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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경우에 독자들은 텍스트를 변조시키고, 기대하고 있거나 몰두하고 있는 관심사를 텍스트에 끼워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텍스트 자체는 독자가 자신의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떤 유사한 조어(造語)를 제공함으로써 잘못 읽기에 유리한 조건을 줄 뿐이다. 특히 교정되지 않은 눈으로 피상적인 훑어보기를 할 때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러한 환상의 가능성을 쉽게 얻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환상의 필연적인 조건은 아니다.

독자의 직업이나 현재 처해 있는 상황 또한 잘못 읽기의 결과를 규정한다. 최근 자신의 뛰어난 연구 결과를 가지고 동료들과 논쟁하고 있는 문헌학자는 장기(奬棋) 전략 Schachstrategie을 언어 전략 Sprachstrategie로 잘못 읽는다.

우리는 또한 쓰기와 베끼기를 할 때 동일한 단어가 매우 빈번하게 반복되는 현상도 마찬가지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만일 작가가 자신이 이미 쓴 단어를 또 반복한다면, 이는 아마도 그가 그 단어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 의지의 방해 기능은 계속해서 관념들의 흐름과 분절 운동을 조화시키려는 쪽으로 작용한다.

물건을 〈잘못 놓는 것〉은 물건을 어디에 놓았는가를 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문자와 책을 다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찾는 것을 단번에 들어 올릴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무질서로 보이는 것이 나에게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질서다

우리는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관념들에 관한 이러한 종류의 기본적인 방어 노력을 히스테리 증상을 이루는 메커니즘의 하나로 간주해야 한다. 그런 방어 노력은 고통 자극이 일어났을 때의 도피 반사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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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를 망각하는 이 두 가지 전형적인 사례 간의 불일치와 내적 친화성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망각의 두 번째 메커니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억압당하는 사람에게서 생겨나는 내적 모순에 의한 사고의 교란이다.

이름이 망각되는 메커니즘(혹은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름이 기억에서 달아나 일시적으로 망각되는 메커니즘)은 그 시점에서 의식되지 않는 일련의 낯선 생각들에 의해 의도했던 이름의 재생이 방해를 받는 것이다. 방해받는 이름과 방해하는 콤플렉스 사이에는 처음부터 하나의 연관이 있거나, 아니면 피상적인(외적인) 연상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보이는 그런 연관이 생겨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름 망각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대별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 이름이 불쾌한 일과 연관되어 있을 때이고, 또 하나는 그 이름이 그런 결과를 초래한 또 다른 이름과 연관되어 있을 때이다. 따라서 이름의 재생이 방해받는 것은 이름 그 자체에 의한 것이거나, 그것과 밀접하든 소원하든 간에 어떤 식으로든 연관을 갖는 관계에 의한 것이다.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실수 행위에 의해 생겨나는 고유 명사의 망각과 덮개-기억 형성 사이의 유사성이다.
얼핏 보면 이 두 현상 사이에는 유사성보다 차이점들이 훨씬 뚜렷하다. 전자의 현상은 고유 명사와 관계를 갖는 반면, 후자의 현상은 현실이나 상상 속에서 체험된 인상 전체와 관계한다. 전자에서 우리는 기억 기능의 명백한 실패를 보게 되는 반면, 후자에서는 우리에게 낯설게 여겨지는 기억 작용을 보게 된다.

