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가 무언가를 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한 것은 제 생에서 그때 단 한 번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데 거절하면 상대방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치유할 길 없는 생생한 금이 갈 것 같은 공포에 위협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p154)...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55/232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 다자이 오사무 (太宰治, 1909~1948)의 <인간실격 人間失格>에서 주인공 요조가 돌아본 자신의 인생이다. 그는 신에게 묻는다. 공포에 대한 무저항이 자신이 저지른 죄(罪)이며 불행의 근원인가를. 요조는 어떤 공포를 느꼈던가. 다른 이들과 자신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 이를 피하기 위해 요조는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닌 '주변에서 원하는 나'가 되고, 그는 모든 이들에게 사람받는 듯 보이지만 정작 자신으로부터는 사랑받지 못한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p18)...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20/232


 겉으로는 웃음과 미소짓고 있지만, 가면 속 자신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겉과 다른 자신 안의 괴물을 발견했기에, 그는 그는 괴물을 닮은 자화상을 보며 진(眞)정한 아름다움(美)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다른 이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추(醜)의 미학을.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46/232


 세상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지 못한 요조는 결국 죽음을 선택했지만, 그는 죽지 않는다. 그는 대신 죽음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세상이란 결국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닐까 하는. 요조는 사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사회는 신뢰할만한 곳이라고 회심(metanoia)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새롭게 태어나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에게 관심을 갖는다. 요조의 사회는 아버지와 같은 무서운 곳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사회로, 다시 사회 계약론의 사회로 옮겨간다. 이처럼 요조의 사회는 죽음을 통해 달라졌다.


 여자도 누웠고, 새벽녘에 여자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또 저도 세상에 대한 공포, 번거로움, 돈, 예의 운동, 여자, 학업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더 이상 견뎌내며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의 제안에 쉽게 동의했습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78/232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15/232


  요조의 변화는 호리키와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죄(罪)의 반의어를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법(法)과 선(善)에서 찾는 호리키와 그렇지 않은 요조. 호리키에게 법과 도덕은 다르지만, 요조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법과 선악(善惡)은 분리된 개념과 현실의 세계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그의 인식은 곧 깨지고 만다. 


 "죄, 죄의 반의어는 뭘까. 이건 어렵다."

 "법이지." 죄의 반의어가 법이라니!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로 안이하게 생각하며 시치미를 떼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뭔데? 신이야?"

 "설마....... 죄의 반의어는 선이지. 선량한 시민. 즉 나 같은 것이지."

 "농담은 그만두자고. 그러나 선은 악의 반의어지 죄의 반의어는 아니야."

 "악과 죄는 다른가?"

 "다르다고 생각해. 선악의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아. 인간이 멋대로 만들어낸 도덕이라는 것을 말로 표현한 거지."

"말이 많군. 그렇다면 역시 신이겠지. 신, 신. 뭐든지 신으로 해두면 틀림없어."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32/232


 엄청난 불행이 닥쳤을 때, 그는 사회에 대한 신뢰가 처절하게 깨져 나가면서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리바이어던이 다시 뛰쳐나왔음을 실감한다. 사회에 대한 신뢰가 깨졌을 때 그는 신에게 묻는다. 신뢰는 죄인가? 선량한 상대에 대한 믿음의 대가가 과연 공포로 귀결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그때 저를 엄습한 감정은 노여움도 아니고 혐오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그것은 묘지의 유령 따위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신사(神社)의 삼나무에서 흰 옷을 입은 신령과 부딪쳤을 때 느낄지도 모를, 아무 소리도 안 나오게 만드는 고대의 거칠고 난폭한 공포였습니다. 저의 새치는 그날 밤부터 나기 시작하였으며 점점 더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게 되었고, 점점 더 인간을 한없이 의심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삶에 대한 일체의 기대, 기쁨, 공명 등에서 영원히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37/232


 그렇지만, 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요조는 선과 악, 죄에 대한 신의 대답을 기다린다.  자신의 불행이 죄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면 그에 대한 신의 해명을 요조는 기다리지만, 신의 심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기되는 심판 속에서 그는 불안감을 느끼고, 이제 그는 '익살'이라는 끈으로 사회에 맞춰 사람 사이에(人間)사는 대신 비합법의 영역에서 사람(人)으로 머문다. 이제 그가 생각하기에 감당할 수 없이 커져버린 죄로 인해 그는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요조는 결국 어렸을 때부터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공포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사회에 대한 신뢰가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거절하지 못하는 무저항이 문제였을까.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59/232


