렇게 본다면 동시에 탈(脫)이분법이기도 하다. 중세 뿐 아니라 책의 구조마저 모순적으로 보여지는 이러한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안전, 한적, 독립은 인생을 즐겁게 하는 좋은 것들이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궁정 생활을 피하여 자연 속에서 노동과 절제의 단순한 생활을 영위하려고 했다. 이것은 단순한 생활이라는 이상의 부정적 측면이다. 긍정적 측면은 단순함과 노동의 향유라기보다는 자연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안락함이다. _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p220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중세의 가을>에서 하위징아는 백년전쟁 전후로 부흥했던 부르고뉴 공국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시대를 규정한다. 지리적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강성했지만 불과 백여년 존속했던 부르고뉴공국.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사이에 있는 가을처럼, 부르고뉴의 지리와 역사 자체가 가을이 아닐까. 네덜란드어 판 서문은 이 시기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을 보다 명확하게 설명한다.


 이 책은 14세기와 15세기라는 중세 후기를 조망하고 있지만 그 시대를 르네상스의 안내자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중세의 마지막 시기, 세 사상의 마지막 단계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나무로 친다면 이 시대는 열매가 농익어서 완전히 만개하고, 또 땅에 막 떨어지려는 그런 시대이다. 과거의 주도적 형식들이 화려하게 개발되어 사상의 핵심을 제압하고, 또 예전의 타당했던 사상들을 경직시켜 고사시키던 그런 시대이다. 중세 후기를 하나의 독립된 시대로 파악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_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p24, 네덜란드어 판 서문


 이전 시대인 중세 전/중기와 이후 시대인 르네상스 시대와 구분되는 별도의 시기 중세 후기. 독자들은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의 변화의 싹을 중세 후기라는 시대적 한계를 통해 발견한다. 그리고 부르고뉴라는 공간적 제약 안에서 또 다른 변화의 씨앗이 자리함을 짐작하게 된다. 만약 하위징아가 자신의 고국인 네덜란드를 무대로 중세의 역사를 썼다면, <중세의 가을>은 11월의 가을이 아닌 음력 8월의 한가위 같은 느낌이 나지 않았을까.


 <중세의 가을>은 독립된 시대로서 중세 후기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중세 후기를 특징짓는 것은 이전/이후 시대와 구분되는 이분법의 모순이지만, 동시에 <중세의 가을>이 주제로 한 시간적, 공간적 한계는 오히려 이분법 구조를 넘어서 탈(脫)이분법적으로 시대를 전망케 하는 매력을 가진 작품이라 여겨진다...


  그것은 사악한 세계였다. 증오와 폭력의 불길이 거세게 불타올랐다. 악은 강력하다. 악은 그 검은 날개로 이미 어두워진 대지를 덮는다. 곧 세계의 종말이 오리라고 기대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교회는 계속 허덕거렸으며, 설교자들과 시인들은 말세를 경고하고 탄식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_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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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1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3
키스 토마스 지음, 이종흡 옮김 / 나남출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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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가 초자연적 수단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지상의 생활환경을 통제할 수단에 대한 전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역사도 이런 규칙에서 예외가 아니다(p70)... 중세교회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교회의 진리 독점권을 증명하는 가장 효과적 수단이라는 전통에 편승하고 있었다. 그 전형을 일찍이 정립한 것은 12~13세기의 성인전기물이었다. _ 키스 토마스,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1>, p71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1>에서 저자는 16~17세기 잉글랜드의 상황을

통해 기독교 안에 자리한 마술적 요인 검토하고, 이를 바라보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을 비교한다. 본문에서 저자는 가톨릭 의례 안에 자리한 마술적 요인에 주목한다. 제국의 종교로 자리 잡기 위해 다신교와 치열한 다툼을 해야 했던 가톨릭 전례 안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다신교 안의 여러 신들을 대신하는 성인(聖人)과 성인으로 인정받기 위한 기적 입증 등은 교회 전통으로 받아들인 원시종교의 특성으로 또한 마술적 요소이기도 하다.


