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만 해도 소스라치고 전율이 내 몸을 사로잡는다네.

 어째서 악인들은 오래 살며 늙어서조차 힘이 더하는가?

 자식들은 그들 앞에서, 후손들은 그들 눈앞에서 든든히 자리를 잡지.

 그들의 집은 평안하여 무서워할 일이 없고 하느님의 회초리는 그들 위에 내리지도 않아 그들의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들의 암소는 유산하는 일 없이 새끼를 낳지. <욥 21 : 6 ~ 10>


 정녕 악인들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타오르지 않네. 

 그 천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를 비추던 등불은 꺼져 버리지. 

 그의 힘찬 걸음걸이는 좁아지고 그는 자기 꾀에 넘어간다네. <욥 18 : 5 ~ 7>


 <성경>의 여러 편들 중에서 <욥 기>가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선한 이가 상을 받는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주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자신의 죄(罪)로 인해 벌(罰)을 받는다는 뿌리깊은 인식에서 벗어나 선한 이들이 어렵게 사는 반면, 악한 이들이 잘 사는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욥 기>에는 담겨있다.


 빌닷의 발언 두 번째 부분에서 교부들은 욥에 대한 그의 질책과 비난이 왜 잘못됐고 근거 없는지 지적한다. 동시에 빌닷의 발언에서 부분적 진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 진실은 인간적 영광의 일시적 특성에 대해 그리고 불경한 이들과 교만한 자들의 절망적 삶과 피할 수 없는 형벌에 대해 윤리적 성찰을 할 수 있게 한다. _ 만리오 시모네티 등, <교부들의 성경 주해 구약성경 6 : 욥기>, p173


 동시에, 욥과 세 친구들의 이야기는 명확히 선(善)과 악(惡)을 구별할 수 없게 한다. 

 자신의 불행을 탓하며 운명을 저주하는 욥의 모습에서 의(義)인의 전형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처럼, 독자들은 오히려 욥과 대립하는 세 친구와 엘리후의 대화 속에서 의로움을 발견한다. 아마도 이것은 교부들이 말한 바처럼 <욥 기>의 인물들 성격이 입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욥 기>에서 논쟁이 이루어지는 문제들은 사회공동체의 파괴와도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쉽게 답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이처럼 복합적인 인물들과 현실적인 문제들은 날선 공방을 펼친다. 선한 이가 받는 벌과 악인들이 누리는 영화, 저주하는 의인과 회개를 권유하는 친구들. 그렇지만, 이들의 공방은 쉽게 정리되지 않고, 끝없는 논쟁만 이어질 뿐이다. <욥 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자네의 시작은 보잘것 없엇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이 사실은 욥을 책망하는 친구의 말 <욥 8 : 7>임을 생각해본다면, <욥 기>는 여러 면에서 우리를 혼돈의 카오스(Chaos)로 내모는 어려운 책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책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욥의 문제가 우리 자신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리라. <욥 기>는 논쟁을 이어가면서 결국 평행선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지점은 인간 이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갈등이 해소되는 지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보아라, 주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며 악을 피함이 슬기다. <욥 28 : 28>


 인간은 창조된 이후에는 이성의 안내를 받아 각 요소들에서 얻을 수 있는 유용함이 무엇인지 파악했습니다. 땅은 파종에 적합했고, 파종은 농업을 위한 것이었으며, 농업은 특별한 작물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무는 배를 만들고 건물을 짓는 데 유익했습니다. _ 만리오 시모네티 등, <교부들의 성경 주해 구약성경 6 : 욥기>, p229


 지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리오? 슬기의 자리는 어디리오?

 사람은 그것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하고 생물들의 땅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네.

 대양도 "나에게는 그것이 없어." 하고 바다도 "그것은 내 곁에 없어." 한다네. 

 금덩어리로도 얻을 수 없고 그 값은 은으로도 잴 수 없으며

 오피르의 순금으로도 살 수 없고 값진 마노나 청옥으로도 안 되네...

