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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영화 <괴물> (사진출처 : 동아일보)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 裕和, 1962 ~ ) 감독의 <괴물>을 봤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여러 클리셰들을 파괴하며 관람객에게 반전을 선사한다. 그런 반전 중 하나가 악인 또는 빌런(villain)찾기다. 선-악 구도 설정 후 영화를 관람하는데 익숙한 관객들에게 감독이 선사하는 반전으로 자신의 구도를 무너뜨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과연 진정한 악(惡)이 있는 것일까. 어쩌면 개인이 악이 아니라, 사회의 구도 속에서 악은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닐까. 영화에 담긴 여러 주제 중 이 부분에 시선이 머문다. 


  

 희생제의의 진정한 기능은 실제로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물과 그 희생물이 대체하는 인간 존재 사이의 연속성을 요구한다. 이 두 가지 요구는 아주 섬세한 균형을 취하고 있는 인접상태에 의해서만 동시에 충족될 수 있다. _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p61 


 사회라는 유기체는 체제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희생양은 축제라는 제의(祭儀) 속에서 사라져간다. 사람들은 성스럽고 반복적인 의식(儀式)을 통해 인간과 공동체의 연속성을 보장받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희생양에 대한 죄(罪)의식은 어떻게 소멸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희생양은 죽어야만 한다는, 악이라는 단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조금은 다른 지점에서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정체 속에서 '선거'라는 축제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정치적인 연속성을 보장받기 위해 반대편의 희생양이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희생을 강요하는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각자의 이념 편향이 생기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선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회의 요구와 시스템은 개인을 악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의 요구에 순응했다 이유로 처형을 받은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 속에서 우리 모두는 축제의 일원으로 동참한 것으로 면죄될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된다.


 논증을 위해서 피고(아이히만)가 대량학살의 조직체에서 기꺼이 움직인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은 단지 불운이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피고가 대량학살 정책을 수행했고, 따라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읃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_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p382


 공동체 내의 구성원 모두가 희생양이 되어 악으로 지정될 수도, 행위로 악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가운데에서 우리는 광란의 축제에 휩싸이지 않고 깨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편향에 의해 제한된 시선으로 사회를 해석하는 이데올로기 대신 자신이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와 왜곡될 가능성에 대해 인정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부분 최적화가 전체 최적화가 아님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열린 결말과 통하고 있음을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다원주의가 지상의 낙원을 이룩할 처방을 제시해 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인류를 괴롭히는 최악의 정치 상황을 피하게 해주는 사상이라고 생각된다. 다원주의는 오늘날 각국의 사회가 달성한, 대단히 수준 높은 정치적 성과에 속한다(p75)... 다원적 사회에서는 정치적 지배를 위한 끝없는 싸움을 줄여 줄' 중첩적인 정치적 합의' overlapping political consensus가 필요하다. 이런 합의는 일종의 기본적 합의, 즉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측이 나머지 사람들에게 자신의 특정한 도덕성을 강요할 수 없다는 원칙에 근거해 있어야 한다. _폴 슈메이커,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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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1-07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인에 대한 과도한 악마화가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이번 테러로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론과 정치계의 반응이 참담한 수준이네요.

겨울호랑이님<괴물>보셨군요! 저도 궁금했던 영화인데 서둘러 보고싶어지네요.^^

겨울호랑이 2024-01-07 12:11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괴물>은 지난 <헤어질 결심> 이후 가장 인상깊게 봤던 영화였습니다. 미미님께서도 좋게 보실 것 같네요. 오후부터 날이 추워지고 있네요. 미미님 건강하게 휴일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

yamoo 2024-01-07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슈메이커의 책이네요. 몇 년 전에 이 책으로 새마나 했던 적이 있었는데 .교과서류의 책이라 공부하긴 좋았었죠. 다시보니 반갑네요..^^

겨울호랑이 2024-01-07 21:45   좋아요 1 | URL
교과서류의 책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책이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너무 광범위한 범위를 다루는 탓에 단편적인 암기사항을 전달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모든 것을 다 가져가기보다 큰 틀에서 차이점을 이해하는데 중심을 두면 좋은 정치철학 개론서로 독자에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
 
