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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가 왜 멸종했으며 어떻게 해서 해부학적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 대신 그의 성공 역사를 전세계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p66)... 모든 생활의 중심은 사냥, 도살, 도축이었다. 동물은 생존에 필수적인 고기, 지방, 골수를 제공했고 거기에 더해 가공해 사용할 수 있는 털, 힘줄, 뼈, 뿔도 제공했다. 요컨대 동물은 식량으로, 또 도구로, 의복으로, 나아가 집을 짓는 자재로 남김없이 이용되었다. _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 p78/962

 얼마 전 대통령의 지시로 '개 식용 금지 검토'가 보도되면서 오랜 한국 사회의 논쟁 중 하나인 '개를 먹어도 좋은가'가 잠시나마 이슈가 되었다. 찬반의 여러 논리가 있지만, 크게 묶어본다면 '개는 다른 가축과 다른가?'에 대한 물음으로 돌릴 수 있을 듯하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얇게나마 이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공존했던 시기로 약 3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헤르만 파르칭거(Hermann Parzinger, 1959 ~ )는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Die Kinder des Prometheus: Eine Geschichte der Menschheit vor der Erfindung der Schrift>에서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원인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저자는 기후, 종족의 특성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기에 특정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책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말하듯 이 시기의 중심이 '수렵(狩獵)'이었다는 사실은 독자들에게 사피엔스의 생존과 관련된 어떤 관련성을 추측케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단히 중요한 사실은 유럽의 후기구석기시대 현생인류는 그 이전의 인류종과는 달리 투창가속기라는, 사냥 성공률을 확실히 높일 수 있는 일종의 기계를 발명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인류는 자연환경에 일방적으로 적응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이 그때그때 사냥 운과 같은 우연적 요소에 덜 좌우되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계획적으로 목표의식을 갖고 사냥 도구와 기술을 개선시켰다. _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 p126/962


 후기구석기시대를 공존하던 인류의 두 종(種)은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개발된 여러 개발된 사냥도구들은 이러한 노력의 성과물로. 두뇌의 용량도 비슷하고 같은 수준의 문화를 누리던 이들의 결과물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본다면, 이러한 새로운 도구의 개발이 생존의 견인차가 되지는 못할 듯하다. 그렇다면, 사피엔스가 해냈고, 네안데르탈인이 하지 못했던 일 - 가축화 -가 수렵 생산성에 결정적인 변수는 아니었을까.  


 당시 인간이 개를 길렀던 것은 시간이 더 지난 후 다른 가축을 기르게 됐을 때 가졌던 목적과는 아주 다른 이유에서였다. 다른 가축들의 경우 고기와 젖 그리고 털을 공급받기 위한 목적이 주였다. 이에 반해 갯과 동물은 가장 환영받는 사냥 조력자였다. 추정컨대 갯과 동물은 처음에는 인간이 사냥하고 남은 것을 주워 먹기 위해 야영지 근처에 머물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과 더욱 친밀하고 지속적인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는 서로에게 이득이 되었을 것이다. _ 헤르만 파르칭거,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 , p74/962


 파르칭거가 인간과 개의 공생을 '사냥 조력-음식 제공'이라는 경제적 교환관계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 The First Domestication: How Wolves and Humans Coevolved>에서 저자들이 보여준 관점은 한 단계 나아간다. 늑대 중 일부가 자신들의 무리 대신 인간을 동료로 택하고, 인간(호모 사피엔스) 역시 늑대집단의 특성을 받아들이면서 생존을 위한 보다 나은 결과를 얻었다는 것으로 이들은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통해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렌시스를, 개는 늑대보다 생존에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생인류와 조우한 최초의 늑대들은 사자와는 매우 다른 방법으로 인간과 상호작용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이 늑대들은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 심지어 호모 에렉투스 같은 호모 속의 다른 구성원들 옆에서 수천수만 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들과 친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늑대는 이들과 사회적 유대를 맺거나 장기적인 상호작용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늑대 표현형의 분명한 변화를 이끈 유대조차 없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더 몸집이 크고 더 육체적으로 강한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를 유럽과 아시아 전체에서 밀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사피엔스가 늑대를 파트너로 가졌던 반면 네안데르탈인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Coren 2006 ; Shipman 2015) _ 레이먼드 피에로티외 ,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 , p119


 인류가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퍼져나가면서, 인간 집단의 사회성은 영장류 모델을 더 이상 닯지 않고 갯과 동물 모델의 요소를 반영하기 시작했다.(Schleidt and Shalter 2003)... 최상위 포식자인 늑대는 순록, 말, 들소 같은 유제류처럼 떼를 지어 이주하는 동물을 먹고 산 '최초의 목축업자'이기도 하다. 마지막 빙하기 동안 인간 집단은 늑대의 목축 생활과 집단행동방식을 받아들였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아마도 아시아 동부의 호모 에렉투스 같은 시간적으로 더 앞선 다양한 호모 속이 현생인류에게 일을 내주고 개가 늑대로부터 분리되면서, 두 종 모두 종안과 종 사이에서 더 협력적으로 상호작용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_ 레이먼드 피에로티외 ,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 , p123


 이런 관점들을 종합해 본다면, 수렵시대부터 시작된 '개'는 다른 가축과는 분명 다르다. 고기와 젖을 얻기 위해 기르기 시작한 소, 양과 같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동물이 아니었으며, 인류와 비즈니스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는 고양이와 같지만, 농경시대 이후로 가축화된 고양이보다 이른 시기에 손잡은 혈맹(血盟)이라고 본다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이런 역사적인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개는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주장이 단순히 반려견을 집안에서 키우기 때문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개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인류와 개와의 전통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문제가 아닐까를 생각하게 된다. 다만, 법을 통해 관계 회복을 강제하는 것보다는 우리들 스스로 변화하려는 움직임이 바람직할 것은 물론일 것이다. 서유구 徐有榘, 1764 ~ 1845)의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 <정조지 鼎俎志>에는 '개'고기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위장의 기운을 보하고, 허리와 무릎을 따뜻하게 하고, 기력을 북돋는다는 효능도 소개되지만, 이와 함께 해(害)로운 점도 많은 것을 보면 전통적으로도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은 아닌 듯하다. 


 <본초강목 本草綱目> 개고기는 그 성질이 상륙(商陸, 자리공뿌리)과 상반되고, 살구속씨를 꺼린다. 마늘과 함께 먹으면 몸을 해친다. 마름과 함께 먹으면 전간(癲癎)이 생긴다. 일반적으로 개는 구워 먹어서는 안 되는데, 구워 먹으면 소갈병에 걸리게 한다. 임산부가 먹으면 아이가 말을 못하게 된다. 열병이 있은 후에 먹으면 사람을 죽인다... 야윈 개는 병이 있고, 미친개는 발광하고, 저절로 죽은 개는 독이 있고, 발굽 뒤에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 개는 몸을 해친다. 넓적다리가 붉고 부산스러운 개와 누린내가 나면서 눈이 붉은 개는 모두 먹어서는 안 된다. _ 서유구, <임원경제지> <정조지1>, p302 


 이번 페이퍼를 쓰면서 가축화된 동물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냥 친구 개, 창고 지킴이 고양이, 경작 도움이 소 등등. 이들 모두 인류 문화가 바뀌면서 전통적이 역할에서 벗어나 귀염받거나 아니면 고기를 제공하는 관계로 변화되었음을 역사 안에서 바라본다. 이와 같이 사회, 문화가 바뀌면서 관계가 다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우리 가치의 중심을 인간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 인류는 사회를 위해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물음으로 돌아오면서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다음주제는 '노동가치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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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10-08 11: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담번 주제도 몹시 기대됩니다. ^^

