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과 세계사 2 - 대륙별 구석기 문화 케임브리지 세계사 4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엮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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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기가 가장 강하게 영향을 미친 지점은 인간이 서로를, 그리고 주변 환경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석기란 경제적 변혁을 일컫는 말이기는 해도 사육과 재배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식량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한 이용하는지, 그 관점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기술적 및 사회적 혁신도 함께 요구되었다. 이 모두를 하나로 묶어서 "신석기 패키지"라고 한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8


 초기 농업과 관련된 인간의 반응 양상들을 살펴보면. 선호하는 식물의 야생 서식지를 유지하는 활동을 했고, 식량 자원이 풍부한 곳을 중심으로 머무르며 생활의 이동성이 감소했으며, 이용 가능한 식량 자원의 변화에 따라 식생활 패턴을 바꾸었고, 작물재배 혹은 야생 작물 관리를 통해 원하는 동식물의 밀도를 높여 나갔다... 식량 생산이 지속되면서 인구가 증가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에서 농업에 의존하는 사회가 더욱 많아졌고, 그들이 농업에 적합하도록 주변 환경을 바꾸게 되었다... 농업은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능한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590


 그레이엄 바커(Graeme Barker, 1946 ~ )와 캔디스 가우처(Candice Goucher, 1953~ )의 <케임브리지 세계사 4 Cambridge World History Vol. 2 Ch.8-23 : 농업과 세계사 2 : 지역별 농업의 기원 >에서는 '신석기 혁명'의 모습을 지역별로 세부적으로 살펴본다. 자연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던 시기, 홀로세를 살아가던 호모 사피엔스들은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농사를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주(定住.)생활의 형태가 등장하고, 창고 등 건물들이 등장했고 그 과정에서 신분제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생했다.


 재배 및 사육, 그리고 마을의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사회적 관계도 새롭게 바뀌었다.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몇몇 사회적 관념의 변화는 이후 시기의 변화를 이끄는 기반이 되었다. 즉 의례, 가족 및 공동체 구조, 횡적/종적 사회관계, 축제 등의 행위가 이때 모두 고도화되었다. 이러한 행위의 대부분은 신석기 시대 물질문화의 풍요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76


 남아시아의 신석기 발전은 크게 보아서 기본적으로는 "신석기 혁명"의 가장 고전적인 패턴을 그대로 따랐다. 먼저 영구 정착지가 등장했고, 이후 농업이 개발 혹은 유입되었으며, 그다음으로 토기가 제작되었다. 남아시아에서 신석기의 대표적인 특징, 즉 토기와 정주 생활과 가축과 작물 등은 모두 신석기 시대 말기에 등장했다. 남아시아의 신석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변종들이 연속된 장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67


 특정 유형의 건축 재료, 즉 나뭇가지를 엮어 벽체를 만들고 초가지붕을 씌운 오두막 건물의 흔적이었다. 토크와 유적의 발굴 사례에서 보듯이 이러한 구조물을 대개 원형이었고, 안에는 화덕 자리가 있었으며, 대개는 가운데 기둥 자리 구멍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러한 건물화 함께 발견되는 이모작의 흔적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건물의 흔적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이모작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한 장소에서 머물러 살아야만, 또한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만, 갠지스강의 주기적 범람과 갠지스 평원에서 자라는 벼의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49


 자원 증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농업으로 변화한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첫째, 사람들은 식량 자원을 생산할 수 있는 특정 식물에 집중하여 갈수록 관리를 강화하면서 그 식물을 의도적으로 심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둘째, 사람들은 숲속에서 원하는 식물을 심기 위하여 새로운 환경, 즉 농지를 조성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453


 이와 함께 차이점도 발견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축의 활용, 관개시설의 운용 등이다. 이들의 사용은 해당지역의 기후와 재배하기 적합한 작물의 종류에 따라 달라졌지만, 결과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토양의 비옥도와 재배작물의 특성, 관개시설의 유무는 투입 노동력의 비율과 가축사육의 필요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며, 단기적으로는 계급제, 장기적으로는 문명의 성격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게 된다. 


 동양에서 곡물의 중요성은 서양에 비교하자면 가축의 중요성에 맞먹는다. 유럽에서 농업은 복합 영농으로, 곡물 생산은 언제나 동물 사육과 함께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농업은 언제나 곡물 생산에 집중했으며, 선사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중국 음식은 대체로 채식 위주였다. 다만 최근에 그 경향이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245


 동물 사육은 일본의 초기 농업 사회에서 그 역할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야요이 시대부터 말과 소는 주로 농사일에 사용되었고, 인간의 노동력을 보충하는 운송 수단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사육의 목적이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고기나 우유를 비롯한 축산물을 활용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집돼지도 야요이 시대부터 사육되지 시작했으나, 야요이 시대의 식생활에서 돼지고기가 차지한 비중은 미미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28


  "농업"에서 식량 생산 활동을 총칭하는 의미를 포함한다. 곡물 재배 위주(원경 園耕, farming), 가축 사육 위주(유목 herding 혹은 목축 pastoralism), 혹은 농경과 유목을 함께 병행하는 경우(농목업 agropastoralism)를 모두 농업의 개념에 포함된다... 다양한 식량 생산 시스템이 동시에 공존함으로써 식량 수급의 안전성을 높이고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복잡한 사회관계와 교환 체계가 마련되어야 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478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 시기에 지역별로 생산력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서, 농업의 전파 방향이 일방적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신석기 혁명의 초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수렵채집, 목축, 농경이 혼재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안정적인 식량 확보'라는 농업만의 장점은 전반적인 생활 수준의 악화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주된 생활양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앞선 시대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렌시스와 공존하다가 이들을 대체한 것처럼.


