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구약 성경의 지혜서 중 하나인 코헬렛서는 목적이 없어 방향 감각을 상실하거나 계속되는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한다. 우리는 코헬렛서를 통해 인생이 각자가 경험하는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모자이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삶의 순간들을 잃어버리기 전에 이해하고, 놓치기 전에 누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_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p17/152 


 올해 첫영성체 교리를 듣고 있는 연의. 외워야 할 기도문도 많고, 성경 필사도 해야 하고, 평일미사도 가야하기에 예전보다 교리 이수 조건이 까다로워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부모도 예외는 아니어서, 부모 교육도 별도로 진행되고 독후감도 제출해야하는 등 부모 역시 신경쓸 부분이 없지 않다. 그리고, 오늘 페이퍼는 제출할 과제 도서에 대한 내용이다.


 과제 도서인 조앤 치티스터 (Joan D. Chittister, 1936 ~ )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구약성경><코헬렛 Ecclesiastes>서의 내용을 현대인의 시각에서 재음미하는 영성서적이다. 태어날 때, 잃을 때, 사랑할 때, 웃을 때, 전쟁의 때 등등. 우리의 삶 전체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과 사건 안에서 저자는 그 의미를 발견하고 독자들과 나눈다. 저자가 발견하는 '때'의 의미는 또한 <코헬렛> 저자의 깨달음이기도 하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_ <구약성경> <코헬렛> 3:1~9


 결국 지금 이 순간을 적극적으로 잡아야 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곳을 의식하고, 거기에 몰두하며, 기민하게 행동하는 것이 삶을 알차게 사는 비결이고 배워야 할 교훈이다. 우리 앞에 존재하는 지금 현재를 어떠한 요령 없이 보는 것이야말로 삶의 중요한 방식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이 문제는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끊임없이 말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_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p15/152 


 <코헬렛>의 저자로 알려진 솔로몬은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여기에 바탕을 두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에서는 삶에서 현대인들의 삶의 방향성에 대해 나눔한다. 삶의 매 순간의 의미를 찾아가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의 본문 내용은 하나의 지혜 문학으로서 우리에게 잠언(箴言)으로 다가온다. 잔잔하게 영혼을 적시는 책의 내용은 편안하게 다가오지만, 페이퍼에서는 경구보다 조금 다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인용한 <코헬렛> 3장 9절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자.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이 한 문장으로 <코헬렛>의 '때'에 대한 코헬렛의 이야기는 반전으로 다가온다. '지혜의 왕'이라 불리던 솔로몬은 모든 것에 대한 때를 말한다. 현명한 그는 때의 의미를 깨닫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처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부와 영광을 부렸던 그가 말하는 '허무'의 의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보람의 의미를 묻는 그의 물음과 이로부터 느껴지는 허무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코헬렛> 1장의 첫 구절로 이끈다. 때에 맞춰 인간으로서 최선의 삶을 살았건만, 그로부터 남겨진 것이 허무라면, 솔로몬의 마지막 깨달음은 절대적인 시간에 대한 인간의 무기력과 상대적으로 유한한 인간의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이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 곳으로 서둘러 간다. _ <구약성경> <코헬렛> 1:1~5


 이와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CE 354 ~ 430)는 <참된 종교 De Vera Religione>에서 <코헬렛>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신의 섭리에 의해 주재되는 세상 속에서 인간은 상대적으로 유한하고 한계가 많지만, '헛됨'을 벗어날 수 있다면 유한함에서 벗어나 절대성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교부의 해설 속에서 신의 절대성과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한 허무를 극복할 하나의 방편을 발견하게 된다. 초월(超越. transcendence).


죄와 그 벌에서 유래하는, 영혼의 이 도착倒錯으로 말미암아, 육체를 지닌 모든 사물이, 솔로몬의 말대로, 헛된 인간들의 헛됨이여. 세상 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여기서 '헛된 인간들'이라는 말이 괜히 덧붙여진 것이 아니다. 헛되게 만드는 인간들이 제거된다면, 즉 맨 마지막 것들을 맨 처음 것처럼 추구하는 인간들이 없다면, 육체를 지닌 사물이 곧 헛됨 그 자체가 되지는 않으며, 비록 미약하더라도 아무런 결함이 없는 자기 나름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것이다. _ 아우구스티누스, <참된 종교> 21.41