겨울호랑이 2021-10-08 11:55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마침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읽고 있습니다만, 그 전에 먼저 토지 독서 챌린지 페이퍼를 올려야 할 것 같아요. 참 한 주가 빠르게 지나갑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점심 맛있게 드시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

북다이제스터 2021-10-13 08:59   좋아요 1 | URL
존 로크가 처음 제시하고 애덤 스미스와 리카르도가 자신들 경제이론의 바탕으로 삼은 노동가치론은 자체의 모순을 가진 듯 보입니다. 마르크스도 노동가치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듯 합니다. 그들은 노동가치를 주장했으나 결국 왜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1-10-13 09:05   좋아요 0 | URL
북다이제스터님께서도 이미 아시겠지만, 마르크스는 <자본>과 <잉여가치론>에서 기존의 경제학자들이 가졌던 노동가치론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지적하고 자신의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당시에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이 제시한 사상은 분명 기존 경제학자들보다는 앞서 나간 것이겠습니다만,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북다이제스터 2021-10-14 19:27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 글 기다리고 기다리다 제가 먼저 정리해 봤습니다. 제 이해가 맞는지 한 번 봐주세요. ^^

노동은 가치 있을까?

 

인류의 모든 이론이 그렇듯 ‘노동가치론’도 역사에 따른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이론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적 탄생 배경과 전승 과정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할 듯싶다. 동양도 그렇지만 서양 경제사는 ‘땅 소유자(지주)와 화폐 소유자(상인)’ 간 다툼이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계급투쟁 역사는 농촌과 도시 사이에서 벌어졌다고 지적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이러한 경제 역사였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토지를 보유한 귀족[士]이 상인[商]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사농공상(士農工商) 이념 지표를 2000년 동안 유지했던 것도 그렇고, 중세 유럽에서 상업이 유대인에게만 제한되었던 것도 그렇다. 또한 부르주아(상인)가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지주)을 상대로 세상을 바꿔보자고 일으킨 프랑스혁명도 그렇다. 땅 소유자가 지배하는 시스템을 ‘봉건주의’라 한다면, 상인이 지배하는 시스템을 ‘자본주의’라 할 수 있겠다.

 

잠시 예를 들면,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이념을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이라고 표현한다면, ‘자유’는 경제 관념을, ‘민주주의공화국’은 정치 관념을 의미한다. 이렇듯 경제와 정치 관념을 서로 때어내어 국가 체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두 가지 정치경제 사상이 있었다. 땅 소유자가 내건 정치 슬로건이 ‘귀족정’이고 화폐 소유자가 내건 슬로건은 ‘민주정’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민주정은 자본주의와 잘 어울린다. 아무튼 고대 그리스 이후 귀족정과 민주정 다툼은 로마가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동지중해를 석권하여, 군사적인 토지 세력이 해상 상업 세력에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고대 세계는 로마의 토지 세력 아래 통일되었다. 이후 1500년 간 유럽에서는 토지 세력이 지배하는 봉건 시대가 지속되었다.

 

봉건 시대를 종결하고 자본주의 시대, 즉 상인이 지배하는 시대가 열리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정신이 새로운 이론을 요구했고 존 로크가 이에 응답했다. 칼 폴라니가 지적했듯이 화폐가 지배하는 상인 시대 특징은 “부(富)의 모든 형식 중에서 오직 돈만이 정해진 한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사용을 위해서 궁전 다섯 개를 짓기 원하는 상인도 궁전 5000개를 짓는 일에는 망설일 것이다. 하지만 상인은 궁전 5000개 가치를 돈으로 축적할 수 있고 또 그 돈을 보유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상인이 그 만큼 많은 자신 돈을 권력이 있는 왕이나 귀족, 반란 민중 등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고 안전하게 보유할 수 있는 ‘소유권,’ 즉 재산의 배타적 권리가 중요하게 된다. 당시 사람들을 지배하던 일반적인 생각은 ‘만일 지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라면 모든 인간들이 쓰도록 주어진 특정 자연물을 어떻게 몇몇 개인이 독점할 수 있는가?’였기 때문이다.

 

존 로크는 ‘소유권이 당연하다’는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천부인권설’을 대전제(공리)로 끌어들인다. 천부인권이란 개인 신체는 자신 소유이며, 자신 몸을 소유할 권리는 천부적 권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직접 수행한 노동으로 획득한 대상도 자신 소유가 된다는 노동가치설을 만들어 낸다. 아래 자세한 이유를 언급하겠지만 토지나 생산 도구로 만든 가치는 고려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로크가 모든 소유권을 정당화한 것은 아니다. 로크는 내가 소유하고도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소유할 것이 남아 있는 한에서만 나의 소유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로 로크는 자연과 달리 화폐에 한계가 없기에 화폐를 근거로 자본의 부 축적과 소유를 정당화한다.

 

정치경제학에서 노동가치의 ‘가치’란 ‘의미있다’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고 ‘어떤 상품 가격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와 관련 있다. 즉 가치가 서로 다른 물건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의 척도 또는 매개가 있어야 한다는 가격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상품을 만들고 판매하기 위해 생산 과정에 투입된 것은 생산 수단과 노동력이라는 두 요소다. 여기에 토지는 포함되지 않는다. 토지는 소유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고대 이스라엘 왕국은 신의 이름으로 토지소유를 불법화 했으며, 우리나라 경우 ‘왕토’라는 이름으로 대부분 토지는 국가 소유로 남았다. 왕토사상은 토지의 유일한 소유자가 왕이니 토지는 원칙적으로 누구에게 넘겨줄 수 없다. 물론 사고 팔 수도 없다. 그러므로 관리를 임용해도 급료로 토지 자체를 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급료는 줘야 한다. 절묘한 해결책이 있다. 관리에게 토지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를 내주는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18세기까지 대부분 땅은 매매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땅은 소수가 독점적으로 소유하거나 사고파는 대상이 아니었다.

 

생산 수단은 일반 상품처럼 특정한 노동에 의해 이미 생산된 상품으로 구입되어, 그 가치가 생산 과정에 그대로 이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남는 것은 노동력뿐이다. 노동력은 로크 말처럼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거나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 애덤 스미스는 처음에 로크 이론을 받아들였다. “모든 물품의 진정한 가격은 그것을 얻기 위한 노동과 수고다. 노동은 최초의 가격, 곧 모든 사물의 대가로 지불되는 최초의 구매 대금이다.” 즉 노동을 제외한 땅의 천연자원이나 생산 수단은 단지 인간 노동이 만들어낸 수많은 결과물로서, 최종적으로 사용 가능한 형태를 위해 변형된 자원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노동가치가 이윤을 만들고 궁극적으로 상품 가격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애덤 스미스는 가치 근원이 노동에 있다는 존 로크 출발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노동 가치설을 전개했지만, 나중에 노동에 의한 가치 결정은 자본가와 지주가 없는 세상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노동가치론을 포기했다.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서는 상품 가격에 자본가 이윤과 토지 사용 대가인 지대, 노동자 임금이 포함된다고 보았다. 만일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하된 노동 시간에 따라 상품 가치가 결정된다면 상품 가치는 투하된 노동만큼, 즉 임금을 받고 일한 만큼 생산된 가치에 의해 결정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이윤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가와 지주가 상품 가치 형성 과정에 이윤과 지대라는 가격 형태로 참여한다고 보았다. 이는 결국 자본가 이윤 획득을 정당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점은 로크가 노동에 근거해 소유권을 정당화한 것과는 정반대 논리로 나아간 것이다. 스미스는 소유권을 근거로 이윤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로크 논리에 비추어 보면 스미스 주장은 명백하게 모순적이다. 소유가 노동에 의해 정당화되면서도, 노동하지 않고 거두어 들이는 이윤이 소유에 의해 정당화되는 자가 당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분명 알고 있었을 리카도도 자본 입장에서 이윤을 설명하기 위해 스미스 주장을 받아들여 상품 가격을 ‘고정 자본 임금(유동 자본) 평균 이윤’이라고 규정했다.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는 등가 교환의 법칙을 전제하기에 생산 가격의 구성 요소로서 기계류와 같은 고정 자본 뿐 아니라 임금과 평균 이윤을 미리 전제하는 논의를 전개했다. 하지만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다시 가치는 가격에 의해 설명되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올바른 방법은 가치로부터 가격을 설명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가치 차원에서 이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잉여가치율 개념을 만들었다. 잉여가치율은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잉여노동을 뽑아내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지 측정하는 공식이다. 만약 상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기본 노동 시간이 4시간이고, 이익을 창출하는 추가 잉여노동이 4시간이라면, 잉여가치율은 4:4, 즉 1백 퍼센트다. 잉여가치란 한마디로 잉여노동인 것이다. 이는 자본이라는 개념 자체가 착취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경우 문제가 생기는데 노동력 또한 상품이기에 등가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등가 교환이면서도 부등가 교환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생산 체계가 문제다. 결국 노동가치론의 문제는 ‘등가 교환’을 전제로 삼은 데 있다.