 요조는 죽음으로부터의 귀환에서 선악이라는 도덕적 관념과 죄악은 구분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죄에 대한 요조의 질문과 신의 침묵, 그 사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요조는 죄인이자 악한이 되버리고 말았으며, 결국 자신 스스로 선악이라는 도덕과 죄악이 분리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 말았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p138)... 과연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 _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p139/232


 <인간실격>에서 요조는 신에게 신뢰심과 무저항에 대해 묻는다. 그렇지만, 먼저 요조는 자신의 불행이 죄의 결과인지에 대해 먼저 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에 앞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직시(直視)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인간실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에 맞춰 변화되는 불안정 속에서 근원적인 실체에 대한 추구 -  인간이란 무엇인가 - 란 덧없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꾸민 느낌이 드는 것이다.

불행. 이 세상에는 갖가지 불행한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러나 그 사람들의 불행은 소위 세상이라는 것에 당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해 줍니다. 그러나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항의할 수 없었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얘기를 하려 하면 넙치가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들 전부가, 잘도 뻔뻔스럽게 그런 말을 하는군 하고 어이없어할 것이 뻔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23-10-23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인간실격>을 호랑이 님의 리뷰로 다시 보니 생각이 새록새록 납니다. 저하고 다른 포인트를 잡으셨네요~ 신선한 리뷰 잘 봤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10-23 10: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인간실격>은 뒤늦게 읽은 만큼 더 강렬하게 다가오네요. yamoo님 활기찬 한 주 여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그러고 나서 그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제게 보내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듣고 흘려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겁쟁이의 이 한탄이 어째서 예리한 바늘이 되어 제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것인지요?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들 비참한 농민들에게, 이 일본인들에게 박해와 고문이라는 시련을 주시는지요?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다른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57/206


 저는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가 통과한 부락은 모두 관리들에게 습격당하고 있습니다. 아까부터 머릿속에 의심이 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관리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배교한 자들이 관리의 앞잡이로 이용된다는 것을 전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배교자는 자신의 비참함과 상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동료를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과 같은 운명 속으로 끌어넣으려고 합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74/206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의 <침묵 沈默>에는 두 침묵이 나온다. 하느님의 침묵과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의 침묵. 로드리고 신부는 끊임없이 자신과 일본인 신자들에게 닥친 시련에 대해 기도를 드리며 탄원을 하지만 돌아온 것은 침묵 뿐이다. 다른 한 편으로 로드리고 신부는 기치지로의 고백성사 요청에 대해 침묵한다. 계속 이어지는 기치지로의 배교(背敎)와 회개(悔改). 로드리고는 나약한 기치지로의 모습에 대해 침묵한다.


 농민들 중에 저희 종교를 불교와 비슷한 종교로 혼동하는 사람조차 상당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 자비에르 신부님조차도 통역의 실수로 처음에는 비슷한 오역을 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은 일본인은 우리가 믿는 주님을 그들이 오랫동안 믿어 온 태양의 신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73/206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의 침묵을 '신(神)의 부재(不在)'로 해석하고 절망에 빠져든다. 자신의 스승 페레이라 신부처럼. 자신보다 앞서 일본에 들어와 배교하고 일본인이 된 페레이라 신부는 제자 로드리고 신부에게 자신의 배교를 정당화하고 자신의 길을 따를 것을 권유한다. 참된 진리인 교회의 가르침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일본의 신자들은 진정한 신자가 아니며, 교회를 통한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페레이라 신부. 그렇지만, 이러한 말이 로드리고 신부의 마음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정작 그를 움직인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일본인 신자들의 순교.