 사람에게 위험한 바로 그 섬광들을 경험한 다윗은 자신의 모든 희망을 하느님의 이름에 두는 이가 행복하다고 옳게 말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헛된 것과 어리석은 것들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항상 그리스도를 향해 노력하며 늘 자신의 내적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코헬렛의 말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무입니다. 따라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초월하십시오. 먼저 여기에서 달아나지 않으면, 지금도 존재하고 늘 존재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암브로시우스, <세상도피> 1,4) _ <교부들의 성경주해 9 - 잠언, 코헬렛, 아가>, p295 


 이러한 연결점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의 본문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매 순간에 머물면서 우리는 새로워지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지혜의 왕이었던 솔로몬도 피해가지 못했던 허무함에 빠지지 않을 좋은 조언이 된다. <대학 大學>의 '苟日新(구일신) 日日新(일일신) 又日新(우일신)'과도 통하는 본문의 내용 속에서 인간의 한계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지만, 절대성에 수렴해가는 삶의 자세에 대해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이 즉시 일어나는 것을 막는 자연의 방법이다." 이 말은 영혼을 잠시 진정시키고 잠깐 멈추게 하는, 영적 성숙의 시간적 단계가 있음을 가르쳐 준다. 시간은 차례차례 인생의 어느 순간에서 순간으로 우리를 인도하며 우리가 그 시간 안에서 모든 상황을 겪게 한다. 그러나 인생한 할당된 일수를 채웠는지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았는지로 평가된다. 이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_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p148/152 


 <코헬렛>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에서는 흐르는 시간 안에서 인간의 유한성이 드러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현재로서 절대적인 시간의 미분(微分)이라면, 과거-현재-미래의 절대적인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적분(積分)이라 할 수 있겠다. 미분의 차원(次元)과 적분의 차원이 서로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시간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현재'로 존재하는 '때'에만 관여할 수 있다. 여기에 절대적인 가치를 담으려 노력하는 자세에 대해 옛 지혜문헌들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접점을 갖는다.  


 차라리 시간은 셋인데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이 셋은 영혼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다른 곳에서는 이것들이 안 보이며,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記憶)이고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注視)이며,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期待)다.(11권 20,26)...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기대에 해당하는 영역은 짦아지고 기억에 해당하는 영역은 길게 연장된다. _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권 28.38, p456


 기나긴 시간이란 동시에 펼쳐질 수 없는 수많은 순간瞬間들에 의해서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알아듣게 하겠습니까? 영원에서는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고 전체全體로서 현전現前합니다. 어느 시간도 전체로서 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과거는 미래에 의해서 밀려나고 모든 미래는 과거에 의해서 뒤쫓기며, 모든 과거와 미래는 항상 현재하는 것에 의해서 조성되고 전개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보게 하겠습니까? 누가 인간의 마음을 붙들어 세워 멈춰 서서 바라보게 만들고, 영원이 어떻게 정지한 채로 미래 시간과 과거 시간을 결정하는지, 그러면서도 영원 자체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님을 바라보게 만들겠습니까? _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권 11.13, p431


 제자가 스승인 랍비에게 물었다. "저처럼 미천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모세처럼 살 수 있습니까?" 스승은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가 죽을 때, '너는 왜 모세처럼 살지 못했나?'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네. '너는 왜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했나?'라는 질문을 받을 걸세." 그렇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때가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때가 왔다. 지금이 바로 우리의 때다. _ 조앤 치티스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p152/152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가 유한한 시간에서 담아야 할 절대적 가치를 말한다면, 시간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도 존재한다. 이번에는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에서 출발해보자. 객관성과 주관성, 영원과 찰나의 대조로 상징되는 이 둘 중에서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우주(宇宙)에 대한 해석방향이 달라지고,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됨을 보여준다는 내용은 리 스몰린(Lee Smolin, 1955 ~ )의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에 담겨있다.


 '흐로노스 chronos"는 우리가 잘 아는 베테랑 할아버지, 시간의 아버지 Father Time, 즉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 Kairos"는 완전히 반대의 예측 불가능한 주관적인 시간이다.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바로 아이작 뉴턴이 얘기하는 시간의 특징 aquabiliter fluit - 즉, 강의 물이 항상 일정하게 흐르듯 영원히 고정된 시간이 바로 흐로노스이다.(p35)... 그에 반해서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흔히 "기회 opportunity"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일정하게 아주 "적절한 때 right timing"을 의미한다. 흐로노스가 신적인 우주의 영원한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인간세상의 찰나, 즉 짤막한 현재의 시간이다. _ 김승중,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 p37 


 절대적인 시간의 세계가 수리(數理)적 질서로 마치 정밀한 시계와 같은 구조로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면,  리 스몰린은 흐르는 물과 같은 시간에 대해 말한다. 이는 시간 안에서 시간을 바라보는 관계주의적 관점과 시간 밖에서 시간을 관조(觀照)하는 절대주의적 관점은 시간을 하나의 변수(變數)로 보는가, 주어진 조건으로 보는가의 차이이기도 하다. 시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이야기의 방향은 다르지만, 책의 내용  중 수학을 통해 시간(時間)을 또 다른 공간(空間)으로 이해하는 뉴턴적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 안에서 우리는 <고백록>, <코헬렛>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 첫 영세 교리 과제로 주어진 도서에 대한 내용이 어느새 산으로 와버렸지만,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많이 쓴 듯하다. 이 페이퍼 중 아우구스티누스 선에서 적당히 재편집을 해서 제출해야겠다...