 

그럼 상품 거래에서 ‘등가 교환’이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 이를 알기 위에서는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각자 자신이 응당 얻어야 마땅한 몫(due)을 얻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경제적 거래가 그러한 원칙하에서 이뤄질 때 비로소 경제 현상이 폴리스의 약화와 같은 사회 변동을 가져올 모든 가능성이 차단될 수 있으며, 성원들 간의 경제적 거래가 폴리스 결속과 화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뤄질 것”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응당 얻어야 할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중간’ 즉 적절한 수량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정의로운 거래는 정확한 등가(equivalency)로 이뤄져야지 어느 한쪽이 이익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근대의 프루동도 이를 뒷받침한다. “A가 B에게서 이익을 취한다면, 경제원리에 따라서 B는 C에게서, C는 D에게서 다시 그만큼의 몫을 회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이러한 일은 결국 Z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러면 Z는 누구로부터 회수할 것인가? 만일 그가 최초 수혜자 A로부터 회수한다고 하면, 이미 누구에게도 이익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거대한 사회도 같은 것이니, 한 사람이 이윤으로 부자가 되려면 다른 한 사람이 가난해져야만 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왜냐하면 A에게 이익이 존중되기 위해서는 Z가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미스나 리카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가 상품 교환의 유통 과정이 아닌 생산 과정에서 ‘잉여가치’를 찾은 이유는 상호 평등한 존재로서 판매자와 구매자가 만나는 유통에서 잉여가치가 생겨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상품의 등가성을 엄밀히 재기 때문이다. 단순한 상품유통이든 노동력을 포함한 확대된 상품유통이든, 유통에서는 잉여가치가 생길 수 없다고 믿었다. 상품교환의 기본 공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용가치가 다른 상품을 교환한다. 하지만 교환할 때의 가치는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상품유통에서는 가치 증식을 해명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마르크스는 갈리아니의 말을 인용했는데, ‘평등이 있는 곳에는 이익이 없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로 보면 총가치는 총생산 가격과 일치하고 총잉여가치는 총이윤과 일치’한다는 점을 <자본론> 3권에서 입증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가치론이 개별 상품이 아니라 사회 전체 차원에서 적용되며 총가치의 분배 차원에서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만일 교환 속에서 가치 증식이 이루어진다면 사회 전체 가치 총량은 일정하게 유지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더 이상의 가치 생산이 이루어질 수 없다. 여기서 노동가치론은 무너지게 된다. 노동가치론은 등가 교환이라는 법칙을 유지해야 하는데, 자본주의 생산에서 이것이 무너진다. 예를 들어 극단적인 경우로서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로봇에 의해 생산할 수 있는 그러한 기업을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여기서 가변 자본(노동력)은 제로이고 잉여가치도 제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이윤율이 확보된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총자본의 총잉여 가치가 생산 가격을 통해 배분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회사는 노동자를 직접 착취하지는 않지만,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간접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총잉여 가치가 개별 자본에 배분된다는 마르크스 생각은, 잉여 가치가 개별 자본에서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별 자본에서의 생산 과정에서 잉여 가치가 착취되는 것이 아니다. 유기적 구성이 높은 자본, 예를 들어 자동화가 진행되어 노동자가 거의 없는 기업, 노동자가 착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이윤율이 얻어지는 것은 다른 자본 아래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개별 자본의 생산 과정에서만 착취를 말하는 것은 곤란할 뿐 아니라 종종 유해하기까지 하다. 개별 자본이 얻는 이윤에는 다른 부문의 자본 노동자나 독립 소생산자로부터 얻어진 잉여 가치가, 또한 한 나라의 총자본이 얻는 이윤에는 해외 노동자로부터 얻어진 잉여 가치가 배분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꿰뚫어 볼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의 교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다. 이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인간 노동 일반으로 추상화된 가치가 사회적 관계 아래서 결정될 때, 즉 교환가치가 될 때 그 것은 더 이상 노동 시간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교환가치량은 투하된 노동 가치량과 같지 않고 ‘사회적으로 승인된 가치의 양’으로 결정된다. 교환 가치는 가치가 사회적으로 표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은 임금노동과의 교환 속에서 모든 노동자의 노동을 수량적인 단위로 환원한다. 하지만 노동자의 구체적인 노동은 양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질을 갖고 있다. 자본 입장에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교환은 등가 교환이다. 자본에게 임금노동은 또 하나의 상품이며 상품으로 환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교환은 부등가적이다. 노동자에게 임금노동은 자신의 생명을 재생산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전개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노동력이 생명적 욕구를 갖고 자기 활동을 전개하는 한, 항상 양화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자본의 내적 논리, 즉 이윤 추구라는 체제 안에 온전하게 포섭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책상 1개 = 바지 2개’라는 표시에서 “좌변인 1개의 책상은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주어 내지 주체고, 바지는 그것의 가치를 표현하는 술어다. 따라서, ‘책상 1개 = 바지 2개’는 양적 동일함(등가성)을 표시하는 수학적 기호가 아니기에, 수학적 습관에 따라 양변을 바꿔놓으면 안 된다. ‘책상 1개 = 바지 2개’의 식에서 “애덤 스미스는 ‘기회비용’의 동등성을 찾아냈지만, 마르크스는 이 관계에서 양적인 등가관계를 끄집어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잘못되었다. 상이한 물건들의 크기는 동일한 단위로 환원된 뒤에야 비로소 양적으로 비교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가치형태는 양적 비교를 위한 동일한 단위가 없으며, 따라서 양적인 관계로서 가치를 정의할 수 없다.˝ 즉 단순한 가치형태는 양적 관계를 표시하는 수학적 도식이 아니라 ‘질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논리적 도식이다. 하지만 화폐의 탄생을 통해서 질적인 등가 가치가 양적인 등가 가치로 변화되었다. “사실 좌우변 교환 도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심연이나 비약이 있으며, 그 심연 속에 경제학적 가치 개념과 연관된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다. 여러 생산물이 단 하나의 등가물(화폐)을 통해 비교된다고 할 때, 비교하는 방법은 그 등가물의 양을 비교하는 것이다. 등가물의 질이 무엇이든, 그것은 하나기에, 질의 차이를 통해 가치를 표현하고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치경제학적으로 ‘노동가치론’이 의미 없다면, 문화 차원에서 노동은 가치(의미)가 있고 ‘신성’할까? 노동이 중요하다고 여겨지게 된 계기는 18세기에 자본가가 노동을 통한 성과에 집중하면서, 자신 삶을 귀족들과 의도적으로 구분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생적으로 남의 노동에 의지해 살고 있는 귀족에 비해 자본가 자신이 더 청렴하고 도덕적이며, 교양 있고 유용하며, 덜 부패하고 덜 극단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자본가 계층이 절약과 금욕, 부지런한 노동의 미덕을 실행한 것은 그들이 프로테스탄티즘이나 공리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체계가 이윤을 낭비하지 않고 투자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자신에게 강요하는 규율은 타자에 대한 규율로 전환되어 완성된다. 자신에게 혹독함은 ‘비생산적이고 게을러터진’ 노동자를 가차 없이 대할 수 있는 권리나 의무로 자연스럽게 전이된다. 초창기 노동자들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려고 했다. 그런 사람은 현재보다 더 잘살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자기가 생각했던 정도의 수당을 받는다면 더 일하려 하지 않고 그냥 일을 그만두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아직 자본주의 정신이 다수 사람을 지배하지 않은 곳에서는 여전히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임금을 몇 배 더 올려주더라도 노동자들을 더 많이 일하게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을 스스로 일하고 싶어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어졌다.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노동의 미덕과 노동하는 태도였다. 학교에서의 사회화 리듬은 생산 리듬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시간을 작은 단위로 나누어 아이들이 종소리에 반응하도록 가르쳤으며, 시간에 늦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도록 강요했으며, 신체적 태도와 동작을 교정하고 모든 태도를 훈육시켰으며, 아주 작은 이탈이나 소홀함도 육체적 처벌과 모욕으로 벌을 주었다. 기능적 지식을 주입하여 머리를 식민화시켰고 육체를 노동 도구로 만듦으로써 육체마저 식민화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노동은 자아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이 모든 과정들이 함께 작용해 결국 노동을 인간의 이차 본성으로 만들었다.