 비의 법칙과 뇌성 번개의 길을 정하실 때

 그분께서 지혜를 보고 헤아리셨으며 그를 세우고 살피셨다네. <욥 28 : 12 ~ 28>


 <욥 기>에서 극적인 갈등의 해소와 화해는 욥이 이성(理性)의 한계를 인정하고, 지혜를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진다. 태초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어디있었는가에 대한 물음과 갈고리로 레비아탄을 낚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욥이 자신의 무지(無知)와 무능(無能)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욥은 자신을 내려놓는다.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욥 42 : 1 ~ 6>


 교부들에 따르면, 욥은 하느님의 전지 全知와 하느님께서 인간 삶의 모든 사건을 통제하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때 하느님에게 의로움을 인정받는다. 욥은 진실한 겸손과 온전한 참회를 보여 준다. _ 만리오 시모네티 등, <교부들의 성경 주해 구약성경 6 : 욥기>, p318


 <욥 기>의 끝에 이르러서도 욥이 제기한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답(答)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욥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한계를 일깨우며 삶의 뜻을 헤아리고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므로, 겸손되이 받아들이라는 열린 결말이 제시되며 <욥 기>는 마무리된다.


 <욥 기>에서는 고난을 받는 선한 이가 고통을 당하는 현실 문제에 대해, 신상필벌(信賞必罰)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대신, 그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지혜 안에서 살아갈 것을 강조한다. 또한, 섣부르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 인간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그 의미를 찾을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지혜 문학의 정수가 담겼다는 평가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욥 기>의 마지막은 화해를 이룬 욥이 더 큰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이야기로 끝나지만, 이는 <마르코 복음> 16장 9절 이후 추가된 내용이 <마르코 복음>의 전체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듯, <욥 기>의 대주제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삶의 지향점에 복(福)이 주어질 필요는 없을 것이기에. 

 

 내 조국 테바이 주민들이여, 보시오. 저분이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는 더없이 권세가 컸던 오이디푸스요.

 어느 시민이 그의 행운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보시오, 그런 그가 얼마나 무서운 불운의 풍파에 휩쓸렸는지!

 그러니 항상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를 지켜보며 기다리되,

 필멸의 인간이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 _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1524 ~ 1530


  다른 한편, 인간의 유한성과 삶에 대한 순응은 소포클레스(Sophokles, BC 497 ~ BC 406)의 <오이디푸스왕>에 나타난 휘브리스(hybris)에 대한 경고와도 통하는 바를 발견하지만, 조금은 결이 다름을 느낀다. 그것은 아마도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의 차이의 일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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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0-15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욥의 고난과 역경을 확실히 기존의
권선징악적 개념으로 해석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
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가 닿을 지
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현재를 사는 우리 인간이 어
떻게 만세에 이르는 신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가 바울에 의해 재정립되고
세계 종교로 도약하게 되면서 기존의
헤브라이즘 사고에서 벗어나게 되긴
했지만, 그 영향력은 배제할 수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20-10-15 09:47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욥의 고난과 제기되는 물음은 인간의 무력함으로 알 수 없기에, 신의 뜻으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는 이와 같은 신의 뜻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겨집니다. <교부주해 구약성경>에서 교부들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면서 의미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헤브라이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와같다면 2020-10-18 0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절실한 필요에 하나님이 왜 응답하지 않는지, 우리의 헌신과 진심에 마땅한 보상과 만족을 왜 허락하시지 않는지 몰라서 우리는 놀라고 자책하며 숨죽여 살아갑니다

나와같다면 2020-10-18 0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욥기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답이요, 위로입니다. 고통과 환란은 형통과 안심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의 욥기 설교 [JOB] 중 교우들에게 하신 글입니다

흠.. 저는 뭔가 마음 깊은 의문이 들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면 욥기서를 찾게되는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20-10-18 05:45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욥기」는 인간이 풀 수 없는 문제를 마음에 안고 살아가야할 때 큰 힘을 주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안식을 주는 책. 여기에 「욥기」의 뜻이 담겨 있다 생각해 봅니다...
 

자네의 시작은 보잘 것 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욥」(8:7)

「성경」을 읽지 않는 이들도 아는 유명한 구절. 때문에 많은 이들이 「욥기」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으며, 직접 읽었을 때 혼란을 겪게된다.

많은 사람들은 욥기의 목적이 고통(악)의 문제를 논하고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능력이 하느님의 본성안에서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느냐는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리라고 기대하면서 욥기에 접근하는 독자들은 실망할 것이다.(p225)

이에 대해「구약성서의 이해 3」의 저자 앤더슨은 우리가 「욥기」에 대해 갖는 오해를 지적하고 지혜 문힉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욥기」의 핵심을 이해하는 길을 본문에서 제시한다.