 인도아대륙 전체적으로 볼 때 농업의 확산 방향은 완전히 다르고 서로 상충되기도 했다. 갠지스 평원에서 발굴된 자료를 근거로 보자면 대체로 남아시아 기원의 농업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전파되었고, 서남아시아 기원의 농업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이처럼 상충되는 패턴은 농업과 인구 확산 모델 연구를 촉진했고, 이로써 상호 작용과 다양한 흐름들이 밝혀졌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133


 초기 목축민과 달리 남부 아프리카 지역의 초기 농경 공동체들(EFC)은 동부 및 남동부 습윤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곳은 우기가 남반구 여름철로 국한되는 지역이었다.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으므로 그중 일부 지역의 생태 환경은 농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들 지역 가운데 대부분에는 이미 후기 석기 시대(LSA) 문화를 보유한 수렵채집인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예전처럼 천연자원을 계속 이용했고, 농업 공동체와는 이웃에서 공존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513


 <농업과 세계사 2>에서는 구체적으로 여러 지역의 농경문화가 소개된다. 이들 중 일부는 청동기 문명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어느 문명은 소멸되기도 하지만, 세계 전역에 자리 잡은 문명을 보노라면 문화의 상대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모든 문명은 저마다의 환경에서 각자 최선의 길을 선택해 발전했던 것이 아닐까. 이들 문명에 대해 현대의 관점에서 우월과 열등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잔혹하다고 알려진 아즈텍(Aztec)문명을 생각해보자. 포로들을 인신공양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잔혹한 제국의 문화에 대해 야만적이라고 평가를 내리지만, 이들 문화권에서는 포로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토지가 제한적이었고, 지력(地力)도 떨어지는 상황이었다면, 그들의 인신공양의 풍속을 단순히 잔혹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고대 왕이나 귀족 등이 죽었을 때 가까운 이들을 함께 묻는 순장(殉葬)의 경우에도 죽은 이(死者)를 위한 강제적인 풍습으로 여겨지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지도자에 의한 정치 보복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겨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개인의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증이 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 이유로 생겨났을 수 있는 문화의 성격을 규정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전통(傳統 tradition)이라 알려진 많은 것들이 현재의 관점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다른 나라의 문화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전통, 문화의 많은 부분이 신석기 시대 농경 생활로부터 유래된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서로 다른 환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임을 신석기 혁명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당시 농업인은 기존에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에서 확장을 시도하기보다는 새로운 지역으로 찾아 들어가 원하는 생태 환경의 니치(niche)였다. 그러나 규모가 제한적이고 수용 한계가 뚜렷했기에, 각각의 충적선상지에서 부양할 수 있는 인구 규모는 그만큼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200


 벼농사는 대규모 인구 증가를 뒷받침했다. 또한 논농사는 고도의 사회적 협력과 공동체의 단결 및 상호 의존을 필요로 했다. 이는 사회 내부적으로 발달하던 위계질서와 상충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런 갈등은 야요이 시대 말기까지 지속되었다(p318)... 벼농사는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바꾸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 조직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차별의 세습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적 분화가 최초로 나타났는데, 이를 촉진한 것이 벼농사였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2> , p319


요약하자면 갠지스 강 중류 지역에서는 먼저 야생종 벼를 관리하기 시작했고(BCE 7000 이후),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기원전 2000년 경에 이르러 농업-목축 기반의 정착 마을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농업 마을 주변으로는 수렵-채집-어로 문화 공동체가 곳곳에 산재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제2천년기에 집약적 벼농사의 관행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 뒤로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고, 사회가 복잡성을 더해서 마침내 철기 시대의 도시가 등장했다. 그때가 기원전 제1천년기 중엽이었다. - P150

일본 고고학은 대개 야요이 시대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기존에는 야요이 시대의 시작을 기원전 300년경으로 보았지만 최근에는 기원전 제1천년기로 수정되었다. 이 무렵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나중에 신토(神道)라고 불리게 될 문화 및 신앙이 구체화되었으며, 고문헌에서 일본이라는 명칭도 최초로 등장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새로운 도래인(渡來人)이 일본으로 건너가 기존의 조몬인과 뒤섞였으며, 오늘날 대부분 일본인의 조상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일본어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 벼농사에 기반을 둔 야요이 문화는 기존의 수렵채집문화, 원주민 문화, 조몬 시대의 문화를 대체했다. 전통적으로 야요이 이전의 문화는 오늘날 일본인의 직접적 조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 P291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 태국에서 신석기 유적이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제3천년기 중엽이었다. 당시 정주 생활이 강화되었고, 문양을 새긴 토기, 간석기 자귀, 사육종 돼지와 닭, 재배종 벼가 등장했다. 홀로세 중기가 끝나갈 무렵, 즉 기원전 제3천년기 말 대륙동남아 몇몇 지역에서 매장지와 주거지가 혼재된 장소가 등장했다. 그곳에서는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했다. 기원전 제2천년기 말기에 이르러 태국 남부 해안 혹은 그에 가까운 곳에서 해양 생활에 적응한 뚜렷한 정주 생활 장소가 등장했다. 여기서도 농업의 흔적이 분명히 확인되었다. - P393

