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 ~ 1914년의 무기 전쟁은 육군과 해군의 계속적인 기술 발달을 가능케 했다. 1900년 경의 라이플, 피스톨, 카빈 cabine, 기관총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이 무기들은 1914 ~ 1918년 전쟁 기간 중에 사용되었다. 라이플은 제임스 리 James Lee가 발명한, 탄창으로 장전하는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구경은 좁아졌고, 탄환은 더 가벼워졌다.... 과립 형태의 니트로셀룰로오스를 주재료로 한 무연 화약이 1884년 프랑스에서 채택되었고, 그것은 1884년 프랑스에서 채택되었고, 그것은 말 그대로 전장의 모습을 바꿔놓은 하나의 발명이었다.(p748)... 또 다양한 기관총이 시험되며 발달했다. 그러다가 1883년 하이럼 스티븐스 맥심 Hiram S. Maxim(1840 ~ 1916)이 특허를 낸 기관총이 최종적으로 채택되었다. 그 기관총은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한 반동력을 이용해 장전, 발사, 사출이 계속되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참호 전쟁이 치러진 것은 무엇보다도 그 기관총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아마도 기관총은 다른 어떤 유형의 무기보다 더 많은 병사를 살상했을 것이다. 1870년대에는 최선의 대포가 전장식인가 후장식인가를 놓고 의견이 양분되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 이르자 더 이상의 여지가 없었다. 발사시 반동을 막기 위한 수압 완충기가 딸린 후장식대포는 이제 표준 장비가 되었다. 또 포신에 강선을 넣어 사정거리가 대폭 늘어났다._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p750


 버나드 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1887 ~ 1976)의 <전쟁의 역사 A History of Warfare>는 제국주의 팽창과 함께 이루어진 군비 경쟁이 현대전(現代戰)의 새로운 양상을 결정지었음을 확인시킨다. 개인 화기에서 전략 무기까지 이전 세대와는 혁명적으로 바뀌어진 무기체계는 전장에서의 살상율을 극적으로 높였고, 참호, 기관총, 독가스로 대표되는 제1차 세계대전은 무기의 위력을 시험하는 장(場)이었다.


 변화된 무기의 양상은 DK의 <무기 Weapon>를 통해서 변화된 전술은 <롬멜 보병 전술 Infantry Attacks by Erwin Rommel>과 <마셜 보병전투 Infantry in battle>를 통해 대대 단위 이하 부대의 전술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독일의 에르빈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 ~ 1944)과 미국의 조지 마셜(조지 캐틀렛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1880 ~ 1959)의 제1차 세계대전 경험을 담은 이들 책들은 '공격' 위주의 과거 전술에서 '기습'과 '습격'으로 변화된 전술의 핵심 내용을 잘 담아낸다. 다만, 같은 주제의 소부대 전술 책이지만 상세 내용은 차이를 보인다. 주로 야전 지휘관으로 활약한 롬멜의 전술책은 그 자체로 자신의 전투 기록으로 보다 생생한 전장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보다 생생하게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나는 평시 총검술을 열심히 연마했기 때문에 총검술 실력은 상당했다. 1 대 3, 수적으로는 열세하지만 나는 백병전에 자신만만하였다. 앞으로 돌격하는 순간 적탄이 날아왔다. 어딘가 맞았다. 적의 3 ~ 4 보 거리에서 분하게도 쓰러졌다. 왼쪽 다리의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었다. 주먹만한 상처에서 붉은 피가 치솟았다._ 롬멜, <롬멜의 보병 전술>, p69


 반면, 마셜의 <마셜 보병 전투>에서는 개별 전투는 전술 원칙을 설명하는 사례로 소개된다. 이는 주로 참모로 활약한 저자의 경험과 밀접한 관련있어 보인다.

 

마침내 자동화기로 무장한 정찰요원 몇 명이 범람한 강을 도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들 정찰요원 중 한 명이 사격을 실시하려고 준비 중에 있던 독일군 기관총 운용요원을 사살하거나 격퇴하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사격 소리는 다른 병사들에게도 분발할 수 있는 촉진제 역할을 하여 결국 도하를 완수하였다._ 마셜, <마셜 보병 전투>, p144


 두 권의 책은 전술 부대의 운용에 관한 책으로 군사학에 대한 최소한의 흥미와 배경지식이 있어야 수월하게 읽히는 책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장(戰場)에서 인간의 모습과 조직의 대응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사진]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출처 : https://world-war-2.wikia.org/wiki/Second_Battle_of_El_Alamein)


 <전쟁의 역사>의 저자 몽고메리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에서 롬멜 장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린 경험이 있다. 그런 그가 바라보는 적장 롬멜은 어떤 적이었을까. 개인적으로 이들이 격돌한 1942년 10월 23일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Second Battle of El Alamein)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 235 ~ BC 183)와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 BC 247 ~ BC 183)간의 자마 전투(Proelium Zamense, BC 202) 이후 북아프리카 최대 격전의 의의가 있다 생각된다. 


 롬멜은 전에도 종종 전투를 중지하고 퇴각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대체로 행정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 사막에서만큼은 결코 전투에서 참패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참패를 당한 것이었다. 이제 그의 군대를 아프리카 밖으로 몰아내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는 석유가 부족해 당분간은 큰 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유능한 장군이었다._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p869


 이들 두 전투는 북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전투라는 점 외에도 몇 가지 유사점이 있다. 이들 전투의 승패가 기동전機動戰, Maneuver)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과 이들 전투 후 해당 지역에서의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두 전투에 참여한 라이벌들의 관계가 자못 흥미롭다. '평행이론'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한 점이 있지만. 한니발과 롬멜 두 사람 모두 본국으로부터의 절망적인 보급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장군이었지만, 결국 패장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적장인 스키피오와 몽고메리로부터의 존경을 잃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도 유사점이 발견된다. <전쟁의 역사>에서 몽고메리는 롬멜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만약 스키피오가 한니발에 대한 저술을 남겼다면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이처럼 여러 면에서 몽고메리와 롬멜의 관계를 통해 스키피오와 한니발을 떠올리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지금 이 순간 정치적 결단까지 떠맡은 두 위대한 사령관이 강화를 제안하고 받아들여, 승자의 광포한 복수심과 패자의 완고함 및 어리석음에 정당하고 합리적인 한계를 두려 했다고 보는 편이 훨씬 개연적일 것이다. 위대한 두 맞수는 공히 고귀한 영혼과 정치가적 재능을 갖고 있었다. 한니발은 불가피한 일에서 대범하게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에 못지않게 스키피오는 승리의 과도함과 무례함을 현명하게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_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2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