 일본인은 인간을 미화하거나 확대시킨 것을 신이라 부르고 있어. 인간과 동일한 존재를 신이라 부르지.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하나님은 아니야.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55/206


  성 자비에르 신부가 가르치신 하나님이라는 말도 일본인들이 멋대로 오오히(大日)라고 부르는 신앙으로 변해 있었어. 태양을 숭배하는 일본인에게 데우스(Deus)와 오오히는 거의 비슷한 발음이었던 거야. 그 착오를 비로소 깨닫게 된 내용의 편지를 자네는 읽지 않았던가? (p153)... 데우스와 오오히를 혼동한 일본인은 그때부터 우리의 하나님을 그들 식으로 바꾸고, 그런 다음 다른 것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어. 언어의 혼란이 없어진 뒤에도 이 굴절되고 변화된 신앙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거야. 자네가 아까 말한 포교가 가장 화려했던 시대에 가서도, 일본인들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아닌 그들이 굴절시키고 변화시킨 하나님만을 믿고 있었던 거지.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53/206


 이 나라는 늪지대야. 결국 자네도 알게 될 테지만, 이 나라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늪지대였어. 어떤 묘목이라도 그 늪지대에 심으면 뿌리가 썩고 잎이 누렇게 말라 버리지. 우리는 이 늪지대에 그리스도교라는 묘목을 심은 거야.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52/206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하지만, 신부의 믿음으로 인해 죽어갈 수밖에 없는 이들. 이들을 바라보며 로드리고는 결심하고 바로 이 순간, 로드리고는 자신의 기도에 대한 답을 듣는다. 침묵이 깨진 것이다.


 "밝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단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그러나 당신은 유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가서 네가 할 일을 이루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너에게 성화를 밟아도 좋다고 말한 것처럼 유다에게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라고 말했던 것이다. 네 발이 아픈 것처럼 유다의 마음도 아팠을 테니까.".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94/206


 페레이라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에게 하느님은 어떤 존재였을까. 분노하는 하느님, 질투하는 하느님, 욥의 하느님, 요나의 하느님이 아니었을까. 죄에 대해 심판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더 큰 재산을 돌려주며, 이방인들을 회개시켜 주시는 약속의 하느님. 절대적인 교회의 아버지로서 하느님을 생각했기에 이들은 낯선 문화와 약해지는 신자들의 마음에 대해 침묵하며 배척했던 것은 아닐까. 로드리고 신부의 침묵은 이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하느님의 침묵은 선택이라는 상황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목자(牧者)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모든 고통에서 나오는 선택을 '수고했다'며 받아들이는 마음.


 <침묵>을 통해 로드리고 신부의 침묵은 구약(舊約)의 침묵이라면, 하느님의 침묵은 신약(新約)의 침묵이 아닐까를 생각해 본다. 배교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 성직자로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견뎌야 했을 로드리고 신부. 이를 통해 그는 성직자로서 죽었지만, 믿음 안에서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난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 중에서도 가장 추악한 인간까지 그리스도는 찾아 구원하셨던 것일까? 문득 신부는 이렇게 생각했다. 악인에게는 또한 악인으로서의 강함과 아름다움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기치지로는 악인의 가치도 없다. 누더기처럼 어딘지 더러울 뿐이다. 불쾌감을 누르며 신부는 고해성사의 마지막 기도를 외우고 습관에 따라서 "평안히 쉬어라"라고 중얼거렸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20/206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나 불평이나 원망을 늘어놓기 위해서다. 신부로서 그것은 굴욕이며 수치였다.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 위해 있는 것이지 결코 원망을 듣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시련의 날에 악창에 걸린 욥이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_ 엔도 슈사쿠, <침묵> , p97/206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17세기 일본교회를 배경으로 신앙(神仰)의 문제를 깊이 있게 분석한다. 선교를 둘러싼 기존 사회와의 갈등과 신앙문제를 다루는 작품 속에서 한국 가톨릭 교회역시 19세기 박해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했기에, <침묵>은 보다 의미있게 다가온다. 로드리고 신부의 인간적인 고민과 함께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를 생각하게 된다. 윤지충(尹持忠) 바오로와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등이 제사를 거부하고 부모의 신주를 불태우며 4대 박해로 이어지는 한국 가톨릭교회 순교사 속에서 북경교회에서 교리(敎理) 해석을 좀 더 유연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천주실의 天主實義>의 저자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처럼 동양문화의 천(天)과 하느님이 다르지 않음을 말하는 유연성이 있었더라면, 조선교회와 일본교회는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릴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이와 함께, 영화 <미션 MIssion>에서 보여지듯 신부들은 초대교회와 같은 신앙공동체를 낯선 곳에서 펼치려 하지만, 결국 제국주의의 첨병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가슴아픈 역사 속에서 로드리고 신부의 기도에 대한 응답에 빠른 응답이 있었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결말이었을까라는 의문도 함께 던져본다.