화전을 했던 장소에서는 식량, 약품, 공예품을 만들 재료, 천이나 밧줄을 만들 섬유, 지붕이나 벽의 재료 혹은 바구니를 만드는 데 사용할 나무껍질, 고무, 불 피울 때 사용할 송진, 유향목, 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는 코킹, 향료, 나무 기름, 염료, 사냥을 위한 독성 물질, 지붕에 덮을 나뭇잎, 지붕 조각, 건축 자재, 도구나 배나 무기를 만들 원재료 등을 구했다. 이런 시스템에서 농부는 숲속의 특정 구역을 개간하고 관리하는데, 이는 한 구역을 완전히 갈아엎어서 농지를 만드는 것과 다른 방식이다. 오히려 숲의 구조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개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해리스(Harris)에 따르면 "화전과 원경(園耕)은... 다른 농업 시스템과 달리 자연환경의 구조, 기능적 역학, 균형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한 면이 있다." - P423

바닥면을 인공적으로 높이면 배수가 원활하고 습지에서도 농사가 가능했다. 이런 식의 밭을 치남파스(chinampas)라 했는데, 멕시코 분지의 호숫가 지역에서 농업의 중요한 요소였다. 치남파스는 호수의 진흙과 수생 식물, 그리고 가정 생활에서 발생하는 쓰레기 등으로 만들었다. 치남파스는 대개 좁게 만들었지만 상당히 길게 늘일 수 있었고, 가장자리를 따라 나무를 심기도 했다. 약 1만 2000헥타르의 치남파스가 아즈텍 제국 수도의 인구를 먹여 살렸다. - P587

초기 농부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유용한 통로는 바로 그들의 시간 관념이다. 숲을 제거하고, 소규모 농지를 조성하고, 가축을 기르는 등의 일은 분명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토지와 공간을 소유하는 것 또한 연속성이라는 농업 이데올로기의 일부였다(p669)... 현재의 시간 속에서도 삶은 굴러간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 역시 복잡한 관계 가운데 할 일이 많았고, 그날그날 해야 할 일뿐만 아니라 특별한 일도 있었다(p670)... 과거를 돌이켜보는 일은 신석기 시대 유럽 농업인의 특징이기도 했다. 과거에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것은 곧 현재의 소유권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며, 미래에도 마찬가지였다. - P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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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 교환의 세계 -하
페르낭 브로델 지음, 주경철 옮김 / 까치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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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구분이 여기에서 핵심적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시장 그자체의 미덕과 "합리성"을 갖다붙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실 마르크스와 레닌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가끔 그런 식의 언급을 했다. 그래서 독점의 발달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발전이며 후기 자본주의의 결과물로 본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가 봉건제를 대체했을 때 그것은 진보를 낳는 "생산력과 사회관계의 발달에 더 유리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희생시키면서 사회적인 진보를 독점하는 제약이 마침내 존재하지 않게 될 발전단계를 배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화"를 가져오는 체제"였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828


 레닌은 여기에 첨가하여 이렇게 말한다. "사실 독점은 자신이 거기에서 유래한 자유경쟁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다. 독점은 자유경쟁의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공존한다." 이 점에서 나는 완전히 그의 말에 동의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829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1985)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 2-2>에서 시장경제에서 자본주의가 태어나게 되는 여러 조건에 대해 언급한다. 경쟁이 이루어지는 교환시장경제에서 독점적인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불평등'이다.


 유럽에서는 11세기에 경제가 깨어나면서부터 불평등이 더욱 현저해졌다. 레반트 무역에 다시 참여하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는 대상인 계급이 확고히 자리를 잡아갔고, 이들은 곧 도시 지배귀족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서화는 다음 세기들 동안 경제가 번영할수록 더욱 굳어졌다. 금융업은 이러한 발전 중에서도 최상층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29


  상품의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교환만을 전문으로 하는 상인(商人)계층이 등장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거래를 담당하는 대상인이 출현했다. 문제는 일반 상인들과 대상인들 사이에 적용되는 '게임의 규칙'이 다르다는 점에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력을 바탕으로 더 좋은 조건으로 자금을 빌릴 수 있었고, 여러 혜택을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혜택은 그들에게 더 많은 부(富)를 가져다 주었으며, 더 많은 부를 통해 자신들의 사업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자본주의적인 성공이 돈에 달려 있다는 말은 이때의 돈을 모든 사업에 필수적인 자본의 뜻으로만 보면 그야말로 하나마나한 소리이다. 그러나 이때의 돈이란 투자 자본 이외에도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보증과 특권, 공모와 보호 등의 여러 가지 것들을 가져다주는 사회적 고려를 의미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41