 시간 안에서 생각하는 것과 시간 밖에서 생각하는 것의 차이는 인간 사고와 행위의 여러 측면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기술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접근법이 절대적이고 이미 존재하는 범주들의 집합으로서 결정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시간 밖에서 생각하는 것이다(p12)... 시간 안에서 생각하는 것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일종의 관계주의 relationship다. 관계주의는 어떤 것에 대한 가장 참된 기술은 그것이 속한 계의 다른 부분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이다. _ 리 스몰린,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 , p13/302


 세계를 동역학적 부분과 배경(동역학적 부분을 둘러싸고 있고 우리가 이것을 기술하는 용어들을 정의하는)으로 나누는 것은 분명 뉴턴적 패러다임의 천재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이 패러다임을 전체 우주에 적용하는 것을 적절하지 않게 만든다. 과학을 우주 전체의 이론으로 확장할 때 우리가 마주치는 도전은 정적인 부분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변화하며, 우주 밖에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_ 리 스몰린, <리 스몰린의 시간의 물리학> , p116/3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그러고 나서 그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제게 보내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듣고 흘려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겁쟁이의 이 한탄이 어째서 예리한 바늘이 되어 제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것인지요?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들 비참한 농민들에게, 이 일본인들에게 박해와 고문이라는 시련을 주시는지요? 아니,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다른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_ 엔도 슈사쿠, <침묵> , p57/206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침묵 沈默>에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하느님의 길이 진리의 길이라면, 이 길을 따르는 이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왜 하느님은 침묵하시는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로드리고 신부에게는 최소한 두 인물이 떠올랐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의인 욥과 <신약성경>의 의인 예수. 


 <구약성경>에서 자신에게 닥친 이유없는 불행에 대해 욥은 계속적으로 탄원을 하며, 이러한 불행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던진다. 이에 대해 <욥기>에서는 다행히도(?) 응답받는다. 그가 의롭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의로움이 드러나기 위해 의인에게 시련이 닥쳤기 때문임을 교부(敎父)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hn Chrysostom, 349~407)는 저서에서 밝힌다.


 

 그러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사내답게 허리를 동여매어라.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공의마저 깨뜨리려느냐? 너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나를 단죄하려느냐? (욥 40 : 6 - 8)


 그분은 당신의 개입이 '너를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의롭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거나, 당신께서 승인하신 개입을 함으로써 욥의 시련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내가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이 일을 꾸몄다고 생각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네가 의롭게 되도록'이라고 하지 않고, 그가 실제로도 그랬고 또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네가 의롭게 보이도록"이라고 하셨습니다. _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욥기 주해> 中


 <구약성경>에서 욥은 응답을 받지만,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에서 예수는 죽음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아니, 그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다. 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다윗-솔로몬의 영광이 재림한다는 대중의 열망에 부합하지 못하고, 실망감이 미움으로, 미움이 증오로 바뀌며 제자들에게마저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 예수.


 예수는 당시의 모든 사람들의 오해에 둘러싸여 살아야 했다. 짧은 생애 동안 민중도, 적대자도, 그리고 제자들마저도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예수에게 걸려고 했다. 예수는 자신의 의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중大衆의 기대 속에서 고독했다. 서민들은 그에게서 사랑보다는 현실적인 효과를 추구했고, 대중은 로마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유다를 '하느님 나라'로 회복시킬 지상적인 메시아로 그를 내세우려 했다. 이러한 기대와 흥분은 한때 갈릴래아의 봄이라는 열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지만, 예수에게 지상적인 메시아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예수로부터 떠나갔다. 예수의 비극적인 십자가상의 죽음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상이 내가 쓴 <예수의 생애>의 줄거리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7


  대사제 안나스는 예수의 죽음을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의 전승과 같이 말하지만, 예수 자신은 <루카 복음>의 내용으로 자신의 죽음을 말한다. 같은 공관 복음에서도 엇갈리는 최후의 순간에 대한 증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상반된 역사적 기록들 위에 교회가 세워졌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을까. 앞의 <마태오 복음> <마르코 복음> 기록이  하느님의 침묵에 대한 최후의 질문이라면, 이어지는 <루카 복음> 기록은 예수가 겟세마니에서 이미 응답을 받았음을 함축하기에 이들 증언 사이의 차이는 크다. 슈사쿠는 아마 이 점을 <사해 부근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서로 다른 전승 속에 바오로에 의해 세워진 교리는 불완전하다는 점을.