  번역에 관한 개인적인 생각을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 하려 한다. 사실, <침묵>은 예전에 바오로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읽고, 이번에 홍성사에서 출간된 책으로 다시 읽었다. 책은 잘 읽히는 편이지만, 용어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불만을 갖는다. 가톨릭 교회와 관련된 내용이라면 번역도 가톨릭에 맞게 하는 편이 자연스러운데, 개신교식으로 번역된 부분은 낯설게 다가왔다. 가톨릭 전례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침묵>을 영화화한 <사일런스 Silence>가 있다는 것을 이웃분이신 레삭매냐님의 소개로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직 보진 못했지만,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Charles Scorses, 1942 ~ )의 작품이니만큼 기대가 된다. 레삭매냐님께 감사드리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일찍이 나는 당신과 같은 가톨릭 신부에게 물은 적이 있소. 부처님의 자비와 가톨릭교의 하나님의 자비는 어떻게 다르냐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에 중생이 의지하고 매달릴 수 있는 부처님의 자비, 이것을 구원이라고 일본에서는 가르치고 있소. 하지만 그 신부는 분명히 말했소. 가톨릭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그것과 다르다고 말이요. 가톨릭교의 구원이란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것뿐 아니라 신도가 가능한 한 지켜야 할 강인한 마음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보면 당신도 역시 가톨릭교의 가르침을 이 일본이라는 늪지대 안에서 어느 틈엔가 잘못 인식해 버린 것이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190/206


 첨탑을 가진 건물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곳에 교회가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저 진흙과 나무 조각을 반죽해서 만든 가난한 움막 속에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신도들은, 어쩌면 자기들에게 성체성사를 주고 자신들의 고해를 들어주고 아이들에게 세례를 줄 사제를 굶주린 듯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선교사나 사제들이 모두 추방당한 이 광야에서 이제 그들에게 생명수를 가져다줄 사람은 이 황혼의 섬에 있는 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주님이시여! 당신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선이요, 당신이 계시는 집은 이처럼 아름답습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73/206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2-05-07 17: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5-07 20:52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이하라 2022-05-07 1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2-05-07 20:53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thkang1001 2022-05-07 19: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5-07 20:55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그레이스 2022-05-08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겨울호랑이 2022-05-08 12:13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thkang1001 2022-05-08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겨울호랑이 2022-05-08 12:14   좋아요 0 | URL
^^:) 다소 흐린 날이지만, 좋은 일요일 오후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2-05-08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2관왕이시군요.
더더욱 축하드리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08 21:16   좋아요 0 | URL
네 이번 달에는 운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얄라얄라님 ^^:)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들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들의 죽음은 결국 교회의 기초가 되는 돌이 된 거라고.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시련은 결코 주시지 않는다고. 모키치도 이치소우도 지금 주님 옆에서 그들보다 먼저 간 많은 일본인 순교자들과 똑같이 영원의 지복(至福)을 얻고 있을 것이라고. 저도 물론 그런 것은 백 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도 왜 이런 비애의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 남는 것일까요? 어째서 기둥에 묶인 모키치가 숨이 끊어질 듯이 불렀다는 노래가 이렇게 고통스러움으로 머리에 되살아오는 것일까요?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의지와는 달리 몸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섭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아무리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육체의 공포는 의지와 관계없이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가르페가 있을 때는 빵을 두 개로 나누듯이 공포도 서로 나누었습니다만, 앞으로는 혼자서 이 밤바다의 추위와 어둠을 모두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이것은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무기둥에 묶여 파도에 씻긴 모키치나 이치소우의 인생은 얼마나 익살스러운 연극인가. 많은 바다를 건너 2년의 세월을 보내며 이 나라에 다다른 선교사들은 또 얼마나 우스운 환영(幻影)을 계속 뒤쫓은 것인가. 그리고 지금,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는 산속을 방황하고 있는 나 자신은 얼마나 우스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저는 그때까지 계속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가 통과한 부락은 모두 관리들에게 습격당하고 있습니다. 아까부터 머릿속에 의심이 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관리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배교한 자들이 관리의 앞잡이로 이용된다는 것은 전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배교자는 자신의 비참함과 상처를 정당화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동료를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과 같은 운명 속으로 끌어넣으려고 합니다. 그 심사는 추방당한 천사가 하나님의 신도를 죄 가운데로 유인하려는 심리와 비슷한 것입니다.