 그런데 이상한 일은 대상인들은 이 법칙을 따르지 않아서, 한 업종에 전문화하는 일이 대단히 드물다는 점이다. 심지어 상점주도 큰 돈을 벌어 대상인이 되면 곧 전문화를 포기하고 비전문화의 길을 간다(p534)... 대상인이 된다는 것, 혹은 대상인이라는 것은 모든 상품이라고는 못 해도 적어도 많은 상품을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럴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진다는 것을 말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35


  자본에 적용되는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와 비전문화를 통한 위험 회피는 사업 포트폴리오(portfolio)구성을 가능케 했으며, 이러한 사업의 다각화는 시대에 따라 빠르게 변화하는 유행품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하며 점차 시장에서의 독점(獨占)적 지위를 차지하는 자본들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교환시장에서의  활용할 수 있는 신용거래의 차이가 극복할 수 없는 틈을 만들어내는데, 이를 위해서는 시장경제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모든 상인들의 장부에는 상품 계정 외에 채권계정과 채무계정이 함께 있다. 채권과 채무 양자 사이에 균형을 지키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만, 이 형태의 크레딧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현명한 일이다. 그 결과 이 크레딧은 교환 총량의 4~5배가 된다. 모든 상업체제가 여기에 의존한다. 이 크레딧이 멈추면 상업에 힘을 주는 모터가 마모되다가 결국에는 서버리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상업체제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그 속에 내재해 있는 크레딧이라는 점이다 - 이것은 내부 크레딧이며 이자가 붙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유별나게 활발한 곳이 영국이었으며 그것이 영국이 번영을 누리는 비밀이었다. 대상인은 이 내적인 편익을 통해서 이익을 보고 또 고객들에게도 이익을 준다. 그렇지만 대상인은 그 외에도 대부업자나 자금주라는 외부의 크레딧도 정규적으로 이용한다. 이것은 다름 아닌 현찰을 빌리는 것이며 여기에는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이것이 핵심적인 차이다. 이 돈을 사용하는 상업거래는 결국 이자율보다 훨씬 높은 이윤율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42


 이러한 시장경제의 불평등은 금융거래를 통해 대자본형성을 가능케하며, 퇴장(退藏)된 자본은 보다 높은 이윤율을 보장하는 곳을 물색하게 된다. 이러한 자본의 욕구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바로 근대국가(國家)다. 근대국가는 중세의 봉건제와 교회조직과 같은 계서제(階序制)의 연장선상에 있는 조직으로 중앙집권화된 군주제의 형태로 등장하게 된다. 중세 귀족정에 대항하는 군주와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아(bourgeois)의 결합은 바로 자본을 통해 이루어졌고 실현되었다.


 국가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국가의 권위가 커지고 다양해지면서 그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제는 지난날처럼 국왕 직할 재산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 따라서 유동적인 부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정한 종류의 자본주의와 일정한 정도의 국가의 근대성이 동시에 시장경제의 틀 안에서 구성되었다. 이 두 가지 운동 사이에는 단순한 일치 이상의 것이 있다. 핵심적인 유사성은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계서제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유사성으로는 국가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부유해지기 위해서 독점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741


 회사(會社)의 형태로 응집된 자본은 초기 원거리 무역을 주도하였으며, 원거리 무역을 통해 자신의 규모를 키워가면서 파트너인 군주에게는 영주들을 제압할 수 있는 무력과 재력을, 자본가들에게는 막대한 이윤을 독점적으로 제공하게 된다. 이는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했다.


 어느 한 회사의 독점은 세 가지의 것이 맞아 떨어져야 가능했다. 국가가 그 첫번째이다. 국가는 비교적 효율적이고 결코 뒤에서 그냥 물러서 있지 않는 존재이다. 다음으로 상업세계 - 즉 자본, 은행, 크레딧, 고객 등 - 가 있는데 이것은 독점에 적대적이거나 거기에 공모하거나 둘 중 하나이지만 혹은 동시에 그 두 가지를 겸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원거리 무역의 대상이 되는 지리적인 권역인데 이것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631


 원거리 무역이 의심할 바 없는 우위를 가지게 되는 까닭은 이것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거리 무역은 집중을 가져오고, 반대로 집중은 원거리 무역으로 하여금 자본을 재생산하고 나아가서 빠르게 증대하도록 하는 더할 나위 없는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독일 역사가들과 모리스 도브가 이야기했듯이, 원거리 무역이야말로 상업자본주의를 창출하고 나아가서 상업 부르주아지를 창출한 핵심적인 도구였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574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에서는 성숙한 시장경제에서 출현한 독점자본이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위험이 높은 뭔거리 사업을 독점하고, 시장지배력을 가지고 점차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러한 시장경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의 내용과 비추어보면, 재벌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모습은 결코 후진적인 자본주의 기업의 모습은 아니다. 다각화된 사업구조와 정치권과의 결탁 등의 모습은 오히려 궁극적인 대자본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자본주의는 결코 후진적이지 않다. 오히려, 앞선 궁극의 자본주의 대기업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문제는 시장경제 부분에서 발견된다. 과연 충분히 시장경제가 활성화된 이후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했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교환이 중심이 된 시장경제에서 자본주의가 태어났다면, 우리 주변에서 다양한 형태의 시장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 형태의 유통경로가 저마다의 장단점을 가지고 교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때, 성숙한 시장경제를 말할 수 있겠지만 국가전매 시스템과 대기업에 의해 지배된 유통 구조 등은 우리나라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 국가주도로 1층 물질문명의 소비요구에 직점 대응하는 형태임을 발견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근대기업의 성장이 일제 시대를 통해 이루어지면서 충분한 시장경제의 성숙이 이루어지기 전 국가에 의해 주도되면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경제 대신 국가 독점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먼저 확립되었다는 점이 오늘날 한국 경제의 문제점이 아닐까.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고 이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 마지막 단계인 자본주의 층으로 올라가보도록 하자...