 (교회에서) 물질적 번영은 전적으로 의례 준수와 연결된다고 가정되었다. 의례를 매년 반복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온갖 일상 문제들에 대해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관행들이 제공하는 의무는 교회로서도 무시하기에 아까운 것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이 마술에 의존하고 있으니 마술을 배척하기 보다는 교회의 통제하에 두는 편이 더 유리하지 않겠는가. _ 키스 토마스,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1>, p114


 이에 반해,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미 중세 천 년을 거치면서 굳건해진 기독교 사회 전통 위에 교리를 어렵지 않게 세울 수 있었다. 자연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성상(聖像)과 성화(聖畵)가 필요했지만, 종교개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언어와 자국어로 씌여진 성경(聖經)이었다. 기존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위해 이제 종교(가톨릭)은 그 안의 마술적 요소로 인해 비판받게 되었고, 새로운 시대 이념으로 프로테스탄트는 마술을 대신할 그 무언가를 제시해야 했다.


 가톨릭교도는 과거처럼 계속 무동반 기도에 의존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기적을 성취할 수도 있었지만, 프로테스탄트는 어떠한 종류든 기적적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기적은 초대 교회의 보호막으로 이교도를 처음 개종시키는 데는 필요했지만, 기독교 신앙이 확고하게 정립된 후로는 군더더기로 전락했다. 따라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참 교회의 본질적 특징이라는 가톨릭교회의 주장은 부적절한 것이었다. _ 키스 토마스,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p269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1>안에서 우리는 사상의 변화와 일상 생활의 변화 속도 차이를 발견한다. 급진적인 사상의 변화는 몇몇 지식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그것과 일상 생활에 새겨진 문명의 역사를 바꾸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사상이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겠지만, 동시에 일상생활은 사상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융합 안에서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작은 변화의 한 걸음을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종교개혁 이후로도 기성종교는 여전히 불행을 설명해 주고 불확실한 순간에 안내역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이 일상의 현실문제에 대처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점복과 초자연적 치료에 종교를 이용하려는 시도도 여전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마술과 점성술을 위시한 비종교적 신앙체계들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_ 키스 토마스,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1>,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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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제국사 1469-1716
존 H. 엘리엇 지음, 김원중 옮김 / 까치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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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스페인의 성취는 본질적으로 카스티야의 성취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17세기 스페인의 재난 역시 카스티야의 재난이었다. 오르테카 이 가세트는 합스부르크가 스페인에 대한 비명(碑銘)으로 사용할 수 있을 다음과 같은 글을 씀으로써 이 역설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했다.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만들었고,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파괴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438


 존 H. 엘리엇(John Huxtable Elliott, 1930 ~ 2022)의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Imperial Spain>는 15세기 중반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졌던 세 왕국 -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 의 전성기를 배경으로 한다. 포르투갈은 16세기에 일시적으로 스페인(에스파냐)에 병합되고 다시 분리되지만. 위에서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 1883~1955)가 언급했듯 스페인 제국 역사의 중심은 카스티야였으며, 시작 또한 여왕 이사벨 1세(Isabel I de Castilla y Aragon, 1451~1504)였다. 제국 스페인의 역사는 이사벨의 선택의 결과였다.


 이사벨이 왕위계승자로서 인정을 받자 그녀의 혼인은 국제적 관심사가 되었다. 그녀의 배우자감으로 세 명의 유력 후보자가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샤를 7세의 아들 발루아의 샤를과 결혼하여 전통적인 프랑스-카스티야 동맹을 강화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의 오빠가 원했던 것처럼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결혼하여 카스티야의 미래를 서쪽 이웃과 연결시킬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녀는 아라곤의 후안 2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페르난도와 결혼함으로써 후안 2세가 강력하게 책동했던 카스티야-아라곤 간의 통합을 성사시킬 수도 있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19


  상업 중심, 지중해 연안의 아라곤과 목축 중심, 대서양 연안의 카스티야는 분명 상이한 조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토양의 카스티야의 전사들을 뒷받침하는 아라곤의 관료제가 없었다면 제국은 유지될 수 없을 터였고 그런 면에서 이들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제국을 창조한 역동성은 거의 전적으로 카스티야에 의해서 제공되었다. 카스티야의 활력과 자신감은 카스티야인들에게 새로운 스페인 제국에서 자연스럽게 지배권을 쥐게 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뒤에는 행정 경험이 풍부하고 외교술과 통치술이 숙달되었던 아라곤 연합왕국이 있었다. 이 점에서 두 연합왕국간의 통합은 상호 보완적인 파트너간의 통합이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43