 그는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완강한 그 침묵은 나(대사제 안나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그 침묵은 처음부터 나의 호기심과 수다스러운 말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p174)...  "그대는... 마지막에 저 비탄의 시편 구절을 외치게 될 거네.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이네." "아닙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겨드립니다.' 라고. 이 모든 걸 곧 알게 될 것입니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175


 <침묵>에서 로드리고는 <성경>의 의인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와 함께 응답받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과 함께 침묵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이 욥의 경우에서처럼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에 대해. 자신은 의로운가. 알지 못한다면 스승 예수를 따라야겠다는 생각에 예수의 길(道)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는 선택을 한다. 


 라삐들이 가르치는 것들을 그는 전혀 입에 담지 않았다. 율법을 날마다 엄중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도, 율법을 날마다 외워야 한다는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하느님은 외로우시므로 당신을 사랑하고 찬미해 주기를 기다리신다고 했다. 하느님은 보호자가 필요 없는 훌륭한 학자나 제사장들,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선인善人이 아니라 아이를 잃은 어머니처럼 울면서 외롭게 걷고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시다고 했다(p253)... 라삐은 황당무계한 꿈같은 예수의 이야기가 머지 않아 본색이 드러나리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예수는 오직 사랑만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에게는 실현 불가능한 사랑을 전하고 있었다. 사랑이 이 현실 세계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종교 지도자인 라삐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예수에 대한 환멸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255


 로드리고의 선택은 <침묵>에서 생각이 오래 머무르는 지점이다. 그 어떤 선택도 독자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침묵>에서 로드리고는 예수의 침묵에 고민하지만, 독자들은 그의 선택으로 인해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선택의 의미를 찾는다. 왜 그는 이런 선택을 했을까.


 개인적으로 로드리고 선택은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 예수' 또는 '역사적 예수'에 근거했으리라 여겨진다. 바오로(Paulus, ACE 5 ~ 64(?))에 의해 규정된 그리스도가 아닌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한 예수의 모습을 로드리고는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을까. 불완전함을 걷어낸 믿음의 근원의 차원에서. 이와 같은 길은  슈사쿠의 다른 저서 <사해 부근에서> <예수의 생애>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본질적 일은 자기 주위에 한 무리의 제자를 만들고 이들에게 무한한 애착심을 불어넣고, 또 이들의 한복판에 자신의 교리의 새싹을 심어 놓은 것이었다. <죽은 후에도 그를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한 것이야말로 예수의 가장 큰 업적이요, 또 동시대인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이었다. 예수는 교리를 세우지 않았고, 신조를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예수를 따르는 것,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교도라 불리는 까닭이었다. _ 에르네스트 르낭, <예수의 생애> , p396


 바오로는 우리 인간이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것과 인간 행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자신의 독선이며, 그것이 상대를 상처 입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p152)... 바오로의 그리스도론論이 전개된다. 율법은 인간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는다.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계율과 율법을 지키지만, 돌을 던진 수면에 물결이 일듯이 계속해서 새로운 죄에 휘말린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행위의 비애, 그리고 원죄의 고통이 있다.. 그런 인간을 원죄에서 해방시키는 존재, 그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하느님은 자신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속죄물인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53


 생명을 살리는 것과 믿음을 저버리는 양 갈래 길은 로드리고에게 '예수'와 '그리스도' 중 어느 길을 택하는가와 마찬가지의 질문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로드리고의 고민이 생각보다 가볍게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끝이 아니다. 선택을 위해 이번에는 로드리고 개인의 문제로 내려와야 한다. 이것은 시간의 문제다. 한 사람의 일생과 순간의 다툼.


 성직자로서 일생을 한 길만 걸어온 한 사람의 신념과 찰나와도 같은 배교의 순간. 어쩌면 평생에 비하면 보잘 것없는 박해시기만 참고 버틸 수 있다면 그는 자신의 믿음을 영육(靈肉)간에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순간을 버티지 못한다면 그는 남은 삶을 비참하게 살아야 할 것이리라. 예수와 그리스도의 선택과 이어지는 영원과 찰나의 선택. 영원한 생명과 유한한 생명(그렇지만 수많은 사람들의)의 선택. 이것이 <침묵>에서 로드리고가 처한 절망적 상황이 아니었을까.