 자본주의의 과정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오직 일정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이 갖추어져야만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조건들은 자본주의의 과정을 준비해준 것이거나 적어도 용이하게 만들어준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1) 첫번째로 들 수 있는 명백한 조건은 활력이 넘치고 진보하는 시장경제이다. 여기에 지리적, 인구적, 농업적, 산업적, 상업적인 여러 요소들이 더해진다. 이러한 기반에 깔려 있는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대해서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2) 또한 사회가 여기에 공모해야 한다. 사회는 자신이 어떤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지, 또 어떤 과정에 대해서 자유로운 길을 열어주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수세기 전부터 그런 것을 옹호해주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요인이 되는 가문의 영속성과 연속적인 축적이 확보될 수 있을 만큼 계서화된 사회는 자본주의의 전(前)단계를 밟아가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점은 세계시장이라는 특별한 해방 세력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원거리 무역이 모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도의 이익을 누리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2-2>, p862



상업사회는 그것을 둘러싼 사회 속의 사회이다. 그런 만큼 상업사회를 그 전체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을 시야에서 놓치면 안 된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직후 스페인은 절호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지만 세계시민적인 자본주의가 스페인에 달려들어 그 기회를 빼앗아갔다. 이때의 경제활동들은 피라미드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하층에는 농민, 목동, 양잠업자, 장인 겸 행상인, 소액 고리대금업자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위에는 카스티야의 자본가들이 이들을 장악하고 있고, 다시 그 위에는 푸거 가의 대리인들 그리고 다음에는 새로 권력을 휘두르게 될 제노바 상인들이 이 모든 것을 지휘하고 있었다. - P534

자본주의는 자기가 선호하는 방향을 따라서 개입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콩종크튀르를 주시한다 - 이것은 자본주의가 활동 영역을 선택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규정해주는 것은 어떤 선택을 했는가 하는 것보다는 - 그 선택은 콩종크튀르에 따라, 세기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 전략을 창출할 수 있는 수단과 그 전략을 변화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 P565

우리는 산업 이윤, 농업 이윤 그리고 상업 이윤 사이에 어느 것이 우세하다는 결정적인 분류를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보았다. 크게 보면 상업, 산업, 농업의 순으로 이윤이 높다는 통상적인 견해가 대체로 사실과 일치하는 것 같지만 여기에는 많은 예외들이 있기 때문에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사업활동이 옮겨가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이 자본주의의 전체사에서 핵심적인 성질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 시련이 있을 때마다 드러내는 유연성, 변환과 적응의 능력이 그것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심대한 위기가 닥쳤을 때나 혹은 이윤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때에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거의 순간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능력인 것이다. - P612

국가는 많은 요소들이 합류된 중요한 실체이다. 유럽 이외의 지역은 수세기 동안 국가가 견딜 수 없는 무게로 짓누르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국가가 확고하게 다시 성장해나갔다. 근대성의 창시자들이 만든 근대 국가는 근대적 군대, 르네상스, 자본주의, 과학적인 합리성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이었다(p734)... 근대 국가는 지방의 주, 자유도시, 장원, 초소형(超小形) 국가와 같은 예전의 구성체들과 조직들을 변형시키고 깨뜨려 나갔다. 새로운 군가는 그들의 사람들의 골수를 빼먹으면서 그리고 또 한편으로 경제발전에 힘입어서 발전해갔다. - P735

장기공채는 저절로 영구채로 전환되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국가가 공채를 상환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국가는 유동공채를 확정공채로 전환함으로써 크레딧이나 현찰로 된 재원을 소진시키지 않아도 되었다. 대출인들로서는 자신의 채권을 제삼자에게 매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매번 그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국가에 빌려준 돈을 상환받을 수 있게 되었다. 국가는 지불하지 않는데 채권자들은 원하는 대로 빌려준 돈을 되찾을 수 있는 것, 이것은 정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p753)... 공채 정책을 성공시킨 것은 대상인, 금 세공업자, 은행업 가문들과 같이 채권 발행 업무에 전문화한 사람들, 한마디로 말해서 이 나라의 결정적이고 독점적인 핵심인 런던의 "비즈니스 계"였다. - P754