 그렇지만, 오늘날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CF 간의 유명한 엘 클라시코(El Clasico)에서 보듯  과거로부터 치열한 라이벌이었던 두 지역을 하나로 묶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가능했지만, 문화적, 경제적으로는 매우 힘든 일이었고 그 결과 제국은 초기부터 매우 연약한 구조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제국의 구조를 유지시키기 위해 그들은 결국 철저한 신앙의 힘에 의존하게 되고 그 결과 순수 가톨릭 중심주의는 이전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활력을 주던 무슬림과 유대인을 축출하는 정책으로 이어지면서 폐쇄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종교재판소의 설치가 무엇보다도 스페인 왕들의 지배영역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고안된 종교적 조치이기는 했지만 그것의 중요성이 결코 종교적 영역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신생 스페인의 경우처럼 정치적 통일이 절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나라에서 신앙의 통일은 카스티야인, 아라곤인, 카탈루냐인을 성(聖) 교회의 궁극적 승리를 보장하는 단일한 목적 속에 하나로 결속하게 하는 대체물로서 작용했다.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117 


 여기에 더해 결혼을 통해 제국을 정치적으로 유지시키려는 노력은 페르난드의 지나친 반(反)프랑스 움직임과 만나 스페인을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원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카스티야와 신대륙은 신성로마제국의 보급창고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었으나, 스페인은 카를 5세의 정복전쟁을 위해 다른 의미에서 식민지가 된 것이었다.


 카를 5세가 엄청난 돈이 드는 외교정책을 추진하고 그 비용을 대기 위해서 부채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카스티야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국가의 수입원들은 황제의 비용을 대기 위해서 수년 후의 것까지 저당잡혔고, 그중 많은 부분은 국외에서 이루어졌다. 부채에의 의존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데에 한 몫을 했다. 무엇보다도 국왕의 재정정책에서 장기적 전망의 부재는 재원의 헛된 낭비를 의미했고, 그 재원을 끌어내기 위해서 사용된 방법들이 카스티야의 경제 성장을 방해하려고 일부러 고안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228


 카를 5세( Karl V, 1500~1558)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Felipe II de Habsburgo, 1527~1598) 시기 스페인은 오스트리아와 분리된 별도의 제국이 되어 포르투갈을 병합하는 등 전성기를 맞지만, 여전히 독립을 둘러싼 네덜란드와의 전쟁, 대서양에서의 사략(私掠)행위를 둘러싼 잉글랜드와의 대립은 결국 스페인을 외부에서 무너뜨렸고, 스페인 제국 내에서 식민지 경제가 독자적으로 운용되면서 일어나는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아메리카가 새로운 제국정책을 뒷받침하는 재원을 제공하는 동안 그 제국 정책은 11580년 포르투갈의 합병이라고 하는 펠리페의 대성공으로부터 지리적 방향성을 획득했다. 포르투갈의 스페인 제국에의 통합은 펠리페에게 새로운 대서양 해안과 그것을 보호하는 데에 도움을 줄 함대를 제공했고, 아프리카로부터 브리질 그리고 캘리컷으로부터 몰루카 제도에 이르는 제2의 제국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치세 후반기의 제국주의를 가능케 한 것은 새로운 귀금속 유입과 함께 이 포르투갈 영토의 합병이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303


  이처럼 <스페인 제국사 1469-1716>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정치적 결합으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척박한 토양과 상대적으로 열등한 산업, 통합되지 않은 지역간의 갈등 등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한 정치적 선택으로 태어난 국가가 대항해시대라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극적으로 일어났으나, 결국 태생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스페인 역사 형성에서 중요한 이 시기 역사는 오늘날의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이해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일독(一讀)을 권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1576-79년 동안 아메리카가 유럽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들었다. 광산 채굴에 소요되는 비용이 높아졌기 때문에 은이 줄어들었고 이민자들을 위한 기회도 줄어들었다.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아메리카로 들어오는 물건도 점점 적어졌다. 그러나 스페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은 아메리카 식민지에 스페인 경제와 유사한 형태의 경제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스페인이 아메리카에 수출해온 주요 품목들이 아메리카 정주자들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332