 바오로와 제자 그룹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믿는다는 점에서는 일치되었다. 그러나 신격화한 예수를 어떤 형태로 믿는가 하는 점에서는 견해를 달리했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는 머지않아 재림할 그리스도, 곧 머지않아 세상 종말에 재림하여 이스라엘과 자신들을 구해 줄 그리스도였다. 이에 반해, 바오로의 그리스도는 율법이라는 자력自力 구원의 한계를 초월하여 인간에게 구원을 선사하는 존재로, 하느님의 자신과 인간과의 벌어진 틈을 메우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한 희생 제물인 하느님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이 두 개의 그리스도관觀은 서로 얽히고설켜 그리스도교 안에서 뿌리를 내려간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90


 한 인간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이기에, 어떤 선택을 했든 로드리고 신부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비록 그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비난받을 만한 내용일지라도...  <침묵>을 읽은 후 로드리고의 선택에 대해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과정에서 로드리고의 선택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는 왕'으로 권위를 부여 받은 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슈사쿠의 다른 저서들과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1823~1892)의 저서 <예수의 생애>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블로크의 <기적을 행하는 왕>에서 드러나듯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기적을 통해 부여받은 권위를 걷어냈을 때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야 비로소 로드리고 선택의 의미가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침묵>은 독립적으로 읽기보다 <사해부근에서>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생각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사람마다 같은 해석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침묵>의 의미를 정리하는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수는 본의 아니게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요 귀신을 쫓는 사람이 되었을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위대한 신적 생애에 있어서는 언제나 그렇듯 그는 기적은 행했다기보다는 여론이 요구한 기적들을 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기적은 보통 군중이 만들어낸 것이지, 그것을 행했다고 말하는 사람의 소행은 아니다. 예수는 군중이 자신을 위하여 지어낸 기이한 일을 행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역사와 민중 심리의 법칙이 이처럼 큰 저촉을 입은 적은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_ 에르네스트 르낭, <예수의 생애> , p27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2-05-29 13: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태<그리스도의 탄생>이 <예수의 생애>와 동일한 내용,다른 제목인 줄 알았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여러 책들이 이렇듯 연결되는걸 보면
평생에 걸쳐 신앙에 관한 고민이 작가에게 있었나봅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9 17:42   좋아요 1 | URL
미미님 말씀처럼 슈사쿠에게 신앙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문제는 인생에 걸쳐 천착한 주제로 보입니다. 그만큼의 깊이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하구요 ^^:)
 

 

 나는 생각만 해도 소스라치고 전율이 내 몸을 사로잡는다네.

 어째서 악인들은 오래 살며 늙어서조차 힘이 더하는가?

 자식들은 그들 앞에서, 후손들은 그들 눈앞에서 든든히 자리를 잡지.

 그들의 집은 평안하여 무서워할 일이 없고 하느님의 회초리는 그들 위에 내리지도 않아 그들의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들의 암소는 유산하는 일 없이 새끼를 낳지. <욥 21 : 6 ~ 10>


 정녕 악인들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타오르지 않네. 

 그 천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를 비추던 등불은 꺼져 버리지. 

 그의 힘찬 걸음걸이는 좁아지고 그는 자기 꾀에 넘어간다네. <욥 18 : 5 ~ 7>


 <성경>의 여러 편들 중에서 <욥 기>가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선한 이가 상을 받는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주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자신의 죄(罪)로 인해 벌(罰)을 받는다는 뿌리깊은 인식에서 벗어나 선한 이들이 어렵게 사는 반면, 악한 이들이 잘 사는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욥 기>에는 담겨있다.


 빌닷의 발언 두 번째 부분에서 교부들은 욥에 대한 그의 질책과 비난이 왜 잘못됐고 근거 없는지 지적한다. 동시에 빌닷의 발언에서 부분적 진실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 진실은 인간적 영광의 일시적 특성에 대해 그리고 불경한 이들과 교만한 자들의 절망적 삶과 피할 수 없는 형벌에 대해 윤리적 성찰을 할 수 있게 한다. _ 만리오 시모네티 등, <교부들의 성경 주해 구약성경 6 : 욥기>, p173


 동시에, 욥과 세 친구들의 이야기는 명확히 선(善)과 악(惡)을 구별할 수 없게 한다. 