욥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이 어떤 책인지 너무나 피상적인 이해만 하고 있다... 일반인들의 마음에는 욥이 신앙인의 모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산문으로 된 서문과 결문에만 해당하는 말이다. 이 책의 주요 부분은 운문으로 씌여졌는데 여기서의 욥은 인내심의 전형과는 아주 다르다. 그는 자기가 난 날을 저주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폭풍우같은 분노를 몰아 하느님께 울부짖으며 저항한다. (p217)

「구약성경」내에서도 신명기계와 역대기계 역사서 저자들의 시대상황, 집필 목적에 따라 역사관의 차이를 보이듯, 산문과 운문으로 구성된 「욥기」는 서로 다른 저자들이 작품 안에서 같은 인물을 다른 성격으로 그려넣는다. 산문 안에서 차분한 욥과 운문 안에서 절규하는 욥.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듯한 욥의 행동과 생각은 차이가 있기에 우리는 마치 욥의 자아분열을 보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되고,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과연 이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는 의인 ‘욥‘의 모슴인가. 저자는 이러한 혼돈을 걷어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주제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운문 부분의 저자와 서문과 결문의 저자는 같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해설 부분의 저자는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데 반해 운문 부분의 저자는 신에 대한 일반적 용어인 엘로아(Eloah) 또는 샷다이(Shaddai)란 말을 쓴다. 또한 해설은 매력적인 우화식으로 씌어진 데 반해 운문 부분은 잠언이나 전도서의 지혜문학에 가깝다.(p219)

저자는 「욥기」를 통해 세 친구들의 정통주의 자세가 아닌 욥의 프로메테우스적인 도전과 회오리 바람을 통해 나오는 소리를 통한 자신의 무지와 겸손을 통해 비로소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말하면서 「욥기」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길을 제시한다. 마치 「욥기」안의 욥이 의로운 자신의 삶의 한계를 인정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화해와 길이 열리듯, 독자들은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기존 의식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지혜의 지평이 보이는 체험하는 것이 아닐까.

예언자다운 방식으로 욥기의 저자는 이단의 창조적인 힘을 대변했다. 신앙은 가끔 신학적 교의를 과감하게 파괴하고 미지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항 수 있기 때문이다.(p227)

욥기의 열쇠는 욥의 회개에 있다. 맨 처음부터 근본적인 문제는 하느님과 욥의 관계였다. 이 시의 절정은 마지막에 가서 이루어지는데 그때에 자만심에 기초를 둔 그릇된 관계가 인격적인 신뢰와 헌신의 관계로 바뀐다.(p233)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욥기」는 단순히 의인이 축복을 받는다는 주제의 단순한 축복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를 넘어섰을 깨 비로소 지혜서의 최고봉이 보인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라 해석된다. 이와같은 「욥기」에 대한 현대 해석에 대해 과연 교부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교부 주해 구약 성경」에서 확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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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0-10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유원작가님의 고전읽기 시리즈를 읽고 욥기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신학과 철학적 접근도 그렇고, 파우스트의 원형질같은 문학적 접근도 그렇구요!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겨울호랑님께서 좋은 글로 도와주십시요!ㅎ 즐건 주말되시구요!

겨울호랑이 2020-10-10 19:28   좋아요 1 | URL
.... ‘파우스트의 원형질‘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제게 막시무스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ㅜㅜ 막시무스님께서도 좋은 주말 되세요! ^^:)

레삭매냐 2020-10-10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경에 담긴 패러블은 정말
옳바른 가르침이 없다면 위험하게
해석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10-11 06:52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모든 책이 그렇지만 전체 흐름에 대한 이해없이 부분 발췌 인용, 이해는 잘못된 길로 이끈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레삭매냐님 감사합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삶의 양식, 즉 다시 태어남의 부활양식을 나의 실존의 지평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의 삶의 지평에 받아들이는 사건, 그 사건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기쁜 소식"이요, 유앙겔리온이다!(p42)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中


 도올 김용옥 교수는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이전 여러 권의 기독교 관련 서적을 낸 바 있다. 이를 먼저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저자는 <기독교 성서의 이해>(2007)를 통해 성서가 정경으로 확립되는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성서 무오설(聖書 無誤說)을 비판하며, <요한복음 강해>(2007)를 통해서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항하는 인간화된 로고스(Logos)의 모습을 밝히는데 중점을 둔다. 공관복음과 관련하여 <마태오 복음>와<루카 복음>에 전승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상의  Quelle(Q자료)를 기반으로 <큐복음서>(2008)에서는 예수의 어록(가라사대 문헌)을 다루고 있고,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도마복음>(2010)에서는 어록 자료 중심의 분석을 수행한다. 