안달루시아는 귀족이 지배하는 대규모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 되어갔고, 이 거대한 새로운 부에 의해서 부유해진 카스티야의 귀족들은 아직 부르주아지가 취약하고 그것도 북쪽 몇몇 도시들에 산재해 있었던 상황에서 거의 무제한의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되었다. 반면에 발렌시아에서는 국왕이 식민화와 재정주 과정을 보다 면밀하게 감독할 수 있었다. - P25

중세 아라곤 연합왕국에는 부유하고 역동적인 도시 과두귀족들이 있었고, 때문에 해외의 상어적 이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곳에는 또한 왕과 신민 간의 관계에서 계약적 개념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것은 여러 제도들 속에 효과적으로 실현되고 있었으며 제국을 운영하는 데에 좋은 경험이 되었다. - P30

동시대의 카스티야는 외부적이기보다는 내부적 지향성을 띠고 있었고 교역보다는 전쟁에 경도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카스티야는 목축적이고 유목적인 사회였고, 그런 습관과 태도는 끊임없는 전쟁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레콩키스타는 여러 가지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이교도에 대한 십자군 원정이기도 했지만 약탈을 위한 군사 원정이기도 했고, 또한 사람들의 이주이기도 했다. 레콩키스타의 이 세 가지 측면 모두가 카스티야인들의 생활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 P30

전통적으로 카스티야의 메세타(meseta)는 풍년이 들면 곡물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량을 생산했다. 그러나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비스카야 등 일부 지역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고 대개 카스티야로부터 배편으로 식량을 공급받아야 했으며, 아라곤 연합왕국도 안달루시아나 시칠리아로부터 곡물을 수입했다. 그러나 흉년이 들면 카스티야 역시 외국 곡물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 P128

카를 5세의 유럽 영토들 가운데 치세 초반에 제국을 운영하는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한 곳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였다. 그러나 이들 두 영토의 재원이 차례로 고갈되자 카를은 새로운 수입원을 찾아 다른 영토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 수 없었다. 1540년에 그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제 나의 스페인 왕국들에 의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 - P221

카탈루냐의 점진적 회복은 프랑스와의 끊임없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근대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경제 변화의 전조였다. 이제 반도에서의 경제적 무게 중심이 중심부로부터 주변부로 이동해가고 있었다. 주변부는 과세부담이 중심부보다 덜했고, 경제적 피로도 덜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는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만들었다. 이제 17세기에 와서 처음으로 스페인이 카스티야를 개조시킬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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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 사건, 정치, 인간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페르낭 브로델 지음, 임승휘.박윤덕 옮김 / 까치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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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들에 대한 콩종튀르(conjoncture)의 역사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종종 구조(structure)의 더딘 역사를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이 기준이 되는 수면(水面)과 비교해야 한다(p446)... 더디게 움직이는 것과 빠르게 움직이는 것 사이를, 그리고 구조와 콩종튀르 사이를 분리하는 것은 여전히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논쟁의 한복판에 남아 있다... 결국 문제는 모순되는 연대기들을 조율하는 것이다. 콩종튀르에 따라서 국가와 문명들, 그 국가와 문명의 주역들, 그들의 한계와 의지들이 어떻게 부침했는가? 난세는 국가의 팽창에 유리한 것으로 보였다. 문명의 번성은 종종 경기가 하강하던 시기에 나타났다. 강대한 제국의 문명들이 자신을 과시한 시기는 거대한 해상제국들의 가을이었다. 이스탄불, 로마, 마드리드의 제국이 그러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447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 사건, 정치, 인간 La Mediterranee a l'epoque de Philippe II vol.3>은 <지중해> 3부작의 마지막이면서, 구조-콩종튀르-사건의 가장 표면에 있는 역사를 그린다. 대중들에게 사건(event)로 기억되는 역사적 사실. 저자 브로델은 상세하게 이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사실 보셀 화약(和約)의 체결은 로마의 입장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교황의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평화조약에 체결되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전파되었다. 협정이 깨어진 것은 어쨌든 교황 덕분이다. 아직 남아 있던 전쟁의 불씨가 이토록 신속하게, 그것도 단 한 사람에 의해서 다시 타올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거센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상기시켜준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62