잊지 않겠습니다
416가족협의회 지음, 김기성.김일우 엮음, 박재동 그림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4월 16일, 너희가 구명조끼 입고 서로 격려하며 공포에 떨면서 구조를 기다릴 때, 이틀 동안 아무도 너희를 구하려 하지 않았단다. 너희가 자랑스러워하던 대한민국이 말이다. 아직까지 진상 규명도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구나. 너희들의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과 가족들의 분노, 아픔만 있을뿐. _ 4.16가족협의회,<잊지 않겠습니다>, p88/572

4.16 세월호 9주기. 세월호의 아픔이 치유되지 않았고, 진실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이유로 정권이 교체되었고(물론, 세월호가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촛불혁명으로 이뤄낸 새 정부에서 가졌던 희망도 실망으로 바뀌어, 이제는 더 큰 절망속에 우리가 밀려난 듯하다.

각본대로 움직이는 정치인들이 싫고 그런 정치인들이 좌지우지하는 이런 나라도 싫은데, 사람들은 이제 너희들을 잊으라고 재촉하는 것 같구나. 처음엔 모두 우리를 위로해주며 관심을 가져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를 보는 시선들이 너무나 따갑고 차가워. _ 4.16가족협의회,<잊지 않겠습니다>, p210/572

세월호의 비극이 정권 교체의 빌미가 되었음을 강하게 의식해서인지,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관심과 소외로 대처하는 공권력 앞에서 또다른 역사의 퇴보를 지켜봐야하는 우리의 처지에서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제는 기억해야 하는 이들이 더 늘었지만, 분명한 것은 망각이 기억을 이겼을 때, 기억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더 커질 뿐.

이제 시간이 계속 흐를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김주열 학생의 주검이 떠오르며 4.19가 시작되었듯 해마다 4.16이 되면 아이들의 죽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해마다 아이들과 희생자들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_ 4.16가족협의회,<잊지 않겠습니다>, p566/572

글의 마지막은 지난 2016년 제주도 출장 당시 제주도 앞 바다를 촬영한 사진으로 마무리한다. 여객선 바깥의 검푸른 바다는 바라만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는데, 서서히 검은 바다 속으로 잠겨야 했던 아이들과 탑승객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차디차고 컴컴한 바닷속에서 구해달라며 엄마, 아빠를 찾았을 너를 생각하면 아직도 엄마는 잠을 잘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어. 뜨거운 물에 씻을 수도 없더구나. 엄마는 너 따라가고 싶어도 아직 갈 수가 없어. _ 4.16가족협의회,<잊지 않겠습니다>, p396/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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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4-17 09: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제 아침, 4.16이네 하고 마음이 가라앉았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04-17 09:45   좋아요 3 | URL
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기억해야 하는 사건이 참 많습니다...
 


 효율성이 일시적 가치라면 회복력은 특정한 조건이다. 효율성을 높이면 종종 회복력이 약화되는 것이 사실인데, 이를 해소할 수단이 되는 시간적 가치는 효율성이 아니라 적응성이다. 효율성의 핵심은 마찰, 즉 경제활동의 속도와 최적화를 늦출 수 있는 중복과 반복을 제거하는 데 있다. 하지만 회복력의 핵심은 적어도 본질적으로는 중복성과 다양성이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19/345


 제러미 리프킨 (Jeremy Rifkin, 1945 ~ )은 <회복력 시대 The Age of Resilience: Reimagining Existence on a Rewilding Earth>에서 기존의 '효율성'을 대신한 '적응성' 을 강조한다. 자연을 타자(他者)로 보고, 이로부터 인류 자신 - 정확하게는 중심부 위치한 존재 - 의 풍요를 위해 이용할 자원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끊임없이 부정적인 것을 외부화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면서 현재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된 관점이다.