시장의 합리성이란 통제하는 교환이 아니라 자발적인 교환의 합리성이다. 그것은 "자연의 본성", 개인의 계산을 초월하는 집단적인 수요와 공급의 만남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선험적으로 그것은 기업가 개인의 합리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 자신은 단지 상황에 따라서 그의 활동의 최상의 길, 즉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할 뿐이다. 끊임없이 수단을 목적에 맞추고 가능성을 지적(知的)으로 계산하는 의미의 합리성 없이 자본주의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인정할 수 있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문화마다 다양할 뿐 아니라 콩종크튀르마다, 사회집단마다, 또 그들의 수단과 목적마다 다양한 것이다. 하나의 경제내에서도 여러 개의 합리성이 존재한다. 자유경쟁의 합리성이라는 것은 단지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독점, 투기, 힘의 합리성 역시 또 다른 합리성인 것이다. - P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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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구분이 여기에서 핵심적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시장 그자체의 미덕과 "합리성"을 갖다붙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실 마르크스와 레닌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가끔 그런 식의 언급을 했다. 그래서 독점의 발달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발전이며 후기 자본주의의 결과물로 본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체제가 봉건제를 대체했을 때 그것은 진보를 낳는 "생산력과사회관계의 발달에 더 유리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희생시키면서 사회적인 진보를 독점하는 제약이 마침내 존재하지 않게 될 발전단계를 배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화"를 가져오는  체제였다.  - P828

레닌은 그의 유명한 글(1916)에서 "자본주의의 일부 핵심적인 성격들이 정반대로 전환하는, 아주 발전된 특정 단계에 가서의 일이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과정에 핵심적인 것인 자본주의적인 독점이 자유경쟁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내가 레닌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레닌은 여기에 첨가하여 이렇게 말한다. "사실 독점은 자신이 거기에서 유래한 자유경쟁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다. 독점은 자유경쟁의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공존한다." 이 점에서 나는 완전히 그의 말에 동의한다.  - P829

유럽은 적어도 이중의 상층사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역사의 변절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극복할 수 없는 정도의 어려움에 봉착하지 않았던 것은 이들 앞에 전체주의적인 독재나 자의적인 지배자의 독재와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유럽은 끈기 있는 부의 축적에 유리해졌으며, 또 다양화된사회 속에서 다중적인 세력과 위계들이 발전하고 이것들 사이에 다양한 방향으로 경쟁이 이루어지는 것이 용이해졌다. 출생의 특권에만 근거한 사회신분에 비해서 이것은 다당함, 분별, 노력의 결실, 정당함 등으로 인식되었다.  - P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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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두번째 권인 교환의 세계(Les Jeux de l‘Echange)를 끝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자본주의의 과정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오직 일정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이 갖추어져야만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조건들은 자본주의의 과정을 준비해준 것이거나 적어도 용이하게 만들어준 것들이었다. - P861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예들에서 보았듯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요인이 되는 가문의  영속성과  연속적인 축적이 확보될 수있을 만큼 계서화된 사회는 자본주의의 전(前)단계를 밟아가는 것이다. 유산이 상속되고 가산이 불어나며 가문 사이에 유리한 연결이 맺어진다는 것, 동시에 사회가 여러 집단으로 분화하고 그중 어떤 집단이 지배적이거나 잠재적으로 지배적이며 또 계단식이든 사다리식이든 사회적 상승이 — 쉽지는 않더라도 — 어쨌든 가능하다는 것 등, 이 모든 것은긴, 아주 긴 사전 준비를 의미한다. 사실 여기에는 정치적이고 소위 "역사적인" 그리고 특히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들이 개입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수세기에 걸친 사회 전체의 움직임이 작용하는 것이다.  - P862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점은 세계시장이라는 특별한 해방세력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원거리 무역이 모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도의 이익을 누리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다. 우리는 이 책의 마지막권인 제III권에서 세계 - 경제(économie-monde)의 역할을 다시 볼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특별한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는, 지구상의 자립적인 각 지역으로 구성된 닫힌 공간이다. 세계 - 경제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계 - 경제의 변경이 변화하며, 유럽이 세계 정복을  시도하는 것과 동시에 세계 경제는 커진다. 세계경제와 함께 우리는 또 다른 수준의 경쟁, 또 다른 차원의 지배를 보게된다. 우리는 유럽과 세계의 시간상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다름 아닌자본주의 전체의 연대기라고 할 수 있는 세계체제의 연쇄를 통해서 수없이 반복한 바 있는 법칙을 추적해갈 수 있다.  - P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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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세계사 1 - 대륙별 구석기 문화 케임브리지 세계사 3
마리아 팔라 외 지음, 그레이엄 바커 외 엮음, 류충기 옮김 / 소와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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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질학적으로 보자면 대략 1만 1500년 전을 분기점으로 기후가 바뀌었다. 그 이전이 플라이스토세(홍적세 洪積世, 빙하기라 부르며 기온과 강우량의 변화 폭이 매우 컸던 시대)이며, 그 이후가 오늘날을 포함하는 홀로세(현세 現世)다. 그 이전까지 인류는 수렵, 어로, 채집(이른바 "포레이징") 등의 방식을 적절히 섞어가며 식량을 확보했다. 그러나 수천 년이 지난 뒤 인류의 대부분은 거의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게 되었다. 농업의 시작은 분명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농업은 자연 경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을 뿐 아니라 도시화와 복합적 사회 구조 및 불평등을 초래했고, 이후의 역사를 완전히 압도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31


 그레이엄 바커(Graeme Barker, 1946 ~ )와 캔디스 가우처(Candice Goucher, 1953~ )의 <케임브리지 세계사 3 Cambridge World History Vol. 2 Ch.1-7 : 농업과 세계사 1 : 대륙별 >의 주제는 농경문화(農耕文化 Agrarian culture)다. 빙하기 이후 새롭게 등장한 농업(農業)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전 시대까지 자연의 일부였던 인간은 이제 자연을 자신을 둘러싼 배후지로 인식하고, 이러한 인식은 도시를 중심으로 한 고대 농업도시로 이어지는 내용이 본문에 소개된다.