 

대부분 사람들의 사회화가 임금노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본질적으로 노동하는 태도를 통해 매개되는 사회에서 일자리를 잃는 것은 다만 수입원을 잃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 장소와 사회적 실존, 사람들과 교제와 관계를 상실하고, 동시에 가장 중요한 자아 유지 메커니즘을, 허약한 자아를 지탱하던 외적 지지대를 상실하는 것이다. ‘퇴직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외되고 또한 소외시키는 노동에 종속된 삶을 지칭하는 급진적 표현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바람직한 노동은 “목적 합리성이 독립되어 따로 노는 것을 피하고 철저하게 가치 합리성 차원에서 복무하도록 묶어두는 것을 사상으로 하고 있다.” 이 점은 헤겔 사상과 다르며 오히려 마르크스 사상에 부합한다. “헤겔에게 노동이란 세계를 변화시키는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이다. 그는 노동을 목적성에 따라 자신 의지를 밖으로 드러내는 활동으로 일반화한다. 비를 막으려는 목적성이 지붕을 만들고, 바람을 피하려는 목적성이 벽을 만들듯이, 정신 안에서 형성된 목적성은 정신 외적인 존재로 변화된다. 이로써 노동은 정신의 활동방식인 ‘외화(外化)’가 된다.“

 

그렇지만 마르크스 생각은 다르다. “노동이란 일반적인 합목적 활동이 아니며, 정신 활동이 외화되는 것도 아니다. 노동이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사용가치고 노동력의 사용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하는 행동이 노동이라는 통념을 깬다. 자본가가 노동력을 상품으로 구매하여 사용하는 것이 노동이며, 그런 사용 때문에 노동력의 판매자는 비로소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노동이란 이처럼 노동력을 구매하여 사용하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정의되는 것이지, 정신 활동의 본성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노동의 가치 여부는 우리가 어떠한 것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일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 참고도서

<경제인류학 강의>

<노동가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노동을 거부하라>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

<트랜스크리틱>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소유란 무엇인가>

겨울호랑이 2021-10-14 20:08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댓글로 쓰기에는 너무 좋은 글을 올려주셨네요. 제가 아직 정리가 채 끝나지 않았는데, 제가 생각했던 범위보다 더 깊고 넓게 노동가치론을 정리해주셔서 많이 배웠습니다. 다만, 존 로크 이전에 이븐 할둔이 이미 <역사서설>에서 노동가치론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존 로크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사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대상황에 따라 재발견된 사상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잉여가치론 1>에서 마르크스는 말씀하신 애덤 스미스, 리카도 이외에도 존 스튜어트 밀, 케네를 비롯한 중농주의 사상가들의 이론에 대해 평가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들은 노동이 모든 가치의 원천임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논의를 중단한 실패한 사상가인 듯 합니다. 큰 틀에서 자본 역시 과거 노동의 결과물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한계점을 말하고, 마르크스 자신은 이를 위해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으로 나누어 분석을 수행한다는 것이 그의 ‘가치론‘의 한 부분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러한 그의 분석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을 먼저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조만간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의 정리로 부담이 늘어났네요^^:)

북다이제스터 2021-10-14 20:17   좋아요 1 | URL
아 마르크스의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을 분리하여 한 분석의 의미를 전 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말씀해주시면 저도 제 글을 좀 더 수정보완 하고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10-14 20:43   좋아요 1 | URL
제가 이해하기로 마르크스는 ‘불변자본‘을 ‘과거 노동의 결과로 이미 체현된 노동‘(즉 죽은 노동)으로, 현재의 생산 기간에 지출된 노동을 ‘산 노동‘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불변자본‘은 이미 노동이 체화된 부분이기에 새로운 가치를 낳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산과정 후 생겨난 상품의 잉여가치에 청구권을 내미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 듯 합니다. 이는 생산수단을 자본가가 독점하기에 생기는 현상으로 가변자본에게 지불해야 하는 필요노동에 대한 대가를 최소한으로 지급하면서 자신의 몫을 키우려는 의도가 착취의 형태로 나가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거칠게 이렇게 정리가 될 듯 합니다만.... 중간에 이빠진 부분이 많네요^^:)

북다이제스터 2021-10-14 20:49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백퍼 이해 되었습니다.
제 글에도 반영하여 다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1-10-14 20:51   좋아요 0 | URL
북다이제스터님, 항상 감사합니다. 저도 곧 정리하겠습니다^^:)

mini74 2021-10-08 14: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초의 가축. 이거 우리 똘망이 역사수업 시간에 교재로 써야겠어요 ㅎㅎㅎ

겨울호랑이 2021-10-08 14:11   좋아요 2 | URL
^^:) 개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더 재밌게 읽을 책이라 여겨집니다. 미니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가장 큰 규모의 멸종은 2억 5,100만 년 전에 있었던 페름기 말기, 달리 표현하면 페름기 - 트라이아스(PTr)의 멸종으로, 5대 멸종 중 세 번째에 해당한다. 학자들은 페름기 말의 대대적인 동물상과 식물상의 전환을 오래전부터 인식했으며, 고생대와 중생대의 경계 표시로 삼았다. 페름기 말기에 멸종이 일어나는 동안, 고생대 바다를 우점했던 대부분의 동물군들, 곧 산호, 유관절 완족동물, 이끼벌레, 자루가 있는 극피동물, 삼엽충, 암모나이트가 사라졌거나 크게 위축되었다. 식물, 곤충, 양서류, 파충류에서 광범위한 멸종이 있었고, 그들을 대체하는 우점군들이 나타나기까지 끔찍하게도 오랜 변화의 세월이 필요했다. _ 마이클 J. 벤턴, <대멸종>, p187