이상의 범주들에서 혼동, 왜곡, 융합 등이 한 단어의 발음과 관계하든 철자와 관계하든, 아니면 의도와 문장의 부분을 구성하는 단어 전체와 관계하든 그것은 중요한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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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는 환각적 소원의 대체물에 불과하다. 꿈이 소원 성취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소원 이외에 우리의 정신 기관을 가동시킬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짧은 길을 퇴행하여 소원을 성취시키는 꿈은 부적절한 것으로 버림받은, 정신 기관의 〈제1차〉 작업 방식의 표본만을 보존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꿈이 무의식의 소원 성취를 표현한다는 사실뿐이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전의식 조직은 소원 성취를 왜곡시킨 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점만 말하면, 우리는 그러한 사고 흐름을 〈전의식적〉 사고 흐름이라 부르고 완전히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그것은 단순히 등한시되거나 중단되어 억제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표상의 흐름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것인지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목적 표상에 의해 선택된 연상의 경로를 따라서 〈리비도 집중 에너지〉라고 불리우는 일정한 크기의 흥분이 목적 표상에서 전위된다고 생각한다. 〈등한시된〉 사고 흐름은 이러한 리비도 집중을 받지 못하고, 〈억제〉되거나 〈배척〉된 사고 흐름은 에너지 집중이 철회되면서 자신의 흥분에 내맡겨진다. 목적을 부여받은 사고 흐름은 일정한 조건에서 의식의 주의를 끌 수 있으며, 그 결과 의식의 도움을 받아 〈리비도 과잉 집중
Uberbesetzung〉이 된다.

꿈은 소원을 성취된 것으로 보여 주면서 우리를 미래로 인도한다. 그러나 꿈을 꾸는 사람이 현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미래는 소멸될 수 없는 소원에 의해 과거와 닮은 모습으로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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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인간이 ‘소비하는 인간’, 완전한 소비자가 되기 시작했고, 이런 인간상이 새로운 종교적 비전의 성격을 띤다는 사실이다. 이 비전에서 천국은 모두가 매일 새 물건을 살 수 있는, 바라는 모든 것을 살 수 있고 이웃보다 조금 더 많이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거대한 백화점이다. 이런 완전한 소비자의 비전은 사실상 세계를 정복한 새로운 인간상이다. 정치 조직이나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인간은 공허감을 느끼고 이 허전함을 상징적으로 채우기 위해 다른 사물, 바깥에서 들어오는 사물로 자신을 채워 마음의 공허와 쇠약을 극복하려 한다. 불안하거나 우울한 기분이 들면 무언가 구매하거나 냉장고를 열어 평소보다 더 많이 먹으려 하고 그러고 나면 약간 덜 우울하고 덜 불안해진 모습을 확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수동성의 결과는 무엇일까?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누가 봐도 확실하며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바로 소비하라는 강제, 소비하는 인간이 되라는 강제다. 소비하는 인간은 내면이 공허하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안으로 불어넣어야 한다. 수동성 탓에 실제로는 공허하지만 꽉 찼다는 허울을 선사할 물건으로 자신을 채워야 한다. 세계를 지배한다고 잘난 척하는 어른임에도 그는 젖을 달라고 우는 영원한 젖먹이다. 실제 그의 분주함과 게으름은 같은 것이다. 즉 내면 활동성의 결핍이다.

정치적 수동성에서도 똑같은 것을 목격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은 척하며 거기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선거와 이런저런 후보에 대해 열을 올린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에 무관심하며 완벽하게 숙명론적이다. 어떤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며 그 후보가 이기면 정말로 스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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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항상 하나가 되고 완전해지려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달리 표현하면 삶이란 어쩔 수 없이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다. 성장과 변화가 멈추면 죽음이 닥친다.

삶은 항상 과정이다.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며, 기존 구조와 태어난 환경이 주고받는 끝없는 상호작용 과정이기도 하다.

폭력을 휘둘러 타인을 제 뜻대로 행동하게 만들려는 행위를 법이 제재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법은 폭력 앞에서 최소한의 보호밖에 제공하지 못한다.

삶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우리가 삶을 사랑한다면 (매우 중요한 자격 요건이다) 삶의 과정이, 다시 말해 변하고 성장하며 발전하고, 더 자각하며 깨어나는 과정이 그 어떤 기계적 실행이나 성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고통은 인생의 최악이 아니다. 최악은 무관심이다. 고통스러울 때는 그 원인을 없애려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 감정도 없을 때는 마비된다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다." 나는 장미를 실제로 보지 않는다. 그저 "저건 장미다"라고 말하며, 그 말을 통해 내가 말을 할 수 있고 하나의 대상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 대상을 단어로 올바르게 분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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