 저자는 <큐복음서>와 <도마복음>의 공통된 말씀 자료 속에서 무엇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저자는 성서 텍스트를 일종의 '무대장치'로 해석한다. 보다 극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 성서의 자료들은 가공된 것이 많으며, 이 안에서 '인간 예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인간 예수'가 아닌 '메시아 예수' 또는 '십자가 위에 못박힌 예수'의 모습이 사도 바오로에 의해 강조되면서 기독교 교리가 성립되었음을 <도올의 로마서 강해>(2017)에서 설명한다.


 마가복음은 인류사상 최초로 등장한, 유앙겔리온이라고 하는 유니크한 문학장르이다.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선포하는 유앙겔리온의 선포자였다고 한다면, 마가는 예수의 삶을 선포하는 유앙겔리온을 창시했다... 전자가 예수의 십자가사건의 의미를 물었다면, 후자는 예수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한다.(p73)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中


  이와 같이 정리한 기독교 사상 체계 위에서 저자는 드디어 <마가(마르코) 복음>(2019)에서 인간 예수의 모습을 찾는다. 저자는 <바오로의 편지(바오로 서간)>들 외의 복음서의 원형을 <마가 복음>에서 찾으면서, 이로부터 인간 예수의 모습을 찾아간다. 불트만의 성서신학의 연구를 바탕으로, 안병무의 갈릴리 지평에서의 인간 예수를 찾아 최종적으로 우리 삶으로 가져오려는 12년에 걸친 저자의 노력을 우리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복음서의 끝이야말로 원점에서의 새로운 출발이다. 빈 무덤이야말로 1장 1절의 선포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빈 무덤이야말로 살아있는 예수님 말씀의 모든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안병무는 예수의 삶이 노자가 말하는 물과도 같다고 말했다. 예수는 물과 같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무화 無化시킴으로써 모든 생명의 구주가 되었다고 했다. 마가의 마지막 빈 무덤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우주적인 "빔", 곧 모든 생명의 근원, 끊임없이 회귀하는 반자도지동 反者道之動의 위대한 생명력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p605)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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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4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4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요한 13 : 2) ...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 27)


 The devil had already induced Judas, son of Simon the Iscariot, to hand him over(Jn 13 : 2)... After he took the mersel, Satan entered him. So Jesus said to him, "What you are going to do, do quickly."(Jn 13 : 27)


 그(루시퍼)는 여섯 눈구멍으로 울고 세 조각

 턱 위로는 눈물과 피맺힌 침을 뚝뚝 흘리더라.

 

 입이란 입은 이빨로 한 죄인을 

 발기는 게 삼을 찢는 듯한데, 이렇게

 세 놈을 아파 못 견디게 굴더라.


 스승이 가로되, "저기 드높이 가장 무서운

 벌을 받는 영혼이 유다(이스카리옷)이니, 

 그 골통이 쑥 들어가고 정강이만 쑥 내밀었구나.(p466) <단테의 신곡 上 지옥편 제34곡 52 ~ 63)> 中 


 기독교 역사 2000년 중 가장 유명한 죄인, 배신자인 유다 이스카리옷. <성경 The Bible> <신곡 La Divina Commedia>에서도 설명되고 있듯 생전에는 사탄(Satan)의 유혹을 받은 존재로, 죽어서는 지옥에서 루시퍼(Lucifer)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이끈 배신자인 유다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다. 때문에, 기독교 문명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좋지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많은 작품에서 유다는 '할 말 없는 죄인'에 불과하지만, 레오니드 안드레예프(Leonid Andreyev, 1871 ~ 1919)의 <가룟 유다>는 그런 관점에서 벗어난 작품이다.