 마이클 J. 벤턴(Micheal J. Benton)의 <대멸종 When Life Nearly Died: The Greatest Mass Extinction of All Time>은 사상 최대의 멸종이 일어났던 페름기(Permian, 약 2억 9000만 년 전 ~ 2억 4500만 년 전)의 마지막을 주제로 한다. 책의 영문 제목과 같이 거의 모든 생명체가 멸절한 이 사태를 불러온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2억 5,100만 년 전 페름기 말기, 시베리아에서 엄청난 화산활동이 일어났다. 약 200만~300만 세제곱킬로미터의 현무암질 용암이 쏟아져 나와 러시아 동부 390만 제곱킬로미터를 400~3,000미터 깊이로 뒤덮어 버렸다. 시베리아 트랩으로 알려진 이 직역은 넓이가 유럽공동체와 맞먹는다. 요즘은 이런 대규모 화산활동 - 지속기간은 전체적으로 100만 년 이하로 보고 있다 - 이 페름기 말 위기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_ 마이클 J. 벤턴, <대멸종>, p368


 화산이 방출하는 주요 기체는 두 가지이다. 이산화황과 이산화탄소가 그것이다. '온실가스'인 이산화황은 처음에는 온난화를 초래하다가, 곧 대기 중의 물과 반응해서 황산염 에어로졸을 만들어내 후방산란을 통해 태양복사를 흡수하여, 결국에는 온난화를 초래하다가, 곧 대기 중의 물과 반응해서 황산염 에어로졸을 만들어내 후방산란을 통해 태양복사를 흡수하여, 결국에는 냉각화를 유발한다. 또 다른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가 지각 근처에서 태양열을 가둬 대기를 따뜻하게 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_ 마이클 J. 벤턴, <대멸종>, p372


 

페름기의 대멸종을 설명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백악기 -팔레오기 멸종(Cretaceous-Paleogene extinction event)과 마찬가지로 소행성/운석 충돌, 해수면의 변동 등 여러 학설이 제기되지만, <대멸종>에서는 '화산활동이 초래한 지구 온난화'를 원인으로 지적한다. 현무암질 용암과 함께 뿜어져 나온 이산화탄소, 이산화황, 황산염, 염소는 지구온난화와 무산소화를 만들어 생물생산성을 파괴시켰고, 이와 함께 산성비는 토지를 파괴시켰다. 이러한 대기의 파괴 작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페름기의 육지 판게아(Pangaa) 초대륙에 대해 짚고 가야한다. 현재 6대륙이 하나로 연결된 판게아 초대륙은 동식물이 빠르게 번성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과 함께 빠르게 절멸할 수 있는 최악의 조건을 함께 제공했다.


[그림] 판게아 초대륙 (출처 : 위키백과)


 판게아 초대륙의 엄청난 크기는 세계 기후와 동물 군과 식물 군의 확산에 매우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저위도 지역에서는 중앙판게아산맥이 동서방향으로 뻗어 있어 대기의 흐름과 이로 인한 기후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석탄기 후기 동안 이 산맥지대는 열대지역을 가로지르며 놓여 있어서 습한 열대기후에서 자라는 푸르게 우거진 열대우림이 석탄퇴적기를 형성할 수 있었다... 판게아의 대부분은 적도 남쪽으로 뻗어 있었고 과거 곤드와나 대륙괴를 포함했다. 거대한 대륙괴 덕분에 일부 동물군은 광활한 지역에 널리 퍼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판게아 북쪽의 시베리아에는 지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그마 분출이 일어나 현무암으로 광대한 지역을 뒤덮었고 이어서 화산재와 화산가스, 특히 이산화황과 수증기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 사건이 페름기 대량멸종시기와 일치하는데 당시 해양은 산소가 고갈되어 대부분의 해양생물 종이 멸종했다. _ 더글라스 파머 외, <선사시대>, p172


 그리고, 시베리아의 마그마 분출로 시작된 거대한 변화에 판게아 생태계는 마치 연환계(連環計)로 불타는 함대처럼 빠르게 절멸하게 되버렸다. 전체 생명체의 95퍼센트 이상이 멸절한 페름기 대멸종. 이로 인해 지구 생명체의 진화(進化 evolution)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주로 열대의 바다나리류, 완족류, 태형동물이 장악하고 있었던 페름기 후반부의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과정은 약 1천만 년 넘게 일어났다. 모든 대륙이 하나의 거대한 초대륙 판게아로 합쳐지면서 기후와 해류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이로 인해 멸종사건을 일으킨 주요 요인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는 비활동적 중앙해령이 가라낮으면서 해수면의 높이를 280m까지 떨어뜨림으로써 상당수의 해양서식지가 사라졌고 퇴적작용도 거의 일어나지 않아 따뜻하고 얕은 바다는 지구의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는 정도로 줄어들었다. _ 더글라스 파머 외, <선사시대>, p178


 이러한 페름기의 대멸종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대멸종>을 읽다보면 페름기를 살았던 생명체들이 처한 위기가 오늘날 우리가 처한 환경 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음에 적지 않게 놀라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 생명체들은 화산 폭발과 대기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반면, 오늘날 우리는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아닐까. 페름기 때의 판게아 초대륙은 오늘날 세계화( globalization)로 대체되어 세계를 연결시키고, 산성화로 파괴되는 하부구조 -토양과 식물 - 는 극심화 양극화로 파괴되는 하부계층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문제를 악화시키는 구조적 원인이 결과적으로 페름기 대멸종의 환경으로 만드는 상황이 우리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먼 훗날 우리 후대가 아니면 다른 생명체의 역사가가 이 시기를 '인류세 대멸종'이라고 이름짓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맥닐 교수는 지난 세기 동안 인구는 겨우 4배 증가한 데 비해 이산화탄소와 아황산가스 배출량은 각각 17배와 13배가 증가했고 수자원 사용량 역시 9배나 증가했다는 점을 들어서 단순히 인구 증가로만 20세기의 환경 변화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인구 증가가 환경오염을 심화시켰던 것에 못지않게 때로는 토양침식을 완화시키기도 했고, 또 20세기 후반에 심화된 열대 지방의 삼림 파괴는 인구 증가와 거의 상관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_ J.R. 맥닐, <20세기 환경의 역사>, p15 해제 中


 페이퍼를 마무리하다 보니 주일학교 교사 시절 '환경'을 주제로 여름캠프를 준비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캠프 주제가가 <내일은 늦으리>였는데... 언젠가 연의가 자라서 하늘을 바라볼 때 그 하늘에 얼만큼의 별들이 빛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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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1-09-17 13: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 신간 중에도 지구 환경 위기를 경고하고 지구의 역사, 고생물 등을 다룬 책들이 많았어요. 다시 정리해 보아야겠어요.
겨울호랑이 님의 페이퍼를 보면서 우리가 더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는 생존 문제임을 절실히 느낍니다.