기치지로가 하는 말처럼 인간을 모두 성자나 영웅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박해받는 시대에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신도가 배교한다거나 목숨을 던진다거나 할 필요도 없이 은혜받은 그대로 신앙을 계속 지킬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만 평범한 신도였기 때문에 육체의 공포를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 어디에도 갈 수 없어서 이렇게 산속을 헤매고 있답니다, 신부님." 가련하고 불쌍한 자에 대한 연민이 지금 이렇게 제 가슴을 아프게 조이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으라고 하자 기치지로는 겁에 질린 듯이 명령대로 조심조심 땅 위에 당나귀처럼 무릎을 꿇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2-04-12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과 다른 영화의 결말이
참 그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침묵의 다양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네요.

겨울호랑이 2022-04-12 10:36   좋아요 1 | URL
<침묵>이 영화로도 나와 있군요. 예전에 가톨릭 출판사(바오로딸)에서 나온 <침묵>을 읽고 이번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침묵>을 읽고 있습니다. 레삭매냐님 말씀을 듣고 보니 영화로도 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개정판 아리랑을 읽으면서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 사회 문제의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일제 시대. 이 시대가 우리에게 아픔인 것은 당시에 뿌려졌던 식민지 잔재가 오늘날 사회 곳곳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며, 때문에 눈을 돌려서는 안될 것임을 알려준다.

2021년 부동산 투기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지만, 이미 1910년도 전후 이같은 문제가 있었음을 문학작품 안에서 본다. 역사의 기출문제를 풀지 않고 덮는다면, 다음에 같은 문제가 출제되었을 때 또 틀릴 수밖에 없다.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으로 이어지는 3부작 속에서 우리가 지금 직면한 문제가 사실은 외면하고, 풀지 못했던 일들의 결과물임을 확인하게 된다...

김제 만경 들판의 논값이 득달같이 뛰어오른 것은  일본사람들이 돈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논값은 갑자기 배로 치아 상답이 5원 정도였고,  평답은 4원 정도였다. 그건 조선사람들이 약삭빠르게 돌려부른 것이 아니었다. 바람잡이 고용인이나 거간꾼을 앞세운 일본사람들이 먼저 그런 가격을 놓고 사람들의 마음을 홀려냈던 것이다. 논마지기나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논값이 느닷없이 배로 오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이변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끄러운 손

오래전 어느 해
가장 뜨거운 여름날
내가 잘 아는
전신마비 장애인을 방문했다

무엇을 줄까 궁리하다
‘그래 더위를 식힐 부채 하나 좋지‘하며
가장 크고 멋진 것을 준비해 갔다
그러나 내가 웃으며 선물을 건넸을 때
그는 웃지 않고 말했다
‘잊으셨어요? 제가 손도 불편하다는 걸?
이 손으로 어찌 부채를 부치라고!‘
실망 가득한 그에게 나는
미안하다 미안하다 되풀이하며
전에도 몇 번 보긴 했지만
불편한 게 내 손이 아니다 보니
그의 손을 잠시 잊었다 했다. - 부끄러운 손 - 중

시인의 생각과 마음이 줄여서 표현된 것이 시이기에 어렵게 느껴지는 시집에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많은 설명에도 자신의 뜻을 담기가 쉽지 않은데, 그것을 짧고 인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시를 읽을 때 온전하게 그 안에서 편안히 쉬고 싶다. 짧은 문장 속에 담겨있는 강한 느낌 표현이나 인상도 좋을 수 있겠지만, 요즘은 일상에서의 숨김없는 표현을 통해 시 안에서 쉬고 싶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이해인 수녀님의 시는 일상에서의 작은 느낌을 전하며 온전하게 채워준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니의 책다방 2020-10-18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해인 수녀님 시집 저도 너무 좋아해요♡ 수녀님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겨울호랑이 2020-10-18 14:36   좋아요 1 | URL
^^:) 수녀님의 시는 생활에서 오는 순수함이 잘 느껴집니다. 이 부분이 독서 생활님께서 느끼시는 따뜻함과 연결된다 여겨지네요. 독서 생활님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0-10-18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녀 님의 산문집을 예전을 읽고 좋아했어요.

겨울호랑이 2020-10-18 19:25   좋아요 0 | URL
수녀님의 글은 예전부터 많은 이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아옴을 느낍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