 

 힘이 있어 보였지만 유다는 왜 그런지 나약하고 병색이 있는 듯 가장했고, 목소리는 일정치 않았다. 때로는 힘 있고 남성적이고, 때로는 듣기에 불쾌하고 기분나쁘며 남편을 욕하는 늙은 여편네의 째지는 목소리를 냈다... 붉은빛의 짧은 머리칼은 그의 이상한 두개골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두개골은 두 번의 칼질에 의해 절단된 듯 뒤통수에서부터 네 부분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어 불신과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두 개골을 갖고 있다면 고요와 평화는 있을 수 없으며 유혈의 무자비한 전투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릴 것이다. 유다의 얼굴 역시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날카롭게 관찰하는 검은 시선의 한쪽 눈은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치며 그 주위는 많은 주름이 져 있었지만, 다른 쪽은 생기도 없이 밋밋하고 마비된 듯하고 주위에 주름살도 없었다.(p30) <가룟 유다> 中


 <가룟 유다>에서 유다의 외모는 이중적이다. '살아 있는 눈'과 '죽은 눈'을 가진 좌우 비대칭 외모를 가진 인물. 마치 마징가Z의 아수라 남작처럼 다른 면을 가진 유다는 그의 외모처럼 스승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는 인물이다. 스승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스승을 미워하는 제자. 한 인물 속의 애증(愛憎)의 감정은 결국 그를 파탄으로 이끈다.


 모든 이에게 예수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한 송이 꽃, 좋은 향기가 나는 장미였지만, 유다에게는 날카로운 가시였다. 마치 유다에게는 심장도 눈도 코도 없어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부드럽고 순수한 꽃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p45) <가룟 유다> 中


 자네(유다)는 아름답지 않고 자네의 혀 또한 얼굴처럼 유쾌하지 않네. 자네는 거짓말을 일삼고 항상 험담을 늘어놓네. 그러면서 예수가 자네를 사랑하기를 바라는가?(p60)... 도마, 난(유다) 그를 아네. 스승님은 유다를 두려워하는 거야! 스승님은 용감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유다로부터 숨고자 하네. 스승님은 바보, 배반자, 거짓말쟁이를 사랑하네. (p61) <가룟 유다> 中 


  스승의 사랑을 바라지만, 스승의 사랑을 받지 못한 유다. <가룟 유다>에서 유다는 똑똑하지만 거짓말을 일삼는 비열함도 함께 가진 이중적인 인물로 설명된다. 그리고, 하나의 사건은 유다를  제사장 안나스에게 이끌어 스승을 팔아 넘기게 된다.


 그들은 스승님을 항상 사랑합니다만, 살아 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더 사랑합니다. 스승님이 살아 있으면 가르침에 대해 물을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이 죽으면 그들이 스승이 될 것이고 그때는 다른 이들의 마음이 불편하겠지요!.... 그들은 불쌍한 유다를 모욕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은화 세 닢을 훔쳤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유다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파렴치한 사람인 것처럼 말입니다!(p77) <가룟 유다> 中 


[그림] 스승을 넘기는 유다( 출처 :https://www.history.com/news/why-judas-betrayed-jesus)


 <가룟 유다>에서 끊임없이 번민하는 유다의 모습이 제시된다. 예수를 유대 제사장들에 넘긴 후 유다가 자살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성경에서는 유다의 죄책감에 초점에 맞추지만, <가룟 유다>에서 유다는 조금 다르다. 예수 죽음의 책임을 자신에게만 전가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에게 되묻는다. 가장 사랑받는 제자라 불렸던 요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말을 들은 베드로, 예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청한 야고보와 요한.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가 잡혔을 때 예수 곁에 있지 않았음을 유다는 비판한다. 너희들이 나를 배신자라고 욕하지만, 너희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유다의 물음은 통렬하다.