겨울호랑이 2021-09-17 14:04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오거서님 말씀처럼 이제는 어느 분야든 환경문제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시대가 되버렸네요. 작은 실천이 중요함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오거서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9-17 2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오늘부터 추석연휴 시작입니다.
즐거운 명절과 좋은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1-09-17 23:5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풍요로운 한가위 되세요!^^:)
 

 촉매는 화학반응을 일으킬 때 아무렇게나 하지 않고 규칙성을 띠기 때문에 생명 탄생의 이전 단계에서 중요하다. 촉매와 그들의 촉진 반응에 의해 더욱 많은 종류의 화합물들이 점차 생겨났다... "하이퍼사이클 hypercycle"이라는 강력한 촉매 작용을 통해 분자들은 화학적 보전 chemical survival을 위한 투쟁에서 서로 서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가조직할 수 있는 있는 화합물들이 서로 보완 작용하여 마치 생명체 같은, 궁극적으로 복제 가능한 구조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이클의 진행은 최초의 세포를 탄생시키는 기초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뒤를 이어서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발전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하이퍼사이클 과정은 생물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65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1938 ~ 2011)와 아들 도리언 세이건(Dorion Sagan, 1959 ~ )의 <마이크로코스모스 Microcosmos: Four Billion Years of Microbial Evolution>는 지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주인공이었던 미생물과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마치 '오파비니아' 시리즈의 요약본과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입문서(入門書)를 통해 저자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논리는 협동보다는 경쟁을 크게 강조했다. 그러나 피상적으로 매우 연약해 보이는 생물이 집합체의 한 부분으로서 오랜 기간 생존했던 반면, 소위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생물이 협동 기술을 익히지 않은 나머지 결국은 멸망한 사례를 우리는 진화 역사에서 꽤 자주 보아왔다. 만약 공생이 생물 역사에서 그렇게 보편적이며 주요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생물학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165


 진화 과정을 거쳤던 모든 종이 결국 공진화를 한 것이라는 논리는 추론적이기는 하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이 논리는 미생물우주뿐만 아니라 거대생물우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곰팡이는 식물 질병의 주 원인이면서도 식물체 생장에 필수적이다.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험악한 관계는 때떄로 좀 더 대규모 공생관계의 한 부분으로 간주할 수 있다. 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263


 <마이크로 코스모스>에서 생명의 출현으로부터 현생 인류에 이르기까지 수십 억년에 걸친 지구 역사에서 진화(進化, evolution)은 결국 '공생(symbiosis)'의 문제임을 저자들은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 ~ 1903)에 의해 왜곡된 '사회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진정한 진화의 의미를 되찾자는 것이 이 책의 한 주제라 여겨진다.


 생물의 역사에서 80퍼센트는 미생물의 역사이다. 우리는 약 20억 년 전 대기 중에 산소가 축적될 때 출현했던, 산소를 사용해서 물질대사를 할 수 있었던 박테리아와 기타 여러 박테리아들로 구성된 재조합에 불과하다.(p271)... 우리는 진화의 사다리에서 가장 윗계단을 차지하는, 모든 생물의 지배자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생물계의 지혜를 받은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가 유전공학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인간은 자신을 박테리아 생활사에 은근히 맡겨서 오랫동안 그들의 방법으로 유전자를 교환하고 복사하게 했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272


 저자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토인비(Arnold Toynbee·1889~1975)에 의해 문명(文明)에 주어진 '도전과 응전'이라는 과정도 새롭게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도전에 성공적인 응전이 문명을 이끈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실현된다는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고대 그리스에서 도리아인의 침입, 고대 인도에서 아리안 족의 침입도 문명의 파괴가 아닌 새로운 문명의 탄생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진화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아닌 어울림이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진화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조금 누그러지는 느낌을 받는다.


 미토콘드리아의 선조는 분명, 현대의 포식성 박테리아 중에서 특히 델로비브리오 Bdelovibrio나 답토박터 Daptobacter와 비슷한 종류였을 것이다(p174)... 우리 몸 세포에 있는 미토콘드리아의 선조도 맹렬한 공격자였는데, 주위에 산소가 풍부해지면 산소를 호흡하고 또 필요한 경우에는 산소 없이도 생존할 수 있는 그런 박테리아였을 것이다. 미토콘드리아의 선조는 우리 몸의 다른 박테리아 조상에게 침입해 그 속에서 번식했다. 그들에게 침입당한 숙주세포는 처음에는 거의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숙주세포가 사멸하면 침입자들도 역시 죽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결국에는 협력자들만 살아남았다. 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175


 이와 함께 <마이크로 모스모스>는 오랜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겸손할 필요가 있음도 말한다. 이런 겸손함을 잃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는 살아남을 수 없음이 이 책의 또다른 주제다. 개인적으로는 다소 직설적으로 말하는 저자의 화법에서 저자의 전(前) 남편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 ~ 1996)의 <코스모스 Cosmos>와는 같은 메세지, 다른 어조를 느끼게 된다. 두 책에서 다루는 코스모스는 <10의 제곱수>에서 보여주는 세계만큼 크기에서 차이가 있지만, 메세지의 크기는 결코 다르지 않다.


 매번 대재난이 있을 때마다 생물권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두 발짝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의 두 발짝은 본래의 문제 영역을 뛰어넘어서 새로운 진화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그 도전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은 생물권이 특출한 불굴의 능력이 있어서 대재난을 딛고 일어서서 새로이 시작할 수 있음을 확신시켜 준다. 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330


 우주에서 벌어졌던 진화의 단계를 차근차근 이해하노라면, 거대한 [수소 산업]의 최종 산물로서 태어난 생물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확실히 알게 된다. 지구 이외의 다른 곳에서도 우리와 같이 놀랄 만한 돌연변이를 이룩한 존재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 먼 곳 어디에선가 우리에게 들려줄 그들의 흥얼거림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_ 칼 세이건, <코스모스>, p674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대기 중 높아지는 이산화탄소의 농도(PPM)에 의해 유발되는 지구온난화문제, 핵발전 문제 등은 분명 우리의 위기다. 그렇지만, 그것을 지구의 위기라 볼 수 있을까? <마이크로 코스모스>는 지구 역사 속에서 이미 여러 차례의 위기와 종(種)의 대멸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대멸종 후에도 '바이러스'라는 뿌리가 존재하는 한 생물은 다시 번성할 수 밖에 없음도 함께 보여준다. 다소 냉정하지만 문제는 인류의 미래가 여기에 포함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일 뿐이다. 저자(린 마굴리스)가 좋아하는 가이아 이론(Gaia Theory)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생물이 자신을 변화시킨다면 그것은 공간, 탄소, 에너지, 물 등을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것이며, 이는 다시 새로운 부산물을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새로운 부산물 축적이 점차 증가하면 부산물을 생산했던 바로 그 생물이 부산물 때문에 시험에 놓이게 된다._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마이크로 코스모스>, p339


 이것은 또한 환경 문제에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이크로 코스모스<안의 문장 안에 묘사된 새로운 부산물 축적이 생물을 번성하게 하는 한편, 위기에 놓이게 하는 상황을 통해 19세기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를 떠올리게 된다. 그가 눈 앞에서 지켜봤던 자본주의에 내재한 역설이 표면화 되는 상황 속에서 혁명을 통한 변화를 주장했다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거의 정점에 이른 지금 시점에서 이에 대한 해법으로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지만, 차근히 답을 찾아가도록 하자.

 

 내가 '모순'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역설'입니다. 앞서 이율배반, 즉 '대립하는 두 개의 주장이 모두 옳은' 상황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주장이 상반된 옳음을 동시에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역설(paradox)'입니다. 하나의 견해(doxa)에서 반대 방향 내지 다른 방향(para -)이 생겨나는 것이죠. 모순적 대립, 즉 논변과 항변의 대립 속에서는 한쪽 힘이 커지면 다른 쪽 힘은 작아집니다. 대립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니까요. 그런데 역설의 상황에서는 한쪽이 커지면 다른 쪽도 커집니다. 나는 마르크스에게 모순의 변증법 이상으로 역설의 변증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_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p168/220


 <마이크로 코스모스>는 오랜 지구의 역사를 요약하면서 바이러스(virus)로부터 시작된 진화의 역사 속에서 우리 인간도 결국은 '변이화합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 과정에서 지구와 생명의 역사의 핵심을 알기 쉽지만 분명하게 알려주고 저자들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좋은 생명과학 입문서라 생각된다. 그리고, 다른 여러 분야와도 연계해서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에세이이기도 하다.


