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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생각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7
팀 베인 지음, 김미선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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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묘사가 생각의 세 가지 중심 특징을 포착하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각은 자극과 무관하고 환경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대상을 표상할 능력을 수반한다. 둘째, 생각은 (상대적으로) 무한한 범위의 대상과 속성을 표상할 능력을 수반한다. 셋째, 생각은 짜임새 있고 융통성 있는 방식으로 환경을 표상할 능력, 즉 잠재적 합리성 및 통찰을 뒷받침하는 능력을 수반한다. _ 팀 베인, <생각>, p11/102

'생각'에 관한 입문서. 데카르트로부터 출발해 파스칼로 마무리되는 내용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을 넘어선 생각의 가능성과 함께, 경험(특히, 언어)에 의해 실제적으로는 현실의 한계에 갖힌 한계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천재들의 독창적인 사고로 여겨지는 것들도 사실 기존의 범주에 새로운 경험 요소가 부가되는 것을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정의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생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으로가 아니라, 생각으로 자신을 높여야 한다. 그렇다면 잘 생각하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도덕의 원리이다. _ 팀 베인, <생각>, p8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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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인터뷰
로렌스 R. 스펜서 엮음, 유리타 옮김 / 아이커넥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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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각 있는 존재는 불멸의 영적 존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여기에는 인간도 포함되지요. 단순하고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나는 조어(造語)인 'IS-BE(이즈비)'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입니다. 불멸의 존재 본연의 모습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함(is)'이라는 영원의 상태에서 사는 것이고 그들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존재함(be)'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낮다 하더라도 모든 이즈비들은 나 자신이 다른 이로부터 받고자 하는 존중과 대우를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_ 로렌스 R. 스펜서, <외계인 인터뷰>, p96

지난 7월 미국 하원 미확인 변칙현상(UAP, Unidentifed Anomalous Phenomena)과 관련해서 청문회가 있었고, 잠시나마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되었다. 당시 별다른 관심은 없었지만, 아는 지인으로부터 <외계인 인터뷰>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느냐는 말을 듣고 읽었다. 책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또는 이것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하는 부분은 일단 넘기자. 처음에는 단순히 로스웰 사건, 51구역(Area 51)과 같은 음모론과 관련한 책으로 생각했지만, 책 내용에는 음모론을 넘어서는 부분도 함께 담겨 있었고, 우리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둔다.

과학은 물질의 종교입니다. 과학은 물질을 숭배합니다. 과학의 패러다임에서는 창조된 것이 전부이고 창조주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종교는 창조주가 전부이고 창조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요. 이 두 극단은 바로 감옥의 쇠창살입니다. 과학과 종교는 상호작용하는 전체로서의 모든 현상들을 관찰하고 주시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_ 로렌스 R. 스펜서, <외계인 인터뷰>, p210

개인적으로는 과학과 종교에 대한 과도한 맹신을 경계하는 문단이 인상깊게 느껴진다. 외계인 에어럴은 과학도 종교도 근원적인 것이 아닌 진실을 왜곡하는 수단에 불과함을 말한다. 진실은 양 극단 어느 한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종교가 말하지 않는(또는 말할 수 없는) 그 사이 어느 곳에 놓여있으며 진정한 자기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메세지 속에서 간결하지만 작은 울림을 느끼게 된다.

모든 피라미드 문명은 무지와 두려움과 무력으로 인류의 노예화를 지속시키기 위한 통제 방법으로 종교를 이용합니다. 부적절한 정보, 기하학적 디자인들, 수학적 계산과 천체의 정렬이 해독 불가능하게 뒤범벅된 것도 지구 이즈비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게 할 목적의, 불멸의 영이 아닌 딱딱한 물질에 기반을 둔 날조된 영성의 한 부분입니다. _ 로렌스 R. 스펜서, <외계인 인터뷰>, p152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현재 당신들 존재가 처해있는 어려운 여건을 풀 효과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또한 인류는 한낱 생물학적 몸뚱이에 불과하다는 개념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현재 어디에 있고 자신들은 이즈비이고 그리고 진정 이즈비로서 자신들이 누구인지 알아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인간의 형체를 넘어서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어야만이 당신들이 처한 이 수감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즈비에게 지구에서의 미래는 없습니다. _ 로렌스 R. 스펜서, <외계인 인터뷰>, p232

어쩌면 <외계인 인터뷰>의 주제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너 자신 안에 있는 신성(神性)을 깨달으라는. 누군가에게 그 신성은 성령(聖靈)이 될 수도 있겠고, 다른 이에게는 불심(佛心)이 될 수도 있겠고,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여겨진다.

이런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고 앞으로도 항상 당신일 것입니다. 또한 저 깊은 곳에서 당신은 당신이 누구이고 당신이 아는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늘 당신 본질 그대로입니다. _ 로렌스 R. 스펜서, <외계인 인터뷰>, p207

마지막으로, <외계인 인터뷰>는 사실일까?에 대한 물음을 생각해본다. 어쩌면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겠다. 만약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지상에 유배된 '기억이 소실된' 이즈비인 내가 진실을 아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책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상상력의 산물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인가 아닌가는 개인들의 믿음과는 관련이 없는 부분이기라 생각되기에 가장 적절한 답은 <논어 論語><先進> 편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焉能事鬼
敢問死. 曰未知生 焉知死.