 자네가 말하는 훌륭한 희생이라는 게 정말 있는가? 희생이 있는 곳에는 통곡 소리와 배신자들만이 있네. 희생이란 한 사람의 고통이자 모든 이들의 치욕이네. 배신자들, 자네들은 이 땅에 무슨 짓을 한 건가? 자네들 자신이 모든 죄를 짊어졌네. 자네로부터 배신자 종족과 소심쟁이, 거짓말쟁이 가문이 시작되지 않겠는가? 자네들은 이 땅을 파괴하려 했네. 자네들은 조만간 자네들이 예수를 못 박은 십자가에 입 맞출 것이네!(p136) <가룟 유다> 中 


 <가룟 유다>에서 유다 죽음의 동기는 죄책감이라기보다는 허무감에 가깝다.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사건. 예수 수난기. 유다의 분열된 마음이 가져온 이 사건과 유다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유다의 마음은 하나로 통일이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지게 된다. 유다의 죽음은 <성경>의 내용처럼 그 자신을 회개하지 않은 죄인으로 만든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가룟 유다>에서처럼 분열된 인격의 통합으로 이룬 완성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예수는 죽었다. 공포와 꿈이 실현됐다. 이제 누가 유다의 손아귀에서 승리를 빼앗겠는가? 실현됐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군중이 골고다에 모여 '구해 주소서, 구해주소서!' 외치도록 내버려 두자. 피와 눈물의 바다가 땅 위에 흐르겠지만 그들은 단지 치욕스러운 십자가와 죽은 예수만을 발견할 것이다.(p124)... 유다는 자신의 발밑에서 하늘과 태양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외로운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의 무력함을 느끼고 그 모든 것들을 심연 속으로 던져 버렸다.(p125)... 기괴한 열매처럼 유다의 몸은 밤새도록 예루살렘 위에서 흔들렸다. 그러나 죽어서 이상해진 얼굴이 어느 방향을 향하건, 핏기로 가득 찬 붉은 두 눈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고 한결 같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p141) <가룟 유다> 中 


 <가룟 유다>에서 유다는 모순된 인물이다. 거짓말을 일삼는 교활한 인물이기도 하면서, 스승의 사랑을 원하는 지고지순한 인물이기도 하면서, 상처 받기를 두려워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유다는 도마와 대화를 나눌만큼 이성적인 면도 가진 반면, 베드로와 힘을 겨눌만큼 튼튼한 신체도 가진, 문무(文武)를 겸비한 매우 복합적인 면을 가진 인물이다. 우리의 인식과는 다른 유다의 모습을 우리는 <가룟 유다>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유다의 다른 면을 외경(外經)에서 찾을 수 있는데, 지난 2006년 세상에 알려진 <유다복음 The gospel of Judas>이 그것이다. 

 

 유다가 말했다. "선생님, 제 후손들이 그 통치자들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다. "오라, 나는 [-2행 누락-], 그러나 너는 네가 그 나라와 그 모든 세대를 보면 많이 슬퍼질 것이다." 유다가 이 말을 듣고 그에게 말했다. "내가 받아들인 그것은 좋은 것입니까? 왜냐하면 당신은 저 세대를 위해 저를 떨어뜨려 놓으셨습니다." 예수가 대답하여 말했다. "너는 열세번째가 될 것이며 다른 세대들에 의해 저주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날에 그들은 네가 거룩한 [세대]로 올라간 것을 저주할 것이다. 예수가 말했다. "[오라], 내가 너에게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비밀]에 대하여 가르쳐주마. 왜냐하면 위대하고 끝없는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다복음> 中 (번역 출처 : http://m.pressian.com/m/pages/articles/320?no=320)


   Judas said, "Teacher, surely the rulers are not subject to my seed?" Jesus answered. He said to him, "Come ..... [about two lines are untranslatable] [b]ut because you will groan deeply when you see the kingdom and its entire race." When Judas heard these things, he said to him, "What benefit have I received because you separated me for that race?" Jesus answered. He said, "You will become the thirteenth and you will be cursed by the rest of the races - but you will rule over them. In the last days, they will < > and you will go up to the holy ra[ce]." Jesus said, ["Com]e and I will [te]ach you about the [things ..... that] no human will see.(p116) <Judas, 9 : 26 ~ 10 : 1> 中 


 영지주의(Gnosticism) 복음서로 여겨지는 <유다복음>이 기독교에서는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이 안에서 유다는 예수에게 인정받는 첫 번째 제자이면서, 비밀을 전수받는 존재로 묘사된다. 신앙적으로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유다 복음>의  인간 유다의 다른 면을 발견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도록 하자. <가룟 유다>와 <유다 복음>을 통해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인(惡人)이 아닌 인간 유다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사탄과 루시퍼에 대한 이야기는 제프리 버튼 러셀(Jeffrey Burton Russell, 1934 ~ )의 <악의 역사> 시리즈를 통해 다음 기회에 정리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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