 진보의 시대 전체를 이끈 시간적 지향의 근본은 '효율성'이다. 즉 천연자원의 착취와 소비와 폐기를 최적화하고, 그렇게 해서 자연 자체가 고갈돼도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점점 더 빨리 증진한다는 임무다. 우리 개인의 시간적 지행과 우리 사회의 시간적 박동이 효율성이라는 원칙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지구의 지배적인 종으로 그리고 지금은 자연계의 파멸로 이끌었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6/345


 이러한 관점은 최근 기후위기, 팬더믹 위기를 겪으며 위기를 경고한 다른 석학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는 이러한 위기에 대한 해법을 지난 수십년간 자신의 저작에서 일관되게 주장해온 내용과 연계해서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3차 산업혁명 인프라는 중앙 집중형보다는 분산형으로 설계되었다. 이것은 사유화를 피해 개방적으로 투명하게 유지될 때 네트워크 효과를 최적화하며 가장 잘 수행된다. 네트워크와 플랫폼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모든 참가자가 더 많은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게 되기 때문이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193/345


 한계비용은 디지털 상호 연결로 더 낮아지지만, 공급자-사용자 네트워크의 지속적인 서비스 공급과 트래픽의 중단 없는 흐름으로 한계비용의 급격한 감소를 만회할 수 있다. 공급자-사용자 네트워크의 새로운 경제 시대에 지식 공유에서 에너지 공유, 차량 공유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활동이 잠재적으로 서비스가 된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196/345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에너지원이 점차 고갈되는 상황에서 화석 연료 대신 녹색 경제가 대두될 것이고, 인터넷의 발달로 경제적으로는 향후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에서 소유 대신 공유경제가 대세가 되고, 정치적으로는 시민사회가 부상하며, 글로벌(global) 대신 로컬(local)이 활성화되면서 대량생산의 테일러주의 대신 소규모 다품종 생산이 보편화되고, 인간 가치가 높아지는 세상. 제러미 리프킨의 전작들에서 단편적으로 그려졌던 미래들이 '적응'과 '회복력'이라는 화두로 <회복력 시대>에서 묶인다.


 회복력 시대에는 모든 대륙에서 문자 그대로 수십억 가정과 수백만 기업, 크고 작은 수십만 지역사회가 일하고 거주하는 곳에서 태양광과 풍력을 붙잡아 만든 새로운 에너지를 마이크로그리드에 저장하고 글로컬 에너지 인터넷을 통해 공유할 것이다. 몇몇 지역에서만 풍부하게 발견되는 화석연료와 달리 태양과 바람은 분산된 에너지로서 모든 곳에 존재한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199/345


 생태 지역 거버넌스는 그 본질과 취지상 시장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이며 그 안에서 인간 주체가 자신이 몸담은 생태 지역을 구성하는 다른 무수한 주체에 끊임없이 적응한다는 사실은 거듭 강조할 만하다. 배타성이 아닌 포용성의 자유라는 새로운 개념, 다시 말해 인간 종을 넘어 우리의 동료 생명체들과 지구상의 다른 모든 주체를 포함하는 연결성은 생태 지역이 지배하는 미래의 결정적 역학이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232/345