계로(자로)가 귀신을 섬기는 것에 관하여 여쭈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아직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단 말인가?" 이에 우직한 계로가 다시 여쭈었다 : "그럼 이번에는 감히 죽음에 관하여 여쭙고자 하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아직 삶을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_ 도올 김용옥, <논어한글역주 3>, p258

PS. 만약, <외계인 인터뷰> 자체가 <베다>처럼 진실을 담고 있다면, 이 책 자체도 하나의 거대한 은유로서, 마틸다 오도넬 맥엘로이(Matilda Macelroy) 여사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사실 여부는 경전의 오탈자와 같은 부수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씁쓸한 일이지만 베다 찬가를 배운 사람들은 베다 찬가를 신의 말씀이라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결국 베다의 내용은 글자 그대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사람들은 베다의 완곡한 표현이나 비유적인 표현들을 교조적 사실로 수용하여 실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베다에 담긴 철학은 무시되고 찬가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종교의 실천교리가 되었다는데, 특히 힌두교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_ 로렌스 R. 스펜서, <외계인 인터뷰>,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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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경우에 독자들은 텍스트를 변조시키고, 기대하고 있거나 몰두하고 있는 관심사를 텍스트에 끼워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텍스트 자체는 독자가 자신의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떤 유사한 조어(造語)를 제공함으로써 잘못 읽기에 유리한 조건을 줄 뿐이다. 특히 교정되지 않은 눈으로 피상적인 훑어보기를 할 때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러한 환상의 가능성을 쉽게 얻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환상의 필연적인 조건은 아니다.

독자의 직업이나 현재 처해 있는 상황 또한 잘못 읽기의 결과를 규정한다. 최근 자신의 뛰어난 연구 결과를 가지고 동료들과 논쟁하고 있는 문헌학자는 장기(奬棋) 전략 Schachstrategie을 언어 전략 Sprachstrategie로 잘못 읽는다.

우리는 또한 쓰기와 베끼기를 할 때 동일한 단어가 매우 빈번하게 반복되는 현상도 마찬가지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만일 작가가 자신이 이미 쓴 단어를 또 반복한다면, 이는 아마도 그가 그 단어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 의지의 방해 기능은 계속해서 관념들의 흐름과 분절 운동을 조화시키려는 쪽으로 작용한다.

물건을 〈잘못 놓는 것〉은 물건을 어디에 놓았는가를 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문자와 책을 다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찾는 것을 단번에 들어 올릴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무질서로 보이는 것이 나에게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질서다

우리는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관념들에 관한 이러한 종류의 기본적인 방어 노력을 히스테리 증상을 이루는 메커니즘의 하나로 간주해야 한다. 그런 방어 노력은 고통 자극이 일어났을 때의 도피 반사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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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를 망각하는 이 두 가지 전형적인 사례 간의 불일치와 내적 친화성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망각의 두 번째 메커니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억압당하는 사람에게서 생겨나는 내적 모순에 의한 사고의 교란이다.

이름이 망각되는 메커니즘(혹은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름이 기억에서 달아나 일시적으로 망각되는 메커니즘)은 그 시점에서 의식되지 않는 일련의 낯선 생각들에 의해 의도했던 이름의 재생이 방해를 받는 것이다. 방해받는 이름과 방해하는 콤플렉스 사이에는 처음부터 하나의 연관이 있거나, 아니면 피상적인(외적인) 연상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보이는 그런 연관이 생겨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름 망각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대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 이름이 불쾌한 일과 연관되어 있을 때이고, 또 하나는 그 이름이 그런 결과를 초래한 또 다른 이름과 연관되어 있을 때이다. 따라서 이름의 재생이 방해받는 것은 이름 그 자체에 의한 것이거나, 그것과 밀접하든 소원하든 간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을 갖는 관계에 의한 것이다.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실수 행위에 의해 생겨나는 고유 명사의 망각과 덮개-기억 형성 사이의 유사성이다.
얼핏 보면 이 두 현상 사이에는 유사성보다 차이점들이 훨씬 뚜렷하다. 전자의 현상은 고유 명사와 관계를 갖는 반면, 후자의 현상은 현실이나 상상 속에서 체험된 인상 전체와 관계한다. 전자에서 우리는 기억 기능의 명백한 실패를 보게 되는 반면, 후자에서는 우리에게 낯설게 여겨지는 기억 작용을 보게 된다.

이상의 범주들에서 혼동, 왜곡, 융합 등이 한 단어의 발음과 관계하든 철자와 관계하든, 아니면 의도와 문장의 부분을 구성하는 단어 전체와 관계하든 그것은 중요한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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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는 환각적 소원의 대체물에 불과하다. 꿈이 소원 성취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소원 이외에 우리의 정신 기관을 가동시킬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짧은 길을 퇴행하여 소원을 성취시키는 꿈은 부적절한 것으로 버림받은, 정신 기관의 〈제1차〉 작업 방식의 표본만을 보존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꿈이 무의식의 소원 성취를 표현한다는 사실뿐이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전의식 조직은 소원 성취를 왜곡시킨 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점만 말하면, 우리는 그러한 사고 흐름을 〈전의식적〉 사고 흐름이라 부르고 완전히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그것은 단순히 등한시되거나 중단되어 억제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표상의 흐름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것인지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목적 표상에 의해 선택된 연상의 경로를 따라서 〈리비도 집중 에너지〉라고 불리우는 일정한 크기의 흥분이 목적 표상에서 전위된다고 생각한다. 〈등한시된〉 사고 흐름은 이러한 리비도 집중을 받지 못하고, 〈억제〉되거나 〈배척〉된 사고 흐름은 에너지 집중이 철회되면서 자신의 흥분에 내맡겨진다. 목적을 부여받은 사고 흐름은 일정한 조건에서 의식의 주의를 끌 수 있으며, 그 결과 의식의 도움을 받아 〈리비도 과잉 집중
Uberbesetzung〉이 된다.

꿈은 소원을 성취된 것으로 보여 주면서 우리를 미래로 인도한다. 그러나 꿈을 꾸는 사람이 현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미래는 소멸될 수 없는 소원에 의해 과거와 닮은 모습으로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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