 자신의 불행을 탓하며 운명을 저주하는 욥의 모습에서 의(義)인의 전형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처럼, 독자들은 오히려 욥과 대립하는 세 친구와 엘리후의 대화 속에서 의로움을 발견한다. 아마도 이것은 교부들이 말한 바처럼 <욥 기>의 인물들 성격이 입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욥 기>에서 논쟁이 이루어지는 문제들은 사회공동체의 파괴와도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쉽게 답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이처럼 복합적인 인물들과 현실적인 문제들은 날선 공방을 펼친다. 선한 이가 받는 벌과 악인들이 누리는 영화, 저주하는 의인과 회개를 권유하는 친구들. 그렇지만, 이들의 공방은 쉽게 정리되지 않고, 끝없는 논쟁만 이어질 뿐이다. <욥 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자네의 시작은 보잘것 없엇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이 사실은 욥을 책망하는 친구의 말 <욥 8 : 7>임을 생각해본다면, <욥 기>는 여러 면에서 우리를 혼돈의 카오스(Chaos)로 내모는 어려운 책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책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욥의 문제가 우리 자신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리라. <욥 기>는 논쟁을 이어가면서 결국 평행선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 지점은 인간 이성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갈등이 해소되는 지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보아라, 주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며 악을 피함이 슬기다. <욥 28 : 28>


 인간은 창조된 이후에는 이성의 안내를 받아 각 요소들에서 얻을 수 있는 유용함이 무엇인지 파악했습니다. 땅은 파종에 적합했고, 파종은 농업을 위한 것이었으며, 농업은 특별한 작물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무는 배를 만들고 건물을 짓는 데 유익했습니다. _ 만리오 시모네티 등, <교부들의 성경 주해 구약성경 6 : 욥기>, p229


 지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리오? 슬기의 자리는 어디리오?

 사람은 그것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하고 생물들의 땅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네.

 대양도 "나에게는 그것이 없어." 하고 바다도 "그것은 내 곁에 없어." 한다네. 

 금덩어리로도 얻을 수 없고 그 값은 은으로도 잴 수 없으며

 오피르의 순금으로도 살 수 없고 값진 마노나 청옥으로도 안 되네...

 비의 법칙과 뇌성 번개의 길을 정하실 때

 그분께서 지혜를 보고 헤아리셨으며 그를 세우고 살피셨다네. <욥 28 : 12 ~ 28>


 <욥 기>에서 극적인 갈등의 해소와 화해는 욥이 이성(理性)의 한계를 인정하고, 지혜를 받아들이면서 이루어진다. 태초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어디있었는가에 대한 물음과 갈고리로 레비아탄을 낚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욥이 자신의 무지(無知)와 무능(無能)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욥은 자신을 내려놓는다.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욥 42 : 1 ~ 6>


 교부들에 따르면, 욥은 하느님의 전지 全知와 하느님께서 인간 삶의 모든 사건을 통제하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때 하느님에게 의로움을 인정받는다. 욥은 진실한 겸손과 온전한 참회를 보여 준다. _ 만리오 시모네티 등, <교부들의 성경 주해 구약성경 6 : 욥기>, p318


 <욥 기>의 끝에 이르러서도 욥이 제기한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답(答)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욥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한계를 일깨우며 삶의 뜻을 헤아리고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므로, 겸손되이 받아들이라는 열린 결말이 제시되며 <욥 기>는 마무리된다.


 <욥 기>에서는 고난을 받는 선한 이가 고통을 당하는 현실 문제에 대해, 신상필벌(信賞必罰)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대신, 그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지혜 안에서 살아갈 것을 강조한다. 또한, 섣부르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 인간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그 의미를 찾을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지혜 문학의 정수가 담겼다는 평가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욥 기>의 마지막은 화해를 이룬 욥이 더 큰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이야기로 끝나지만, 이는 <마르코 복음> 16장 9절 이후 추가된 내용이 <마르코 복음>의 전체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듯, <욥 기>의 대주제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삶의 지향점에 복(福)이 주어질 필요는 없을 것이기에. 

 

 내 조국 테바이 주민들이여, 보시오. 저분이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는 더없이 권세가 컸던 오이디푸스요.

 어느 시민이 그의 행운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보시오, 그런 그가 얼마나 무서운 불운의 풍파에 휩쓸렸는지!