 이런 면에서 <회복력 시대>는 저자 제러미 리프킨 미래학의 결산이라고 하겠다. 저자는 책에서 암울한 현실을 지적하면서도, 절망적인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긴박한 현재의 위기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가 더 명확해졌음을 책 본문을 통해 밝힌다. 그렇지만, 이와 함께 팬더믹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터져나오는 문제들 속에 새로운 길, 희망 대신 과거로의 회귀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저자의 주장이 과연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에너지원은 고갈되었지만, 리프킨의 전망과는 달리 원자력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는 현실,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디지털 공유 경제 대신 강화된 소유권과 통제로 인한 중앙집권과 불평등한 세상과 글로벌 공급체인으로 연결된 대기업 중심의 세상. 지난 시간동안 리프킨 전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세상은 움직여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암울한 현재가 과연 변곡점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점을 개인적으로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회복력 시대>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저자 리프킨의 전망과 우리의 현실을 비교하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독자 스스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보다 의미있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진보의 시대에 평등은 자율성의 파생물로서만 가치가 있다. 자율성에 대한 신념이 전제되지 않고는 평등을 옹호할 수 없다. 스스로 자율적 행위자라고 믿는 만큼 평등을 요구할 것이며 그것이 다반사가 된다는 뜻이다. 모든 개인의 본질이 자율성의 추구라면 평등한 대우에 대한 욕구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p281)... 관계적 자아를 위한 회복력은 자립성과 자율성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에 대한 개방성과 취약성에서 비롯한다. 그것은 삶의 긍정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것에 대한 개방성을 의미하는데, 삶의 긍정적인 경험은 풍부한 관계망을 만들고 풍부한 관계망은 다시 회복력을 강화한다.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28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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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나를 가장 근본적으로 의문에 빠지게 하는가? 그것은 유한한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관계, 즉 죽음으로 향해 있고 죽음을 위한 존재임을 의식하는 내 자신에 대한 나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죽어가면서 부재에 이르는 타인 앞에서의 나의 현전 presence이다. 죽어가면서 결정적으로 멀어져 가는 타인 가까이에 자신을 묶어두는 것, 타인의 죽음을 나와 관계하는 유일한 죽음으로 떠맡는 것, 그에 따라 나는 스스로를 내 자신 바깥에 놓는다. 거기에 공동체의 불가능성 가운데 나를 어떤 공통체로 열리게 만드는 유일한 분리가 있다. _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 p23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 ~ 2003)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 La Communaute inavouable>에서는 타인(他人)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묻는다. 나 자신의 죽음이 아닌 다른 이의 죽음이 왜 나에게 의미를 갖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하기 위해 블랑쇼는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 ~ 1962)가 말한 '모든 존재의 기초'로서 결핍으로부터 출발한다. 인간 또한 결핍의 충족을 추구하지만, 영원한 배고픔과 갈증의 형벌을 받은 탄탈로스(Tantalus)처럼 자기 자신을 위한 결핍 충족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단지 자기 자신을 미래를 향해 기투(project)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가져올 뿐. 궁극적으로 이러한 가능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선 그 무엇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실존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블랑쇼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는 죽음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죽어가는 타인의' 손을 붙잡고 그와 함께 이어나가는 무언(無言)의 대화. 나는 그 대화를 다만 그가 죽어가는 것을 돕기 위해서만 이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를 근본적으로 상실로 이끌며 나눌 수 없는 그의 소유인 것처럼 보이는 사건으로 인한 고독을 나누기 위해, 나는 그 대화를 이어간다. _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 p23


 타인의 죽음에 대한 공감과 나눔. 그것은 내 존재의 근원적 문제로서의 결핍을 충족할 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공통의 운명을 가진 필멸(必滅)의 존재들이 갖는 관계속에서 공동체는 규정되어간다. 죽음을 싫어하는 공통된 감정 속에서 지금 죽음을 맞아야만 하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통제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첫 번째 자유다. 


 각자의 것일 수 없는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사건(탄생, 죽음)이 만일 각 사람에게서 공통된 것이 아니라면, 공동체란 있을 수 없다. 그 사실이 공동체의 근거를 이룬다. 공동체는 너나들이로 말하기가 금지되어 있는 비대칭성 asymetrie의 관계만을 '너와 나에게서' 완강히 보존하려 한다... 공동체는 죽어간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우리는 홀로 죽지 않는다. 만일 죽어가는 자의 이웃이 된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진정 필요하다면, 그 이유는 하찮기는 하지만 역할을 나누기 위해서, 죽어가면서 현재 죽을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부딪힌 자를 내리막길에서 붙들기 위해서이다. 가장 부드러운 금지의 명령으로. 지금 maintenant 죽으면 안 돼. 죽기 위한 지금이 있을 수 없다는 것. _ 모리스 블랑쇼,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 p24


 156명의 안타까운 희생자가 발생한 10.29 참사.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은 분명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유한한 존재로서 죽음을 바라보는 안타까움.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이 공존하는 것을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출입금지 구역도 아닌 곳에 자유롭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방문한 이들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다름아닌 평소 '자유민주주의'를 그토록 외치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평소 그렇게 '자유'를 외치던 자들이 정작 '책임'에 대해서는 왜그렇게 침묵하는지. '자유-책임'은 동전의 양면임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이렇게 참사의 기억은 일부에서 왜곡되고, 논쟁거리로 소비되고 있다.