 농업의 발전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여정이었다. 그 과정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결과가 상충되는 경우가 많았다. 홀로세에 와서는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계가 플라이스토세의 균형에서 벗어나, 지구상 다른 모든 존재의 희생을 딛고 오직 인간의 생존과 인구 확정에 유리한 방식으로 바뀌었다. 농업이 등장한 이후 발전을 거듭한 결과, 세계의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가 되고 말았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42


 그렇다면, 이와 같은 극적인 변화가 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농업과 세계사 1>에서는 빙하기의 어려움을 겪은 여러 집단에서 식량의 보존과 저장을 위한 전략이 고민되었음을 알려준다. 다만, 이러한 전략이 구체적으로 실행되기 위해서는 온화한 기후가 전제되어야 했고, 이러한 기후가 만들어낸 퇴적층에서 인류는 생존전략을 실행할 수 있었다.


 의도적 식량 생산을 향한 초보적 시도는 최후빙하기가 끝난 뒤에 바로 시작되었다. 새로운 식량 확보 전략은 어느 한 지역에서만 실행된 것이 아니었다. 기원전 1만 1000년에서 기원전 5000년 사이 세계의 여러 곳에서 독립적으로 새로운 전략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125


 수렵채집인이 아주 가까운 주변에 널린 식량 자원을 전면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 핵심적 계기는 바로 간석기 이용 기술이었다. 그들이 사냥한 동물들은 다양했지만,대형 동물이라 하면 주로 가젤이었다(p246)... 최근 식물고고학에서 그들이 섭취한 주요 식물들을 연구한 성과가 있는데,  그 결과에 따르면 이행의 핵심적 시기는 더 나중이었다. 즉 홀로세 초기 온화한 기후가 회복되고 나서야 재배로의 이행이 이루어졌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247


 변화의 동력을 단순히 생태 환경의 변화만으로 한정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변화의 측면을 고려할 때, 의사 결정 전략, 위험 관리, 자원의 공동 이용, 기술 혁신 등이 모두 식량 생산으로 가는 길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다만 일반적으로는 농업 이행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요인을 기후 변화로 인식하고 있었다. 농업인이 새로운 생태 환경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비결은 충적선상지와 범람원을 성공적으로 관리했기 때문이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65


 이러한 농경문화가 식량의 안전성을 확보시켜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농경문화가 인류에게 축복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또다른 별개의 문제임을 <농경과 세계사 1>은 보여준다. 오랜 진화의 결과인 신체에게 갑작스러운 음식의 변화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 결과 개인의 건강은 악화되었으며, 공동체 면에서도 대단위 노동력의 사용과 이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발생하면서, 인류는 헤시오도스(Hesiodos, BCE 740 ? ~ BCE 670 ? )가 노래했던 황금(黃金)시대에서 은(銀)의 시대로 강제로 넘어가야 했다. <성경>에서 카인이 농경문화를 아벨이 목축문화를 상징하고 그들의 부모가 낙원에서 쫓겨나는 것은 또다른 형태의 강제 이주일지도 모르겠다.


  농업 이행기에도 식생활과 생활 양식 전반에 걸쳐 수렵채집인 선조들과 다른 변화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고생물학 연구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이 나빠지는 경향이 확인되었다. 특히 경제적 이행기에, 그리고 사회가 더욱 복잡해질수록 그러한 악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예컨대 농업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질병이 나타났고, 출산율과 인구 밀도가 높아지고 인구수가 증가했음이 확인되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190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 넘어가는 경제적 이행 과정에서 농업이 도입된 이후 일관되게 나타난 경향은 삶의 질 저하였다(p206)... 곡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사육하는데 왜 건강이 악화되었을까?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수렵채집인의 생활 양식이 오히려 인간의 신체 진화에 걸맞음에도 불구하고 농업이 시작되면서 "구석기 방식의 식생활"을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농업 도입 이후 결과적으로 인간의 진화와 식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남아 있는 문제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207


 농업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핵가족이 특징적 주거 단위로 대두되었다. 이들은 서로가 별개의 집에 살면서 창고를 각자의 집에 두었다. 이는 곧 농업의 이점을 누리는 동시에 위험성을 감수할 주체가 집단 차원에서 핵가족 차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플래너리에 의하면, 초기 농업 공동체에서 공유가 갈수록 제한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농업은 토지 생산성을 높여주었지만, 동시에 평균 생산량의 차등이 발생했다. 둘째, 공유를 제한함으로써 균형 잡힌 상호 교환을 확인하기가 더 쉬워졌고 "속임수"를 방지할 수 있었다. 셋째, 공유의 축소, 토지 보유의 제한, 가정 단위의 사적인 저장으로 경제적 판단이 더욱 유연해졌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238


 이와 함께 <농업과 세계사 1>에서는 동물의 가축화가 언급된다.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1937 ~ )가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에서 밝혔듯, 구세계와 신세계의 결정적 차이를 가져온 가축화의 문제 역시 이 시기에 발생한 것을 보면 오늘날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의 기원이 BCE 12,000 ~ CE 500의 시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이 인류에 미친 영향력과 함께 문제 해결의 어려움을 함께 깨닫게 된다.  뒤이은 <농업과 세계사 2>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의 이행하는 여러 형태의 모습이 소개된다...