 그러니 항상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를 지켜보며 기다리되,

 필멸의 인간이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 _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1524 ~ 1530


  다른 한편, 인간의 유한성과 삶에 대한 순응은 소포클레스(Sophokles, BC 497 ~ BC 406)의 <오이디푸스왕>에 나타난 휘브리스(hybris)에 대한 경고와도 통하는 바를 발견하지만, 조금은 결이 다름을 느낀다. 그것은 아마도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의 차이의 일부가 아닐까...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0-10-15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욥의 고난과 역경을 확실히 기존의
권선징악적 개념으로 해석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
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가 닿을 지
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현재를 사는 우리 인간이 어
떻게 만세에 이르는 신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가 바울에 의해 재정립되고
세계 종교로 도약하게 되면서 기존의
헤브라이즘 사고에서 벗어나게 되긴
했지만, 그 영향력은 배제할 수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20-10-15 09:47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욥의 고난과 제기되는 물음은 인간의 무력함으로 알 수 없기에, 신의 뜻으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는 이와 같은 신의 뜻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여겨집니다. <교부주해 구약성경>에서 교부들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면서 의미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헤브라이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와같다면 2020-10-18 0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절실한 필요에 하나님이 왜 응답하지 않는지, 우리의 헌신과 진심에 마땅한 보상과 만족을 왜 허락하시지 않는지 몰라서 우리는 놀라고 자책하며 숨죽여 살아갑니다

나와같다면 2020-10-18 0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욥기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답이요, 위로입니다. 고통과 환란은 형통과 안심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의 욥기 설교 [JOB] 중 교우들에게 하신 글입니다

흠.. 저는 뭔가 마음 깊은 의문이 들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면 욥기서를 찾게되는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20-10-18 05:45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욥기」는 인간이 풀 수 없는 문제를 마음에 안고 살아가야할 때 큰 힘을 주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안식을 주는 책. 여기에 「욥기」의 뜻이 담겨 있다 생각해 봅니다...
 

자네의 시작은 보잘 것 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욥」(8:7)

「성경」을 읽지 않는 이들도 아는 유명한 구절. 때문에 많은 이들이 「욥기」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으며, 직접 읽었을 때 혼란을 겪게된다.

많은 사람들은 욥기의 목적이 고통(악)의 문제를 논하고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능력이 하느님의 본성안에서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느냐는 철학적 문제를 제기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리라고 기대하면서 욥기에 접근하는 독자들은 실망할 것이다.(p225)

이에 대해「구약성서의 이해 3」의 저자 앤더슨은 우리가 「욥기」에 대해 갖는 오해를 지적하고 지혜 문힉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욥기」의 핵심을 이해하는 길을 본문에서 제시한다.

욥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이 어떤 책인지 너무나 피상적인 이해만 하고 있다... 일반인들의 마음에는 욥이 신앙인의 모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산문으로 된 서문과 결문에만 해당하는 말이다. 이 책의 주요 부분은 운문으로 씌여졌는데 여기서의 욥은 인내심의 전형과는 아주 다르다. 그는 자기가 난 날을 저주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폭풍우같은 분노를 몰아 하느님께 울부짖으며 저항한다. (p217)

「구약성경」내에서도 신명기계와 역대기계 역사서 저자들의 시대상황, 집필 목적에 따라 역사관의 차이를 보이듯, 산문과 운문으로 구성된 「욥기」는 서로 다른 저자들이 작품 안에서 같은 인물을 다른 성격으로 그려넣는다. 산문 안에서 차분한 욥과 운문 안에서 절규하는 욥.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듯한 욥의 행동과 생각은 차이가 있기에 우리는 마치 욥의 자아분열을 보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되고,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과연 이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는 의인 ‘욥‘의 모슴인가. 저자는 이러한 혼돈을 걷어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주제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운문 부분의 저자와 서문과 결문의 저자는 같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해설 부분의 저자는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데 반해 운문 부분의 저자는 신에 대한 일반적 용어인 엘로아(Eloah) 또는 샷다이(Shaddai)란 말을 쓴다. 또한 해설은 매력적인 우화식으로 씌어진 데 반해 운문 부분은 잠언이나 전도서의 지혜문학에 가깝다.(p219)

저자는 「욥기」를 통해 세 친구들의 정통주의 자세가 아닌 욥의 프로메테우스적인 도전과 회오리 바람을 통해 나오는 소리를 통한 자신의 무지와 겸손을 통해 비로소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말하면서 「욥기」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길을 제시한다. 마치 「욥기」안의 욥이 의로운 자신의 삶의 한계를 인정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화해와 길이 열리듯, 독자들은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기존 의식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지혜의 지평이 보이는 체험하는 것이 아닐까.