 

 세기를 거치며 새로이 덧붙여진 자산으로 점점 더 풍부해진 이 공생관계는 대혁명과 더불어 파경을 맞았다. 모든 것이 요동을 쳤다. 이제껏 사회적 결속의 원칙이요 민족적 일체성의 기초였던 교회의 맏딸이라는 준거관념은 두 충성의 대상 - 신도인가 시민인가 - 가운데서 선택을 강요받은 프랑스인들 사이에 깊은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한 파열은 몇 달 사이에 이루어졌다(p197)... 교회의 맏딸 반대편에 또 하나의 프랑스가 들어서 있었으니, 이 프랑스는 대혁명을 자신의 세례 시점으로 잡고, 랭스의 종교에 혁명의 서사시를 대립시켰다. 그 사건의 파장은 막대했다. 그것은 거의 2백 년 가까이 민족의식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몰고 왔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5> , p198


 기억의 왜곡 문제는 오늘날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억의 장소 5 Les Lieux de Memoire>는 1572년 프랑스에서 가톨릭 신자들에 의한 대대적인 위그노(개신교 신도) 학살이 일어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Massacre de la Saint-Barthelemy)이 분열된 프랑스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억되었는가를 알려준다. 


 대개 공식적 프랑스에 속하며, 따라서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나라에서 권력의 보유가 허용한 모든 수단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던 절반의 프랑스는 프랑스의 종교적 과거에 관한 모든 전거를 공동의 기억에서 지워 버리는데 힘을 쏟았다... 반대기억을 풀어놓는 반대역사(contre-historie)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지지자들은 종교에 관한 편집(偏執)에서 비롯된 박해 이외의 어떠한 사실도 좀처럼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종교사는 생바르텔르미 학살과 미구엘 세르베토나 라바르 기사의 처형 사건, 또는 낭트 칙령의 철회 등 확실히 종교적 소수파나 무신자들에게 고통스러운 기억들만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들로 축소되었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5> , p199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하나의 분기점에서 자신의 입장에 따라 역사의 기억을 하나의 방향으로만 바라보기 위해 이를 소거(消去)하려는 움직임과 이에 대항해 하나만을 강조하고 다른 모든 것을 편집하는 반대의 흐름. 이러한 두 갈등은 오랜 분열 끝에 공동체에 닥친 공통의 위기 속에서 극적으로 화해하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적 의미가 퇴색한 뒤 이루어진 화해가 갖는 한계 또한 <기억의 장소 5>에서는 분명하게 지적된다. 10.29 참사를 보면서 우리는 이 비극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타인의 죽음이 현재의 우리에게 갖는 의미,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기본으로 이 참사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한 세기여에 걸쳐 점점 더 사이가 벌어진 끝에, 두 개의 프랑스는 1914년에 터진 전쟁과 함께 민족 공동체가 겪어야만 했던 시련을 계기로 서로 화해하기 시작했다. 두 갈래 기억들 사이의 화해는 '신성한 단결'(Union sacre)의 필연적 결과들 가운데 하나였다(p204)... 오늘날 이러한 관념에 의거하는 하나의 프랑스와 그것을 거부하고자 했던 또 하나의 프랑스 사이의 대립은 확실히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양쪽 모두의 기억상실일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맏딸이 지나온 종교적 과거가 잊혀져감에 따른 민족문화와 민족적 기억의 손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염려해야 할 이들이 바로 세속성 원칙에 가장 투철한 구성원들, 즉 근대 프랑스의 기초자들을 계승한 사람들이라는 점은 현 상황의 커다란 역설이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5> , p209