 브로델이 그려낸 사건사에서 개인의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프랑스 발루아 왕조와 오스트리아-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조 간 화의를 내용으로 한 보셀 화약을 파기시킨 파울루스 4세 교황(Papa Paolo IV, 1476-1559)이나, 북유럽 저지대에서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네덜란드 독립운동을 제압하지 못한 알바 공작(Gran Duque de Alba, 1507-1582), 레판토 해전을 승리로 이끈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 1547-1578)의 경우는 개인의 의지, 능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펠리페 2세는 이 계획에 동조했지만, 알바 공작은 예산 부족과 유럽의 상황을 이유로 반대하면서 국왕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가짜 위인은 사실 소인배였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공격할 줄 알았던 근시안적인 정치가였다. 그가 내린 총사면령은 너무 뒤늦은 조치였다. 결국 스코틀랜드 여왕은 잉글랜드로 망명했고 스코틀랜드는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고 말았다. 끝으로 알바 공작은 불안한 잉글랜드를 공격하기는커녕, 결코 유리한 입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협상이나 술책에 의존하려고 했다. 1569년, 먼 거리와 상황으로 인해서 사태를 책임졌던 것은 에스파냐 국왕이 아니라 신중한 알바 공작이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206


 그럼에도 개인이 거둔 빛나는 승리는 두드러진 사건에만 머무르게 된다.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결국 콩종튀르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최후의 갤리선 간 해전이라는 레판토 해전(1571)에서 거둔 에스파냐-베네치아 연합함대가 거둔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완승(完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판토 해전의 의미가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은 레판토의 패전이 오스만 투르크 해군의 궤멸을 의미하거나 에스파냐의 우위가 확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놀랍게도 이 예기치 않은 승리는, 1571년 10월 7일에 벌어졌다. 그러나 이듬해 동맹군은 모돈[메토네]에서 패퇴했다. 1573년에 재정이 바닥난 베네치아는 전쟁을 포기했다. 1574년 투르크는 라 굴레트와 튀니스에서 승리했다. 십자군의 모든 꿈은 이렇게 역풍을 맞아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우리가 사건들, 즉 빛나는 역사의 외피에만 집착하지 않는다면, 수천 가지의 새로운 현실이 팡파르 없이 조용히 나타나서 레판토 너머로 이어진다. 투르크의 마법은 깨졌다(p245)... 결국, 1574년의 승리 이후, 특히 1580년대 이후에 투르크의 대함대는 안으로부터 해체되었다. 1591년까지 지속되는 바다의 평화가 투르크 함대에게는 최악의 재앙이었다. 그 평화로 말미암아 투르크 함대는 항구에서 썩어나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판토 해전 하나가 이렇게 많은 결과들을 야기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그러나 레판토 해전은 분명히 이것들에 기여했다. 역사적 경험으로서 그 사건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아마도 "사건사(histoire evenementielle)"의 한계를 보여주는 두드러진 사례이기 때문일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246


 단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레판토는 해전에서의 승리일 뿐이고, 육지로 둘러싸인 지중해라는 물의 세계에서 한 번의 승리로 대륙으로 길게 뻗은 투르크의 뿌리를 잘라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성동맹의 운명은 로마에서만큼이나 빈에서,  폴란드의 새로운 수도인 바르샤바에서,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결정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이 지상의 국경에서 공격을 받았다면...... 그렇지만 그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결국 에스파냐는 필요한 만큼 오랫동안 철저하게 지중해에 개입할 수 없었다. 언제나 핵심은 거기에 있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268