PS. <마이크로 코스모스>안의 자세한 내용은 '오파비니아' 시리즈의 리뷰를 통해 살펴보는 것으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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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브리아기는 진화의 역사에서 다양한 해양무척추동물이 나타나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다. 그중 일부는 눈과 강력한 턱 덕분에 최초의 적극적인 포식자가 되었다. 또한 삼엽충과 같은 다른 캄브리아기 진화동물군도 번성했다가 오르도비스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p70)... 디토모피게(Ditomopyge)를 포함한 마지막 삼엽충은 오래도록 쇠퇴기를 겪다가 페름기 말에 멸종했다._ 더글라스 파머 외, <선사시대>, p181


 오파비니아 시리즈의 4번 째 주제는 삼엽충(三葉蟲, trilobite)이다. 삼엽충들이 살았던 시대는 약 3억 년이지만 이전 시대인 원생대(Proterozoic Eon)와는 달리 생명체들의 변화가 극심했던 시기였다. 삼엽충이 살았던 시대는 동물의 다양성이 극적으로 증가한 '캄브리아기'(Cambrian Period, 약 5억 4,200만 년 전~약 4억 8,830만 년 전), 해양동물군의 속성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오르도비스기'(Ordovician Period, 약 4억 8,830만 년 전~약 4억 4,370만 년 전), 해양무척추 동물이 자리를 잡고 오르도비스기 말의 멸망으로부터 벗어난 '실루리아기'(Silurian period, 약4억 4,370만 년 전~약 4억 1,600만 년 전), '어류의 시대'이자 세계 최초로 숲이 형성된 '데본기'(Devonian Period, 약 3억 9,500만 년 전~약 3억 4,500만 년 전), 거대한 석탄 퇴적지를 만들었던 '석탄기'(carboniferous period, 약 3억 5,920만 년 전~약 2억 9,900만 년 전), 마지막 5억년 동안 최소 90%이상의 생물이 사라진 대멸종의 시대인 '페름기'(Permian period, 약 2억 8,600만 년 전 ~ 약  2억 4,800만 년 전)에 이른다. 고생대의 대부분 기간 동안 삼엽충이 존재했기에, 많은 이들이 고생대를 '삼엽충의 시대'라 부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삼엽충에 관한 사소한 진리들을 확장시키면 세계 전체와 연관지을 수 있다. 삼엽충에 관한 사소한 진리들을 확장시키면 세계 전체와 연관지을 수 있다. 에드워드 윌슨 Edward Wilson은 최근에 문화와 과학의 상호의존성을 주장하면서 지식의 통합사계를 제시했다. 그는 그것을 '통섭(consilience)'이라고 했다. 여기에 상술한 삼엽충 이야기는 더 작은 형태의 통섭을 보여준다. 종목록조차도 지자기, 판구조론과 결합되면 사라진 지구의 초상화를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_리처드 포티, <삼엽충>, p251 


 고생대의 랜드마크인 이 생물에 대해 <삼엽충 Trilobite!: Eyewitness To Evolution>의 저자 리처드 포티(Richard Fortey)는 화석을 기반으로 삼엽충에 대한 지식을 대중에게 소개한다. 오랜 기간 후손을 이어온 최초의 절지동물은 '눈'을 발달시키면서 캄브리아기에 등장한 후 빠르게 오르도비스기를 자신들의 전성기로 만들었다. 이 시기 다른 환경의 서식지에서 각각 살아왔던 삼엽충의 역사는 '눈(目)'의 역사이며, 이후 생명체 진화(evolution)의 방향을 '시각'으로 결정짓게 되었음을 <삼엽충>은 소개한다.. 


 삼엽충의 눈은 방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점에서 그들은 동물계에서 독특한 존재다.(p115)... 방주석 결정을 살펴보면 삼엽충 시각의 비밀을 알 수 있다. 삼엽충은 맑은 방해석 결정을 눈의 수정체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그들은 특이했다. 다른 절지동물에게서는 대개 몸의 나머지 부위를 구성하는 물질과 비슷한 큐티클로 이루어진 수정체, 곧 '부드러운' 눈이 발달했다. 삼엽충은 이런 한계 안에서 대단히 다양한 눈을 발전시켰다._리처드 포티, <삼엽충>, p116


 포식자, 뻘벌레, 여과섭식자는 한 군집을 이루어 함께 생활했다. 이제 물에 잠긴 대륙이라는 중심부에서 그 주변의 심해에 이르기까지, 이런 동물들이 일련의 서로 다른 군집을 이루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수심이 점점 깊어지면서 서식지가 달라지고, 각 서식지를 차지한 삼엽충들은 사냥하고 청소하고 침전물을 파고 뒤졌으며, 개흙이 부드러운 곳에서는 휘저어서 현탄액을 만들었다. 산소농도가 낮은 더 깊은 곳은 트리아르트루스 같은 전문가들이 차지했다. 그들은 풍요와 질식사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서식지에서 다른 삼엽충들보다 유리했다. 해저 바로 위에서는 작은 아그노스티드가 움직이는 렌즈콩처럼 헤엄을 치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눈은 쓸모가 없어졌다. 그곳은 눈먼 자들의 세상이었다._리처드 포티, <삼엽충>, p249


 오르도비스기 절정에 달한 삼엽충의 번성은 오르도비스-실루리아기 사이에 닥친 빙하기로 인해 큰 타격을 입는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빙하기가 삼엽충들을 멸종에 이르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오르도비스기와 같이 생태계의 주도권을 두 번 다시 잡지 못하고 결국 페름기 말 디토모피게(Ditomopyge)를 비롯한 마지막 삼엽충들은 지구에서 사라지게 된다. 


 오르도스기 말에 생명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대멸종이 일어났다. 당시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규모 빙하가 오르도비스기 말의 기온을 급격히 떨어뜨렸고, 아마 그것이 동물군 위기의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빙하기와 관련된 퇴적물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주위에는 삼엽충들도 있다.(p280)... 캄브리아기와 오르도비스기, 오르도비스기와 실루리아기에 비해 데본기 초와 실루리아기의 삼엽충들은 훨씬 구분하기가 어렵다. 데본기는 파콥스와 그 친척들의 전성기였다. 잠시나마 집합복안이 지배한 시기였다._리처드 포티, <삼엽충>, p281


 페름기 말이 되자 20여 속에 불과한 그리 많지 않은 삼엽충들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흔한 화석이 될 정도로 번성한 것들도 종종 있다. 가장 마지막 삼엽충은 페름기 말의 또 한 차례의 대멸종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사라진 듯하다._리처드 포티, <삼엽충>, p220


 <삼엽충>에서는 크게 두 번의 대멸종이 나온다. 오르도비스기의 대멸종과 페름기의 대멸종이 바로 그것이다.  삼엽충의 크기는 불과 3~10cm 정도에 불과하지만 (물론 고생물학자들이 생태계에 일어난 큰 변화를 기준으로 시대 구분을 했겠지만), 이 작은 삼엽충들이 3억년 동안 지구에 살면서 고생대의 6기와 2번의 대멸종의 시기 동안 남긴 자취를 보면서 우리 인류가 남긴 불과 600만년의 발자취는 보잘것 없음을 깨닫게 된다. 작은 <삼엽충>의 몸에 새겨졌을 지구의 역사를 떠올리면서 '(역사의) 기억 앞에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마침 글을 마무리 하는 시간대에 들은 어느 신박한 표현에 대한 오마주를 마지막으로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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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모자 2021-03-30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선사시대] 재밌어 보여서 중고로 구했습니다! 기대되네요~

겨울호랑이 2021-03-30 16:32   좋아요 1 | URL
^^:) 말 그대로 역사 이전의 시대에 대해 잘 정리한 책이라 생각됩니다. 황금모자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bookholic 2021-03-30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 정가 마지막 반값세일 때 사두었다가 장식품이 되어버린 <선사시대>.. 이제 먼지를 털어낼 시간이 된 건가요..^^
즐거운 봄날 되세요~~^^