 다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10.29 참사에 대해 애도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러한 참사의 원인과 재발방지에 대한 노력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방지하고자 만들어 낸 합의체로서 '국가권력'이라는 리바이어던을 인정한 것은 이를 통해 최소한의 안정을 보장받기 위함이 아닐까. 스스로의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면서까지 리바이어던이라는 용(龍)의 머리에 올라탔으면,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그의 의무가 아닐까. 되려 역린을 건드려서 용의 분노를 샀더라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일반의지를 모두 담아낼 그릇이 못된다면, 스스로 그릇을 깨뜨리고 내려오는 것만이 모두를 위한 마지막 충정이라 생각된다...


 공통의 권력(common power)은 외적의 침입과 상호간의 권리침해를 방지하고, 또한 스스로의 노동과 대지의 열매로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여 쾌적한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권력을 확립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람의 의지를 다수결에 의해 하나의 의지로 결집하는 것, 즉 그들이 지닌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one Man) 혹은 '하나의 합의체'(one Assembly)에 양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 모두의 인격을 지니는 한 사람 혹은 합의체를 임명하여, 그가 공공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하든, 혹은 [백성에게] 어떤 행위를 하게 하든, 각자가 그 모든 행위의 본인이 되고, 또한 본인임을 인정함으로써, 개개인의 의지를 그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개개인의 다양한 판단들을 그의 단 하나의 판단에 위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달성되어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의 인격으로 결합되어 통일되었을 때 그것을 코먼웰스(Commomwealth)라고 부른다. 이리하여 바로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이 탄생한다. 코먼웰스의 정의(定義)는 다음과 같다. '다수의 사람들이 상호 신의계약을 체결하여 세운 하나의 인격으로서, 그들 각자가 그 인격이 한 행위의 본인이 됨으러써, 그들의 평화와 공동방위를 위해 모든 사람의 힘과 수단을 그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_ 토머스 홉스, <리바이어던 1> , p232


 용(龍)이라는 동물(虫)은 유순해 길들이면 탈 수 있다. 그러나 턱밑에 직경 한 자쯤 되는 역린(逆鱗, 거꾸로 난 비늘)이 있는데, 만약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어, 설득하려는 자는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어야만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_ 한비자, <한비자> , p118/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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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08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12-09 04:52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
 
[eBook] 심심할 때 읽는 EPL 영국 축구(프리미어리그) 이야기
이문익 / 유페이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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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새벽 운동을 가기 위해 일어나던 중 충격적인 사건에 정신이 들었다.

참 가슴아픈 일,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수도 서울 한복판 번화가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탄식이 절로 난다. 2014년 10월 판교 공연장 환풍구 붕괴사고에서처럼 문화행사에 많은 사람이 몰려 발생한 사건이지만, 피해 규모는 그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에 비통한 마음이 크다.

위령의 날(Day of the Dead, 11월 2일)에 젊은이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더 이상 이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힐즈버러 참사 (Hillsborough disaster)

 1989년 4월 15일 잉글랜드 셰필드에 있는 힐즈버러 스타디움에서 발생한 96명의 팬이 사망하게 된 사건이다. 당시 리버풀 FC와 노팅엄 포리스트 FC간의 FA컵 준결승전이 힐즈버러 스타디움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이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약 25,000여명의 리버풀 팬들이 찾아왔지만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이들이 몰려 킥오프 이후 96명이 압사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의 모든 스타디움에는 기존의 입석 형태가 아닌 좌석 형태의 좌석을 갖추게 되었고, 보호 철망은 모두 철거하게 되었다. _ 이문익, <EPL 영국축구(프리미어)이야기> , p8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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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1-02 1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희생자들이 훌리건으로 매도당해서 그 명예 회복과 보상을 위한 소송과 승소까지 20년이 걸렸다고 들었어요.
결국 과실치사로 보상을 받았지만, 길고 긴 법정싸움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압니다. ㅠ

겨울호랑이 2022-11-02 21:28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책임질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고 빠져나가기 위해 진실을 은폐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그렇게 넘어가서는 안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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