 중요한 것은 지중해의 양대 세력이 거의 같은 시기 서로의 시선을 각자 다른 방향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에스파냐 제국은 신대륙에서 얻어지는 막대한 금은과 함께 포르투갈 합병으로 인해 거대해진 대서양 영토로, 오스만 투르크는 발칸 반도로부터 시작되는 중부유럽으로의 확장과 아프리카-인도 항로에 관심을 가지면서 지중해는 더 이상 찾지 않은 평화로운 쇠퇴의 시기를 맞게 된다. 돈 후안의 빛나는 사건은 콩종튀르의 분기에서 전환점이 아닌 과정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브로델은 <지중해> 3부작을 통해 역사의 거대한 흐름으로부터 인간이 만들어낸 작은 사건을 구조에서 보여준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인가, 아니면 환경인가. <지중해>를 읽으면서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은 개인으로 현현한 시대정신(Zeitgeist)이지만, 그러한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수많은 요소의 합(合)임을 생각하게 된다...


 에스파냐가 지중해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투르크는 지중해에서 그들의 노력을 유지했을 것이다. 평화, 16세기 말의 준(準)평화는 서로가 적을 내버려둠으로써 성립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에스파냐가 북아프리카에서 기회를 놓쳤다면, 그것은 레판토 해전 이후 몇 년 동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16세기 초였다. 당시에 에스파냐는 자신이 추구하지 않았던 아메리카를 획득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땅에서는 과거에 에스파냐의 "역사적" 임무라고 불렀던 것, 그리고 오늘날 한층 더 새로운 표현인 에스파냐의 "지리적" 임무를 저버리고 새로운 그라나다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315


 이는 투르크의 강력한 전쟁을 전제로 하는가? 그런 정책은 존재한다. 술레이만 대제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른바 쇠퇴는 잘못된 평가이다. 투르크는 막강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고, 야만적이지 않고 오히려 잘 조직되고 훈련된 신중한 세력이었다. 투르크가 갑자기 지중해의 잘 알려진 땅들을 포기하고 동쪽으로 향했을지라도, 이것은 투르크가 "쇠퇴하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가 아니다. 투르크는 단지 운명을 따랐을 뿐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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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게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는 매력적인 지역이다. 투르크는 페르시아 문제를 두고 고심한다. 결국 이 시기 내내 지중해의 역사는 자율적이지 않다. 지증해의 운명은 인근 지역 또는 먼 지역의 운명과 연결된다. 이 연결 고리는 매우 중요해 보인다. 고난의 1558-1559년에 이르러, 위기감이 고조되고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서 지중해는 이제 자신의 전쟁을 치르며 홀로 분투하게 될 것이다.  - P17

섬(코르시카)는 자원에 비해서 너무 많은 인구를 부양하고 있었고, 전쟁은 불행을가중시킬 수밖에 없었다(p51)... 코르시카의 잘못이라고는 교통의 요충지였다는 것뿐이다. 이 섬이 합스부르크 왕가 대발루아 왕가의 전쟁에서 중요했던 이유는 섬 자체보다는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파르마, 심지어 시에나 이상으로, 프랑스의 코르시카 점령은 신성 로마제국 황제와 그 동맹세력 사이의 연결을 방해했다. - P52

캅카스 산맥의 맞은편 전역, 캅카스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모든 지역이 카스피해로 열린 통로와 함께 오스만의 지배 아래에 복속된 것이다. 이것은 작은 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독특한 활력의 신호이고, 사실 유일한 신호도 아니다. 그러나 지중해의 역사가에게 중요한 것은 지중해에서 먼 카스피 해 방향으로 투르크의 힘을 고정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심력에 의한 방향 전환이 적어도 1590년까지 지중해 무대에서투르크의 부재를 설명해준다.  - P359

에스파냐의 정책은 1578~1583년의 시기에 대서양과 서유럽으로 옮겨갔다. 그와 동시에 펠리페 2세의 치세 전반부를 결산한 1575년의 파산 직후, 귀금속의 유입으로에스파냐가 쓸 수 있는 전쟁 자금이 갑자기 늘어났다. 이 "전환기" 이후 1579년부터1592년까지 "은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것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펠리페2세의 정책이 다른 곳에서처럼 네덜란드에서도 지나치게 격해지고 대담해졌다.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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