겨울호랑이 2021-03-30 21:00   좋아요 1 | URL
bookholic님의 <선사시대>의 새역사가 시작되는 군요! 화창한 봄날 즐거운 독서 시간 가지세요 ^^:)
 

 캄브리아기 폭발은 전적으로 몸의 바깥부분에만 한정된다. 따라서 캄브리아기 폭발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그림 맞추기 퍼즐을 풀려면 더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동물 몸에서 내부설계에 얽힌 이야기는 멀리 선캄브리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_ 앤드루 파커, <눈의 탄생>, p33


 만약 지구의 역사를 눈 이전과 눈 이후로 나누고, 시각의 힘 - 일반적으로 현생 동물들에게 작용하는 가장 막강한 선택 압력 -을 생각한다면, 눈의 탄생이야말로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임이 틀림없다._ 앤드루 파커, <눈의 탄생>, p380


  앤드루 파커(Andrew Parker)가 <눈의 탄생 In the blink of an Eye>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지구 생명체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으로 이루어진 캄브리아기 폭발의 추진력은 선캄브리아기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중심은 눈(目 eye)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등장한 눈이 진화(進化 evolution)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눈의 탄생>에서 선캄브리아기 말에 일어난 급격한 환경변화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태양방사의 증가, 초신성 접근 등 아직 검증되지 않은 여러 가설들을 통해 선캄브리아기 말기에 갑작스럽게 늘어난 일조량(日照量)은 초기 생명체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일부 기상학자에 따르면, 선캄브리아 시대에는 담요안개(이것의 원인은 화산활동을 비롯해 여러 자기였을 수 있다)가 지구를 뒤덮고 있어서, 거대한 우산처럼 햇빛을 상당량 차단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선캄브리아 시대 말에 이 안개가 걷힌 것이 지표면의 빛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을 것이다. 그 안개가 어떻게 걷혔는가에 대한 설명은 임계치에 이르는 태양방사의 증가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_ 앤드루 파커, <눈의 탄생>, p386


 초신성은 이산화질소를 형성함으로써 가시광선을 흡수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것이 지표면의 빛 수준을 감소시키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나선형 팔을 지나는 동안 우리 태양계는 먼지와 얼음이 결집된 두꺼운 '오르트 구름'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태양계는 더욱 밝아지지만 동시에 지구 대기는 더욱 불투명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 태양계가 초신성이나 오르트 구름에서 멀어질수록, 지구는 더 밝아지게 된다._ 앤드루 파커, <눈의 탄생>, p387

 

 시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더 먼 거리에서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주변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해 보다 빠르게 인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감각들보다 우수하다. 인류 전쟁사에서 냉병기(cold weapon)에서 열병기(hot weapon)으로 발전되어 왔듯이, 자극을 활용하는 기관 역시 발전하게 되었고, '눈'을 갖도록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감각은 동물이 자극을 일으키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따라서 동물이 그 자극을 만들지 않으면 그것은 감지될 수 없다... 그러나 시각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눈은 대개 환경 내에서 자극범위, 곧 스펙트럼의 대부분을 감지하기 때문이다._ 앤드루 파커, <눈의 탄생>, p378


 저자는 진화생물학자로서 <눈의 탄생>을 통해 '눈'이 등장한 캄브리아기의 폭발보다 '눈'이 등장할 수 있게한 내부 설계 쪽에 더 중심을 두고 설명하지만, 책을 통해서  생명의 진화라고 하는 것은 결국 환경과 생명체의 교환의 결과물임을 깨닫는다. 박테리아 또는 시아노 박테리아의 단순한 구조의 생물이 보다 복잡한 구조의 생물로 발전하는 것에는 이들의 유전자 변화 뿐 아니라 이들이 필요로 하는 황화수소, 수소 또는 부산물이 만든 환경 또한 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진화사에서 한 획을 그은 '눈의 탄생'은 오랜 기간 준비되어 오다가 들어맞는 조건에서 활짝 핀 일대 사건으로 여겨진다.


 동물의 내부체제는 그 동물이 호흡을 하고 영양분을 얻고 번식하는 방식을 전반적으로 제약한다.(p27)... 동물의 외부란 외피의 재료, 색, 모양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내부구조보다는 사실 환경과 더 밀접한 연관이 있다. 환경에는 기온과 빛 조건 같은 물리적 요인과 동물 이웃들 같은 생물학적 용인이 포함된다... 내부구조는 이와 다르다. 내부구조는 훨씬 더 많은 유전자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새로운 내부 설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유전자가 동시에 돌연변이를 일으켜야 한다._ 앤드루 파커, <눈의 탄생>, p28


 비록, 저자는 <눈의 탄생>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지구의 대기 변화에는 태양 방사선, 초신성등 외계(外界) 요인이외에 지구 내 요인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의 등장으로 인한 산소호흡의 보편화 또한 선캄브리아 시기에 일어난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당연한 가정이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오파비니아의 다른 시리즈 <미토콘드리아> <산소> <진화의 키, 산소 농도>에서 다루도록 하자. 원래 오파비니아 시리즈의 다음 책은 페름기 멸종을 다룬 <대멸종>이지만, 이에 앞서 캄브리아기를 자신의 시대로 만든 위대한 생명 <삼엽충>을 먼저 정리해보도록 하자...

 

눈을 가진 최초의 동물은 삼엽충 - 최초의 삼엽충이었다. 최초의 진정한 삼엽충은 포식자이기도 했다. 팔로타스피스, 네오코볼디아, 시주디스쿠스 같은 눈을 가진 모든 삼엽충들은 캄브리아기 초, 캄브리아기 폭발이 시작될 무렵의 대표주자이기도 했다. 부속지 모양을 보면 이 삼엽충들은 영락없는 포식자였다. 그러나 가시가 돋은 방패는 이들이 먹이가 되는 일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들은 아마 서로를 공격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구상에서 벌어진 공격의 원형이었다.(p342)... 최초의 눈을 추적한 결과, 그 눈은 최초의 삼엽충, 또는 '최후의' 원시 삼엽충의 눈이었으며, 그 시기는 캄브리아기 폭발의 벽두였던 것으로 드러났다._ 앤드루 파커, <눈의 탄생>, p350


만약 지구의 역사를 눈 이전과 눈 이후로 나누고, 시각의 힘 - 일반적으로 현생 동물들에게 작용하는 가장 막강한 선택 압력 -을 생각한다면, 눈의 탄생이야말로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임이 틀림없다._ -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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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3-18 15: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기 전엔....눈깜박할 사이...아녀? 그렇게 오해를 ^^,,,,

겨울호랑이 2021-03-18 15:56   좋아요 1 | URL
ㅋㅋ 정말 빠르게 훑어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을 것 같네요.ㅋㅋ 제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제목을 썼네요.^^:)

얄라알라 2021-03-18 1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제 영어실력이.짧아서 그래용. 비스무레한 영어 표현이 있었던거같은데 요것도 검색하지 않고서는 기억도 안나는 ㅋ

겨울호랑이 2021-03-18 16:39   좋아요 1 | URL
^^:) 겸손의 말씀을... 얄라얄라북사랑님 덕분에 활짝 웃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scott 2021-04-09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 전 삼엽충만 읽었는데 겨울 호랑이님의 페이퍼에 담긴 눈에 탄생, 대 멸종 꼭 읽기로 ~
장바구니로 담아갑니다.
이달의 당선작 축하해요 ^.^

겨울호랑이 2021-04-09 17:11   좋아요 1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scott 님께서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라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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