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맬서스의 분석으로부터 결혼과 가족구조의 다양한 특징들을 구축해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맬서스가 당연시했던 특성들로, 그가 언급하지도 않았고 무시해버렸던 것들이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결론의 상태와 목적에 관한 일련의 가정들인데, 그 가정들은 18세기 초엽의 잉글랜드 성직자들에게는 자명하고 당연한 것이었지만,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엔 독특한 것이었다. 맬서스는 단본제(monogamy)를 가정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복제 (polygamy)가 실행되고 있었다. 그는 남편과 아내의 비교적 평등한 관계를 가정했지만, 대부분의 사회는 남성 지배적이었다. 그는 결혼 해체를 가정하지 않았지만, 많은 나라에서 이론은 쉽게 허락되었다. 잉글랜드는 재혼이 허용되었지만, 다른 나라에서 재혼은 금지되거나 강제적이었다. 대부분 나라에서 혼인 후 가구 형태는 부모로부터 독립된 가구가 아니라 ‘부거제 (virilocal)‘ 나 ‘모거제(uxorilocal)‘ 였다. 대부분 사회에서 결혼 자금은 신랑과 신부가 엇비슷하게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신랑 혹은 신부 한쪽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지출하였다. 맬서스 이론의 기본 가정인 이러한 특징들은 맬서스와 동시대인 중국, 인도, 동유럽, 남미 사람들에게는 매우 극단적인 것이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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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년, 루이 14세가 세상을 떴을 때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임에 틀림없었으나 나라는 이미 활력을 잃었고, 국민들은 가난에 지쳐 있었다. 여기에 역사가 주는 교훈이 있다. 국가의 강성이 반드시 국민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 교훈이다. (p84/718) - P84

콜베르는 자신의 이름을 딴 일종의 중상주의 경제 개념, 콜베르주의(colbertisme)를 성공적으로 수립했다. 콜베르주의는 성장보다는 오로지 통상에 무게를 둔 경제이론이었다. 한 국가의 힘은 국고에 비축된 금와 은의 양으로 결정된다는 원칙에서 출발한 이 이론의 결론은 국가가 소비량보다 생산량을 늘려야 하며 수입보다 수출을 늘려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콜베르 경제 이론을 바탕으로 통상위원회가 창설되어 식민 정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p108/718)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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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화적 해결책이 나온데에는 끊임없는 싸움에 지친 탓이 컸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양측 진영은 민중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지도부 엘리트들은 그들의 무절제한 폭발력을 두려워했다. 또한 아무리 신앙심이 깊다 하더라도, 장점이라고는 학살에 동원할 수 있는 머릿수가 많다는 것뿐인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재산과 부를 나누어줄 생각은 없었다. 결국 위그노와 가톨릭 양측의 과격함과 폭력은 왕권강화에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국왕만이 진영과 상관없이 모든 백성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p99/906)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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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군주를 향해 이렇게 주장하고자 한다. 앞서 인용한 이유로, 인민을 억제하기 위해 그런 요새를 설치하는 것은 무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요새를 지어놓으면 당신은 국민을 억압하는 것을 덜 망설이면서 더 적극적으로 억압에 나설것이다. 그런 억압은 국민들을 격앙케 하여 당신의 파멸을 바라게 만든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의 원인인 요새는 더는 당신을 지켜줄 수 없다.  - P382

리비우스의 역사서를 읽으며 어떤 교훈을 얻으려고 한다면, 로마인들과 로마 원로원이 활용한 모든 행동 방식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여러 문제 중에서도 고려할 만한 사항은 로마 인들이 집정관, 독재관, 군대지휘관들을 전투 현장에 파견할 때 부여했던 권한에 관한 사항이다. 명백한 점은 그들에게 부여한 권력이 아주 대단했다는 것이다.  - P418

로마 공화국의 행동을 신중하게 고려해 보면, 그들이 쇠망하게 된 원인이 두 가지라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농지법을 둘러싼 투쟁, 다른 하나는 군 지휘권의 연장이다. 이 두 가지 일이 처음부터 잘 파악되어 적절한 대책을 세웠더라면 자유로운 삶의 방식은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고 아마도 전보다 더 평화로웠을 것이다.  - P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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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이러한 혁명에 대한 면역성은 다음 세 가지의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신문, 사법제도,  노동조합을 통한 여론의 힘이 의회에 개혁을  강요하는 것, 둘째는 폭스의 끊임없는 노력의 덕택으로  명문 출신으로서의 특권을 자부하면서도 서민계급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는 휘그당 내에 자유주의적인 요소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셋째로는 온화한 도덕과 일반 서민의 열정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킨 복음주의의 조류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 등이었다.  - P611

영국은 지금도 이전과 다름없이 관례로 다스리고 있다. 10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지주귀족은 여전히 관대한 지방 관리로 남아 있으며 군주제, 의회, 그리고 대학은 모두가 중세의 전통과 관습을 충실하게 지켜오고 있다. 영국인의 적응력은 보수주의에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강하다. 오래된 제도는 항상 새로운 추세를 시인하고 허용한다. 영국에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한 번도 없었다. 역사가 변천하는 시기를 표시하는 일시적인 반란은 있었으나 이것은 큰 바다를 스쳐가는 잔물결에 지나지 않았고 1688년의 명예혁명도 서명을 교환한 단순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 P764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섬나라라는 입지조건과 아마도 풍토의 영향이 로마와의 종교단절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 단절이 오히려 대영제국 형성의 시발점이 되었다. 즉 장기간에 걸친 종교투쟁이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조국을 버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 앵글로 색슨의 식민지를 건설한 용감하고 강인한 신교도의 유형을 창조한 것이다. - P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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