예언자다운 방식으로 욥기의 저자는 이단의 창조적인 힘을 대변했다. 신앙은 가끔 신학적 교의를 과감하게 파괴하고 미지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항 수 있기 때문이다.(p227)

욥기의 열쇠는 욥의 회개에 있다. 맨 처음부터 근본적인 문제는 하느님과 욥의 관계였다. 이 시의 절정은 마지막에 가서 이루어지는데 그때에 자만심에 기초를 둔 그릇된 관계가 인격적인 신뢰와 헌신의 관계로 바뀐다.(p233)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욥기」는 단순히 의인이 축복을 받는다는 주제의 단순한 축복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를 넘어섰을 깨 비로소 지혜서의 최고봉이 보인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라 해석된다. 이와같은 「욥기」에 대한 현대 해석에 대해 과연 교부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교부 주해 구약 성경」에서 확인해 봐야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시무스 2020-10-10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유원작가님의 고전읽기 시리즈를 읽고 욥기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신학과 철학적 접근도 그렇고, 파우스트의 원형질같은 문학적 접근도 그렇구요!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겨울호랑님께서 좋은 글로 도와주십시요!ㅎ 즐건 주말되시구요!

겨울호랑이 2020-10-10 19:28   좋아요 1 | URL
.... ‘파우스트의 원형질‘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제게 막시무스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ㅜㅜ 막시무스님께서도 좋은 주말 되세요! ^^:)

레삭매냐 2020-10-10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경에 담긴 패러블은 정말
옳바른 가르침이 없다면 위험하게
해석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10-11 06:52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모든 책이 그렇지만 전체 흐름에 대한 이해없이 부분 발췌 인용, 이해는 잘못된 길로 이끈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레삭매냐님 감사합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삶의 양식, 즉 다시 태어남의 부활양식을 나의 실존의 지평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의 삶의 지평에 받아들이는 사건, 그 사건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기쁜 소식"이요, 유앙겔리온이다!(p42)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中


 도올 김용옥 교수는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이전 여러 권의 기독교 관련 서적을 낸 바 있다. 이를 먼저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저자는 <기독교 성서의 이해>(2007)를 통해 성서가 정경으로 확립되는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성서 무오설(聖書 無誤說)을 비판하며, <요한복음 강해>(2007)를 통해서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항하는 인간화된 로고스(Logos)의 모습을 밝히는데 중점을 둔다. 공관복음과 관련하여 <마태오 복음>와<루카 복음>에 전승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상의  Quelle(Q자료)를 기반으로 <큐복음서>(2008)에서는 예수의 어록(가라사대 문헌)을 다루고 있고,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도마복음>(2010)에서는 어록 자료 중심의 분석을 수행한다. 


 저자는 <큐복음서>와 <도마복음>의 공통된 말씀 자료 속에서 무엇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저자는 성서 텍스트를 일종의 '무대장치'로 해석한다. 보다 극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 성서의 자료들은 가공된 것이 많으며, 이 안에서 '인간 예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인간 예수'가 아닌 '메시아 예수' 또는 '십자가 위에 못박힌 예수'의 모습이 사도 바오로에 의해 강조되면서 기독교 교리가 성립되었음을 <도올의 로마서 강해>(2017)에서 설명한다.


 마가복음은 인류사상 최초로 등장한, 유앙겔리온이라고 하는 유니크한 문학장르이다.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선포하는 유앙겔리온의 선포자였다고 한다면, 마가는 예수의 삶을 선포하는 유앙겔리온을 창시했다... 전자가 예수의 십자가사건의 의미를 물었다면, 후자는 예수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한다.(p73)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中


  이와 같이 정리한 기독교 사상 체계 위에서 저자는 드디어 <마가(마르코) 복음>(2019)에서 인간 예수의 모습을 찾는다. 저자는 <바오로의 편지(바오로 서간)>들 외의 복음서의 원형을 <마가 복음>에서 찾으면서, 이로부터 인간 예수의 모습을 찾아간다. 불트만의 성서신학의 연구를 바탕으로, 안병무의 갈릴리 지평에서의 인간 예수를 찾아 최종적으로 우리 삶으로 가져오려는 12년에 걸친 저자의 노력을 우리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복음서의 끝이야말로 원점에서의 새로운 출발이다. 빈 무덤이야말로 1장 1절의 선포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빈 무덤이야말로 살아있는 예수님 말씀의 모든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안병무는 예수의 삶이 노자가 말하는 물과도 같다고 말했다. 예수는 물과 같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무화 無化시킴으로써 모든 생명의 구주가 되었다고 했다. 마가의 마지막 빈 무덤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우주적인 "빔", 곧 모든 생명의 근원, 끊임없이 회귀하는 반자도지동 反者道之動의 위대한 생명력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p605) <도올의 마가복음 강해> 中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5-24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4 1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