 서아시아와 동아시아 농업의 기원에는 곡물 재배뿐만 아니라 동물의 가축화도 포함된다. 이와 달리 메소아메리카의 농업이 시작될 때는 주요 곡물(옥수수)이 있었지만 개 말고 달리 길들인 동물은 없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240


 농업의 기원과 식물 재배 및 동물 사육 문제를 한꺼번에 놓고 보면 놀라운 측면이 드러난다. 즉 동물 사육(목축)보다는 대체로 식물(곡물)재배가 먼저였다는 사실이다.초기 농업의 대표적 중심지 세곡(중동 : 밀, 보리 ; 극동 : 쌀, 기장 ; 메소아메리카 : 옥수수, 콩, 호박)을 보더라도 모두 동물 사육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식물 재배가 이루어졌다... 유라시아 전역에서 채택한 생활 경제의 핵심은 복합 영농이었다. 적어도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라면 거의 예외가 없었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300


 목축(pastoralism)이란 초식 동물 무리에 의존하여 생활하는 것으로 자연히 유목민의 삶을 포함한다고 했다. 유목민의 삶이란 특히 토지 소유 및 거주 환경과 관련하여 목축미의 사회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적 문제다. 이 주제는 특히 토지 사용과 관련하여 이동식 목축민과 정주적 농민 사이에 분쟁의 소지가 있을 때 더욱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_ 그레이엄 바커/캔디스 가우처, <농업과 세계사 1> , p319

mtDNA 연구에서 주장하는 결론은 정복자 모델이다. 신석기 시대에 근동 지역에서 유럽 지역으로 상당한 규모의 이주가 있었고, 그들이 차례차례 등 짚고 넘기(leapfrogging) 식으로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원주민 포레이저 집단에 동화되어 오늘날 같은 유전자 분포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는 고고학의 연구 결과와도 일치하는 주장이다. - P88

개별 언어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곧 그들이 공통의 조상, 즉 과거 어느 시점에 사용되었던 하나의 조어(祖語, protplanguage)로부터 갈라져 내려온 후손이라는 의미이다. 후손 언어는 분열된 세포와 같다. 단세포 생물이 세포 분열을 하듯이, 조어는 여러 개의 파생 언어(daughter language)로 갈라진다(p126)... 언어의 계통수가 인간의 역사를 추적하는 밑바탕을 제공할 수 있는 이유는, 무릇 언어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사회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회에 흡수된다면 그들의 언어도 곧 소멸하고 만다. 반대로 어떤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내분으로 갈라지더라도, 혹은 일부 집단이 갈라져 나와서 멀리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더라도 각각의 집단은 기존 언어를 계속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어휘나 문법은 지역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며, 언어 분화의 과정이 비로소 시작된다. - P127

기존 연구에 따르면, 정주민의 경우 출산율이 높게 유지되었다. 여기에 농업까지 도입되면 출산율은 더욱 높아지는데, 농업 이행기 초기부터 출산율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출산율이 증가한 이유 중 하나는 수렵채집인과 달리 아이를 데리고 이동해야 하는 부담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량 공급량이 늘어나면서 이유식이 준비되어 있었고, 보다 안전한 식량 공급이 가능하기도 했다. 또한 농업을 받으들인 사람들의 사망 당시 연령 평균이 수렵채집인보다 더 낮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농업 공동체의 식생활이 이전의 수렵채집인보다 더 나빠졌기 때문에 농업인에게서 성장 문제가 나타나는 것은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기도 하다. - P227

목축의 입장에서 사료나 목초지는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다. 이 문제는 목축을 하는 사람들과 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장 주목할 만한 특성은 그들의 영역 및 이동성이다. 대부분의 목축 사회가 사막, 반건조 초원 지대, 고원 지대, 툰드라, 고위도 삼림 지대 등에 분포하고 있다. 이들 지역의 대부분은 대규모 곡물 농사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들이다. 곡물 농업 혹은 복합 영농이 가능한 지역이라면 생계 전략으로 목축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 P303

지속 가능한 생산의 차원에서 본질적인 문제는 문화적 관습과 목표가 근본적으로 농업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른 시공간에서는 전혀 다른 농업이 실행된다(p365)... 도시 환경에서 노동의 조직화는, 기존의 상식에 따르면 위계질서에 입각한 통치 계급의 직접 관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고도로 중앙 집권화된 정치, 경제 조직은, 고고학이나 역사학적으로 시대에 따라 가끔 그러한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고대 정치 체제에서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도시의 특징은 경제 시스템의 여러 측면을 좌우하는 것일 뿐, 정치적 측면이 고도로 집중화되었는지 여부는 별로 상관이 없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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